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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의 해조(諧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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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7
이효석
1
오후의 해조諧調
 
 
2
사무소 안의 기맥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그가 인쇄소의 문을 연 것은 오정을 조금 넘어서였다.
 
3
마음과 몸을 을르르 떨렸다.
 
4
그의 계획하여 가는 일의 위험성에서 흘러나오는 불안과 또 한 가지 쌉쌀한 일기에서 받는 추위 때문에 였다.
 
5
십일월을 반도 넘지 않은 날씨이니 그다지 매울 때가 아니련만 늦은 비가 한 줄기 뿌리더니 며칠 전부터 일기는 별안간 쌀쌀하여졌다.
 
6
어젯밤 M ․ H점 좁은 온돌방에서 그 집 가족들 속에 섞여 동무들과 늦도록 일하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서 설핀 새우잠을 잔 것이 더한층 그를 으스스하게 하였을 것이나 그것보다도 더 많이 마음을 압도하는 일의 중량이 그를 물리적으로 떨게 하였던 것이다.
 
7
사건이 폭발한지 불과 며칠 안 되는 이제 물샘틈없는 경계망은 실로 어마어마하였다. 길 가는 사나이는 모두 그를 노리는 것 같고 거리의 구석구석에는 수많은 눈이 숨어 그의 행동을 감시하는 것도 같았다. 인쇄소를 찾아 뒷골목으로 들어올 때 그는 몇 번이나 두리번거렸으며 인쇄소 마당에서는 또한 얼마나 기웃거렸든가.-
 
8
문선주의 최군에게 꿀려서 전에도 한전 이곳을 찾은 일이 있었지만 주인은 매일 회사에 출근하므로 사무소는 안주인 혼자 지키고 있었다. 인쇄기계가 세 대나 놓였고 직공이 이십 명이 가까운 결코 소규모가 아닌 이 인쇄소를 찾은 것은. 첫째로는 문선의 최군과 굳은 약속이 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이러한 인쇄소의 허술한 기회를 타서였다.
 
9
“신간 광고 삐라를 오천 장 작을 터인데 오늘 중으로 할 수 있을까요.”
 
10
“잡지사에서 오셨습니까?”
 
11
우둥퉁하고 이가 약간 밖으로 뻑은 호인일 듯한 일녀가 반가이 맞이하면서,
 
12
“지금 마침 손이 비어 있으니 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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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이 ‘잡지사에서 온 손님’에게 의자를 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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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손이 비어 있는 줄고 최군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는 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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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하나를 격하여 바로 공장이었다.
 
16
점심시간이므로 기계소리는 멈추었고 물주전자를 가지고 왔다갔다 하는 직공들이 창으로 들여다보였다. 그들 속이 섞여 최군의 그림자도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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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미농지 판으로 해야 할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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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는 여러 장 되는 원고를 서슴지 않고 그에게 내보였다.
 
19
전부가 국문이요 한자는 약간 섞였을 뿐이므로 물론 그에게는 내용을 알 리 만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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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곧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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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녀는 원고를 들고 공장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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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소리가 울리며 일이 시작된 것은 불과 몇 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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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는 물론 우리들의 계획대로 최군에게로 돌려 채자와 식자를 그가 아울러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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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정판할 것도 없듀록 단번에 주의하여 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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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꼬’ 를 들고 ‘케이스’ 앞에 서서 채자에 정신없는 최군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그는 공장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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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은 부엌에서 칼 소리를 내고 사무소는 텅 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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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혼자 화로를 끼고 앉아서 지금 침침한 방에서는 동무들이 롤러를 밀며 역시 등사실에 분주하게 있을 것을 생각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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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의 오후는 고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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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창기의 집 벽돌집 이층에는 단발한 중국 창기가 창에 의지하며 가을 햇빛을 향락하고 있었다. 단발 밑의 간들거리는 금 귀걸이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여자는 한참이나 창밖을 내다보더니 다시 일어서서 창을 닫고 커튼을 내려 버렸다. 그가 이러한 무의미한 뒷골목의 풍경을 시름없이 내다보고 있을 때에 등뒤에 최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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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히 교정을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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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는 먹이 진한 초판이 들려 있었으니 애자와 식자에 시간 반도 안 걸린 그의 숙련된 기술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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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식은 아마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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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있는 최군의 말과 같이 내려 읽는 동안에 한 자의 오식도 발견치 못한 것 또한 유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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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즉시 공장으로 들어가 꼭 째인 현판을 가지고 기계부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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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페이지 롤 한 대. 8페이지 롤 한 대. 4페이지 롤 한 대. 차례로 세 대의 기계가 놓였으나 그들은 가운데 8페이지 롤을 쓰게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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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속히 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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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군은 기계부 직공에게 터놓고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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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가 이것이 무식한 그에게는 그다지 수상하게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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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을 꼭 짜 놓고 잉크를 새로 붓고 ‘스톱’을 제치니 기계는 돌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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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롤러의 회전도 부드럽고 단순한 해조가 경쾌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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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거덕 덜거덕 인쇄가 되어 ‘실린더’의 몸에 감기는 삐라를 손바닥 같은 ‘채’가 한장 한 장 받아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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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신선한 잉크 낸새와 입체적 활자의 감각에 쾌감을 느끼면서 흥분된 채 기계 옆에 서 있을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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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전화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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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소 문을 열고 여주인이 그를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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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공장을 나가 약간의 불안을 가지고 사무소의 탁상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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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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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예요-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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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루인가 웬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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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서점의 나루에게서 온 것이 저윽이 안심되는 한편 기쁘기도 하였다.
 
50
M ․ H서점에 그가 자주 드나들게 된 것은 오래 전부터였다. 주인을 여러 해 동안 옥중에 빼앗기고 나루들 남매를 데리고 가난과 눈물 속에서 이 소규모의 서점을 경영하여 가는 김씨의 정경에 유다른 호의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보다도 전체로 이 혁명가의 가정과 그와의 사이에 스스로 감정의 합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가족들 중에서도 특히 나루와는 더한층 친밀히 지내 오는 터이었다.
 
51
“잊어저린 것 없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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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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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서점에 놓고 가신 것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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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지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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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지겁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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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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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그는 주머니를 어루만지며 지갑을 빠친 자기의 경솔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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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 속에는 인쇄비가 들었다. 어젯밤 M ․ H서점에서 늦도록 일하다가 간단한 잠참을 먹을 때에 지갑을 나루에게 맡겼었다.
 
59
서점의 가족들과 그와의 사이는 지갑까지 맡기리만큼 친밀하고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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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서점을 나올 때에 피곤한 정신에 지갑을 깜박 잊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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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지고 가겠습니다.”
 
62
“곧 오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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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고 그는 다시 공장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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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멕이는 사람, 인쇄된 것을 받는 사람, 상쾌한 기계의 해조에 맞추어 스스로 손들이 들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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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채’ 옆에는 삐라가 어느덧 꽤 두터운 부피로 쌓였다.
 
66
잉크 냄새 신선한 특호와 일호의 굵은 활자를 서두로 미농지 판대의 지면에 가득 박힌 사호 활자가 시각을 아름답게 압박하고 명문의 구절구절이 또한 가슴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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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통쾌한 한마디 한 구절이 수많은 젊은이의 가슴을 찌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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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별안간 눈이 뜨거워졌다.
 
69
밤을 새우며 붉은 피를 기울여서 초잡아 논 이 통쾌한 글의 아지의 효과를 생각하며 불시에 솟아오르는 감격이 가슴과 눈을 뜨겁게 하였던 것이다.
 
70
8페이지 롤이니 앞으로 한 시간이면 인쇄가 끝날 것이다. 나루와 나누어 책보에 싸가지고 거리의 눈을 피하여 서점에 갔다가 밤 됨을 기다려 동무들과 분담하여 전주와 판장과 벽돌담에-거리의 구석구석이 일제히 뿌릴 것이다. 그리고 일부는 동무들의 등사한 것과 같이 중요한 도시와 각 단체에 우편으로 배포할 것이니 날이 지나면 거리거리에서 붉은 열정과 고함이 일시에 지동치듯 솟아오를 것이다.⎯
 
71
“한민씨!”
 
72
공장 문을 열고 뛰어들어오는 사랑스런 나루의 목소리에 그의 생각은 중단되고 덜커덕! 덜커덕! 부드러운 롤러의 회전이 연쾌한 기계의 음조가 여전히 아름답게 오후의 인쇄소 안에 그윽이 울릴 뿐이다.
【원문】오후의 해조(諧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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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李孝石)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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