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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2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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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쿵저러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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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먹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살려고 먹는 것이라(Man lebt nicht um zu essen, sondern ißt um zu leben)함은, 독일(獨逸)의 이언(俚諺)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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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우리 동양으로 말하면, 어느 것은 구복소인(口腹小人)이라니, 여지없이 모옥(侮辱)하고 멸시(蔑視)하고 눈썹을 찡그리고 침을 배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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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기란 먹기 위함인가, 아닌가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으리라. 과연 먹자고 산다는 것은 만물의 영장 되는 사람에게 최대 모욕이리라. 다른 동물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면 남 들을 상에도 창피한 일이러라. 생각만 해도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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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방 효연소연(囂然騷然)히 전세계를 울리고 움직이고 뒤흔드는 문제가 무엇인가. 분평히 빵의 분배 문제라 한다. 먹자는 시비요, 다툼이요, 싸움이다. 가장 위대한 두뇌와 가장 신랄한 수완들이 이로써 골몰하고 이로써 헐떡이고 이로써 분주하다. “나에게 빵을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죽음을 주소서.” 하는 부르짖음이 구소(九霄)에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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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먹자고 사느냐, 살자고 먹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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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살자고 먹는 것이지!” 라고, 모욕적으로 단정적으로 쉽사리 해결되었던 이 문제가 새삼스럽게 중대한 의문을 일으킨다. 먹자고 사는지 살자고 먹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풀기 전에 먼저 알아둘 항구불변의 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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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먹어야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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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희곡「인(人)과 초인(超人)」가운데 이런 장면이 있다. ‘탄나아’ 라는 청년이 자동차를 몰고 ‘이스파니아’의 ‘세에라’ 에 다다랐을 제, 산적이 달겨 들며 외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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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잣놈을 벗겨 먹기로 위업(爲業)하는 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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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까, 소리에 응하는 울림 모양으로, 그 청년이 대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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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난뱅이를 벗겨 먹기로 위업(爲業)하는 부자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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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마나 신랄한 풍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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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의 말이 난 김에 또 하나 적어 볼까. 러시아(露西亞) 어느 작가의 단편―작자의 이름은 벌써 잊었고, 찾아보니 책이 없는 걸 보면 어느 결엔지 헌책전의 신세를 졌나 보다―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어느 부잣집 문 파수 보는 작자가 주인댁 창고든가 어데에 얼무적얼무적하는 도적을 잡았다. 처음에는 무슨 이기(利器)나 가졌나 보아서 조금 겁도 내었지만, 아모 저항이 없는 걸 보자, 문 파수는 기고만장해서 어르딱딱거리며 파출소인지 어데인지 끌고 가게 하였다. 파출소도 멀었던지, 가면서 그 도적이란 자가 종용종용히 문파수꾼를 꾀이고 달래기를……네가 나를 잡아갈 게 무에냐. 대관절 네가 문파수를 보게 된 가닭은 생각해 볼게 아니냐. 그 까닭은 우리 같은 도적놈이 있기 때문이지, 우리가 없다 하면 왜 너의 주인이 미쳤더냐, 너를 밥 먹이고 돈 주어 가며 문에 세워 두게. 그리고 보면 우리 도적은 너의 직업을 얻어준 은인이 아니냐. 주인의 물건을 못 훔쳐 가게 했으면 너의 직책은 다한 것인데 은혜를 원수로 삼아 나를 잡아가서 욕을 보일 거야 무에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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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참 양상군자(粱上君子)가 사리(事理)를 타서 이르매, 문파수는 이윽히 생각하더니, “그도 그래” 하고. 도적을 놓아주었다 한다. ……그 도적놈도 도적질을 해 먹을망정, 철학자의 풍도(風道)가 있거니와 파수 보는 작자도 매우 아량(雅量)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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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짜르고 예술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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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예술가, 또는 예술가 되려는 이에게 그 얼마나 많은 감흥을 주었으랴, 매력을 끼쳤으랴.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오래 살았자 칠십 년이나 팔십 년의 목숨이 아닌가. 이것을 영원무궁한 시(時)의 장류(長流)에 비길 것 같으면 그야말로 부유(蜉蝣)이고 춘몽(春夢)이다. 그야말로 “번개가 번쩍 할 제 나고, 그 번쩍임이 아즉 사라도 지기 전에 죽는다.” 고 할 수 있는 짜른 찰나다. 이렇듯이 하잘나위없이 덧없는 사이에, 지어 내뜨린 금수문장(錦繡文章)이 천추만세를 나려가며 불멸의 광채를 흘릴 것을 생각할 제 글 가지고 노는 이의 어깨는 으쓱하고 바람이 아니 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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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조선에서 예술에 뜻을 두는 이―물질로나 명예로나 영(零)에 가까운 보수(報酬)밖에 기대할 수 없는 그들은, 예술이 길다는 맛에나마, 까마득한 미래에 희망을 걸고나마, 붓을 잡을 뿐이다―때를 못 만난 탓으로 알아주는 이 없어, 오늘은 역경에 전전하지마는 빛나는 앞날의 태양과 함께 영롱히 번쩍이는 칠보관(七寶冠)이 나를 기다리렸다―하는 것이. 보수(報酬)는 고만 두고 턱없는 빈정거림과 까닭 없는 비웃음을 참아가며 예술의 길에 매진하는 우리 글 쓰는 이의 안타까운 희망일 것이다. 이 점에 들어서는 우리네가 외국 작가―물질로든지 또는 명예로든지 상당한 대우를 받는 그네들보담 비교도 할 수 없이 순결하고 청백하다. 그야말로 추천(秋天)에 걸린 호월(晧月)이다, 옥호(玉壺)에 담긴 빙심(氷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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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술이 길다는 것이 참말일까, 속임 없는 참말일까. 예술이란 것도 또한 인생과 같이 덧없는 것이나 아닐는지. 꿈을 현실로 기뻐하며, 그 실체는 어찌 같은지 환영(幻影)만 보고 좋아하는 사람의 잠꼬대나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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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는 ‘호며’ 의 시도 읽고 ‘셰익스피어’ 의 희곡도 본다. 하지마는 그런 사람이 도모지 몇몇이나 되는가. 글이 있은 지 몇 천년이 지났고, 그동안 몇 억만의 사람이 죽고 살고 하였는데, 오늘날까지 예술가로 이름이라도 전(傳)하는 이는 손꼽아 헤아릴 것이 아닌가. 예술로 일삼던 이가 그뿐이 아닐터인데. 아아, 그들의 길다고 생각하던 예술은 다 어데로 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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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호머’, 한 사람의 ‘셰익스피어’ 의 이름이 떠오른 밑에는 기천기만(幾千幾萬)의 무명 시인과 무명 작가가 소리 없이 자최 없이 쌓인 것이다. 모든 것을 약속한 내일은 그들의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았구나! 일장(一將)이 성공(成功)에 만골(萬骨)이 후(朽)란 글귀는 전쟁에만 쓰일 줄 알았더니, 싱그러운 예술의 왕국에도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 이를 생각하매, 길다는 예술을 가지고도 마츰내 길지 못한 이를 위하여 무연(憮然)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무슨 업원(業冤)으로 조선에서 ‘뮤즈’ 의 은총(恩寵)을 입으려다가, 남보담 더 쉽사리 사라졌고 또 사라질 우리네 예술가를 위하여 동성일곡(同聲一哭)할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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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은 무명(無名)한 이만이 아니다. 유명(有名)한 이 또한 때 있어 아니 사라지란 법도 없는 것이다. 여기 프랑스(佛蘭西) 작가 ‘아나톨 프랑스’ 의 신랄한 문구(文句)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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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열이 점점 식어지면 따라서 지구도 식어질 것이요, 나종에는 사람이 절종(絶種)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땅 속에 있는 지렁이는 뜻밖에 살아갈는지 모른다. 그러면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지렁이에게 치소(嗤笑)를 받을는지 누가 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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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긴 것도 나는 바라지 않는다. 사람이 짜르고 예술만 길면 그야말로 무용(無用)의 장물(長物)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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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금세(今世)의 부귀영요를 백안시하는 김에 아주 내세에 대한 아름다운 기대도 단념할 일이다. 너무 악착하고 참혹한 노릇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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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극작가요 겸 소설가 국지관(菊池寬) 씨가「문예작품(文藝作品)의 내용적 가치」란 평론을 써서 한동안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다. 그 평론의 내용을 대두리만 따면 이러하다. 어떤 작품을 읽어 보면 잘 썼다 잘 썼다 싶으면서도 마음이 감동되지 않고, 어떤 작품은 읽어 보면 못 썼다 못 썼다 싶으면서도 마음이 감동된다. 이런 경우를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까. 예술적 작품으로야 전자(前者)가 후자(後者)보담 몇 백 곱절 우월한 것이언만, 마음이 감동되긴 후자(後者)라 하면 전자(前者)에게 없는 무엇을 후자(後者)가 지닌 것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하고 보면 어떤 작품 가운데는 예술이란 것과는 별다른 가치가 있는 듯싶다. 예술적 표현과는 별다른 가치가 있는 듯싶다. 예를 들면 로맹 롤랑의 소설 가운데 있는 일 삽화(揷話), “프랑스(佛蘭西) 병정이, 전선(戰線)에서 독일(獨逸)의 열육칠 세 되는 어린 병정을 찔러 죽이려 한즉, 그 소년이 손을 들며 ‘엄마! 엄마!’하고 부르짖었다.” 이런 이야기는 소설에 쓰이든지, 아니 쓰이든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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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작품의 제재 가운데는 작가가 그 예술적 표현의 마술 지팡이로 건드리는 세비로 입은 판사(判事)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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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셔츠만 입고 있는 그 죄인의 꼴이 차마 볼 수 없이 무서웠다. 기실아모 무서울 일이 없건마는 몸에는 고사하고 혼(魂)에까지 소름이 끼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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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단두대로구나.” 하는 무두무미(無頭無尾)한 생각이 불쑥 떠오르며 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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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서운 변을 본 것은 언제 일이던지 또 아까 그네들과 지껄이고 떠드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역시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발로들 찬다. 그것은 아까 성(城) 중허리에 걸렸던 (악양루(岳陽樓)란 게 없었으니까) 범중엄(范仲淹)의「악양루기」현판(岳陽樓記懸板)이었다. 새롭고 나은 것이 된 다음에야 묵고 썩은 옛 것이 무슨 쓸데가 있으랴 하면서들 이상하게 흥분된 모양으로 그 현판(懸板)을 이리 차고 저리 차고 하였다. 나도 한 번 박차며 누구에게 반항이나 하는 듯이 부르짖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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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없이 훌륭한 예술품이라도 삼 십 년만 지나면 그뿐이다.” 하고 속으로는 “하하, 내가 ‘로맹 롤랑’의「장 크리스토프」의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구나‘ 하였다. 실상「장 크리스토프」속에 그런 말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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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돌아갈 모양인데 그「신악양루기(新岳陽樓記)」를 세상없어도 한 벌 박아 가지고 싶었다. 가지고 가서 모든 사람에게 자랑을 하리란 어린애 같은 공상을 품고서, 다행히 노작(露雀) 군이 그 원본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곧 그에게 초해 달라고 조르니까 그는 앙탈을 하다 못해서 초는 해 주려 하건마는, 무슨 글자인지 두 자(字)를 빼고 쓰려 하였다. 나는 그대로 쓰자고 꿋꿋이 세웠다. 그는 화증을 내며 그걸 아니 빼면 말이 아니 된다 하였다. 원작자(原作者)도 뭉갠 것이냐 하매, 그는 물론이지 하였다. 내가 마츰내 동의(同意)를 하니까 그는 붓에 먹을 찍어 쓰기 시작하였다. 딴 것은 몽롱하건만 그 첫째줄인가 둘째 줄에 혹이 서로 얼키설키한 계(癸)자가 있던 것은 또렷또렷 하였다. 그는 쓰다가 말았든가 다 썼든가 하였는데, 어쨌든 나는 그「신악양루기(新岳陽樓記)」를 가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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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어느 왕궁(王宮)인 듯한 곳을 거쳐 나는 나온다. 나오는 대로 또 여러 개 층층대가 있었으되, 이번 것은 물이 아니고 대리석으로 된 듯도 하고 그양 나무로 된 듯도 하다. 방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그 층층대 족족 점잖은 노인이 한 분씩 단정(端正)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엔 어째 감개무량한 빛이 도는 듯하였다. 그들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을 한 듯도 싶고 또는 그양 흰 두루막만 입은 듯도 싶은데 다만 실제(實際)의 한 이배(二倍)되는 갓에 대모 갓끈을 단 것만은 역력하다. 또 그들의 앞앞에 길다란 장죽(長竹) 하나씩이 놓여 있었다. 나는 어데선지 그 장죽 하나를 집어 가지고 나오다가 맨 아랫층에 이르러 “내가 왜 이걸 가져가노?” 하면서 그 담뱃대를 훌쩍 들이치고 총망히 달음박질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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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뒤에서는 그 노인들의 울음이 터져 나온다. 넋두리를 섞은 청승궂은 울음이다. 그러자 여기저기 악마구리 떼 같은 곡성이 진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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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땀을 흘리며 꿈을 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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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가 꿈 꾼 그대로를 될 수 있는 대로 아모 기교 없이 써 본 것이다. 잠을 깨자마자 하도 꿈이 기괴하면서도 역력하게 적어 본 것이다. “그까짓 꿈을 다 쓰다니!” 하고 웃을 분이 있을는지 모르되, 나는 이 꿈의 시계에야말로 나의 의식적으로 쓰는 것보담도 더 훌륭한 예술적 표현을 얻은 나의 사상이 있고 감정이 있고 시(時)가 있고―더구나 기분이 있은 듯싶다. 그러고 처음에는 잉크로 쓰려다가 그 새파란 빛이 너무 똑똑하고 강렬하여서 연필로 초를 잡았다는 것도 말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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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5월 0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