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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7
이효석
1
인간 신문
 
 
2
거리는 왜 이리도 어지러운가.
 
3
거의 삼십년 동안이나 걸어온 사람의 거리가 그렇게까지 어수선하게 눈에 어리운 적은 없었다 . 사람의 거리란 일종의 지옥 아닌 수라장이다.
 
4
“신경을 실다발같이 허클어 놓자는 작정이지.”
 
5
문오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눈을 감고 귀를 가리우고 코를 막고─모든 감각을 조개같이 닫혀 버리면 어지러운 거리의 꼴은 오관 밖에 멀어지고 마음속에는 고요한 평화가 올 것 같다.
 
6
쓰레기통 속 같은 거리, 개천 속 같은 거리. 개신개신 하는 게으른 주부가 채 치우지 못한 방 속과도 거리는 흡사하다. 먼지가 쌓이고 책권이 쓰러지고 휴지가 흐트러진─그런 어수선한 방 속이 거리다. 사람들은 모여서 거리를 꾸며 놓고도 그것을 깨끗하게 치울 줄을 모르고 그 난잡한 속에서 그냥 그대로 어지럽게 살아간다. 깨지락깨지락 치운다 하더라도 치우고는 또 늘어놓고 치우고는 또 늘어놓고 하여 마치 밑 빠진 독에 언제까지든지 헛물을 길어 붓듯이 영원히 그것을 되풀이하는 그 꼴이 바로 인간의 꼴이요 생활의 모양이라고도 할까. 어지러운 거리. 쓰레기통 같은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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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안간 덜컥 부딪치는 바람에 문오는 감았던 눈을 떴다. 얼마 동안이나 눈을 감고 걸어왔던지 부딪친 것은 바로 집 모퉁이 쓰레기통이었다. 다리뼈가 쓰라리다.
 
8
빌어먹을 놈의 쓰레기통. 쓰레기통 같은 놈의 거리, 홧김에 발길로 통을 차고 걸음을 계속할 수밖에는 없었다. 멸시하는 쓰레기통 같은 거리를 그래도 걸어가야만 할 운명에 놓인 것 같다. 어수선한 거리의 꼴은 별수없이 다시 신경을 어지럽히기 시작한다.
 
9
행길바닥이란 왜 좀더 곧고 고르지 못하고 삐뚤고 두툴두툴한가. 비스듬히 기울어진 가게의 간판은 차라리 떼어 버리는 것이 시원한 것 같다. 움직이지 않는 낡은 수레를 길바닥에 버려둘 필요가 있을까. 바닷물 속에 장사지내는 편이 옳지. 마저 마저 쓰러져 가는집─사람의 신경을 대팻밥같이 꾸겨 놓은 것은 이것이다. 쓰러져 가는 집을 눈앞에 보아야 함은 사람의 가장 괴로운 의무일 것 같다. 숫제 발길로 차서 헐어 버리는 것이 낫지. 사람이란 개신더기여서 원대한 계획도 없이 필요에 따라 그 자리에 흙을 묻고 기둥을 세우고 솥을 걸고 측간을 꾸민다. 사람의 심청 머리같이 고식적이요 일시적이요 당삼치기인 것은 드물 것 같다. 대체 거리의 명예로운 시장은 무엇을 하고 있는 셈인가. 쓰러져 가는 집은 버려두고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현명한 시장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거리의 집을 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시민의 이름에 값갈 만한 아니 인간의 위신에 부끄럽지 않을 만한 한 채의 집을 먼저 장만한 연후에 다스림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우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떳떳한 백성으로서의 다스림이 아랑곳일까. 집, 집, 신경을 대팻밥같이 꾸겨 놓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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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젊은 사람의 더벅머리─저것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문학을 하든 철학을 하든 길게 자란 머리란 것은 보는 눈을 몹시 거슬리게 한다. 가위로 싹둑 잘라 버리는 것이 생활정리의 한 방법도 된다. 얽은 사람, 절름발이, 장님─이것은 시장에게 다져 낼 수도 없고 누구에게 문책함이 옳을까. 얽은 얼굴은 대패로 곱게 밀어버리고 절름발이와 장님에게는 옛날의 기적을 베풀 수 있으면 얼마나 속 시원한 일일까. 배뚱뚱이 신사─차라리 반으로 갈라 두 쪽의 사람을 만드는 편이 공평도 하려니와 개운도 할 성싶다. 나중에는 외양을 거쳐 심지어 여자들의 양말 속의 살결조차 걱정된다. 일시에 활짝 옷들을 벗겨 본다면 과연 모두 상아같이 하아얀 살결들을 가지고 있을까. 만약 총중의 한 사람이 불행히 불결한 몸을 드러내 놓았을 때에 올 환멸은 얼마나 마음을 뒤집어놓을까……. 어지러운 거리. 어수선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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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오의 머리 속은 날아난 벌떼를 잡아넣은 것과도 같이 웅성거리고 어지럽다. 몹시도 지저분한 거리의 산문이 전신의 신경을 한데 모아 짓이기고 난도질하여 놓는다. 혼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난잡의 운치를찬미하는 예술 같은 것은 악마에게나 먹히워라. 단조하고 운치는 없다 하더라도 차라리 가지런한 거리와 안정된 규칙과 정리된 생활이 있어야 할 것이다. 최후적 통일을 요구함은 사람의 본성이요 생활을 정리하려 함은 영원한 과제였으나, 정리와 통일의 마지막 종점에 도달할 날은 영원히 없을 것 같다. 사람은 역사를 가진지 수십 세기 동안을 탄생한지 수만 년 동안을 두고 생활을 정리하여 온 셈이나 오늘의 생활이 태고적 카오스시대보다 대체 얼마나의 위대한 정리를 하여 왔던가. 위대한 정리가 되어 있다면 오늘의 이 혼란과 불안과 괴롬은 대체 웬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문오는 십년 가까이 공부하여 온 철학의 체계도 이 혼란의 해결의 열쇠는 주지 못하였다. 일종의 해결인 것같이 보이면서 기실 고금 많은 철학자가 제출한 수다한 문제는 전체적으로 보면 도리어 커다란 혼란을 줄 뿐이었다. 귀한 정리의 노력을 보였을 뿐이지 결과에 있어서는 정리와는 인연이 먼 역시 혼란이 있을 뿐이다. 결국 인간 사실은 사실대로 두고 그 표면을─수박의 껍질 위를 핥으면서 뱅뱅 도는 격이 아닌가. 물론 철학이 행동을 규정하는 때도 있기는 하나 더 많이 행동이 먼저 있는 것이며 혹은 행동이 있을 때 동시에 철학을 생각하는 것 같다. 철학의 체계가 과거의 인간 사실을 정리하였을는지는 모르나 현재의 혼란은 일반이며 따라서 문오의 두뇌 속도 해결의 언덕과는 거리가 멀다. 뇌수의 세포가 종이 위에 인쇄된 철학의 활자에 깜박 취할 때는 있으나 그 도취에서 깨서 어지러운 생활의 거리를 바라볼 때 활자의 철학은 조각조각 흩어져 없어지고 눈에 어리우는 것은 혼란이요 신경을 난도질하는 것은 여전히 문란의 마귀이다. 철학으로 카오스를 건지려 한 것이 도리어 카오스의 바다 속에 밀려들어가 팔다리를 허부적거리는 격이 되었다고도 할까. 더욱이 요사이에 이르러 키엘케고어니 세스톱이니─머리 속을 범벅같이 휘저어 놓을 뿐이다. 사람은 항상 생활을 새롭게 꾸며가는 적극성을 가졌다고는 하더라도 마지막의 완전한 정리를 바랄 수는 없을 것 같다. 영원한 정리를 원하나 오는 것은 영원한 부정리인 것이다. 경제생활이 완전한 해결을 볼 때 사람은 완전히 구제되고 인간 사실은 빈틈없이 정리될 수 있을까. 쓰러지지 않는 깨끗한 집이 서고 거지가 없어지고 어지럽던 거리가 한결 정리될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그런 거리의 생활의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하더라도 수십 세기 동안 묵어 내려온 사람의 심청이 일조 일석에 칼로 베인 듯이 변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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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례와 나와의 연애는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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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례와 문오와의 연애는 결코 정당한─정리된 것이 아니었다. 미례는 문오를 사랑하여서는 안되고 문오는 미례를 사랑하여서는 안 된다. 미례는 문오 아닌 남편을 사랑하여야 할 처지에 있고 문오는 그 남편을 배반하지 못할 사정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례와 문오는 남편의 그림자 속에 숨어 금단의 과실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거리의 생활이 해결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결정적인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만의 정당하고 떳떳한 연애만이 있고 이런 어지럽고 까다로운 관계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리라고는 추측하기 어렵다. 꼬이고 혼란된 마음의 실마리라는 것은 언제든지 있어서 칼로 혹을 도려내듯이 생활의 테두리에서 곱게 도려낼 수는 없을 것이다. 영원한 부정리. 끝없는 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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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정리의 방법으로 무엇이 있는가. 프리자의 왕 골듀스가 맨 복잡한 노마디를 사람의 손으로는 도저히 풀어낼 재주가 없는 것이다. 늠름한 왕검으로 그것을 보기 좋게 두 동강으로 낸 알렉산더의 용기는 세상에 없을까 백두산에서 가장 . 큰 전나무를 베어내고 장백산의 짐승의 털을 죄다 뽑아 위대한 한 자루의 붓을 만들어가지고 동해의 푸른 물을 찍어 한 획에 거리와 생활을 말살하여 버렸으면 오죽이나 통쾌할까. 그것이 어렵다면 머리 속에서 뇌수를 쏟아내서 물에 절레절레 헤워 모든 지식의 기록을 떨어버리고 백지의 상태로 하여 다시 머리 속에 수습한다면 천치가 되어 마음속이 얼마나 편안하고 시원할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미례와의 사이도 편안하게 안정될 것이나 그렇지 않은 이상 언제까지나 불안한 마음으로 골듀스의 노마디를 얼싸안고 괴롬의 술래잡기를 계속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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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거의 병적 악마적 생각에 잠기면서 문오는 미례와의 약속의 장소로 걸음을 빨리 하였다. 그 으늑한 차점은 거리에서 동이 뜨다. 수다스럽지 않은 숨은 그곳에서 문오는 가끔 미례와 만나는 처지였다. 주일에 한 번씩 요리를 먹으러 거리의 식당에 나타나듯 주일에 며칠씩을 미례를 보러 차점에 이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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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왜 하필 미례는 나를, 나는 미례를 피차의 반쪽으로 구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일원적 통일의 길이 아니요, 도리어 문란의 길이요, 가시덤불의 괴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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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거리를 어지러운 사랑을 맞으러 걸어가는 자신의 꼴에 문오는 문득 운명적 인간의 꼴을 본 듯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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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해 보신 일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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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신술을 배우겠단 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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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오는 미례의 낮은 어조를 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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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목을 눌리우고 몇 분 동안이나 참을 수 있나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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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배암은 죽었다도 피어난다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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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사람의 목숨도 배암만큼 질긴 셈이군요. 저는 목을 눌리우고 오분 동안이나─완전히 담배 한 개 탈 동안─참았으니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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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오는 놀라 미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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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멍이 조금 들었을 뿐이지 생명에는 별 이상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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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례의 목덜미에 남겨진 손가락 자국만한 푸른 멍이 문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자기 때문에 받는 미례의 수난이 최근에 와서 더욱 심함을 알고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슬프다. 불안정한 삼각형의 위협이 다시 한번 마음을 스친다. 삼각이 일원으로 통일되려면 개중의 하나가 권리를 버려야 할 것임을, 세 개의 뜻이 균등하니 대체 어떤 해결을 지어야 옳을 것인가. 미례의 남편의 위인을 생각할 때 문오의 마음은 결코 평화스러운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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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자꾸 대라니 견딜 수 있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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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대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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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나게요. 결투라도 하려고 할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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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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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오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결투─마음이 섬찟은 하였으나 차라리 그것이 손쉬운 해결의 방법이요 정리의 길일 것같이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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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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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세요. 그가 당신보다 훨씬 장골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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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란 열로 하는 것이지 힘으로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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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은 커피가 입에 쓰다. 잔 바닥에 남은 검은 깡치가 근심스런 마음같이 걸차게 입술에 엉겨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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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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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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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의 길이 없듯이 대답도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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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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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릴없이 흐른 찻방울을 손가락에 찍어 잠자코 탁자 위에 낙서를 하는 문오였다. 글자를 쓰다는 짓고 쓰다는 짓고─나중에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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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장난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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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례는 탁자 위에 그려지는 그림을 하염없이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문득 외면하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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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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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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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례는 문오의 그림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발갛게 물든 미례의 귓불을 바라보며 문오는 도리어 미소를 띄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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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알고 그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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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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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칙한 것이 아니오. 미례의 눈이오. 눈방울 눈시울 속눈썹. 그리고 이것은 눈물,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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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오는 오늘 미례에게 하여야 할 가장 중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미례를 놀라게 할 그 중대한 소식을 전하려면 엄숙하게 보다도 객설스럽게 괴덕스럽게 시작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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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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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한마디 말하면 미례는 이렇게 눈물을 흘릴 것이니까 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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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세요. 설마 저를 잊겠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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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에 있어서는 그렇게 될는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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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고요. 또 한번 말씀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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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례의 어조는 금시는 변하여졌다. 문오는 눈을 꾹 감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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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떠나게 되었소. 너무도 창졸간에 작정이 되어서 미처 말할 기회가 없었던 것요.”
 
57
문오는 이번에 학교의 연구실을 나와 지방 어느 회사에 직업을 얻게 되었다. 학교와 연구실에서 오랫동안 철학을 연구하였음에도 당치도 않는 회사로 가게 된 것부터가 생활의 정리와는 무릇 인연이 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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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떠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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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일이 대강 정리되는 대로.”
 
60
갸름하게 내려 감긴 미례의 속눈썹은 안개나 끼인 듯이 깊은 그림자 속에 젖었다.
 
61
마치 그 괴로운 정경을 구하려는 듯이도 이때 가게의 여주인이 두 사람에게 과자접시를 날라 왔다. 문오는 문득 놀라운 것을 발견하였다. 여주인의 왼편 손에 손가락이 하나 없는 것이다. 무명지가 있어야 할 곳이 비이고 따라서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가 이 빠진 것같이 떴다. 선천적인지 혹은 후천적인지를 관찰할 여유는 없었으나 오랫동안의 단골임에도 불구하고 모르고 지내던 것을 공교롭게도 이날 처음으로 발견하게 된 것이 한 놀람이었다. 문오는 새삼스럽게 여주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일신을 훑어보았다. 빈틈없는 용모에 왜 하필 손가락 하나가 빠졌을까. 삼신의 불찰일까 혹은 장난일까. 이상스런 것은 여주인의 인상이 별안간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와는 판이하여지는 것이다. 결점 없이 완전하게만 보이던 그가 그 한 점의 흠으로 말미암아 금시에 마치 이 빠진 그릇을 대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곧 문오 자신의 머리 속에 이가 한대 빠진 것과도 같다. 결국 그의 머리 속에는 부정리의 사실이 또 하나 늘어 그의 마음을 불안정하게 휘젓는 결과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일도 미례의 처지도 잠깐 잊어버리고 여주인의 일신을 한참 동안이나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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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적들 하신 것 같으니 레코드나 한 장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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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은 친절하게도 축음기 앞으로 나아갔다. 단골인 터이라 두 사람의 은근한 사이도 벌써 대강 짐작하고 동정하는 눈치여서 간간이 그 정도의 친절을 베푸는 것이었다.
 
64
이윽고 「제 두 아무울」의 노래가 흘렀다. 두 사람의 애인을 가진 여자의 노래가 낭랑하게 흘렀으나 그것은 미례의 현재의 정서와 심경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미례는 꽃같이 잠자코만 앉아서 서글픈 표정으로 노래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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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손가락이라도 하나 맞춰 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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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끝날 때까지도 문오는 여주인의 손가락 걱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에는 무엇보다도 손가락의 일건이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공연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모처럼 단골로 다니던 차점도 손가락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마음을 쓰게 된다면 다시 더 올 수 없지 않는가─하고 생각하였다.
 
 
67
문오는 돌아오던 길에 친구의 병원에 들렸다. 요사이 의사에게밖에는 말할 수 없는 일종의 육체의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68
모르는 결에 피부의 전면에 일종의 풍진이 쪽 돋은 것이다. 어느 때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바 없으나 기억의 시초는 처음 몸에 벌레를 얻었을 때였다. 거리의 목욕간에서 얻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비밀한 곳에서 묻혔는지 가릴 수 없으나 벌레는 어느결엔지 맹렬한 세력으로 번식하기 시작하여 거의 피부를 먹어버리려는 듯도 한 형세였다. 즉시 의사에게 의논하지 않고 매약점에서 사온 수은고를 대중없이 바른 것이 일을 저지르게 된 원인인지도 모른다. 몹쓸 벌레 꼴 보라는 듯이 하루도 몇 번씩을 벌레 위에 더덕더덕 바르곤 한 것이 이틀을 지나니 벌레의 형적은 사라진 모양이었으나 이번에는 반대로 수은고의 세력이 거의 피부를 먹어버리려는 듯도 하게 모질게 헤어지기 시작하였다. 쌀알 같은 붉은 점이 불똥을 끼얹는 것같이 쭉 돋더니 그것이 차차 부분을 중심으로 육신의 위와 아래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알고 보면 수은고의 중독이었으나 몹시 가려운 판에 자연 손이 자주 가고 한번 긁기 시작하면 피가 용솟음치고 머리 속이 뗑하고 마치 미칠 듯이도 육신이 수물거렸다. 공교로운 것은 그때를 전후하여 마침 팔에 우두를 맞게 된 것이다. 과거에 한 번도 터본 적 없던 우두가 이해에는 웬일인지 유난스럽게도 트기 시작하여 팔위에 온통 커다란 종창을 이루게 되었다. 한편 근실근실 몹시도 부근이 가려웠다. 우연히 만나게 된 이 우두 바람과 수은고의 독증이 한데 어울려 마치 살 곳을 만난 듯이 피부의 전면을 침범하였던 것이다. 그제서야 하는 수 없이 의사에게 뛰어가고 약을 바르고 주사를 맞고 하게 되었으나 물론 좀체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그 어떤 서슬에 손이 가기 시작하면 피부가 벗겨져라 살이 으끄러져라 흥분되어 정신없이 긁게 되었다.
 
69
“차라리 잘 드는 해부용 메스로 피부를 한 꺼풀을 쪽 벗겼으면 시원할 것 같구먼.”
 
70
“왜 그리 악착스럽게 악마적으로만 생각하나. 자네 요새 확실히 신경쇠약증이 농후해.”
 
71
의사는 친구의 정의로 도리어 문오를 가엾게 여겼다.
 
72
“신경쇠약이라면 확실히 요새 그런 증세 같기는 하나.”
 
73
“당분간 철학을 그만두는 것이 어떤가. 회사로 가게 된 것은 자네를 위하여는 큰 행복일세. 둘에다 둘 넣으면 넷 되는─이같이 완전한 정리가 세상에 또 있나. 얼마 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숫자만 노려보고 살면 얼마간 마음이 유하여지리.”
 
74
“실없이 놀리는 셈이지.”
 
75
“진정의 말이야. 피부를 벗기느니 무어니 그렇게 조급하게 구는 것이 자네 말하는 소위 인생 정리의 길은 아닌 듯해. 설레지 말고 과학적으로 천천히 유하게 하는 동안에 정리도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76
“그렇게 과학이란 안타깝단 말이야.”
 
77
“과학은 허황한 시가 아니고 확실하고 면밀한 것이야. 과학의 위대함을 설마 자네가 모르는 바 아니겠지만.”
 
78
“위대함을 아니까 말이네. 그 위대한 힘으로 나의 말초신경을 모조리 뽑아 없애주지 못하겠나.”
 
79
“말초신경을 뽑기 전에 피부를 고치세 그려. 피부가 정리되면 예민한 자네 말초신경도 무지러지고 마음은 저윽이 편안해질 터이니.”
 
80
“생각대로 해주게. 그러나 자네의 그 위대한 과학의 힘으로도 나의 연애까지야 바로잡아 줄 수 있겠나.”
 
81
“자네의 연애가 어떤 것인지는 알 바 없으나 어떻든 이것이나 한 대 맞고가 누워서 애인을 기다리든지 마든지 생각대로 하게 그려.”
 
82
친구는 누런 분말을 푼 약즙을 푸른 주사기에 넣고 바늘을 꽂았다.
 
83
“요번엔 무슨 주산가.”
 
84
“살균 소독제.”
 
85
충분히 주의하여 천천히는 놓았으나 약즙이 정맥 속에 풀림을 따라 몸이 훈훈히 달고 구역이 날듯 날듯 하였다. 마치 칼슘 주사를 맞을 때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86
“체질에 따라서는 별안간 신열이 나고 몸이 떨리는 수도 있으니 일찍이 가서 눕는 것이 좋겠네.”
 
87
“오늘은 과학의 말을 믿을까.”
 
88
본부대로 문오는 그 길로 즉시 셋방으로 돌아와서 책 서류 등 그날로 정리해야 할 것도 많았으나 일찍이 자리 속에 누웠다. 물론 벌써 밤도 가깝기는 하였으나,
 
89
어느결엔지 잠이 깜박 들었다.
 
 
90
얼마 동안이나 잤던지 눈을 떴을 때에는 육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이 뜨인 것도 몸이 몹시 떨리기 때문인 듯하였다. 떨린다고 생각하니 더 한층 휘둘린다. 찬물을 끼얹는 듯이 등어리가 찬데다가 이빨이 덜덜 갈리고 몸동아리는 흡사 영험이 내린 신장대 모양으로 부들부들 흔들렸다. 이를 물고 배에 힘을 쓰고 사지를 곧게 펴보아도 헛일이다. 중심이 둘러 패인 해까운 육신에 힘을 줄래야 줄 곳이 없다. 중추를 잃어버리고 파도의 희롱을 받는 난파한 기선의 꼴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나뭇잎 같이도 바람개비 같이도 가벼운 사람의 몸. 하잘것없는 육체에 문오는 환멸이 느꼈다. 거리를 거닐 때에 의젓이 서서 의젓이 걸으며 철학이니 과학이니 고집스럽게 논의하는 인간의 꼴이 결국 이렇게 보잘것없이 휘둘리는 한 장의 나뭇잎임을 느낄 때 괴로운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한 조각의 서글픈 갈등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91
“어떻게 된 노릇이예요.”
 
92
말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옆에 미례가 와 앉았다.
 
93
사람의 거래가 빈번한 문오의 방에 미례가 찾아옴은 두 사람 사이에 작정된 금단의 율칙이었으나 문오의 움직이는 소식을 들은 판에 그것을 무릅쓰고 이 밤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어떻든 몸이 금시에 날아 버리는 것같이 불안스럽고 외롭던 판이라 저윽이 반가웠다.
 
94
“맥이 풀려 기운을 쓸 수가 없구려.”
 
95
약한 미례의 손이언만 그것이 손아귀에 탐탁하게 믿음직하게 쥐어졌다.
 
96
“몸을 좀 눌러 주우. 한결 힘이 날 것 같으니.”
 
97
미례는 번듯이 몸을 기울여 문오의 배를 눌렀다. 그것을 주초삼아 문오는 기운을 낼 수 있었다. 든든한 기둥이나 붙든 듯이 몸과 마음이 안정되었다. 잔약한 여자의 몸이지만 이 밤에는 늠름한 의장부의 풍격이 있어 보였다. 문오는 그에게 거의 전신을 의지하고 두 팔로는 그의 어깨를 한사하고 붙들었다. 갈리던 이도 안정되고 떨리던 몸도 차차 가라앉아 갔다.
 
98
미례의 입이 눈앞에 가깝다.
 
99
“별안간 웬일예요.”
 
100
“주사를 한 대 맞았더니 그렇구려.”
 
101
“무슨 주사요.”
 
102
“글쎄……”
 
103
주사 말을 하고 앞에 가까이 미례의 얼굴을 대하게 되니 문오에게는 문득 아까 병원에서 친구가 던진 말이 생각났다. “……어떻든 이것이나 한 대 맞고 가 누워서 애인을 기다리든지 마든지 생각대로 하게 그려.”─의사가 무심히 던진 그 한마디는 마치 예언과 같이도 적중되어 기대치도 못하였던 미례가 지금 눈앞에 나타나 있게 되었음을 공교롭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의외에도 미례를 눈앞에 불러 괴로운 그에게 의지할 힘과 따뜻한 체온을 주게 한 것은 물론 주사의 힘도 의사의 말도─과학의 소치는 아니었으나 결과에 있어서는 그렇게 된 일종의 공교로운 암합이었음을 문오는 괴이하게 여겼다.
 
104
그러고 보니 미례와 그런 자태 그런 모양으로 그렇게 가깝게 만나 몸을 서로 의지한 것도 퍽은 오래간만이었다. 피부에 비밀이 생긴 이후 문오는 그 변을 미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고 가까이 만나기와 몸을 드러내 놓기를 꺼렸다. 미례의 얼굴에 완연히 보이는 섭섭한 표정을 살피면서도 끝내 몸의 비밀을 보이지 않은 채 그날에 이르렀던 것이다.
 
105
“주사는 왜 맞으셨어요.”
 
106
거기에까지 이른 이상 문오는 그에게 몸의 비밀을 더 숨길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모든 것을 모조리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듣고 난 미례는 빙그레 미소를 띠우며,
 
107
“옳지 알았지. 지금까지 그렇게 까다롭게 괴벽스럽게 냉정하게 쌀쌀하게 군 원인이 피부에 있었구먼요.”
 
108
하고 문오의 턱을 손끝으로 가볍게 받들었다. 마치 귀여운 아이의 턱을 반드는 듯도 한 시늉이었다.
 
109
“산문으로만 들어찬 세상에서는 피차에 숨겨야 할 일이 있지 않겠소. 세상은 너무도 산문으로 들어찼으니까.”
 
110
“제게 숨기지 않은들 어때요. 붉은 피부를 본다고 송충이를 본 것같이 기급을 하고 뒤로 물러설 줄 알았어요. 망령두.”
 
111
“안 그런단 말요.”
 
112
“심술쟁이.”
 
113
미례는 문오의 목에 덜컥 얼굴을 갖다 묻었다. 문득 코를 만지며,
 
114
“코끝에 붉은 게 무어예요.
 
115
“얼굴에까지 내돋나 보군. 얼마 안 있으면 얼굴이 원숭이같이 새빨갛게 될걸.”
 
116
“새빨갛게 되면 꽃다발 같게요.”
 
117
미례는 문오의 괴팍스러운 형용을 이렇게 수정하면서 사실 꽃다발을 안듯이 문오의 얼굴을 안고 전신을 그에게 의지하였다. 문오는 미례의 몸을 받으면서도 주사의 일건과 의사의 말이 한결같이 머리 속에 뱅 돌았다.
 
 
118
출발을 앞두고 짐 정리에 문오는 분주하였다.
 
119
한 사람의 살림살이가 왜 이리도 복잡한가. 왜 더 단순하고 가뜬하게 공기와 일광만으로 살 수 없을까 생각하며 불필요한 세간은 될 수 있는 대로 덜고 버리려 하였다. 천정의 거미줄과 책상 속의 먼지와─사람의 살림에는 그런 쓸데없는 물건까지 덧붙이기로 쫓아다니는 것 같다.
 
120
낡은 세간 그릇은 마병장사에게 팔 수 있고 휴지는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고 수백권이나 되는 묵은 잡지는 종이장사에게 팔 수 있고 서랍 속의 서류는 찢어버릴 수가 있다. 서랍 속의 정리─그것은 사실 일종의 인생의 쾌사였다. 필요한 것이든 불필요한 것이든 손에 쥐이는 대로의 서류와 문서의 조각을 살펴보고 아까워할 것 없이 커다란 용단을 가지고 교만하게 대담하게 쭉쭉 찢어버림이 인생의 쾌사가 아니고 무엇일까. 숫자같이 똑똑 쪼개지지 않는 인생에 있어서 그와 같이 통쾌하고 자취 맑은 정리가 있을까. 골듀스의 노마디를 칼로 끊은 알렉산더의 용단과 쾌미와도 흡사하다 할까. 서랍 속을 정리하며 문오는 일찍이 맛본 적 없던 위대한 쾌미와 시원한 감정을 느꼈다.
 
121
모든 것을 그와 같은 용단으로 정리할 수 있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눈에 보이는 것을 모조리 찢어버리고 태워 버렸으면 얼마나 세상은 간단해질까. 그것을 할 수 없는 곳에 범부의 ‘슬픈 운명’이 있는 듯하다. 가령 수십장 넘어 거의 한 묶음이나 되는 채무에 관한 서류─그것을 현실 생활에 얽매어 있는 한 사람의 평범한 시민이 교만하게 대담하게 쪽쪽 찢어버릴 수 있는가. 현금차용증서, 월부반환계약서 여러 상점의 전표─그 많은 글발을 한꺼번에 불붙여 소지 올리고 어울러 아귀 같은 채권자까지도 머리를 끌어 한 단에 묶어 불살라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인생은 통쾌하고 세상은 깨끗해질까. 그것을 할 수 없는 선량한 시민의 운명을 문오는 슬퍼할 수밖에는 없었다.
 
122
그러나 세간의 정리보다도 더 큰 사건이 차례차례로 왔다. 작별, 출발, 부임, 주택난…….
 
123
문제의 주사는 살발산임을 알았으나 그 위력에도 불구하고 풍진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돋을 대로 돋고 필 데까지 피어 버렸다. 근실거리는 몸을 가지고 차례차례로 일을 겪는 동안에 육신은 지치고 머리 속은 톱밥같이 피곤하였다 . 확실히 이마에 주름살이 한 줄 더 잡혔을 것 같다.
 
124
어떤 경우에든지 작별이란 거개 귀찮고 마음을 헝클어 놓는 것이지만 미례와의 이별은 더한층 그런 것이었다. 미례와 그와의 사이는 언제 끝날지를 추측하기 어려운 이야기의 도중인 셈이므로 그 이별이 반드시 두 사람의 교섭의 마지막은 아닐 것이나 그래도 그것이 이별인 이상, 심히 성가스런 것이었다. 전송하는 동무들도 많으므로 떠나는 시간에 역에서 만날 수도 없고 하여 전날 밤 차점에서 몇 시간을 같이 지냈으나 미례는 마치 영영 작별하는 사람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대체 눈물이란 일종의 로맨티시즘이요, 감정의 낭비라고 문오는 평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산문 속에는 눈물이 없는 것이다. 채 정리도 안된 어지러운 산문 속에서 쓸데없는 눈물로 인하여 공연히 감정을 낭비하게 된 것을 문오는 헛된 짓으로 여겼다.
 
125
이별에서 받은 산란한 심사에다 반날 동안 흔들리는 기차 속의 불결 혼란의 인상이 덮쳐 목적지에 내렸을 때에도 거뿐한 심사는커녕 오히려 무겁고 심란한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126
지방의 큰 도회였으나 그 목적지의 인상이 첫째 퍽 산문적이었다. 옛 문화의 유산에서 오는 그윽한 향기와 침착한 윤택 대신에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일종의 신흥도시로서의 분주한 기색과 요란한 혼잡이었다. 대개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 하더라도 처음으로 찾는 사람에게 감격을 주는 것보다는 실망과 환멸을 주는 경우가 더 많으니 그것은 그곳을 찾기 전의 꿈이 늘 지나쳐 아름다운 까닭이다. 요행 상상에 어그러지지 않는 아름다운 곳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완전히 낯이 익기 전에는 한동안 아무리 하여도 일종의 서먹서먹한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법이니 문오도 그 예에 빠지지 않았다. 노스탤지어라고 하여도─현대인에게는 그리워 할 고향이 없기는 하나 일종의 막연한 애수와 서글픈 심사─그런 것이 가슴속을 후렷이 휘덮는 것이었다. 낮설은 곳에서 불안정한 마음에 정리 안된 많은 일을 앞두고─문오는 저윽이 슬퍼졌다.
 
 
127
유람과 쾌락을 목적으로 하여 특별히 깨끗하게 세운 도회가 아니고는 세상의 거리란 그 어느 거리를 물론하고 대개 불결하고 산란한 것이 원칙인듯싶다.─사람의 생활 그것이 그러하듯이.
 
128
문오는 이 거리에서도 역시 과거에 있어서 본 그 어느 거리와도 똑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규모 있는 정돈이 없다면 차라리 시적 단편이라도 있었으면 좋을 것을 거리에는 ─ 온전히 산문의 독기만이 있다. 고르지 못한 길, 쓰러져 가는 집, 삐뚤어진 간판, 먼지 속에 사는 사람들, 게다가 때마침 부의 청결 시행의 날이라 집집마다 마치 물고기가 창자를 뱉어놓은 듯이 어지러운 살림그릇을 행길에 뱉어 놓고 먼지를 털며 한편 그것을 먹는다. 청결의 날은 먼지를 먹는 불청결의 날이다. 사람은 왜 즐겨 다닥다닥 엉겨들어 먼지 속에 사는가. 먼지 속으로 나서 먼지를 먹으며 먼지 속에서 복작거리다가 한 세기 동안의 역사도 못 보고 기껏 반세기쯤 해서는 다시 먼지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먼지로 말미암아 확실히 반세기의 목숨은 짧아지는 것 같다. 왜 사람은 맑은 공중에 떠서 살만한 지혜가 없을까. 얼른 그런 지혜를 가질 날이 오기를 바람이 누구나의 원이 아니면 안되겠다.
 
129
어수선한 거리 속에서 문오는 한 채의 집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이 또한 그에게는 커다란 어려운 과제였다.
 
130
집─사람은 언제부터 이 귀찮은 것을 가지게 되었는지 거의 사람과 운명을 같이하게 되는 이 야릇한 물건, 별을 우러러보며 낙엽 속에 파묻혀 자는 것은 인류의 그리운 옛 꿈이요, 이슬을 피하려면 사람은 불가불 벽과 지붕을 가져야 될 것 같다. 모든 것을 정리하기에 편한 까닭이다. 다 같은 벽과 지붕이나 다 다른 벽과 지붕이다. 집은 각각 다른 성격을 가지고 각각 독특한 때와 전설을 벽에 묻혀 간다. 그 성격은 사는 사람의 성격을 규정하고 꾸며가는 것이니 어느 집이라도 다 좋은 법은 없다.
 
131
그러나 물론 문오는 욕심을 부릴 형편이 못되었다. 아무 집이나 그 지붕 아래에서 피부를 긁고 철학을 궁리하고 미례를 생각할─그런 한 채를 구하는 것이었으나 그것이 수월하게 나서지 않는 것이었다. 별안간 인총이 늘어 주택난이 심한 거리라 같은 회사의 동무들도 나서고 거간들을 여럿이나 내세우고 하여 이틀 사흘을 구하여도‘작성된’그 집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132
피부는 고패를 넘어 회복기에 들어가 있었다. 붉게 피었던 쌀알은 어느결엔지 성창이 되어 긁으면 부연 덕지가 일어나 떨어졌다. 가렵기는 일반이었으나 덕지가 부옇게 떨어짐은 일종의 쾌감이었다. 결국 피부가 한꺼풀 쪽 벗어지는 셈이었다. 이침에 여관방에서 일어나면 전날 밤에 목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불 속에는 물고기의 비늘이 허옇게 쌓여 손바닥에 고물같이 쥐어졌다. 그것은 거의 무한히 있는 것 같아서 일어도 일어도 끝이 없었다. 말 털을 솔질하듯이 굵은 솔로 서억서억 밀었으면 얼마나 시원할까 하고도 생각하면서 문오는 거리로 집을 구하러 나가곤 하였다.
 
133
집도 많고 거간도 흔하여서 하루 동안에 집도 많이는 보지만 거간도 여러 사람 사귀게 되었다 거간들은 . 앞잡이를 서서 네거리를 지나고 행길을 거쳐 뒷골목을 뒤지다가도 금시에 언덕 위를 헤매고 다시 골짝으로 내려가곤 하였다. 그들은 마치 신출귀몰하듯이 삽시간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거리를 휘줄거렸다. 한사하고 거간의 등뒤만 딸는 문오는 반날쯤을 걸으며 완전히 지쳐졌다. 한 사람에게 지치면 술값으로 은전푼이나 쥐어 주고는 네거리에서 다른 거간을 붙든다. 나중에는 피곤한 판에 집보다도 거간의 거동에 주의가 쏠리곤 하였다. 집주인을 옹호하였다가도 금시에 문오를 변호하는 구변과 말재주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교섭을 성사시키지 못하여 집을 물러 나올 때의 거간의 뒷모양은 풀없는 가엾은 것이었다. 그런 때에 찬찬히 주의하여 보면 거간의 탕건에나 모자에는 먼지와 때가 덕지덕지 절어 붙었다.
 
134
그것을 보면 문오는 문득 잊었던 피부를 생각하고 거리 복판에서 벅벅 긁어 비늘을 시원히 떨어트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135
그런지 나흘 만이었을까. 저녁 무렵은 되어 노곤한 몸으로 여관으로 돌아갈 때 문오는 행길에서 우연히 회사의 동무를 만나 집 얻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위와 동떨어져 부근도 조용하고 뜰에는 나무포기도 있다는 보고를 듣고 필연코 마음에 들려니 하여 저윽이 안심되었다. 오랫동안의 심로의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시급히 새집에 들어 말끔히 목욕하고 방 가운데 누워 더도 말고 온 하루 동안 뜰 앞의 나무를 바라보며 천치같이 지냈으면─하는 충동이 유연히 솟았다.
 
136
여관 문을 들어서며 웃음을 띠운 것도 오래간만이었다. 웃음에 대답하는 듯이 주부는 다짜고짜로 한 장의 전보를 내주었다. 문오는 뜨끔하여 웃음을 죽이고 불안스럽게 전보를 펴들었다.
 
137
“오후 도착 미례”
 
138
기쁘다고 하느니보다는 아무리 하여도 슬픈 일이었다. 일껏 일신이 조금 정돈되었다고 생각하는 판에 또 무거운 짐이 굴러 들어온 셈이다.
 
139
잠시 오는 것일까. 영영 오는 것일까. 은밀히 오는 것일까. 공연히 오는 것일까. 철없이 도망하여 오는 것일까. 계획하고 떳떳이 오는 것일까. 그렇다면 집안 처리는 어떻게 하였을까. 남편과의 사이는 어떻게 해결되었을까. 섣불리 하다가는 짜장 결투라도 하게 되고 칼부림이라도 나게 되지 않을까─문오에게는 미례를 만나게 되는 반가운 마음보다도 먼저 이런 불안스러운 생각이 한결같이 드는 것이었다.
 
140
“팔페, 쥬쉬콩탕드쁘발!”
 
141
상상하였던 것과는 딴판으로 홈에 내려서는 미례의 자태는 전에 없던 명랑한 것이었다 . 차림도 경쾌하거니와 표정도 가을 하늘같이 맑아 오도깝스럽게 지껄이는 한 구절의 외국어가 맵시와 낭랑하게 조화되었다. 근심과 불안의 그림자는 그의 얼굴에서 멀어진 것이다. 근심 속에서 온 사람이 아니오, 확실히 평화 속에서 온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142
“노라라고 부르기는 현대적이 아니고 무어라고 부르면 옳은고.”
 
143
“노라는 왜 노라예요. 한 사람의 완전한 자유인으로서 떳떳하게 온 것을요.”
 
144
“자유인!”
 
145
“그럼은요.”
 
146
“뒤를 따라오지나 않나.”
 
147
주위를 휘돌아보는 문오를 미례는 도리어 조소하였다.
 
148
“쓸데없는 걱정하실 것 없어요.”
 
149
“결투를 안 해도 좋단 말요.”
 
150
“정 하시고 싶으면 권투선수가 권투 연습하듯이 허수아비하고나 겨루시지요.”
 
151
“도망을 갔단 말요. 승천을 했단 말요.”
 
152
“승천이라면 정말 승천한 셈이 되는군요.”
 
153
“세상을 떠났나.”
 
154
“비행가가 되려고 떠났으니 말예요.”
 
155
“맙소서.”
 
156
“가정을 없애 버렸지요. 그리고 비행가가 되겠다고 동경으로 내뺐어요.”
 
157
미례는 시원하다는 듯이 한숨을 뽑으면서 뒤를 이었다.
 
158
“잘 생각했지요. 창이 난 가정에 언제까지든지 사람을 붙들어 둘 수도 없고 하니 모든 것을 점잖게 깨달은 셈이지요. 그런 시원한 성격도 한편 가지고는 있나 봐요. 돈푼이나 흘려 보려고 간 모양인데 바른길 잡았지. 부락스러운 것하구 비행가감으로는 똑 떼놓았으니까요.”
 
159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고 우리들을 흘길 날이 오겠구려.”
 
160
“그때 우리는 그 기특한 사람을 떨어지지 말도록 축하해줄 의무가 있잖아요.”
 
161
“떨어지지 말면 짜장 승천하게.”
 
162
문오로서는 오래간만의 농이었다.
 
163
“미례도 박복은 하우. 돈 구덩이를 버리고 하필 가난뱅이한테로 달려온단 말요.
 
164
“농도 한마디지 두 마디까지 하면 점잖치 못한 법예요.
 
165
미례는 눈초리를 가늘게 감으며 귀엽게 항의하였다.
 
166
문오 자신도 문득 뜻하지 못하였던 이 저녁의 그의 다변을 깨달았다.
 
167
얼크러진 골듀스의 노마디를 가져올 줄 알았던 미례가 의외에도 행복스러운 해결을 가져온 것이 그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던 것이다.
 
168
집과 미례와─정리된 이 두 가지의 사실이 문오의 마음을 너긋이 채웠다. 나머지의 모든 불안한 커다란 행복감 앞에 그림자같이 없어지고 그의 머리 속에서 잠깐 동안 사라져 버렸다. 근실거리는 피부도 손가락 하나가 없는 마담의 왼손도 거리의 혼란도 그 속의 거지도 절름발이도 거간의 탕건에 절어 붙은 때 먼지도 지금 그의 머리 속에는 없었다.
 
169
미례와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앞길에 문득 짙은 갈마빛 하늘이 치어다 보인다. 그곳에 변치 않고 늘 있는 하늘이지만 잠시 잊었던 것이 이제 새삼스럽게 눈 속에 들어왔을 뿐이나 오늘의 우연한 그 한 조각 하늘은 유심히도 맑게 그의 마음을 비취는 것이었다 넓고 지천한 하늘이 아니요, 천금의 값있는 한 조각의 거울인 듯싶었다. 불안과 혼란은 구만리의 하늘 밖으로 날아 버리고 잠깐 동안 천지간에는 다만 맑은 하늘과 맑은 마음이 있을 뿐이었다.
 
 
170
─ 5월 2일 어평양(於平壤)
【원문】인간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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