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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나무있는 삽화(揷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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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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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나무 있는 揷畵[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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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과 좌우로는 변두리가 까마아득하게 퍼져나간 넓은 들이, 이편짝 한 귀퉁이가 나지막한 두 자리의 야산(野山) 틈사구니로 해서 동네를 바라보고 홀쪽하니 졸아 들어온다. 들어오다가 뾰족한 끝이 일변 빗밋한 구릉(丘陵)을 타고 내려앉은 동네. ‘쇠멀’이라고 백 호 남짓한 농막들이 옴닥옴닥 박힌 촌 동네와 맞닿기 전에 두어 마장쯤서 논 가운데로 정자 나무가 오똑 한 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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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빛으로는 조그마하니, 마치 들 복판에다가 박쥐우산을 펴서 거꾸로 꽂아 놓은 것처럼 동글 다북한 게 그림 같아 아담해보이기도 하지만, 정작은 두 아름이 넘은 늙은 팽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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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석을 서너 잎은 폄직하게 두릿 평평한 봉분이 사람의 정강이 하나 폭은 논바닥에서 솟았고, 저편 가로다가 울퉁울퉁 닳아빠진 옷뿌렁구를 드러내놓고서, 정자나무는 비스듬히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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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에서 이리저리 뻗어나간 논틀길을 서너 갈래, 그중 동네로 난 놈이 유독 넓기도 하고 꽤 길이 난 것은, 동네와 이 정자나무 밑과의 왕래가 빈번하다는 표적을 드러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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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둘레로는 나무에서 떨어져내린 앞이야 부러져내린 삭정개비야, 봉분에서 쓸려 내려간 검부작이야 흙부스러기야 또 어른 아이 없이 무심코 빗디딘 발자죽이야, 그런데다가 육장 그늘까지 덮이고 해서, 도통치면 한 마지기는 실히 되게시리 논의 벼농사를 잡쳐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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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생김새가 운치도 없고, 또 있다손치더라도 그것을 요긴해할 활량도 없고 한데, 더구나 그렇듯 농사를 잡쳐놓기까지 하니, 벼 한 포기라도 행여 치일세라 새뤄하는 촌사람들에게야(가령 논 그 농사가 제 가끔 제 것이 아니라도) 이 정자나무가 그다지 귀인성 있는 영감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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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을 한술 더 떠, 영감이 성미가 유난하게시리 도섭스러서, 동네 사람들의 폐로와함이 또한 이만저만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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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나무에는 ‘지킴(守護神[수호신])이 붙어 있다고 옛적부터 일러 내려온다. 그 ‘지킴’이 퍽은 영검스러, 누구든지 이 정자나무를 건드리기만 하는 날이면 단박 동티가 나서 그 당장에 병이 들어 죽는다는 것이다. 해서 혹여 다칠세라 무서무서하고, 땔나무가 귀한 이곳이건만, 봄 가을로 삭정개비야 낙엽이야가 그렇게도 숱해 많이 떨어지는 것을 누구 한 사람 감히 긁어가질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산 이팔 한 잎이나 산 가장귀 한 가지는커녕, 그놈을 장작으로 빠개노면 한 마차는 실히 됨직한 커다란 가장귀 하나가 죽어가지고 볼성없이 뻗어 있는 지가 벌써 몇 해로되, 본체만체하지 아무도 선뜻 도끼로 꿍꿍 찍어가자고는 여태 생심내는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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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서 기껏해야 아직 이 정자나무의 위협이 머리에 배지 않은 철없는 아이들이, 늦은 여름 열매가 열어 새파란 팽이 대래대래 붙곤 할라치면 팽 총감으로 그놈을 따느라고 얕은 가장귀에 가 매달리기, 또 단풍 무렵이면 불그레하니 익어 맛이 달크은한 팽을 따먹느라고 역시 아이들이 엉켜지르기 하다가 어른들한테 혼띔이 나곤 하는 게 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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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서는 누가 골치만 띠잉 아파도 이 응큼한 고목나무는 ‘외약 산내끼’(왼새끼)로 허리띠를 얻어 두르고, 좀 심한 병이면, 영감이 도섭이 단단히 났나 보다고, 쩌다가 바치는 떡시루를 얻어먹는다. 역력스럽게도, 누구는 보니까 허어연 영감이 시루의 떡을 넙죽넙죽 집어먹고 있더라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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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떡을 넙죽넙죽 집어먹는 험상궂은 영감 말고도 또 하나, 천년 묵은 끝이 몽땅하고 크기가 전봇대만한 구렁이가 이 정자나무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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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세 길쯤 올라가다가 게서부터 세 가장귀로 벌어지고 그 가장귀 벌어지는 샅에 가서 어른의 주먹으로 두 개 폭은 들락날락할 만한 구멍 하나가 시커멓게 뚫려 있는데, 천년 묵은, 끝이 몽땅하고 전봇대만한 구렁이는 그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살고 있으면서 누가 정자나무를 건드리거나 혹 무슨 일로 심술이 나거나 할라치면 그놈이 그 구멍으로 해서 좇아나와 내립다 사람을 물어 죽인다든지 잡아 먹는다든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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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원지(敬而遠之)라더냐는 이곳 쇠멀 동네 사람의 이 정자나무에 대한 조심을 곧잘 알아맞히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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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러는 해도 노상 그렇게 등을 지고 지내기만 하냐 하면, 여름 한 철만은 이 정자나무가 봄, 가을, 겨울 세 철을 두고 사람을 압기를 시키던 대갚음이라고 할까 치하라고 할까, 아무튼 수월찮이 고마운 노릇을 해주어, 제법 친숙함이 없는 바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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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나무가 팽나무가 돼서 잔가지가 배게 돋고, 게다가 잎이 칙칙하여 오뉴월로 육칠월 한참 들이 무성할 무렵이면 그늘이 여간만 좋은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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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한 비는 그 밑에 들어서면 넉넉 바워낼 수가 있고, 그늘이 그만큼 짙을 뿐 아니라, 들 복판이고 보매 사방 막힌 데가 없어 줄창 바람이 자질 않는다. 덕에 근처의 논에서 일을 하다가 참참이 쉴 때라든지 점심이며 새참을 먹을 때든지 또 병자랄지, 일 못하는 대신 손자나 보아주는 영감들이 앉아 쉬고 더위를 들이고 놀고 하기에 천하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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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며 빈대 벼룩이 없으니, 한뎃잠자리로 또한 마침이기도 하나, 그건 어둠과 무섬은 서로 따르는 법이라, 밤이면 허연 영감이 혹시 나오든지 해서 사람을 떡으로 알고 넙죽넙죽 집어먹을 위험도 없지 않거니와, 그보다도 그 놈 천년 묵은 끝이 몽땅하고 전봇대만한 구렁이가 아예 마음에 섬찍해서 차마 잠들은 자러 가지를 못하고, 낮에, 낮에만은 온 여름을 두고 휴전조약이라도 맺은 듯이 내내 사람이 그 밑에서 그칠 겨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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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이라 오때가 지나 새참이 되어오니, 넓은 들로 불볕이 하나 가득 내리 쬔다. 바람도 깜박 자고 더위를 모르는 이 정자나무 밑도 그늘만 답답히 덮였을 뿐, 이따금씩 생각난 듯이 시르르 울다가 그치는 실매미 소리가 한결 더 더위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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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는 며칠 않아서 목이 밸 무렵이라, 잎이 탐지게 뽑혀오른 포기포기가 보기에도 싱싱하고 소담스럽다. 바람이라도 스르르 일면 방금 쉬이소리가 요란할 듯 기운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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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껏 한빛으로 검푸른 벼만 들어찬 들만이 퍼져나가다 퍼져나가다 못해 암암한 먼 산을, 불룩한 배를 가지고 오히려 싸고 넘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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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져나간 들이 도로 좁아들면서, 가까이 봇둑이 한 줄, 띠처럼 좌우로 건너갔다. 봇둑에 드문드문 지우산이 꽂혀서 있는 것은 읍내 한량들이 낚시질을 하고 있는 정물(靜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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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이라고는 별로 없는 이 들판에, 봇둑 이편짝으로 원두막이 한 채, 유난히 키가 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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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에서는 군데군데 가끔가다가 사람의 웃도리가 보이곤 하는 게‘피사리’ 아니면 ‘만도리’다. 백중이 며칠 안 남았으니 논일도 인제는 거진 치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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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나무에서 바로 논 한 매미를 건너, 그 다음 논에서도 일꾼이 하나 둘 셋, 셋이 들어서서 ‘만도리’를 하고 있다. 갑쇠가 홀로 정자나무 밑 그늘에 밀짚 기직을 펴고 앉아 우두커니 한눈을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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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에 탄 얼굴이지만, 병색이 완구하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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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너벅다리 안쪽으로 모기가 문 자리가 시원찮게 덧이 나더니, 살앓이가 돼가지고 십여 일이나 고생을 했고, 그저께야 침으로 파종을 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합창될 날은 멀었다. 해서 오늘도 품앗이꾼 셋을 대어 저의 논의 만도리를 시켜놓고도 저는 할 수 없이 나와서 앉아 보고나 있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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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은 팔고 앉았어도 갑쇠의 온갖 정신과 염량은 시방 제 앞에 보이는 논과 농사에 잦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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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고 촌사람 농사꾼이 그해 농사에 정성이 안 씨이며, 꿈에라도 범연할까마는, 시방 갑쇠한테 대해서는 올 농사가 여간만 알뜰한 게 아니다. 물론 땅이 제 땅이 아니니, 아무리 애를 써도 반은 남의 일을 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야 새삼스러운 말이요, 어찌할 수는 당장 없는 것, 갑쇠는 이 농사가 인제 가을에 가서 장가를 들 밑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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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 나이 스물일곱에 장근 삼십이니, 비로소 장가를 든다는 것이 결코 당자로 앉아서 무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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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부터 뒤엄(堆肥[퇴비])을 많이 장만해서 마음 먹고 걸음을 듬씬한 보람이 없지 않아, 암모니아를 준 다른 논보다 벼가 된 품이 나으면 나았지 빠지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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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앞에 다른 재앙만 없게 되면 줄잡더라도 스물너댓 섬은 실히 날 것을, 갑쇠는 그새 여러 해 두고 이 논을 붙여보아 논의 성깔을 아는만큼, 그만한 가늠은 잡아두어도 실수는 없을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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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넉 섬만 잡더라도…… 갑쇠는 살앓이 자죽이 따암땀 쑤시는 것도 잊고 흐뭇해서 입가로 절로 웃음이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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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섬은 도조를 물고, 장리벼가 닷 섬이라, 그놈까지 갚고 나면 나머지가 열한 섬 열한 섬에서 석 섬만 양식으로 남겨두고, 가을에 혼인을 해야할 테니까 석 섬을 가지고 내년 보리 때까지 대기가 어렵겠지만, 그야 장리라도 다시 얻어 댈 셈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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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덟 섬이 떨어지는데, 올 가을에도 벼값이 좋아 이십 원은 잡힐테라니 일백육십 원이라, 농채가 그럭저럭 한 오십 원 되나, 그놈을 쓸어 갚고 나면 백 원 하고 머리가 좀 붙어서 남을 테었다…… 백 원……그리고 집에 돼지가 큰놈과 중톹 해서 두 마리니 중톹은 혼인때에 잡아 쓸 요량하고 큰놈은 팔면 사십 원은 받을 터, 하면 도로 일백오십 원 돈이 들어서고…… 그놈 일백오십 원을 가지고서 오십 원쯤 납채로 보내고, 백 원으로는 처억 혼사를 치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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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사, 장가를 간다! 말을 타고 어어 구부 허어, 권마성 소리, 초례청, 곱게 단장을 하고 곱게 입은 신부, 첫날밤, 신부……그게 을녜(乙女)! 을녜렷다! 고놈 빠곰한 눈, 도도룩한 볼태기, 야불야불한 입……으흐흐! 첫날밤의 신부, 그리고 그게 바로 을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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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쇠파리 한 마리가 너벅다리를 따끔 무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어 손바닥으로 무심결에 착칵 때린다는 것이 파리는 날아가고 애먼 살앓이 근처를 건드려놓아서 질색하게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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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놈의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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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쇠는 혼자서 두런거리면서 아직도 커다랗게 고약을 붙인 가장자리로 불그레하니 발이 선 너벅다리의 살앓이 자리를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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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괜한 횡액이거니 하면, 금새 좋던 나머지 속이 찝찌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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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속내 아는 사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주인이 같이 들어서서 하는 일과 남만 시켜서 하는 일과는 영락없이 일 됨새가 다른 법인데, 어쩌다가 병이 나가지고는 나는 멀뚱멀뚱 앉아 보고만 있고, 벌써 세벌김을 맬 때부터 남의 손만 대오니…… 하기야, 인제 가을에 좋자는 신수땜이란다면 오히려 해롭지 않지만,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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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커덕 철부덕, 끙 끙 소리가 바투 들리고, 논배미에서 일꾼들이 이리로 머리를 두르고 매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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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크! 이놈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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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보 최서방이 허겁을 떨면서 옹쥐 한 마리를 움켜쥐고 웃도리를 쳐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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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요 잡것은 뭣헐라구 세상에 생겨나설랑, 남 농사짓는 것 심술만 부리구 댕기는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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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방은 건들건들 우스개를 하면서, 손에 움키어 몸을 뒤틀고 용을 쓰는 응쥐를 들여다보다가, 갑쇠가 앉았는 봉분으로 휘익 내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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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살어서 존 일 많이 힜으니 천당이나 가거라, 잡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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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방은 땀이 샘물로 솟는 시꺼먼 얼굴을 팔로 쓱 씻고는 도로 허리를 꾸부린다. 봉분의 보송보송한 흙바닥에 가 나동그라진 응쥐는 온몸에 흙고물칠을 해가지고 이리 틀고 저리 틀고 발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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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쇠는 꼴 좋다고 물끄러미 치어다보다가, 논으로 고개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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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시 짓지나 안 힜넝그라우 ? 최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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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한 사흘 손이 늦기는 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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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방은 허리를 꾸부린 채 끙 끙, 벼포기 속에서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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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갠찮다. 그러구 아뭏든지, 끙 끙, 농사는 이 두레서 갑쇠가 장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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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라우,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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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구 편지구, 야야, 설흔 섬은 먹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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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흔 섬까장은 몰라두, 내짐작에도 스물댓 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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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련헌 자식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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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방 옆에서 오복이가 손에 김 뜯은 것을 한 움큼 쥐고 땀으로 맥을 감은 웃도리를 기다랗게 일으켜세운다.
 
60
“……그래, 이 논 이 농사에서 나락이 스물닷 섬만 나겄댜? 너, 그리서 스물닷 섬만 차지허구 그 남저지는 죄다날 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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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아라두 주마. 애비가 자식 그것 못 주겄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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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놈이 내가 애비 도리를 못히서……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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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이는 손에 쥐었던 김을 논바닥에 놓고 발로 밟으면서 일변 지껄이면서 도로 허리를 꾸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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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서 장개를 여태 못 들여줬더니, 끙 끙, 아 저놈이 생판 제가 애비를 낼라구 허너만! 헤!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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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불지 마라, 죽여놀 티닝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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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늬이 어머니더러 물어봐라. 내 배꼽 밑에 사마구 있는 것까장 다아 일러줄 티닝개루,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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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 그놈의 자식, 주둥이허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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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쇠가 힘은 좀 세어도 입담으로는 오복이를 못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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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덜아, 그럴라 말구서 짱껜뽕을 히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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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방의 시침 뚜욱 따고 하는 소리에, 갑쇠와 오복이는 뱃살을 잡고 웃는다.
 
71
남은 그래서 웃는 참인데, 귀머거리 오서방이, 에에헤 논 참 거름 자알되었다, 흙이 어찌두 곱게 풀렸는지 한 주먹 웅켜먹구 싶구나, 끙…… 이런 딴청을 하면서 허리를 펴다가 그제서야 웃는 입을 보고 덩달아 히죽히죽한다.
 
72
“오생원 수구허시느만이라우 ! “
 
73
갑쇠가 치하를 하는 것을 오서방은 알아듣지를 못하고, 에? 하면서 입을 가래발리고 턱을 쑥 내린다.
 
74
“오─생─원, 수─구─허세─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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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스무 섬 나구말구 ! 서른 섬이나 나겄다, 끙끙.”
 
76
이번에는 최서방까지 같이서, 어허허 흐흐흐 웃어젖힌다.
 
77
갑쇠가 한참 웃다가, 언뜻 고개를 쳐드는데, 들 가운데 논틀길로 을녜가 머리에 광우리를 이고 부산나케 이리로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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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복판에 섰는 원두막이 을녜네 것이니, 참외 딴 것을 이고 오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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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아도 걸음걸이가 갈팡질팡, 그다지 찬찬스런 맵시는 아니다. 나이 열여덟 살에 그만하면 계집애가 차분하니 좀 얌전스런 구석이 없고서, 이건 가도록 왜장녀가 돼간다고(행실머리가 궂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동네서는 달가와하질 않는다. 그러나 갑쇠는 그런 것이 숭으로 보이지 않고, 좀 까부는 것이 되레 선들선들해서 차라리 더 마음이 당기고 귀염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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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봄부터 그렇잖아도 이편이 먼저 서둘러, 벌써 몇 차례 혼담이 오락가락했고, 아직 확실히 정혼이 된 것은 아니라도 십상 틀림없으려니 하고 있다.
 
81
장가! 가을에 농사를 거두어 장가를 들고, 그런데 신부는 저기 오는 을녜고.
 
82
장가가 기쁜데, 신부가 또한 을녜니, 갑쇠는 더욱 즐겁다. 을녜는 확실히 갑쇠의 즐거움이다.
 
83
그러나 그러는 해도 그 즐거움의 한편짝에는 어두운 그늘이 없지를 않다.
 
84
작년에는 을녜가 오복이, 시방 바로 저 논에서 일을 하고 있는 오복이와 눈이 맞아, 둘이서 보리밭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보았네, 벼낟가리 틈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네 하는 소문이 퍼졌고, 그래 한때는 저의 부모도 그 기미를 채고서 이왕 저지른 노릇이니, 오복이와 혼인을 해버리느니 어쩌느니 한다고까지 말이 떠돌았다.
 
85
그러던 것이 그대로 흐지부지하더니(흐지부지하고 만 것을 보면, 그게 괜한 헛소문이 난 것이겠지야고, 갑쇠는 짐짓 안심을 해도 보았고) 한데 금년 첫여름부터는 또, 관수라는 총각과 배가 맞았으니 등이 붙었느니 하는 소리가 왁자하니 돌기 시작했다.
 
86
하니, 가령 내 뜻대로 가을에 을녜와 혼인을 한다손치더라도 저 오복이하며 (오복이만은 어쩐지 그대도록잖은데) 더우기나 말도 못할 관수 녀석하며 그것들의 찌꺼기를 천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마음에 께름칙하고 심청이 상할 뿐만 일변 아니라, 남 보기에도 치사스런 노릇이다. 게다가 또 당자 을녜가 어떠하냐 하면, 전과는 아주 딴판으로 맵살스럽게 생뚱거린다. 전에는 갑쇠를 보기만 하면 제가 좋아라고 해롱해롱 까불고 괜히 말을 붙여보고 싶어하고, 해서 실상인즉 동네서는 누구보다도 맨먼저 갑쇠와 사이가 수상타고 소문이 나기까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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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쇠는 을녜가 열댓 살, 계집애 꼴이 박히기 시작할 적부터 탐탁히 여겼고, 저것이 조금만 더 자라거든 부디 장가를 들려니 단단히 요량을 대던 참이라, 을녜가 그렇듯 좋아하는 것이 마음에 흡족하지 않을 이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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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본이 수가 좁을 뿐 아니라, 을녜를 장차 안해로 맞이할 딴 배포를 지녔기 때문에 짐짓 얌전하느라고, 더러 농지거리라도 마주 해보고 싶은 것을 참아가면서까지 아주 의젓하게 점잔을 빼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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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을 생각하면, 그리고 오복이니 관수가 을녜를 주물러버린 게 정말이란다면, 차라리 갑쇠 제가 진작 손을 대서 제것을 만들어두지 못한 것이 후회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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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 을녜가 작년부터는 사람이 알아보게 달라져가지골랑, 더러 호젓한 길목에서 단둘이 만나든지 해도 웃는 낯 한번 보여주는 일이 없고 새침하니 외면을 하고 지나가버리곤 한다. 어떤 때에는 자세 보면 입을 삐쭉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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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녜가 그처럼 쌀쌀해지니까, 갑쇠는 그제서야 마음이 달아서 어디 내가 자청 말이라도 좀 붙여보아보려니 하고 간혹 별러보곤 하지만, 그제는 오갈까지 다뿍 든데다가 갑쇠의 비위와 주변으로는 그게 섬뻑 해지질 않고, 번번이 제가 제 무렴에 지쳐 얼굴만 혼자서 붉힐 따름이었다.
 
92
그러자 을녜가 오복이와 어쩌구저쩌구, 또 혼인까지 한다는 소문이 들려, 갑쇠는 아뿔싸! 무릎을 쳐, 하다가 한동안 그 소문이 너끔하니까는 올 봄에는 큰맘을 먹고서, 그리 내켜하지 않는 모친을 졸라대서, 을녜네 집으로 통혼을 해, 그게 요행 얼려가는 듯해서 조금 안심을 했던 판인데, 끝끝내 을녜를 차지할 복이 아니든지(그도 두고는 보아야 할 일이지만) 이번에는 긴치도 않은 관수 녀석이 어디서 툭 튀어나와 가지골랑 또다시 중간치기를 당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93
참외 광주리를 이고 마침 그 논 논틀을 지나는 을녜를, 오복이가 빈들빈들 웃으면서 제 옆에까지 오도록 기다린다.
 
94
을녜는(알고도) 못본 체 눈을 내리깔고 종종걸음으로 을씨년스럽게 그 옆을 지나간다. 흥! 네까짓 애녀석! 하는 태도요, 하니 일이 좀 모양 창피하게는 되었으나, 내친 걸음이라, 또 참외도 하나 집어주면 얻어 먹을 겸, 오복이는 두어 걸음 다가가면서, 참외 하나 다구, 하면서 위정 놀리는 체 소리를 지른다.
 
95
을녜는, 꼴두 같잖은 게 왜 요 모양이냐는 듯이, 얼굴을 빼뜩, 멸시하는 낯놀림 하나로 족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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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못 채리네!”
 
97
“야아, 하나 먹자! 목말라 죽겄다!”
 
98
을녜는 뒤에서 무어라거나 다시는 알은체를 않는다. 오복이는 헤헤 속없는 헛웃음을 치다가, 제 무렴 제가 푸느라, 그만 둬라 손자 밥을 뺏어 먹구 천장을 치어다보지! 끙, 하면서 도로 허리를 꾸부린다.
 
99
본이 사람이 염장이 빠져놔서, 계집애와 붙어 지낼 적에도 속을 달칵 앗기어 노상 구박에 지천을 먹었고, 시방은 상관이 없어지고 나서도, 쓸데없이 지분거리다가는 눈에 넘치는 멸시를 받는 것이건만, 그러나 오복이는 조금도 그걸 창피해하거나 괘념을 하지 않는다.
 
100
앓고, 방금도 그랬지만, 을녜를 길에서라도 만나든지 하면, 저게 내 손에다가 쥐고 주무르면서 가지고 놀던 계집애거니, 재미있던 그적을 여겨 만족과 자긍을 느끼곤 한다.
 
101
오복이가 을녜를 곧잘 놀려먹는 것이 일변 부럽기도 하려니와, 어디 내한테는 어떻게 하나 보자고, 갑쇠도 잔뜩 벼르고 기다린다.
 
102
을녜는 봉분으로 올라와서 갑쇠가 안 보거니만 하고, 살끔 고개를 돌려보다가, 짐짓 건너다보고 있던 갑쇠와 눈이 마주치자 얼핏 외면을 해버린다.
 
103
“참외 하나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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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쇠는 못해오던 짓이라, 차마 얼굴이 마주쳤을 제는 말을 못하고서 을녜가 외면을 하니까야 겨우 한마디, 그거나마 가만히 소곤거리듯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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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이라, 을녜는 주춤 발길을 멈추더니, 잠깐만에 고개를 돌려 몹시도 영롱한 눈으로 무엇을 찾는 듯 갑쇠의 얼굴을 히죽이 웃는 것까지도 우둔은 해보이나, 두릿하니 사내다운 얼굴을 말끄러미 내려다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요, 눈에는 시뻐하는 빛이 갈아들면서 고개를 돌리고 가던 발길을 다시 띄어놓는다.
 
106
“사람 됐네! 동네 지집애 구실릴 줄을 다아 알굴…… 못난이!”
 
107
저 혼자서 구누름하듯 하는 말이요, 맨끝에 못난이란 소리는 낮고 분명찮아서 갑쇠는 알아듣지는 못했다.
 
108
……그러면서 한 세 걸음이나 걸어갔을까, 주춤 다시 멈춰 서더니, 머리에 인 광주리를 한손으로 더듬어 잡히는 대로 참외 한 개를 집어 내 가지고 오금을 꾸부려 땅바닥에다가 살며시 놓는다. 그래놓고는 도로 일어서면서, 해뜩 갑쇠를 돌려다보는 것이다.
 
109
“살앓이허니라구 위너니 먹고 싶은 것두 많얼 테지!”
 
110
그의 얼굴은, 입이 뱅긋이 웃으려고 하는 것을, 눈을 자꾸만 새침하느라고 필경 웃지 못하고 만다.
 
111
이 미묘한 계집의 동정을, 더구나 을녜가 어찌해서 제풀로 오복이게로 갔으며, 제게는 쌀쌀해졌는지를 짐작 못하는 갑쇠는, 저게 그래두 날과 혼인이 되게 되니까, 오복이한테보다는 좀 달리 하는구나 하고, 등이 근질근질해서, 속으로 이히! 그놈의 계집애가 사람 간을 마구 녹이네! 하면서 듬씬 흡족해한다.
 
112
그렇지만? 하고, 갑쇠는 고개를 깨우뚱하면서 엉금엉금 참외를 집으러 기어온다. 그러지만(저편이 조금 동정이 다르니까는 헛배가 불러가지고) 을녜게로 장가를 가는 것이 아무래도 께름칙하다는 것이다.
 
113
참외를 집어가지고 도로 자리로 기어와서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러 한입 뭉떵 베어 물다가, 또 고개를 깨우뚱, 그렇지만! 한다.
 
114
이번은, 그렇지만 을녜가(동정이 다르니 더더구나) 좋기는 좋은데 어떡하느냐 말이다.
 
115
참외를 중동께까지 먹다가 또, 그렇지만…… 하면서 그제는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116
그렇지만 뭐, 농사는 잘 지어 장가들 밑천을 됐겠다, 을녜도 좋고, 또 동네에 과년 찬 계집애가 수두룩하니까, 아무려나 올 가을에 장가를 들게는 되겠지, 이 뜻이다.
 
117
잘 익지도 않아, 단맛도 없는 참외를 어떻게 먹었는지 다 먹고 꼬투리를 논으로 마악 내던지는데, 등 뒤의 인기척에 돌려다보니까, 세상 징그러운 관수다. 갑쇠는 언제고 그렇지만, 단박 압기가 되고 벗은 발등으로 뱀이 지나가는 것처럼 서늑하니 목서리가 치이는 것을 어찌하지 못했다.
 
118
계집 샘으로 해서 갑쇠로 보면 관수라는 인간이 달갑지 않은 것도 의당한 노릇이겠지만, (그러나 또, 다 같은 계집 샘이라도 맨 처음 오복이가 을녜와 어쩌구저쩌구 한달 제는, 흥, 병신이 지랄한다더니, 그거 원 참, 이쯤 아니꼽고 시쁘듬했을 뿐, 그때나 지금이나 오복이를, 시방 관수에게 대한 십분지 일만큼도 미워를 안하니, 그것부터도 편벽이려니와) 아무렇든 그런 계집 샘 말고서도 관수는 하필 갑쇠뿐만 아니라, 동네가 거지반 다 그렇게 섬찍해하는 사람이다.
 
119
그 연유가 (그런데) 이러하다.
 
 
120
관수는 열여섯 살 적에, 이 동네서는 드문 일로 읍내 보통학교를 육학년까지나 다니던 중 월사금이 여러 달 치가 밀린 것을 못 내어 (제라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니까, 그 길로 종적도 없이 집을 나가버렸다.
 
121
농투성이 자식으로 노상 재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천하 망나니가 돼서 공부보다는 싸움이 첫째라, 제 동무들이며 선생에게 실인심을 해, 그래 학교도 아닐 맛이 덜한 판인데, 계제에 월사금 밀린 것으로 창피를 당하곤 하니까, 이첨저첨 그 거조를 냈던 것이다.
 
122
그렇게 집을 나가서는 이내 죽었는지 살았는지 일자 소식이 없더니, 꼭 열한 해 만인 금년 첫여름에 아주 완구한 장정이 돼가지고는 땅에서 솟아나오듯 퍼뜩 고향에를 돌아왔다. 변한 것은 외양뿐만 아니라, 그다지 까불고 술심 망나니고 하던 (실상은 명랑했던) 대신 사람이 몹시 뒷 그늘이 져 보이고 입이 무거워졌고 해서, 우선 남과 붙일성이 없었다. 어쩐지 촌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게 몹시 불길한 것 같아서 수군수군들 했다.
 
123
한데, 그 열한 해 동안을 어디 가서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도, 그저 서울도 있었고 부산도 있었고 대판도 있었고 오까야마 촌에서 농사일도 더러 하고 했다고 대답할 뿐이지, 더는 이야기하기를 꺼려하고, 하는 놈에 그만 과거가 무엇인가 살이 끼어 보여서 동네 사람들은 더욱이나 그와 섭쓸리고 속을 주고 하가를 사리곤 했다.
 
124
아니나다를까 하루는 읍내 주재소의 순사가 나오더니, 고향에 돌아온 뒤로 관수의 일상거지가 어떤가를 조사했고, 그 꼴에 우연히 미끄러져 나온 말로 ‘나쁜 짓’을 하다가 삼 년이나 전중이를 살았다는 것이 그만 드러나고 말았다.
 
125
옳거니! 하고 동네 사람들은 궁금하던 속이 후련해서 무릎을 쳤다. 그래서 그놈이 그렇게 두억신같이 음험해 돌아온 줄은 몰랐지야고, 저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126
동네 사람들은 속을, 놀랜 조개처럼 잔뜩 아물리고 관수를 경계했다.
 
127
경계를 하느라니까 자꾸만 더 무서워나고, 무서우니까 그에게 이상한 압기를 느끼게 되고, 그것은 영락없이 저 ‘지킴’이 있고 천년 묵은 구렁이가 그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정자나무를 무서워하고, 그에게서 압기를 느끼는 것과 꼬옥 같은 것이었었다.
 
128
처음 그들은 그 ‘나쁜 짓’이라는게 무엇인지 적절히 알지 못했다. 누구는 노름을 한 것이라고 했다. 또 누구는 도둑질을 한 것이라고 했다. 또 누구는 그놈이 말을 않아서 그렇지 하기로 들면 청산유순데 아마 그 언변으로다가 누구를 속여 재물을 뺏어먹은 것이라고도 했다.
 
129
이렇게 그의 ‘나쁜 짓’의 해석이 구구한 판인데, 바로 월여 전이다.
 
130
동네앞으로 지나간 전봇대를 갈아 세우느라고 소위 ‘도까다’들이 한패 몰려들어, 낮에 일을 하고서 그날 밤을 주막에서 묵는데, 술들이 취해가지고는 몹시 행패를 하니까, 그래도 동네 사람들은 말 한마디 못하는 것을, 관수는 보다못해 시비를 걸었으나, 동네 사람들은 역연 비슬비슬 구경만 하고 있지 말도 거들어주질 않고, 관수 혼자서 꼼짝없이 여럿에게 몰매를 맞게만 켯속이 되고 말았다.
 
131
관수는 영 다급하니까 쭈르르 부엌으로 달려들어가더니 창끝 같은 식칼을 집어들고 나와서 냅다 엄포를 하는 바람에 ‘도까다’패가 기가 질렸고 그래 겨우 액경을 면했었다.
 
132
동네 사람들은 다시 무릎을 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133
오옳지 ! 그놈이 사람을 궂히고서 전중이를 산 거로다. 이걸로 관수의 그 ‘나쁜 짓’의 정체는 아주 선명해진 셈이 되고 말았다.
 
134
누구든, 제가 듣자니 대판서 계집 샘에 칼로 사람을 죽였더라고까지 언해를 달았다. 그러자 마침맞게 그 뒤 며칠 않아서 관수와 을녜가 배가 맞았다는 소문이 좌악 퍼졌으니……
 
135
그러한 관수가 무슨 짓을 하느냐 하면, 동네 사람들은 밤이면 근처에 얼찐도 하지 못하는 정자나무 밑에를 아무렇지도 않아하고 저 혼자 가설랑은 모기야 빈대 벼룩 안 뜯기고 편안한 잠자리를 한다. 드디어 큰 물의가 일어나고, 동네 사람들은 영 아주 혀를 홰애홰 내저으면서, 그 놈 말 못할 놈이라고 지긋지긋하게 흉한 놈이라고, 정자나무의 ‘지킴’이나 천년 묵은 구렁이도 사람 궂힌 놈은 알아보는 것이라고, 절절히 관수가 천하 무서운 놈인 것으로 치지를 해버렸다.
 
136
그러나 이상한 것은, 관수가 그렇듯 흉하고 말못할 ‘무서운 놈’이게 되면 웅당히 흉하고 말도 못할 무서운 행악을 했을 것이요, 따라서 동네와 동네 사람은 그 해를 입었어야 할 것이었었다. 한데 관수는, 저 정자나무가 실상은 한번도 동티를 내어 동네 누구를 병을 주어서 죽게 하거나, 천년 묵은 구렁이가 쫓아나와서 사람을 물어 죽이거나 한 적이 통히 없듯이 관수도 여태까지 조그마한 행패도 부리는 법이 없었다. 하건만 그 기수를 채어, 거참 모를 일이라고 고개라도 한번 깨웃해 보는 사람은 생겨나지도 않았고, 언제까지도 관수는 그대로 흉한 놈이고 무서운 놈일 따름이었었다.
 
137
한두 번이 아니요 하루 이틀이 아니니 동네에서 온통 그렇게 저를 기하고 흉한 놈으로 돌려놓는 줄을 관순들 눈치 채지 못했을 이치가 없지만, 그는 이이상이다.
 
138
다만 그의 부모가, 아무려나 소중한 자식이요 죽었다가 살아온 걸로 여기는 터인데, 막상 그렇듯 모진 처접과 괄시를 받는 것이 싫고 애가 쓰여 그러지 말고 동네 사람들과 잘 좀 열려 지내라고 타이르곤 한다.
 
139
그럴라치면 관수는 으례껏 콧방귀를 뀌면서 돼지와 개를 빗대놓고 동네 사람들을 빈정거려 준다.
 
140
돼지는 평생 꿀꿀 소리밖에는 못 지르는데, 그게 고작, 배가 고프니 밥을 달란 소리요, 그나마 밥은 왜 먹느냐 하면 살이 져서 사람의 고깃감이 되자는 것이지 아무것도 아니요……
 
141
개는 컹컹 짖을 줄밖에 모르는데, 그건 사람의 턱찌꺼기를 얻어먹는 값으로 도둑을 지켜주자는 밥값이요…… 한데 그놈이 더러는 멀쩡한 사람을 도둑놈이라고 짖는 수도 있고……
 
142
그런 것을 사람이, 아아니 여봐라 나는 도둑놈이 아닐다고 개와 마주 짖어서야 애멈을 면하려다가 이번에는 개가 되어버릴 것이 아니냐!
 
143
촌 농투성이들이란 하릴없이 죽어 바치기 위해서 먹는 밥밖에 모르는 돼지가 아니면 성한 사람을 도둑이라고 짖는 개요 별수가 없는 것, 그걸 입 아프게 탄할 게 없는 것이다.
 
144
이것이 관수가 열한 해 만에 동네 사람들한테 가져다 준 선사다.
 
145
개돼지의 처접을 탔다는 소문이 퍼지자, 동네 사람들은 투울툴하면서 발칙한 놈이라고 분개를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무서운 놈’의 무서운 짓이 무서워서, 일변 그의 언변을 능히 당해낼 장사가 없을 것 같아서, 제네들끼리만, 그놈 사람 궂히고 전중이 산 놈이 무슨 소리는 못할라더냐고,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우니까 피하는 체, 맞대고는 시비를 하려고 하지 않고, 속으로만 저마다 갈고리를 잔뜩 찼다.
 
 
146
갑쇠는 섬뻑 달라졌던 기색을 고쳐 흔연한 낯으로 관수를 올려다보면서 고기 잡으러 가느냐고, 인사삼아 묻는다. 동네 사람 그들은 속은 다그러해서 상극이면서도, 마치 동티가 날까 봐 정자나무를 흔연 대접하듯이, 관수한테도 딱 마주치면 할 수 없이 혼감스럽게 하기를 잊지 않는다.
 
147
관수는, 그렇다고 심상하게 대답하면서 함지박을 넣어 어깨에 걸멘 구력과 또 한 손에 들고 온 팽이를 놓고 휘이 더워한다.
 
148
“……하두 보리꽁퉁이 허구 된장덩이만 먹으닝개루 소징이 나서 원…… 작은 갯바닥에 물이 어떤지……”
 
149
“요새 붕어, 그놈 잡어다가 잘 죌여서 먹으면 괜찮지.”
 
150
“너는 거 참, 오래 고생허는구나 !”
 
151
관수는 밀짚기직 한옆으로 주저앉으면서 갑쇠의 살앓이 앓는 너벅다리를 들려다본다.
 
152
“응, 괜시리 그놈의 것 때민에 ! …… 재수가 없을라닝개루……”
 
153
둘이는 말거리가 없어 잠잠하다. 정자나무에서 실매미 소리가 새삼스럽다.
 
154
갑쇠는 보는 데 없이 앞을 내다보고 관수도 불볕 내리쬐는 들판을 건너 봇둑이 바라다보고 있다.
 
155
풍년의 징조로 탐스럽게 벼가 자란 이 들판도 관수에게는 아무 흥도 나지 않는다. 다른 농군들처럼, 제 것이 벼 한 톨 없어도 잘된 곡식이며 풍년 든 들을 보면 어떤 싱싱한 생명이 뛰노는 것만 같아 내력 없는 만족이 솟아오르는 그것을, 관수는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156
그는 차라리 이 들판이 졸립게시리 단조롭고 싫증이 날 따름이다.
 
157
그리고……
 
158
생각하면서 관수는 무심결에 갑쇠의 얼굴을 힐끔 돌려다본다.
 
159
그리고, 이 살아 있되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은 우둔한 얼굴, 저기 시방 논 가운데 들어서서 끙끙 김을 매고 있는 농군, 김가 이가, 계집 사내, 늙은이 젊은이, 모두 저 들판같이 단조하여 생명의 탄력과 긴장이 없고 색채가 없고, 이 정자나무같이 십 년 백 년을 가야 낡아빠진 채 태고(太古)의 꿈속에서 어릿거리고 있고, 그러면서 쓰잘데없이 음충스럽기나 하고……
 
160
관수는 가래침을 태액 뱉으면서, 모두 보기가 싫고 싫증이 나니, 어서 하루바삐 이 고장을 떠나야 하겠다고 생각을 맺는다.
 
161
나란히 앉아 있는 갑쇠는 갑쇠대로 생각이 다르다.
 
162
그는 심상한 체 이야기도 하고 낯꽃도 천연덕스럽기는 하지만, 관수와 이렇게 단풀이서 호젓이 앉아 있기가, (이러한 계제가 실상은 별반 없었고 오늘 비로소 처음인데) 마음이 편안하지를 않고 자꾸만 거북해 견딜 수가 없다.
 
163
벌써 세 번째나 힐끔힐끔 관수의 옆얼굴을 돌려다본다. 보지 않고 있느라면 부쩍부쩍 제게로 덮어누르고, 덤벼드는 것만 같고, 그래 이놈의 자식을 어디가 아스라지게 한번 칵 질러주고서 벌떡 일어설까 보다고, 다뿍 벼르면서 돌려다보는 것인데, 보면 관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만 있다.
 
164
왜 내가 제까짓 자식을 무서워한단 말이냐고 짜증스럽게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연신 저를 탓을 해도 종시 소용이 없다.
 
165
아무리 해도 이놈의 자식을 뼈가 노골노골하도록 실컷 두들겨주어야 마음이 후련할 것 같다.
 
166
근력은 내가 세니까 다리 아픈 것만 낫거들랑, 이놈의 자식을 어쨌든지 동동 들어서 굳은 땅바닥에다가 태질을 쳐주고 칵칵 제겨주고 다리 팔을 냅다 배틀어주고, 그래 ×을 질질 싸면서 그저 살려줍시사 제발 살려줍시사고, 개개 빌어…… 옳지, 을녜도 다시는 그저 손을 안 대겠읍니다고 항복을 하렷다. 그러거들라면 잼쳐 한바탕, 을녜 모가치로 늑신 두들겨주고 그러고 나서 발길로 콱 차던져, 엉금엉금 기어 달아나, 뒤통수에다가 침을 태액 뱉어주어……
 
167
……하기만 했으면 삼년 묵은 체중 내리듯이 꺼림한 속이 쑥 내려가겠는데, 기운은 나보다 못 세어도 놈이 사람을 궂히기 전중이까지 산 놈이라, 악지가 여간이 아닐걸 ? …… 잘못 섣불리 싸움을 걸다가 괜히 칼이라도 들고 달려들어서 푹푹 찌르는 날이면 이히! 큰일이지…… 에잇 흉한 놈! 에잇 사뭇 희광이 같은 놈! 능구렁이 같은 놈! ……
 
168
그래…… 제까짓 자식을 탄해서는 무얼 하나? 내버려 두면 고만이지. 제까짓 자식이 암만 그래야 타관으로 떠돌아다니던 놈, 사람 궂히고서 전중이나 살고 나온 놈……
 
169
나는 농사가 저렇게 쏟아지도록 잘 됐으니까 그게 제일이지. 이 싱싱한 들판이 우리 세상이요. 우리가 주인인걸, 제 따위 자식이 천하 뿔을 빼는 놈이면 어때 ? 백년 가야 우리 같은 재미는 얻어 천신도 못할 놈인걸.
 
170
“휘유우 날도 극성으루 더웁기두 허다!”
 
171
소리에 놀라, 둘이 한꺼번에 돌려다보니, 갑쇠 모친이 한되들이 유리병에다가 부우면 막걸리를 한 병, 또 한 손에다가는 주발 두 개를 포개들고 봉분으로 올라선다. 일꾼들한테 내오는 새참이다.
 
172
안녕허세요? 오오냐, 관수냐? 이런 지낼 인사를 서로가람 하는데, 갑쇠는 논으로 대고, 일꾼들더러, 나와서 목이나 좀 축이라고 소리를 친다.
 
173
대답 대신, 모포기 속에서 일꾼들이 우뚝우뚝 웃도리를 펴면서, 날쌔게 벌써 논물에다가 흔들어 씻은 손을 해가지고 논두덕으로 처억척 나온다. 시늉만 낸 등거리와 세코잠방이가 방금 물에서 건진 양 땀에 젖어 몸뚱이에 착 달라붙었다.
 
174
다리가 정강이까지 모두 개흙에 빠져, 그놈이, 위께는 부우옇게 말라 딱지가 일고 아래께는 잘라 신은 고무장화 모양이다.
 
175
“에헤, 날두 원…… 쏘나기 한줄금 히였으면 곡식한티두 좋구 사람한티두 조련만……”
 
176
귀머거리 오서방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면서 앞장을 서고 뒤에 오복이와 곰보 최서방이 따라 봉분으로 올라온다.
 
177
일꾼들과 갑쇠 모친 및 관수 사이에 안녕하냐는 둥 수고한다는 둥 농사가 잘 돼서 기쁘겠다는 둥, 얼기설기 수인사가 오락가락하면서 술 한 병에 보리고추장에다가 날마늘을 곁들인 안주를 중심으로 비잉 둘러앉는다. 갑쇠 모친은 여편네라서 짐짓 뒤 곁으로, 그리고 관수는 객군이라서 한옆으로 비껴 앉고.
 
178
관수는 이런, 들에서 먹는 음식머리의 인심에 후해, 옆에 있던 객군은 말고 지나가는 행인이라도 불러서 먹이고 자청해서도 얻어먹고 하는 법이라, 시방 제한테도 막거리를 한 사발 권할 줄을 안다.
 
179
그러나 그것이 혼연한 마음이 아니고, 인심이 풍도만 아니더라면 모른 체 저희끼리만 먹고 말 것을 마지못해 (그러니까) 눈치엣 음식으로 한 사발 주는 게 빠안한 속이다.
 
180
그런 것을 멀거니 앉아 얻어먹다니, 구역질이 지레 날 노릇이지만, 그러나 관수는 술을 통히 먹지 못하기 때문에, 행여라도 얻어먹고 싶어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게 아닌 것이 스스로 마음 편안했다.
 
181
아니나다를까, 오복이는 위정 숙이고 있던 얼굴을 관수가 안 보게시리 들고서, 갑쇠더러 연신 눈짓을 하는 것이, 저 자식은 왜 썩 없어지진 않골랑 흥! 한잔 얻어 든질르고 싶어서…… 이런 눈치가 완구하다. 최서방과 오서방은 그래도 나이깨나 든 값으로 푸욱 삭은 내기들이라, 아무리 마땅찮은 관수겔망정 이왕 주는 음식에 야속스럽게 눈치를 할 며리가 있을까 보냐고, 그래서 안색이 아무렇지도 않다.
 
182
갑쇠 모친은 일꾼 셋에 한 사람 앞에 꼭 두 주발씩 요량을 해 내온 것인데, 객군이 하나 있으니 일꾼 몫이 축이 나겠어서 걱정.
 
183
갑쇠는 × 누워서 개 좋은 일 시킨다는 푼수로, 미운 녀석이니 내 것을 척, 막걸리 한 사발일값에 먹이는 게 되레 놈을 기를 꺾는 것이라서 시방 마음이 흐뭇하고, 그러한 표적이 얼굴에 은근히 나타나기까지 하면서, 갑쇠는 주발에다가 넘실넘실 술을 따르고 있다.
 
184
첫잔은 나이 차례로 최서방이. 최서방은 막걸리 주발을 받아, 이놈이 질름질름 흘릴까 봐, 턱을 쑤욱 빼어다가 입을 대고는 벌컥벌컥, 한동안 벌컥벌컥, 숨도 안 쉬고 주욱 들이마신다. 마시고는 막걸리가 부우옇게 묻은 수염과 입술을 손등으로 쏙 씻고서, 마늘 한 개를 고추장에 꾹 찍어 워석워석, 거 술맛 해롭지 않다고, 갑쇠 모친을 돌려다본다. 노상 받아오는 그 집 술이지야고, 갑쇠 모친은 돌아앉은 채 대껄을 한다.
 
185
다음은 오서방이 술을 받아 역시 최서방 본으로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안주를 씹고…… 씹는데 다른 것은 광대뼈가 불끈불끈 비어지고.
 
186
그 다음은 오복이가 술잔을 받아가지고, 연상을 앞이라서 고개를 돌리는 체하면서 주욱 들이마신다.
 
187
한 주발씩 막걸리거니 하면 그저 그만이겠지만, 제마다 한 주발씩 그 놈을 들이켜고 나서는 그 입맛을 회회 감겨하는 것이며 전신에서 솟아나는 든든해하는 얼굴이며가, 세상에는 이(그다지 상품도 실상 못되는) 한 주발의 막걸리의 미각을 덮어먹을 자가 없을 성부르다.
 
188
오복이가 갑쇠를 부어 주려고, 마시고 난 주발을 손에든 채 술병을 집으러 오는 것은 갑쇠가 가만 있으라면서 다시 한 사발을 부어 들고 관수를 청한다.
 
189
“나? ……”
 
190
관수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흔든다.
 
191
“……나 술 못 먹어.”
 
192
“그리두 목 마른디 한잔 히여!”
 
193
“입에두 못 댄다닝개루……”
 
194
“새양 말구 한잔 허지 그러냐?”
 
195
최서방도 권을 한다. 그러나 관수는 종시 못 먹는다면서 마늘이나 하나 먹지, 하고 한 개 집어 고추장에 찍어다가 씹어 먹는다.
 
196
“요새 젊은 사람 치구는 신통두 허다!”
 
197
갑쇠 모친이 관수를 칭찬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건 술 안 먹는 칭찬이 아니라, 술도 안 먹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도 다 그렇단 말이냐는 뜻으로 말한 데 지나지 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여자답게, 애석해하는 말로 좋게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고……
 
198
갑쇠는 다시금 씨름에 넘어박힌 것 같아 속으로 앙앙하나 할 수 없고, 부은 술을 최서방에게로 돌린다. 그러나 오복이는 한 모금이라도 제 몫이 축나지 않아서 좋아한다.
 
199
오복이가 술병을 차지하고 우선 한 주발 부어서 갑쇠 모친더러 먹으라고 하니까, 자아(저애)는 잡성스런 소리도 다 한다고 눈을 흘긴다. 그 놈을 갑쇠를 주니까는 당겨는 하면서도 손을 내젓고, 갑쇠 모친은, 살앓이 앓는데, 큰일난다고 사뭇 방색이다.
 
200
오서방이 한 사발을 더 먹고 마지막 오복이에게서 술을 마침맞게 끝이 났다.
 
201
갑쇠 모친은 병과 주발들을 걷어가지고 돌아가고, 일꾼들은 제가끔 곰방대에 담배를 피워 문다. 셋이 다 천하에 아무것도 더 부러운 것도 생각도 없다는 듯 만족한 기운이다.
 
202
최서방이 앉았던 자리에 버얼떡 드러눕는데, 오서방은 무릎을 깍지끼고 앉았다가 문득, 아 요새, 싸움은 어떻게 됐다냐고 들띄어놓고 묻는다.
 
203
“청국 군사가 수우수만 명 죽었대요.”
 
204
오복이의 대꾸다.
 
205
“청국 군사는 앞으로 총소리가 난다치면 ×이 빠지게 도망간다면서? 그런디 죽어?”
 
206
이건 최서방의 우스개 섞은 반박이다. 그러다가 그는, 오옳지, 총알은 뒤로 맞아두 죽으니까, 하고 제 말에 제가 토를 단다.
 
207
이렇게 이야기 시초가 잡혀가지고는, 아뭏든지 순사가 들으면 유언비어로 취체를 하려다가 허리를 잡을 만큼 별별 괴상한 소리가 다 나온다.
 
208
그런데 참 장개석이가 조선 사람이라지? 하니까, 응 바로 연전까지도 서울 종로서 대장간을 하던 장(張)서방이라는 둥, 그리고……
 
209
관수는 듣고 앉았다 못해 일어서서 이리저리 서성거린다.
 
210
이왕 나온 길이니 품개질이나 해서 저녁반찬거리라도 좀 장만할까, 그러나 사정없이 내리쬐는 불볕을 내다보면 기가 딱 질린다.
 
211
어쩔까 하고 망설이는데, 마침 천년 묵은 구렁이가 나온다는 정자나무의 그 구멍이 눈에 뜨인다.
 
212
그새 두고 보아야 구렁이는커녕 지렁이 새끼 한 마리도 나온 적이 없고, 또 나올 리도 없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하도 귀에 전 소리라, 밤저녁으로 그 밑에서 호젓이 잘 때면 노상 섬찍하지 않은 것은 아니요, 개구리가 뛰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던 잠결에 퍼뜩 놀란 적도 한두 번 있기는 있었다.
 
213
에라, 기왕 생각이 난 길이니, 빌어먹을 것, 올라가서 저놈의 구멍을 뚜드려 막아버릴까 보다고, 봉분 바닥 여기저기 굴러 있는 돌멩이를 물색해 본다.
 
214
마침 그러자, 나무 꼭대기에서 갑자기, 끼약깍 끼약깍, 형체는 잎에 가려 안 보여도, 까치 떼가 요란스럽게 우짖어대기 시작한다.
 
215
신판 삼국지(新版三國志)에 정신이 팔렸던 일꾼들이 경풍을 하게 놀라서 일제히 정자나무의 그 구멍으로 눈이 쏠린다. 여름 까치가 흔히 구렁이를 만날라치면 새끼 샘에 여러 마리가, 한데 모여들어 사납게 우짖는 수가 있는데, 일꾼들이 놀람도 그러니까 근리하기는 하다.
 
216
“시방두 저 구멍에서 그 구렁이가 나오구 허는가?”
 
217
관수는 그들의 그런 속을 얼른 알아채고는 짐짓 빈들빈들 웃으면서, 뉘게라 없이 대고 뭇는다.
 
218
“아, 자아는(저애는)! ……”
 
219
최서방이, 관수의 말이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버럭 지천이다. 여느때 이기죽거리고 농담 잘하던, 그와는 딴 사람이 되어가지고서……
 
220
“……그건 무슨 소리라구 지망지망!”
 
221
“원, 구렁이가 그렇게 겁이 나서 어떻게 살아요!”
 
222
“점점!”
 
223
최서방은 골을 내가지고 혀를 끌끌 차면서 외면을 한다.
 
224
오서방은 까치 지저귀는 데만 놀라서, 이내 그대로 놀라가지고 있지. 무슨 소린지 뚜렛뚜렛하고, 오복이가 부쩍, 아아니 그래서, 시방두 나온단다, 나오는데 네가 어쩔 테냐고 성구고 나선다.
 
225
“그렇다면 저 구먹을 틀어막지? 못 나오게시니……”
 
226
“흥! 누구는 그런 꾀가 없어서 못 막었까디?”
 
227
갑쇠가 밉살스러라고, 저희끼리 하는 말처럼 빈정거린다.
 
228
“아, 야아덜아 ! 왜 늬이덜까장 나서서 시방 이러냐? 웅?”
 
229
최서방이 다시 성화를 낸다, 그 소리가 요란히 커서, 그제서야 오서방은 무어 말썽이 생기는 줄 알고 어째서? 왜? 하면서 파고든다.
 
230
“어디, 내가 동투(동티)를 만날 셈 치구서, 올라가서 틀어막으까?”
 
231
관수는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면서, 구멍 겨냥을 눈짐작하느라고 연신 올려다보고 내려다보고 한다.
 
232
“야아, 그 까지 뱃바닥 같은 소리 그만 히라, 액색헌 꼴 보기 싫다.”
 
233
오복이가 제딴에 충동이를 노는 속이다.
 
234
“동투를 마질 테닝개 말이지……? 음……”
 
235
관수는 종시 혼자 중얼거리면서 구멍을 올려다보고 섰다가, 이윽고 오복이게로 고개만 돌린다.
 
236
“만약…… 동투를 안 맞으면? 구먹은 시방 내가 쳐막을 테니……”
 
237
“용허다구, 할아버지! 허구, 절을 백 번만 허마.”
 
238
“옳아! 음…… 그러구…… 그러구 또 동투를 맞으면?”
 
239
“말헐 것 없지, 너는 벌써 공동묘지(共同墓地)루 이사를 가버렸을 테닝개…… 설마 죽은 사람더러 내기 시행을 허라구 졸를라더냐?”
 
240
“딴은! ……”
 
241
관수는 한 번 더 구멍을 올려다보다가 함지를 담았던 구력을 비어가지고 와서, 미리 안표를 해둔 갸름한 돌을 집어넣고 또 한 개 큼직한 놈을 집어넣고 어깨가 가사 메듯 겉메고는, 정자나무 밑으로 척척 걸어가더니 밑에서 부터 꼬느듯 쓰윽 구멍께까지 천천히 올려다본다.
 
242
최서방은, 인제는 보기도 싫다는 듯이 돌아앉아서 담배만 삑삑 빨아 푸우푸우 연기를 내뿜는다. 오서방은 관수가 들을 구럭에 담아 메고 정자나무 밑에 가 딱 버티고 설 때에야 비로소 내평을 알아차리고서는 사뭇 눈이 휘둥그래, 잡히는 대로 옆에 있는 오복이의 팔을 잡아 흔들면서 저애가 어쩌자고 저런다냐 ? 응, 응, 어쩌자고 응, 응, 목안엣 소리로 들이 황망해한다.
 
243
갑쇠와 오복이는 인제는 비웃는 낯꽃이 아니라, 차츰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해서 기색이 달라간다.
 
244
그러면서 그들은, 최서방이나 오서방도 다같이, 나는 아무 죄는 없거니, 또 여차직하면 후덕덕 뛰어 달아나려니 하고, 마음과 몸뚱이를 다뿍 긴장시켜 되사려두기를 잊지 않는다.
 
245
참개구리가 나뭇가지에 붙듯이, 관수는 두 팔을 벌려 나무를 안고 오그린 다리로 발바닥에 힘을 주어 차악 달라붙어서는 촐싹촐싹 올라가기 시작한다. 나무가 저편짝으로 약간 비스듬히 누웠기 때문에 오르기에 수나로운 편이다.
 
246
관수는 실상 어른이 애들을 데리고 내기를 하는 것 같아 좀 쑥스런 무엇이 없진 않지만, 그 애들을 놀려주기가 실없이 재미도 나고, 일변 동네 사람들이 제한테서 받는 그 무형의 압기를 한 거풀 더 씌워, 좀더 무서워하라는 짖궂은 심술도 부려주고 싶고 했던 것이다.
 
247
두 다리와 발바닥에 힘을 주어 조촘 몸을 올리고서는 두 팔로 차악 안고, 이어 또 다리와 발바닥에 힘을 주어 조촘 몸을 올리고는 두 팔로 차악 안고, 몇번 그러는 동안에 중동께까지 올라갔다.
 
248
오복이며 갑쇠는 방금 관수가 사지를 바르르 떨고 굴러떨어지려니, 금새 구멍에서 그 천년 묵은 끝이 몽땅하고 전봇대만한 구렁이가 푹 솟아 늘럼늘럼, 관수의 목줄띠를 물고 친친 감으려니만 하고, 잔뜩 시방 목을 늘리어, 아슬아슬하게 올려다보고 있다. 오서방은 차마 못 보아 눈을 감으려다가는 궁금해서 도로 떠보고 도로 떠보고 한다. 어느곁에 최서방도 고개를 돌려, 담배 빨기도 잊고 입을 벌린 채 올려다보다가 침을 흘려버린다.
 
249
관수는 중동에서 잠깐 쉬더니, 땀이 듬씬 밴 등어리가 다시 움직인다.
 
250
동네 앞으로 여편네들이 중긋중긋 나서고 어린애들이 달려온다.
 
251
관수는 마침내 다 올라가서, 세 가장귀 틈에 처억 박혀 앉더니, 후유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구멍을 바싹 대고 들여다본다.
 
252
밑에서, 오서방은(오복이의 팔을 여태 쥐고 있는) 손이 바르르 떨리고 최서방은 차마 고개를 돌려버린다.
 
253
까치 떼는 벌써 날아갔고, 조용한 채 정자나무에서는 실매미도 울지 않는다.
 
254
꼴깍 소리는 눈에 겁이 걸린 오복이가 침을 삼킨 것이고, 관수는 입술이 해쓱하다. 둘이는 다급하다 못해 시방 저도 모르게 관수가 제발 무사하기를 바란다.
 
255
“아, 저게 어떤 놈이냐, 으응? ……”
 
256
동네서 들리는 고함 소리에 모두들 고개를 돌린다. 박첨지가 굽은 허리를 꺼업죽껍죽 지팡이를 짚으면서 소리소리 외치고 쫓아오던 것이다.
 
257
“너 이놈! 어떤 놈이냐 이놈…… 아 이놈 썩 내려오지 못허느냐? 이놈.”
 
258
관수는 피쓱 웃고는, 이어 본숭만숭 어깨에 걸멘 구럭에서 작은 돌을 꺼내가지고 구멍에다가 칵 처박는다. 돌은 한편 끝만 물리고 오똑 서고, 그놈을 이번에는 큰 돌을 꺼내어 두 손으로 쾅쾅 두드려 박는다.
 
259
치는 대로 돌가루가 푸슬푸슬 떨어져 내리면서 돌을 빠듯이 박혀 들어간다.
 
260
아이들이 연달아 모여들어, 제마다 눈이 휘둥그래가지고, 그러나 천하 신기한 이 구경을 재미있어 한다.
 
261
박첨지는 연신 고함을 치면서 거진거진 당도해오고, 관수는 돌이 반이나 박히자 손에 돌을 아래로 내려뜨리고서 올라간 때처럼 나무를 안고 내려온다.
 
262
갑쇠 이하 모두 한숨을 몰아 내쉰다.
 
263
술술 미끄러져 내려오니까, 올라가기보다는 훨씬 수월하고, 다 내려와서 마악 돌아서려는 참인데, 겨우 씨근버근 달려든 박첨지가 짚고 온 지팡이로, 네 이놈! 하면서 관수의 볼기짝을 따악 갈긴다.
 
264
관수는, 아이구 아얏! 하면서 깡총 뛰어 돌려다보고 빈들빈들 웃다가 박첨지가 재차 지팡이를 둘러메니까, 저편으로 겅중겅중 뛰어 달아난다. 구경하던 아이들이 재그르르 웃는다.
 
265
박첨지는 죽자꾸나, 이놈 이 못된 놈 그 나무가 어떤 나무라구, 가지 하나만 손을 대어도 동티가 나는데, 네놈은 뒤어져도 상관 없지만, 동네까지 그 앙화가 미치면 어떻게 하라느냐고, 욕에 꾸중에 왜장을 치면서 관수를 쫓아 다닌다.
 
266
관수는 피하기가 성가시어, 구럭이야 함지야 쾡이를 걷어 들고, 논틀로 해서 봇둑께로 도망질을 친다.
 
267
나무를 채 다 올라가지도 못해서 동티를 맞아 사지가 오그라져 가지고 굴러떨어지든지, 천년 묵은 구렁이한테 물려 직사를 하든지 하려니만 했던 관수가, 터럭 한낱 까딱도 않고 저렇게 멀쩡해서 뛰어가는 것을, 넋이 나간 듯 벙벙해 바라보고 않았던 갑쇠며 일꾼들은, 그가 무사했을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은 어디로 가고 빗나간 기대에 실망을 느끼는 한편 인제 생각하니 매우 소중한 것인데, 제네들의 ‘지킴’이야 동티야 천년 묵은 구렁이야 하는 정자나무에 대하여 지녔던 자랑스런 믿음(그것은 적실히 믿음이다) 그 믿음이 하루 아침에 침노를 받자, 그만 저기 어디 썩은 울타리 쓰러지듯 아무것도 아닌 게 뻐언하니 드러나고만 것이 허망하기 이를 데가 없고, 나아가서는 그것이 원통하고 분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뭘, 사람을 궂히고서 삼 년이나 전중이를 산 흉한한 놈이니, 그렇기도 할 테지야고, 그새까지보다도 관수를 더 지독한 놈으로 모든 것으로써 앙갚음과 위로를 삼았다.
 
268
박첨지는 분이 풀리지 않아 여지껏 발을 구르면서, 저 어디 가서 뒤져 먹던 놈의 자식이, 동네 계집애 발이나 내주기, 번들번들 처먹고 놀면서 할 일이 없으니까 시키잖는 지랄이나 하고, 아 저놈의 자식을 당장 지경 밖으로 쫓아내든지 다리뼈를 부질러 앉히든지 해야지, 저놈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동네가 온통 소가 되고 말 테니, 이 노릇을 어찌한단 말이냐고 고래고래 악을 쓰고 섰다.
 
269
그 말에 갑쇠는 퍼뜩 무슨 생각 하나가 돌면서 오복이게로 눈짓을 한다. 오복이도 꼭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얼굴로, 마주 눈짓을 한다. 둘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
 
270
‘개가 여러 마리면 호랑이도 잡는다’ 이런 생각이 그 끝에 연달아 우러나면서 갑쇠는 다시금 고개를 혼자 끄덕거린다.
 
271
바로 그날 저녁이다.
 
272
관수는 시원하고 모기며 물것이 없어 십상인 정자나무 밑을 독차지하고 밀짚기직을 자리삼아, 베개는 돌멩이라도 이따가 이슬이 맞지 않게시리 덮을 좁쌀부대의 덮개까지 옆에 놓고서 번듯이 누워 있다.
 
273
밤은 초저녁은 지났어도 깊자면 아직은 멀었다. 백중 가까운 초열흘 달이 진작 중천에 뜨기는 했지만, 오락가락하는 구름 사이를 들고 나고 하느라고 들판이 어두웠다 밝았다 한다.
 
274
동네서는 달이 비칠 때면 아렷이 모깃불 지핀 연기만 오를 뿐, 잠들이 들어 교교하다.
 
275
관수는 어둔 속이라 보이지는 않으나, 아까 낮에 구멍을 틀어막은 돌이 그대로 박혀 있으려니 하여, 거기께를 올려다보면서, 그러자 박첨지의 성화하던 일이 생각나서 혼자 싱그레 웃는다.
 
276
바람이 지나가노라, 솨아 벼잎 갈리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멀리서 서툰 퉁소 소리가 들판을 건너 들려온다.
 
277
분명 을녜네 원두막에서 불거니 하고 생각하니, 오늘 저녁에 정녕코 그가 찾아올 듯싶다.
 
278
어제 낮에 잠깐 만났을 때 저녁에 저 혼자서 원두막에 있을께시니, 부디 오라고 두 번 세 번 당부를 했고, 꼭 가마고 대답까지 하고서도 가지를 않았었다. 그래 아까 석양때 우물 옆을 지나느라니까 여럿이 있는데라 말은 못하고, 남몰래 눈만 흘기는 양이 어디 이따가 보자는 그 뜻인 게 역력했었다. 그랬으니까 누가 잡아서 묶어라도 놓기 전에는(하루만 못 만나도 애가 잦아 안달이 나는 그애겠다) 보나 안 보나 오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279
아니나다를까, 구름에 가렸던 달이 훤해지면서 동네께를 내다보자니까, 이리로 향해 걸어오는 검은 그림자가 갈데없는 을녜다.
 
280
정이라는게 게 무엇인지, 저렇게도 계집아이가 남의 구설 어려운 줄 모르고 밤을 낮도와, 제 그린 사람을 만나보려 허덕지덕 애가 밭아 찾아다니고 하는가 하면, 관수는 다시금 을녜가 딱하고 불쌍했다.
 
281
일이 애당초에, 관수는 생각도 의사도 없는 것을 을녜 제가, 마치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나풋 옮아앉듯, 오복이에게서 저게로 날아들어 온 것이니 누가 무어라고 하더라도 꼬이다니 괜한 말이요, 떳떳이 발명할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고저러고 간에 남의 시비가 결리는 게 아니라 저편은 그다지도 정이 있어하고 따르고 하는 것을 이편은 저쪽이 흡족해할 만큼은 정이 가지를 않으니, 첫째 그것이 민망한 노릇이다.
 
282
그러나마 두 사람의 정이 층은 질값에 그런 대로 뒤끝이 맺혀진다면, 가령 을녜가 맨처음 갑쇠에게 마음이 있었다가 그의 둔하고 알심 없는 주변머리에 암상이 나서 폴짝 오복이게로 뛰어가듯이, 또 막상 다들리고 보니 소갈머리 없고 싱거운 오복이가 질증이 났는데, 마침 독하다 할이만큼 속빛깔이 진해 보이는 관수가 나타나니까 뒤도 안 돌아다보고 달려를 오고 하듯이, 그리 하듯이 이번에는 관수의 그렇듯 좀처럼 끓지 않는 정에 그만 준이라도 나가지고, 제풀에 달리 색다른 꽃으로 날아가기를 한다든지, 혹은 둘이서 귀영머리를 마주 풀고 아무렇게나 가시버시가 되어, 자식새끼나 낳고 농사나 지어가면서 그럭저럭 살아를 버린다든지 좌우간 어떻게든지 뒷갈무리가 된다며는 관수는 오히려 마음의 짐이 덜릴 수가 있을 성싶었다.
 
283
그런 것을 관수는, 을녜 제가 흡족해하도록 정도 주지 못했으면서 그거나마 중동을 무질러버리고서 며칠 사이로 이 고장을 훌쩍 떠나게 되었으니, 생각하면 그런 박절할 도리라고는 없다.
 
284
관수는 그래 요새로 들어 을녜를 만나는 것이, 처음 아무것도 전후사 헤아림 없이 만나 놀곤 하던 적만큼이나마도 그거나마 흥이 일지가 않고, 해서 간밤에도 서로 정했던 언약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285
가빠하는 숨소리라도 들릴 듯 허둥지둥, 게다가 치마폭에 무엇인지 묵직하게 꾸려잡고서 봉분으로 올라선 을녜는 잠깐만에 어둠 속에 눈이 익자, 주르르 조금도 서슴지 않고 관수가 누웠는 옆에 와서 펄씬 주저앉는다.
 
286
치마폭에서 익은 냄새가 물큰 풍기는 참외가 데굴데굴 굴러나온다.
 
287
“아이, 숨가뻐라! 어떻게 마꾸 두달음질을 쳤는지……”
 
288
어둠 속으로 희엿한 을녜의 얼굴을, 역시 탐탁은 해서 보고 누웠던 관수는 푸스스 일어나 앉아, 참외를 한 개 집어든다.
 
289
“아까 밭에서 갖구 와서, 이놈 세 개, 제일 잘 익은 놈으루만 골라뒀지, 해.”
 
290
“으응, 고맙다!”
 
291
관수는 참외를 무뜩 베어 물고 워석워석 씹는다.
 
292
“달어?”
 
293
“응, 아아주……”
 
294
잠깐 말이 그치고, 관수의 참외 씹는 소리만 서걱서걱 유난히 높다. 을녜는 어둠침침은 해도 윤곽만이나마 관수의 맛있게 먹는 양을, 흡족해서 말끄러미 들여다본다.
 
295
“동네서는 글씨, 인제 그 녀석이 동투가 나서 급살을 맞어 죽을 것이라구 야아단이 났구만!”
 
296
을녜는 정자나무께를 올려다본다.
 
297
“으응!”
 
298
“그리두 나는 좋아. 그새는 금방 무엇이 나오는 상부르구 무섭더니……”
 
299
“너는 하나 안 먹냐?”
 
300
“나는 실컷 먹었어. 아까 막에 가서두 먹구, 아이 참! ……”
 
301
말을 하다가 비로소 간밤의 노염이 생각이 나서 관수의 너벅다리를 와락 (꼬집어 주려고 손을 뻗치기는 했으나, 그냥 누르고) 흔들기만 한다.
 
302
“어제 저녁에 밤새두룩 지대리게 허구서 안 오구!”
 
303
“응, 참! 깜빡 잊었어! 집에서 저녁 숟갈을 띠던 멀루 쓰러진 것이, 그만……”
 
304
을례는 추렷하고 더 푸념을 하지 않는다. 관수는 두 개째 참외를 집는다.
 
305
“그리서, 혼자 무서워서 혼났겄구나?”
 
306
“무선 건 둘째루, 괜시리 사람……”
 
307
목소리가 가무러지면서 고개를 떨어뜨린다. 자지러진 한숨, 그리고 이윽고 있다가 다시 혼잣말로 뇌사리듯……
 
308
“며칠 안 있으먼 타관으루 떠난다먼서 그새 동안이라두, 좀……”
 
309
관수는 발명할 말도 다독거릴 말도 없고, 달던 참외가 맛이 없어진다.
 
310
벼잎이 바람에 솨아 흔들린다. 한동안 그쳤던 퉁소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311
관수는 문득 생각이다. 세상 말괄량이요, 잘 웃고 잘 놀던 동네 덜머리진 총각이라도 비위만 틀리면 상관없이 대들어 싸움을 하고 콧대 세고 그래서, 나이 열여덟 살이나 먹었건만, 저의 부모가 하루 걸러큼씩 매질을 하고, 그래도 종시 일반으로 기승스럽고 당돌하고 한 이 계집애가 어쩌면 정이라는 것에 얽혀매어서는 이다지도 지기를 펴지 못하고 풀이 죽는고?
 
312
세상에 정이라는 것같이 무서운 고삐는 없는 것이구나 했다.
 
313
“을녜야?”
 
314
관수는 두 개째 참외 먹던 것을 마치고서 몸을 바로 앉는다.
 
315
을녜는 대답 대신 고개만 쳐든다.
 
316
“인제는 그러지 말구서 맘 잡어갖구, 뭣이냐, 시집이나 가렴? 응?……갑쇠가 마침 늬이 집으루 혼인을 허자구 허구 그럇다니……?
 
317
“싫어 ! 나는 죽어도 다른 디루 시집은 안 갈 티여!”
 
318
을녜는 이 말이 시방 당장 털끝만치도 거짓이 없는, 그리고 아주 절박한 실토정이기는 하면서도, 그러나 제라서 듣기에도 가슴이 아플 만큼 공허하게 울려든다.
 
319
작년까지도 그는 갑쇠한테로만 시집을 가려니 했었고 그것이 진정이 있었다.
 
320
또 오복이가, 우리 내외가 되어가지고 같이 살자고 했을 적에는, 아무리 부모가 딴 데로 시집을 가라고 해도 오복이하고만 살지 천하 없어도 싫다고 대답을 했었고, 그것 또한 곱다시 진정이었었다.
 
321
그런데 오늘 밤 이 자리에서도 역시 다름없고 속임 아닌 진정으로 관수 너와 못 살게 된 다음에야 다른 사람한테로 시집을 갈 마음은 없노라고 말을 하여지지를 않느냔 말이다. 웬 일일꼬? 해야 알 수는 없어도, 미흡한 게 관수와 갈리는 만큼이나 마음이 허전해진다.
 
322
“나는 차라리 저어기 전주(全州)루 비단 짜는 공장에나 갈까 봐……”
 
323
“글쎄? 원……”
 
324
“거기 사람들이 직공이라든가 그걸 뽑으러 와서 시방 주막에서 묵는다구.”
 
325
“것두 그리 신통찮너니라…… 고생만 죽두룩 허구 생기는 건 없구, 그러구 자칫 잘못허다가는 못된 구렁으로 빠지기가 쉽구……”
 
326
“뒷일을 누가 알어! 그까짓 것 되는 대루…… 우선 시방 이렇게 막막허닝개루 바람이나 쐴 겸……”
 
327
관수는 창녀(娼女)의 거리에 선 을녜의 환상이 눈에 어릿거려 마음이 가뜩이나 어두워짐을 어찌하지 못했다.
 
328
잠깐 말이 그치자, 때마침 들리는 인기척에 둘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다.
 
329
달은 구름에 가렸으나, 시꺼먼 그림자가 동네로 난 길로 해서 하나 둘 셋, 연달아 넷 다섯, 다섯이나 우뚝우뚝 봉분으로 올라선다.
 
330
관수는 선뜻 일을 짐작했다. 을녜도 같이 짐작이 들었던지, 사풋 관수의 뒤로 가서 숨어 앉는다. 물론 어마두지, 달리는 어찌할 수 없으니까, 손바닥으로라도 얼굴이나 가리는 셈밖에 안되는 것이고.
 
331
그림자들은(쿵쿵 땅을 짚는 소리가 아니라도 제각기 작대기를 든 것은 어둠 속일망정 알아볼 수가 있고) 다섯이 주욱 관수의 앞으로 바투 늘어선다. 아직껏 말은 없으나, 그중 바른편으로 맨끝엣 그림자는 다리를 저는 것이 갑쇠임을 분명히 알겠다.
 
332
그들이 앞으로 다가올 사이에 관수도 일어나서 딱 버티고 서면서(무심코) 고의춤을 추킨다. 을녜는 등 뒤에서 관수의 팔을 잡았던 손을 (그 손이 떨리는 것을 관수는 제 팔에서 느꼈다) 놓고 저도 일어섰다.
 
333
을녜는 그러나 무서워서 떨리지는 않았다. 이 살기에 마음과 사지가 긴장이 되어, 손이 제풀로 떨린 것이요, 여차하면 저도 내달아 한몫을 볼 다구진 마음으로다가 시방 입술을 다뿍 깨물고 있는 참이다.
 
334
“너, 이 자식 관수야?”
 
335
맨처음 개두를 하는 게 키가 기다란 것도 그럴 듯하거니와 음성이 오복이다. 관수는 아주 천연스럽게
 
336
“오복이냐? 난 누구라구! …… 왜애?”
 
337
“흥! 이 자식, 능글능글허게…… 너 이 자식 어떻게 죽으면 못 죽어서 이러냐?”
 
338
저어 북쪽으로 들어가거나 또 저어 남쪽으로 내려가거나 하면 우선, 이 썅! 혹은, 이 네게애미 ! 한마디로 와지끈 따악, 갈겨놓고서 그 다음에 원, 아이새끼가 민하다든지, 문딩이 같응 기 지랄로 한다든지, 비로소 시비를 가리는데, 산세가 다르고 물맛이 달라 그런지, 중토막 사람들은 콩이야 팥이야 시비 먼저 따지려 들고 그러다가 아가리 힘센 놈한테 언변으로 지고서 만다.
 
339
“야덜아? 여러 말 허기두 싫다……”
 
340
관수는 처음 시치미 따는 태도를 벌이고서 저도 따잡고 나선다.
 
341
“……보아하니 싸움을 청하러 온 모양이루구나?”
 
342
“그리서? 어찌여 이것!”
 
343
오복이의 기다란 키 밑에서 동 짤막하니 딱 벌어진 순성이가 (이백근들이 벼 두 섬을 포개 진다는 총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344
“너는 개 ×에 덩덕개비여! 아직 가만 있다가 싸움이 얼리거든 날 때리기나 히여!”
 
345
관수는 씹어뱉듯 순성이를 머쓰려놓고서 다시……
 
346
“헐 수 있냐? 늬이는 다섯이나 되구, 나는 혼자구, 그나마 느이는 작대기들을 가졌지? 나는 맨손이구, 헐 수 없이 내가 맞어는 두었다. 두었다마는, 자아 늬이 중에서 한 놈은 그렇지만, 내 손에 죽을 줄 알어라? 어떤 놈이든지 한 놈 내 손에 잡히기만 허머는 내 목숨이 끊어져두 안 놓치구서 그놈 하나는 죽여놀 테닝개루, 응?”
 
347
말하는 조가 서슬이 시퍼런 것이 사뭇 독이 뚝뚝 듣는데, 마지막 이를 뽀도독 가는 데는 다섯 장정이 모조리 머리끝이 쭈뼛하지 않지 못했다.
 
348
사람을 궂히고서 전중이까지 산 놈. 요전에도 도까다 패들한테 칼을 들고 나서지 않더냐! 정자나무의 ‘지킴’이나 천년 묵은 구렁이도 그를 무서워 하는 놈인걸, 시방 제 말대로 손을 잡히는 놈 하나를 족히 죽여 놓구말구! 하나라니? 다아라도 죽이려 들걸……
 
349
이리 겁들이 난 중에도 더 겁이 나기는, 다리가 아파 다급한 때 뛰지도 못하고 잡힐 갑쇠다.
 
350
“아아니, 야 관수야! ……”
 
351
갑쇠가, 관수의 을러메는 말이 뚝 떨어지자. 황망히 절름거리면서 관수 앞으로 나온다.
 
352
“……이럴 게 아니라, 다아 좋게 이야기를 허자구나?”
 
353
“누가 좋게 허지 말재서?”
 
354
“그런 것이 아니라, 저어 뭣이냐…… 네가 동네루 도루 들어오면서는 말이지…… 두루 재미 적은 일두 많구 또 맘이 들 불안히서…… 그러닝개루 박절헌 일이지만……”
 
355
“나 하나 돌아왔다구 재미 없을 일두 불안헌 일두 있을 며리가 없지만…… 그래, 그리서?
 
356
“그러닝개루 너는 저어, 기왕 타관에 나가서두 잘 지내던 사람이구 허닝개루……”
 
357
“나를 쫓아내잔 말이지.”
 
358
“아아니, 쫓아낸다면사 야숙헌 짓이지만, 그저 피차에 좋두룩 허자면 네가 짐짓……”
 
359
“내가 안 나가 주먼은? …… 흥 ! 늬이들이 이렇게 개떼처럼 우우허니 달라들어서 쫓아낸다구 머 내가 나가기 싫여두?”
 
360
“아, 요년의 자식이! 하룻강아지! 하룻강아지……”
 
361
그래도 제 힘을 믿는, 또 그뿐 아니라, 약속을 솔직이 행하자고, 순성이가 와락 관수게로 덤벼든다. 하나 여럿에게 붙잡혀, 후두둑거리기만 한다.
 
362
구누를 하기를, 매앤 기운 센 순성이가 맨첨으로 달려들고 그러거들랑 오복이, 째보, 태식이, 모두 와아하니 덤비기로 했던 것이다. 해서 실컷 두들겨주고, 동네서 떠나겠다는 다짐을 받고……
 
363
이랬던 것인데, 순성이가 덤비는 것을, 같이 달려들기는커녕, 되레 그를 붙잡고 말리니, 밥도 죽도 아니고 을축 갑자(乙丑甲子)가 되고 말았다.
 
364
“아, 저걸 당장…… 당장 그저…… 저년의 것이 하룻강아지 범 무선줄 모르고! 이잉!”
 
365
순성이는 뒤에서 옆에서 모두 달리는 대로 끌려 물러서면서도 연신 얼러멘다.
 
366
“내가 강아지가 아니라, 개는 늬이가 개여! 개떼……”
 
367
“그리라, 그럼 네가 호랑이라구, 아따 그놈의 호랑이 좀 잡어서 껍질 좀 벗겨 먹자! 이년의 자식!”
 
368
“자아, 내 말 들어라, 여러 말 허기 싫구…… 내가 날새 떠나기는 떠난다. 그러니 인제는 가서 두 발 뻗구 잠이나 자거라…… 그렇지만 행여 늬이들한테 쫓겨서 나가는 줄은 알지 말아라, 괜시리…… 흥!”
 
 
369
닷새가 지나서……
 
370
관수는 제가 말한 대로, 그러나 의외로 빨리, 그저께 저녁때 동네를 떠났다.
 
371
조그마한 보퉁이 하나를 돌고, 들 가운데 행길로 감감하니 멀어가는 뒷그림자를 홀로 그의 모친이 정자나무 밑에 서서 배웅을 했다. 을녜가 저의 집 울타리 안에서 괴밭디딤을 하고 바라다보았을지도 모른다. 십상 그랬을 것이다.
 
372
그리고 시방 오늘은 을녜가 제 동무 둘과 같이 전주 방석공장의 여직공으로 뽑혀 길을 떠나느라고, 관수가 떠난 그 행길을 이편짝으로, 공장에서 온 사람이 둘 앞에 서고, 가운데로 을녜와 두 처녀아이가 서고 뒤에는 배웅 나가는 부모네가 서고, 방금 이십 리 상거의 정거장으로 나가고 있다.
 
373
갑쇠네 논에서는 요전 그날처럼 최서방 오서방 오복이가 오늘은 피사리(抜稗[발패])를 하고 있다. 때도 그날 그맘때 참은 되었다.
 
374
갑쇠는 여전히, 아직도 다 합창이 안된 다리를 정자나무 밑 밀짚기직에 내던지고 퍼근히 앉아서 떠나가는 을녜의 뒷그림자를 바라다본다.
 
375
오복이가 일행을 알아보고서, 흥! 저 잡것이 저러다가 갈보가 되지야고 혀를 찬다.
 
376
“갈보? 갈보 좋지! 직선 많이 허구, 끙 끙, 천당두 올라가구……끙.”
 
377
최서방이 꾸부린 채 피 한 포기를 힘들여 뽑으면서 거드는 소리다.
 
378
갑쇠는, 을녜가 이왕 관수도 떠나고 없으니, 제한테로 시집이나 와주면, 그런 허물 저런 흉 다 씻어 덮어줄 텐데! …… 하면서 한숨을 몰아쉬다가 언뜻 정자나무를 올려다본다. 관수가 처박은 돌이 유난히 또렷하게 박혀 있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무척 다구진 사람이었느니라 싶고 시방은 없는 관수까지도 섭섭한 생각이 새삼스러워진다.
 
379
실매미가 시르르 울다가 끝을 바람결에 흘려보낸다. 한량없이 넓어 나가는 들에서 불볕에 살져가는 벼…… 벼잎이 우수수 기운차게 흔들린다. 풍년은 완구하다. 풍년 든 논의 그 벼잎들이, 부지없는 갑쇠의 마음을 추슬러 주느라고 위정 흔들거리는 성불러 갑쇠는 그리로 정신이 한가닥 끌리지 않질 못한다. 풍년도 좋지만! 갑쇠는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다시금, 훨씬 더 멀어진 을녜의 뒷그림자로 눈이 따른다.
【원문】정자나무있는 삽화(揷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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