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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 부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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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4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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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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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 이층에서는 호텔과 후원의 팔각당이 정면으로 바라보인다. 호텔의 창호(窓戶)는 늘 닫히었고 굴뚝에는 연기가 끊일 새 없고 팔각당 근처에는 수목이 푸르다. 저녁때이면 소복소모(素服巢帽)의 보이가 나무 사이에 희끗희끗 어른거리며 당 주위를 휘돌아치며 새둥우리라도 들쳐 내려는 듯한 눈치였다. 노가지나무와 은행나무 가지가 흔들렸다. 지붕 기와 틈에 앉았던 검은 새가 푸드득 날곤 하였다. 그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을 나는 사랑한다. 확실히 그 어느 화가의 그림에 비슷한 구도가 있었던 듯이 기억된다. 그 귀한 한 폭을 하염없이 굽어보며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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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의 창은 늘 닫히었고 여인의 그림자 한번 어리는 법 없으므로 나는 그 속의 생활을 알 바 없다. 그들이 이쪽 이층의 생활을 모르는 것과 일반이다. 방이란 한량없이 신비로운 것이니 그 속의 생활은 언제든지 외부에 대하여서는 닫혀진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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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수십억의 방이 있겠으나 그 많은 방들은 그 속의 공기와 채광과 색조가 다르듯이 감정과 성격과 인생도 다 각각 스스로 다르며 동시에 비밀인 것이다. 즉 세상에는 수십억의 방의 비밀이 있다. (수십억의 소설이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비밀 ─ 사람은 반드시 한두 조각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법이니 아무리 거리가 가까운 눈앞의 호텔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 속에 갈피갈피 숨었을 수많은 비밀을 단 하나라도 알 길은 없는 것이다. 호텔은새로 같은 이층 이웃방 주민의 생활조차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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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날마다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걸음걸이를 보고 시늉을 관찰하고 회화를 엿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뿐이요, 그 이상 그들에게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탁자에서 열정을 보이고 주의를 말하고 계획을 세우나 그것과 그의 생활의 비밀을 스스로 다른 문제이다.
 
6
베레를 쓰고 루주가 진한 것만을 보고 어찌 그 여자의 속셈을 알 수 있으리요. 거리에서 빚어지는 화려하고 안타깝고 상기되는 생활의 표면과 그들이 각각 방으로 돌아갔을 때의 생활의 속과는 스스로 다른 것이다. 흥분되고 감동되는 접촉면과 한 꺼풀 막 너머 현실과는 딴판이다. 가령 날마다 같은 곳에서 같은 시간에 만나는 알 바 없는 여인(麗人)의 현실 속에 우연한 기회로 참가할 수 있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한 놀람과 꿈의 차이와 신비와 때로는 서글픔을 느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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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드디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두렵다고도 할까. 다른 사람에 관하여서는 백치의 상태에 있을 뿐이다. 거리란 방 속의 세상은 따로 제쳐 두고 다 같이 잠시 동안 모여들어 뛰고 춤추고 흥분하고 장식하고 꿈을 주고 받고 하는 가짜의 회장(會場)과도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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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나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별수없이 소여(所與)의 생활만을 침착하게 해 가는 수밖에는 없다. 방에 돌아가면 자신의 알맞은 비밀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까.
 
 
9
하숙의 이층은 나의 여우(旅寓)에는 지나지 못하나 나의 생활의 결코 무의미한 페이지가 아니다. 그 방은 가난은 할망정 나에게는 그립고 친하다. 열어젖힌 창으로는 이웃 공장들의 연기와 글음이 들어왔으나 밤늦게 불을 끄면 월광도 새어 들었다. 달빛에 젖으면 팔각당은 한층 신비롭게 보였다. 한가한 아침이면 양편 창으로 근심 없이 뜬 경기구가 방울방울 가볍게 바라보였다. 구름과 하늘이 산속같이 맑은 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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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여름에 따라서는 방의 조망도 다르거니와 방의 생활도 다르다. 내용과 감정과 성격이 변천한다. 그 변천의 역사가 스스로 방 어느 구석엔지 남아 벽 위에 때묻고 손톱자국 나는 것을 나는 안다. 육안에 보이지 않는 상형문자로 내용의 기록이 벽 위에 덕지덕지 적히움을 안다. 등장인물은 사라져도 때는 남는 것이다. 나 이전에 그 방에서 살았을 수많은 사람들의 때도 남았으려니와 나 이후에 살 사람들의 생활도 그 위에 때 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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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차례로 이어갈 그 많은 생활 내용은 물론 다 각각 은밀한 것이다. 단순한 한 간의 방은 참으로 비밀의 도가니요, 신비의 계열이다. 이웃방도 그렇고 그 다음 방도 그렇고 층 아래 여러 방도 물론 그렇다. 방은 인생의 항구랄까. 항구 항구에 이야기를 남기고 인생은 또 다른 항구에서 항구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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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동안 이웃방에 들었던 식구들 ─ 장성한 딸과 어미 없는 어린것들을 데리고 유행가를 배우던 아버지는 간곳없다. 같은 층 끝 방의 치과 학생도 없고 가제 해산했던 아래층 여점원도 가버렸다. 그들은 이 여름을 어디서 허비적거리며 헤엄쳐들 건널까. 그들 대신에 하숙에는 낯모를 주민들이 방방에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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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면장에서 만나면 짧은 아침 인사를 건네고 식당에서 부딪치면 농담의 두어 마디를 주고받을 뿐이요, 그들의 정체는 물론 알 바 없다. 교원이요, 회사원이요, 직인(職人)들임을 알 뿐이지, 이웃방이 고요할 때 그들이 방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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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생활이란 피차 관여할 바가 아니며 다 각각 각자만의 것인 까닭이다. 겨우 내가 치운 방 이불 속에 더운 물통을 정성껏 넣어 주는 주인 노파는 목욕물이 더우면 나에게 제일 먼저 일러주고 아들에게는 편지가 오면 자랑삼아 피봉을 보이곤 하였다. 아들은 올림픽대회에 출장한 중거리 선수였다. 편지는 서서(瑞西)텔에서 왔다. 노모의 자랑은 하늘을 찌를 듯도 하였다. 말에 그는 많은 아들의 사진과 오려낸 신문기사의 조각조각을 내보이기까지 하였다. 나는 선수를 칭찬하고 성공을 빌었다. 하숙은 생활의 전람장이나 일일이 방안을 엿볼 수 없음이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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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에서의 전망은 또한 얼마나 풍부한가. 호텔도 호텔이려니와 바로 눈 아래 근경을 나는 더한층 사랑한다. 부근은 철공장에서 오는 소음으로 늘 요란하다. 철판 끊는 소리, 기관 도는 소리, 멀리서 오는 시가의 해조(諧調)가 섞여 부근의 어지러운 생활대에 끊임없는 한 위대한 반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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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 아래는 바로 넓은 공지를 이루어 그곳으로 향하여 각 가호의 생활의 문이 열려 있다. 공지의 생활상은 아침 저녁으로 변하고 조그만 사건이 뒤를 잇는다. 거의 하루 한 차례씩 싸움도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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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제일 일찍이 공지를 지나는 것은 장사치요, 다음은 출근하는 직인들이다. 낮이 되면 근처 직공들이 모여들어 소한(小閑)을 이용하여 캐치볼을 하였다. 야채 행상은 빈 하차(荷車)를 끌고 와 그늘에 세우고 그 속에 웅크리고 낮잠을 잤다. 인물이 가장 풍성한 것은 저녁 무렵이다. 쓰레기통 옆에서는 아이들이 자리를 펴고 놀고 골목쟁이에서는 이웃집 주부들이 모여 수군수군 소문들을 귀띔하는 눈치였다. 하는 일 없이 날마다 거의 무시로 나타나 주부들에게 인사하며 하염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무직의 노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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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향 편에는 중국 가호가 두어 채 있어 문 앞에는 늘 식구들이 나와 거닐었다. 묘령의 여자는 아무리 보아도 이웃집 사내와 남이 아닌 눈치였다. 집 모퉁이에서 만나다가도 인기척만 나면 슬금슬금 골목으로 꺼지곤 하였다. 서먹서먹하고 멈칫거리고 어색하고 그러면서도 대담하고 서투른 꼴이 틀림없이 사랑에 갈팡질팡하는 사람의 꼴이었다. 청복(靑服) 사이로 종아리가 허옇게 드러나도 그것을 여밀 염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생각에 잠겼다. 흘깃흘깃 이쪽 창을 치어다보는 때가 있었다. 내가 그를 수상히 여기듯이 그 역 불규칙하게 창에 어리는 나의 꼴을 수상히 여겼을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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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남향 쪽이 왁자지껄하였다. 또 싸움인가 하고 내려다보니 한 사람의 여인이 집 널판지를 향하여 바라지게 떠들며 욕지거리였다. 보고 섰는 사람들도 웃고 맞장구를 치며 부추기었다. 비난의 상대자가 누구인지를 몰라 시비의 곡절을 판단하지 못하고 있을 때 반지문이 열리며 창백한 소년이 겸연쩍은 얼굴로 나왔다. 벽에 붙은 조그만 측간이었다. 여인은 측간의 사용을 그렇게까지 까다롭게 책망하였던 것이다. 차인꾼인 듯한 소년은 낯도 쳐들지 못하고 세웠던 자전거를 끌고 사람 숲을 헤치고 슬금슬금 사라져 버렸다. 웃음소리는 한동안 한층 더 요란히 터졌다 ─ 뒷골목 인정은 박하고 야속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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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부근은 어수선하고 이층의 전망은 무한하다.
 
21
떨어져 생각하면 모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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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그 가난한 이층에서 지낼 날이 기다려진다. 원컨대 헌 벽도 낡은 방바닥도 고쳐지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그곳에 올 나의 다음 생활의 정감은 어떤 것일까. 전망의 풍경은 어떻게 변하여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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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여행에서 돌아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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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 사해공론 193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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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李孝石)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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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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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6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