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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머니즘 논쟁(論爭)의 총결산(總決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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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4
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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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매니즘 論爭[논쟁]의 總決算[총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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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現代文學[현대문학]과 ‘휴매니티’ 의 問題[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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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이 시작된 지도 1년이 넘어 주제(主題)는 이미 여러 가지 입장과 각도에서 천착(穿鑿)되고 이 이상 더 피차(彼此)를 추구 할 긴장미(緊張味)가 풀어진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휴매니즘은 결코 작일(昨日)의 논제로 잊어버리고 말 한개 평범한 유행 토픽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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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유 있어 논쟁했고, 뜻한바 있어 논의했을 뿐만 아니라 한층 더 성실 치밀히 휴매니즘을 자기의 과제로 반성해야 할 시기에 들어와 있지 않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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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매니즘이 갈수록 인간다운 질(質)을 상실하고 있는 사상과 생활의 중압(重壓)하에서 제창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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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휴매니즘이 현재의 또는 장래의 논의와 사고(思考)의 과제로 생명을 중압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물론 우리가 당면하고 있던 작일(昨日)의 불행이 아직도 뿌리깊이 우리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태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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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르네상스’ 와 현대와의 관계를 회상(回想)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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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휴매니즘을 ‘르네상스’ 와 현대의 역사적 유사(類似)에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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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교회의 질곡(桎梏)과 르네상스인의 영웅적 진통 속에서 근대인은 생탄한 것이고, ‘바바리즘’ 과 혹은 물질 문명의 고식(姑息)속에서 명일(明日)의 인간은 탄생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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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루넷산스인이 내일을 위하여 자기의 여명(黎明)을 희랍에의 동경(憧憬)으로 장식한 것은 그들이 다시 한번 ‘아테네’ 의 시민으로 부활하려함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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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인은 희랍의 계승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 초극자(超克者)이었다는데 크나큰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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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들이 중세사회를 넘어트렸다는 사실보다 훨신 더 의미가 중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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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계기(繼起)의 의미란 것은 표면의 유사(類似)나 상극(相剋)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시대와의 차이와 그 차이의 연속 가운데 있는 것으로 그것은 인간의 질적 변화와 성장의 부단(不斷)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현대와 르네상스가 휴매니즘을 통하여 교섭함은 실상 그 유사성에 있다느니 보다 오히려 엄격한 차이성(差異性)에서 문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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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꿔 말하면 르네상스를 모방하려 함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르네상스의 수준을 초월할까 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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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은 장래의 인간이 근대사회를 어찌했다는 의미보다 비할 수 없이 큰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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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영역(領域)의 문제라느니 보다 항상 시간의 문제이며 문화란 량(量)이 아니라 언제나 질(質)에 중점이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수준을 뛰어 넘는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그 시대의 한계를 깨트릴 길은 한두 갈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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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항상 상대적 의미밖에 갖지 않는 때문이다. 그러나 한 시대를 초월한다는 것이 다른 한 시대를 개척한다는 창조적 의미로 결과(結果)할려면 사상과 행위의 역사적 절대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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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의 역사가 도달한 수평선에서 한층 더 높은 계단으로 인간의 문화를 끌어올리는 것은 현대가 그 어느 목전(目前)의 일선(一線)을 뛰어넘기보다는 투철히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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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대에 선행(先行)한 온갖 시대를 정복치 않으면 우리는 참되히 현대로부터 초극(超克)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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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르네상스에서 배울 참말의 정신이 바로 제 애비 제 교사를 능가하는 무한한 정복의 야망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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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란 언제나 인간의 이러한 야망에 의하여 그어진 굴곡(屈曲)많은 진보의 선(線)이다. 그러므로 시대마다 당면한 역사적 여건을 극복한 문화는 항상 세계적 성격을 띄우고 있었고, 이러한 사상만이 인간 역사의 새 운명을 개척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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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넷산스’의 극복 ─(이 가운덴 스스로 희랍의 정복이 들어 있다!) 그 철저한 극복만이 현대의 초극으로 하여금 새 시대의 탄생의 모태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휴매니즘’의 과제로서의 생명은 인간의 현대적 퇴화(退化)란 일점과 더불어 한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적 변용(變容)과 함께 구원(久遠)한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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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상실된 인간성의 재흥(再興)이란 과제가 절대적 의미에서 여태까지의 문화 위에 새 가치를 기여하는 정신적 창조의 의미를 획득하는 곳이 또한 이 구원한 가치를 실현하는 세계다. 그러나 ‘휴매니즘’ 논자(論者)뿐만 아니라 우리들 일련의 비판자들도 논쟁을 결정적 지점으로 유도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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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매니즘’ 논자(論者)들의 기본적 약점은 각인이 가진 기종(幾種)의 차이에 불구(不拘)하고 결국에선 주관주의자(主觀主義者)이었다는 점과 지나치게 목전(目前)의 사실에 사로잡혔다는 두 개의 의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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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 입장이란 항상 다소간의 ‘푸라그마티즘’ 을 대동(帶同)하는 것으로 인간이란 것을 자기라는 한계에서 해석한 휴매니즘의 방법 가운데 가장 선명히 반영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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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입장은 어디까지든지 ‘나’ 의 입장이고 그것은 결코 그대로 만인의 입장을 의미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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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 만인과 더불어 입장을 같이 하는가의 여부에 대한 시금석(試金石)은 ‘나’ 의 생각속에 있지 않고 ‘나’의 밖에 나와 다른 사람들과를 얽어매논 현실 가운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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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진실과 현실의 진실은 그렇게 아무 때나 내 생각대로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좁은 의미의‘우리의 진실’이란 것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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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리즘’의 창일(漲溢)가운데서 ‘인테리겐차’가 최소한의 방어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말할나위 없이 귀중한 일이다. 또한 이 한계를 자기 붕괴(崩壞)의 최후의 방어선으로 고수하고 자기 재건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도 존귀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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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나’혹은 ‘우리의’ 현실에서 빚어진 ‘이즘’을 생활과 문학상에 절대적 의의를 갖는 진로라 지시함은 만인의 현실의 무시와 제 현실의 과장에 유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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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현대 ‘휴매니즘’ 이 ‘바바리즘’ 과 자기 붕괴에 대하여 절규된 선의지(善意志)임에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백철(白鐵) 혹은 김오성(金午星) 또는 윤규섭(尹圭涉)씨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은 여러가지 자의(恣意)와 ‘푸라그마티’ 즘을 섞은 추상론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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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기를 주장함에 지내지 않던 백철(白鐵)씨나, 행동으로! 의욕으로! 정열로! 급기야는 개인의 마음으로 세계를 고처보겠다는 김오성씨나, 자기의 패배를 제가슴 속에 있는 인간적인 마음으로 만회해 보겠다는 윤규섭씨나, 다같이 각개(各個)의 절박한 진실성을 의심할 순 없으나, 적어도 만인에 의하여 영위되는 생활과 문학의 상태를 지나간 역사적 지평선에서 한길 더 높이 비상(飛翔)시켜 보겠다는 마당에서는 그대로 보편적인 진리일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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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생활이 더 인간다워져야 하고 우리의 문학이 더 인간적인 성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일치한 열망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논쟁한 것은 정히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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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현실을 존중하지 않고는 일반 현실을 어찌할 수 없음이 진실이라면, 일반 현실을 알지 않고는 제 현실도 알 수 없다는 말도 또한 진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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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신을 알라!’고 스핑쓰에게 대답한 희랍인의 지혜는 결코 우리가 개인적 한계 안에 악착(齷齪)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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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현실 그것은 일반 현실 속에 있는 것이며, 그것의 한 구조요소다. 그러므로 개인은 외부 현실과의 격렬한 갈등 속에 있는 때라도 본능적으론 그것과의 조화를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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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커다란 조화가 결렬되었을 때, 인간의 생활은 갈등에 허덕이고 인간의 마음은 두 개로 짜개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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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분열! 19세기 이래 근대인을 괴롭히고 있는 두려운 상태는 이 조화의 불가능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조화의 회복은 동시에 각인의 마음속에서 성취되지 않고 개인 외의 그러면서도 각 개인이 참여하고 있는 넓은 현실 속에서만 또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인간을 존중하는 것은 그 실(實)인간이 영위(榮爲)하고 있는 일반 현실을 존중한다는 것이 아니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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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의 존중 없이 개개인은 인간 본래의 존엄이 유지되지 않으므로……. 그러므로 생활에서도 문학에서도 단순한 표상(表象)에 지나지 않는 인간을 주의(主義)로 한다는 어느 ‘이즘’이 아니라 인간 그것의 진실을 표현하고 인간의 여태까지의 역사를 양기(揚棄)할 근원을 문제삼는 일층 명확한 ‘이즘’이 우리에게 실제상의 의미를 갖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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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리가 ‘휴매니즘’ 을 비판한 것은 인간의 존중을 반대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는 인간 자체의 발양(發揚), 인간의 역사적 초극(超克)이 불철저, 불가능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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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의미에서 선량한 문화인은 누구나 다 ‘휴매니스트’ 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학의 현실과 역사 위에서 인간을 주의(主義)로 한 어떤 특정한 ‘이즘’ 의 조류를 따라갈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시대, 여러가지 ‘이즘’ 가운데 인간의 진화(進化)의 제상(諸相)이 어떻게 나타나 있었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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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동시에 새시대의 문학이 보다 더 인간적이려면 근본에선 무엇이 필요하며 어떠한 길이 정로(正路)인가를 스스로 암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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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불멸(不滅)하게 문학의 역사속을 관류(貫流)한 것은 ‘휴매니즘’이 아니라 수천년을 살아온 인간의 자태(姿態), 또 마음으로서 그것은 인간적인 것, 다시 말하면 ‘휴매니티’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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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대의 문학은 제각기 ‘휴매니즘’ 을 가진 것이 아니라 희랍의 문학도 루넷산스의 그것도 또는 세기말의 그것도 모두다 제 ‘이즘’ 가운데 상응(相應)한 ‘휴매니티’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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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휴매니티’ 란, 과거(過去)한 여러 가지 문학 가운데 있던 천차만별의 각양물(各樣物)이냐 하면, 여태까지의 인간이 실제로 그렇게 살아온 만큼 그런 것이다 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생활이나 문학 가운데 ‘휴매니티’가 소실(消失)혹은 결여(缺如)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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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웁다’ 는 말속엔 그같은 과거한 인간생활의무조건한 긍정(肯定) 외에 무슨 고정된 기본요건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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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람들은 이런때 간편한 표상(表象)이나 개념(槪念)을 걷어내는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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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하면 박영희(朴英熙)씨 같은 이처럼 유물론자는 물질로 산다 하나 사람은 정신도 있어야 한다는둥, 혹은 물심양개(物心兩個)가 공유해야 한다는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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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거한 모든 시대의 문학 가운데 제각기 상응(相應)한 ‘휴매니티’가 있었다는 것은 ‘호메로쓰’와 ‘프루 ─ 스트’의 가치를 혼동하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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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휴매니티’ 란 그 존재의 본성에 있어 제 자신의 역사 위에만 현실된다는 것을 환언(換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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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상언(詳言)하면, ‘인간적’이란 것은 시대, 그 사회를 지배한 인간들의 차이에 따라 각각 다른 내용을 의미했고, 부절(不絶)히 변천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살려면은 ‘빵’ 과 물과 또 무엇이 필요하냐를 묻는 것은 인간을 뇌옥(牢獄) 속에 잡아넣고 번호를 붙인 번호로 환원(環元)시켜 말하는 추상론(推象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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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구체적으로 오늘날까지 제 보통적인 역사를 가젔고, 내일에의행위에서 사는 현실인에게 공통으로 필수(必須)한 제 조건을 그 인간들 자신 속에서 발견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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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겐 야수(野獸)와 어류(魚類)만이 필요한 때도 있었고, 화폐가 필요한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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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현대인에겐 아직 지구만으로 만족할 수 있으나 미래엔 천체군(天體群)을 필요로 할때가 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규정할 수 없는 무한(無限)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간에겐 또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한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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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인간이 태초로부터 그것이 소실(消失)될 종국에 이르도록 존재를 같이 할 개인과 사회와 자연을 끊어야 하는 삼위일체(三位一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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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일 수 없이 인간이 생존치 않음과 동시에 사회 지위없이 인간은 또한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떠한 인간이고 제 생활과 문화 등의 온갖 원천인 자연을 떠나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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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그것이 곧 자연의 일부며 동시에 자연 가운데서(존재는 항상 자연적이다!) 가장 비자연적(非自然的)인 것이 또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결국 이 세가지의 통일적 관계의 총칭이며, 이 조건들이 서로 관계하는 방식과 형태에 따라 생활과 문화의 여러가지 상(相)이 현실화 되어 역사를 만든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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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국(終局)에서 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은 자연 가운데서 인간이 제 소유로 탈취하는 재화(財貨)획득의 능력, 즉 생산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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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능력에 따라 인간이 자연 가운데서 파내는 금은보화가 인간에게 갈수록 큰 비자연적 능력을 증장(增長)시킨다. 그러므로 인간은 생산력의 증장에 따라 단순한 자연의 일부로 부터 자연의 정복자로서 자연 그것과 대립하게 되는 것이며, 이 결과는 자연물로서의 인간에게 갈수록 비자연적 요소를 증장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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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명의 축적, 문화의 진보인데, 문화란 곧 인간의 정신적 능력의 소산으로 그것은 자연 속에서 나왔음에 불구하고 자연과는 비슷도 않은 다른 독립한 천문학(天文學)을 가진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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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문화생산의 지반(地盤)으로 자연정복 능력의 소장(消長)과 인간 생활과의 관계로 들어오면 별다른 문제에 봉착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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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과는 양자 존립(存立)의 최초부터 영원한 대립자나 개인과 사회와는 어떤 성질을 띄울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이 자기의 세계에서 대립하지 않고 한뭉치가 되어 자연과 싸운다면 내부 대립을 가진 때보다는 훨신 더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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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살았고 자연은 죽은 것이란 의미에서 개인 ․ 사회 ․ 자연간의 관계를 볼 때, 자연은 언제나 정열적으로 이 관계 속에 참여함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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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개인과 사회와의 대립이 없다면 개인 ․ 사회 ․ 자연의 관계는 하나의 조화된 세계를 이룬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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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고 인간 자신의 세계가 분열되고 있을때 인간은 자연 광안(光眼)의 능력이 인간 상호간의 싸움 속에 분할되여 인간은 제 힘의 수준 이하로 자연과 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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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꿔 말하면 자연은 제 힘의 수준 이상으로 인간에게 반항하게 된다 할수있어 삼자의 관계는 인간들이 서로 조화하지 않을뿐더러 삼자가 전부 부조화의 동란(動亂)가운데 빠진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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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제약(制約)하는 것도 인간의 생산력 수준 여하에 달렸으나 이 삼자간의 조화와 부조화는 문화의 형성 위에 결정적(決定的)임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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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쓰’ 는 정(正)히 조화의 시대가 아직 끝나기 전에 시인(詩人)이였고‘일리아 ─ 드’는 이 시대 인간의 예술적 제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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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고대의 저열(低劣)한 생산수준 위에 섯었음에 불구하고 이 조화때문에 인간은 한개의 혼연(渾然)한 통일체로서 자연에 대하여 투쟁하는 높고 큰 열정으로 일관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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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중요한 것은 사회 가운데 모든 개인이 아직 개성(個性)으로서의 생명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리아 ─ 드 의 개인은 근대소설에서 보는 바와 같은 항(抗)하기 어려운 어느 대상에 대하여 절망적으로 항쟁(抗爭)해 보는 유약(柔弱)한 자아의 정신이 아니라 전혀 일종족(一種族), 일사회(一社會)를 한 개인 위에 체현한 영웅의 정신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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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 비대한 자아도 아니며 몰개성적(沒個性的)군중도 아닌 적절히 개인이고 적절히 사회인인 그러한 인간, 요컨대 우리가 때때로 상상(想像)하고 동경하는 조화된 인간, 이상형(理想型)의 인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호메로쓰’ 는 문학의 모범이며 불행할 때마다 인간들은 희랍에의 동경(憧憬)에서 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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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희랍에서 ‘휴매니즘’ 의 람촉(濫觸)을 본다함은 전혀 인간의 이러한 아름다운 조화때문이며 유치하나마 그속에 인간적 완성의 모든 씨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형이나 완미(完美)하게 긴장된 인간정신은 인간생활 자체의 내적 분열의 성장과 더불어 문학 위에서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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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全)사회의 성격과 풍모를 조화적으로 표현하는 개인 ── 전형(典型) 〔영웅〕대신에 사회 내부의 모순과 질환을 앓는 제종(諸種)의 인간이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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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계 속에서 인간이 개인임과 동시에 사회인일 수 있음은 다른 인간과의 조화에서가 아니라 깊은 대립에서이었다. 즉, 그들은 사회의 영웅이 아니라 한 계급의 선수임에 불과하였다. 이런 때문에 문학이 자기 집단뿐만 아니라 전사회 성원에게 공감과 존경을 받기 위하여선 부득이 주인공이나 작자 정신 가운데서 한량(限量)을 말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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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예술적 위태(僞態)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위태성(僞態性)은 예술적 ‘픽숀’의 진실성을 멸살(滅殺)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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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작가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부의 적을 가진 인간을 전사회의 친우로서의 보통성을 부여할려면 위태(僞態)는 불가피의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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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묘사하는 주인공에게 보통성을 부여하려는 부단(不斷)한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는 현실과의 모순 틈에 끼인 작가의 심리는 내적 분열을 가진 사회의 심장 소리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사회의 문학은 이따위 위태를 만듦으로서 평연(平然)한 낙천주의를 띄우지 않으면 거개(擧皆)가 상기한 모순의 침통한 신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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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19세기 후년의 서구문학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문학의 여명기 르네상스는 이 모순과 고통의 신음과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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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한 바와 같이 르네상스는 이 모순의 소멸기가 아니라 이중(二重)의 모순의 시대, 즉 한 모순이 다른 모순에 의한 해결의 시대, 교체(交替)의 시대다. 그러나 긴요한 점은, 낡은 모순은 이미 완전히 개화(開花)한 모순이고, 새 모순은 아직 전개되지 않은 종자 속에 쌍엽(雙葉)이었다는 것이며, 전자는 후자에 의하여서만 해결될 불가피한 운명을 가젔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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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시민으로 하여금 새 사회의 지배자가 아니라 대표자로서의 전형성(典型性)을 보유케 하였고, 낡은 것의 공격과 새세계의 창조란 거대한 약진적(躍進的) 열정에 불타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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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일순의 짧은 시일이었으나 거대한 문학을 낳었다. 비록 ‘일리아드’와 같은 조화된 인간을 창조하진 못했으나 최대한의 힘찬 개성을 창조하기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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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섹스피아, 세르봔테스 등은 그 뒤의 전근대(全近代)문학, 그 중에도 위대한 ‘발 작크’로도 추종할 수 없는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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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우리는 영웅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한 시대의 대표선수의 정신을 찾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전근대(全近代)문학의 불치의 질환이 된 인간정신의 찢어진 모순의 음영(陰影)은, ‘햄릿’ 의 우폐(憂幣)한 표정에서 뿐 아니라 낙천적인 ‘동키호테’ 의 면상(面上)에도 떠돌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동키호테적 ‘옵티미즘’ 의 공상성(空想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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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캇치의 말과 같이, 새 시대가 전개하는 능력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해나 낡은 세계에 대한 위대한 항쟁 원리를 가진 신세계의 풍자적(諷刺的) 대조(對照)에서 생겨난 것도 사실일 것이나 여하간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않는 곳에서‘옵티미즘’은 천재(天才)의 공상을 빈 것이다. 그러나 이 공상성은 낭만적 공상과는 근본에서 다르다. 그것은 자기 모순의 은폐의 산물이 아니라 그 적발(摘發)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토마스 만이 정당하게 읽은 것처럼 세르봔테스는 자작(自作)가운데 사랑스런 동시에 경멸스런 인간의 자태(姿態)를 그린 것이다. 이 사실은 섹스피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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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세계와 항쟁하는 영웅적인 인간정신과 새 시대의 진실한 묘사와는 언제나 그의 시극(詩劇)가운데 상극(相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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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의 위대성은 모든 개성의 사멸기(死滅期)인 중세문학과 사회성의 매장(埋葬)의 땅인 근대문학으로부터 얼마간이라도 초연(超然)할 수 있었던 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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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는 중세문학의 극단화(極端化)한 전체성(全體性) ──〔이것은 조화성(調和性)의 형해(形解)태였다〕신(神) ──〔이것은 영웅의 시체다〕── 라는 근대문학의 극단화한 개인성의 결함과 장점을 동시에 음미할 수 있는 행복된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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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해화(死骸化)한 전체성에 대한 생생한 개성의 선고(宣告)가 아직 한 시대의 대표로서의 통일성을 잃지 않었을 때, 사람들은 호메로쓰 시대의 조화되고 생생한 인간을 재회(再會)하여 희랍의 청랑(淸郞)한 창공하(蒼空下)에 나선 듯한 위대한 감흥을 맛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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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문학정신이 찬란한 인간의 이름으로 대표된 것은 물론 신이 되어 천상(天上)으로 올라간 고대의 영웅들을 산 개인의 육체로 환원(環元)하여 지상에 불러내린 때문이나 그곳엔 고대인의 부활 이상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직 고대인에게 자각(自覺)되지 않고 영웅적 조화(調和) 가운데 미미(微微)한 요소로 밖에 위치하지 않었던 개성의 진정한 가치와 독립성을 명증(明證)한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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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점이 르네상스가 고대를 초극(超克)한 기점(基點)이고, 근대적 승리의 유일의 표징(表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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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가치, 그 시대문학이 세계문화 가운데 기여한 재보(財寳)를 나는 이곳에 두나 또한 인간의 근대적 불행, 분열의 슬픔이 이 속에 배태(胚胎)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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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르네상스는 인간을 천상(天上)에서 끌어내렸고 근대는 인간을 지상에다 메어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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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인이 개인의 고갈(枯渴) 때문에 울었다면 근대인은 정히 개성의 과잉때문에 신음한 것이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문화가 휴매니즘이라 불려지고 방대한 인간적 에스프리로 충만된 것은 그들의 인위적 고안(考案)의 결과가 아니라 시대 자체가 낳은 자연스런 결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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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꿔 말하면 작가들이 일부러 인간의 존중이란 생각을 작품위에 베풀지만 인간을 위하여 무엇 무엇이 필요하다는 항목을 안출(案出)한 때문이 아니라 시대실(時代實)과 시대정신의 충실한 전달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르네상스인은 무지를 속인(俗人)의 신성한 의무라 생각한 동양인과 반대로 희랍인과 더불어 아는 이것, 힘이라는 계율(戒律)을 믿었다.
 
97
그리고 행복된 것은 낡은 세계의 항쟁이 모든 것을 알아내라는 정신과 모순하지 않고, 일치하게 또한 유효한 무기였던 점이다.
 
98
요컨대 그들의 휴매니즘은 엄격한 레지리티였다. 다시 말하면 사실(事實)이 그들에겐 인간적이었다.
 
99
이 성격은 희랍과의 밀접한 공통성을 가진 것으로 희랍, 르네상스 외의 리얼리즘이 이와 반대로 수많은 비인간적 사실의 적발(摘發)로 결과한지라 한개 대조를 이룬다. 그러므로 섹스피어, 세르봔테스의 리얼리즘에 비하여 발작크, 스탕달의 그것에 훨씬 저도(低度)의 것이고, 그 뒤의 총명한 시인들 속에서 리얼리즘은 점차로 포기된 것이다.
 
100
왜 그러냐 하면 근대의 현실은 르네상스의 휴매니티를 상실했고, 그것을 정밀히 그린다는 것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비인간적 뇌옥(牢獄)의 화폭을 펴놓게 되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근대작가, 시인이 현실로부터 도피, 주관적 비상(飛翔)으로 문학상적(文學上的) 휴매니즘의 실현을 꾀해 본 것이다. 그러나 현실 가운데 진실로, 낡어가는 세계를 인간들로부터 근대 특유의 방법으로 휴매니즘을 빼앗고 있는 세계에 대립하고 제 억지 위에 새로운 인간적 세계의 실현을 걸머진 새로운 시대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으면 작가는 제 작품 가운데 휴매니즘을 현실화 할 수는 없다.
 
101
근대는 작가의 적멸(寂滅)과 고민의 시기로 그들의 생득적(生得的) 한계가 벌써 전세기말에 싹튼 새 세대의 자태를 인식시키지 않었거나 일부러 알기를 기(忌)한 것이다.
 
102
이것은 문학의 정체와 퇴화의 과정이고, 문학 가운데 휴매니즘이 충일(忠溢)한 대신 편재한 현상이다. 요컨대 휴매니즘은 희랍, 르네상스와 같은 위대한 문학에 고유한 것이고, 시대 현실의 리얼리티가 인편적일 때 문학도 인간적이다. 그러므로 우수(憂愁)한 현실 속에서 우러나온 문학이 사실적일 수 없음과 동시에 그런 현실 속에 있는 새 붕아(萌芽)를 작가가 못보았을 때나 안보려 할 때도 다같이 문학은 비사실적이다.
 
103
이리하여 비사실성은 시대가 만들어 낸 것이든 작가가 지여 낸 것이고 간에 비인간성의 예술적 표현이 된다.
 
104
휴매니즘이란 것을 자기 이외의 다른 개인과의 적대(敵對)나 자기 분열 속에서 찾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105
휴매니즘이란 자기 분열의 고민이나 이리와 같은 개개인의 적의를 만인과 더불어 나누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즐거움과 인간적 연대의 감정을 만인과 공감함을 의미할 것이다.
 
106
내적 분열의 고백은 똑같은 동시대인에게 일종 공감을 줄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고통과 절망이 분여(分與)이고 유락(愉樂)과 희망과 교훈의 공감은 아니다.
 
107
문학은 언제나 이런 것을 탐구하고 있었고, 또한 그 시대들이 여(與)한 한계의 양식 내에서 고유한 방법으로 ‘인간적’이었다.
 
 
108
3
 
 
109
그러므로 문학은 항상 새로운 세계를, 새로운 시대를, 구세대에 대신할 새세대를 희망하고 탐구하였다.
 
110
위대한 예술, 진정으로 인간의 이름에 해당하고, 만인과 더불어 새 시대의 호흡을 같이 할 그런 문학을 작가들은 창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수(憂愁)의 긴 세계를 살고, 또한 오늘날 참말로 깊어가는 우수의 어둠속을 걷는다.
 
111
광명은 과연 생탄(生誕)하였는가? 이 물음 가운데 현대문학이 인간세계를 실현하는 길이 리얼리즘이냐? 아이데아리즘이냐? 의 십자로가 있다. 그러나 이 해답은 간단히 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당면한 시제(詩題)는 작가가 많은 철학서와 과학서를 읽느니 보다, 개인의, 가정의, 사회의, 국가의 그리고 세계 나는 그 역사의 현실의 적나라(赤裸裸)한 제상(諸相)을 알아내는데 있다.
 
112
경솔한 작가는 서책(書冊)과 학설을 얻지 않는 이상으로 현실을 숙지(熟知)하지도 못하고 판단해 버리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탐구를 버리고, 서책에서도 현실에서도 아무것도 못 배우고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113
현대 인테리의 수많은 작가가 이 부패한 세계에 악착하고 있는 것이다.
 
114
대체로 리얼리즘에 대한 불신이 휴매니즘으로 결과(結果)하는 이유를 나는 알 수가 없다.
 
115
만일 시대의 진실한 묘사가 인간 퇴화의 방지와 새 인간의 등장, 휴매니즘의 창조를 결과(結果)를 마지 않는다면 그 현실 속에선 비(非)레아리즘을 가지고도 휴매니즘을 만들어 낼순 없는 것이다.
 
116
일부러라도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인조 인간, 작위된 허위의 휴매니즘에 끄치고 만다.
 
117
비록 현실이 모든 인간적인 것의 편린(片鱗)을 발견할 수 없을만치 어둡다하더라도 그 고뇌의 리얼리즘만으로라도, 허위의 휴매니즘보다는 훨씬 높은 예술, 인간적인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118
문학에 있어 허위는 비인간적 요소의 전형(典型)임을 자각해야 한다. 고뇌의 세계가 비록 루넷산스와 희랍에 비하여 너무나 협소한 지옥이라 할지라도 헛된 천국보다는 백배나 인간적이다.
 
119
이것은 희랍적 조화에 미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문학적 휴매니즘 위에 생신미(生新味)를 가한 루넷산스의 역사에서 우리는 배울 수 있는 점이 아닌가?
 
120
‘천국의 노예이기 보다는 오히려 지옥의 왕자’인 것이 언제나 인간적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대 현실이 모든 인간적인 것의 최후의 매장터일 뿐만 아니라 새 세대의 모태일때 또는 임의 새시대의 간난 것이 고고의 소리를 울린 뒤라면 휴매니즘은 일부러 리얼리즘의 부정 위에 건립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21
뿐만 아니라 시대의 리얼리즘을 통해서만 우리는 휴매니즘을 파악할 수 있고, 그것 없이는 문학이 제 세계 속에 진정한 휴매니즘을 실현할 수는 없다.
 
122
지상에 현실 속에 있는 휴매니즘을 그대로 두고 어느 천국에서, 어느 공상(空想) 속에서 인간을 데려올 것인가?
 
123
인간은 언제나 지상의 것이고, 현실 속의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에 현실 속에 인간이 없을때, 천상이나 공상 속에 있는 것은 결코 인간이 아니다. 인간적 현실의 리얼리즘으로부터 문학속에 이 세계를 창조할려는 리얼리즘으로부터 떠나갈려는 현실 휴매니즘, 혹은 무슨 ‘이즘’, 무슨 문학은 다 같이 휴매니즘 실현의 진정한 길을 포기하는 것이다.
 
124
그들은 현실을 알지도 못하고 깊이 탐구하지도 않고 쉽사리 현실에 절망하고만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문학이 그 빈곤때문에 허덕이고 있는 휴매니즘의 재건, 세계사적 휴매니즘을 창조할려면 인간을 간판으로 한 어떤 주의(主義)가 아니라 시대 현실의 핵심을 파낼려는 집요한 사실을 주의(主義)로 하는 문학정신 위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
 
125
리얼리즘이 현대적 암담(暗膽) 가운데 싹트고 명일의 양지에서 꽃필 장대(壯大)한 휴매니즘의 창조를 어떤 인간주의보다도 확실히 보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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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꿔 말하면 문학 위에서 최대의 휴매니즘은 레아리즘이다. 그러므로 문학적 리얼리즘에서 떠나감은 진정한 휴매니즘에서 떠나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순이론적(純理論的)으로만 아니라 문학적으로 휴매니즘을 휴매니티와 구별하게 되고 아전인수적으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휴매니티를 리얼리즘 가운데서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참된 문학은 현실이 미워도 현실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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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조광]」 4권 4호, 1938.4)
【원문】휴머니즘 논쟁(論爭)의 총결산(總決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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