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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의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가극 〈카르멘〉의 상연을 보지 못한 여러분들도 길거리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아이들이 하모니카로 부는 〈카르멘〉의 서곡은 가끔 들으신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가극 〈카르멘〉은 본시 프랑스의 소설가 메리메의 소설을 작곡가 비제가 가극화한 것으로, 처음에 이 소설이 발표되던 당시에는 평판이 너무 좋지 않아서 프랑스 인은 아무도 이것을 읽으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소설로서 이렇게 평판이 좋지 못한 것이 어찌해서 가극화되고 또 그다지 유명해졌는지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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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카르멘〉이 가극의 제재로 적당하다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예언자〉의 작곡으로 유명해진 마이어베어였습니다. 그는 곧 당시 일류의 희곡 작가 스크리브를 찾아가서 이것을 상의해 보았으나 스크리브는 하나의 소설로도 이같이 악평인 〈카르멘〉을 가극으로 성공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니 단념하라고 권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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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작곡가 오베르도 역시 이 점에 착안하고 스크리브를 찾았으나 그에게도 또한 위에 말한 이유를 들어서 단념하기를 권했습니다. 그러나 저자 메리메는 어디까지든지 자기 소설이 가극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자진하여 베를리오즈에게 작곡을 부탁했습니다만, 베를리오즈는 자기의 가극을 상연하였다가 실패를 당한 직후라 의기가 몹시 소침하여 〈카르멘〉은 너무도 근대적이란 간단한 구실 아래 착수할 생각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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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유명한 〈마르타〉의 작곡가 플로토도 일시는 〈카르멘〉의 가극화를 계획하고서 그 최후의 막을 해피 엔드(Happy End)로 개작할 것을 원작자에게 교섭했다가 작가의 동의를 얻지 못하여 최초의 계획을 버린 일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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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체 메리메란 당시 일개의 문학 청년으로 그의 성가가 전연 없었던 만큼 그는 자작의 소설을 가극화하여 이름을 일세(一世)에 흩날려 볼 야심은 불타듯 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렇게 용이하게 착수해 주는 이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메리메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콜롱바Colomba〉가 일찍이 각국의 작곡가의 속에서 작곡되어 하나도 성공한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로 그의 졸작이라고 하는 〈카르멘〉이 비제의 손에 가극화되어 예술과 흥행의 양방면으로 절대한 성공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비록 우연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일개의 아이러니컬한 사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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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의 명여우 (名女優) 사라 베르나르는 비제의 〈카르멘〉이 성공한 것은 자기의 덕택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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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불전쟁 직후 프랑스의 흥행사가 베르나르를 주연스타로 내세워가지고 9개월 동안 남미 각지로 순회를 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상연 종목은 고전파의 극보다는 위고나 뒤마 등의 근대극이 운동과 농업 이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남미 사람들에게는 적당하리라고 말했을 제, 베르나르는 〈카르멘〉을 연출하도록 지배인을 설복시켰습니다. 그리하여 극 중의 음악을 메이락크와 알레비 양인에게 맡겨서 작곡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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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사가 준비되어 금명간 출발하려고 할 즈음에 희극좌(喜劇座)의 좌주(座主)는 자기에게 소속된 베르나르를 9개월 동안이나 외지에 순회시킬 수는 없다 하여, 할 일 없이 베르나르의 대역을 물색해 보았으나 얻지 못하게 되자, 남미 순회 대계획은 출발 일보 직전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되고 보니 두 사람의 작곡가는 그 동안 불면불휴 작곡한 것을 쓸 길이 없게 되어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되자, 이것을 동정한 베르나르가 작곡가 비제를 찾아가서 이 사유를 고백하고 2인의 작곡가를 그에게 소개하여 그들의 원조 아래 가극 〈카르멘〉의 작곡을 시작하도록 권유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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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제는 별로 마음에 당기지는 않았지만, 그때에 그는 신혼 직후로 생활 안정을 얻지 못했던 만큼, 이것이라도 완성시켜서 생활의 일조(一助)를 얻을까 하는 생각으로 각본이 채 입수되기도 전에 소설을 수삼차 통독하여 장차 작곡할 분위기와 선율들을 만들어보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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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의 완성은 그의 신병으로 인하여 대단히 지체되었으나, 드디어 파리의 오페라 코믹 좌(座)에서 이것을 상연할 날은 닥쳐오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1875년 3월 3일, 비제가 죽기 3개월 전에 이 대가극은 훌륭히 초연의 막을 열었던 것입니다. 비제와 메리메의 기쁨도 기쁨이려니와, 그보다도 이 사업을 원조한 두 청년 음악가의 기쁨이야말로 과연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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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극이 초연되던 첫 시즌에 47회나 되는 장기의 속연(續演)을 하는 동안에 관중의 거의 60퍼센트는 파리 구경을 왔던 외국인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중대한 원인이 되어 이 〈카르멘〉은 속히도 세계적으로 선전되어 그 성가(聲價)를 올리게 된 것도 우연치 않은 행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인은 처음부터 국산의 이 가극을 몹시 냉안시했지만, 그 반면에 프랑스의 2대 적국인 독(獨) ․ 오(墺) 양국에서는 일찍부터 이 가극의 진가를 인식하여 카이제르 황제의 조부되는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는 자국 내에서 상연되는 카르멘 〈〉을 100회 이상이나 구경했다고 하니 실로 놀라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분은 〈카르멘〉을 출세시킨 은인인 동시에 도이칠란트에 있어서 이 가극이 얼마만한 열광적 환영을 받았을지도 족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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