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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 불경기! 원래 믿을 것 못되는 것은 인심이지만 황금궁핍에 의리의 심조조차 잊어버리는 등 가지가지의 경박한 인심을 빚어 내는 요사이니 불경기의 심도가 아마 지나쳐 심한가 보다. (10행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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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적 세태의 과정의 이면에 잠겨 꾸준히 힘 기르며 고요히 맥치고 있는 시꺼먼 일군(一群)이 있으니 이것이 장차 밝은 (약(略))을 운전하여 올 숨은 동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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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두운 뒷골목에서 좁은 방에서 얕은 책상에서 은은히 움직이고 붉은 열정도 다하며 방대한 힘을 길러 가는 것이니 이 힘의 성장은 거리의 구석에, 가두에, 서사(書肆)에 ─ 도시의 각처에 현현되어 스스로 도시의 일면상을 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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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잠시 한 서사에 나타난 이 힘의 성장을 살펴서 써 서울의 프로필의 일단을 엿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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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당 서점이라면 아마 서울이 가진 유일한 좌익서적 전문의 서점일 것이다. 규모는 작으나 경영하는 분이 색다른 이니만큼 이채 있는 서점이다. 주인을 여러 해 동안 (중략) 홀로 이것을 영리(營理)하여 가는 김씨의 여러 가지 수난에는 또한 눈물겨운 이야기가 스스로 많으련만 족외한(族外漢)인 나로서는 다만 사창(肆窓)에 어리운 고객의 그림자를 살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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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동안 서점에 시좌(試坐)하여 발견하는 놀라운 사실은 고객의 종류이니 그의 대부분은 루바슈카 입은 장발청년(이렇게 유달리 차린 청년이 서울 안에 몇 사람이나 있으랴마는)이나 첨단적 지식분자연(智識分子然)한 양복 계급이리라고 예상한 기대를 배반하여 버리고 고객의 대부분이 실로 중등학교 정도의 생도들이라는 것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이 서점을 찾는 수백 명의 고객의 구십구 퍼센트가 두발단삭(頭髮短削)한 쓰메에리 교복의 중학생들이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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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떼를 지어 선풍같이 우르르 몰려오기도 하고, 혹은 단독으로 들어와서 주밀한 주위와 신중한 관찰로 서가를 세세히 뒤져 보며 신간을 물색하고 힘에 맞는 서적을 선택하여서 머리 속의 체계를 정리하여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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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번잡한 거리에 날뛰지 않으며 공연히 백화점을 찾는 법 없이 다달이 가난한 학자(學資)를 할애하여 이 서점을 찾을 뿐이요, 하루의 대부분을 침침한 하숙방에 들어박혀 앞날을 위하여 새 과학 (중략)을 공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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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많은 기개(氣槪)들 숲에 섞여서 간혹 몇 사람의 전문학생, 대학생들이 이 서점을 찾아오기는 하나 그들은 새벽 하늘의 별같이 극히 희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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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탄식이 무슨 소용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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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벌려면’ 의학을 공부해야 하고, ‘거룩한 지위를 얻으려면’ 법률을 공부해야 하고 ─ 그들의 두뇌가 아직까지도 이 ‘아나크로니즘’ 의 지경에서 뱅뱅 돌고 새 출발을 용단치 못함을 어찌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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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高文) 합격을 필사의 목표로 삼년 동안이나 도서관 책상에 파고 엎드렸던 가련한 친구가 있고, 은행에 취직하여 급료가 풍성풍성하니 만족 변절하여 연구회의 옛 동지들까지 잊어버리는 가엾은 사람이 있는 것을 어찌하랴. 그야 대학생이라고 열이면 열 다 똑똑하랴마는 시대에 눈 어두운 사람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상아탑의 학원 속에서 철 아닌 ‘파아내서스’ 동산 속에서 낡은 글을 읊조리고 때묻은 골동품을 만지작거리는 꼴들이 너무도 딱한 것이다. 이들은 이 서점을 찾는 기예(氣銳)한 중학생들과 비겨 볼 때 우리는 그곳에서 또 대립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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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단정하게 차린 여학생들이 이 서점을 찾아와서 어떤 책부터 읽기 시작하였으면 좋겠느냐고 지도를 빌었다 한다. 그보다 이전에도 또 이런 일이 간간이 있었다 하니 그때의 귀여운 고객들은 어린 소학생이었다 한다. 얼마나 놀라운 일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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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곳곳에서 구석구석에서 그들은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다. 세태가 스스로 그들에게 바른길을 뙤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단순한, 너무도 단순한 두뇌가 많은 이 거리에서 어여쁜 백지들 많은 이 거리에서 그들은 얼마나 귀여운 동무들인가. 거리의 ‘넌센스보이’ 들이여, 동방의 여인들이여, 그대들도 모름지기 이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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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촌에 즐비하여 있는 화려한 백화점을 기웃기웃 사치한 물화(物貨)에 침을 흘리며 재즈 레코드에 헛 흥겨워 말고 어두운 현실 구석에 엎드려서나마 색다른 글줄이라도 읽어 보아라. 의상과 유행에 대하여서는 감수성이 지나쳐 예민한 그들의 안테나다. 강렬히 닥쳐오는 사조의 음파에 대하여서는 너무도 우둔하다 함은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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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을 모르고 재즈에 마음 뺏기는 법 없이 오직 서점을 사랑하고 어두운 방 구석에서 힘 기르는 지하실의 시꺼먼 일군! 이들 위에 (중략)는 약속되었나니 축복하노라. 그들의 장한 성장을! 동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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