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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잊는 여자! 이 분홍색 제목이 실없이 나를 괴롭게 하였다. 몇 마디 적기는 적어야 되겠는데 대관절 나에게 그런 알뜰한 이성이 있었던가. 녹주홍등(綠酒紅燈)의 거리에서 손끝에 스치는 가는 버들이 있을 법만 하건마는 그것은 괴어 오른 알코올의 거품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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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의 사막에 방황해 보았다. 한 송이 어여쁜 꽃을 찾아보려고 한 줄기 그윽한 향기를 맡아 보려고 그러나 나에게 그런 아름다운 행복이 있을 리 없었다. 잿빛 안개가 겹겹으로 싸인 사막은 쓸쓸하게 가로 누웠을 뿐이다. 나는 이 빛깔도 없고 윤갈도 없는 지나간 감정 생활을 돌아보매 말할 수 없는 비애가 가슴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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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일소년 홀홀이삼십(如何一少年 忽忽已三十).” 문득 어릴 적에 탐독한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의 글귀가 입술에 떠 오른다. 인생 30이면 소위 청춘의 햇발은 반남아 젊은 것이 아니냐. 어둑어둑해 오는 청춘의 황혼에서 못 잊는 정영(情影) 하나 감추지 못한 과거의 고개를 기울이며 지우는 한숨을 누가 감상적이라고 웃을 것이냐! 그러나 긴말은 고만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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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오래간만에 감상에 잦아진 것만이라도 덕이라 할까.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하나라도 부여잡는 격으로 나도 쓸쓸한 과거 감정의 사막에서 어슬픈 그림자 하나를 잡아내기는 내었다. 그것은 봄 아지랑이보담도 덧없고 하염없는 영상에 지나지 못할망정 생각에 떠오른 대로 못 잊는 여자라고 일러나 볼까. 그 그림자는 7, 8년 전 길거리에서 두어 번 지나친 어떤 부인의 모습과 방불하다.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다. 건망증 환자로는 남에게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나의 일이라 며칠을 두고 피차 교섭이 있던 사람도 1, 2일만 지나면 고만 씻은 듯이 잊어버리는 것이 버릇이거늘 길가에서 지나친 밖에는 아모런 까닭이 없는 그 부인이 7, 8년을 지난 오늘날 ‘못 잊는 여자’를 생각할 제 아련히 나타난다는 것은 정말 모를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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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모양은 점점 역력해진다. 가늘고 긴 눈썹 - 이른바 원산미(遠山眉) 수정같이 맑으면서도 저윽이 붉은 광채가 도는 듯한 눈, 적으나마 예쁘게 쪽선 콧대, 새빨간 채송화 꽃잎처럼 붉은 작은 입, 잠깐 수심을 띤 듯한 핼슥한 얼굴빛……머리에는 조바위를 썼든가 말았든가, 발에는 분명히 운혜를 신었었다. 깨끗한 옥양목 두루막을 입었는데 홀쪽한 키와 자그마하나마 묘하게 짜인 얼굴이 두말 적 없이 어울렸다. 조그마한 손은 언제든지 옥판 선지의 축을 들고 있었다. 서화(書畵)공부를 다니는 어느 심규(深閨)의 부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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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걸음걸이야말로 더욱 선하게 눈앞에 나타난다. 길바닥이 솜이나 무엇같이 그의 발이 스치는 대로― 그렇다. 그는 땅을 밟지 않았다. 다만 곱게 가볍게 부드럽게 스쳤을 뿐이다.― 폭신폭신하게 들어가는 듯하였다. 하느적하느적 화원에 넘나는 나비의 날음날이도 이러할까. 구름 위를 걸어간다는 선녀의 보법(步法)도 이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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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閒雅), 전려(典麗), 균제(均齊)의 동양적 미가 그의 왼 몸에 거지(擧止)에 사향(麝香)과 같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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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을 자꾸 적으면 무얼 하잔 말인가. 여기서 그의 미를 예찬한들 쓸 데가 무에냐. 두어 번 내 안계(眼界)를 스칠 뿐이었고, 벌써 7, 8년 전 동안 사라지고만 이름도 모르는 그이를 두고 뇌이고 또 뇌인들 소용이 무엇이냐. 속절없는 노릇이 아니냐. 그이가 나의 유일한 ‘못 잊는 여자’ 노릇을 할 줄이야! 그이는 물론 꿈에도 몰랐으리라. 이 글을 적는 나의 가슴은 왜 쓸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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