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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전날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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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3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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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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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았던 자리가 채 녹기도 전에 이동 명령이다. 정말 어떻게 되어가는 판인지 알 수가 없다. 장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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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니, 어떻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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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 안에 있던 십여 개의 입 중에서 아마 네다섯 입이 똑같은 말을 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같은 시각이었다. 고저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장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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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떻게 한다는 거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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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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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한다는 거야! 그것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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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병, 군대밥 좀더 먹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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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수병이 하는 소리다. 언제나 또 무엇에나 체념이 빠른 박 수병이다. 그는 벌써 행장을 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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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식, 또 서둘러댄다! 박 수병! 너 혼자서 먼저 이동할 작정야? 서둘러대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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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내가 맨 앞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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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수병의 말에 실소들을 했다. 사실 박 수병은 맨 앞이다. 실소 끝이라 공허가 더 했다. 찬바람이 휘 돈다. 산악 지대라서만도 아니다. 불길한 예감이 든 것이었다. 화산에서 연닷새 이동이다. ㄷ산이 아무래도 무너진 것 같다. ㄷ산을 뺏긴다면 포위될 위험성이 다분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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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들! 첨부터 우리한테 맡기라니까 억질 피우더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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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참모 윤 일조가 밖에서 들어오면서 철모를 내동댕이친다. 이 소대에서는 물론 중대에서도 군대밥을 가장 많이 먹은 고참이다. 작전 횟수도 그러려니와 예언이 또 잘 들어맞는다. 작전참모란 별명도 그래서 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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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산을 그리스군이 맡는다는 이야기가 났을 때 작전참모는 길길이 뛰었었다. 우리 해병대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악전을 많이 했다고 해서 작전에서는 그리스군을 내세웠었지만 두 번이나 실패를 했었다. 철의 삼각지의 ㅂ고지에서도 그랬고 ㅁ고지에서도 그랬었다. 그리스군으로 결정이 되자 작전참모는 중대장한테로 달려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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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장님! 안 됩니다! ㄷ산 고지는 제가 잘 압니다. 그리스군한테 맡겼다가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면 우린 또 포위당합니다. 덩케르크 정도가 아닐 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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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장도 잘 알고 있었다 . 그러나 중대장한테도 작전 지휘권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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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소를 띄우며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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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참모한테는 어디까지나 참모의 권한밖에 주어지지 않았어! 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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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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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으면 물러가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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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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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참모를 내어보내고 중대장도 주먹으로 가슴을 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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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참모의 예언은 불행히도 들어맞고 말았다. 그리스군이 무너지자 영군이 투입되었다. 영군도 무서운 참패를 보고 퇴각을 했다. 다음에 미군이 투입되었다. 그 미군이 또 불과 세 시간 전투에 백여 명의 희생자를 냈던 것이다. 긴급 비밀회의가 개최되었다. 연달은 패배로 진중에는 불안이 떠돌았다. 하이얀 공포에 싸인 채 밤이 밝았다. 작전 사령부에서도 급기야는 손을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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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산은 우리 해병대에 맡겨보기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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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라! 내 말이 뭐랬나!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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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같은 분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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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식 전쟁엔 수호지식으로 싸워야 하는 법야. 벼 짚단으로 만든 허수아비한테 암만 기관총을 쏘아봐라! 피 한 방울 날 줄 아느냐? 연합군은 손자병법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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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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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산이 또 무너졌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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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묻는 부하한테 중대장은 장검을 뽑듯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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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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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어둠이었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밤의 기온은 자정을 기하여 얼어붙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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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별빛이 겨우 길만을 희미하게 비쳐줄 뿐이었다. 언제 어디서 복병이 튀어 나올지도 모르는 산악지대다. 일체의 불빛은 엄금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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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대로 죽음에의 길이었다. 지옥에의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무서운 포화가 터졌건만 아직도 맹수 소리가 간단없이 들린다. 어둠의 행진을 진지하게 했다. 죽음의 행진처럼 말 한마디 없다. 이런 때면 장병들은 고향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그리운 고향의 산천, 아직도 겨드랑이에 따뜻이 남아 있는 부모님의 애정, 형과 동생, 누님과 누이의 그리운 모습들, 애인과 아내의 사랑스러운 얼굴들, 지금의 그들에게는 괴롭고 슬프던 일을 추억함으로만도 오히려 기쁠 수 있었다. 아니 오직 그리운 고향 산천을 바라보고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을 눈앞에 그리어보는 것만으로 즐거울 수 있었다. 고향 산천을 그리는 동안에는 추위도 몰랐고 피로도 몰랐다. 십상 팔구는 죽음의 길일지도 모르는 길이건만 불안도 공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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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어머니는 앉아 계시겠지? 아들을 생각하시고, 아들의 신상에 재앙이 없기를 빌고 계시겠지… 형은 알 게다. 누이는 새벽 공불 하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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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야 할 이런 추억도 그대로 시였다. 아름다운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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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닌 내 사진을 꺼내 들고 앉으셨을지도 모르지. 언젠가의 편지처럼 돋보기를 쓰시구 희미한 불에 내 얼굴을 좀더 자세히 보시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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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실 게다. 우시다가 그대로 잠드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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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꿈속에서 또 아들의 그리운 얼굴을 만나보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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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울면서도 역시 즐거울 수 있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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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들이 쓸쓸할 땐 고향 생각을 해라. 고향이란 언제나 우리를 즐겁게 해준다. 가장 밉던 어릴적 친구의 얼굴도 너희들을 즐겁게 해줄 것이다. 고향은 기쁨의 샘이니라. 고향은 인간을 갖은 악으로부터 수호해주고, 갖은 슬픔을 극복하게 해주는 신비한 존재다. 그러기에 고향을 버린 사람은 거칠어지고 악해진다. 이 고향을 그리는 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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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장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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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향수가 자라고 자라는 동안에 너희들은 조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인간이 진실한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과오가 없는 법이다. 이 고향과 조국에 대한 너희들의 애정이 진실한 동안에는 너희들의 신상에는 조그마한 불행도 오지 않는다. 너희들이 고향을 버리고 조국을 잊고 하면 수많은 헛된 생각이 너희 머리를 어지럽게 할 게다. 그러면 너희들은 잘못을 저지르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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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붙들듯이 하며 타이르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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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장님은 시를 아는 사람이야. 고향을 버린 사람은 시를 모른다 ―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지. 대장은 시인인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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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병조 이문찬도 대열에 끼여 있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보다도 대장에 대한 깊은 애정이 따스하니 그의 몸을 녹이어주고 있었다. 대장은 정말 좋은 말을 해주었느니라 했다. 친형한테 대한 그런 애정이요, 존경이기도 했었다. 문찬은 그가 시를 쓴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쓰고자만 하면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을 사람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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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이 나의 형이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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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찬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불행히 그에게는 형이 없었다. 위로 둘이 다 누님이다. 밑으로도 여동생이 둘이었다. 그와는 단지 한 살밖에 틀리지 않는 남동생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연년생이지만 쌍둥이 같았다. 키도 그랬고 얼굴도 그랬었다. 무엇보다도 음성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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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난 또 문식이라구. 어쩌면 너의 형젠 음성까지가 그렇게두 같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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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그러고 웃으셨다. 대견해하는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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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 때도 그랬다. 어머니와 누이들은 문찬이와 문식이의 발소리를 통 분간 못했었다. 통통거리는 발소리가 나면 어머니는 형이라거니 누이는 동생이라거니 하고 싸웠었다. 그러나 매양 어머니도 누이도 틀렸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문식이는 그런 소리를 듣기 싫어했었다. 제 형과 똑같다는 것이 싫은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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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썅 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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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고 같다는 소리를 누가 하면 이렇게 악을 썼었다. 썅이란 문식이가 몹시 나쁜 의미로 쓰던 말이었다. 평안도에도 ‘썅’이란 소리가 나쁜 욕으로 씌어진다 해서 썅자를 하나 덧붙인 것이다. 무엇이나 마땅하지 않으면 “썅 썅!”이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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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말마따나 우애있던 형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그리웠고 동생 문식이와 어려서 쥐어뜯고 싸우던 회상도 결코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흐뭇한 즐거움이다. 문식은 지금 스물넷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문찬은 중학 오년 때 해방을 맞았었다. 문식도 같은 오학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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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되던 이듬해 문찬은 월남을 했었다. 더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그 말을 듣고 문식은 형을 비겁하다고 했다. 이기주의라고 까놓고 욕도 했었다. 늙으신 부모는 두고 저 혼자만 월남한다는 것은 에고이즘이라고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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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같으면사 앵이 가겠다. 저만 공부하믄 그만임메? 썅! 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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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식은 문찬이가 월남해가는 것을 속으로는 되레 좋아했을지도 모르던 것이다. 한살 틀림에 형입네 하고 뻐기는 것이 눈꼴 상그러웠던지도 몰랐다. 문식이는 그런 아이였었다. 다급하면 형을 내어세웠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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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더럽다이. 무스게 나 한 살 더 먹구서리, 성성 함메? 썅! 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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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도 많이 한 형과 아우였다. 문식이는 동생이라고 한번 지지 않았다. 반은 달랐지만 성적도 문식이가 위였다. 운동도 그랬다. 문식이는 재치도 있었고 몸도 날랬었다. 형이면서도 매사에 지기만 한 터라 문찬이 자신 동생을 미워했던지도 모르던 일이었다. 미워하기까지는 몰라도 시기를 했을 문찬이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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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문식이도 지금은 가장 그리운 사람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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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식이도 나처럼 군대에 뽑혀 나왔을지 모르지. 놈들이 그냥뒀을 리가 없지 ― 육십 노인까지 잡아간다는 놈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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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찬은 이런 생각을 하며 기계적으로 걷고 있었다. 극도의 피로는 무서운 위력으로 잠을 갖다 씌운다. 졸지 말아야 한다는 의식은 있으면서도 문찬은 가끔 깜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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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들 말아라. 졸다간 감기 든다. 여기서 감기 들렸단 그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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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연사흘 동안 강행군이다. 어제는 더욱이 밤을 새워 걸었었다. 오후 세시에 겨우 목적지에 와서 쉬일 만하니까 또 갑자기 이동명령이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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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작전에 한 중대의 사정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도 ㄷ산은 지금 무인지경처럼 되어 있던 것이다. 잘못하면 이쪽 진지의 모든 시설까지 놈들한테 점령당할 위험도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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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는 날이면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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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던 ㄷ산 A고지 밑 진지에 도착한 것은 예정시간보다도 한 시간 이른 네시 정각이었다. 날이 밝아서 이쪽 진지가 비었다는 것을 놈들이 확인한다면 그대로 밀려 내려올 위기였다. 진지에는 이송하다가 남은 약간의 부상병과 한 소대 수효도 채 못 되는 장병들이 초조하니 교체 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고 지휘관은 소령이었다. 교대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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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우리의 전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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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미 해병 소령은 중대장을 얼싸안았다. 우리 해병대의 부대장은 K대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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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좀 만져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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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한 장교가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고 있었다. 물에 씻고 난 손처럼 물이 흥건했었다. 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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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귀 부대를 얼마나 기다렸다는 것을 이 손은 충분히 설명해주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귀 부대가 이렇게 정각 전에 도착해주었다는 데 대한 감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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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마디로 족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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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부대 간부들은 적정에 대한 충분한 보고와 토의를 끝마치고 전원 임무에 배치를 완료했다. 오늘 밤까지에는 또 한 대대가 도착할 예정이다. 거기에 대한 보급 기타 장비에 대한 연락을 끝내고 미 해병대는 새 임무지로 후퇴를 했다. 다행히 식량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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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한시에 도착한 대대를 맞아 장병들은 환호를 불렀다. 이만한 병력이란다면 이 진지를 수비하기에는 충분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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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니까 오늘 밤은 유감없이 즐기도록 하라. 음식은 충분하고 술도 있다. 단 과음은 말 것. 내일의 전투를 위한 일체의 장비를 열다섯시까지 완료할 것. 열다섯시 십오분부터 일체 검열이 실시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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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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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쳤!” 소리에 장병 할 것 없이 입이 떡 벌어졌다. 싸움을 앞둔 장병들의 기쁨이란 또 각별한 것이다. 불안과 초조에 떠는 소심한 장병도 전투개시 명령만 내리면 용기가 백배한다. 그 전투를 앞둔 하룻밤의 휴식이었다. 요새 며칠은 연달은 이동에 보급도 신통하지 않았었다. 건빵 몇 개가 한 끼의 식사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장병들 눈앞에는 진수를 다한 성찬이 있었다. 술도 있었다. 세계 각국의 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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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들은 일체 장비의 정비를 하면서도 콧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난히도 애수를 띤 강원도 아리랑이 들리는가 하면 때아닌 성탄절 노래도 흘러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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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잠긴 밤 주의 품에 안겨서 감사 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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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전 장병들의 합창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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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의 깊은 산속은 춥도 덥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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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시 십오분, 일체의 장비 검사가 시작되었다. 총기와 탄환, 기타의 일체 보급은 두말할 것도 없었지만 신발 끈, 단추 한 개에까지 무섭게 세밀한 검사다. 장교들의 표정도 각별하게 긴장이 되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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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시간을 기해서 장병 참석하에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부대장은 손수 중대장들의 잔에 술을 부어주며 전공을 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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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장병들도 대대장과 함께 잔을 높이 들어 전승과 건강을 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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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술 한잔 받으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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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가 권주가를 불러 합창이 시작되었다. 노래가 끝나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병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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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소가 터지는가 하면 박수가 인다. 일선, 그것도 적과의 접선이 불과 수 백 야드밖에 안 되는 최전선에서의 장병들의 향연은 그대로 전쟁이었다. 병째 들고 마시는 장병도 있었다. 끼고 도는 수병도 있다. 쇼의 무대처럼 포옹도 하고, 키스도 하고 우는가 하면 폭소가 터지고 폭포 같은 웅변도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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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를 약 한 시간, 장병들은 귀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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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무장 총원 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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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섬광 같은 명령이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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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훈련인가 했다. 너무 군기가 문란해질까봐서 미리 하는 단속이려니 했다. 이 즐거운 날 밤에 전투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칠칠암야였다. 오늘은 그 몇 개 아니되던 별조차도 없었다. 어둠 속에 전 장병이 정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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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소대, 제2소대, 제3소대, 이제로부터 원한의 ㄷ산 고지 탈환전을 전개하고자 함! 불리어진 각 대장은 대대장실로 집합. 각 대원은 전투장비에 유감이 없기를 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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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도 설마 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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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설마 정도가 아니었다. 오늘 밤을 기해서 전 병력을 ㄷ산 고지 탈환전에 투입한다는 것이다. 돌격부대, 증원부대, 보충부대, 후방부대 ― 대대장의 편성은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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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이 점령하고 있는 ㄷ산은 24개의 고지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 고지가 또한 이중과 삼중으로 되어 있다. 반월형의 능선을 따라서 참호가 벌집처럼 산재해 있다. 적의 병력 수는 아직 확인된 적이 없다. 인해전술을 유일한 전법으로 삼는 오랑캐들은 실로 천문학적 보충 부대를 갖고 있었다. 전열의 참호를 탈환한다 해도 후열 삼 열 이렇게 반월형이 된 진지다. 더욱이 전열의 진지는 45도의 경사였다. 45도 절벽 산악전의 귀신이라고까지 일컫던 그리스군이 참패를 한 것도 이 무서운 절벽 때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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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절벽.”
 
103
“지옥의 ㄷ고지.”
 
104
이런 이름으로 전세계에 알려진 절벽이다. 첫째 발을 붙일 수가 없다. 평지라도 몸에 겨운 무기였다. 이 무거운 무기를 지고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산이 아니라 비탈이다. 45도의 절벽에 무거운 무기와 포탄을 메고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세 발자국 올라갔다가는 네 발자국 미끄러져 내려왔다. 거기에 고지에서는 수류탄이 비오듯 하는 것이다. 중공군이 난공불락의 고지라고 호언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열 사람이 능히 수백 명을 막을 수 있는 요새이었었다. 이등병조 이문찬은 제3소대 소속이었다. 이 소대가 또 마침 선발대로 지명이 된 것이다. 전투경력은 많은 문찬이었으나 ㄷ산에서의 야습작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명령을 받는 순간 문찬은 혁대를 바짝 졸라매었다. 습관이었다. 혁대만 졸라매면 그의 모든 전투 준비는 끝난 것이다. 그의 전투 준비는 또 바로 죽을 준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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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벼라! 어떤 놈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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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선전포고이기도 하다.
 
107
“인제 난 생명을 내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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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체념이기도 했었다. 출발은 정각 열시, 작전본부에서 오늘 밤을 택한 것이며 이 시간을 정한 데는 그럴 이유가 있다. 놈들은 어디까지나 수호지식의 전법이었다. 이쪽은 과학전이다. 밤에는 쉬고 낮에만 싸운다. 거기다가 일요일은 쉰다 ― 이런 관념이 놈들한테는 꽉 박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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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또 사실이기도 했었다. 그리스군이고, 영군, 미군, 심지어 터키군까지도 단 한 번 야습을 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놈들의 원시전에보다도 한번 더 옛날 전법을 현대 과학전 대신 감행하자던 것이다. 적의 생리를 역용한 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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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찬 이등병조는 중대장의 지휘 밑에 있었다. K부대장은 전 장병을 모아놓고 마지막 훈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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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탄은 비겁한 자만을 노린다. 용기있는 인간 앞에서는 포탄은 아무 힘도 못 쓴다. 제군들도 지금까지의 전우를 회상해보라. 용기있는 동료로서 죽은 사람이 있던가? 없을 것이다. 주저한 자, 겁을 낸 자만이 희생이 되었었다. 특히 이번 작전은 조국의 운명을 건 작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작전에 그리스, 영국, 미국, 터키 ― 네 나라의 장병이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해병대의 모든 명예가 걸린 작전이다. 전세계의 인류가 지금 눈을 똑바로 뜨고 우리의 작전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전은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다. 우리까지 패한다면 우리의 십만 대군은 적에게 포위가 될 것이다. 덩케르크의 비극 정도가 아니다. 이는 우리 삼천만의 비극이요 전인류의 비극이다. 제군의 용전은 소련의 세계 적화의 방패가 되는 것이다.”
 
112
그러고 나니 정각 열시 십오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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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찬이 소속된 이 중대장은 전 대원을 어루만지듯,
 
114
“잘들 싸워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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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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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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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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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리까지에는 단숨에들 달리었다. 거기서부터 다시 분산하기 시작했다. 둘이 일단이 되기도 했고 셋이 일단이 되기도 했다. 셋 이상은 위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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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찬은 박 수병과 김 수병 셋이서 일단이 되기로 했다. 고지 뒤를 돌아서 측면을 오르기로 한 것이다. 절벽은 위험도 했거니와 도저히 발을 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대로 바람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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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리가 난다. 등에 진 경기관총의 중량이 몸을 뒤로 잡아낚는다. 세 발 옮겨 놓고 두 발 내려왔다. 이렇게 기어올라간 것이 한 번 잘못으로 두어 칸이나 내리구르고 말았다. 뒤따라 올라오던 박 수병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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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올라갔다. 이 ㄷ산 작전은 크리스마스 밤부터 보름 동안이었지만, 보름 동안을 두고 이 절벽을 오르고 내리밀리고 한 세음이었다. 마지막 날 밤의 전투가 가장 치열했다. 기습 도중 의외로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우군이 실족으로 내리구르는 통에 폭발이 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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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화가 되었다. 자는 곰을 깨운 폭이다. 마음놓고 자던 적들이 기관총을 볶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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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맹목적이었다. 덮어놓고 둘러대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더 위험하다. 어디서 쏘는지도 알 길이 없다. 이쪽에서는 총탄을 받을 뿐이었다. 쏘기는 커녕 몸의 중심을 잡기에 더 겨를이 없다. 거기에 놈들이 무턱대고 수류탄을 던져대기 시작한 것이다. 희생자도 날 것이었다. 그러나 좋았다. 놈들에게도 수류탄에는 한도가 있을 것이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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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사관님, 좀 방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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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수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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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시간이 없어. 밝기 전에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면 우린 전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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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가 많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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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기야, 뭐 좀 있었겠지. 보구 쏘는 것두 아니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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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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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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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기관총이 콩을 볶아댄다. 그렇다고 쉴 수는 없었다. 보이지도 않는 적 앞에서 미리 굴복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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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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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찰나였다. 앗 소리와 함께 김이수가 내리구르기 시작했다. 물론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소리가 날 뿐이었다. 얼마를 굴렀을 때다. 폭음이 연거푸 두 번이 났다. 김이수의 수류탄이 폭발한 것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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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수병, 조심해서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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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 하사관님이나 조심하세요!”
 
136
이렇게 기어올라갈 무렵 분명히 수류탄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그들 머리 위였다. 방향도 모르고 몸을 피할 수도 없다. 발이 허공에 떠 있으니 피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137
“꽝!”
 
138
무서운 폭음과 함께 불이 번쩍 빛난다. 칠칠 어둠 속이라 그런지 찬란하기까지 한 불빛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전후방의 연락도 두절이 되고 말았다.
 
139
생각하면 실로 대담한 작전이었다. 무모하기까지 한 작전이다. 전 병력의 삼분지 이를 단번에 투입한 것이다. 패한다면 오직 그뿐이었다. 일종의 배수진이었다.
 
140
대대장 이하 전 장병은 작전본부에서 무전기를 둘러싸고 있다. 시시각각으로 연락병한테서 오는 무전에 일희일비였다. 영하40도의 산속이건만 오히려 땀이 흐르고 있었다.
 
141
“수류탄 몇 개 폭발했지?”
 
142
“도합 열세 갭니다.”
 
143
“열세 개! 놈들이 던진 것이 몇 개나 될꼬?”
 
144
“글쎄올시다. 반 이상이 고지 밑에서 터졌습니다. 아직 아군은 반 가량밖에 못 갔을 겝니다.”
 
145
“그럼 반은 우리가 가졌던 것이로군! 분하다!”
 
146
그때 무전이 또 들어왔다.
 
147
“응 응, 적 진지에서 이백 미터? 응, 뭣이? 적의 기관총이 두 대?”
 
148
그때다. 고지에서 약 백 미터 지점에서 불이 번쩍한다. 대대장은 무전기를 두드려대고 있다. 아무 반응도 없다.
 
149
“아, 아, 아!”
 
150
아무리 해도 이렇다 하는 반응조차도 없다.
 
151
“마쳤구나!”
 
152
피가 섞인 절규였다. 무전이 끊어진 때를 계기로 무서운 폭음과 연광이 그칠 사이가 없다. 시계는 정각 네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네시라는 숫자가 무서운 불길을 가져다준다. 네시 정각에서 볶아치던 폭음도 딱 그치고 만 것이었다. 불길한 침묵이 끝없이 계속되고만 있다. 전원 전사를 했다는 말인가?
 
153
뼈가 깎이는 듯싶은 침묵이 또다시 깨어졌다. 역시 수류탄의 폭음이었다. 두 개, 세 개, 폭음 사이사이로 기관총이 또 볶아친다. 그러나 무전은 단 한마디 연락이 없다.
 
154
또 침묵이 오고 말았다. 그 침묵은 그대로 깨어질 줄을 모르고 말았다. 인제는 더 주저하고 있을 때가 못 되었다. 대대장은 최후의 결심을 했던 것이다. 보충대에 돌격 명령이 내려지고 만 것이다. 대대장도 이 마지막 전투에 참가할 결심이었던 것이다. 그도 죽을 각오였었다. 혼자 살 수는 없었다.
 
 
155
5
 
 
156
인간이 본래부터 무기만을 가지고 싸운 것은 아니다. 원시시대에는 오직 주먹만으로 싸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칼이 생기고 활이 생기고 총이 생겼을 것이다. 무기가 없다면 인간은 본래의 자태로 돌아갈밖에는 없다. 무기가 최고도로 발달된 오늘날 맨주먹만의 육박전을 하고 있었다면 현대인은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웃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157
그러나 ㄷ산 고지의 탈환전은 완전히 원시시대의 육박전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것이 문명의 퇴보라도 좋다. 인류의 후퇴라도 좋았다. 거기에는 현실이 있을 뿐이었다. 무기라고는 무엇 하나 몸에 지니지 않은 인간과 인간과의 난투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158
밝기 전의 암굴 속이니 피아의 구별이 갈 리도 만무다. 적을 구별하는 방법은 오직 놈들의 머리를 꺼들어 보는 일뿐이었다. 머리를 길렀으면 우리 편이요, 깎았으면 적이었다. 이론의 싸움이 아니니 말이 교환될 리도 없다. 오직 비명과 절규가 있을 뿐이었다. 더욱이 이등병조 이문찬이 인솔한 혼성 결사대가 습격을 한 제일 토치카는 이십여 명이나 되는 적의 본거였다. 이 굴속에서 피아간 사십 명의 인간이 맞붙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꼭 피아만의 싸움도 아니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적이다. 적과 적이 마주붙어 물고뜯었고 우군끼리도 그랬었다 . 적과 우군의 최후 판단은 역시 머리를 꺼들어 보는 방법뿐이었다. 상대방을 고르는 것도 아니다. 어둠 속에서 팔을 내저어 닿는 인간이면 그것이 적이었다. 손에 스치는 인간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이쪽이 죽어야 했다. 방법은 목을 조르는 것이 가장 정확했다. 볼을 훑는 것도 묘방이었다. 그러나 워낙 옷을 많이 입어서 손에 잡히지가 않는 것이다.
 
159
그래도 문찬은 두 놈이나 그런 방법으로 해치웠었다. 한 놈은 목을 졸랐다. 목을 졸라 쓰러뜨리는 순간 네번째 놈한테 머리를 잡힌 것이었다. 무섭게 억센 손이었다. 날쌔기도 했다. 놈은 머리가 잡히기가 무섭게 한 팔로 목을 끌어안고 졸라대던 것이다.
 
160
그는 최후의 발악을 했다. 염라대왕과의 싸움이었다. 순간, 아니 찰나였다. 문찬은 졌다고 생각되었다. 번개 같은 예감이었다. 아니 실감이었다. 십 년 전 열다섯 살 때였다. 문찬은 열병을 앓았었다. 사십도 열이 일주야를 계속했었다. 그날 문찬은 염라대왕을 보았었다. 놈도 그의 멱살을 잡고 졸라대던 것이다. 물론 꿈이었고 의식도 없었다. 그러나 오직 한 의식은 죽는다는 것뿐이었었다. 놈한테 졌다는 절망이 그에게 위대한 힘을 내게 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이겼었다. 염라대왕을 단번에 쳐서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그때의 그 절망이다.
 
161
문찬은 기를 써 보았다. 그러나 워낙 센 놈이었다. 의식이 멀어가는 것을 깨달을 수는 있었다. 다만 그뿐이었다. 문찬은 최후의 발악을 했다. 놈의 배에 무서운 일격을 주었던 것이다. 십 년 전 염라대왕한테서 목숨을 찾던 그 일격이었다. 그 순간 놈의 팔이 늦추어졌다. 한결 숨이 통한다. 이것이 그가 원기를 회복한 계기가 되어주었다.
 
162
문찬은 놈의 팔에서 목을 빼면서 멋지게 헤딩을 했던 것이다. 머리는 놈의 가슴을 들이받았던 모양이었다. 놈은 뒤로 나자빠졌었다. 그러나 놈은 무섭게도 날쌔었다. 넘어가면서도 어느새 그의 머리를 잡았던 것이다. 놈과 함께 문찬도 쓰러졌었다. 놈의 배를 타고 앉은 셈쯤 되었다. 넘어지면서도 문찬은 놈의 목을 더듬었다. 목이 손에 잡히었다. 문찬은 머리를 꺼들린 채 놈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놈은 버둥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163
이쯤 되면 승부는 이미 결정된 셈이다. 놈도 여간내기가 아니다. 목을 졸린 채 문찬의 허리에 두 손을 돌리더니 깍지를 끼고 조여대던 것이다. 무서운 힘이다. 문찬은 허리가 척 부러진 것을 느끼었다. 그 사품에 놈은 또 원기를 회복하고 마지막 발악을 했던 것이다.
 
164
엎치락뒤치락 두 번이나 뒹굴고 있을 때다. 문찬은 놈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이 딱 굳어지고 말았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165
문찬은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다!
 
166
그는 또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있었다. 두번째 같은 소리가 놈의 입에서 나오던 것이다.
 
167
“썅! 썅!”
 
168
“뭐?”
 
169
문찬은 놈의 목을 풀었다.
 
170
“너 문식이냐?”
 
171
“……”
 
172
아무 말이 없다.
 
173
문찬은 속삭이듯 다시,
 
174
“너 문식이냐? 나 문찬이다!”
 
175
“형님이오?”
 
176
“그렇다, 내다, 나야!”
 
177
그때까지도 아직 먼동은 틀 생각도 않고 있었다.
 
 
178
6
 
 
179
그들의 싸움은 응당 여기에서 끝났어야만 할 일이다. 그들은 적이 아니었으니까.
 
180
그러나 둘의 싸움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 싸움은 박치기를 하고 목을 조르고 그런 정도의 싸움은 아니었다. 형이 죽느냐 아우가 죽느냐 하는 것이 지금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181
문식은 형한테 본격적인 싸움을 걸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문찬은 휘갑이 되고 있었다.
 
182
아까까지는 둘은 맹목적인 적과 적이었었다.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본능적인 적이었고 싸움이었다. 적이겠거니 하고 싸운 것이다. 그러나 인제는 정말 적임을 서로 확인하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싸움이었고 적이었던 것이다.
 
183
“문식이도 빨갱이가 되어 있을까?”
 
184
형은 아우한테서 집안 소식을 들으면서도 이런 생각이 앞서던 것이다. 형과 아우면서도 이런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비극이었다. 슬펐다. 가슴이 저리었다. 그러면서도 일단 그런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지금의 형이었었다.
 
185
‘만일에 문식이가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있다면? 그리고 문식이가 내가 얼마나 공산주의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면? 날 또다시 적으로 돌릴까? 그리고 다시 본격적인 싸움을 하자고 들 것인가?’
 
186
형은 아우의 얼굴을 훔쳐보고 앉아 있었다. 싱겁게 먼동이 트기 시작한다.
 
187
“문식아!”
 
188
“?”
 
189
“너 어느 정도지?”
 
190
“뭐가? 사상?”
 
191
“응.”
 
192
“건 뭣하러 물어보우?”
 
193
“형제간에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우리는 형제니만큼 그걸 되도록 알 필요가 있어. 넌 나의 동생이니까, 난 형이구. 너와 나는 같은 아버지의 피를 받은 형제니까. 내가 이걸 묻는 목적은 아무것두 아니야. 네가 날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인가 그것이 알고 싶을 뿐이다.”
 
194
“……”
 
195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동생의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 침묵일까?
 
196
“난 너의 사상을 구속할 의산 조금도 없다. 인간은 자유니까. 또 구속한다구 구속 되는 것두 아니구. 어떠냐, 너 공산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197
“형님이 말하는 뜻 다 알겠소. 나두 아까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귀순할 수 없을까 하고. 정말 남쪽이 그리웠어요, 서울이. 형님은 내가 사년 동안 그놈들 교육을 받았으니까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있을지두 모른다 ― 그것이 불안해서 그러죠? 허지만 쓸데없는 기우야.”
 
198
“그래?”
 
199
“난 죽어두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어요. 만일 소련놈들만 안 나왔다면 나두 혹 공산주의자가 됐을지 모르지. 아냐, 됐을 거야. 노동자, 농민이, 우리 인구의 거의 전부가 잘 사는 셈인데 뭐, 그 이상 더 좋은 정치가 있겠어요? 그러나 북의 정치는 소련놈이 망쳐놓았지요. 소련이 만든 공산주의를 소련놈들이 와서 깨었지요. 형님두 들어서 짐작은 하겠지만 이북은 완전한 소련의 영토화했습니다. 정치는 물론 경제권도, 재채기도 소련식이 아니면 반동입니다. 거기서 내가 만 사 년을 살았어요! 나두 몇 번이나 월남을 하려구 계획을 했었지요. 그래, 원산까지 두 번이나 왔다가 도로 갔었구, 차호에서도 한번 밀선을 타려다 그만두구. 아버지 어머니 총살 당하시는 것이 눈에 버언해져서… 그래서 일체를 단념했어요. 이 하늘 밑에 살고 있는 이상 나도 공산주의자가 되리라고 했었어요. 공부도 했구, 노력도 했구, 그래두 안 됩디다. 생리적으로 안 맞는가봐.”
 
200
“고맙다, 고맙다!”
 
201
형은 아우의 손을 잡았다. 정말 고마웠다. 정말 형과 아우가 싸우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던 긴장이 탁 풀린다.
 
202
되레 싱거웠다.
 
203
“문식아, 정말 고맙다. 네 말을 듣기까지엔 난 정말 불안했었다. 네가 만일 정말 공산주의자가 되어 있다면 내 뒤를 따라오려고도 않을 게구, 그렇다고 널 그대로 돌려보낼 수도 없지 않으냐. 군법은 그것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까. 너와 정말 아까처럼 싸우게 되는 것이나 아닌가 그것이 겁났었다.”
 
204
“형님, 그럼 날 받아줄까?”
 
205
“내가 있지 않으냐? 내가!”
 
206
“난 정말 이번 싸움에 끌려나오면서 그런 기횔 보리라 했었어. 그럴 기회만 있다면 포로 수용소에 갈 작정하고 탈출할 계획이었어요. 허지만…”
 
207
“허지만?”
 
208
“……”
 
209
“단념했어요!”
 
210
“어째서? 응?”
 
211
“연만하신 아버지 어머니 총살당하게 할 순 없어. 지금까진 말을 않았지만 형님이 월남하시구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운 고문을 받으신 줄 아우? 만 한 달 그 무서운 고문 끝에 또 이 년 동안 중노동을 하시다가 지금 누워 계셔요. 아깐 건강하시다구 그랬지만 거짓말였어! 어머니두 약해지시구 동생들이 공장에 다녀서 겨우 살고 있어. 나까지 그렇게 하는 날엔 아버지와 어머닌 그 자리에서 총살입니다. 탈주병이 아니오? 거기다가 반역자구! 내가 군대에 나왔기 때문에 겨우 지금 아버지가 누워 계실 수 있는거야. 아까두 말했지만 차호에서 밀선을 타구 가라구 그러셨어. 그래, 차호에 나왔었지. 모든 연락도 다 돼 있었구. 그날 새벽이었어요. 늙은 노인이 총살당하는 것을 보았어. 아들이 월남을 했다는 죄예요. 아비가 꼬여서 보냈다는 게지. 노인의 시첼 보군 난 용기가 없어졌어요. 그래, 집으로 돌아갔더니만 아버지가 우시면서 왜 도로 왔느냐구… 어서 빨리 떠나라구 그러시며… 지옥이어요. 지옥도 그렇진 않을 거야. 허지만 난 그 지옥으로 또 가야 해요. 설마 통일이 되겠지요. 그날까지만 죽지 말구 살아 있다면 아버지나 어머닌 목숨을 건지지 않겠어요? 그때 삼부자가 만나죠.”
 
212
동생은 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형도 따라 울었다. 울면서 한 소리였다.
 
213
“네 맘도 잘 안다. 그러나 놈들이 네가 싸우다 죽은 줄 알지, 탈출했다구야 생각하겠나? 그것을 어떻게 알겠니?”
 
214
“형님, 모르시는 소리예요. 다 압니다. 서로 감시가 있어요. 더구나 난 반역자의 집 아들입니다. 형님이 떠난 뒤에 붙은 이름이지요. 내가 전사를 했다 해도 놈들은 믿지 않아요. 그러니까 난 살아서 돌아가야 해요. 죽어도 시체가 놈들 눈에 뜨이는 자리를 골라 죽어야만 아버지 어머니가 학살을 면하십니다. 통일이 늦어진다면 아버지 어머닌 돌아가실 거 아니오? 그때 오겠어요. 맘만 먹으면 못 올 것두 없어요. 밀선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월남자가 생기면 가족을 학살하니까 그래서들 못 나오죠. 아버지가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시겠어요? 길어야 내년 넘기시기두 어려우실 거야. 어머니야 이삼 년 더 사시겠지. 아버지만 돌아가시면 어머님 모시구 밀선을 탈게요. 아버지야 문 밖 출입도 못하시니까.”
 
215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주위가 소란해진다. 증원부대가 올라온 것이었다. 그것을 보더니 문식이가 몸을 벌떡 일으킨다. 벌써 훤히 밝았었다. 제1·2·3의 세 고지는 완전히 탈환된 모양이었다. 5·6·7 고지에서 포문을 열고 있었다.
 
216
증원부대가 목표인 모양이었다.
 
217
“어떡하려구 그러느냐?”
 
218
하고 문찬은 문식의 손을 덥석 잡았다. 순간 그의 머리에서는 부모의 생각은 완전히 없었다. 오직 동생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다.
 
219
“가겠어요.”
 
220
“안 된다! 못 간다.”
 
221
“놔주어요!”
 
222
문식은 홱 팔을 뿌리친다. 그러나 형은 또 달라붙었다. 팔을 잡았다. 동생은 빼려고 애를 썼다. 형은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결심이 서 있었다. 밀고 당기고 끌리고 이러는데 우군 하나가 저만큼 나타나고 있었다.
 
223
무기를 가진 국군을 보자 문식은 재치있게 형의 발을 걸어 쓰러뜨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형은 비탈에서 한참을 굴렀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문식을 쫓기 시작했다. 그때다. 착각이 일었다. 문식이가 아버지, 어머니를 판 것은 거짓이다. 문식이는 공산주의에 충실하기 위해서 달아나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틀림이 없다 싶었다. 무서운 오해였다. 그러나 또 무서운 증오였었다.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동생을 쫓았다. 다리가 말을 안 듣는다 . 비탈을 구르다가 다리를 접친 모양이었다. 동생과의 거리는 자꾸 멀어만 가고 있었다.
 
224
간이 졸인다. 안타깝기만 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뭐라고 소리를 쳤었다. 왼쪽 다리가 완전히 말을 안 듣는다. 그는 앵금을 치면서 역시 쫓아가고 있다. 쫓으면서 역시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225
그 자신은 물론 몰랐다. 몰랐기에 그런 소리를 쳤을 것이다. 아까의 착각이 그대로 그를 사로잡고 있었던지도 몰랐다.
 
226
그때 마침 국군 두 명이 고지까지 올라왔었다. 국군들은 문찬이의 고함소리를 이렇게 들었다.
 
227
“쏘아라! 쏘아라!”
 
228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문찬 자신은 몰랐지만 그는 분명히 이렇게 부르짖으며 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229
“쏘아라! 쏘아라!”
 
230
달아나고 있는 것은 분명 공비다. 쫓고 있는 것은 국군이었다. 그 국군이 쏘라는 것이었다. 달리던 문식이가 우뚝 선다. 선 채로 깊은 생각에 잠긴다. 부모를 희생시켜야 하느냐, 형을 버려야 하느냐를 다시 한번 망설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물론 일분도 채 못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231
이 짧은 시간에 문식은 결심을 한 모양이다.
 
232
그는 홱 몸을 돌이키며 남쪽을 향하여 분명히 세 발을 옮겨놓았었다.
 
233
“쏘지 말아라. 쏘지 말아라!”
 
234
문찬은 국군 쪽을 향하여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두 방의 총소리는 문찬의 절규에 대답해주고 있었다. 국군은 쏘라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었다. 쏘지 말라고 손을 저은 때는 이미 방아쇠가 당기어진 때였다.
 
235
국군의 겨냥에 틀림이 있을 리 없었다. 문식은 푹 엎어지더니 떼굴떼굴 비탈로 구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비로소 문찬은 성큼 발을 멈추었다. 증원부대가 세 고지에 다다른 모양이다. 만세 소리가 산을 흔들어댄다. 그러나 이등병조 이문찬의 귀에는 먼 나라에서 들려오는 소리만 같았다. 문식의 시체는 아직도 구르고 있었다. 나무 포기 하나 없는 비탈이니 산부리까지 구를 것이다. 그때 총을 쏜 두 전우가 가까이 왔다.
 
236
“이 이조님, 어떻게 된 거요?”
 
237
문찬은 그 말에는 대답도 없다. 그는 문식의 시체가 구르는 것을 아직 바라다보고 있었다. 골짝에 끼었는가보다.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문찬은 입을 열고 있었다.
 
238
“내가 정말 쏘라고 그랬나? 쏘라구!”
 
239
물론 동료들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하는 소리였다.
 
240
“내가 쏘라구? 그랬다구? 내가! 응, 내가?”
 
 
241
〈「새벽」4호, 195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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