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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방 벽에 세계지도 한 장을 붙여놓았다. 어느 신문에서 부록으로 발행한 것인데 지도라느니보다 시국약시표(時局略示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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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벽에도 명필의 주련을 붙인다든지 명화를 액에 넣어 걸어놓는다든지 또 이름난 고화 족자를 비단으로 선 둘러서 걸어놓는다든지 하면 눈도 살이 찌고 좋겠지만 그것은 생활과 마음의 여유가 다같이 없는 나인지라 무릇 인연이 멀고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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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필경 시방도 치어다보이는 저 세계지돈데 이놈 살풍경스럽기가 다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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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게나 얼룩덜룩 빨갱이 파랭이 검정이 노랭이 함부로 물감칠을 (한듯한 조각들이라든지 올망졸망한 영유의 표시라든지 또 금시 대포소리 중폭격기 소리 독와사(毒瓦斯) 냄새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대항지대의 표시 이런 것이 실로 120 퍼센트 비미술적(非美術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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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것만 나는 책을 보다가도 원고장이나 쓰다가도 또 골똘한 생각을 하다가도 고개를 쳐들어 그놈 세계지도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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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앉아 있어서 방금 이런 소리를 쓰는 조선이 코딱지만 하게 가운데쯤에 가서 조금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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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에 내가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너무 시원찮아서 나는 입을 딱 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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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지도 전체) 다 집어삼켜도 넉넉하겠는데,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나는 어이가 없어서 혼자 픽 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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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저 세계지도 어느 구석에서 두 놈이 멸살을 서로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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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어우러져 죽을동살동 모르고 싸우는 놈도 있을 것, 로미오와 줄리엣도 숱해 많을 것, 또 어디서는 시방 방금 어머니의 문밖으로 비어져나오는 인생의 출발도 있을 것, 또 나처럼 세계지도를 바라보면 내가 생각하는 꼭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한인(閑人)도 하나쯤은 없지 아니하지는 아니할 것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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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포 전에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인데 사과 형상으로 만들어서 새빨간 물감칠을 했고 꼭지 근처만 파랭이를 칠해서 아닌게아니라 사과처럼 으수하기도 하다. 돈 넣는 구멍은 꼭지 근처에 갸름하고 좁게 뚫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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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도 웬만큼 큰 사과만밖에는 않다. 그래 주인집 어린아이가 그것을 먼 빛으로 보고서 사과로 속기까지 했다는 말을 주인에게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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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벙어리가 내 책상 위에 와서 놓이게 된 때의 일을 생각하면 실로 계획이 원대하고도 포부가 아름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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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속에 백 원이 모이거든 올 여름에 같이 금강산 구경을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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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 벙어리를 가져온 사람과 나와의 약속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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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동화 아닌 동화가 애기 아닌 애기들에게 어떤 때는 즐겁기도 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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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원생고려국(願生高麗國)하여 일견금강산(一見金剛山)이라고 고려국에 낳지 못해서 금강산 못 보는 간절한 한을 읊조리기도 했는데 불과 몇십 원의 돈으로 사오 일에 볼 수 있는 금강산을 놓아두고 나는 이때껏 보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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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것이 원이든 판이니 그러면 올 여름에 금강산 구경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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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나뽈레옹 보나파르트에 도버해협 이상으로 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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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르지……그러니까 생기면 간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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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던 끝인데 그가 벙어리를 가지고 왔다. 내가 가져다놓자고 말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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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다 놓으면서 매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십전짜리 한푼을 집어 땡그렁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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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원이 모이거든 금강산 구경을 올 여름에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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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그 벙어리 속으로는 현재 이 사회에서 유통되고 있는 통화 중 꽁무니로부터 시작한 세 단위의 것까지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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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도합은 얼마나 되었을까 ? 하면 글쎄 절대로 일 원이 넘지 못했을 것은 백 원을 걸고 내기상을 할 자신이 충분하고 그저 한 오십 전 들어갔을까?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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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오십 전이니 그놈이 백 원이 되자면 몇 달이 걸려야 하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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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계산을 하면 우리의 금강산 구경은 시방부터 일백아흔아홉 달 뒤이겠으니까 꼭 16년이 지난 그 이듬해 정월이겠다. 퍽 쉽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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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애기 아닌 애기인 우리들의 동화 아닌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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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속에 다직해야 10원 돈이 다 차기 전에 벙어리는 잔인한 내 손에서 깨어지게 될 운명에 있다는 것을 벙어리는 모르고 있지만 나나 벙어리를 가져다놓은 사람은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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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서 신통스럽게 써먹지도 못하고 또 써먹고 싶어도 다 잊어버린 영어단자 외우기에 얻은 중학시대의 신경쇠약 이것은 평생 고질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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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운동이나 하고 마음의 번뇌가 없이 살 때에는 그런 줄 저런 줄 모르겠더니 10년 이짝 내 신경은 온전히 상태(常態) 이외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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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을 치고 보면 늦은 봄이 제일 심한 때다. 마침 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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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도 독실히 본다든지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한다든지 정력 드는 원고를 쓴다든지 하는 날이면 벌써 양편 귓속에서 굉장한 재즈음악이 들려오고 야관지가 끌로 파는 듯이 아프고 우꾼거린다. 이놈이 며칠씩 계속되면서 밤이면 며칠 밤이고 고스라니 잠을 자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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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말을 들으면 수면제가 칼모친이나 아다린 같은 것이면 0.25cc가 보통의 분량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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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을 한동안 먹어내듯이 되어가지고 0.75cc까지 먹은 일이 있었다. 0.25cc만 더하면 1cc 즉 보통 사람의 치사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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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무 분량이 늘어가는 것이 언짢기도 하고 또 차즘 잠을 자기 못하는 것이 그다지 고통스럽지 아니하다는 일종의 마비증이 생기어서 인제는 웬만한 때는 수면제를 쓰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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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꼬박 누워서 건철야를 곧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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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밤의 내 머리속은 정신병원보다 못지 아니한 일대 파노라마가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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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속뿐 아니라 누가 내가 모르게 그러한 밤의 나를 엿본다면 나의 얼굴의 표정의 야릇한 변화에 정말로 정신이상이 생긴 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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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누웠으니까 수족이나 몸뚱이는 움직이지 아니하지만 얼굴은 가지각색으로 표정의 변화가 생기며 어느때는 무어라고 중얼거리기까지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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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늦은 봄엔가는 밤중에 역시 그렇게 하고 누웠다가 귀의 착각까지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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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귀에 익은 목소리로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불에 덴 것처럼 뛰어 일어나가서 대문을 열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아니하였다. ─ 왔으면……와서 찾았으면 기다릴 터인데……이렇게 의아하면서 나는 도로 들어와 자리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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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경 후에 또 찾는 소리가 들리었다. 대문을 절벅거리며 한번 두 번 세번 역력히 그 사람의 목소리다. 나는 또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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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지 아니했다. 골목 밖에까지 쫓아나갔다. 그래도 보이지 아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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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도로 들어와서 곰곰 생각하다가 자리옷 위에 바바리만 걸치고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이화동까지 뛰어왔다. 찾다가 대답이 없으니까 아는 집으로 갔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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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러기 얼마 전에 내가 머리를 몹시 다친 때문에 더 심한 발작이 생긴 것이었겠지만 생각하면 나는 완전한 발광과 백지 한 장의 사이에까지 아슬아슬하게 올라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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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은 그러한 귀의 착각까지 일으키는 일은 없지만 건철야는 역시 항다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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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다섯시 여섯시가 되어 전등불이 휙 나가고 닫힌 덧문 틈으로 희끄름하게 새벽빛이 스며들 때에 겨우 잠이 들려고 하면 물지게 소리를 톱으로 온갖 소음이 침노를 하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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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대로 이불 속에서 딩굴다가 오정이 넘어서 일어나면 사지는 뭇매를 얻어맞은 것같이 나른하고 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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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생명은 ─ 그다지 아깝지도 아니하지만 ─ 가속도로 단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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