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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톤·씽클레어’는 米國[미국] 푸로문단의 제 일인자요, 사회주의 문학의 세계적 존재다. 그는 문필의 여가를 얻어 정계를 엿보았었다. 일즉이 사회당의 일원이 되여 加州知事[가주지사] 후보로 이차, 가주선출 상원의원 후보로 일차 출마한 경험이 있다. 3차 다 사회당 후보이었던 관계상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였었다. 그는 금년에 이르러 다시 가주지사 운동에 분주햇다. 이번엔 재래의 사회당을 탈당하고 정부여당인 민주당으로 출진하였다. 그런 만치 일반은 그의 이번 승리를 믿는다. 발서 공안후보로는 확정되였다는 喜電[희전]이 있다. 그는 ‘가주의 빈궁근절’즉‘에핔’(Epic-End Poverty in California)운동의 표방을 걸고 나섰다. ‘産出[산출]과 防衛[방위]’(I produce ; I defend)는 그 운동의 표어요, ‘산출과 방위’를 躬行[궁행]하는 미롱은 그 운동의 표상이다. 그는 그 동안 혹은 ‘팜플렡’으로 혹은 주간신문으로 소신의 주의를 선전하고 각지를 편력하며 遊說[유설]에 분망하였다. 금번에는 기필코 승리할 것을 必誓[필서]한 것 같다. 그는 이미 정책을 확정했을 뿐이 아니다. 그는 벌서 취임식장에서 吐[토]할 式辭[식사]를 준비하였다. 그는 벌서 집정 5년에 飢餓[기아]가 영영 끈친 평화의 가주를 눈앞에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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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톤, 씽클레어’(Upton Sinclair)는 1879년 9월 20일 미국 남부지방인 ‘볼틔모-’(Bal-timore)에서 출생하였다. 본시 군인계통의 家閥[가벌]로 선조 중에는 일즉이 英國[영국] 해군의 군원이었던 이도 있었고, 조부는 南北戰爭[남북전쟁] 당시 몸소 南軍[남군]에 가담하야 해군소좌의 位[위]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武閥[무벌]의 혈통을 이은 ‘엎톤’이었는지라 그는 유전적으로 투쟁성을 타고나 어려서부터 의협에 불타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는 一人[일인]이나 一隊[일대]만을 대적하고 匹夫[필부]의 勇[용]을 본받지 아니하였다. 그는 米國[미국] 전사회의, 일보 더 나아가, 세계 전인류의 복지를 위하야 투쟁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는 불의와 허위와 억압과 횡포와 싸우기를 결심하였다. 이 싸움에 그는 창 대신 한 자루의 ‘펜’을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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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톤의 부친은 酒類[주류]판매상으로 가계가 일시는 자못 넉넉하였었다. 그러나 남북전쟁 당시 다대한 손해를 입어 가산의 탕패를 면치 못하였다. 一朝[일조]에 零落[영락]의 窮境[궁경]에 빠진 엎톤 일가는 남달리 빈궁의 苦味[고미]를 맛보며 그날그날을 지내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엎톤은 傾敗[경패]된 南國老大家[남국노대가]의 분위기 속에서 그의 유년시대를 지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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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5세 때에 그는 통속소설을 作[작]하였다. 16세 때엔 다년간 애독하는 ‘이―닝, 포우스트’(씽클레어의 집에서 오래 전부터 이 신문을 구독하였었다 한다.)의 주필을 심방하고 試用記者[시용기자]의 직을 구하였다. 자력으로 호구의 책을 도모케 되매 그는 ‘뉴―욕’ 시립대학에서 學[학]을 修[수]하기로 한 것이다. 17세 때엔 일시 음악에 留意[유의], 提琴工夫[제금공부]로 매일 10시간씩 2년을 허비하였다. 대학졸업 임박하야 수개월의 휴가를 얻어 귀가, 오즉 독서삼매에 빠젔었다. 그동안에 다수한 철인사상가, 문인 등의 사상에 접하야 후일에 대성할 사상 내지 문필적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큰 사상적 영향을 엎톤에게 준 이는 ‘基督[기독]’, ‘햄’, ‘쉘리’, ‘밀턴’, ‘꾀―테’등이었다 한다. 문학 석사의 학위를 득한 것이 1819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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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톤도 소년기를 지나매 자연 실제문제의 봉착을 면할 길이 없었다. 박두한 결혼문제, 결혼후의 생활문제가 그를 괴롶이었다. 그는 점차 인생의 심각미를 더 느끼게 되었다. 그는 통속소설이나 作[작]하랴던 전일 욕망의 비열을 뉘우쳤었다. 대학을 필한 직후부터 〈쩡글〉(Jungle)을 출판하야 확고한 작가적 명성을 획득하기까지의 8년간은 그의 시련기었던 것이다. 그는 이 동안에 여러 난관과 苦境[고경]을 지냈었다. 그가 ‘미―타 에이치 러’(Meta H Fuller)와 결혼한 것도(1900년) 이때요, 〈마이더스王[왕]〉(1903년), 〈프린스, 헤이근〉(1903년), 〈아―, 스터―〉(1903년), 〈메너서스〉(1904년), 〈産業[산업]의 頭首[두수]〉(1906년) 등을 연작하야 작가적 출세를 도모한 것도 이 시절이다. 그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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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에 이르러 결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자 나는 좀더 심각한 작품을 지어보겠다는 마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20세부터 26세까지의 6년간 나는 거의 飢餓線上[기아선상]에서 방황한 것이다. 나의 작한 6편의 소설은 총수입이 1,000불을 넘지 못하였다. 혼자 뉴―욕에 있을 때의 내 생활비가 매주 4불 반, 전가족(당시 그는 부인 외에 어린 아들 하나이 있었다.)과 시골 살 때의 총비용이 월 30불 평균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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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통속소설의 저작을 포기한 후 그는 그의 저술적 노력을 한갓 ‘전인류의 복지’수립에 경주하였었다. 그는 종교, 교육, 예술, 언론 등 美名的[미명적] 도금과 衣皮[의피] 속에 숨은 추악 즉 은폐된 사회적 잔인, 허위, 포학 등을 투시한 것이다. 이 질곡하에 신음하는 대중의 구출을 그는 그의 필생의 사업으로 정하였었다. 그러나 그의 사회주의는 ‘마―ㅋ스’주의를 토대로 한 유물사관적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그의 사회주의는 기독교적 박애주의를 근거삼은 인도주의적 사회주의이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의 사상 내지 주의의 共鳴者[공명자]다. 어찌보면 그의 신봉자인 것도 같다. 그는 예수를 신봉하고 공명하나 예수교에 귀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예수교를, 특히 현존하는 예수교를 매도한다. 그는 예수교를 위시하야 현존하는 모든 종교를 공격한다. 신앙에 귀의해버릴 그가 아니다. 종교적 허식을 시인할 그는 더욱 아니다. 종교를, 적어도 미국에 현존하는 모든 종교를 그는 대중의 인식안을 엄폐하는 폐물로 본 것이다. 그는 종교를 이용해야 대중을 기만하는 도당을 미워하고 그러한 도당의 走狗[주구]가 되여 瞞着[만착]을 是事[시사]하는 종교가들을 타기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예수교를 신봉은 커녕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추모한다. 종교가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혁명가로서의 예수를 추모한다. 그는 예수를 同志[동지]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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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톤이 세속을 추종하랴던 심산과 태도를 버리고 사회적 암혹타파에 착수한 초기 수년간은, 전기한 바와 같이, 너무 辛酸[신산]한 그의 시련기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 동안 생활적 궁핍과 싸우고 사회적 위압과 싸운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그 앞에 올 더 큰 투쟁을 기대하고, 동시에 그 투쟁의 승리를 믿었다. 그는 것을 다듬는 鵬鳥[붕조]와 같이 一飛覆天[일비복천]할 그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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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웅비할 그 때가 왔다. 1904년 ‘시카고’獸肉王國[수육왕국]에 大盟罷[대맹파]가 돌발되었다는 소식이 전국에 전하였다. 시카고 牛肉[우육] ‘트러스트’는 전미 아니 전세계 최대의 獸肉罐製[수육관제] 공장지대다. 막대한 금력하에 수다한 노동대중이 사역되는 이곳이다, 그 곳에 착취가 있고, 그 곳에 억압이 있고, 그 곳에 가만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들은 금력으로 언론·행정의 제기관을 농락하야 이면적 죄악을 교묘하게 덮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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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수육 트러스트의 맹파는 엎톤에 대한 天與[천여]의 好機[호기]이었다. 그는 곳 진상조사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또 일변 맹파노동자들의 壯擧[장거]를 찬하는 長論[장론]을 지어 사회당 기관지인 ‘어피―ㄹ 투 리―쯘에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 대한 일반의 響應[향응]은 다대하였다. 당시의 맹파당이 씽클레어를 그들의 동지, 그들의 대신자로 환영하게 된 원인의 7·8분이 이 논문의 발표에 있었다 할 것이다. 맹파의 응원당인 사회주의자들은 곳 3만여부의 해당논문을 매입하야 맹파원에게 배부하였다. 또한 ‘어피―ㄹ 투 리―쯘지는 당 수육 ‘트러스트’의 노동자생활을 재료삼아 소설을 창작할 것을 씽클레어에게 위탁하였다. 그 보수로 이 作[작]을 필할 때까지의 생활비 5백불을 지급할 것까지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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씽클레어는 상상이 아닌, 사실추측이 아닌 경험을 토대로 한 가장 逼眞[핍진]한 작품을 의도하였었다. 그는 몸소 듣고, 보고, 경험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노동자들과 2개월여나 기거를 같이 한 것이다. 그 동안에 조사한 사실과 체험한 실감을 소설로 직출하였다. 이것이 ‘어피―ㄹ 투 리―쯘지에 연재되었던 〈쩡글〉(1906)이다. 시장에서 行賣[행매]되는 獸肉罐[수육관] 우에 ‘특제품’‘일등품’의 ‘텔’이 붙는 것은 상례다. 그 텔 속에 病獸[병수]의 腐肉[부육]이 든 줄을 세상은 몽매에도 알 리가 없다. 씽클레어는 〈쩡글〉속에 이 실상을 뒤집어 이 추악을 보라 한 것이다. 황금이 산적한, 인심이 인후한 미국이라 한다. 밥을 찾는 각국의 노동자는 이 나라를 향하고 운집한다. 이 나라는 無依[무의]한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다. 이 나라는 그들을 好餌[호이]삼아 그들의 膏血[고혈]을 빤다. 저렴한 노임과 가혹한 사역, 그 잔인이 어떠하뇨? 씽클레어는 〈쩡글〉속에 그 진상이 이렇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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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장 경건한 마음 진실한 정열속에 이 作[작]을 草[초]하였다. 이는 공장 노동자들의 실생활을 포괄적으로 표현한 미국 최초의 폭로소설이었다. 이 作[작]이 미국에 지은 파문은 자못 컸던 것이다. 居無何[거무하]에 이 作[작]은 전미를 풍미하였다. 이 作[작]은 ‘전미국인의 위를 아프게 한 것이다.’ 대자본적 기업기관의 중압하에 다수한 노동자가 신음한다. 그들의 고초는 실로 상상 이외다. 그들은 구출해 보랴던 것이 씽클레어의 〈쩡글〉을 作[작]한 진목적이다. 그 목적을 달키 위하야 자연 그 기관의 폭로를 감행한 것이다. 이 진의를 이해하는 독자도 적지 않았었다. 그러나 씽클레어가 수육 ‘트러스트’의 기만적 상업술을 적론한 결과, 다시는 腐肉[부육]을 먹을 우려가 없다는 점으로 〈쩡글〉을 찬한 자도 없지 않았었다. 씽클레어의 아래의 嘆[탄]이 또한 무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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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로 심혈을 경주한 것은 그곳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를 위한 때문이었다. 사회가 다소라도 노동자의 고초에 대하야 관심케 되여서가 아니오, 그들이 다만 결핵병든 부육을 먹기를 싫여했든 까닭에 이 作[작]이 유명해진 것을 생각하면 나는 더없는 불쾌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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씽클레어는 〈쩡글〉의 발표로 일약 ‘푸로’문단의 중진이 되였다. 이 作[작]으로 그는 첫 승리를 획득한 것이다. 이 작품의 발표후 수육트러스트는 일시 타격을 면치 못하였다. 그들은 씽클레어를 없이할 방책을 백방으로 강구하였다. 마침내, 언론기관을 매수하고 씽클레어를 일종의 사회비방자라 공격한 것이다. 씽클레어는 이 태도를 더욱 분노하였다. 소위 공평을 말하고 권선징악을 표방하는 언론기관이다. 제 스사로 먼저 수육트러스트의 非[비]를 경고했어야 할 것이다. 그렇거늘, 도로혀 그 악을 엄폐하고 정언자를 모해하랴 하다. 씽클레어의 분노가 또한 무리가 아니다. 그는 공격의 화살을 ‘쩌―날리’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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씽클레어가 〈쩡글〉에서 얻은 수입은 3만불이었었다. 그는 문필노동자를 자처한다. 여분의 수입으로 私財[사재]를 쌓는 것이 그의 뜻이 아니다. 그는 이 수입으로 ‘뉴―쪄―시’, ‘이―글욷’에 ‘헬리콘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는 40여 가족의 정신노동자를 모집하야 협동적 문화생활을 목표삼은 일종의 이상부락이었다. 사회주의적 규범하에 시설된 제도이었다. 그러나, 1907년 3월 불행이 원인불명의 出火[출화]로 전촌이 소진하였다. 이리하야 그의 사업은 일시 좌절의 비운에 빠젔었다. 그러나 그는 재차의 궐기를 기다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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씽클레어는 중키에 몸이 날신하고 얼굴이 앳되여 선비다운 사내다. 그리 강장하지 못한 체질에 일시는 위통으로 신음한 일까지 있어 자연 섭양에 유의키를 마지 아니한다. 「體育[체육]」지에 식요법에 관한 논문을 자조 발표한 것으로 보아도 그의 이 방면의 관심을 추지할 수 있다. 정구에 능하야 붓 대신 ‘라켙’을 잡고 ‘코―트’우에 활약하는 모양도 일관의 値[치]가 있다. 비서모집 少不下[소부하] 1일 1차 정구상대가 되여줄 조건이 부가되었다 하니 이 역시 미국의 ‘앳된’일면이라 할까. 1911년에는 ‘미터 에이치 러’와 이혼, 그 전에 〈미트로폴리스〉(1908년), 〈探求者[탐구자] 쌔뮤엘〉(1910년), 〈사랑의 巡禮[순례]〉(1911년) 등을 발표하였다. 모도가 별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다만 巴里[파리]에서 발표된 〈미트로폴리스〉만은 작중에 취급된 미국 有閑[유한]계급의 현실이 新奇[신기]를 기호하는 佛國人[불국인]에게 영합되여 일시 독서계의 유행이 되였었다 한다. 그 후인 1913년, 그는 현 부인 ‘메어리 크레이그 킴부로―’(Marry Craig Kimbrough)와 결혼하였다. 메어리는 閨秀詩家[규수시가]다. 각 잡지에 〈쏘넽〉(14행시)을 자조 발표하였고, 그 발표된 것을 씽클레어의 편집으로 출판한 일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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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콜로래도’주인 탄광지대에 대맹파가 이렀다. 이것이 씽클레어의 재궐기의 호기가 된 것이다. 씽클레어는 이 맹파의 소식에 ‘시카고’수육 트러스트 파업 이상의 심적 충동을 받었다. 그리하야 부부협동으로 그 현상 조사에 착수하였었다. 외부와의 내왕이 끊인 심산유곡에 만여명의 갱부와 그 처자들이 있다. 그들은 천백척 지갱 속에서 주야를 모르고 노고한다. 그러나, 그 노고에 대한 보수란 지극히 적어 圖生[도생]이 겨우겨우다. 한번이 구렁에 들면 그들의 자유는 이에서 끊치는 것이다. 벗어나랴 하나 감시의 눈이 너머 많다. 혹 그 눈을 피하야 도주를 꾀하다가 불행이 잡히면 참혹한 私刑[사형]을 받어야 한다. 그들은 마츰내 이 포학을 꾸짓고 이러난 것이다. 쟁의는 7개월을 계속하였다. 그 동안 鑛主[광주]측은 별별 蠻暴(만폭)한 수단으로 그 운동을 진압하랴 하였다. 銃鉋총포)휴대의 폭력단을 보내어 갱부들과 그 처자들에게 구타, 발포를 감행하고 심지어 그들이 집합한 천막에 불을 지르기까지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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씽클레어는 이 진상을 〈石炭主[석탄주]〉(King Coal, 1917)속에 상세이 묘사하였다. ‘헐, 워―너―’라는 ‘인테리’청년의 갱내생활을 토대로 그 참상을 보여준 것이다. 이 작품으로 인하야 씽클레어의 명성은 다시 높아젔다. 그의 재궐기의 뜻은 이러하야 이루어젔든 것이다. 그러나, 씽클레어가 이런 소설을 草[초]한 목적은 노동자를 선동하야 모든 것을 파괴케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 진상을 천하에 알리어 일 각성을 촉진하고 여론을 환기하야 왜곡된 제도와 조직을 개량하랴는데 그 목적이 있었든 것이다. 이 점에 있어 그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도적이오, 기독교적이오, 쇼우적이었다. 歐洲大戰[구주대전]이 勃發[발발]하자 그는 재래의 반전론적 태도를 바리고 미국의 참전을 주장하였다. 獨逸[독일]을 제어하지 아니하면 마츰내 ‘자유를 사랑하는 자의 목적하는 모든 것이 위태롭게 될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따에 임하야 權[권]을 쓸 것과 미국의 참전은 최후의 목적(평화)을 위하야 수단에 구애되지 안는 일시의 권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주장으로 인하야 ‘變節漢[변절한]’이라는 좌당의 통매와 ‘기회주의자’라는 우익의 조소를 함께 받은 것이다. 씽클레어가 미국의 참전을 권유한 것은 그가 年來[연래]의 주의를 포기하야서가 아니었다. 도로혀 그 주의를 사랑함으로 위협하는 적국을 격파하야 그 주의를 보장하자는 것이 그의 처음 뜻이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렇치 못하였다. 대전이 종말에 가깝ㅅ자 미국은 모든 혁명운동의 반역자가 되였었다. 씽클레어는 환멸의 비애를 느꼈다. 그는 前過[전과]를 뉘웃치고 그 대속으로 〈짐머―, 히긴스〉를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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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머―, 히긴스〉를 효시로 그는 연하야 은폐된 사회적 죄악폭로에 그의 전력을 경주한 것이다. 〈宗敎[종교]의 利潤[이윤]〉(1918)에서 그는 종교의 부패를 말하고, 〈부라스, 쵴〉(1919)에서 신문계의 암흑면과 〈百[백] 퍼―센트〉(1920, 영국에선 ‘間牒[간첩]’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엇다)에서 애국주의와 ‘스파이’정책의 추악을 鼓鳴[고명]하였다. 대학교육을 비웃어 〈거위의 거름〉(1923)을 쓰고 소·중학교 교육을 꾸지저 〈거위색기〉(1924)를 발표하였다. 〈拜金主義[배금주의]〉(1925)는 예술의 조소요, 〈黃金[황금]이 쓴다〉(1927)는 문학의 唾罵[타매]이었다. 이러한 문헌들은 사회의 이면적 사실을 지적·폭로하야 그 진상을 천하에 공포하였다. 이 점에 있어 씽클레어의 공이 크다. 그러나 이 문헌들은 말하자면, 일종의 보고에 불과하다. 풍부한 재료나 주밀한 조사만도 三嘆[삼탄]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결국 그 재료 그 조사 이상의 별 것이 아니다. 이런 작품이 진정한 의미의 문헌이 되기는 어렵다. 이 작품들이 형명가로서의 씽클레어의 명성을 높였을른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문학가로서의 그의 평가를 더할 수는 없었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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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記[전기] 폭로작품들 중에 나타난 씽클레어의 작품가적 역량은 그리 豊溢[풍일]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쩡글〉을 쓴 씽클레어의 필력의 쇠퇴를 증좌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수다한 폭로문헌을 草[초]하는 동안에 ‘人生讀本[인생독본]’을 썼고, 〈石油[석유]〉를 作[작]한 것이다. 〈석유〉는 〈글〉에 필적 뿐아니라 〈글〉을 능가하는 대작이다. 〈글〉에 나타났던 ‘굿센 맛’과 ‘날카라운 맛’이 이 作[작]에서 다소 희박해진 것이 사실이나 그의 사회적 시야는 이 作[작]에서 더 확대해젓고 그의 인생에 대한 인식은 이 作[작]에서 일층 심각하야졌다 한다. 그 정교한 구도, 평이한 필체가 가이 ‘톨스토이’에 비길 만하니, 이 一作[일작]으로도 능히 당대 미국작가의 제 일인되기에 넉넉하다 한 평자까지 있다. 그 후도 연하야 〈뽀스톤〉〈山市[산시]〉등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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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當年[당년] 57세의 中老[중노]다. 그는 항상 養生[양생]에 유의하야 연령보다 15세는 젊어 보인다 한다. 아마 아즉 元氣旺溢[원기왕일]한 40 청년의 풍도가 있을 것이다. 겸하야 그의 숙원의 하나이던 政權把執[정권파집]의 성공이 불원타 하니 그의 득의를 상상할 만하다. 그는 한번 정권을 잡는 날 수십년간 표방해 온 정책수행에 매진할 것이다. 그러나, 세사란 뜻 같이 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너무 이상의 유린이 심하다. 그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그의 이상을 실현할 것인가? 또는 실패할 것인가? 이는 오즉 세월이 알 바이니 잠시 그 결말을 기다리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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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數月前[수월전] 朝鮮中央日報[조선중앙일보]를 통하야 씽클레어의 변변치 못한 소개를 해본 일이 있다. 그러나 필자의 奔忙所致[분망소치]로 끝을 내지 못하였었다. 그후 小閑[소한]을 얻어 그 소개를 맛처본 것이 이 小論[소론]이다. 필자는 씽클레어를 전문으로 연구한 적이 없다. 따라 이 소론은 몇몇 평론가의 소론을 모아본 것에 불과하다. 대개 ‘Living Authors’ ‘柾不二夫[정부이부]’氏[씨]의 「씽클레어評傳[평전]」, ‘로이드, 델’의 「씽클레어評傳[평전]」(‘小野忍譯[소야인역]’, 「新潮[신조]」9월호 所載[소재]), ‘早坂二郞[조판이랑]’氏[씨]의 「씽클레어는 加州知事[가주지사]가 될까」등과 씽클레어 작품 數三[수삼]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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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東亞[신동아]」37호, 1934년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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