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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전원의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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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백신애
1
어느 전원의 풍경
 
 
2
말갛게 깍은 머리 위에 탕건만 눌러 쓰고 활짝 돋운 남포불을 바라보며 김상렬(金相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건넌방에서는 아이들의 장난하는 소리가 부산하였다.
 
3
‘오늘밤만 새면 내일부터는 또 한 해가 시작된다’하고 그는 빨뿌리에 마꼬 한 개를 끼워 들고 생각에 잠기었다.
 
4
‘좌우간 오늘밤 안에 작정을 단단히 해 가지고 내일부터는 근심이 없도록 해 버려야지, 차일피일 하다는 큰일이다.’
 
5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들은 부자집이라고 모두 부러워하나 실상 김상렬 자신은 기막힐 딱한 걱정이 두 가지 있었다. 그는 이 걱정거리를 없애기 위하여 오래 고민하여 왔으나 좌우 판단을 내기에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잘 깨달았던 것이다.
 
6
하나는 자기의 뒤를 이을 맏아들에 관한 일이요, 또 하나는 자기의 전재산에 관한 일이니만큼 지금의 김상렬에게는 자기 생명 다음 가는 중대한 걱정거리다. 그는 이 두 가지를 생각할 때마다
 
7
‘지금 세상은 예전 세상과 다르다. 예전에는 천벌이 무서워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지마는 지금은 천벌이란 것이 없어졌다.
 
8
톱으로 썰어 죽이고 벼락을 때려 가루를 내어 죽여도 죄는 죄대로 남을 용덕이란 놈은 아직껏 네 활개 펴고 잘 살게만 해 두고, 그렇게 순직하고 무지런하던 김서방은 재작년 여름에 벼락을 맞아 죽었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천벌이란 정말 엉터리없는 것으로 타락되고만 것임을 알 수가 있단 말인지.
 
9
그리고 이 땅덩어리로 말하더라도 옛적에는 부동여산(不動如山)이니 태산같이 믿는다느니 하여 대지를 변함도 움직임도 없는 절대의 것으로 믿고 둘 곳 없는 심사라도 오직 이 땅 위에만은 맘 턱 놓고 발을 내려 디디던 것이었으나 지금은 어디 땅이 흔들린다는 둥, 어느 곳 땅이 벌어지고 사람이 죽는다고 법석이란 둥, 아무 산이 터지며 불꽃이 충전한다는 둥 하니 이런 기막힐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10
움직이지 않는다고 믿은 땅덩어리가 움직이니, 항상 움직이며 살아가는 사람이야 일러 무엇하랴. 변화무궁하고 교묘(巧妙) 교활(狡猾)하며 심지어 선악의 표준까지 혼돈케 되어 구별할 길이 없으니 나는 어느 것을 절대적 옳은 것으로 믿을 수가 없고, 이 가운데서 살아가기 정말 두렵다.
 
11
그러나 이 가운데서라도 절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도 ‘내 편을 만들고 내 수중에서 녹여 낼 수 있는 대로만 하는 것이 절대로 착한 일이며 절대로 옳은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김상렬이가 이같이 믿을 수 없다는 세상에서 오직 한 가지 믿을 수 있다는 것이란 무엇일까.
 
12
그것은 법률이다. 이 법률이란 것이 어떻게 생겨났던 것인지 또 누가 만들어 낸 것인지 하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법률이란 것을 알게 되던 때(물론 육법전서를 다 알게 된 것은 아니다. 법률이란 것이 있다는 것만을 알게 된 때에 말이다) 너무 기뻐 하늘이 무심치 않음을 감사하였던 것이다.
 
13
‘천벌이 영험(靈驗) 없게 된 것도 하늘의 옥제(玉帝)가 이 땅 위에 당신이 택하신 임금님을 내리시사 법률이란 것을 만들게 하셔 간접으로 정사(政事)를 하시게 된 것이리라’고 무한히 기뻐하였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법률에 눈이 밝다는 자기와 각별히 친한 친구 이정환을 자주 만나서 온갖 법률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한 가지 괴로움이 생겨났다. 그것은 자기 아들에 관한 일이었다.
 
14
물론 아들이 못나서 하는 걱정이 아니라 그대로 남에게 뒤지지 않을만은 하지만 장가를 잘못 보낸 탓이었다.
 
15
처음 장가갈 때는 과히 싫다고는 하지 않던 것이 초행에서 돌아온 이후는 죽어도 색시집에 가지 않겠다고 뻗대는 것이었다.
 
16
그 후 색시를 데려온 후도 한방에 거처하는 일이 없고 밤낮 그 부모에게 이혼시켜 달라고 졸라대었다. 그러므로 상렬은 그 아들에게 만단으로 회유하고 때로는 위협도 하고 갖은 수단으로 달래 봐도 전혀 효험이 없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러는 중에도 며느리가 딸을 하나 낳았다.
 
17
“입으로는 싫어해도 속으로는 그다지 싫지 않기에 아이를 낳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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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사람도 있고 하여 상렬은 아무래도 이혼은 시키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아들은 아내가 아이를 낳고 난 후 아무 말 없이 동경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19
“이혼해 주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0
라고 뜸뜸이 말만 보내고, 3년이 되어도 귀국하지 않았다. 상렬은 차차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아들의 장래와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얼른 이혼을 시켜 버리고 다른 데 좋은 며느리를 맞아오고는 싶으나 며느리 편에서 순순히 이혼해 주지 않을 것임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21
며느리도 처음엔 시부모가 자기 편을 들어 주었으나 차차 시부모의 맘도 자기를 떠나감을 보고 분하고 안타까운 악심만 자꾸 들어갔다. 그러므로 양편의 가슴속이 얼굴에 나타나게 되자 집안은 평온한 날이 없어졌다. 날이 갈수록 상렬은 이 문제가 심각하게 머리에 떠올랐다.
 
22
법률만 없으면 그만 며느리를 쫓아 보내고 아들을 데려왔으면 좋으련만 아무 이유 없이 법률이 이혼을 허락할 리도 없고, 또 그대로 쫓아 보냈다가 법률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23
시부모의 이런 생각이 날로 그 얼굴에 나타나자 며느리도 처음같이 유순하지 못했다. 피차 시비가 심함에 따라 상렬은 그같이 기뻐하였던 법이란 것이 도리어 가증스럽게 여겨졌다.
 
24
이때에 또 한 가지 걱정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어느 친구의 사정에 동정하여 오만 원 차용증서에 연대 보증인으로 도장을 찍어 주었던 것이 이제는 자기가 그 돈의 어환 책임을 전부 지게 되었던 것이다.
 
25
원금은 단 오만 원이나 이자까지 합하면 천 석 추수밖에 안 되는 자기 재산 전부를 다 해도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었던 것이었다. 그는 이 뜻하지 않은 걱정에 이 일 년을 죽어지냈던 것이었다. 생각하면 이 두 가지 걱정이 모두 억울한 걱정임을 때닫자 그의 초조함은 비할 데가 없었다.
 
26
‘아들 장가도 지금 며느리에게 보내지 않고, 친구야 죽든 살든 보증인만 되어 주지 않았으면 아무 걱정 없이 편안히 행복하게 살 것을……’라고 생각하매 이 두 가지가 모두 미묘하고 사소한 변변치 못한 동기와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된 것임에는 더 한층 답답하여지는 것이었다. 지금 며느리와 혼인하지 않아도 장가갈 수 있는 자기 아들이요, 보증인이 되어 주지 않더라도 그 친구와의 우정이 상해질 리가 없었을 것이다.
 
27
상렬은 생각하다 못하여 벌떡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밖으로 나왔다. 골목마다 섣달 그믐날 밤이라 사람들의 걸음 소리가 바쁘게 들렸다. 그는 어두운 골목을 한참 걸어 이정환의 사랑으로 찾아들어 갔다.
 
28
“그믐날 밤에 찾아오기는 좀 미안하네만.”
 
29
하고 방안에 들어가며 인사를 하였다.
 
30
“자네는 친구 집에 놀러 오는 데도 날을 맡아서 오는가, 그믐날은 놀러오면 안 된다던가?”
 
31
이정환은 구들목에 누웠다 일어나며 반갑게 맞았다.
 
32
“자네 춥지 않나, 그만 갓을랑 집어치우고 나처럼 겨울에는 모자를 쓰게나.”
 
33
하고 엉성하게 추워 보이는 상렬을 조롱하듯 하며 아랫목으로 자리를 비켜 놓았다. 그러나 상렬은 얼굴을 찌푸리고 윗목에 가 소매 속에 손을 넣은 채 꾸부리고 앉았다.
 
34
“자네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 왔네.”
 
35
상렬은 그제야 소매에서 손을 빼고 마꼬 갑을 끄집어 내었다.
 
36
“무슨 말인가?”
 
37
“다름이 아닐세, 자네도 아다시피…….”
 
38
상렬은 말을 어떻게 끌어내야 좋을지 맘속으로 생각하며 말끝을 길게 뺐다.
 
39
“글쎄, 자네 사정이야 내가 모르는 게 있나, 그러나 너무 걱정을랑 하지말게.”
 
40
“그러니 말일세. 저 우리 자식 놈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41
상렬은 이미 정환에게 속 통정을 해 오던 터이라 바로 말을 끄집어내었다.
 
42
“허, 그 사람, 그 까짓 것 걱정할 게 뭐야. 며느리가 아무리 중하다 할지라도 내 아들만은 못한 것이니 아들이 정 싫다면 이혼을 해 버려야지.”
 
43
정환은 시원스럽게 말을 하였다.
 
44
“글쎄, 내 자식이 중하기는 하지만 이유도 죄도 없이 어떻게 며느리를 쫓느냐 말일세. 더구나 계집아이라도 벌써 새끼까지 낳은 것을 설령 내가 또 쫓고 싶다고 한들 법이 있는데 임의로 쫓기어 지느냐 말일세.”
 
45
상렬은 그제야 자기의 맘속을 다 말이나 한 듯이 한숨을 내쉬고 정환을 쳐다보았다.
 
46
“저런 사람 좀 보게. 자네 내 말 듣게. 좌우간 이제는 자네도 법만 허락하면 이혼시켜 주려는 것이지?”
 
47
정환은 정색하여 다잡아 물었다.
 
48
“그렇지 않은가. 법만 없으면 그만 제 친정으로 보내 버리지.”
 
49
“그럼 문제없네. 에끼, 사람. 그 까짓 게 뭐가 걱정이야. 내가 책임짐세.
 
50
법률이란 게 원래 무서워할 게 아니네. 언제든지 내 편을 만들어 놓으면 그만일세. 착한 일만 하는 사람이라도 악한 놈에게 못 이기는 수도 있게 하는 것이 법률이거든. 그 참 교묘하이.”
 
51
정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상렬은 알아듣지 못하였다.
 
52
“좌우간 자네가 이미 이혼시키려는 결심만 있다면 천 원 하나는 손해가 날 터이나 염려 없네. 내가 책임지고 이혼되도록 해줌세.”
 
53
“아니 천 원만 있으면 이혼이 될까?”
 
54
상렬은 정환의 말이어서 순순하게 들리므로 속으로 의아하였다. 돈 천원만 있으면 이혼이 된다는 조목이 법률에 씌어 있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55
자기 며느리는 목이 끊어져도 친정에는 가지 않으며 또 만일 남편이 다른데 장가를 가면 백 번이고 초례청에 대들어 막 부수어 댈 것이며 어린 아이는 자기가 데리고 키우겠다는 둥, 벼르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상렬이었기 때문이다.
 
56
물론 며느리 한 사람뿐이면 좀 쉬울 것이나 며느리의 친정에도 상당한 젊은 남자가 많아서 좀처럼 이혼은 해주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이다. 그러나 정환은 그까짓 이유는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57
“에끼, 바보 같은 사람. 한 번 이혼만 해 버리면 그만이지 무슨 상관인가. 제까짓 것이야 무어라고 시위를 한 대도 염려 없네. 한 번 이혼한 후에는 자네 집에 무단히는 오지도 못하네. 잘못 행패를 하다가는 콩밥을 먹이지…….”
 
58
하고 자못 염려 없다는 듯이 우겨대었다.
 
59
“그렇지만 그렇게 되나? 초례청에 대어들면 큰일이지.”
 
60
상렬은 자꾸 염려가 놓이지 않았다.
 
61
“여보게, 이혼하면 남남인데, 남의 잔치에 대어들면 법률이 가만히 있나?”
 
62
“음…….”
 
63
상렬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64
“참, 그렇지만 이혼하기까지가 문제지?”
 
65
하고 다시 정환을 바라보았다.
 
66
“염려 없네. 내가 수단을 가르쳐 줌세. 좌우간 며느리를 잘 꾀어서 제 입으로 이혼하겠다고만 하도록 하면 그만일세.”
 
67
하고 계교를 하나 가르쳐 주었다. 상렬은 그 말을 다 듣고 나니 그럴 듯도 하였으나 사람으로서 차마 하지 못할 일이었다.
 
68
“여보게, 그렇게 할 수야 있나?”
 
69
하고 상렬은 입맛을 다셨다.
 
70
“허이, 사람. 지금 세상에는 어떠한 못할 짓을 하더라도 법률에 걸리지 않게만 하면 제일일세.”
 
71
정환은 예사라는 듯이 말했다.
 
72
“그것은 그렇게 한다고 하면 그만일쎄만, 또 한 가지 있네.”
 
73
상렬은 집에 가서 다시 더 생각해 보리라고 작정을 한 후, 또 한 가지를 마저 꺼내었다.
 
74
“무엇인가?”
 
75
정환은 벽에 어깨를 기대어 앉으며 어떠한 어려운 문제라도 끌고 오라는 듯이 버티었다.
 
76
“자네도 알지만 그 보증해 준 오만 원 말일세. 반환기일이 다섯 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떡하나?”
 
77
“그까짓 것도 염려 없네. 내가 한 푼도 구경도 못한 돈을 멀쩡하게 갚아 줄 바보가 어디 있는가. 자네는 그 돈을 갚으면 거지가 되지 않나? 나 같으면 그 돈을 내가 써 없이 했더라도 갚아 주지 않겠네.”
 
78
정환은 이 말을 듣고 놀라는 상렬을 비웃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79
“갚지 않아도 배겨낼 수 있게 하는 법이 있는가?”
 
80
“있고말고.”
 
81
“여보게, 농담이 아닐세.”
 
82
“허, 누구는 농담인 줄 아는가? 당장에 안 갚아도 관계 없게 해 줌세.”
 
83
“…….”
 
84
“예를 들어 말하자면 자네가 나에게 갚을 돈이 삼십만 원 가량 있다고 하면 그만이 아닌가?”
 
85
“?”
 
86
“내 말을 잘 듣게. 만일 자네가 그 돈을 갚지 않고 있으면 돈 받을 자가 재산을 차압을 하지 않겠나?”
 
87
“그렇지.”
 
88
“여보게, 내 말은 그자들이 차압을 하기 전에 자네가 한 푼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89
“에끼 사람, 그만 두게. 나는 정말 걱정일세. 농담은 그만 두고 좀 생각해 주게.”
 
90
상렬은 웃으며 정환에게 간청하듯 말했다.
 
91
“허, 누가 농담을 한단 말인가. 자세히 설명할 테니 들어보게. 자네가 거짓 증서를 하나 쓰거든.”
 
92
“어떻게…….”
 
93
“삼십만 원 쯤 자네가 나에게 차용한 것 같이 거짓 증서를 써 가지고 내 앞으로 공정증서를 낸단 말일세.”
 
94
“공정증서?”
 
95
“옳지, 자네 재산은 전부 내 것이라고 즉 삼십만 원 대부해 준 까닭에 그 돈을 갚기 전에 자네 재산은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내 것이라고 공정증명서를 하나 내놓으면 누가 보든지 자네 재산은 내 것이 되어 있으니 아무 놈도 손을 못 대지 않겠나.”
 
96
“그래…….”
 
97
상렬은 감격하였다. 지금 세상의 법률이란 이다지도 교묘하며 이다지도 나를 위해 갖은 법을 다 마련해 두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98
상렬은 집에 돌아와 갓을 벗어 걸고 큰 기침을 한 후
 
99
“아가.”
 
100
하고 크게 불렀다. 그믐날 밤은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고 막내아들과 딸들이 안방에서 떠들고 있었다. 두어 번 연달아 부르는 사이에
 
101
“네.”
 
102
하고 며느리가 사랑으로 달려왔다.
 
103
“준비가 다 되었느냐?”
 
104
“네.”
 
105
“하룻날 제사는 일찍 모시게 해라. 세배꾼들이 오기 전에.”
 
106
“네.”
 
107
그믐날 밤인 탓인지 며느리의 대답 소리는 평소보다 부드럽고 공순하였다.
 
108
물론 이만한 말을 하기 위하여 며느리를 사랑으로 불러낼 것도 아니며 전 같으면 며느리가 곁에 있더라도 마누라를 불러 분부하는 것이었으나 이제 듣고 온 이정환의 말이 생각났으므로 당장에 음모 공작을 개시하려고 일부러 며느리를 불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며느리의 공손스런 태도를 보매, 그만 가슴이 턱 막혀졌다.
 
109
“아가, 춥지 않으냐? 잠깐 누워 쉬어라.”
 
110
그는 이 말을 정환의 일러준 계교로 하려던 것이 참으로 속에서 솟아 나오는 위로의 말이 되고 말았다.
 
111
“네, 아버님. 시장하시지 않습니까? 벌써 12시나 되었습니다.”
 
112
“아니다. 그만둬라.”
 
113
“약식이 다 됐습니다. 조금 가져오리까?”
 
114
며느리는 염려되는 듯이 조용히 물었다. 상렬은 정환과 자기가 조금 전에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왔는지도 모르고 있는 며느리가 가엾기도 하고 또 스스로 부끄럽기도 하였다.
 
115
“그만둬라. 어서 들어가 좀 쉬어라.”
 
116
말소리가 떨리어 나왔다.
 
117
“네.”
 
118
며느리는 손을 이불 아래 넣어 방바닥을 만져 차지나 않은가 하고 물은 후 살그머니 물러나갔다.
 
119
“어허이.”
 
120
상렬은 길게 한숨을 쉬고 드러누웠다.
 
121
“나는 정말 못하겠구나.”
 
122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정환이가 가르쳐 주던 계교가 다시금 생각났다.
 
123
“될 수 있는 대로 며느리를 귀히 여기는 척하여 그 동안 상했던 사이를 회복시킨 후 이혼만 하면 아들이 돌아온다고 하니 이혼장에 도장만 찍어 동경으로 보내면 아들이 돌아올 테니 돌아오면 시부모가 잘 회유하여 서로 의가 상합하도록 할 테니 염려 말고 도장만 찍어라. 그리고 너의 친정 부모도 알면 재미없으니 네가 가만히 도장을 찍어 가지고 오너라.”
 
124
고만 자꾸 꾀던 정환의 얼굴이 떠오르며 몸에 소름이 끼쳤다.
 
125
‘법률이 이러한 간사한 꾀를 용납시킨다 하더라도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짓이다’라고 상렬은 생각하였다. 그러며 한편 자기 재산에 대하여는 정환이가 말하는 대로만 하리라고 결정하였다.
 
126
정월 대보름이 지난 후 어느 날 사랑에 내려온 마누라를 보고 상렬은 정환에게서 들은 계교를 이야기하였다.
 
127
이 말을 듣고 난 마누라는 명절 때마다 더욱 간절한 아들 생각에 속을 상하던 마음이라 펄쩍 뛰듯이 기뻐했다.
 
128
“암만해도 내 자식이 있은 후에라야 남의 자식 사정을 보는 법이야.”
 
129
하며 당장에 그 계교를 쓰겠다고 야단을 했다.
 
130
“안돼 ─.”
 
131
상렬은 그믐날 밤 이후 끝없이 가엾게 보이는 며느리를 차마 속여 넘기기가 가슴이 아팠다.
 
132
“영감은 정신이 빠졌소? 그래 이대로만 있다가 걔가 동경서 영영 안 나오면 어떻게 하며, 동경보다 더 먼 데로 가 버리면 어쩔 테요. 그리고 또 원래 싫은 부부를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하나요. 피차 팔자가 아니에요.”
 
133
하고 마누라는 빡빡 세웠다.
 
134
상렬은 잠잠하고 앉았다가 도장을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집을 나섰다. 이미 자기 집 재산은 전부 동산 부동산 할 것 없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이정환의 앞으로 공정증명을 내기로 준비가 다 되었던 것이었다.
 
135
물론 상렬도 자기의 전 재산을 남의 명의 아래 두기가 위태한 것 같기는 하나, 이정환의 재산도 이삼십만 원은 될 뿐 아니라 죽마고우로서 오늘까지 친형제 진배없이 지내왔던 터이라 십분 안심하였던 것이다.
 
136
만일 그대로 두었다가는 채권자에게 그대로 홀짝 빼앗길 것이었으므로 그는 아주 맘을 놓았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날 모든 수속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한쪽 어깨가 가뿐하여 맘이 무척 상쾌하였다.
 
137
“아가…… 술 한 잔 덥혀 다오.”
 
138
하며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며느리는 뜰에 내려와 상렬을 맞아들인 후 술상을 차려 들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139
“어, 이제 안심이다. 너희들은 몰랐어도 나는 보증해 준 것 때문에 어떻게 염려를 했는지 모른다.”
 
140
상렬은 술잔을 들며 이렇게 말하였다.
 
141
“안심이라니, 어떻게 된 셈이요?”
 
142
마누라도 이미 그 보증해 준 오만 원 까닭에 무척 애를 써 오던 터이라 반기어 물었다.
 
143
“이야기할 테니 듣소.”
 
144
상렬은 정환과 그 동안 해 놓은 공정증서 이야기를 다 했다. 마누라는 자세히 듣고 나더니 만일 며느리가 장차 이혼을 당하고 나면 누설하지 않을까 두려운 듯이 상렬에게 눈짓으로 염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상렬은 요즈음 그 며느리가 가여워 가슴이 아픈 터라 모르는 척하고
 
145
“아가, 이제는 안심해라.”
 
146
하고 연달아 술잔을 기울였다. 마누라도 지금까지와는 태도가 일변하여 며느리를 무척 중히 여기는 척하였다. 상렬은 비록 자기 마누라가 거짓으로 며느리를 사랑하나 며느리는 그 사랑을 참으로 받고 감격하여 공손히 받드는 것을 보매 도리어 마누라와 아들이 얄밉고 괘씸하였다.
 
147
“아버님, 드릴 말씀은 아니올시다만 제 생각에는 염려가 됩니다.”
 
148
하고 며느리는 상렬 부부의 맘속에는 무관심하고 의젓하게 입을 열었다.
 
149
“엉? 무엇이!”
 
150
“아무리 친한 사이시더라도 사람의 속을 어떻게 아실 수 있습니까? 그러하오면 전 가산이 이정환 씨 명의로 있게 되오니 염려올시다. 아무 증인도 없는데…… 아니올시다. 설혹 증인이 있다더라도 벌써 법률적으로 뚜렷이 그 분의 것이오니 그 분이 만일 마음을 잘못 쓰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151
하고 며느리는 얼굴이 푸르러졌다.
 
152
“엉?”
 
153
상렬은 심황후를 만난 심봉사처럼 두 눈이 활짝 뜨인 것 같아 벌떡 일어났다.
 
154
“아가, 네 말이 과연 옳구나. 법률이란 참 교묘하구나. 위에 위가 있고, 아래에 또 아래가 있어 끝이 없겠구나. 만일 정환이가 거짓 증서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지.”
 
155
“아이 참 그래. 그러면 어쩌나.”
 
156
마누라도 펄쩍 뛰었다. 상렬은 바쁘게 정환의 집으로 달려갔다.
 
 
157
─ 《영화조선》(1936).
【원문】어느 전원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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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전원의 풍경 [제목]
 
  백신애(白信愛) [저자]
 
  1936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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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전원의 풍경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8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