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여행지에서 본 여인의 인상, 이상한 기연 ◈
카탈로그   본문  
1927.10.
이익상
1
여행지에서 본 여인의 인상, 이상한 기연
 
 
2
C신문사를 퇴사하던 이튿날 ─ 8월 10일 밤 일이었다. 한일월(閒日月)을 얻은 김에 흡신 철저하게 한적(閑寂)을 맛보자 하는 엷지 않은 욕심을 가지고 석왕사(釋王寺)를 향하게 되었다. 종로에서 전차를 탈 때부터 나의 마음에는 여행 기분이 가득하였다. 여행하는 사람의 특성과 또는 여행의 성질에 따라 여행하는 사람이 느끼는 바가 다르지만은 나의 그때의 여행은 대단히 감상적이었다. 어쨌든 4년 간이나 정들여 놓았던 C사(社)를 하직한, 섭섭한 마음에 가슴에는 무엇인지를 두근거리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행은 흔히 그 특수한 의의가 고독을 느끼는 데에 있는 터에 나의 그때 길은 온 세상을 저버리고 나 혼자 사람 없는 곳을 찾아가는 듯하였다. 그렇게 고독을 느끼는 만큼 사람이 그리웠다. 전차 중에서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할 때에 나의 어깨를 흔드는 사람이 있었다. 눈을 번쩍 떠서 쳐다보았다.
 
3
그는 나의 고향사람 R이었다.
 
4
“자네 어디 가나?” 그가 손에 여행구(旅行具)를 들은 까닭에 나는 물었던 것이다.
 
5
“어떤 이가 좀 어디를 간대서…….”
 
6
“가는 이가 누구야?” 좀 심악(甚惡)스럽지만 나는 물어보았다.
 
7
“저이가……” 하고 R의 가리키는 편에는 몸이 날씬하고 얼굴빛이 희고, 트레머리에 에나멜 구두를 날아갈 듯이 신은 신여성 한 분이 차창밖을 내다보고 섰었다. 나에게서 일종의 호기심이 번쩍 일어났다.
 
8
“어디를 간대?”
 
9
“원산(元山)으로 해수욕을 간대…….”
 
10
나와는 같은 북행(北行)이었다. 그러나 그는 원산(元山)이요 나는 석왕사(釋王寺)였었다.
 
11
“그러면 나와 한 차로 가겠군”
 
12
이러하자 여자는 이편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는 얼굴에 비교하여 눈과 입이 작았다. 극장에서 더러 본 듯한 기억도 있었다.
 
13
“어떠한 인가.”
 
14
“차차 알지!” R의 대답은 시원치 못하였다.
 
15
꼬치꼬치 묻기도 안 되어서 그대로 정거장까지 아무 말 없이 갔다. 한번 호기심을 가진 이상에 그 여자의 행동이 눈에 아니 띨 수 없었다. 그 여자를 작별하려 나온 남자의 수가 의외에 다수인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치 아양부리는 여왕처럼 그들 사이에서 납시었다.
 
16
발차(發車)시간이 가까워오자 나는 그대로 사람 물결에 휩싸여 구내(構內)로 들어가서 자리를 보전을 하고 그대로 누웠었다. 그 여자와 나는 차의 등(等)이 벌써 달랐었다.
 
 
17
석탄냄새와 입김의 탄산가스로 혼탁해질 대로 혼탁하여진 공기를 밤새도록 마시고 아침 해가 차창을 비추일 때에 나는 석왕사역에 내리었다. 석탄연기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새벽 서늘한 바람을 쏘이며 정거장 출구로 향하자 어제 밤에 원산(元山)으로 해수욕 간다는 칠피(漆皮) 구두 신은 여성이 바로 내 앞을 서서 걸어간다. 나는 웬 셈인지를 몰랐다. 물론 원산 간다는 말을 그 여성의 입에서 직접으로 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R의 말과는 다른 것이 나로 하여금 더욱 호기심을 일으키었다. 그 여자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으나, 나는 유심히 보는 것 같이 느끼었다. 그네는 어제 밤에 자기의 일을 R과 내가 말한 것을 눈치채었는지 알 수 없으나 한번 보는 데에도 사람의 뱃속을 훑어낼 듯한 매서운 맛이 있었다. 그네의 의복은 벌써 어제 밤 의복은 아니었다. 차중(車中)에서 청결하게 꾸미고 나온 것이 더욱 눈에 띠었다. 어제 밤 보던 것이란 칠피 구두 뿐이었다. 아마 석왕사를 좀 들려서 목적지로 향하는 것인가 보다하고, 바로 승합자동차를 몰아 석왕사 여관으로 향하였다. 자동차를 내리자 그는 어느 곳으로 사라져 버렸는지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18
그 며칠 뒤이다. 조석(朝夕)으로 약수터에 물 먹으러 왕래하는 것이 한 노동이었다. 한번은 아침이 느직하였을 때에 약수를 먹으려 내려갔더니 화장을 힘껏 정성 들여 한 그 여자가 물구가를 들고 약수터 안으로 들어왔다. 어깨를 서로 나란히 해서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눈에는 벌써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라는 목례에 가까운 친한 시선이 떠돌았다. 같은 남성끼리도 향수를 느끼는 여창(旅窓)에서 이와 같이 정다운 시선을 만나는 것이 그다지 불유쾌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거든 하물며 꽃같이 아름다운 여성에서랴! 말 할 수 없는 ‘쇼크’를 아니 느끼고는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느라고 어정어정 하다가 물 뜰 자리를 잃어버렸다. 그는 물주전자에 한참 물을 뜨다가 물구가를 들고 나를 바라본다. 이것은, ‘컵’을 앞으로 내놓으라는 말이었다. 나는 감사하는 뜻을 말하고 물을 컵에 가득히 받아 여러 숨에 삼키었다. 이것이 그 여자와는 말을 나눈 것이 처음이었다. 그의 여관을 묻고자 하였으나 어쩐지 남점직한 생각이 나서 그만두었었다. 그리하여 그대로 그는 산 아래로 내려가고 우리 일행은 위로 올라왔다.
 
19
이러한 일이 있는 뒤로 그 여자를 물먹으러 내왕(來往)하는 길에서 두어번이나 만났다. 서로 목례를 반드시 하고 지내었다.
 
20
이삼일을 지난 뒤에 S관(館)에 동숙하든 K형과 원산 해수욕장으로 일일(一日)을 소창(消暢)하러 가려고 석왕사역으로 향하였다. 정거장에 와보니 칠피 구두 신은 여성이 나와 앉았다. 처음에는 차에서 내리는 이를 마중이나나왔나 하였더니 차표 사는 것을 보니 그도 원산을 가는 것이 분명하였다. 웬일인지 오늘에는 그는 본 체 만 체하고 인사도 없다. 내가 인사를 먼저 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렇게 건망증에 잘 걸리는 것이 현대여성인가 하고 혼자 웃으면서 K형과 함께 발차를 기다리었다. 그 여자는 모친인 듯한 중늙은이와 동생인 듯한 어린 계집아이와 동행되었었다. 같은 차에 앉아서도 서로 눈 한번 말 한마디 사귀지 않고 원산역에 내려서 그들은 인력거를 몰아 어느 곳인지 급히 가 버리고 나는 시가(市街)를 어정거리고 한참 돌아다니다가 정오에 송도원(松濤圓) 해수욕장으로 차를 몰아갔다. 나는 자연히, 그 여자가 해수욕장에 오지나 않았나 하고 살피게 되었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참 괴상한 여자야!’어쩌면 하던 인사를 그렇게 적인 듯이 끊어버리나!’하고 호기심을 더욱 가지게 되었다. 소위 세인(世人)들이 떠드는 애매한 여성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21
그날 석양에 석왕사로 돌아오려고 급히 원산역을 향하였다.
 
22
그 여자가 또 나와있다. 그리하여 아침이나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차를 탔다. 내 생각에 그는 바로 경성(京城)이나 삼방(三防)으로 향하나보다 하였더니 석왕사에 이르자 그도 또한 차를 내리었다.
 
23
그 뒤 며칠 석왕사에 머무르면서 한 번인가 두 번인가 역시 물터에서 만났다. 그는 여전히 다시 인사를 한다. 나는 이 인사란 결국 물터에서만 하는 인사인가 보다 하고 혼자 웃었다.
 
24
그 이틀 뒤에 삼방을 들려 경성으로 돌아오려고 정거장으로 나왔다. 자동차 앞에 인력거 세대가 달려갔다. 그 인력거 셋 가운데에 하나는 분명히 그 여성이었다. 그리고 또 한 대는 그와 백중(伯仲)을 다툴 만한 미인이 탔고 또 한 대에 수염을 불란서식(佛蘭西式)으로 전제(剪制)한 중년신사가 한 분 탔었다. 풍채가 당당한 것이 ‘부르주아’나 귀족계급인 듯 하였다. 그들은 경성으로 가나보다 하고 무심히 정거장에서 기차를 기다리었다. 그들의 인력거가 정거장에 닿았을 때에, 그 여성은 또다시 모르는 체하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약물터에서만 하는 인사인 것이 분명하였다.
 
25
기차는 얼마 뒤 삼방 가(假) 정거장에 도착하였다. 나는 행장(行裝)을 챙겨 가지고 급히 내렸다. 앞 제 이(第二) 승강대(乘降臺)에서 그 여자 일행이 내려온다.
 
26
그 동안 그 여자는 경성에서 원산까지 어떠한 활동을 하기 위하여 몇 번이나 왕래를 하였는지 그것은 알 수 없으나 내가 경성으로부터 석왕사까지에, 또 석왕사에서 원산까지, 또 다시 석왕사에서 삼방까지에, 무슨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또는 일행인 것처럼 도정(道程)을 함께 하게 되었다. 마치 내가 그를 미행이나 한 것처럼 되고 말았다. 그 여자 역시 하도 이상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저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마침 저이가 나를 따라다니나 봐요 하는 듯한 계면쩍은 생각도 났다.(이것을 역용(逆用)하면 그가 나를 미행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마는)
 
27
하나 이상한 생각으로 바로 나는 충충 산협(山峽) 길을 걸어 백수(白水) 여관으로 들어갔다. K군 R군을 만나 여장(旅裝)을 풀은 뒤에 광장 휴게실에 앉아서 이상스러운 여성과 기연(奇緣)으로 행정(行程)이 집 떠난 뒤로 오늘까지 꼭 같이 된 것을 말하고 웃는 차에 그 여성이 양장을 하고, 우리 앉은 곁으로 지나갔다. 이번에는 그의 얼굴과 우리의 눈이 서로 피할 수 없게 꽉 만났다. 그는 머리를 숙여 인사를 받는 사람 아니면 모를 만큼 슬쩍 하고는 그대로 문 밖으로 나아갔다.
 
28
“아! 저 여자 말이오! 요전에 여기 와서 돈을 물 쓰듯이 쓰고 갔다고 여관 안의 평판이 자자한 여자이라우.”
 
29
“그리고 올 때마다 따라오는 남자의 얼굴은 다르다고 하던걸요.” 이것은 R군의 그 여자에 대한 설명이었다.
 
30
그의 얼굴을 그 이튿날까지 그곳에서 구경하였으나 그 뒤에 그와 같이 온 중년신사만 남아있었고 그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31
그 뒤에 우리들끼리 앉으면 말말끝에 그 여자의 말이 나왔다. 그러나, 그 여자의 정체는 분명히 아는 이는 없었다.
 
32
삼방에서 4일간을 묵은 뒤에 경성으로 돌아오는 차중(車中)에서 그가 또 타지나 아니하였나 하고 살피었으나 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33
─《별건곤》제9호, 1927.10.
【원문】여행지에서 본 여인의 인상, 이상한 기연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수필〕
▪ 분류 : 근/현대 수필
▪ 최근 3개월 조회수 : 11
- 전체 순위 : 3968 위 (3 등급)
- 분류 순위 : 705 위 / 1791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이익상(李益相) [저자]
 
  1927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수필 카탈로그   본문   한글 
◈ 여행지에서 본 여인의 인상, 이상한 기연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8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