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 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구름을 어루만지게 되는 과정에는, 몹쓸 바람과 모진 비를 많이 치르는 것처럼, 아니, 사나운 풍우에 무수히 시달리는 것이 크고 높은 나무를 이루는 필요한 조건인 것처럼, 한 개인이나 나라가 위대해지자 하면, 진실로 허다한 곤란과 시련을 겪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이것은 世界[세계]의 어느 나라 역사를 보아도 소연하게 알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환란 고통을 이기지 않고 위대한 자격을 얻어 가진 국민은 일찌기 있지 않다.
12
대한의 역사에도 혹은 국내의 분열 때문에, 혹은 외국의 침입 때문에 무수한 國難[국난]이 뒤를 이어 일어났었다. 어떻게 보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요, 참기 어려운 불행과 같기도 하지마는, 돌이켜 생각하면 이것이 대한의 국민을 단련해서 위대한 역사를 가지게 하려는 階段[계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니, 우리들은 모름지기 이를 견디고 이를 이기고서, 그 너머 있는 영광을 붙들기에 힘씀이 있을 따름이다.
13
국난에도 여러 가지 모양새가 있거니와, 새로 생긴 어떠한 세력이 나라의 뿌리를 흔들 작정으로, 무력을 가지고 갑자기 나라 서울로 들이덤비면, 미처 이것을 물리칠 겨를이 없어서 우선 政治機構[정치기구]를 보호하기 위하여, 서울을 다른 데로 옮겨 놓고, 거기서 저항할 힘을 만들어서, 차차 대적의 세력을 물리쳐 꺾다가, 마침내 그것을 몰아내고 도로 그전 서울로 올라오는 일이 있다.
14
서울을 내어놓고 나가는 것은 避難[피난]이라 함에 대하여, 서울로 도로 들어오는 것을 還都[환도]라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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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을 많이 겪는 나라에는 피난하고 환도하는 일이 가끔 있을 밖에 없다. 우리나라 역사도 그러하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허다한 민족이 두꺼비 씨름처럼 엎치락뒤치락 하는 대륙을 덜미에 짊어지고, 또 남의 나라의 침략으로 생업을 삼는 海賊[해적]의 굴혈을 바다 앞에 두고 지내는 관계로 해서, 이네들이 기운을 쓸 때마다 그 불똥이 우리나라로 미쳐오고, 그것이 심해지는 때에는, 나라 서울이 견디는 수 없어서 얼마동안 지키기 좋은 곳으로 서울을 옮겨 두었다가, 국난이 평정된 뒤에 돌아오는 일이 있었다. 다만 외국 세력 때문만이 아니라, 또 나라 안의 싸움으로 해서 그러한 적도 있었다. 마치 커가는 아이가 감기도 들고 체증도 나는 것처럼, 우리 역사의 위에도 피난과 환도라는 경력이 여러 번 있었다. 그중에서 고려시대 이후의 몇 번 일을 이야기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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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반도를 통일한 뒤에, 마땅히 북방에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을 다 차지해야 할 터인데, 신라 나라가 이 책임을 오래도록 다하지 못하므로, 그전 고구려의 끼친 백성이 들고 일어나서 신라를 넘어뜨리고 새 나라를 만든 것이 고려이었다. 고려는 나라를 세운 뒤로 대동강 이북의 땅을 회복할 양으로 힘을 쓰는데, 거기는 女眞[여진]의 겨레가 살고, 여진의 뒤에는 契丹[계단]의 겨레가 있어서, 그 세력이 점점 강성하였다. 우리 겨레의 북방으로 나가는 길은 이네들의 막는 바가 되어서, 고려는 나라를 세우던 당초로부터 계단으로 더불어 세력을 겨루지 아니하면 아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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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太祖[태조]로부터 여러 대의 임금은 계단의 방비에 대하여 많은 준비를 해 나오는 가운데, 여섯째 임금 穆宗[목종]이 아들이 없이 병이 대단하여 조정이 수런수런하거늘, 그때 큰 병력을 가지고 서북 지경을 지키고 있던, 兵馬使[병마사] 康兆[강조]가 나라 일을 근심하여 서울로 돌아와서, 다음 임금 될 이를 모셔 들였는데, 이러한 북새통에 목종이 세상을 떠났다. 새로 선 임금이 顯宗[현종]이다.
19
이때 계단에는 文殊奴[문수노]라는 임금이 서서 세력이 한참 강성하더니, 고려에 이러한 변이 있음을 알고 강조의 병력을 꺾어버릴 좋은 기회라 하여, 현종 원년(지금부터 950년 전) 11월에 임금 죽인 강조를 집어 치운다는 핑계로, 군사 四[사]○만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지금 義州[의주] 지방으로 침입하였다. 강조가 이를 맞아 싸울새, 칼을 둘러 꽂아서 적병을 덤비지 못하게 한 戰車[전차]를 새로 만들어서 쓰매, 싸움의 형편이 이편에 크게 이로왔다. 강조는 여기 교만한 생각이 나서, 적병에 대한 방비를 소홀하게 했다가, 도리어 패전하여 강조가 붙들려 가고, 계단 군사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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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처럼 믿은 강조의 防禦線[방어선]이 터져 막을 수가 없어지매, 현종 임금이 하는 수 없이 十二[십이]월 二八[이팔]일에 서울(그때는 지금 開城[개성])을 내어 놓고 남으로 피난하여, 楊洲[양주]·忠州[충주]·公州[공주]를 거쳐, 이듬해 정월 十三[십삼]일에 갈재(蘆嶺[노령])를 넘어서 羅州[나주]에 이르렀다.
21
이 정월 一[일]일에 문수노는 서울로 들어와서, 나라의 사당집과 대궐과 민가를 불지르고, 十一[십일]일에 가서야 겨우 물러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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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는 동안에 도순문사(벼슬 이름, 都巡問使[도순문사]) 楊規[양규]가 通州[통주]·郭州[곽주]·돌재(石嶺[석령])·쑥밭(艾田[애전]) 등 일곱 군데서, 계단 군사와 싸워서 번번이 이기고 허다히 죽인 것밖에, 그 三[삼]만여 인을 사로잡고, 약대·말·군기·양식 등을 거의 다 빼앗았다. 계단의 군사가 여지없이 패전하여 더 힘을 쓸 수 없이 된지라, 문수노 이하 약간 사람이 겨우 목숨 붙은 것만을 다행으로 알고서, 정월 二九[이구]일에 압록강을 건너서 도망해 돌아갔다. 양규도 쑥밭 싸움에 불행히 전사하였다.
23
계단 군사의 기세가 꺾여지는 것을 보고, 현종 임금은 정월 二一[이일]일에 나주에서 떠나서, 全州[전주]·公州[공주]·淸州[청주]를 거쳐, 二[이] 월 二三[이삼]일에 개성으로 돌아와서, 타다가 남은 壽康宮[수강궁]으로 들어갔다. 전후 六[육]○일 만에 환도한 셈이다.
24
고려와 계단의 싸움은 이 뒤 줄곧 계속하였지마는, 姜邯贊[강감찬·姜民瞻[강민첨] 등 명장이 있어, 그때 그때마다 이를 격퇴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려가 계단에 대하여 공손하게 구는 대신으로, 압록강 이쪽의 여섯 城[성]을 고려가 차지하여, 땅은 도리어 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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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계단의 뒤에 또 여진의 난리를 당했었지마는, 여진은 본디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었기 때문에, 그 세력이 강성해진 뒤에도 그다지 심악스러운 일은 없었다. 대륙에서 여진의 나라가 쭈그러질 무렵에 새로 일어난 세력이 蒙古[몽고]이었다. 대륙의 북방에서 옛부터 허다한 민족 세력이 일어났지마는, 몽고는 그중에서도 전부후무하게 강대한 세력이었다. 몽고는 다만 동방의 아시아뿐 아니라, 서방 유럽까지를 뒤잡아 흔들어서, 몽고가 강성할 무렵에는 천사에 몽고를 대적하는 나라와 백성이 없었다.
27
몽고의 세력이 우리 반도로 들어오기는 고려의 스물 세째 임금인 高宗[고종]의 초년이었다. 몽고가 대륙에서 그전의 계단 사람과 여진 사람들을 압박하여 그네들이 쫓겨서 압록강을 건너 들어오매, 그 뒤를 따라서 몽고의 군사가 고려로 들어왔었다. 계단과 여진의 세력이 뿌리뽑혀 버린 뒤에는, 몽고가 대신 고려를 집적거리기 시작하였다. 지금부터 七五[칠오]○년쯤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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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의 군사가 가는 곳에 떨어지지 않는 서이 없고 굽히지 않는 나라가 없었지마는, 고려 하나만은 압박하면 압박할수록 되받기를 강하게 하여, 몽고 군사는 세상에 이렇게 무서운 나라도 있는가고 놀랄 지경이었다. 몽고가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鐵州[철주]를 무찌르고 龜州[귀주]로 달려들었을 때에는, 몽고가 세계로 돌아다니면서 배워 가진 갖은 재주를 다하여 귀주성을 공격하였지마는, 이 성을 지키는 장수 朴犀[박서]는 고금에 드문 명장으로서, 이런 재주 저런 재주로 막아서 언제든지 고려의 방어하는 재주가 몽고의 공격하는 재주에 앞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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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몽고가 전력을 기울여서, 연해 연방 덤벼드는 것은 심상한 방법으로 막아내기가 어려웠다. 오래오래 두고 끝끝내 저항을 하자면, 항상 위협을 받는 개성 서울을 떠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사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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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고려의 정치를 지도하고 있던 崔瑀[최우]는 우연히 서울을 몽고의 침입할 수 없을 곳으로 옮겨 가기를 결심하였다. 몽고 사람은 물이 귀한 모래 바닥 나라에서 자라난 백성이므로, 큰 물을 무서워하는 버릇이 있었다. 최우는 이 약점을 알고서, 고종 一九[일구]년 七[칠]월 六[육]일에 임금을 모시고 개성 서울을 바다 속의 江華[강화]섬으로 옮겨 가지고 들어갔다. 물(陸[륙])에서 멀지 않고 개성에도 연락하기 쉬운 강화는, 몽고의 압박을 받는 일없이 몽고와의 항전을 계속하기에 매우 적당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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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사람은 과연 바다가 무서워서 감히 건너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강화 저쪽에 와서 고려 임금이 어서어서 뭍으로 나오라고 호통하였다. 밖에서 소리지르는 범의 아가리로 향하여 굴 속의 토끼가 튀어 나올 리가 없었다. 이동안에는 두 나라 사이에 승강도 많고, 고려 사람의 겪은 고초는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지마는, 고려의 몽고에 대한 철저한 반항 정신은 그 때문에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다. 고종은 강화로 들어가서도 三[삼]○년 가까이 더 임금 노릇을 하였지마는, 고종 임금과 최우의 지도력이 존립하는 동안에는, 고려와 몽고의 항전은 그냥 그대로 계속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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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四五[사오] 년에 최씨의 세력이 꺼꾸러지고, 이듬해에 고종 임금도 세상을 떠나매 너무도 시달린 끝이라, 고려의 조정에 항전을 더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많아져서, 마침내 몽고에 대하여 화친하기를 청하고, 두 나라의 관계가 차차 완화되었다. 그래서 고려의 임금이 몽고의 사위 노릇하는 조건으로 고려와 몽고가 한집안이 되어 버렸다. 말하자면 무력으로 한 쪽을 굴복시킨 것이 아니라, 친척 관계를 맺어서 싸울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임금인 元宗[원종] 十一[십일]년 五[오]월 二七[이칠]일에 비로소 개성 서울로 돌아왔다. 전 임금 고종이 피난해 들어간 때로부터 三九[삼구] 년 만의 일이다. 침입하는 다른 나라에 대하여 이렇게 오랜 동안 능히 반항을 계속한 것은 진실로 드문 일이요, 더욱 몽고의 세계에서는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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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서른 한째 임금 공민왕의 때에, 대륙에서 몽고의 세력이 줄어지고 중국이 다시 어지러워지기 시작할 때, 머리에 붉은 수건을 쓰고 혁명 운동을 북방 중국에 일으킨 무리가 있었다. 이르기를 紅巾賊[홍건적]이라고 하는 떼다. 홍건적은 한때 세력이 대단하여, 북방 중국으로부터 지금 만주 지방까지 그 영향이 미쳐 오고, 밀리는 힘이 우리 반도로 들어오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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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八[팔]년 十二[십이]월에 압록강을 건너와서 지금 평양을 떨어뜨리기까지 한, 한 패는 安祐[안우]라는 맹장의 힘써 싸운공으로 이를 물리쳤지마는, 이듬 이듬해 공민왕 一[일]○년, 지금부터 六[육]백 년쯤 전에 둘째번 침입해온 潘城[반성]·沙劉[사유]의 一[일]○만 무리는 지금 평안도 지방을 휩쓸고, 황해도의 절령을 넘어서 밀물처럼 내려오는 것을 미처 막을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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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형세가 급해진 것을 보고, 十一[십일]월 十九[십구]일에 할 수 없이 개성 서울을 내어놓고 남방으로 향하면서 뒷일을 安祐[안우]·崔瑩[최영]에게 맡겼다. 왕은 廣州[광주]·忠州[충주]를 거쳐 새재(鳥嶺[조령])를 넘어서, 十二[십이]월 十五[십오]일에 福州[복주], 지금 安東[안동]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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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떠나나온 뒤에 十一[십일]월 二四[이사]일에 홍건적의 무리가 개성으로 들어와서 두어 달 묵고 있는 동안에, 백성과 마소를 죽이고 온갖 참혹한 짓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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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정월에 安祐[안우]는 李芳實[이방실]·鄭世雲[정세운]·崔瑩[최영] 등 여러 장수와 힘을 합하여, 十七[십칠]일에 홍건적이 들어 있는 개성을 에워싸고, 十八[십팔]일 새벽에 적이 아직 두서를 잡지 못하는 짬에 대군이 사방으로부터 들이덤벼서, 적의 괴수를 다 잡아 죽이고, 적의 무리가 놀라고 겁내어 서로 짓밟는 것을 닥치는 대로 목베기 一[일]○만이 지나고, 군기와 가진 물건 전부를 빼앗으니, 약간의 무리가 겨우 목숨을 보존하여 압록강 건너로 돌아가고, 그 나머지는 우리 칼의 밥이 되어서 적난이 그만 평정되었다.
39
이 기별을 받고 왕은 二[이]월] 二五[이오]일에 복주를 떠나서, 尙州[상주]·淸州[청주]에 들러서 온 一[일]년 두고 치렁거리다가 또 이듬해 二[이]월 十二[십이]일에야 개성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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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마는, 전후 열 다섯 달 만에 환도한 것이다. 홍건적이 다녀나간 직후에는 대궐은 다 불타 버리고, 거리 거리에 백골이 수두룩하였었는데, 이것들을 깨끗이 치우고 복구할 것을 약간 복구하기 위하여, 짐짓 중로에서 치렁치렁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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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년으로부터 倭寇[왜구], 곧 일본의 해적이 그악해져서 이씨조선의 초기까지 그들에게 몹시 부대꼈지마는, 대개 한 지방에서의 일이요, 나라 전체의 소동을 일으킨 일은 없었다. 조선의 열 네째 임금 宣祖[선조]의 때에 일본의 豊臣秀吉[풍신수길]이라는 인물이 나서, 끄덩이끄덩이 따로 났던 국중을 통일해 가지고 커다란 세력을 이루어 가졌는데, 마침 조선에는 조정이 東人[동인]·西人[서인]이라 하는 두 패에 갈려서, 나라일을 내어 놓고 당파 싸움하기에 다른 정신들이 없었다. 풍신수길이 조선에 이러한 틈이 있는 것을 보고, 선조 임금 二五[이오]년, 지금부터 三六[삼육]○년 전 四[사]월에 대군을 움직여서, 그 先發隊[선발대] 五[오]만이 四[사]월 十三[십삼]일에 동남 해변 釜山[부산]으로 달려들어서, 그 뒤 七[칠]년에 걸치는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43
임진왜란은 총 가진 일본 군사를 활로써 대항하는 싸움이다. 서로 비교가 되지 아니하여, 일본 군대가 덤비는 대로 모든 성이 차례로 떨어지고, 태산같이 믿었던 忠州[충주]의 防禦戰[방어전]도 四[사]월 二八[이팔]일에 형편없이 패해버렸다. 조정에서 이 기별을 듣고는 앉아 배기는 수 없어서, 四[사]월 그믐날 새벽에 선조 임금과 모든 妃嬪[비빈]과 중요한 관인들이 창황히 서울을 내어놓고 북방을 바라고 피난을 나섰다. 일본 군사의 진출하는 형세를 보아 가면서 조츰조츰 나가다가, 五[오]월 二七[이칠]일에 개성, 六[유]월 十六[십륙]일에 평양을 들러서 六[유]월 二二[이이]일에 마침내 義州[의주]에 다다랐다. 압록강 한 금을 붙들고 나라를 지키는 셈이었다.
44
서울에는 金命元[김명원]이란 이가 약간 군사를 거느리고 남아 있었지마는, 五[오]월 二[이]일에 일본군이 동녘 길, 남녘 길로 달려들매, 저항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일본군은 서울에서 숨을 돌려가지고 선조의 뒤를 밟아서 차츰차츰 진군하여, 六[유]월 六[육]일에 평양을 빼앗고 들어가 웅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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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에서는 우리 군이 패하고 또 패하여 보기가 딱할 지경이었지마는, 다행히 바다를 지키는 李舜臣[이순신]이 중요한 목쟁이를 지키고서 싸우면 이기고, 덤비면 때려부숴서 일본의 한 척 배도 놓쳐 보내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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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일본 군사는 우리나라로 깊이 들어온 뒤에는, 군사와 물자를 바닷길로 날라다가 보급할 작정이러니, 배가 서쪽 바다로 나갈 수가 없으므로 필요한 사람과 물건의 뒤를 댈 수가 없는 데다가, 한편으로 뭍에서도 여기저기 義兵[의병]이 벌떼같이 일어나서, 자칫하면 뒷길이 끊어질 형편이 되었다.
47
평양까지 진출한 일본군은 더 앞으로 나갈 희망이 없어서 어쩔 줄을 모르는 판에, 명나라에게 구원병이 오고, 또 그 謀士[모사] 沈惟敬[심유경]이라는 이가 화평하자는 말을 꺼내어, 일본군이 이에 응하여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일본군이 평양에서 패전함을 기회로 하여, 우선 남방 해변으로 물러나가서 이야기하자는 조건이 성립하여, 이듬해 癸巳[계사]년 四[사]월에 서울과 각처에 있던 일본군이 차례로 부산과 및 그 좌우쪽 지방으로 철수하였다.
48
이렇게 휴전이 되고, 서울이 수복되어 위급한 일이 없어지매, 왕이 癸巳[계사] 정월 十八[십팔]일에 의주를 떠나서 남으로 내려오기 시작하여, 定州[정주]·安州[안주]·平壤[평양]·海州[해주]를 거쳐 一[일]○월 초하룻날에 서울로 돌아왔다. 景福[경복]·昌德[창덕]의 두 대궐과 모든 큰 집이 다 타버리고, 지금 덕수궁 된 곳이 겨우 남은 고로, 여기를 대궐로 하여 선조 임금의 산 동안은 여기서 정사를 행하였다. 꼭 一[일]년 반만에 환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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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라 사이의 화평하는 교섭은 될뻔 말뻔 하면서 四[사]년을 지내고, 丁酉[정유]년에 일본군이 둘째 번 침입하여 다시 북으로 쳐밀었으나, 이번에는 稷山[직산]까지 밖에 더 올라오지 못하고, 더 二[이]년을 흑죽학죽 하다가 戊戌[무술]년 八[팔]월 十八[십팔]일에 일본의 풍신수길이 죽어, 일본군이 도망해 돌아가서, 己亥[기해]년 八[팔]월까지 명나라에서 구원으로 와서 있던 군사도 다 철수해 가서, 지리하게 끌던 이 싸움이 七[칠]년 만에 깨끗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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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는 국난이 북방으로부터 달겨들었음으로써 피난은 항상 남방으로 갔었는데, 임진왜란은 남방으로부터 달려들어서 북방으로 피난했던 것이 여느 때와 다른 점이었다.
52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서 조선과 명나라가 다 피곤한 틈을 타서, 오랫동안 짓눌려 지냈던 女眞[여진]의 겨레가 만주 지방에서 고개를 들고 일어섰다. 그것은 선조의 아들인 光海君[광해군] 임금 때의 일인데, 광해군은 임금 자리에 있은 지 十五[십오]년 만에, 그 사촌 되는 이가 광해군을 내쫓고 대신 임금 자리에 나가니, 새 임금은 仁祖[인조]라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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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를 떠받들어 임금이 되게 한 공으로 여러 사람이 높은 벼슬들을 하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인 李适[이괄]은 공로 만한 상을 타지 못하고, 평안도의 兵使[병사]로 물리쳐 나가 있게 되어서 불평을 품고 있다가, 인조 二[이]년, 지금부터 三四[삼사]○년 전 정월 二四[이사]일에 조정을 숙청하겠다는 핑계로 군사 만 二[이]천을 이끌고 서울로 달려들었다. 그 형세가 사나우므로 관군이 이를 막지 못하여, 금세 서울이 위태하게 되었다. 二[이]월 八[팔]일 저녁에 왕과 비빈이 창덕궁으로부터 나서서 水原[수원]·天安[천안]을 거쳐 十四[십사]일에 公州[공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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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은 一[일]○일에 서울로 들어와서 새 조정을 배포하려 하더니, 十一[십일]일에 官軍[관군]으로 더불어 서대문 밖 길마재(鞍峴[안현])의 싸움에 패전하고, 수구문 밖으로 도망하다가 붙들려 죽어서 일이 그릇되고 말았다. 十八[십팔]일에 왕이 공주를 떠나서 직산·수원을 거쳐 二二[이이]일에 서울로 돌아오니, 그동안이 보름에 지나지 못하였다.
55
겨우 괄의 난을 진정하였지마는, 한편에서 강성해가는 여진 겨레(조선에서는 「되」라고 불렀다)의 압박이 북풍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여진 사람이 새로 만주라는 겨레 이름과 後金[후금]이라는 나라 이름을 쓰면서 대륙에서 활동을 하는데, 조선이 덜미를 짚을까 두려워하고, 또 필요한 물자를 조선에서 얻어갈 작정으로, 인조 五[오]년 丁卯[정묘], 지금부터 三四[삼사]○년 조금 못 되는 해 정월 十三[십삼]일에 그 임금의 사촌인 阿敏[아민] 이 군사 三[삼]만으로써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여, 平山[평산]에 와서 지쳐 내려올 기세를 보였다. 왕이 二一[이일]일에 비빈을 데리고 대궐을 나서서 衿川[금천]·通津[통진]을 거쳐 二九[이구]일에 강화섬으로 들어갔고, 한편 왕세자는 전주로 내려갔다.
56
만주의 군사는 우리에게 향하여 명나라를 끊고 금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려느냐, 그렇지 않겠느냐를 종다짐하여 말썽이 길게 되다가, 조선이 마침내 그리하마 하여, 三[삼]월 三[삼]일에 약조를 정하고 七[칠]일 이후에 금병이 차차 철퇴하였다. 왕은 四[사]월 一[일]○일에 강화를 떠나서 가던 길로 돌아와서, 十二[십이]일에 서울로 들어와서 慶德宮[경덕궁]으로 처소를 정하니, 전후 두 달 남짓해서의 환도이었다. 왕세자는 三[삼]월 二三[이삼]일에 전주서 돌아오고, 비빈들은 五[오]월 五[오]일에야 강화에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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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조를 잘 지키지 않는다 하여 피차간에 말썽이 많게 지내다가, 인조 十四[십사]년 丙子[병자]에 후금이 임금이 淸[청]나라 황제로 승진하는 예식을, 조선이 승인하지 아니한 것이 말썽되다가, 마침내 그해 十二[십이]월 九[구]일에 청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서 사잇길로 풍우같이 몰아 내려와서, 十四[십사]일에 이미 서울로 달려들었다. 이날 아침에 조정에서 먼저 비빈을 강화로 떠나보내고, 저녁때 왕이 남대문을 나설 때에는 청의 군사가 이미 앞길을 가로막아서, 어쩔 수 없이 말머리를 돌려서 남한산성을 향하여 밤 늦게 간신히 성으로 들어감을 얻었다. 十五[십오]일 이후로는 청군이 남한산성을 에워싸고, 三[삼]○일에는 청의 임금 홍타시(弘多時)가 남한에 이르러, 이듬 丁丑[정축]년 정월 一[일]일 이후에는 홍타시가 친히 청군을 지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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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자니 힘이 모자라고, 굴복하자니 부끄러워서, 공연히 서로 말썽들만 하는 가운데, 정월 二二[이이]일에 강화가 청군에게 떨어져서 비빈이 다 잡히고, 그 기별이 二六[이육]일에 남한에 이르니, 왕이 이제는 할 수 없다 하여 성을 열고 굴복하기를 결심하고, 三[삼]일에 남한에서 나와서 三田浦[삼전포]에서 청의 임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청의 임금은 두 왕자와 비빈을 머물러 두고 인조왕은 놓아 주었다. 왕이 그길로 송파 나루를 건너서 밤에 창경궁의 養和堂[양화당]으로 들어왔다. 四七[사칠]일 만의 환도이었다. 그리고 이때까지의 다른 환도는 다 떳떳하게 들어온 것이러니, 이번의 인조 만은 부끄럼을 잔뜩 짊어진 환도이었다. 또한 임금이 세 번이나 서울을 버렸다가 도로 찾아들기도 별로 없는 일이었다.
60
어느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부대껴서, 서울을 내어놓고 또 찾아드는 일이 결단코 명예로운 일은 아니나, 그러나 체증·감기 한 번 앓지 않고 그대로 커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풍파와 난리를 아니 치르고 위대해지는 나라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쇠가 불에 많이 불릴수록 단단해지고, 금강석이 망치를 많이 맞을수록 광채가 드러나는 것처럼, 국가와 인민의 가치는 이러한 국난을 많이 치르고, 그것을 意義[의의]와 보람있게 잘 치름으로써 점점 나타나는 것이다. 한 번씩 환란을 치르는 대로 더욱 용기와 능력과 진보와 향상을 보이는 곳에, 한 국민 생활의 가치가 돋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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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역사상으로 본 피난(避難)과 환도(還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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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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