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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백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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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없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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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동경서 발행하는 어떤 신문지상에 장곡천여시한(長谷川如是閑)씨를 평한 말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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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는 다방면으로서 무엇을 한 가지 끝까지 철저하게 연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씨의 단점이라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그는 너무 두뇌가 명철한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무엇이든지 한 가지에만 열중한다는 것은 그만치 그의 머리가 맹신적(盲信的)으로 단순한 까닭이니 즉 예를 들어 말하면 한 종교(宗敎)에 열중하는 사람 그 사람이 조금 ‘바보’가 아니면 한 가지 종교에만 열중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무슨 방면이든지 한 방면만 꼭 연구한다는 것은 좀 ‘바보’가 되지 않으면 못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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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써 있었던 것이 나는 이따금 생각날 때가 있다. 무슨 까닭에 자주 이 말이 생각나느냐 하면 한 방면에만 철저하지 못하는 장곡천 씨의 투철한 두뇌를 숭배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단점을 평한 말이 피육으로서는 대단히 점잖고 교묘했던 것을 느낀 까닭이다. 아니 그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루호드’하고 내 자신에 비춰서 느껴진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장곡천 씨 같은 두뇌를 가졌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너무나 평범하여 버리려는 무열성한 나를 변명하기에 대단히 적당한 방편이 되어주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뒷걸음질치려는 나의 나태심을 자위(自慰)하기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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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한 가지만으로도 ‘바가라시이’하고 음악, 미술, 문학, 사상 무엇무엇 모두 하나씩만하게 되는 것은 바보다. 착한 것도, 악한 것도 모두 극단으로 가서는 ‘바가라시이’하다 라고 생각하여 인류 세상에 있는 온갖 것을 죄다 알고 두루두루 다방면으로 취미를 가지고 열중하여 그만치 않은 소산이 있게 한다면 즉 자전식(字典式)이 된다면 이상적 인간이라 할 수 있겠지만 결국 인간이란 유한(有限)한 것이니 어떻게 바랄 수 있으랴.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닌 아무 능률 없는 남김 없는 평범한 인간이 되고 말 것이며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된다면 사회는 답보만 하는 우울에 빠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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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에 집착하는 것을 ‘바보’라고 생각하는 가장 원만한 재능을 가진 장곡천시가 한 가지도 완성치 못하는 다능의 단점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인데 이러한 평을 받게 되는 것을 보면 결국 그도 한 방면에 열중하는 사람 이상의 바보거나 자기 재주를 과신하는 욕심쟁이거나 열정이 없고 의지가 박약한 게으른 낙천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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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서도 내 스스로도 때때로 장곡천식 성격이 염치없이 쑥 나올 때가 많아. 남을‘바보’라고 생각하면서도 끝까지 ‘바보’라고 못하는데 장곡천 씨 이상의 게으름뱅이 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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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여류문사라고 하는 K씨가 머리 깎고 중이 되어 금강산중에서 참선 공부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당장에 나의 악벽인 주재 넘은 입슬이 들먹 하는 충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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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사람이란 속세(俗世)를 떠나서는 산다는 의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있는 까닭에 속세가 있고 사람이 나면 속세에 나는 것이니 살려고 나온 속세를 왜 버리느냐? 늙어 병들어 무기력한 사람이면 용훅 예사이지만 피 끓는 젊은이가 사람의 생활을 버리고 비인간의 생활을 찾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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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철창 속에서 아주 아무리 엄중하게 갇혀 있는 영어(囹圄)의 몸이라 해도 인적 없는 첩첩산중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단 혼자 자유롭게 있는 것보다는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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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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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석가님을 숭배 사모하여 중이 되었다면 구태여 삭박위승이 되지 않으면 못 하는 일일까? 석가의 대제자로도 감히 나아가 입을 벌리지 못하던 유마거사(維[유])마(居士[거사])도 있나니 그는 재속(在俗)하여서 불법(佛法)의 오의(奧義)를 통달하였으며 석가만치 신통력(新通力)을 가졌다고 하지 않느냐. 이 세상이 속되고 죄 많은 까닭에 그것을 구원하려고 석가는 도를 닦았다. 즉 중생(衆生)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대자비의 교를 베푼 것이다. 단지 자기 혼자의 극락을 위하여서가 아닌 것이다. 중생을 구원하려고 산중선정(禪定)에서 대오(大悟)한 것이 대지바심이었던 것은 지금부터 이천 년 전 일이니까 지금의 우리가 배울 바가 아닌가 한다. 아무리 K씨가 인간세속을 떠나 금강산 좋은 곳에서 일여경지(一如境地)에 이르러 대오를 한다더라도 그는 벌써 인간세속을 떠나서이니 세속에 사는 우리 중생이 쳐다볼 때가 아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자기 일개인이 인생과 만물의 무상(無常)함과 공(空)임을 느끼고 차라리 극락이나 찾아보리라는 것이라면 그는 스스로 모순됨이 있다. 인간만물이 무상하고 공이라면 구태여 정성스런 고행(苦行)을 할 턱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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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죽음이 참 삶이냐 이 삶이 도리어 죽음이 아닌가 모르겠다. 모르는 까닭에 나는 이대로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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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노래 부른 사람보다 더 인간의 사명(使命)에 대하여 무책임하다. 짧게 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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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씨는 인간적 책임을 회피한 비겁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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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문이 바쁘게 가장 제가 젠 척 막 쏟아져 나오려다가 다음 순간에는 그만 잠잠하게 미소하고 침묵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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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거꾸로 타는 것도 제멋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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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자인 그가 산(山) 생각을 덜해서 머리를 깎았을라고 평(評)하기 전에 먼저 이해할지라 사람이란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正當化) 시키려고 가진 애를 다 쓰는 동물이니 하물며 영리한 K씨에 있어서야 무슨 생각을 못했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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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씨는 알지 못하면서 가진 말을 다해 보다가 이렇게 슬그머니 생각이 들어지고 마는 것이다. 머리 깎고 중이 된 K씨의 용단성만을 도리어 감복하며 장곡천 씨 이상의 불철저한 내 자신의 무열정함이 가소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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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9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