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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범전야(出帆前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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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8
채만식
첫사랑 S와의 추억에 대한 글
1
出帆前夜
 
 
2
동경서 돌아와 일 년 강화에 가서 있다가 다시 서울로 와서 한동안 홍떵거리던 때였으니 퍽도 오랜 기억이다.
 
3
저녁때가 다 되어서 하숙에 누워 딩굴고 있느라니까 내 이름을 부르면서 소년배달부가 전보 한 장을 들이밀고 간다.
 
4
가슴이 성큼해서 얼핏 뜯어보니 “명조출범 에스”라고 언문으로 씌어 있다.
 
5
고향에서 온 불길한 전보가 아닌 것을 알고 안심한 것은 일순간이요, 어쩐지 절박하게 섭섭한 생각에 나는 잠깐 전보를 들고 앉은 채 막막히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6
“명조출범 S”
 
7
상해로 떠나려고 인천으로 내려간 S가 배시간이 작정되어 그것을 알린 전보다.
 
8
나는 전보를 되읽었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명조출범 에스”의 여섯 자뿐이다.
 
9
첫째 주소를 알 수가 없다.
 
10
또 어느 배란 말도 없고 그냥 아침이라고 했고 시간도 알리지 아니했다.
 
11
이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다. S가 떠나는데 내가 전송을 하지 아니할 것을 S는 아는지라 다만 떠난다고만 한 것이 도무지 괴이한 일은 아니다.
 
12
나로도 S를 경성역에로 전송도 아니했으면서 인천까지 가서 배의 전송을 할 터는 아니었으니 떠나면 떠나나보다 하고 말 것인데, 그러나 막상 전보를 받고 난 나는 새삼스럽게 섭섭한 생각이 들고 따라서 주소도 배이름도 배 떠나는 시간도 알리지 아니하고 그냥 떠난다고만 한 S가 나를 저버린 사람인 것처럼이나 안타까왔다.
 
13
나는 전보를 만지면서 이리 궁리 저리 궁리하다가 무릎을 탁 치고 양복을 거듬거듬 집어 입었다.
 
14
내가 생각해도 묘안이라고 기뻐했다. 전보를 잘 간수해 가지고 경성 역으로 나가 마침 떠나는 차를 잡아타고 인천 가서 내리니 짧은 가을 해가 저물었다.
 
15
우편국에서는 그러한 규정인지 또는 나의 겸손한 청을 물리치지 못했음인지 그것은 모르겠으나 좌우간 계원(係員)은 내가 내놓는 전보를 상고하여 접수한 뇌신지(賴信紙) 뭉텅이 속에서 S의 것을 꺼내 보여주었다.
 
16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면서 우선 S의 필적(筆蹟)에 십 년의 정든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기쁨을 삼켰다. 주소도 번지도 아니 썼으나 여관 이름은 씌어 있었다. 나는 인력거를 잡아타고 그 여관으로 찾아갔다.
 
17
아! 있다 S가 있다. 나는 S를 찾아내고 말았다.
 
18
여관으로 들어서서 하인을 붙잡고 S라는 여자 손님이 들었느냐고 묻 는데 옆에서 밀창문이 보통 이상으로 와락 열리며 얼굴을 내어보이는 것이 S였었다.
 
19
S !
 
20
우리 둘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냥 반갑고 기뻤지만 S의 표정은 복잡하였다. 처음에는 놀라고 그러고 웃으면서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그러고도 그냥 웃으면서 나를 방으로 맞아들인다.
 
21
S의 그 눈물 어린 미소에 나는 그냥 그저 감격했다. 가뜩이나 감격 하기 쉬운 이십대의 젊은 나였던 것이다.
 
22
그러나 수줍었다.
 
23
우리는 마주앉았다. 그리고 그냥 마주 바라보았다. 아마 퍽 오래 그렇게 바라보고 앉아 있었던가 보다.
 
24
S가 먼저 입을 열었다.
 
25
“어떻게?”
 
26
이렇게 묻는 S의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머금겨 있다.
 
27
어떻게 찾아왔느냐는 말도 되고, 또 왜? 왔느냐는 말도 되고, 그러나 알았다는 말도 되고······
 
28
나는 대답 대신으로 표정을 지어 대답하였다. 적막하게.
 
29
S는 고개를 숙였다. 나도 고개를 숙였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리 둘은 한숨을 내어쉬었다.
 
30
S는 뜻하지 아니한 섭섭한 기쁨에 안타까왔던 것이다⎯⎯때가 늦어 기쁨을 기뻐할 수 없는 안타까움.⎯⎯
 
31
나도 그냥 무턱대고 쫒아는 왔으나 막상 쫒아와서 딱 만나고 보니 만난 기쁨이 지나고 난 그 담에오는 것은 ‘어떡하나?’ 하는 막막한 수심이었던 것이다.
 
32
한동안을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번에는 내가 입을 열었다.
 
33
“내일 아침에?”
 
34
그 말에 S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 눈에는 눈물이 퍽 많이 글썽 거렸다. 그렇게 눈물 어린 눈으로 나를 꼿꼿이 치어다보다가 그냥 내 무릎에 칵 엎드리면서 “왜 왔어요!” 하고 우는 것이다.
 
35
도무지 못견뎌서 흐느껴 우는 S의 등 위에 나는 눈물을 한 방울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때만 해도 나도 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36
울기에 늦어진 저녁을 먹고 나서 우리는 어둔 바다가 어둡게 바라보이는 해안의 길로 나란히 나섰다.
 
37
항구는 때로는 겁나게 분잡하고 번화하나 때로는 자지러지게 적적하고 고요하다. 우리에게는 적적한 때였었다.
 
38
바닷바람에 섞여 솩하는 물소리만이 들려온다. 멀리서 등대의 불이 쉴새없이 깜박거린다. 하늘에는 별들!
 
39
나가는 밴지 들어오는 밴지 항구 밖에서 “우” 처량하게 기적소리가 멀리 울린다. 이 기적소리는 그새 잠자던 우리의 회포를 또 흔들어 일으켰다.
 
40
묵묵히 말이 없이 목선들이 들어싸인 선창 옆을 우리는 걷다가 내가 입을 열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41
“가면 그냥 가지 전보는 무엇하러!”
 
42
“그래두······”
 
43
내 말을 받아 S는 이렇게 뇌사렸다. 그러고는 또 묵묵히 우리는 거닐었다.
 
44
“무엇하러 왔어요! 오지만 않았더면!”
 
45
얼마를 묵묵히 걸어가다가 이번에는 S가 입을 연 것이다.
 
46
“그래두······”
 
47
나는 이렇게 제절로 말이 흘러나왔다. 결코 아까 S가 “그래두······”
 
48
라고 한 그 말의 입내가 아니다. 막혔던 가슴속에서 그냥 제절로 흘러 나오는 소리다.
 
49
S는 부모는 없고 상해에 그 오라버니만 널리 장사를 하고 있었다. 소학교를 마칠 무렵에 일가가 상해로 가는 데 따라갔다가 S만 서울로 도로 와서 서울서 XX여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그 전해에 졸업하고 오면 가면 놀고 있었다.
 
50
나와는 우연한 기회로 그해 봄에 알았었다. 열아홉 살을 맞이하는 봄이었었다. 우리는 그냥 그저 알고 지냈다. 심심하면 서로 하숙을 찾았다.
 
51
오래 못 만나도 아무렇지도 아니했다. 그렇게 봄과 여름을 지내고 가을이 늦었다.
 
52
하루는 S가 웬 상스럽지 아니하게 생긴 남자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보이면서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사진 관상을 해주었다.
 
53
그러고서 누구냐고 물으니까 이번 상해로 가서 결혼식을 할 사람이라고 서슴지도 아니하고 대답했다. 열여덟 살밖에 아니 된 처녀로되 그는 잘못 보면 빠걸이라고 볼 만큼 쾌활하고 남성적이었었다.
 
54
나는 아무 거리끼는 생각도 없이 그를 축복해 주었다. 그도 결혼을 하고 난 뒤의 생활계획을 처녀답게 다분의 공상을 섞어 종알종알 이야기하였다.
 
55
S는 자기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아니했던 것이요,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고도 또한 생각지 아니했던 것이다.
 
56
나도 내가 S를 사랑한다고도 또 S가 나를 사랑한다고도 생각지 아니했던 것이다.
 
57
그래서 나는 S가 떠나는 것을 경성역으로 전송하려고도 아니했고 또 떠나는 S도 떠나는 날과 시간도 나에게 알리지 아니했던 것이다. 혹 그가 떠나는 그 전날쯤 우연히 한번 더 만났다면 “나 내일 인천으로 가서 떠나요”라고쯤 S가 말했을 것이요, 그러면 나도 “그러시오? 그러면 잘 가시오”라고쯤은 했었을 것이다.
 
58
그러나 S는 소리도 없이 위선 서울을 떠났었다. 그동안 S와 나는 각기 자기도 모르게 제6의 의식이 우리의 그새 지내온 감정을 재검토라도 했던 모양이다.
 
59
그래서 출범의 전날 S는 무엇한테 뒤로 끌리는 것 같은 생각으로 나에게 “명조출범”이라는 전보를 쳐보았던 것이다.
 
60
그것이 이내 내 가슴속에서 고이 자던 S에의 격정에 불을 붙인 것이다.
 
61
S가 “왜 왔어요!” 하고 울던 말이나 그리고 내가 “전보만 아니 쳤어도······” 하던 말이 다 그 속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62
S가 전보를 치지 아니했거나 또 내가 인천으로 쫒아내려가지를 아니했거나 했었으면 미상불 우리는 젊은 가슴에 아프디아픈 못 한 개씩을 박지 아니했었을 것이다.
 
63
그러나 그때 생각에는 그 못이 달콤하지만 그보다도 아픔이 더한 못이더니 시방 생각하면 아팠지만 퍽 연연하게 기쁜 못이었었던 것도 같다.
 
 
64
항구는 잠을 잤다. 그러나 우리는 잠도 잊고 돌아갈 것도 잊고 그냥 해안을 걸었다. 말이라고는 아까 한 그것뿐이다.
 
65
아무 말도 없이 같은 거리를 수없이 왔다갔다 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필경 참다 못해 성난 것처럼 “가지 마우” 하였다.
 
66
“안 가고 어떻게!”
 
67
S는 이렇게 대답했다.
 
68
“그러면 갈려우? 내일 아츰에 저기서 배를 타고 갈려우?”
 
69
이 말에 S는 나에게 매어달리면서 “어떻게 가라고 그래요!” 하고 울었다. 그 쾌활하던 성품과 명랑하던 웃음이 다 어디가고 S는 이다지도 우지가 되었는지!
 
70
지금 생각하면 그게 그때에 벌써 단명하려고 청승을 부렸던 모양이다.
 
 
71
그 이튿날 S는 인천 항구의 바닷물에 눈물을 떨어트려 두고 상해로 떠났다.
 
72
가서 바로 결혼은 했을 것이나 그 소식은 나는 듣지 못했고 그런지 석달 만에 그가 병으로 불귀의 손이 되었다는 것만 알았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토설하지 아니한 이 이야기를 나는 가슴에 품고 더러 인천을 가 면 S의 탄 배가 떠나가던 바다 위를 바라본다. S가 눈물을 떨어트리고 간 바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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