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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서 돌아와 일 년 강화에 가서 있다가 다시 서울로 와서 한동안 홍떵거리던 때였으니 퍽도 오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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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때가 다 되어서 하숙에 누워 딩굴고 있느라니까 내 이름을 부르면서 소년배달부가 전보 한 장을 들이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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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성큼해서 얼핏 뜯어보니 “명조출범 에스”라고 언문으로 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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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온 불길한 전보가 아닌 것을 알고 안심한 것은 일순간이요, 어쩐지 절박하게 섭섭한 생각에 나는 잠깐 전보를 들고 앉은 채 막막히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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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로 떠나려고 인천으로 내려간 S가 배시간이 작정되어 그것을 알린 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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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보를 되읽었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명조출범 에스”의 여섯 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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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느 배란 말도 없고 그냥 아침이라고 했고 시간도 알리지 아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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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다. S가 떠나는데 내가 전송을 하지 아니할 것을 S는 아는지라 다만 떠난다고만 한 것이 도무지 괴이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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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도 S를 경성역에로 전송도 아니했으면서 인천까지 가서 배의 전송을 할 터는 아니었으니 떠나면 떠나나보다 하고 말 것인데, 그러나 막상 전보를 받고 난 나는 새삼스럽게 섭섭한 생각이 들고 따라서 주소도 배이름도 배 떠나는 시간도 알리지 아니하고 그냥 떠난다고만 한 S가 나를 저버린 사람인 것처럼이나 안타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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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보를 만지면서 이리 궁리 저리 궁리하다가 무릎을 탁 치고 양복을 거듬거듬 집어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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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해도 묘안이라고 기뻐했다. 전보를 잘 간수해 가지고 경성 역으로 나가 마침 떠나는 차를 잡아타고 인천 가서 내리니 짧은 가을 해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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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국에서는 그러한 규정인지 또는 나의 겸손한 청을 물리치지 못했음인지 그것은 모르겠으나 좌우간 계원(係員)은 내가 내놓는 전보를 상고하여 접수한 뇌신지(賴信紙) 뭉텅이 속에서 S의 것을 꺼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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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면서 우선 S의 필적(筆蹟)에 십 년의 정든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기쁨을 삼켰다. 주소도 번지도 아니 썼으나 여관 이름은 씌어 있었다. 나는 인력거를 잡아타고 그 여관으로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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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있다 S가 있다. 나는 S를 찾아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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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으로 들어서서 하인을 붙잡고 S라는 여자 손님이 들었느냐고 묻 는데 옆에서 밀창문이 보통 이상으로 와락 열리며 얼굴을 내어보이는 것이 S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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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냥 반갑고 기뻤지만 S의 표정은 복잡하였다. 처음에는 놀라고 그러고 웃으면서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그러고도 그냥 웃으면서 나를 방으로 맞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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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의 그 눈물 어린 미소에 나는 그냥 그저 감격했다. 가뜩이나 감격 하기 쉬운 이십대의 젊은 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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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주앉았다. 그리고 그냥 마주 바라보았다. 아마 퍽 오래 그렇게 바라보고 앉아 있었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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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묻는 S의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머금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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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찾아왔느냐는 말도 되고, 또 왜? 왔느냐는 말도 되고, 그러나 알았다는 말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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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답 대신으로 표정을 지어 대답하였다. 적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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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는 고개를 숙였다. 나도 고개를 숙였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리 둘은 한숨을 내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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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는 뜻하지 아니한 섭섭한 기쁨에 안타까왔던 것이다⎯⎯때가 늦어 기쁨을 기뻐할 수 없는 안타까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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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냥 무턱대고 쫒아는 왔으나 막상 쫒아와서 딱 만나고 보니 만난 기쁨이 지나고 난 그 담에오는 것은 ‘어떡하나?’ 하는 막막한 수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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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을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번에는 내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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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S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 눈에는 눈물이 퍽 많이 글썽 거렸다. 그렇게 눈물 어린 눈으로 나를 꼿꼿이 치어다보다가 그냥 내 무릎에 칵 엎드리면서 “왜 왔어요!” 하고 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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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못견뎌서 흐느껴 우는 S의 등 위에 나는 눈물을 한 방울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때만 해도 나도 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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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에 늦어진 저녁을 먹고 나서 우리는 어둔 바다가 어둡게 바라보이는 해안의 길로 나란히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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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는 때로는 겁나게 분잡하고 번화하나 때로는 자지러지게 적적하고 고요하다. 우리에게는 적적한 때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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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바람에 섞여 솩하는 물소리만이 들려온다. 멀리서 등대의 불이 쉴새없이 깜박거린다. 하늘에는 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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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밴지 들어오는 밴지 항구 밖에서 “우” 처량하게 기적소리가 멀리 울린다. 이 기적소리는 그새 잠자던 우리의 회포를 또 흔들어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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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말이 없이 목선들이 들어싸인 선창 옆을 우리는 걷다가 내가 입을 열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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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받아 S는 이렇게 뇌사렸다. 그러고는 또 묵묵히 우리는 거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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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를 묵묵히 걸어가다가 이번에는 S가 입을 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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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제절로 말이 흘러나왔다. 결코 아까 S가 “그래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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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한 그 말의 입내가 아니다. 막혔던 가슴속에서 그냥 제절로 흘러 나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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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는 부모는 없고 상해에 그 오라버니만 널리 장사를 하고 있었다. 소학교를 마칠 무렵에 일가가 상해로 가는 데 따라갔다가 S만 서울로 도로 와서 서울서 XX여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그 전해에 졸업하고 오면 가면 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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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는 우연한 기회로 그해 봄에 알았었다. 열아홉 살을 맞이하는 봄이었었다. 우리는 그냥 그저 알고 지냈다. 심심하면 서로 하숙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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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못 만나도 아무렇지도 아니했다. 그렇게 봄과 여름을 지내고 가을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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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S가 웬 상스럽지 아니하게 생긴 남자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보이면서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사진 관상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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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서 누구냐고 물으니까 이번 상해로 가서 결혼식을 할 사람이라고 서슴지도 아니하고 대답했다. 열여덟 살밖에 아니 된 처녀로되 그는 잘못 보면 빠걸이라고 볼 만큼 쾌활하고 남성적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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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 거리끼는 생각도 없이 그를 축복해 주었다. 그도 결혼을 하고 난 뒤의 생활계획을 처녀답게 다분의 공상을 섞어 종알종알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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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는 자기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아니했던 것이요,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고도 또한 생각지 아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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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가 S를 사랑한다고도 또 S가 나를 사랑한다고도 생각지 아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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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S가 떠나는 것을 경성역으로 전송하려고도 아니했고 또 떠나는 S도 떠나는 날과 시간도 나에게 알리지 아니했던 것이다. 혹 그가 떠나는 그 전날쯤 우연히 한번 더 만났다면 “나 내일 인천으로 가서 떠나요”라고쯤 S가 말했을 것이요, 그러면 나도 “그러시오? 그러면 잘 가시오”라고쯤은 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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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S는 소리도 없이 위선 서울을 떠났었다. 그동안 S와 나는 각기 자기도 모르게 제6의 의식이 우리의 그새 지내온 감정을 재검토라도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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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출범의 전날 S는 무엇한테 뒤로 끌리는 것 같은 생각으로 나에게 “명조출범”이라는 전보를 쳐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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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이내 내 가슴속에서 고이 자던 S에의 격정에 불을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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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가 “왜 왔어요!” 하고 울던 말이나 그리고 내가 “전보만 아니 쳤어도······” 하던 말이 다 그 속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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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가 전보를 치지 아니했거나 또 내가 인천으로 쫒아내려가지를 아니했거나 했었으면 미상불 우리는 젊은 가슴에 아프디아픈 못 한 개씩을 박지 아니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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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때 생각에는 그 못이 달콤하지만 그보다도 아픔이 더한 못이더니 시방 생각하면 아팠지만 퍽 연연하게 기쁜 못이었었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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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는 잠을 잤다. 그러나 우리는 잠도 잊고 돌아갈 것도 잊고 그냥 해안을 걸었다. 말이라고는 아까 한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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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도 없이 같은 거리를 수없이 왔다갔다 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필경 참다 못해 성난 것처럼 “가지 마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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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갈려우? 내일 아츰에 저기서 배를 타고 갈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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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S는 나에게 매어달리면서 “어떻게 가라고 그래요!” 하고 울었다. 그 쾌활하던 성품과 명랑하던 웃음이 다 어디가고 S는 이다지도 우지가 되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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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그게 그때에 벌써 단명하려고 청승을 부렸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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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S는 인천 항구의 바닷물에 눈물을 떨어트려 두고 상해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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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바로 결혼은 했을 것이나 그 소식은 나는 듣지 못했고 그런지 석달 만에 그가 병으로 불귀의 손이 되었다는 것만 알았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토설하지 아니한 이 이야기를 나는 가슴에 품고 더러 인천을 가 면 S의 탄 배가 떠나가던 바다 위를 바라본다. S가 눈물을 떨어트리고 간 바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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