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병환(李炳換)은 W대학을 졸업한 경제학사(經濟學史)이다.
3
그의 선친 때는 이백 석 추수는 하던 것인데 그들의 형제가 상속 받은 것은 커다란 집 한 채와 때 묻은 가구뿐이었다.
4
그러므로 대학 본과부터는 고학(苦學)을 했던 것이다. 돈 있는 친구의 보조도 받고 또 노동도 했고 이따금 그 형이 얼마씩 보내주기도 했으나 그의 대학 생활은 처참하여 실로 억지의 학생 생활을 했던 것이다.
5
졸업을 앞으로 일 년 밖에 남기지 않았을 때는 그 형은 늙은 모친과 어린 자녀를 거느리고 끼니도 이어 나가지 못할 형편이었으므로 이따금 병환하게 곤란한 자기 형편과 얼마만이라도 학비를 보조해주지 못하는 무력함을 한탄하는 편지를 하는 것이었다. 병환은 이러한 편지를 받을 때
6
마다 말할 수 없는 초조와 안타까움을 느꼈다.
7
대학을 졸업만 하고 나면 자기 일가의 모 ─ 든 불행과 괴로움은 금시에 해소되고 말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졸업 후에 할 일이 확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취직이라도 할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였으나
9
하는 막연하다면 기막히게 엉터리 없는 막연한 생각이었으나 병환에게는 벌써 졸업 후에 할 일이 확정되어 있는 것 보다 몇 갑절 더 달콤한 희망이 었으므로
11
하고 생각하면 용기가 충전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 부러운 사람이 없고 어떠한 일이라도 졸업만 하고나면 자기를 이겨낼 사람이 없을 것 같게도 생각되었다.
12
이러한 생각을 하면 모 ─ 든 이상은 졸업하는 날부터 실현되는 것이니 세월이 어서 달음질하여 졸업날을 가져오라고 고함을 치고 싶은 것이었다.
13
그러나 세월은 병환을 저주나 하듯이 더디고 그 형에게서 오는 가난하고 괴로운 눈물의 편지만도 수가 잦아졌다. 그는 자기 일가족에게 모 ─ 든 행복을 가져오는 졸업할 날을 어서 가져오지 않는 세월이 자기 일가족의 모 ─ 든 불행의 원인이라고 끝없이 한 끝 세월만 원망하였다.
14
불행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불행하게 한 원인이 있고 이 원인을 사람들 앞에서 원망해 보임으로서 자위와 만족을 느끼며 체면유지를 하려는 것이라 그 원망스런 불행의 원인을 극복시키려는 사람은 드물다. 병환이도 자기 형의 편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세월만 가득 원망하여 편지 답을 써 보내는 것이었다.
16
“흥, 너는 아직 원망할 대상이 있으니 행복하구나. 나중에 원망하고자 하나 할 대상이 없는 날의 그 불행을 어떻게 이겨 나가려노.”
18
병환은 기다리고 바라던 졸업날이 닥쳐오자 곧 경제학사 리병환이란 명함을 박았다. 그 형이 무슨 노릇을 하여 어떻게 구변해낸 돈인지 사십원을 보내주었으므로 그것으로 봄 양복 한 벌을 지어 입고 졸업사진을 상자에 곱게 간수해 가지고 불이야 불이야 고향인 A로 돌아왔다. 아무도 마중 나와 주지도 않은 고향 정거장에 그는 활개 있게 내려섰다.
19
그는 자기 집에 들어서자 부지중에 눈살이 찌뿌려졌다. 늙은 어머니, 말 못하게 초라한 옷을 입은 그 형, 거러지 떼같이 욱덕이는 조카아이들, 더구나 그 형수의 골아 붙은 얼굴, 모두가 가엽다느니 보다 불쾌함이 앞을 서는 것이었다.
20
길고 긴 오년 동안을 이 객창에서 영설의 공을 닦아 금의환향한 오늘의 자기를 맞아주는 사람들이란 것이 모다 이 모양들이라고 생각함에 부지중에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21
저녁상을 받고 앉으니 조카아이들이 자기 어머니 눈치를 엿보아 가면서 병환의 상 위를 바라보며 큰 아이는 침을 삼키고 작은 아이는 나도 이 밥 달라고 칭칭대었다. 병환은 그 밥이 넘어 가지 않았다.
22
답답한 가슴으로 거리로 나가 보았으나 형설의 공을 닦고 돌아온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가 무표정하고 쌀쌀하여 대학 출신인 자기를 몰라보았다. 스마 ─ 트한 그의 신조양복을 보고는 눈 하나 크게 뜨는 사람이 없었다.
24
그는 문득 눈앞에 날아간 옛 친구 한 사람에게 활개 있는 인사를 건넸다.
30
“오 ─ 그런가, 축하하네. 그런데 어디 취직처나 정했나.”
32
병환은 총알이나 맞는 것 같이 뜨끔하여 저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33
“경쟁이 심하니까 어서 어디 취직부터 해야 할 것인데.”
36
그는 얼마만치 그 친구에게 우월감을 가지며 이렇게 걸림없이 말했다.
37
“대학 졸업을 했으니까 취직쯤이야 어려울 것 없지만 자네도 짐이 많으니까 말일세.”
39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자네 형님이 별 기술이 없으니까.”
40
친구의 이 말에 병환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내려 박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앞에 자기 집 식구의 지지한 꼴이 떠오르며
41
‘우리 집안이 이렇게 된 줄 모르는 사람이 없구나’
42
하는 생각이 번쩍하여 그 친구와 더 말하고 섰기가 불쾌했으므로
43
“또 천천히 만나세. 지금 좀 가볼 데가 있어서!”
45
그는 그 길로 자기의 고종사촌되는 누이의 집으로 향했다. 이 누이는 고등여학교 출신으로 은행원에게 시집가서 따뜻한 문화 생활을 하고 있는 터이라
46
“아이그 오빠, 잘 오세요. 축하합니다. 이제는 학사님이시지…….”
47
불과 한 살 차이요 어릴 때 서로 한 곳에서 자란 탓으로 친함이 친구와 같았으므로 누이는 그를 보자 곧 농담을 섞어 반겨 맞았다.
48
“그래 잘 있었나? 바깥주인은 어디 갔어?”
49
하고 전등불이 휘황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50
“오빠 이제는 여기서 살으실 테니 큰오빠 댁에 그대로 계실여나요.”
51
누이의 이 말이 병환은 반가웠다. 동경같이 화려한 곳에 있던 몸, 더구나 최고의 학부까지 졸업한 당당한 청년 신사의 몸으로서 어떻게 그런구지리 ─ 한 집에 살 수가 있겠느냐고 묻는 말같게 그는 느껴졌던 것이었다.
52
“그래, 대체 집구석이 왜 모두 그 모양으로 되고 말아서…….”
53
하고 그 형의 무변통함을 원망하듯 말하였다.
54
“그러기에 말이에요, 큰 오빠는 좀 성질이 눅저서 말이 아니야요. 장차 오빠 혼자서 어떻게 그 짐을 지시겠어요.”
55
누이는 어디까지든지 자기를 잘 알아주는 것 같이 느껴져서 하는 말이 모두 자기의 맘에 맞았다.
56
“말이 아니야. 어떻게든지 내가 책임을 져야 되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그까짓 것 염려할 것 없어!”
57
그는 졸업만 하고나면 …… 하고 벼르고 바라던 용기가 아직 그대로 있는 터이라 가볍게 대답하였다.
58
“아이구 참 월급 생활을 하려면 아니꼬운 꼴이 많으니까 오빠두 장차 어떻게 참고 지내실테요.”
59
“아이구 참 월급쟁이가 될 필요가 있나?”
60
그는 명랑하게 웃었다. 누이가 자기를 월급쟁이가 되는 줄만 아는 것이 철없어 보였다. 그의 꿈은 적어도 청년실업가에 있었던 것이었다.
61
“월급쟁이가 아니라도 좋은 일이 있다면야 오죽 좋겠어요. 오빠는 월급쟁이 노릇을 하시지 않으려나요.”
62
“월급쟁이라도 계급이 있는 것이니까 구태여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63
그는 누이의 남편이 상업하교 출신 밖에 되지 않으니까 아니꼬운 꼴을 보는 것이지 자기처럼 대학 출신이라면 남의 아래 갈 리가 없으니 아니꼬운 꼴을 볼 턱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64
그러나 민감(敏感)한 누이는 병환의 이 말에 조금 불쾌함을 느꼈는지
65
“물론 월급쟁이라도 계급이 있지만 첨부터 그렇게 좋은 자리를 주나요.”
67
“참 오빠, 장가는 드실 생각 없어요.”
68
하고 자기가 병환에게 응수한 것이 과하지나 않았나 하여 얼른 말끝을 돌리어 홍차 따를 준비를 하였다.
70
병환이도 말머리가 돌려진 것이 반가워 얼른 대답을 하며 싱글싱글 웃었다.
71
“어여쁜 색시야 많이 있지만 오빠 맘에 드실지!”
72
“글쎄 어떤 색시가 좋은지 나는 참 모르겠더라.”
73
병환이는 지금까지 이 중대한 문제를 한 번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 이상하였다고 느낄 만치 지금의 자기에게 빼놓을 수 없는 긴급하고 중대한 문제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었다.
75
누이는 상긋 웃으며 찻잔을 병환의 앞에 놓으며
76
“대처 결혼에 대한 오빠의 이상을 알아야지요.”
78
“글쎄…… 나는 아직 그런 것을 생각해 볼 여가가 없었다.”
79
“그러면 내가 알아맞힐까요? 첫째 인테리여성일 것, 둘째 얼굴이 얌전할 것, 셋째…….”
82
이라고 하려든 것을 병환의 자존심을 보장해 주기 위하여 웃고 만 것이었다. 병환은 이어서 조건의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83
“나는 모르겠다. 좌우간 모 ─ 든 점에 있어서 너만큼만 하면 충분하지.”
85
“아이그 천만에, 내 따위만큼 한 색시야 와글와글 하지요.”
87
“그런데 오빠 결혼하시려면 한 가지 빠져서는 안 될, 아니 제일 중요한 조건이 뭐야요.”
89
“사람만 맘에 들면 아 ─ 무리 신분이 나쁘든지 가난하든지 해도 관계 없어요?”
90
영리한 누이는 병환의 결혼에는 가장 큰 조건이 될 것이 이것임을 미리 짐작한 바이나 이렇게 병환의 귀에 거슬리지 않게 슬쩍 물어보는 것이었다.
91
“신분 낮은 것이 무슨 관계겠나. 더구나, 가난한 것이 문제될 택이 있겠나. 돈 있는 집 여자는 당초에 원하고 싶지 않다.”
93
누이는 병환의 이 대답이 철없게도 보이고 가엾게도 여겨졌다.
95
병환은 누이의 맘속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96
“돈 있는 여자는 건방지다고 싫단 말씀이지요.”
97
“건방질 뿐 아니라 내 친구의 말을 들으니 남편을 막 쥐고 흔드려고 한다더라. 그뿐 아니라 여자 건방진 것 못 써.”
98
“아이구 그 참. 오빠 그것 말이 되나요. 여자가 건방지고 남편을 깔고 앉으려면 그것이 되는 일인가요. 모두가 그 남편에게 달렸지요, 남자가 여자에게 쥐이는 불출이가 어디 있겠으며 제 아무리 건방진들 남자보다 더한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99
“그렇기야 하지만 이것은 이론이고 정말 건방만 부린다면 죽이지도 못하고 기막힌 것이야 좌우간 여자는 여자답게 부드럽고 얌전해야 돼!”
100
“아 ─ 니 오빠는 아주 머리가 고물이구려!
104
“앗따 어디 봅시다. 만일 취직구가 얼른 나서지 않고 그 집구석에서 고생을 조금 해보면 알 것을 나중에는 돈 있는 집에 장가가려고 해맬 것을.”
105
하는 말이 입술까지 튀여 나오는 것을 참아버리고 이 말도 오래할 것이 못된다고 그는 더 계속 하지 않았다.
106
“너 군청(郡廳)에 들어가지 않겠나.”
107
몇 달 후에 병환의 형은 딱한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111
그는 아니꼽다는 듯이 군청에를 뒤씹고 나서
114
“아마 네 맘에는 차이지 않겠지만 하는 수가 있나. 집안 형편이 이러니까 취직부터 해야지.”
115
형은 아우에게 애원하는 듯한 어조였다.
117
병환은 바쁘게 물었다. 경제학사인 자기가 월급생활로 들어간다면 얼마로 평가되느냐 하는 호기심에서이다.
118
“한 사십 원은 될 거야. 이것도 대학 출신이니까 특별이지.”
119
그형은 간신히 머뭇거리며 바른말을 했다.
121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쾌활하게 웃었다.
122
보통학교나 겨우 졸업한 댁이들이 몇 십년 군청 밥을 먹다가 나서 나중에는 제법 군주사 입네 ─ 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불쌍한 미물들이라고 아득한 꼴자구니를 내려다 보듯 해 온 터이라, 오늘의 자기가 돈 사십 원에 팔리워 그들과 한 집안 공기를 호흡하며 동료가 되라고 하는 자기 형의 말은 정말 정신없는 익살이라고 느끼며 잇따라 두어번 더 웃었다.
123
“그렇지만 이 자리를 떨어뜨리면 정말 어렵다.”
124
그 형은 철없어 보이는 자기 동생을 안타깝게 여기며 기어히 승낙을 받으려 했다.
127
하고 보기 좋게 그 형의 의견을 일축해 버렸다.
128
그 후 병환이는 자기 친구들에게 편지로 취직을 의뢰하기도 하고, 그 형이 결사적으로 애를 쓴 결과 삼사처나 월급 자리가 있었으나, 맨 처음 군청고원 자리보다 조금도 나은 곳이 없었다.
130
이것이 병환의 정가와도 같아 그는 이 모욕을 참을 길이 없었다.
131
아우의 이 맘속을 잘 아는 그 형은 그 철없음이 가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하고 또는 비웃고도 싶었으나 그래도 한 자리 차 던지면 또 한 자리 물어다 바치곤 하여 쉬지 않았다. 병환이는 학생시대에 한 가정도 구원하지 못하는 그 형을 무변통하고 못난 사나이라고 불쌍하게 여겨 왔었으나, 오늘에 와서는 도로히 그 형이 자기를 위하여 취직 운동에 맹렬히 활동함을 봄에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32
“정말이지 현하 조선에 있어서는 대학이 아니라 대학의 선조꼭지까지 졸업한 사람이라도 단번에 회사 중역이나 군수나 서장이나 그런 자리를 네 ─ 기다렸습니다 하고 내받칠 데가 없는거다. 너도 그만 취직할 작정을 해라.”
133
하고 가진 말을 다 ─ 하여 승낙하기를 바랬다.
134
“그렇지만 너무 억울하고 아니꼬와서 어떻게!”
136
“그렇기야 하지만 첫째 집안 형편이 말이 안 되니 우선 급한 대로 아무데나 들어가 놓고 차차 기회와 왕운을 기다려야지.”
137
“그건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일시적이라 하고 아무렇게나 취직을 한다고 하지만 한번 취직을 하고나면 그 사람이 평가되고 마는 것이 되고 또 아니하고 있으니 보다, 좋은 자리를 그 직업에 쫓아 고르게 될 기회가 적어지는 것이어요, 첫째 누구라도 사람이 필요하여 나를 초빙하려면 내가 취직하고 있는 것 보다, 놀고 있는 편이 유리할 것이 아니어요. 그렇기도 하고 또 어디 우리 살림에 사십 원 가지고 지탱할 것 같습디까? 좀 고생되더라도 시작을 좋은 자리에 해야 되는 것입니다.”
138
병환이도 사십 원에 취직하지 않으려던 이유가 차차 변해왔다. 지금은 사십 원 이○ 월급에 기가 막혀 웃지도 않아지고, 보통학교 졸업자리와 한 동료가 되 아니꼽다던 것도 차차 말하지 않게 되고 얼마만치 유리하게 타산적으로 변하게 된 것도 오랜 세월이 걸려서였다.
139
그 봄, 여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닥쳐오자 병환 일가의 생활은 기막히게 되어 갔다. 아무 수입이 없이 그 형이 예전 친구에게서 취해 오는 돈과 염치 체면 없이 건달이 노릇을 하여 잡는 돈으로 살아오는 터이라 이따금 끼니를 굶는 것은 예삿일이 되었다. 병환의 앞에 수없이 갈아드리는 취직 자리도 그렇게 무진장은 아니였던지.
141
할 때는 허가를 받을 데도 쉽게 나서지 않아졌다.
142
봄, 여름, 가을은 졸업할 때 지어 입은 봄 양복으로 어떻게든지 출입을 했으나, 겨울이 탁 닥쳐오니 병환은 방 안에 갇혀 앉지 않을 수 없었다. 동서 입던 학생복은 귀향할 때 고학하는 친구에게 벌써 벗어 주었고 단벌옷은 봄옷이니 그는 찬 방에 종일 틀어박혔다가 그 형이 집에 들면 두루마기를 얻어 입고 간신히 문밖 구경을 하게 되었다.
144
그는 목도리도 없이 소름끼친 두 뺨에 쓴 냉소를 띄우고 친구의 사랑으로 찾아다녔다.
145
그는 졸업한 후 오늘까지 근 일 년 동안을 돈이라고 손에 쥐여 보지 못했었으나 술과 담배 피는 양도는 무척 늘었었다.
146
“저 놈의 자식 대학 졸업을 했으면 제일인가. 왜 일없이 밤낮 남의 사랑에 눌러 붙어 멀쩡한 자식을 끌고 요리집에 못 가서 애를 쓰노.”
147
친구의 마누라나 어머니들은 모조리 병환을 미워라고 욕하였으나 병환 자신은 꿈에도 그 미움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는 비록 곤궁한 신세이나 돈 있고 중학 졸업도 못한 친구들에게는 자기가 그렇게 놀러 다녀주는 것이 영광은 못 될지라도 불쾌하거나, 싫어할 리는 없으리라고 믿었으므로 모양은 초라하나 친구의 요리집에 가는 데는 상좌를 점령하는 버릇까지 들고 말았다. 그는 비록 불청객이 자래로 요리집 가는 친구에게 따라가기도 점점 무관하여져서
148
“나만 공술을 밤낮 얻어먹기 미안하네. 나도 돈 있으면 한 턱하고 싶
150
하던 체면도 차차 사라지고 자존심도 우월감도 억제심도 어디로 달아났는지 턱없고, 미움 받는 공술에 공연히 주량만 늘리게 되었다. 그의 집에서 끼를 자주 굶게 됨을 따라 그는 취직보다 무엇보다 제일 앞서는 문제는
152
하는 생각이었으므로 이 친구 저 친구 집을 엿보다가 혹은 권하고 혹은 예언하듯, 혹은 억지로라도 한 턱을 시켜 우려먹기도 일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도 이따금 너무 억지의 술을 얻어먹고 돌아오면
153
“허? 이거야 참 거러지에 질 배가 있나.”
154
하고 가슴이 아플 때도 있으나,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사정이라, 울분하여 한숨만 짓다 마는 것이었다.
155
대학 출신인 당당한 장래 청년 실업자가 될 리병환이가 고등부랑자 룸펜으로 진출하게 된지 몇 달이 못 되어 그의 친구라는 친구는 모조리 서로 마주칠까 몸서리를 내게까지 되었다.
156
친구들이 그를 만날까 울겁을 대며 요리집엘 가든지 무슨 회합을 하든지 하는 것을 알게 되면
157
“내가 이렇게 까지 못난 놈이 되었던가.”
158
하고 반성이나 자책은 할 생각이 없고 도로히
159
‘죽일 놈들, 어디 보자. 기어히 이 턱을 빼앗아 먹고는 말리라. 네놈들이 아무리 건방거려도 빨가벗고 늘어서서 보면 세상의 대위도 또는 기생들까지라도 너의 놈들을 좋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직 돈이 있으니, 그 돈으로 몸을 잘 장식하고 있는 까닭에 너의 놈을 제일로 여기는데 불과하다’고 그는 가슴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지금의 병환에게는 양심이나 자존심을 가지지 못한 만큼 나날이 그 생활은 핍박하여 갔던 것이다.
160
병환을 멸시하고 미워하는 것은 오 ─ 직 그의 친구며 친구들의 아내, 부모들뿐만 아니라 고종사촌 누이까지도 동경서 첨 나오는 날과는 대위가 첫째 천양지차로 달라졌다. 요즈음은 그래 대하면 비웃는 것이 인사가 되었다.
161
“오빠는 늘 그리고 놀아서 어떻게요. 좀 염치가 있어야지 첫째 큰오빠댁 보기가 창피하지 않아요.”
163
“예, 듣기 싫다. 낸들 이러고 있기를 자원하는 줄 아니.”
164
“에이그, 지금 세상이 어떠한 세상이라구.”
165
“너보다는 좀더 알고 있을 터. 염려마라 어디 중매나 좀 하렴.”
166
“아하 ─ 오빠두 내가 그렇게 권할 때는 바 ─ 루 안하겠다드니…….”
168
“예, 너니까 부끄럼없이 하는 말이다마는 어디 그럴듯한 색시 없니?”
169
이미 철면피가 된 병환이었으나 자기가 이 누이에게 돈 있는 여자에게는 장가를 들지 않으려고 하늘같이 버티어 보였던 때가 있었느니 직접 돈 있는 색시에게 중매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170
“그럴 듯 ─ 한 색시라니, 오빠의 이사에 맞는 여자 말씀이요?”
172
그는 누이가 그럴 듯 ─ 이란 말의 의미가 돈 있는 하는 말을 암시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파고 물음에 대답하기가 간지러워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173
“저 ─ 오빠야 돈 있는 집 색시는 죽어도 원치 않을 터이고…….”
176
그는 이렇게 정색을 하며 말을 하는 것이었다.
177
“하하하, 오빠두, 인제는 글렀어요. 졸업하고 나온 직후였다면 나도 너도 하고 시집오려든 색시가 많았지만 이제는 고등부랑자요 건달이 상건달이라고 아무도 시집 안 오려는 데요.”
178
누이는 침끝같이 날카롭게 피육을 하였다.
179
“허허허, 나를 그렇게 생각하나? 그리말고 돈 있는 집 외딸이나…….”
180
그는 누이의 찌르는 듯한 말이 가슴에 조금도 자극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그렇다고 무류히 앉았을 수도 없어 농담같이 말을 붙이는 것이었다.
181
“아이쿠나, 오빠, 부자집 외딸은 남편의 뺨을 막 친대요.”
182
병환은 누이가 아무리 다 잡더라도 자기가 부자집 색시와 결혼할 결심은 이렇게도 굳고 변하지 않는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으며
183
“그럴 리야 있나, 치면 두들겨 맞기도 하지, 그까짓 것 문제가 되나.”
184
“인제는 오빠도 사람이 되나보 ─ 그런데 오빠 내 말 좀 듣겠어요.”
185
누이는 태도를 일변하여 정색하며 말을 꺼냈다.
186
“오빠, 나는 이래뵈도 날마다 오빠를 어떻게 하나 하고 염려해 왔어요. 그런데요. 오빠는 지금 바른말을 하면 부랑자로 세상이 인증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좋은 일 하나 가르쳐 드리겠어요. 오빠는 오빠가 제일인 것 같지만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데야 어떻게요.”
187
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병환으로 하여금 노동자가 되라는 것이었다. 자기 남편은 매인 몸이라 여가가 없지만 자기는 아내도 없으니 여가가 많이 있는 까닭에서 지금까지 저축한 돈도 있고 소작으로 준 전지도 있고, 더구나 지난해에 국유지(國有地)를 일만오천여 평 대부해 놓은 것이 있으니 여기에 과수(果樹)도 심고 다른 농작물도 지으며 일방 여러 가지로 애를 쓰면 할 일이 많으니까 자기와 같이 흙 속에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라는 것이었다.
189
“이것 보세요. 과수나무를 심으면 과실이 열 때까지는 아무 수입이 없을 터이니 꿀벌(養蜂)도 먹이고, 양잠(養蠶)도 해야 되요. 다른 일꾼을 쓰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두 사람이 노동합시다.”
190
하며 과수 재배법을 연구한 적에서 잠대 내놓든양 끄았다. 병환은 처음은 농담으로만 들었던 것이 차차 진검(眞儉) 해지는 누이의 말을 듣자 다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
“아주 철저한 노동자가 되어야 해요. 남의 집 담사리처럼!”
196
하고 쾌히 응락하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198
하고 누이의 턱 모르고 열중하는 태도가 우습고 천진스러웠다. 그뿐 아니라 어서 돈 있는 집에 장가나 들게 중매하라고 조르고 싶은 맘만 가득 하였으나 그 누이의 태도에 어디인지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자기를 압도하는 것 같아 그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고 농장 계획에 대한 자자한 예산을 귀 밖으로 들으며 대답만은 열심히 하고 있었다.
199
“그렇지 마는 일 년 이 년에 돈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지루해서 하겠니.”
200
병환은 이야기가 거의 끝날 때 쯤 하여 참다못해 한마디 내놓고 말았다. 누이는 놀란 듯이 병환을 바라보며 그 표정이 점점 굳어지며,
201
“아 ─ 니 오빠는 내 말을 들어주는 줄 알았더니, 찬성하는 척 하고 나를 놀린 셈이지요?”
204
병환은 누이가 자기를 가엽게 보는 듯한 그 표정과 말에 일변 놀라며 취소하듯 손을 흔들었다.
205
“아직 오빠는 더 고생을 해야겠어요.”
206
하고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병환은 조금 무류하여 앉았다가 일어서 나왔다.
207
“사람이란 고생을 하면 자연 정신을 차리게 되는데 오빠는 고생을 하면 할수록 그 고생에 이겨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엎어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락되고 마는 사람이야.”
208
하고 누이는 생각함에 어떻게 해야 병환이가 한 걸음 한 걸음 타락해 감을 뉘우치게 할 수 있으랴, 하고 한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