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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의학생의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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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노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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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의학생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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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이다. 생각하면 형과 헤어진지 벌써 4년 이로구나. 그런데 세정(世情)의 변동이 격하였던 탓일까. 그때가 아득한 옛일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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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아! 나는 형의 편지를 통하여 온갖 역경에서 삶의 고진을 맛보고 있으면서, 아직도 양심을 부르짓고 있는 형을 발견하고 커다란 충동을 받았다. 험악한 세상에서 眞[진]과 義[의]의 최후의 아성에 이르러 악전고투하고 있는 형을 생각할때, 나 자신은 온갖 부정과 증오(憎惡)와 멸시의 대상이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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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쓰지 않았느냐? ‘모든 과거와 허물로 찬 기억의 페이지를 깨끗이 불살라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벗을 대하듯 새로운 이야기를 하여보자’고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양심에 충실할려는 갸륵한 마음에서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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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아! 우리의 과거는 확실히 허물에 가득찬 생활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허물에 가득한 과거’ 보다도 더 더럽고 그릇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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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모순과 비극에 대하여 지난날 우리의 어린 주먹은 몇 번이나 그를 저주 하였던가? 그리고 정사선악(正邪善惡)에 대한 간사한 악의 감정은 어렴풋하게 구별되어 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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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뒤 그 존귀하고 깨끗한 동심은 얄궂은 나의 공리심의 성장아래 차차 좀먹기 시작하였으며, 그리하여 비테로의 마음의 싹은 드디어 시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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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아! 그뒤부터는 각각으로 변모하는 주위의 현실에 대하여 무기력한 추종과 비겁한 아첨을 내세우는것도 겨우 삶의 길을 찾으려는 진부한 처세술이 나의 전부를 차지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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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요즈음 사람들이 흔히 우리 학생들을 평하듯이 나는 장래에 대한 희망과 이상과 포부를 잃었을 뿐아니라, 나 자자신에 대하는 신뢰 신념까지를 잃고 말았다. 비겁하고 위선적이면서도 극히 교활하고 타산적인 인간이 되고 말았다. 나에게는 청년의 사회적 책무도, 아무도 없다. 학생의 목표, 임무……운운에 대하여서는 나의 고막은 경화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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兄[형]아! 나를 마음껏 욕하여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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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학생이지만 의학(醫學)은 인술(仁術)이다 라는 말을 저버린지 이미 오래다. 나의 눈에는 벌써 환자의 돈주머니가 얼씬 거린다. 만일 나에게 희망과 이상이 있다면 그것은 의사의 특권을 이용하여 돈을 모으고 그것으로 남보다 좀더 윤택한 경제적 생활을 하려는 동물적인 욕망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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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3년간 의학을 배운 오늘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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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나에게 아직도 진지한 인생 태도를 잃지않고 굳센 의지로 사회의 온갖 저항과 싸워가고 있는 형의 진심을 토로(吐露)한 정열의 일서(一書)는, 나에게 커다란 충격의 파문을 일으키고 남음이 있었다. 실로 나는 형의 편지속에서 날카로운 비판의 정신과 거짓없는 반성의 거울을 발견하고, 자신이 너무나 변해버린 모양과 타락된 인생관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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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 자존, 아부, 질투, 광기, 이기주의, 독선주의, 관료주의, 데카당스, 무기력, 우울, 고민, 절망, 그리고 봉건적인 한계를 조금도 넘지못한 진부한 여성관 ── 이 모든것이 부정되고 청산되어야 할것에 대하여 가슴은 다시 파동을 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전신은 또다시 와글와글 끓어 올라오는 젊은 정열의 피로 인하여 불덩이 같이 뜨거워 진다. 참으로 형은 나의 꺼져가는 양심의 등잔에 귀중한 기름 한방울을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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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이제까지 얼마나 벗을 그리워 하였던가? 나를 둘러싼 억울한 환경의 여러가지 자극이 눈으로 귀로 숨어들어 가슴에 뭉쳐서 불덩이의 울분이 되어 끓어 오를때, 말없는 벽만을 향하여 같이 고민하고 같이 의논하는 벗 없는 고독속에 눈물을 흘려가며 슬퍼한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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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아! 그러던 나에게 지금 나타난 형의 존재가 얼마나 믿음직하고 위안이 되는 반가운 벗의 존재인지 상상(想像) 하였다고! 어린 시절의 벗을 이렇게 성장한날 같은 뜻의 연결위에 재발견 하는 기쁨이 어찌 옛친구를 만나는 단순한 기쁨에 비길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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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아! 나도 이제는 재출발 하련다. 건실한 인생관 세계관을 가지고 나의 개성을 주장하련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양심적인 문화인이 되어 보련다. 그리고 직업인으로서의 의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의사가 되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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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결국 유한한것이 아니냐? 이 유한한 인생에 길고 짧음이 있음은 무슨 관심이랴? 다만 몇 해라도 가치있는 생애를 보내다 죽으면 그것이 오히려 참다운 인생이 아니냐? 공리주의자 ‘밀’까지도 행복한 도야지보다 불행한 소크라테스가 됨에, 참다운 행복이 있음을 알았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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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는 世專[세전] R씨의 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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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서간집 「나의 화환」에서
【원문】한 의학생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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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영(盧子泳)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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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10월 0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