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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명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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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5
백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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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명에서
 
 
 

1. 귀먹은 자(者)의 정적(靜寂)에서 외우는 독백(獨白)

 
 
3
S!
 
4
이 어인 까닭일까요!
 
5
왜 이다지 고요합니까?
 
6
깊고 깊은 동혈의 속과 같이 어지간히도 고요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밤이어요.
 
7
마을을 한참 떠난 들 복판에 외로이 서 있는 이 집인 까닭에 이렇게도 고요함일까요.
 
8
그러나 지금은 겨울이 아닙니다! 멀리서 달려오는 북쪽의 난폭한 바람이 아 ─ 모 거칠 것이라곤 하나도 없이 제 마음대로 이 들판에서 서서 천군만마같이 고함을 치고 이 집의 수많은 유리 창문과 뼈만 남은 나무가지를 마구 쥐여 흔들어 놓아 시끄럽고 요란하기 끝이 없게 할 때입니다.
 
9
그런데 왜 이다지 고요할까! 일순간 사이에 땅덩이가 깊은 바다 속에 깔아 앉아 버린 듯 합니다. 모든 움직임과 음향이 딱, 정지되어버린 듯도 합니다.
 
10
S!
 
11
이제 금방 어머니 방에서 어머니가 편안히 잠드시라고 보문품경을 나직나직 읽어드려 겨우 잠이 들으신 듯하여 살며시 내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내 방문을 무심코 한 걸음 들어서자 두 눈은 부신 듯 하였어요. 방 안에 얌전스레 나래를 편 듯 깔려있는 침구가 무척도 찬란한 색깔이었든 탓인지요…….
 
12
이렇게 호사스런 침구가 나에게 무슨 관계를 가졌단 말입니까! 다만 내가 본래부터 좋아하는 백합화를 하얗게 수놓은 새빨간 자주색 이불일 따름입니다.
 
13
머리맡에 놓은 몽롱형 전기 스탠드에는 파란 전구가 끼워져 있고 그 곁에 오늘 신문이 얌전하게 놓였고 작은 둥근 상에는 약병과 물 주전자, 뜨롭통이 담겨 있으며 창에는 빈틈없이 커튼이 내려져 아늑한 방 안의 분위기가 나를 끌어 안어 주는 듯 느껴졌습니다.
 
14
대체 누가 내 침방을 이렇게 치장하여 주었을까요. 어느 편을 돌려 보든지 모두가 마음 편히 잘 자도록 정성을 드려 놓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언니가 모르는 사이에 꾸며놓은 것임에 틀림없겠지요.
 
15
아침에 내가 이 방을 나갈 때는 신문잡지, 서적 등이 자욱이 널려 있었고, 병원의 입원실같이 하얀 이불이 아랫목에 헝클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16
언니가 나에게 표하는 정성이 오늘에서 비롯함은 아니나, 왜 그런지 이 밤에는 새삼스럽게 언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가슴에 찼습니다. 곁에 있었으면 한마디 인사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17
이제까지는 구태여 언니뿐만이 아니라 집안 사람들 중 누구에게든지 아무런 정성을 받아도 입에 내어 감사다하고 해 본 적이라고는 없었어요.
 
18
물론 마음속까지 느낄 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입 밖에까지 내여 표현하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무뚝뚝한 성격인지는 모릅니다.
 
19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나의 성격이라고만 돌리고 말 수는 없어요. 왜그러냐 하면 나는 그들에게 감사를 느끼기 바로 직전의 순간에는 마치 무거운 쇠줄에 동여 매이는 것 같은 압박을 느끼는 것이었어요. 아니 그 보다도 도리어 나는 괴롬을 느끼는 것이랍니다. 그들에게 무엇 하나라도 보람될 것이라고는 가지지 못한 나이기 때문에……. 아니 항상, 그렇습니다. 항상 나는 그들이 나에게 바라고 있는 바를 기어이 배반하여 버리려고, 아니 배반하고 말리라, 배반하여 버리지 않고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악마이었기 때문입니다.
 
20
그러므로 그들의 정성은 나에게 고통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바라는 바는 오로지 압박천대, 그리고 축출! 이것이어요.
 
21
그러면 나는 얼마나 마음이 자유롭고 얼마나 용감해질 수 있으리.
 
22
그들의 지극한 은애(恩愛)는 나에게서 용기와 자유를 고살(苦殺)시킬 뿐입니다.
 
23
S!
 
24
나는, 나라는 인간은 무엇이라고 정의를 부쳐야 좋을 인간일까요.
 
25
나는 가죽들의 정성을, 아니 그보다 어느 때든지 그들을 배반하고야말 인간임을 확실히 자인하면서도, 그들의 사랑을 배반할 수 없으며, 나에게 이 고통을 주는 가족을 미워하여야 될 것이며 그 반대로 지극히 사랑합니다.
 
26
왜? 나는 내 사랑하는 가족들을 기쁘게 해주며, 그들의 원하는 딸이 되지못합니까!
 
27
왜? 나는 기어이 배반하고야말 인간이거든 그들의 사랑과 정성에 무엇 까닭에 감격합니까? 감격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이생명이라도 바쳐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28
왜? 나는 그들을 버릴 것을 단념하지 못하여 왜 또 기어이 배반해 보겠다고도 하는 것일까요!
 
29
S!
 
30
나는 모르겠어요! 나는 모릅니다. 나는 약한 자일까요! 너무나 강한 자일까요!
 
31
S!
 
32
나는 이 방으로 들어오기 조금 전부터 고질인 위장이 아프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차차 아파오는 도수가 높아가고 있음으로 그것을 참으려고 애씁니다. 팔짱을 끼고 아래턱을 가슴속으로 파묻히듯이 하며 고도로 쫓겨 가는 배 위에 서 있는 나폴레옹같이 침통한 포즈입니다.
 
33
묵묵히! 묵묵히! 이윽도록 그 파란 전기 스탠드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34
S!
 
35
이때이었어요. 바로 이때! 어느 때부터 시작된 느낌인지는 모르나 문득
 
36
“아! 무척도 고요하다. 왜 이다지 고요할까! 어인 까닭에 이 밤이 이다지도 고요할까!
 
37
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멀고 먼 거친 타향에서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고향집 안방 안에 이제 금방 들어와 앉은 듯이 그 고요함이 그립고도 정답게 느껴졌어요.
 
38
S!
 
39
S와 서로 떠난 이후 오늘날까지 늘 나는 이러한 시간을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40
모든 음향과 움직임이 없는 터럭 끝만치라도 외계(外界)의 구애가 없는 그러한 묵적(默寂)한 가운데다 내 자신을 앉힌 후 고요히 침착하게 냉정하게 진실한 나라는 것을 집어내어 과거와 현재, 미래에 있어서의 나타나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곡차곡 검토(檢討)해 보며 나라는 인간이 어떠한 것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 것인가를 알아내려고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41
그러나 이제 의외에도 그러한 시간이 이곳에서 나를 맞아 줄 줄은 생각하여 보지도 않았던 까닭에 한참 동안 무아몽중으로 앉아 있었을 뿐이었어요!
 
42
이 동안에 시간은 제 갈 길을 얼마나 갔는지 모릅니다.
 
43
정적은 일각일각으로 굳세인 박력(迫力)을 가해가며 더욱더욱 적막하여 가는 그 가운데서 나는 즐기는 듯 도취하듯 묵연(默然)히 앉아 있을 뿐입니다.
 
44
이렇게 하여 또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는지……. 깊은 나락(奈落)에서 울려오는 듯이“당”하고 시계가 새로 한 시를 쳤습니다. 그러고도 또 얼마간을 그대로 앉아 있었어요. 아무것도 생각하는 것도 없었고, 이러한 시간을 가지면 하려고 하는 모든 푸념도 다 잊어버린 듯 하였습니다.
 
45
내신경의 어느 일부는 눈이 빙빙 돌아갈 만한 맹렬한 활동을 개시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46
아파가는 도수가 자꾸자꾸 높아가는 나의 위병은 어느 때무터 사라져 버렸는지 내 마음과 몸은 남김없이 외계의 정적 속에 동화되어 고요한 호수(湖水)같이 잠잠하여졌음을 느꼈습니다.
 
47
“아!”
 
48
이 신기한 이 밤의 정적은 마침내‘나’에게‘나’를 가져다 주었어요. 거짓과 갈등과 괴롬에 고달파진 나는 세상이 시끄러움 속에서 혼명(混冥) 하여져‘나’까지 잊어버리고 내가 남(他)인지, 남이 나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던가 봐요.
 
49
나는 나 같은 약한 자인지 지극히 강한 자인지 스스로 구별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세상의 시끄러움이 참을 수 없게 저주로왔어요.
 
50
아무 시끄러움이 없는 고요한 가운데서 차근차근 내 모양을 바로 보기 원했어요!
 
51
눈멀고, 귀먹은 자의 정적을 원하였던 것입니다.
 
52
“아!”
 
53
과연 내 원하던 귀먹은 자의 정적은 틀림없이도 이제 거짓과 괴로움과 갈등에 낡아진 때 묻은 옷을 활짝 벗겨서 새빨간 내 마음을 내 가슴에 던져 보냈습니다.
 
54
S!
 
55
나는 지금 잃어 버렸던 나를 굳게 찾아 안고 울어야 옳을지 기뻐해야 옳을지 모르겠어요.
 
56
지금의 나를 누구에게나 보이고 싶고 말하고 싶습니다. 입을 열기 싫어하고 남을 대하기 싫어하던 그 우울이 지금의 나에게서 떠나가 버렸는가 합니다.
 
57
S!
 
58
문득 S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누구의 얼굴보다도 명확하게 내 마음 가운데 떠오릅니다.
 
59
당신의 이름을 가만히 입안에 돌려보니 갑자기 당신에게로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어요.
 
60
그리고 다음 순간 달음박질하려는 내 마음을 바보처럼 모르는 척, 그대로 멈추어서 생각난 듯이 옷을 활활 벗어 버리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던 것입니다.
 
61
그리고는 이불 위에 좍 벗고 들어 누어 천정을 바라봅니다.
 
62
왜 구태여 이때의 내 마음속에 당신의 얼굴이, 뚜렷이 떠올랐을까요! 그 크고 빛나던 불 같은 두 눈과 분명한 윤곽의 당신의 얼굴이 왜 그다지도 명확하게 떠올랐을까요!
 
63
S!
 
64
그에 대한 설명은 한 가지 두 가지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인 줄, 오직 당신만은 아시리라.
 
 
 

2

 
 
66
S!
 
67
당신과 내가 서로 알게 되고, 또 서로 몇 차례 만나게 된 것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 모두 다 우연이었습니다. 정말 이상스런 신기한 우연(偶然)이었어요.
 
68
당신이 내가 있는 이 땅으로 여행하게 된 이유는 그만 두더라도 한 발자국이 땅 위에 내려 놓자 실로 우연히 당신의 옛 친구였던 김을 만났던 것이 아닙니까?
 
69
그래서 김과 서로 반가운 동행이 되어 경부선 기차에 올랐던 것이지요. 김은 당신과의 옛 우정을 위하여 신라고도(新羅古都)로 안내하게 되어 K역에 내린 것이었습니다.
 
70
그리하여 경주행 기차에 바꾸어 타자 김은 또 하나 옛 친구를 만났던 것입니다. 역시 아무 뜻하지 않은 우연으로.
 
71
당신과 김이 단순한 옛 친구가 아니며 죽음과 삶을 함께 하였던 동지(同志)였다고 한다면 이제 또 한 사람 만난 친구 역시 김에게 있어서의 옛 동지였습니다.
 
72
이 새로 나타난 친구와 당신과는 미지의 사이였으나 김을 중심으로 하여 세 친구는 삽시간에 동화되고 말았지요.
 
73
이 새로 나타난 친구! 그 사람이 바로‘나’이었지요?
 
74
S!
 
75
나는 우연히 생각 밖의 친구 김을 만난 것이 기뻤으며 더구나 당신을! 첫말부터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당신을 알게 된 것이 기뻤습니다.
 
76
“어디를 가는 길이요?”
 
77
김은 나에게 물었습니다.
 
78
“우리가 떠난 지 십여 년 만에 우연히 이렇게 만난 것이니 관계되는 일이 없거든 함께 경주 구경합시다.”
 
79
라고 그때 김은 옛날이나 다름없이 이러한 말을 하였지요?
 
80
나는 더 무엇을 생각할 여가 없이
 
81
“갑시다. 나도 함께 가겠어요!”
 
82
라고 즉답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즐겁게 회고담을 주고받으며 기차가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가는 생각조차 해볼 여지가 없었어요.
 
83
이윽히 이야기 꽃을 피운 후 나는 문득 이러한 생각이 났습니다.
 
84
“대체 내가 이 기차에 어떻게 하여 오르게 되었던가! 어디로 가려던 것인가! 이렇게 아무리 옛 친구라고는 하나 함께 아무 예상도 준비도 없이 여행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옛날에 아무리 간절한 동지였다고 하지만은 오늘을 피차 체면과 예의를 차려야 할 터가 아닐까! 더구나 내가 너무나 기분에 도취되어 여인다운 체면을 잃은 것이 아닐까!”
 
85
라고……
 
86
내가 그 기차에 타게 된 이유는 혼란하였습니다. 괴로움과 시끄러움에 시달리다 못해 훌쩍 집을 나와 아무 의식 없이 차표를 샀던 것입니다.
 
87
“어디로 갈까!”
 
88
하고 생각해 볼 여가 없이 그때의 나 같은 멸망을 당한 인간이 갈 곳! 그것은 깊은 산중이 아니면 차라리 이미 패하여버린 옛 자취나 찾아 가서 함께 멸망하여 가는 것을 우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경주까지의 차표를 샀던 것이랍니다.
 
89
그러나 차표를 사가지고도 나는 망설이며 그대로 집으로 돌아서려 할 때 발차를 신호하는 벨이 울려왔으므로 급히 차에 뛰어오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90
내가 이렇게 무궤도적 여행을 나선 것이나 선뜻 당신들과 동행이 되기 응낙한 것은 누구의 눈에라도 온당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며 또 누구라도 성격파산자같이 조소할 것입니다.
 
91
그러나 S! 내가! 이미 이러한 줄도 저러한 줄도 다 알면서도 스스로의 행동을 비판해볼 겨를을 얻지 못하였음에는 파묻혀 있는 여러 가지 괴로움이 있었던 탓이었습니다.
 
92
그때의 나의 괴로움으로서는 별 깊은 의미를 포함하지 않은 짧은 여행쯤이야 문제 도리 꺼리가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도 그때의 나에게는 절대로 필요한 휴식이 될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93
S!
 
94
그때의 나의 괴로움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나의 이혼(離婚)이었습니다.
 
95
이혼! 이것은 자살자의 눈에는 중대한 문제로 보였을지 모르나 나로서는 급작스러운 무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가장 자연스런 해결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96
하늘을 우러러 던진 돌맹이는 반드시 그 높이에서 떨어져 땅에 달 때까지의 얼마간의 시각만이 문제이지만 다시 도로 땅 위에 떨어짐에는 틀림없는 자연 법칙입니다.
 
97
나의 결혼은 하늘을 향하여 돌맹이를 던진 것과 같은 결혼이었어요.
 
98
그러면서도 나의 주위는 그 던진 돌맹이가 무사히 그대로 공중에 매여달려있을 기적을 신념하고 있었고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나 자신은 반드시 땅 위에 뒤떨어지는 법칙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부득이 모르는 척이라도 해보려 애썼으나 그러기에는 너무나 내가 무지하지를 못했습니다.
 
99
이 법칙을 분명히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나인 까닭에 때에는 이미 떨어져 버렸는가 하는 공중과 땅 사이의 거리와 그에 따르는 시각 문제를 잊어버리고 말 때가 있기도 했습니다. 내가 이러한 착각을 일으켰을 때에도 반드시 공중에 매여 달려 있으리라는 기적을 신념하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려고 나는 입을 다물고 참어 왔고 견뎌내었던 것입니다.
 
100
내 주위의 억센 힘들이 재주껏 던져 올린 돌맹이! 이 돌맹이가 땅 위까지 닿는 그 떨어지는 시간 중에 내 눈은 휘돌리우고, 내 가슴은 구토(嘔吐)에 가로 막히고 내 전신은 전율(戰慄)과 공포에 떨렸습니다.
 
101
그러나 이것은 다만 시각 문제였을 따름인 줄 아는 나이였기 때문에 가만히 죽은 듯이 견디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102
그러므로 나의 이혼은 나에게 평화와 안식을 일시에 가져 온 것이 됩니다. 하늘로 올라갔던 돌맹이가 이제 제가 있어야 할 자리로 모진 비바람 속을 뚫고 땅 위에 내려앉은 셈이 됩니다. 모든 고난(苦難)이 해소된 셈이에요. 나에게 괴로움이 될 이치가 없습니다.
 
103
나는 얼마 동안 내내 있던 이 땅에서 풍기는 그립던 흙 내음새를 가슴껏 마셔 보고, 두 발을 들어 힘껏 이 땅덩이를 굴려도 보았습니다.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요!
 
104
그러나 S!
 
105
이 기쁨은 짧았습니다. 나에게 두 번째로 굴러온 문제! 그것은 또 다시 엄연하게 내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106
그것은! 내 주위가 너무나 무지한 까닭입니다. 그들은 나의 타고난 본질(本質)을 이해하지 못함이어요. 아니 기어이 이해하지 않으려고만 애쓰려함이어요.
 
107
그들은 나에게 아름다운 보물(寶物)이 되어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을 때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방 안쪽 장롱 속에나 선반 위에 담겨 있어 귀한 옥돌(玉石)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랍니다.
 
108
그러나 S!
 
109
나는 불행히도 옥돌이 아니어요. 보물되기를 또한 원치 않는 답니다. 나의 가림없는 본질은 거친 창파(蒼坡)에 씻겨 가며 제대로 다듬어 지는 백사장(白沙場)에 흩어져 있는 조약돌이 아니라면 험악한 산꼭대기에 모나게 솟아 있어 비바람과 눈보라에 저절로 다듬어지는 바윗돌이 아닌가 합니다.
 
110
그보다도, 솟으며 떨어지며 감돌며 흘러가는 계곡(溪谷)물에 밀려서 넓고 깊은 바다 속까지 갈 수 있는 한 조각 모래가 됨을 원한 답니다.
 
111
이러므로 고난에 피로한 내 자신이 잠시 쉴 여가조차 길지 못하게 조약돌 같은, 바윗돌 같은, 모래알 같은, 나를 옥돌이 되리라는 두 번째의 기적을 바라는 내 주위의 은애(恩愛)에 얽매어 버리게 된 것입니다.
 
112
나의 괴로움은 이것이었어요.
 
113
나에게 이혼한 여자란 불명예를 회복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첫째 방안에서 나오지 말아야 하며, 세상의 기구한 억측에서 흘러나온 가진 비평을 일일이 변명하고 그리고 주위의 명예를 위하여 세상에 사죄하는 뜻으로 근신 하여야 되며 그리고 얌전스런 여인으로서의 본분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행복이 나에게 오리라는 것이어요.
 
114
그러나 S!
 
115
나에게는 하여야 될 아니 하지 않고는 견뎌 낼 수 없는 일이 있답니다.
 
116
그 일이 무엇인가를 당신은 잘 아시리다. 비록 마음속으로나마 일을 가지지 않고는 내가 산(生)다는 뜻을 잃어버림이 됩니다.
 
117
그들은 너무나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나 귀히 여기는 까닭에 나에게 ‘일’을 앗으려 하며 오직 안일(安逸)만을 주려는 것입니다.
 
118
나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내 주위 속에서 견뎌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곳을 헤치고 나올 용기를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에게서 용기를 앗아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119
“S! 어머니의 눈물입니다.”
 
120
조용한 어머니의 눈물은 나에게서 모든 용기를 앗아가는 무기(武器)였습니다. 그 눈물은 오직 나에게 안일을 주려는 지극한 사랑이 근원되어 있습니다.
 
121
그들은 털끝만치도 나를 이해해 주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끝없이 사랑할 줄만 압니다. 그 사랑을 감수하지 않을 듯한 불안에 항상 슬퍼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달래보며 온갖 정성을 다해줍니다.
 
122
그들이, 나에게 보내는 은혜의 깊이가 얼마나 큰지를 측량할 줄 조차 모르는 나이기 때문에 나는 혼란하여져서 용기는, 소멸되는 것이랍니다. 그럼으로써 나 스스로의 초조와 실망은 커갑니다.
 
123
그래서 나는 집을 훌쩍 나온 것이었어요. 나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극도로 혼란하여 머릿속이 파멸될 것만 같았어요.
 
124
S!
 
125
우리가 탄 기차가 목적지에 다 도착했을 때 나는 문득 눈물겨워지며
 
126
“S! 김! 나는 이곳에 실컷 울러 왔어요”
 
127
라고 혼잣말같이 중얼거렸지요.
 
128
“울기 위하여?”
 
129
하며 이상스럽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래져
 
130
“무슨 까닭과 이유인가요.”
 
131
라고 물으셨지요?
 
132
“나는 삶에 패부자입니다. 확실히 나도 패부자의 일형(一型)이야요. 아니 패부자의 과정에 있다고 할까요! 그럼으로 이미 멸망하여버린 옛 왕(王)터는 내 슬픔을 나누기 적당한 곳이여요.”
 
133
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134
“우습습니다. 우리는 옛 자취들을 지금의 내 삶에 장식이 될 조그마한 무엇이라도 하나를 얻어 보려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아직까지도 울어본 기억이라곤 별로 없습니다. 동지였던 K가 너무나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을 때 나는 애석하고 분함을 못 참아 크게 운 기억이 있을 뿐이지요. 나는 울만치 큰 감격을 받아 보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뜻하는 바 일이 천신만고를 겪은 후 성공되는 날이 있다면 그때는 너무나 기쁨의 감격이 극도에 이르러 혹 눈물이 좍 흘러내릴 것 같은 느낌은 있었어요. 울 곳을 찾아간다! 너무나 로맨틱한데요. 당신은 벌써 인생의 절반이나 살아 버린 것 같은데 어쩌면 한가하게 울 곳을 찾아가는 여가를 가졌습니까? 나는 잠시라도 무의미한 일로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여가가 없어요. 사람의 일생이란 긴 듯 하면서도 무척 짧은 것이랍니다. 당신의 삶은 너무나 한가합니다. 한가한 삶이란 대개 무의미란 것이어요.”
 
135
당신은 조소하듯 말하셨지요! 나는 귀를 기울이고 입을 닫고 말았던 것입니다.
 
136
“한가한 삶! 그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런 줄 나도 잘 알아요. 그 까닭에 나는 그 한가한 삶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 쓸수록 나는 더욱 얽매어 가기만 합니다. 늙었을 때의 안일을 위하여 젊은 내 혼이 산천과 조수(鳥獸)를 벗하여 그 가운데 고요히 호흡하라는 삶을 아직 젊은 내가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요! 나는 젊어요. 나에게는 발열한 긴장으로 희망의 피안을 향하여 맹진하는 분위기가 욕망될 뿐입니다.”
 
137
나는 부르짖으며 말했지요!
 
138
“그러면 왜 그 욕망을 무시하고 울 곳을 아까운 시간을 허비합니까.”
 
139
당신은 한결같이 나를 웃었습니다.
 
140
“나는 내 욕망을 위하여 싸웁니다. 그러나 나는 이겨내지 못해요.”
 
141
“이겨내지 못할 만치 굳센 것은 무엇입니까.”
 
142
“어머니의 눈물이여요.”
 
143
“아! 넌센스다. 어머니의 울음, 눈물로 시종한단 말이어요?”
 
144
라고 당신은 가가대소하였습니다. 나는 가슴을 쥐어 키운 것 같이 멍하여져서 눈만 번쩍 뜨고 있었지요! 당신의 웃음소리는 나에게 웅장하게 울려주는 경종(擎鍾)소리 같았습니다.
 
145
“당신들은 잘 모릅니다. 모두다 피상적 관찰이며, 이론입니다. 나의 이 괴로움에 가장 상식적이며 비판에 그치는 것입니다. 좀더 내 환경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간단하게 결단하지 못한다는 괴로움임을 알 것입니다.
 
146
이윽한 후 우리는 석굴암(石窟庵)을 향하여 걸어 들어가며 나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굳센 삶에 대한 굳은 자신에 충만한 일거수 일투족이며 단 한 번의 웃음 가운데 무서운 기백(氣魄)을 감수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옛날 죽음을 돌보지 않고 다만 동지들과의 굳은 결합 가운데서 용진하고 분투하던 때가 다시금 내 앞에 당도한 듯도 하였으며 지금까지나 한 몸에 얽매어 살기로 걸음을 돌린 이후의 모든 괴로움이 그 자리에서 티끌만한 가치도 없는 하나 넌센스밖에 뜻을 가지지 못하게 될 듯하여 어떻게든지 나는 나의 괴로움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던가를 당신에게 주장해 보이고 싶었으며 그리함으로써 나를 지지하려 했습니다.
 
147
“당신은 방향 전환을 한 후의 감상이 어떠했던가요?”
 
148
라고 마치 나의 가슴을 투시(透視)하듯 이렇게 물었지요?
 
149
“나는 무한한 고독을 느꼈습니다. 큰 단체에서 떨어져 나온 나라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하며 얼마나 외로운 것인가를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150
나에게서 그 열열하던 의기가 사라져가는 비애를 느꼈습니다.”
 
151
나의 이 대답은 진정한 고백이었습니다.
 
152
“그런 거랍니다. 단체적 훈련을 받아 온 사람은 혼자 떨어져 나서면 개인적으로는 아주 무력한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인가 봐요…….”
 
153
당신은 이윽히 묵묵하며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었습니다.
 
154
“그때의 우리가 표방하던 주의며 주장을 이제 와서 어떠한 것임을 말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당신에게 그때의 그 열열하던 용기와 의기만을 다시 가지라는 충고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당신의 삶의 목표며 생각이 어떠한 길을 향하였다던지 그것은 잠깐 그만두더라도 그저 그 열열하던 용기를 어서 회복시키셔요. 그러면 당신에게서 그 괴로움이 살아져 버릴 것 입니다.”
 
155
라고 타이르듯 말하셨지요! 나는 이 말을 듣고 내 가슴 한구석에서 무한한 학대와 무시를 받으며 병들어 있는 무엇이 그제야 고함을 치는 듯 하였습니다.
 
156
석굴암을 구경하고 내려와서 김과 셋이 역사에서 하룻밤을 쉬는 동안 당신은 나에게 용기를 주려고 가진 애를 쓰셨습니다. 그 하룻밤을 세우고 난 나는 이른 아침 다시 아침 식탁에 모였을 때 나의 모든 지난날이며 앞날을 적나라하게 비판하여 본 후 가장 바른 내 길을 찾아야 될 절박한 생각에 차있었습니다.
 
157
“석굴암! 과연 위대한 예술입니다. 나는 그에 대한 문외한이기는 하지만 단지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도 위대한 무엇을 하나 창조합시다.
 
158
지난날의 것이 아닌 오늘날의 것을 창조하기로 분투합시다.”
 
159
라고 당신은 아침 인사대신 이렇게 하셨습니다. 나는 아무 대답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음으로 엉뚱한 말을 하게 되었던 것이랍니다.
 
160
“S! 당신은 나에게서 옛날의 용기와 정열을 다시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사람이 된다면 나의 어머니의 눈물은 더 심각해지고 더 많아질 것입니다.”
 
161
라고요…….
 
162
“아! 아, 또 눈물 이야기에요? 당신은 눈물이 아니면 말을 못하는 셈이십니다. 울음이란 지금의 우리에게는 하나 넌센스에요. 우리는 앞으로 일 초의 쉼도 없이 맹진해야 될 사람입니다. 울어가며 울고 있는 이유가 대체 어디 있으며 울고 있는 무의미한 사람에게 매어달라고 고민하고 있을 턱이 어디 있는가요.”
 
163
당신은 조소하였지요?
 
164
“그러나 S! 이것은 생각함으로서 있고 없어질 문제가 아니에요. 엄연히 존재하여 있는 현실입니다. 어머니는…… 단 하나인 딸에게 자기의 모 ─든 삶을 걸고 있어요. 그는 나의 행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이 땅의 현실에 있어서는 나라는 것이 아 ─ 무 힘도 의욕(意慾)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 되어 어머니의 환경에 칭찬 받는 그러한 딸 되기 바랍니다. 집안에서 나 혼자 어떠한 생활을 하든지 또는 그들이 나를 위로하기 위하여 얼마나 큰 희생을 하든지 그것은 돌보지 않고 다 ─만 어머니의 환경에 가장 아름다운 타협을 한 착한 딸이 되고, 칭찬받고 부러움 받는 정숙스런 여인이 되라고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간절한 요구입니다. 내가 만일 이때에 어머니의 그 바람을 배반한다면 어머니는 자살이라도 할 것이에요. 그만치 그는 인습적입니다.”
 
165
“그래서?”
 
166
“그러니까 나는 도저히 어머니의 바라는 삶으로서 단 하나 밖에 그나마 얼마 남지 않는 내 삶을 허비할 수가 없어요.”
 
167
“그래서?”
 
168
“그러니까 나는 괴로운 것입니다. 나의 이성(理性)은 도저히 어머니의 생각과 타협할 수 없답니다.”
 
169
“그러면?”
 
170
“그러면 나는 나를 위하여 살아야 됩니다. 그러나 S! 내가 방향 전환 이후의 고독과 외로움을 이해해 준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었어요. 이 묵중한 대지(大地)도 움직이는 때가 있지마는 어머니의 사랑은 내가 죽고 없는 날까지 움직이지 않는 절대의 것이니까요! 나는 변하지 않는 절대를 믿고 싶고 그거만이 참(眞)인가 합니다.”
 
171
“하하하! 변하지 않는 것을! 당신은 너무나 학대받은 자의 비꼬인 생각을 가졌군요.”
 
172
“…….”
 
173
“이 세상은 변하고 움직이는데 뜻이 있는 거랍니다. 변함없는 세상! 그것은 질식입니다. 당신이 그 옛날 수천의 군중을 향하여 사자후 하던 사람입니까? 왜 이다지 모호하고 절벽 같은 멍텅이가 되었는가요?”
 
174
곁에 앉았던 김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175
“오─ 직 변하면 안 될 것은 자기의 신념(信念)뿐입니다.”
 
176
라고 단 한마디 말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이윽한 후
 
177
“당신은 어머니의 눈물을 거두려면, 그 방법은 단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78
라고 말하셨습니다.
 
179
“무엇이어요? 어떠한 방법일까요.”
 
180
나는 미친 듯 파고 물었지요!
 
181
“오 ─ 직 당신의 변치 않는 신념! 그 신념에 매진하는 것뿐! 그것이 당신의 어머니를 불안에서 구원하는 것이 됩니다. 당신의 갈 길이 얼마나 뜻있는 것인가를 잘 이해시킨 후 절대의 불굴의 보조로 걸어가십시오. 그때는 어머니가 당신을 애호할 것입니다. 굳은 신념! 절대 불굴의 정신! 이것은 또 절대의 힘(力)이랍니다. 절대의 힘! 이것이라야 모 ─ 든 것을 정복합니다.”
 
182
“환경의 더구나 이해 없는, 당신을 알지 못하는 환경이 어떻게 비방하든 욕하든 그것이 문제시 될 턱 없습니다. 나는 온 세상이 비방한대로 내신념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세상에다 자아를 자랑하고만 싶은 허영을 버리세요. 세상은 으레이 욕하고 시기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성미를 다 ─ 맞혀 주려면 결국 당신 자체는 가치 없는 하나 흙무덤으로 그치고 말 뿐입니다. 도리어 세상을 내 성미에 맞도록 만드세요!”
 
183
“……”
 
184
“사람이란 눈앞에 작은 위안에 빠져 가장 중대한 큰 찬스를 놓치는 때가 많은 것이랍니다.”
 
185
“…….”
 
186
당신은 말이 없는 나를 달래듯 위로하듯 어디까지든지 자아(自我)를 중장해 나갈 용기를 고취하여 주었지요?
 
187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은 건강해야 됩니다. 왜? 늙은이처럼 늘 앓아요! 이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아침부터 죽그릇을 들고 앉았으니 그것이 말이 됩니까.”
 
188
라고 내가 위병 까닭에 아 ─ 무것도 먹지 못하고 오 ─ 트밀 그릇을 앞에 놓고 앉았는 것을 들여다보며 말하였습니다.
 
189
“아픈 것! 누구가 일부러 아프려 합니까. 나의 오랜 고민의 생활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러시지 않더라도 내가 아프지 않은 순간에는 온갖 용기가 다 ─ 나옵니다마는 아픔이 시작될 때는 아주 자포가 되어요.”
 
190
“그러기에 말이 아니에요? 나는 앓지 않는답니다.”
 
191
“당신은 원래 건강하시니까…….”
 
192
“아니에요. 나는 나의 굳은 신념이 나를 건강하게 해준답니다. 스스로 자기 몸을 중히 여기고 싶어지니까요! 신념이 없는 사람은 모 ─ 든 것을 되어 나가는 대로 맡겨두고 턱없는 꿈에만 빠져서 요행이나 바라고 있을뿐이지요!”
 
193
아! 나는 정말 애 앞이 밝아지는 듯 했답니다. 나는 당신과 얼마 동안이라도 한 곳에 있다면 얼마나 용감해질까 ─ 라고 느꼈습니다.
 
194
S!
 
195
그러나 우리는 오래 한 가지로 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당신과 김은 서울을 향하고 나는 나대로 집으로 돌아왔지요.
 
196
이것이 당신과 내가 우연히 서로 알게 되어 얻은바 수확이었습니다.
 
197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어머니에게 당신의 신념되는 바를 설명하십시오. 그리 오래지 않아 당신에게 기쁜 날이, 진정한 행복된 날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독서를 하세요. 당신의 가족들이 아무리 못 하게 하더라도 당신만 마음먹으면 반드시 됩니다. 다 ─ 잠든 틈을 타서 읽으시오.”
 
198
당신이 나에게 하직 인사말은 이것이었지요! 그리하여 우리는 어느 때 다시 만날 기약조차 없이 갈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199
나는 그 길로 집에 돌아왔던 것이나 내 귀에는 굳센 당신의 가지가지의 말이 꽉 박혀 있었습니다.
 
200
그 이튿날 나는 어머니의 권함을 버리지 못하여 경성으로 오게 되었던 것 입니다. 좋은 의원이 있다는 어머니의 친구에게서 편지를 받았던 때문이었어요. 그리하여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그 의원을 찾아 상경하게 되었지요!
 
201
물론 상경은 하지마는 당신과 김이 어디 있을지 아 ─ 무 약속이 없었으니 서로 만날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아예 그런 생각은 염두에 내지도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202
그리하여 나는 그 이튿날 경성을 향하여 떠났던 것이었지요!
 
203
우연! 우리에게 두 번째의 우연이 또 왔습니다. 당신과 김은 상경하던 길 도중에 대전서 내려 하룻밤을 유성 온천서 쉬고 난 후 내가 탄 기차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204
이리하여 우리는 기약 없이 두 번째 우연 속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205
나는 기뻤어요, 무척 반가워 서로 무의식간에 손을 마주 잡았던 것입니다. 그리운 옛 벗을 만난 듯 하였어요.
 
206
몇 날간을 서울서 보내는 동안에 당신은 나에게 기탄 없는 충고를 하였고 용기를 고취하여 주었지요? 그리고 우리는 어느 사이엔지 굳게 손을 마주잡고
 
207
“서로 힘이 되어 줍시다.”
 
208
라고 약속하는 동무가 되었고
 
209
“서로 마음의 괴로움을 호소하며 기쁨을 나누는 뜻 있는 동무가 됩시다.”
 
210
라고 맹세하였습니다. 나의 가슴에 저기압은 사라져간 듯 하였고 스스로 내가 나아갈 길이 밝아져 왔던 것입니다.
 
211
세 번째의 우연! 그것도 역시 기차 위에서 입니다. 나는 트렁크에 약을 가득 지어 담고 그것으로서 기어이 내 병을 고치고 말리라고 결심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속에서 또 다시 당신을 만났던 것입니다.
 
212
서울서 우리가 헤어질 때는 내년 봄에 내가 건강을 회복한 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으리라는 것과 서로 주소를 알리며 자주 서신 왕복이나 하자는 약수로서 떠났던 것이었는데 내가 의원에게 일일간 진찰을 받는 동안 당신은 평양과 개성을 구경한 후 당신의 고향인 동경으로 들어가는 차 중에서 또 우연히 만났던 것입니다.
 
213
이상스런 세 번째의 우연의 해우에는 당신도 놀라는 얼굴이었습니다. 나는 너무나 기의하여 내가 마치 무슨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에 희롱을 받는 듯하여 반갑고 기쁘다느니 보다 몸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214
“정말 잘도 만나집니다!”
 
215
당신은 차창으로 내려다보며 아직 놀란 장닭처럼 서 있는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마치 내가 당신의 뒤를 쫓아다니며 이러한 우연을 만드는 것 같아 잠깐 불쾌하기도 했습니다. 당신 역시 그러한 느낌인 모양이었습니다.
 
216
“우연! 신기한 우연! 우연이란 우스운 것입니다.”
 
217
나는 얼떨떨한 말을 하며 비로소 앉았습니다. 당신은 한결같이 차창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218
“우연? 이 세상에 우연이란 것이 없어요, 피차 또박또박 제가 지나야할 코스를 밝아온 결과로 서로 그 코스가 한 대 교차되었던 것에 불과하니까 그것은 가장 자연적 결과입니다. 만일 이것을 이름 지어 우연이라 한다면, 그 우연이 또한 인간 일생을 좌우하는 중대한 계기가 될 수가 있어요. 때로 인간이란 우연에 좌우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219
라고 말하셨습니다. 나 역시 어디를 바라보고 있어야 좋을지 몰라 시선을 따라 차창 밖을 내려다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창 밖은 늦은 가을이라 옮아가는 들판에는 이미 추수가 끝나고 저물어가는 황혼 속에 황량하여 있었습니다.
 
220
“보세요, 저는 논둑에 불이 타고 있지 않아요? 그것이 무슨 불인지 알아요?”
 
221
이윽고 비로소 나를 돌아보며 말하셨습니다.
 
222
“내년 봄에 풀이 짙게 나라고 일부러 놓은 불이지요.”
 
223
“그렇습니다. 뜻 모르는 사람은 왜 풀뿌리를 태워 버리냐고 할 것입니다. 당신도 지금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목적에 반대되는 수단이라도 취해야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224
당신의 이 한 말은 나에게 무한한 감명을 주었습니다.
 
225
그때 기차는 어디를 달리고 있었는지 모르지마는 먼 산 밑에 옹기종기 붙어 있는 초가집들에서는 한가하게 저녁 연기가 오르고 있어 나에게 망향(望鄕)의 슬픔을 자아냈습니다. 나는 무슨 까닭인지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당신은 보지 않는 척 하며,
 
226
“용기가 흔들리며 마음이 약하여질 때는 반드시 편지하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의 힘이 될 서적이나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227
라고 은근히 위로해 주셨습니다.
 
228
“S! 나는 아픔이 시작될 때마다 삶의 노력이 우습게 보여져요. 집에 있을 때 뒤창을 열면 멀리 산이 보이고 그 산허리에 두세 집의 화전민(火田民)이 살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 사람들은 일생에 한번 기차를 타보지도 않고 다 ─ 만 그 날 그 날 먹고 입을 것만 있으면 그 이상 더 바람도 욕망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 ─ 만 그러고 있다가 죽어버리지요. 나는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그들이 정말 사람답게 사는 것 같아요. 사람이란 그저 살다가 죽는다는 것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229
나는 마음이 센티멘탈해져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던 것입니다.
 
230
“아니에요. 그것은 원시인의 생활입니다. 우리는 금일의 문화인이랍니다.”
 
231
라고 당신의 나의 무지(無知)함에 실망한다는 표정으로 간단히 대답하셨습니다.
 
232
어느 사이에 우리가 탄 기차는 빠르게도 내가 내려야 할 역이 가까워졌습니다.
 
233
나는 공연히 가슴속이 초조하여졌습니다. 나는 당신을 떠나 있으면 무력해지고 약해질 것만 같고 당신만 한 곳에 있으면 무력해지고 약해질 것만 같고 당신만 한 곳에 있다면 나의 용기는 그칠 때가 없이 언제나 정열에 불타며 이지적 결단성을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함께 당신이 내리는 곳까지 가고만 싶었어요. 도중에서 나혼자 내리고 만다는 것이 나 혼자 낙오(落伍)되고 마는 것 같게도 느껴졌습니다.
 
234
당신은 내 마음속을 잘 아셨음인지 기차가 K역에 대기 조금 전에 먼저 벌떡 일어서서 나의 두 어깨를 잡아 나를 일으켜 세우며
 
235
“어서 건강을 회복하십시오. 내년 봄, 삼월에 디시 오겠어요. 그때까지 피차 많이 연구도 하고 검토도 해 봅시다. 그리고 그때 피차 얻은바 결론을 말하기로 합시다.”
 
236
라고 한마디에 힘을 주어 분명한 발음으로 일러 듣게 하셨지요!
 
237
나는 얼른 그 말의 진의가 무엇임을 알아내지도 못하여 기차가 K역에 대이고 말았음으로 그대로 내려 버리지 않으면 안 될 때였습니다.
 
238
“어서 내리십시오. 내려야 됩니다. 눈앞에 있는 정열에 지배되는 속인(俗人)이 되지 맙시다. 적어도 먼 앞날까지를 검토해 보아야 됩니다.”
 
239
“…….”
 
240
나는 무슨 말을 하여야 적당할지를 모르고 그대로 플랫폼에 내려섰습니다.
 
241
“내년 봄에 다시 만납시다. 꼭! 그리고 그때까지 생각의 결론을 얻어 두십시오. 서로 진보된 보고를 합시다.”
 
242
움직이는 기차에 따라가는 나의 손을 힘껏 잡고 큰소리로 말하며 당신의 커다란 두 눈은 햇볕같이 정시(正視)할 수 없게 찬란하게 빛나며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그 찬란한 빛은 내 몸을 남김없이 불태웠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비로소 안 것 같았습니다.
 
243
S!
 
244
그리하여 당신은 떠나갔습니다. 나는 갑자기 두 눈이 어두워지도록 눈물이 가득 고여지며
 
245
“S! 당신은‘힘’이에요. 지금의 나에게는 오 ─ 직‘힘’이 필요할 뿐이에요.”
 
246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247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하루라도 속히 건강을 회복시키려고 애쓰며 한편 나를 위하여 바른 길을 잡으려 애썼습니다.
 
248
나의 이 변화는 집안 사람들이 잘 눈치채었음인지 갑자기 불안에 떨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삶에 매력을 가하여 나로 하여금 굴복하게 하려고 갖은 정성을 다 ─ 하였어요.
 
249
나는 아픈 위를 부여잡고 냉정하게 어머니의 눈물을 위로하며 차츰차츰 나의 의도하는 바를 납득시키려 시작했던 것입니다.
 
250
그리고 또 하나 당신이 내려준 과제! 내년 봄 삼월에 보고할 것을 검토해 보며 연구하려 했습니다.
 
251
그러나 잠시도 그러한 종용스런 시간이 나에게 오지 않았음으로 끝없이 초조하였던 것입니다.
 
252
S!
 
253
이 밤은 몹시도 적막한 정적 가운데 깊어졌습니다. 나는 더 검토할 것도 더 연구할 필요도 없음을 이제 이 깊은 침묵의 대기(大氣)속에서 느꼈습니다.
 
254
“당신은‘힘’이에요, 나에게는 오 ─ 직‘힘’이필요할 뿐입니다.”
 
255
이것이 결론이에요, 이외에 다시 더 아 ─ 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256
S!
 
257
이제 남은 문제는 다만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뿐입니다.
 
258
내년 봄 삼월!
 
259
S!
 
260
그때 당신에게 말할 결론이 이 밤에 나타났어요. 그리고 나는 내가 취할 바 길을 분명히 알아내었습니다.
 
261
나에게도 신념이 생겼습니다.
 
262
S!
 
263
나에게도 갈 길이 명백히 나타났습니다.
 
 
 

3

 
 
265
S!
 
266
그 고요하던 밤이 벌써 새어 갑니다.
 
267
이제 새로운 아침이 밝아옵니다. 나는 잠옷 위에다 두터운 가운을 둘러 입고 내 방을 나섭니다. 창에 내려져 있는 커튼을 헤쳐 버리고 언니가 정성껏 깔아준 호사스런 금실을 걷어차고 나는 용감스럽게 그 방을 나섰습니다.
 
268
하루밤의 정적 가운데서 찾아낸 내 영혼은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그리고 새빨갛게 내 가슴에 안기워 있습니다.
 
269
S!
 
270
당신과 내가 만나고 떠나고 하던 그때는 늦은 가을이었사오나 지금은 겨울입니다.
 
271
고요하게 새어오는 겨울의 아침 공기는 지극히 청정합니다. 대자연(自然)의 가장 아름다운 본성(本性)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여요. 청정된 내 영혼을 영접하여 주는 듯 합니다.
 
272
S!
 
273
나는 뜰 가운데 서 있는 가장 크고 웅장스런 복숭아나무 곁으로 걸어갔습니다.
 
274
잎사귀 다 떨어진 뼈만 남은 가지들은 마치 죽은 듯 말라진 듯 합니다. 나는 그 중에도 가장 가느다란 한 개의 젓 가지를 잡아 보았어요. 서리(霜) 맞은 가지의 감촉은 싸늘하게 내 손끝에 느껴졌습니다.
 
275
나무는 말라진 듯 합니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이 나무를 정성껏 가꾸십니다.
 
276
왜 말라버린 것 같은 이 나무를 가꾸실까! 나는 손 끝에 힘을 보내어 잡았던, 가지를 작끈하는 소리를 내면서 분질러 뜨렸습니다.
 
277
그러나 S!
 
278
그 작은 젓 가지 하나에도 약동하는 생명의 줄이 흐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279
‘나의 어머니가 너를 가꾸심이 이것이다. 너는 아무리 죽은 듯하나 굳세게도 살아 있었다. 모진 삭풍에 부대끼어 그 잎사귀를 다 ─ 빼앗기고 말았어도 너는 너대로 다시 오는 봄을 기다려 너 혼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만히 살고 있었다.’
 
280
나는 가슴속으로 부르짖어 보았던 것입니다.
 
281
그리고 커다란 한 가지를 와지끈 분질러 보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훌륭히 살아 있는가를 내 눈으로 보고 싶은 욕망에서…….
 
282
고함치며 누구에게라도 보이고 싶었어요.
 
283
S!
 
284
돌아오는 봄 삼월에 당신에게 드릴 보고는 이제 훌륭히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말할 결론도 벌써 완성된 줄 알겠습니다. 나는 봄을 기다리기 싫습니다. 이 차디찬 겨울에서도 훌륭히 살아 있는 나를 한시바삐 알리고 싶습니다.
 
285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바로 보라고 눈을 뜨게 한 당신입니다.
 
286
S!
 
287
내가 얻은바 결론을 이제 보고합니다.
 
288
나는 나를 갖은 수단을 다 ─ 하여 속아 달라고 달려왔을 뿐입니다. 나는 나를 속이지 못하여 고민하였고 울어 왔을 뿐이었어요. 이렇게 함으로써 세상에 아첨하였던 것입니다.
 
289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 나에게 끝까지 행복하고 안일을 바라시는 어머니! 그에게 내 삶을 내 스스로 파악하고 굳세게 살아가며 어느 때나 용감하게 보임으로써 비로소 안심과 만족을 얻도록 할 것이에요. 내가 나를 속이는 괴로움을 지닌 채 일평생 나의 불행을 슬퍼할 것이에요.
 
290
그러면 이 곳에서 내가 취할 바 길이 스스로 밝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취할 바 길! 이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가장 나를 속임없이 가장 아름다운 양심으로 내가 뜻한바 길을 매진하겠다는 것입니다.
 
291
가도 또 가도 내 정성 내 힘을 다 ─ 하여도 얻은 바가 없다면 그것은 나 자체의 본질의 무력함이니 그것을 이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얻는 바가 있든지 없든지 나는 다만 내 생명이 다 ─ 할 때까지 매진할 뿐입니다.
 
292
나의 취할 바 이 길에서 다 ─ 만 일 초간의 한눈도 팔지 않을 것이며 모─ 든 비방이며 유혹의 옆길을 나 관계하지 않으렵니다.
 
293
S!
 
294
내가 나를 속이지 않는, 그리고 아름다운, 그렇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마음으로서 뜻한바 길을 매진한다!
 
295
나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296
그리고 또 한 가지 만일 내가 나를 속이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대한 내 마음도 속이지 못할 것입니다. 속임없이 보고한다면! 나는 당신의 곁에서 나라는 것을 더 한층 완성시키고 싶습니다. 나의 용기와 정열에 북돋움을 받고 싶습니다. 이 마음은 나라는 것을 나 혼자의 힘으로 운전해 갈 수 없는 약자의 말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너무나 오랫동안 환경과의 갈등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약자로서 고민해온 나이기 때문에 바라던 욕망인지도 모릅니다.
 
297
좌우간 나는 당신의 절대적인‘힘’을 ! 아니 그 힘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한 개의 연인으로서 한 개의 남성인 당신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이 생각을 사랑이라고 합니까? 연애라고 하는지요!
 
298
그러나 S!
 
299
나는 누구에게도 당신을! 또는 당신이 나를! 연애한다고! 고 생각 키우기가 분한 듯 합니다. 모욕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이성간의 애욕을 초월하였다고 말하기도 속되는 것 같습니다.
 
300
내 입으로 분명히 말한다면 나는 당신에게‘연애 이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름 짓는지 나는 알지 못하며 알려고 애쓰고도 싶습니다. 다만‘연애 이상’이라고 밖에 아무런 표현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애는 미(美)입니다. 신비스런 미(美)이에요.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그 신비스런 미의 감정을 지나‘힘’이란 느낌을 가진 까닭입니다. 힘은 모 ─ 든 것을 정복하는‘절대’의 미를 가졌어요.
 
301
S!
 
302
그러면 가장 실질적 현실적으로는 나의 이 결론이 어떠한 형식으로 전개될 것인가! 그것은 지금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당신이 가진바 그‘힘’은 어떻게든지 전개시킬 수 있는 것인 까닭입니다. 그럼으로 오 ─ 직 이 섬세한 문제는 당신과 내가 내년 봄 삼월에 다시 만날 그 순간에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03
S!
 
304
그러면 내년 봄 삼월까지 나는 무성한 잎사귀를 한 가지 가득 움트게 할 정열을 아름답게 다듬어 둘까 합니다.
 
 
 

2. 천국(天國)에 가는 편지

 
 
306
(S가 가 있는 곳은 재래(在來)의 천국(天國)이 아니다. 희망(希望)의 녹기(綠旗)를 높이 꽂은 저 ─ 봉우리 위이다)
 
307
 
308
S!
 
309
왜?
 
310
이다지 장난이 심하십니까! 아무리 장난이더라도 거짓말 하는 것은 꽃은 즐기지 않는답니다.
 
311
S!
 
312
오늘은 바로 이월 이십팔 일! 즉, 이월 그믐날이랍니다. 이 하루만 지나면 우리가 기다리던 그 봄 삼월이옵니다. 내일 날부터 시작되는 그 삼월달에 우리에게 훌륭한 그야말로 환희에 넘치는 삶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날이 있는 것입니다.
 
313
그런데, 그런데, 이 장난이 무슨 우스운 장난입니까?
 
314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315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316
당신이 나에게로 오는 날을 어떻게 하고 그 영민한 당신이 어떻게 잘못 되어 길을 헛들으셨는가요!
 
317
나에게 올 길을 어이하여 천국(天國)으로 헛가셨는가요!
 
318
이 어인 일오니까?
 
319
S! 오! S!
 
320
S! 당신이 죽었다! 내가 이 말을 믿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습니까.
 
321
나는 웃어요, 웃습니다. 만일 내가 지금 울었다면……당신
 
322
“넌센스다. 내가 죽을 인간이든가? 그 말을 믿고 울었던가요! 당신은 왜 그리도 어리석을까.”
 
323
하고 조롱할 것만 같아요.
 
324
“신념이 없는 까닭에 아픈 것이에요.”
 
325
라고 나에게 주먹을 쥐여 보이며 말하던 당신이었어요.
 
326
당신이 연구하고 검토하여 얻은바 결론을 서로 보고하자던 그 삼월이 내일부터 시작되려는 오늘! 당신은 나에게 죽음을 알게 하는 그 마음이 무엇입니까.
 
327
당신의 죽음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오니까? 무슨 의미일까요! 대체 나는 해독치 못합니다.
 
328
나는 이 삼월을 위하여 당신의 내린 그 과제(課題)의 해답을 훌륭하게 준비하였답니다.
 
329
첫째 나는 아픔을 정복했어요. 완전히 건강이 회복되었어요. 당신에게 밑지지 않을 건강한 몸과 마음을 준비하였답니다.
 
330
그리고 어머니 그 눈물 많던 어머니의 눈은 이제 한 방울의 흘림도 없이 힘 있게 빛나고 있습니다. 내가 잡은바 굳은 신념! 그것은 바로 어머니에게도 안심이 되었습니다.
 
331
그런데, 그런데, 당신의 죽음은 지금 방방곡곡까지 알려졌습니다. 신문, 잡지, 모조리 뒤져봅니다. 그 정열에 넘치는 당신의 뚜렷한 면영(面影)곁에 검은 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믿지 않으렵니다.
 
332
아니 믿지 않는다는 나의 고집을 당신이 또한 웃을 것 같습니다. 아!아!
 
333
“사실은 이렇게 죽었음을 증명하는 데 왜 믿지 않으려는 것입니까? 사실을 무시하는 거짓을 가집니까.”
 
334
라고 나를 꾸짖을 것 같습니다.
 
335
그러면 나는 당신의 죽음을 믿는 것이 바른 길입니다. 이런 맹랑스런 사실을 생각으로나마 할 수 있는 일입니까?
 
336
S!
 
337
그 굳센 당신이 이제 벌써 한줌의 회색빛 재(灰)로 변하고 말았습니까? 당신의 그‘힘’그 맹렬한 의기는 어디 있습니까? 어디다 두고 당신은 얼마의 석회(石灰)뿐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입니까?
 
338
그 맹렬한 의기! 당신은 어디 다 두었습니까, 지금 어디 있는가요!
 
339
내가 가야 될 길! 단 하나 바른 나의 궤도(軌道)위에 올려 세운 내 기차는 지금 초속력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나의 목적지를 향하여……!
 
340
왜? 당신은 나에게 바로 달려가라고 말하던 당신이 무슨 까닭으로 적신호(赤信號)를 하는 것입니까?
 
341
이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암시함인가요!
 
342
나는 눈물 없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가슴 가득 울음을 안고 갈 바를 잃고 거리로 뛰어 나갔습니다.
 
343
아무리 헤매어도 아무리 걸어가도 다만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희미한 가등(街燈)과 네온 라이트에 처참스럽게 범적거리는 두 줄기 전차 선로뿐이에요.
 
344
나는 찾았습니다. 기어이 찾아 내려 했습니다. 내가 준비하여 두었던 그 보고를! 연구하고 검토하여 얻은 바 그 결론을 말하려던 당신을 찾았습니다.
 
345
가다가, 또 걸어가다가 나는 문득 멈추어 섰습니다. 이윽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섰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346
당신의 죽음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가졌는가를 나는 문득 깨달았던 것이었어요.
 
347
S!
 
348
“가장 유의한 동지가 가석한 죽음을 하였을 때밖에 운 기억이 없다.”
 
349
던 당신의 말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내 방문 굳이 닫고 가슴이 파열될 것 같이 꽉꽉 들어찬 울음을 얌전히 엎드려 소리 없이 서리서리 풀어내었습니다. 그 눈물 속에 내 몸이 잠기었습니다.
 
350
S!
 
351
당신은 태양보다 맹렬한 의기로 살았으며 죽음 역시 사십 오도의 맹렬한 열(熱)로서 마쳤습니다.
 
352
당신의 삶도 간결(簡潔)하였고 삶을 청산함에도 단 하루 동안에 다 ─ 하였다 하오니 당신은 삶과 죽음이 다 ─ 함께 간결하였습니다.
 
353
S!
 
354
‘힘’! 절대의 미! 이것이 당신이었으니, 이 당신에게 죽음을 당한 나이지마는.
 
355
나는 아직 살아야 되는 엄연한 사실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두고 간 그 굳센 의기! 이것만은 당신의 죽음이 앗아가지는 말아주십시오.
 
356
나는 당신의 두고 간 그 맹렬하던 의기의 한 조각을 내 죽는 날까지 놓을 수 없습니다. 나는 힘껏 틀어잡고 내 삶을 지탱해 나갈 것이며 내 가는 길의 운전수를 삼겠습니다.
 
357
그러면 S!
 
358
나는 이제 당신의 죽음을 슬퍼만 하는 끝없는 눈물 속에 잠기어진 내몸을 건져내렵니다. 그리하여 내 가는 바로 궤도 위에다 올려놓으렵니다. 그리고 당신이 두고 간 그 맹렬한 의기의 운전으로 죽음의 경계선에 들어대일 순간까지 쉬지 않고 달려가리다.
 
359
S!
 
360
그 후에 조용히 내 몸에서 삶에 먼지를 활활 털고 공손히 꿇어 엎드려 당신이 두고 갔던 나의 운전수를 도로 받쳐 드립니다.
 
361
S!
 
362
그 날까지 나는 나의 운전수와 단 둘이서 서로 축복하며 서로 보호하오리다.
 
363
오! S!
 
364
당신은 살아서 나에게‘힘’을 가르쳐 주었으며 죽어서 나에게 희망(希望)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365
─《조광》(1939.5).
【원문】혼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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