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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8
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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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동차에 실려 유리창으로 내다보던 저 건너 동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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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분홍빛 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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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다란 푸른 이파리가 물고기처럼 흰 뱃바디를 보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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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살았소 하는 듯이 너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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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여름도 짙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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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내가 이 절에 올 때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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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터를 닦고 재목을 깎던 집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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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기둥이 서고 지붕이 덮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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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을 깔고 용마름을 펴는 일꾼이 밀짚모자를 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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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러지게 잘된 장다리밭 머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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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다린 황라 적삼을 떨쳐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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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지가 빨간 잠자리란 놈이 의젓이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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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머리에 서 있는 싱거운 포풀러 나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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헙수룩한 제 그림자를 동그란히 접어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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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너머 방적회사의 목멘 고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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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온 촌 아기들을 식당으로 부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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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소리개 모양으로 떠돌아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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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차는 제비나 된 듯 내달으며 넘놀아도 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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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녀석들도 꼬리를 오그리고 죽지를 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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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다리가 세로 가로 쓰러져 있는 밭 가운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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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린 듯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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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요새 뙤약볕이란 돌도 녹일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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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꾼한 바람이 진한 거름내를 풍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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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끝을 건드리고 밭 위를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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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떼가 몇 개 안 남은 무색한 보랏빛 꽃수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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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었다 놓고, 놓았다 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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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왕 날개를 울리면서 해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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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나비는 들어가면 눈이 먼다는 독한 가루를 잔뜩 싣고 아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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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를 건드리고 머리를 만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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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잠자리란 녀석은 다시 일지를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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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고 있나, 그렇지 않으면 인제 벌써 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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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채를 손에 든 선머슴아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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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벗어 들고 성큼 발소리를 죽여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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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두 걸음 곧 손이 그 곳에 미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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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저런 망한 녀석들의 심술궂은 눈 좀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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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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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렇게 꼿꼿하고 고운 두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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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빛깔이 기름칠한 것처럼 윤택나는 날씬한 체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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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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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맵기 당추 같은 고추짱아의 마음도 모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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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꽃 진 지가 얼마나 된다고 요만한 뙤약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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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이야, 벌써 ‘호박’처럼 맑던 네 눈도 어두워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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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의 짙은 물결이 들 가득 밀려오고 밀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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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은 어른처럼 말 없이 잠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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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연연한 봄의 고운 배는 벌써 엎어졌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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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 따가운 뙤약볕의 소나기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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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 날개도 두터운 비름 이파리도 다 또 일수 없이 풀이 죽고 말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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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 속에서 낮잠을 자던 게으른 풀숲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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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꾀꼬리가 한 마리 푸드득 나뭇잎을 걷어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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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침묵의 망사를 찢고 하늘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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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고마와라. 얼마나 고마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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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나는 이 조그만 꿈을 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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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을 의지하여 허리를 펴서 뒷산을 보았다.
55
숲 사이에 원추리가 한 떨기 재나 넘은 보름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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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전히 머리를 쳐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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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꼬리가 남긴 노래 곡조의 여음을 듣고 있지 않은가!
 
58
나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어 산비탈을 올라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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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지 말고 시대의 한가운데로 들어오라’는 식물들의 흔드는 손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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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아직도 죽지 않았었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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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추리가 다정스러이 웃는 얼굴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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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깐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숙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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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운 나비와 무성한 식물들의 겨우살이를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64
그 때 나는 아직 살아 있는 행복이 물결처럼 가슴에 복받침을 느끼었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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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화(林和) [저자]
 
  1935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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