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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야 씨나 유진오 씨나는 필자와 탄생 지반이 비슷한 때문에 씨 등의 작품을 비평하는 데는 언뜻 생각하면 퍽 도움이 되고 수월할 것 같으나 정작 손을 대고 보면 오히려 지장이 되고 불편이 되는 점이 적지 않다. 탄생 지반이나 생장(生長)한 문학의 고향이 같거나 비슷하다고 하여도 물론 두 분은 모두 나의 선배다. 그러므로 씨 등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깊고 소상하게 나는 씨 등의 걸어온 길과 걸어가는 길을 주목하여 관찰하고 있다. 새 달의 잡지를 목차만 쭈르르 살펴보다가 씨 등의 이름을 발견할 때에 소설의 제목만 보면 씨등이 무엇을 썼는지는 퍼뜩 생각할 수 있다. 읽어보면 대체로 주제나 제재나가 생각했던 바와 과히 어그러지지 않는다. 작품을 읽어 가다가도 작자가 어느 부분에서 붓방아를 찧고 있었는지 어느 구절을 억지로 넘겨 버렸는지 또는 작자의 창작 심리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내깐으론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씨 등의 작품을 비평함에 도움이 되고 또 장애도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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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문학이 위기에 부딪혔을 때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헤쳐 나가겠는가 하는 것은 한씨나 유씨나 또는 독자나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이런 때를 당하여 유씨나 필자는 오랫동안 소설을 쓰지 못했다. 한씨가 더듬더듬 씨의 세계를 개척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유씨나 필자는 작년 금년으로 겨우 창작의 붓을 듦에 이르렀다. 오늘날에 와서 씨 등이나 필자가 과연 어떠한 방면으로 자기의 문학을 끌고 갔는가, 어느 곳에서 작자의 마음대로 주무르고 요리하고 지배할 수 있는 작품의 세계를 발견하였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은 하나의 비평적인 관제가 될 수 있다. 이 자리에서는 물론 그것을 하고 앉았을 장소도 아니고 또 나 자신의 작품 행동을 함께 읽어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시킬 처소도 아니므로 나에게 맡겨진 두 분의 작품, 하나는 『조광』지에 실린 한씨의 「산촌」또 하나는 『야담』이라는 잡지에 실린 유씨의 「수술」을 가지고 간단하고 일면적이나마 이야기를 벌여 보기로 하겠다. ‘김갑산동’이라는 산촌이 보통 학교 교장 사사끼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사사끼는 내지에서 모범농을 데려다 농사를 개량시킬 요량으로 그 산촌에 사는 소작인에게서 작권(作權)을 이동해 버린다. 사사끼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기술이는 아버지와 동리 사람의 권에 못 견뎌서 교장을 찾아 탄원했으나 교장은 국난타개, 생업보국 등의 표어를 되풀이하면서 종내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작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고장은 시골이라서 농지령이나 작권 이동에 관한 법령 같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부득이 항쟁이 시작되었다. 농민들은 땅에 물고 처지자는 판인데 결과인즉슨 토착작인이 패배했다. 기술은 덕분에 ‘오곡이 무르익는 한여름이 다 지나도록’ 다른 데 가 살다가 다시 세상에 나오니 그가 사랑하는 처녀 복례는 간도론가 어디론가 가 버리고 없고 산촌 ‘김갑산동’은 ‘사사끼동’과 합쳐서 저수지 배수로가 휘황하더라. 이 경개(梗槪)를 보아도 짐작하겠지만 한설야 씨는 6, 7년 전의 방법이나 수법을 거지반 그대로 지니고 작품을 구성하고 사건과 인물을 배설(配設)하였다. 경향 작가로서의 관록이 엿보여 비상히 유쾌하였다. 그러나 유감인 것은 그리고 이 유감인 점이 나에게는 대단 중요한데, 이 「산촌」에 그려진 세계는 결코 작자가 요리하고 지배할 수 있는 세계는 아니었다. 얼마 전에 나는 씨의 「강아지」를 읽었고 연전엔 씨의 장편 「청춘기」를 읽었다. 이것관 「산촌」은 같은 세계는 아니다. 결국 한씨는 아직도 제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 같다. 이것이 작가로서의 진전인지 정체인지는 스스로의 상상에 맡긴다. 하여간 「산촌」에서 기술이와 교장 사사끼를 가운데 두고 구성되고 배치된 사건이나 인물의 픽션의 비진실성, 관념성은 감출 길이 없고 문학어에 대한 씨의 원시적인 생각도 은폐할 수가 없다. 문학어란 근로 대중의 일상어에서 빚어지는 것이지만 그와는 반대의 길 위에서 창조된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상어의 가운데서 불확실한 것, 우연적인 것, 명료치 않은 것을 뽑아 버리고 정선한 것이 문학어다. 이 점에 대하여 한씨의 재고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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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유진오 씨의 「수술」은 그 전에 쓴 「김강사와 T교수」나 「사령장」이나 「간호부장」에서처럼 하나의 작은 단편다운 초점을 명백히 설정하였다. 그러나 씨가 오랫동안 침묵하는 동안에 얼마나 노력을 하였는가를 말해 주는 데 있어서는 장편 「수난의 기록」이나 「어떤 부처」나 한가리조 이 「수술」도 우리에게 실망을 주는 작품이다. 예전의 단편처럼 초점이나 테마는 명료하지만 작자가 노리고 있는 윤리라고도 할 만한 것이 그 전치에 비하여 저하된 것이 사실이 아닌가. 강상의 윤리와 의사의 윤리간에는 명백히 하향선이 그려져 있다. 먼젓달에 「어떤 부처」를 좋은 작품이라 말한 비평가가 있었지만 그건 알지 못하는 말이다. 유진오 씨는 아직 완전히 씨가 빠졌던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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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대훈 씨와 이선희 씨가 만약 『조광』에 쓴 「묘비」와 『야담』지에 쓴 「돌아가는 길」을 통속 소설이라고 의식하면서 썼다면 ‘통속 소설에의 유혹’이라는 표제를 떼치우고 ‘통속 소설에의 과정’이라는 구(句)를 붙여도 무방하다. 필자가 ‘과정’ 대신에 ‘유혹’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두 분을 아끼고 믿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실인즉 이 ‘유혹’이란 말에다 두 분이 모 신문 기자의 직을 갖고 있다는 색다른 뉘앙스까지를 가해 보자는 심사도 없지 아니하다, 라고 하는 것은 신문 기자의 직이란 나의 체험에 의하면 가끔 저널한 심리에 유혹되고 빠지기 쉬운 자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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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본정(本町) 같은 데 산보를 나갔다가 우연히 친구를 만나 어디서 작은 금액을 갖고 몇 시간의 오락을 구하였다고 하자. 생각한 결과 상영 프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상영관엘 들어갔는데 마침 막간인지라 그 동안 문간에서 준 뉴스 조각을 읽기로 하였다. 읽어보니 항용 있는 멜로드라마나 신파 냄새가 나는 비극이었다. 이 뉴스의 상영 영화의 경개(梗槪), 이놈을 잡지로 박아 8페이지[頁[혈]]쯤 되게끔 늘여서 적어 놓은 것이 『야담』지에 실린 이선희 여사의 소설 「돌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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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원체 뉴스의 영화 경개에다 비기게쯤 되었으니 그 곳에 묘사라는게 있을 턱이 없다. 또 시나리오나 콘티뉴이티도 아니고 바로 영화의 경개이고 보니 인물의 성격이라든가 성격의 추구하든가 또는 어떤 성격이 생채(生彩)를 낼 만한 정황의 설정이라든가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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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토막으로 나누어서 갈라놓은 것도, 한 장면 한 장면의 묘사를 입체적으로 구성해 보려는 생각에서 나왔다고는 볼 수 없다. 그 한 토막 한 토막이 설명이나 해설이 아니고 소설 묘사였다면 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가 그대로 구원만은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스토리를 이어나가기 위한 가벼운 설명이고 보니 부득이 통속 소설을 쓰기 위한 각서적 경개(覺書的梗槪) 밖에는 더 안된다. ‘예경’이와 K라는 이가 촌구석으로 찾아왔다는 대목이나 K가 결혼한 뒤에 예경이와 연애했다는 대목이나 또 K의 본처가 촌구석을 찾아드는 대목이나 K와 본처와 예경이 셋이 대면하는 대목이나 그것이 제법 소설이 되자면 좀더 성실한 묘사와 성격의 추구와 심리의 정치(精緻)가 필요하지 않은가. 작자나 독자나 한가지로 중요시하려는 마지막 장면, K와 예경의 상론, 결결하는 대목의 픽션의 유약성과 소설가로서의 책임의 회피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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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운하면서 예경이가 K에게 던지는 수작이 착잡한 현대인의 성 윤리를 잡았다기에는 너무도 엉터리 없지 아니한가. 소설가가 현실을 지나치게 애띠게 보든가 붓장난이 지나치면 신시어리티를 잃는 법이다. 자중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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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함대훈 씨의 「묘비」는 테마가 확연히 서지 않았다. 그리고 작품 구성에 있어서도 방향이 두 개로 갈라졌다. 안나 안드레브나 쿠지모봐라는 러시아 여자와 조선의 노어 학생 이청산이와의 관계가 중심인지 이청산과 그의 아내와의 관계가 중심인지 혹은 세 사람의 관계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주지(主旨)인지 나에겐 명확치 않았다. 하기는 명확치 않게 되기를 기도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기분이나 분위기의 묘출. 그러나 그 기분이나 분위기가 과즉 애상이거나 감상에 지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소설가가 할 짓이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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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전체의 구성이나 장면의 변전은 다분히 통속적이다. 그리고 묘사가 적고 건둥건둥 짧은 대화로 페이지를 넘긴 것 등은 이 소설의 통속성을 증가 시켰다. 이청산이가 안나를 따라서 동경서 하르빈 가기를 작정하는 대목이나 그 때에 안나의 남편의 부고가 온 것이라든가 제4장이 전부 증명된 것과(성격의 창조는 성격과 성격의 갈등이 빚어내는 사건이나 행동의 묘사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지 성격의 설명이란 본시 소설도(小說道)의 가는 길이 아니다) 배경이 화태(華太)로 되면서도 화태다운 풍경이(나) 생활의 묘사가 대단히 희박한 것과 마지막 안나와 이청산과의 대면에서 볼 수 있는 문학주의적 취미(그것은 잘못하면 문청 취미에 떨어지기 쉽다) 결말의 비성실성, 이런 것은 내가 이 작품을 ‘통속 소설에의 유혹’이라고 말하려는 태반의 이유가 된다. 통틀어 말하자면 노어 학생과 그의 아내와 그리고 남편을 여의는 러시아 여자, 이 세 사람의 인물이 벌써 어느 정도까지 이 소렁을 통속 소설 밑으로 끌고가려는 것임을 함씨는 알아야 할 것이다. 함시가 통속 소설에서 씨의 작품을 방어하려면은 이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미성년의 문학 - 김진수(金鎭壽)와 권명수(權明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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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연(劇硏) 당선 작가(불행히 나는 당선작을 읽지 못했다.) 김진수 씨의 희곡 「향연」을 읽고 나서 나는 이 분이 미혼자가 아닌가 하고 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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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우리가 결혼 적령기의 미혼 처녀가 쓴 소논설을 읽을 기회를 얻었다고 가상하자. 그가 만일 남녀 관계 이외에서 재료나 제재나 주제를 취하였다면 모르지만 이여(爾餘)의 세계에 작품을 의탁하였을 경우에, 우리는 그곳에 벌어지는 인가의 생활과 윤리와 연애가 얼그러져서 빚어내는 극적 갈등이라든가 성격 심리의 묘사가 얼마나 밍밍하고도 애띠고도 미성년다운가를 용이하게 맛볼 수가 있을 것이다. 시의 세계와도 달라서 소설이나 극은 잡음이 가장 많이 섞일 수 있고 또 섞여야만 되는 문학적 형식이다. 남녀 관계에 대하여 플라토닉하고 감상적이고 신비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처녀적 상념을 떠나기 전에 소설 문학이나 극문학의 문을 두드려 붓대를 잡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삼가야만 될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혼 처녀들을 미혼 처녀답게 그리는 것은 당연하나 그 미혼 처녀다운 것의 배후에 무엇을 들어 있는가를 꿰뚫어 볼 만한 안광이나 시야가 준비되어 있지 못할 경우에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귀염성 있는’(?) 철부지다운 색조는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센티멘털리즘이나 가벼운 신비적 낭만주의가 문학의 세계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실로 센티멘털이나 낭만 그 자신에 즉하여서도 철저하지 못한 때문이다. 센티멘털이나 신비나 낭만에 철저한 때에는 그것은 그러므로 센티멘털리즘이 되기를 면할 수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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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의 상념이 이러하기 때문에 극은 하나의 갈등도 그럼직한 사건도 갖지못한 채 막을 닫아 내린다. 많은 늙은 처녀(올드미스라는 유행어가 있다)들이 들고 나가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한 극적 필연성을 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네 명의 늙은 처녀들이 작자의 늙은 총각다운 상념 때문에 하나도 성격이 되어 있지 못함은 주목할 만하다. 무대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분이 극의 요소에 대하여 이렇듯 무관심한 것을 보는 것은 하나의 경이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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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조광』지에 「금비녀」를 쓴 권명수 씨는 나의 과문인 탓인지 모르나 어느 신문 잡지의 당선 작가이거나, 어느 중견 대가의 추천 작가이거나 그렇진 않은 듯싶은데 이번까지 이 잡지에 두 번이나 소설이 실렸다고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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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표」와 이번의 「금비녀」의 두 편을 읽은 대로 독후감을 말하자면 곰상스러우나 대단히 작은 작가라고 생각하였다. 신인다운 기백이나 작가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잘고 곰상스럽고 시야가 좁은 작가이다. 언뜻 왕년의 김유정이나 현덕의 세계를 연상케 하나 세태나 풍속의 묘출에 있어 권씨는 훨씬 뒤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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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찌되었건 「금비녀」라는 소설은 신문 사회면적 사실을 주로 심리 분석을 통하여 문학에까지 높이어 보려는 작품이다. 신문 사회면에서는 일단짜리로 가끔 소매치기한테 소지품을 빼앗기고 너무 억울해서 마치 자기가 당한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남의 소지품을 앗으려다가 경찰의 손에 붙들렸다는 ‘좀도적’의 기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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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사, 신문 기자도 흘려 버리기 쉬운 이런 작은 사건을 붙들어서 제 금비녀를 앗기우고 남의 것을 앗기까지의 심리를 곰상스럽게 추구하여 잔소리를 늘어놓은 것이 권씨의 「금비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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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나는 소설가가 쓰리나 소매치기의 하찮은 심리를 분석하고 묘사하여 허구헌날을 보내는 가운데서 어떠한 의의나 만족을 바랄 수 있는가를 묻고 싶다. 현대 작가 그것도 지금과 같은 우리 문학의 현세에 있어서 다른 사업이나 직업을 모두 집어치우고 문학으로 뜻을 세우겠다는 문화 사상인으로서의 신인 작가가 어쩌면 요렇게도 옹졸스러워야만 되는가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오히려 작가가 심리의 추구 그것만으로 시종함이 없이 일단 올라서서 물욕이라든가 소유심이라든가 허영이라든가를 테마로 설정하여 그것의 색다른 뉘앙스를 보여 주려고 하였다면 나는 기분(幾分)이나마 신인다운 기백을 인정하기에 인색치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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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은 문학 청년 냄새가 남아 있어서 그 길다란 세텐스나 뒤엉킨 대화의 혼란이 오히려 뉘앙스를 감쇄하여 인상이 희박하나 구성도 좀더 정리되고 시츄에이션을 준비함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가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시야나 기백의 문제일 것이다.
4. ‘소설성’과 관념의 알력 - 춘원의 전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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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 씨의 장편 소설 「사랑」전편(前篇)이 책으로 되어 박문서관에서 나왓다. 이것을 월평에 넣은 것은 좀 어떨까 했으나 이번 달에 나온 신작이고 전작 장편이므로 그것을 통독한대로 이 곳에 감상의 일단을 적어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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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주제는 ‘끝없이 높은 사랑을 찾아 향상하려는’ 애씀을 그리는데 설정되었다. 춘원에 있어 끝없이 높은 사랑이란 육체적인 것, 다시 말하면 육체적 욕망을 전연 떼어버린 정신적 사모를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육체적 욕망을 전연 떠나는 곳에서 비로소 참된 사랑이 생겨난다는 것은 하나의 공상에 불과하는’ 중인(衆人)의 속된 생각(?) 앞에, 씨의 이른바 진정한 사랑이(?) 어떻게 해서 인간성의 가운데 생겨 있을 수 있는가를 증명하고자 기고(起稿)된 것이다. 이러한 작자의 관념을 얽어 가는 데 하나의 토대가 되어 있는 것은 예의 불교적 인과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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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單)마디로 말하여 이 소설의 사상적 내지 철학적 관점은 육체와 정신에 대한 기계적인 이원 사상과 불교적 인과 법칙인데 미리 실토해 두거니와 이러한 작자의 사상적 관념에 대하여 필자와 같은 청년배나 속인은 매력이나 흥미를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같은 속중이 정신적 매력을 느끼거나 말거나 그런 건 물론 작자의 알 바도 아니고 관여할 바도 아니겠으나, 도대체 범연(泛然)한대로 말하여 현대 철학과 현대 유물론의 세련을 치러 버린 현대인의 교양이나 취미나 또는 윤리에 있어서, 소박한 기계적 이원 사상과 나이브한 인과율의 철학이 과연 어느 모로 어떻게 하여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세기적 이념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역시 하나의 간과치 못할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세계관이 능히 20세기의 정신적 위기를 구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조선이란 땅은 과시 풍류의 고장이기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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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까닭에 내가 춘원의 이 역작에서 느끼는 흥미는 딴 곳에 있었다. 그것은 작자의 이러한 주관이나 철학적 관념이 ‘소설성’과 부딪쳐서 어떠한 알력상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국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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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성’, 알기 쉬운 말로 바꾸어서 말해 보자면, 소설 본래의 정신, 묘사의 정신, 산문 정신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묘사란 본시 분석의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소설성’이란 것을 생각해 보기 위하여 장편 소설(로만)이란 문학적 형식이 시민 사회의 합리적 과학 정신과 함께 신흥하는 상업 시민의 이념으로 비로소 전형화 되었다는 것을 상기함이 필요할 것이다. 이 장편 소설 본래의 정신은 결국 리얼리즘의 정신인데, 이것은 작자의 주관적 관념이나 사상적 방수제를 넘어서 널리 사회의 본질 속으로 꿰뚫어 들어가는 강한 힘을 가진 물건이다. 발자크의 주관적인 왕통파 사상을 그의 리얼리즘이 격파해 버렸다는 것을 사람들이 흔히 들어 온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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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춘원의 상술한 주관이나 사상적 관념과 ‘소설성’이 서로 모순되고 알력하면서 어떻게 「사랑」전편(前篇)을 끌고 나갔는가에 나의 태반의 흥미는 집중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춘원으로부터 시작된 현대 조선 소설의 특수 성격을 고찰해 보는 데도 반드시 고려해야 될 관점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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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을 갖고 소설을 통독하고 난 뒤의 감상은 ‘소설성’, 산문의 정신, 그것은 작자의 관념에 눌리어서 거의 상실되어 버렸다는 느낌이었다. 소설성은 유지되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결론을 갖고 보면 우리의 소설이 현재 당도해 있는 위기가 언제부터 배태되어 온 것인가에 생각이 미쳐서 금후로만의 진로를 찾아보는 데도 하나의 참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소설성의 상실’이라는 결론을 얻기까지의 몇 개의 이유를 이 곳에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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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의 관념이 사랑의 끝없는 상향(上向)의 탐색이라는 의도를 설정하였음에 불구하고 그것이 인간성의 유린을 결과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의 가장 큰 희생자는 일 왈(一曰) 석순옥이고, 이 왈(二曰) 안빈이다. 석순옥이란 본시 작자의 억지로 된 조작의 인물이되, 그에게서 석가에게나 있을 성인적 요소(작자의 명명한 바 아우라몬)를 검출코자 시인 허영과 월미도의 장면을 설정한 것 같은 것은 석순옥의 명예도 아무것도 아니고 동시에 그것은 종교적 명예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성의 유린을 결과하였을 뿐이었다. 다음 안빈 박사 역시 작자의 관념에 의하여 행동과 사유를 완전히 속박당한 인물인데 작자의 누차의 설명과 일종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어찌하여 그렇게 훌륭한 인격자인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소설에 나오는 그런 옹졸스런 행동이나 사유를 갖고는 일세의 사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단 하나 그런대로 소설성의 유지에 끝까지 노력한 인물은 안빈의 아내 옥남이었다. 가장 생채 있는 인물이고 이 여자를 그릴 때마다 작자의 왕년의 묘사 정신이 펀뜻펀뜻 광채를 발하는데 그것이 한 고비를 당할 때마다 인과율의 출동으로 매몰되고 마는 것은 지극히 애석하였다. 지면이 없어 이만하고 마는 씨의 소설을 새삼스러이 ‘원숙’이나 ‘능숙’ 운운으로 평가하는 것은 씨를 존대함이 되진 못할 것을 말하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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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38년 11월 9~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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