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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7
이효석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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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 절
 
 
 

1

 
 
3
“천당에 못갈 바에야 공동변소에라도 버릴까.”
 
4
겹겹으로 싼 그것을 나중에 보에다 수습하고 나서 건은 보배를 보았다.
 
5
“아무렇기로 변소에야 버릴 수 있소.”
 
6
자리에 누운 보배는 무더운 듯이 덮었던 홑이불을 밀치고 가슴을 헤쳤다. 멀쑥한 얼굴에 땀이 이슬같이 맺혔다.
 
7
“그럼 쓰레기통에라도.”
 
8
“왜 하필 쓰레기통예요.”
 
9
“쓰레기통은 쓰레기만 버리는 덴 줄 아우 ─ 그럼 거지가 쓰레기통을 들쳐 낼 필요가 없어지게.”
 
10
건은 농담을 한 셈이었으나 보배는 그것을 받을 기력조차 없는 듯 하였다.
 
11
“개천에나 던질 수밖에.”
 
12
“이왕이면 맑은 물 위에 띄워 주세요.”
 
13
보배는 얼마간 항의하는 듯한 어조로 말 뒤를 재쳤다.
 
14
“─ 땅속에 못 파묻을 바에야 맑은 강 위에나 띄워 주세요.”
 
15
“고기의 밥 안되면 썩어서 흙 되기야 아무데 버린들 일반이 아니요.”
 
16
하고 대꾸를 하려다가 건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17
─ 보배에게서 문득 ‘어머니’를 느낀 까닭이다. 그것이 두 사람의 사랑의 귀찮은 선물일망정 ─ 아직 생명을 이루지 못한 핏덩이에 지나지 못할망정 ─ 몇 달 동안 배를 아프게 한 그것에 대하여 역시 어머니로서의 애정이 흘러 있음을 본 것이다.
 
18
유물론자인 건이지마는 구태여 모처럼의 그의 청을 거역하고 싶지는 않았다.
 
19
“소원대로 하리다.”
 
20
하고 새삼스럽게 운명의 보를 ─ 다음에 보배를 보았다. 눈의 착각으로 보배의 여윈 팔이 실오리같이 가늘어 보였다. 생활과 병에 쪼들려 불과 일년에 풀잎같이 바스러져 버렸다. 눈과 눈썹이 원래 좁은 사이에 주름살이 여러 오리 잡혀졌다.
 
21
단칸의 셋방이 몹시 덥다. 소독용 알코올 냄새에 섞여 휘덥덥한 땀 냄새가 욱신욱신하다. 협착한 뜰 안의 광경이 문에 친 발 속에 아지랑이같이 어른거린다.
 
22
몇 포기의 화초에 개기름같이 찌르르 흘러 있는 여름 햇볕이 눈부시다. 커브를 도는 전차 바퀴소리가 신경을 찢을 듯이 날카롭다.
 
23
“맑은 물에 띄우면 이 더위에 오죽 시원해 할까.”
 
24
보를 들고 일어서려 할 때 보배는 별안간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였다. 또 복통이 온 모양이었다.
 
25
“아이구……”
 
26
입술을 꼭 물었고 이마에는 진땀이 빠지지 돋았다. 눈도 뜨지 못하고 전신은 새우같이 꾸부러졌다.
 
27
“약이나 먹어 보려우.”
 
28
별수없이 건은 매약을 두어 알 보배의 입에 넣어 주고 물을 품겼다. 이불 위로 배를 문질러도 주었다.
 
29
한참 동안이나 신음하다가 보배는 일어나서 뒷문으로 갔다. 뒤가 무거운 것이다.
 
30
연일 연복한 약이 과한 모양이었다. 약이래야 의사에게 의론할 바 못되므로 책에서 얻어들은 대로 위산과 피자기름을 다량으로 연복한 것이었다. 공교롭게 효험이 있어서 목적을 달하였으나 원체 근 다섯 달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모체가 받은 영향이 큰 모양이었다. 몸이 쇠약한 위에 복통이 심하였다. 다른 병이나 더 일으키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지금와서는 건의 유일의 원이었다. 보배는 들어와 다시 요 위에 쓰러졌다.
 
31
“가슴이 아파요.”
 
32
“설상가상으로.”
 
33
“폐마저 상해 버리는 셈인가요. 상할 대로 상하라지요. 어차피 반갑지 않은 인생!”
 
34
“고요히 눕구려.”
 
35
보배의 표정이 얼마간 평온하여진 것을 보고 건은 운명의 보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36
전차에 올랐을 때에 차안의 시선이 일제히 건에게로 쏠렸다. 알코올 냄새의 탓이거니 하고 시침을 떼고 자리에 걸터앉았으나 보 위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쉽사리 흩어지지도 않았다.
 
37
사람들은 이 보의 것을 무엇으로 생각할까.
 
38
가령 맞은편에 앉은 양장한 처녀의 앞에 이것을 갖다가 풀어 보인다면 그의 표정은 어떻게 변할까. 기급을 하고 아우성을 치면서 달아날 것이 아닌가.
 
39
도회란 속속으로 비밀을 감추고 있는 음침한 굴 속이 아닌가 ─.
 
40
다리 위에 섰을 때에 얼마간의 용기가 필요하였다. 사람들이 다리 위를 지나거나 말거나 건은 한 개의 돌멩이를 던지는 셈치고 그것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털썩 하고 물 위에 흐린 음성이 났다. 검은 보는 쉽사리 물속에 젖어버려 다음 순간에는 보의 위치와 모양조차 사라져 버렸다. 슬픔도 두려움도 양심도 죄악의 의식도 ─ 아무 감정도 없었다. 목석같이 무감정한 그의 마음을 건은 도리어 의아하게 여겼다. 발을 돌릴 때에 마음은 한결 시원하였다. 몸이 자유로워진 것 같고 걸음이 가뿐하였다.
 
41
“두서없던 생활에 결말이 났다.”
 
42
보배와의 일년 동안의 생활도 끝났고 수년간의 그의 무위의 생활도 끝났다. 이것을 기회로 새로운 생활로 ─ 한번 벗어났던 운동의 선 위로 ─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바다를 건너간 동무들이 그를 부른지 오래다. 지금에야 네 활개를 펴고 그들의 부름에 응할 수 있는 것이다.
 
43
─ 건이 그것을 버린 지 삼년이 넘었다. 어찌할 수 없는 커다란 시대의 움직임이었다. 그 역 한 시험이라고 생각할 수밖에는 없었다. 많은 동무들이 선 위에서 떨어졌다.
 
44
그 세상에 가 있는 사람 외에는 거개 타락하여 일개의 시민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표변하여 버렸거나 하였다. 그 중에서 양심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어느결엔지 바다를 건너 날쌔게 달아났다. 당시에는 갈 바를 몰라 마음이 설레던 것도 때를 지남을 따라 초조의 속에서도 차차 마음이 가라앉았다. 반년 동안이나 우물쭈물 지나는 동안에 그는 알맞은 사람을 얻어 잡지를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마지막 목적은 아니었으나 그럭저럭 하는 동안에 마음의 안정도 얻고 한편으로 시세도 살피자는 뜻이었다.
 
45
그러나 일년도 지탱하지 못하고 잡지는 실패였다. 끌어댄 친구는 가엾게도 얼마 안되는 자본을 완전히 소탕하여 버렸다. 그마저 없어지니 건은 입에 풀칠할 도리조차 없어 가난과 불안의 구렁 속에서 헤매일 수밖에 없었다. 카페의 여급으로 있는 보배를 알게 되고 가까워진 것은 이런 때였다. 건은 보배를 원하였고 보배는 건을 구하였다. 반드시 연애가 아닌 것도 아니었으나 보배가 건을 구한 것인 그 역 당시 마음의 가난과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6
보배는 그때에 실연의 괴롬과 상처가 아직 온전히 사라지지 않은 중이었다. 학교 시대의 스승이요, 학교를 나와서는 애인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사랑의 유물까지 남긴 뒤 하필 사람이 없어 그의 동창의 동무를 이끌고 달아난 것이었다. 생각하여 보면 한 사람의 불량한 스승이 장기인 음악을 낚시삼아 두 사람의 제자를 교묘하게 차례차례로 낚은 셈이었다.
 
47
학교를 마쳤을 뿐 인생에 미흡한 보배는 기막힌 생각에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48
애인을 후려간 상대자가 그의 친우임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지가지의 소문을 옆 귀로 흘리며 얼마 동안은 괴롭게 몸부림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는 비로소 인생에 눈뜨게 되었다.
 
49
눈물을 씻고 새로 분을 발랐다. 직업에서 직업으로 생활을 쫓는 동안에 가슴의 상처는 완전히는 아물지 않았을망정 옛 애인과 동무에게 대한 태도는 벌써 관대하고 무심한 것이었다. 그것보다도 날마다의 생활의 걱정과 쇠약하여 가는 건강이 의식의 전부를 차지하였다.
 
50
건을 알게 된 것은 이런 때였다. 같은 불여의의 처지가 두 사람을 쉽사리 접근시켰고 감정의 소통이 마음의 문을 서로 열게 하였다. 두 사람은 단칸의 셋방에 만족하였다. 반드시 연애가 아닌 것도 아니었으나, 말하자면 일종의 공동생활이었던 것이다. 건은 일정치 않은 수입을 보배의 것과 합자하였다. 이것도 생활의 한 방편이요 형식이거니 생각하였다. 이러한 형식으로 모인 살림이기 때문에 보배가 옛 애인과의 소생을 유모에게 맡겨 두고 그의 관심과 수입의 일부분이 그리로 들어간다 하여도 건에게는 아랑곳도 없는 노릇이요, 불쾌히 여길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물론 보배 역시 건에게 대하여 그것을 미안히 여기지는 않았다. 건은 이러한 공동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앞을 내다보고 일을 생각하고 열정을 북돋우면 그만이었다. 공동생활은 말하자면 그가 다음 일의 실마리를 찾을 때까지 유숙하고 있으면 족한 일종의 정류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의 애정의 산물이 생겼을 때에도 그것을 길러갈 욕망도 능력도 없는 두 사람은 합의의 결과 그 수단을 써서 그 노릇을 한 것이었다.
 
51
무사히 성사된 것만 다행이었다. 건은 이것으로 보배에게 대한 애정이며 지금까지의 무위의 생활이며를 청산한 셈이었다. 자유로운 몸으로 바다 밖에서 부르는 동무의 소리에 응하여 뛰어갈 수 있는 것이다.
 
 
52
백화점 지하층에 들러 보배의 즐겨하는 음식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53
“보배의 건강만 회복되었으면 시름을 놓으련만.”
 
54
걸음걸음 이런 생각을 하고 오던 터이라 건은 방문을 열었을 때에 놀라고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갈 때에 누웠던 보배는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요 위와 그 옷자락에는 피가 임리하여 있다.
 
55
“웬 피요.”
 
56
몸서리를 치면서 소리를 쳤다.
 
57
“하혈이 이때 멈추지 않었단 말요.”
 
58
“하혈이 아니예요.”
 
59
절망의 목소리였다.
 
60
“그럼 동맥을 끊었단 말이요.”
 
61
대답하는 대신에 보배는 기침을 두어 번 하였다. 입안에 고인 것을 뱉었다. 거품 섞인 피였다.
 
62
“아니 각혈이란 말요.”
 
63
건은 몸을 주물트렸다. 보배는 이어서 입안의 것을 두어 번 그릇에 뱉었다. 가는 핏방울이 옷섶에 뛰었다. 얼굴은 도화빛으로 불그레 상기되었다.
 
64
요동하는 보배의 몸을 눕히고 건은 급스럽게 방을 나갔다. 오랜 후에 그는 면목이 있는 의사를 데리고 왔다. 토혈은 외출혈이 아니라 역시 폐에서 나온 것이었다. 출혈을 멈추게 하는 주사를 피하에 두어 대 놓은 후 정맥에 ‘야토코인’을 놓았다. 입이 무거운 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으나 침착한 표정 그것이 무서운 선고였다.
 
65
‘야토코인’을 오랫동안 맞아야 할 것을 말하고 안정을 시키라는 충고를 남긴 후 참고로 보배의 혈담을 싸가지고 의사는 가버렸다.
 
66
“─ 기어코 올 것이 왔구나.”
 
67
하는 생각에 건은 도리어 엉거주춤하던 마음이 이상하게도 가라앉음을 느꼈다. 일난이 가고 다시 일난이 오는 기구한 운행을 막아낼래야 막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아직 극히 가벼운 증세라는 의사의 말을 빙탁하여 보배를 위로하고 간호에 힘쓸 뿐이었다. 공교롭게도 각혈은 쉽게 그치고 기침도 차차 가라앉고 열도 내리기 시작하였다. 일주일 동안에 정양하니 안색도 회복되고 식욕이 늘었다.
 
68
일주일이 넘었을 때에 보배 다니는 카페에서는 사람이 왔다. 보배는 며칠후부터 다시 나가겠다는 뜻을 품겨서 돌려보냈다.
 
69
“그 몸으로 어떻게 일한단 말요. 다 집어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는 없소.”
 
70
건은 딱하다는 것보다도 보배를 측은히 여겼다.
 
71
“이 주제를 하고 고향엔들 어떻게 돌아가요. 좁은 고장에 소문만 요란히 펴놓고 이제 이 꼴로 헤적헤적 돌아갈 수 있단 말예요.”
 
72
“고향의 체면을 꺼려서 이 무서운 곳에서 죽어야 한단 말요.”
 
73
“………”
 
74
“별수 없소. 하루라도 속히 내려가도록 생각하우. ─ 완전히 회복한 후에 다시 오면 좋지 않소.”
 
75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보배의 어조는 별안간 애달퍼졌다.
 
76
“나를 처치해 놓고 가버리실 작정이지요. 동경 있는 동무에게서 편지 자주 오는 줄 알고 있어요.”
 
77
“내 일이야 내 멋대로 처리하겠거니와 보배의 건강을 걱정하여서 말요. 우리에게 무슨 다른 도리가 있소.”
 
78
“………”
 
79
“날을 보아서 하루 바다에 나갔다 옵시다. 몸이 웬만치 가뿐하여지면 두말 말고 고향으로 가기로 하고.”
 
80
건은 혼자 지껄이고 있는 동안에 문득 보배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고 말을 끊어 버렸다.
 
 
 

2

 
 
82
보배의 기분이 상쾌한 날을 가려 건은 인천으로 해수욕을 떠났다.
 
83
번잡한 곳이니 필연코 그 무슨 귀찮은 것을 만나게 될 듯한 예감도 있는 까닭에 보배는 그다지 마음에 쓰이지 않는 것을 억지로 그의 건강도 시험하여 볼 겸 끌어낸 것이었다.
 
84
거리에서나 차 속에서나 걱정하였던 것보다는 비교적 굳건한 보배의 몸을 건은 기뻐하였다. 오늘이 보배와의 마지막 날이다 라는 은근한 생각이 있기 때문에 이날 보배에게 대한 그의 애정이 평소보다 더한층 두터움을 느꼈다. 보배의 건강을 웬만하다는 것만 증명되면 건으로서는 이 마지막 날에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보배의 한 표정 한 거동이 모두 건의 주의의 과녁이었다. 그의 품속에는 며칠 전 동무에게서 온 급한 편지가 감추어 있는 것이었다.
 
85
여름의 해수욕장은 어지러운 꽃밭이었다. 청춘을 자랑하는 곳이요, 건강을 경쟁하는 곳이었다. 파들파들한 여인의 육체 ─ 그것은 탐나는 과실이요 찬란한 해수욕복 ─ 그것은 무지개의 행렬이었다. 사치한 파라솔 밑에는 하아얀 살결의 파도가 아깝게 피어 있다. 해수욕장에 오는 사람들은 생각컨대 바닷물을 즐기고자 함이 아니라. 청춘을 즐기고자 함 같다. 찬란한 광경이 너무도 눈부신 까닭에 건들은 풀께를 떠나 사람의 그림자 없는 북쪽으로 갔다.
 
86
더위를 견디기 어려워 건은 요 며칠 답답한 방안에서 해수욕복을 입고 지냈으나 바다에 잠겨 보고 바다의 고마움을 짜장 느꼈다. 보배도 해수욕복으로 갈아입으니 치마를 입었을 때의 인상보다는 그다지 몸이 축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허리 . 아래는 역시 여자답게 활짝 펴져서 매력을 감추고 있는 것이었다.
 
87
물속에 잠겼다 모래펄에 나왔다 하는 동안에 건은 언제부터인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물속에서 농탕치고 있는 한 사람의 여자를 보고 있었다.
 
88
명랑한 얼굴 탄력 있는 거동을 살피면서 처녀인가 아닌가를 마음속으로 점치며 은근히 보배와 비교도 하여 보았다. 처녀의 감정은 어려운 노릇이겠으나 확실히 보배보다는 나이의 테두리가 한 고패 젊고 그의 인생도 그만큼 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그 여자는 이쪽을 보고 뛰어오는 것이다.
 
89
“보배! 언니!”
 
90
가까이 달려와서,
 
91
“얼마만요.”
 
92
보배의 손을 쥐었다.
 
93
“옥련이오. 우연히 만나게 되는구려.”
 
94
보배의 이 한마디에 건은 그 여자가 바로 공교롭게도 보배의 이왕의 사랑의 적수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그를 훑어보았다.
 
95
“고생한다는 말을 저쪽에서 잘 듣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렇게까지 사람을 몰라 보시게 되었어요.”
 
96
아무 속심사도 없어 보이는 순진한 목소리였다. 보배는 동하지 않는 침착한 태도였다. 어울리지 않는 듯이 그 어디인지 엿보았다.
 
97
“언제 나왔소.”
 
98
“한 일주일 될까요.”
 
99
“동경 재미는 어떱디까.”
 
100
“재미가 있으면 나왔겠어요.”
 
101
“아주 나왔단 말요.”
 
102
“생각 같애서는 다시 들어갈 것 같지 않아요.”
 
103
옥련은 숨김없이 걱실걱실 대답하였다.
 
104
“음악공부는 집어치었소.”
 
105
“공부고 머고 허송세월하고 놀았어요.”
 
106
“옥련이 나오는 날 난 공회당에서 오래간만에 고명한 독창을 듣게 될 줄 알았더니.”
 
107
농담이 아니었다. 보배는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을 그대로 말했음에 지나지 않았다.
 
108
“작작 놀리세요, 호호호.”
 
109
하아얀 이빨이 신선하게 드러났다. 귀여운 얼굴이었다.
 
110
“도회에 가서 걱정 없이 허송세월하는 것도 좋겠지.”
 
111
“걱정 없이가 무어예요. 이래 보여도 고생 톡톡히 했어요.”
 
112
“무슨 고생. 사랑 고생. 안방 고생.”
 
113
“그야 언니의 고생에 비기면야 고생이랄 것도 없겠지만. ─ 그래도 가령 화수분이 아닌 이상에야 돈이 떨어져 고생한 때 있었고 ─.”
 
114
“사랑에 끌려간 바에야 사랑만 있으면 그만이겠지.”
 
115
“또 조롱이야.”
 
116
옥련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허물이 있는 이상 자연히 겸양의 태도를 지었다. 그러나 보배 자신은 미흡하고 나 어린 동무를 측은히 여기면 여겼지 마음속으로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미묘한 관계에 있는 두 사람으로서는 다따가 만난 자리에 사이가 화목한 편이었고 피차에 말이 많았다.
 
117
“조롱은 무슨 조롱. ─ 고생했다는 얼굴이 전보다 더 푸냥해졌어.”
 
118
보배는 기어코 한마디 더해 붙이고 요번에는 어조를 부드럽게 했다.
 
119
“그래 나오기는 혼자 나왔소.”
 
120
“아니예요. 같이 나왔어요.”
 
121
하고 옥련은 저쪽 모래밭을 턱으로 가리켰다. 보배는 그쪽을 보았다. 건도 그의 시선을 따랐다. 해수욕복을 입은 한 사람의 후리후리한 사나이가 모래를 털면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122
“궐자이구나.”
 
123
알아차린 순간 건은 어깨를 으쓱하였다. 흉측한 벌레나 본듯한 떫은 표정을 하였다. 입에 도는 군침을 모래 위에 뱉었다.
 
124
이때 옥련은 처음으로 건의 존재를 발견한 듯이 그를 돌려다보면서 몸의 자세를 틀고 보배와 건을 나란히 볼 수 있는 위치에 앉았다.
 
125
그러나 보배는 옥련에게 건을 자세히 관찰할 여유를 주지 않고 꾀바르게 또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물론 한편으로는 가까이 걸어오는 사나이 태규 ─ 사랑의 배반자에게 시선을 주고 싶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126
“돌아온 건 무슨 목적이오. ─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냐 말요.”
 
127
“작정이나 웬 있나요. 할 일 없으니까 조촐한 차점이나 하나 열어 볼 생각예요.”
 
128
“돈도 없다면서.”
 
129
“피아노 한 대 남은 것 팔아 버린다나요.”
 
130
“흥, 그것도 좋지.”
 
131
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태규가 와서 앞에 선 것이었다.
 
132
“보배. 오래간만요.”
 
133
몹시 겸연쩍은 태도였다.
 
134
“ ─ 풍편에 소식은 가끔 듣고 있었지만.”
 
135
보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딴 편을 향할 때 그의 인사를 옆 귀로 흘렸다.
 
136
별안간 벌떡 건이 일어서는 눈치였다. 보배는 얼굴을 돌렸을 순간에는 건은 이미 태규의 볼을 보기 좋게 갈긴 뒤였다.
 
137
“벌레 같은 것……무슨 염치로 간실간실 눈앞에 나타나.”
 
138
거의 본능적으로 하려는 것을 건은 다리를 걸어 그 자리에 넘어트렸다.
 
139
“하, 웬 놈야. 무례한 것 ─ 비신사적 ─ ”
 
140
“나는 물론 그 신사 축에 들고 싶지도 않다. 너 같은 것을 용납하여 두는 세상도 무던히는 관대한 셈야. 이 신사! 망할 신사!”
 
141
비슬비슬 일어서는 것을 붙들어서 바닷물까지 끌고 가 다시 딴족을 걸어 쓰러트렸다. 일어설 여유도 안주고 물속에 잠긴 머리를 발로 지긋지긋 밟아 얼굴 째 꺼꾸로 물속에 묻어 버렸다.
 
142
“저이가 왜 저래. 다따가 모르는 사람을 무엇으로 여기고. 무례한 양반. ─ ”
 
143
옥련은 두 주먹을 흔들고 발을 구르면서 어쩔 줄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보배는 무감동한 표정으로 냉정하게 그 광경을 방관할 뿐이었다.
 
144
“신사! 힘의 맛이 어때.”
 
145
물을 켜고 허덕허덕 일어나는 태규를 건은 다시 머리를 밟아 물속에 틀어 박았다.
 
 
146
해변에서 한 걸음 먼저 여관으로 돌아온 건은 혼자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보배의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147
보배와의 마지막 날에 최후의 만찬을 성대히 할 작정으로 건은 깨끗한 여관을 골라 사치한 식탁을 분부한 것이었다.
 
148
하녀가 가져온 두 번째 병의 맥주를 따랐을 때에 보배가 돌아왔다.
 
149
“보배도 한결 몸이 가쁜해졌수.”
 
150
건이 바다 이야기, 요리 이야기를 너저분히 꺼냈다. 아무리 기다려야 낮에 해변에서 겪은 사건은 이야기하지 않는 까닭에 보배 쪽에서 그것을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151
“아까는 무슨 망령예요.”
 
152
“무엇. 나는 벌써 잊어버리고 있었구료.”
 
153
건은 엉뚱하게 딴소리를 하였다.
 
154
“─ 오래간만에 팔이 근질근질해서.”
 
155
“그것으로 마음이 시원하단 말예요.”
 
156
“시원하구 말구. 보배는 시원치 않소.”
 
157
뒤슬뒤슬 웃고 나서 잔을 들었다.
 
158
“초면에 폭력을 쓰는 것은 어떨까요.”
 
159
“나 역 궐자가 그다지 미운 것은 아니었으나 그때의 복잡한 감정은 그 방법으로밖에는 정리할 수 없었던 거요.”
 
160
“원시인의 방법이 아닌가요.”
 
161
“병든 현대에 있어서는 원시인의 방법이 가끔 시원한 경우가 많아.”
 
162
건은 팔을 내저으면서 힘을 자랑하는 듯이 웃었다.
 
163
“오늘 저녁은 특별히 부탁한 요리요. 실컷 먹고 푹 쉬고 내일 돌아갑시다.”
 
164
저녁을 마친 후,
 
165
“내 거리를 한번 휘돌고 들어오리다.”
 
166
하고 건은 자별스럽게 보배를 품안에 안아 보고는 여관을 나갔다. 새삼스러운 그의 거동을 수상히 생각하였다. 아니나다를까, 건은 종시 돌아오지 않았다. 보배는 요 위에서 궁싯거리면서 밤중에 여러 번 눈을 떠보았으나 돌아오는 기척은 없었다. 물론 밤이 훤히 발은 후까지도.
 
 
167
쓸쓸한 하룻밤을 세우고 이튿날 아침 첫차로 보배는 서울로 돌아왔다.
 
168
섭섭한 느낌을 종잡을 수 없었다.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생각하며 마음을 억지로 굳게 가지고 방에 돌아왔을 때에 구석에 늘 놓여 있던 트렁크가 눈에 띠이지 않았다.
 
169
“기어코 혼자 가버렸구나.”
 
170
더한층 쓸쓸한 것은 한쪽 벽에 밤낮으로 걸렸던 건의 잠자리옷이 사라졌음이었다.
 
171
물론 구석에 놓였던 몇 권의 책자도 간 곳이 없고 책상 위 종이조각에는 연필 자취가 어지러웠다.
 
 
172
─ 밤차로 돌아와 부랴부랴 짐을 꾸려 가지고 지금 집을 떠나려고 하는 것이오. 보배를 이별하려면 이 수밖에는 없소. 정거장에서 작별하다가는 자칫하면 눈물을 흘리게 될는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지금에는 급하고 바쁜 생각 뿐이요.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고향으로 내려가시오. 간신히 구한 여비 속에서 이것을 떼어서 놓았소. 주사 값을 치르고 여비를 삼으시오. 품에 지녔던 시계 이것도 보배에게 ─ 주고 가겠소. 나의 앞으로의 생활에는 밤낮의 구별조차 없을 터이니 시게도 필요치 않을 것이오. 시계 보고 틈틈이 생각이나 해주오. 나의 가슴은 지금 열정에 뛰놀고 있소. 나의 행동을 양해하여 주시오. 차시간이 바뻐 이만 쓰겠소. 가서 또 편지할 날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오. 제발 몸 튼튼히 하시오. 건.─
 
173
앞에 놓인 봉투 속에서는 지폐 다섯 장과 끼워 놓은 시계가 나왔다.
 
174
보배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뼈가 찌르르 아팠다. 평소에 무심히 지냈던 애정이 한꺼번에 솟아오르는 듯하였다.
 
175
“언제까지든지 같이 지낼 수 없었는가.”
 
176
가지가지의 기억이 머리 속을 피뜩피뜩 스쳤다. 무뚝뚝은 하였으나 무언지 굵은 애정으로 항상 보배의 마음을 녹여 주었다. 태규와의 기억이 마음속에 남아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건과의 기억이 가슴속에 굵게 굵게 맺히고 있음은 반드시 시간의 거리가 가까운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177
건이 버리고 간 헌옷가지에 얼굴을 묻고 있으려니 어느 때까지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보배는 일어서서 방안을 어정어정 걸었다 뜰에 나갔다 하였으나 쉽사리 마음은 개이지 않았다.
 
 
 

3

 
 
179
이튿날 보배는 오래간만에 다니던 카페를 찾았다. 근무를 계속할 생각으로가 아니라 마지막 작별차로였다.
 
180
교섭을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에 대낮의 카페 안에서 술 마시고 있는 태규를 문득 만나 보배는 주춤하였다. 동무 여급들의 눈도 있고 하여 모르는 체하고 나가려고 하다가 기어코 불리우고 말았다.
 
181
동무들 있는 앞에서 뿌리치고 나가기도 도리어 수상스러워질까 보아 순직하게 의자에 앉아 버렸다.
 
182
“일전에는 실례가 많았소.”
 
183
쌍꺼풀진 눈가에 불그스레한 술기운을 띠운 태규는 보배를 보는 눈망울에 몹시 윤택이 있었다.
 
184
보배는 그 아름다운 눈을 보아서는 안되겠다는 듯이 시선을 피하면서 무엇이 실례인가 하고 그가 말한 ‘실례’의 뜻을 생각하려고 애썼다.
 
185
“다따가 실례라니까 잘 모르겠죠.”
 
186
태규는 보배의 표정을 살펴 가느다란 단장으로 두 손을 받치고 말을 이었다.
 
187
“하기야 모욕을 받은 것은 나니까 실례를 한 것은 보배들 쪽이겠지만 나는 그날 집에 들어가 곰곰이 생각한 결과 역시 실례가 내 쪽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요. ─ 오랫동안 실레가 많았소.”
 
188
두 팔 밑에서 단장이 휘춘휘춘 휘었다.
 
189
“낸들 보배를 근본적으로야 배반했겠소. 다만 그때의 감정에 충실하였던거요. 새로운 감정 그대로 행동하였던 거요. 사람은 생각하면 변새 많은 동물 같소. 원래가 늘 다른 것을 ─ 자유를 원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 아니겠소. 나는 구태여 과거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것도 아니요, 나의 행동의 정당성을 보배에게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요. 원컨대 사람의 자유로운 행동이 그대로 바르게 용납되는 세상이야말로 마지막 이상이 아니겠소. 그런 세상에서는 나의 행동도 응낙될 것이요. 어떻게 말하면 보배에게는 잠꼬대같이 들릴 것이요. 나는 얼토당토않은 이상주의자일는지도 모르오.”
 
190
장황한 태규의 말을 새삼스럽게 들을 필요도 없어 보배는 딴 편만 보고 있기에 그 자리가 심히 괴로웠다.
 
191
“─ 저쪽에 있을 때에도 보배의 소문이 조각조각 들릴 때마다 마음이 아팠고 적어도 늘 걱정만은 하고 있었던 것요.”
 
192
보배는 얼마간 귀찮아서 딴 편을 본 채 동무들과 몇 마디 말을 건네고 있었다. 태규는 단장을 놓고 술잔을 들어 보배에게도 권하였다.
 
193
보배는 물론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 더 권하지도 않고 태규는 그의 잔을 마시고 일어섰다.
 
194
“오래간만에 한 곡조 쳐보고 싶구려.”
 
195
하고 구석에 놓인 피아노 옆에 앉았다.
 
196
귀익은 ‘드리고’의 「세레나데」가 울렸다. 태규는 고개를 들고 창을 노리며 일종의 정서를 가지고 뜯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보배는 몇 해 전 같은 지붕 밑에서 아침 저녁으로 듣던 면면한 그 곡조를 이제는 무심히 옆 귀로 흘리는 것이었다. 웬일인지 문득 일전에 해변에서 옥련이가 피아노를 팔아서 차점 열겠다고 전하던 말이 생각났다. 보배는 이 얼토당토않은 딴 생각에 잠기면서 피아노에 열중하고 있는 몰락한 피아니스트인 옛 애인의 뒷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97
피아노를 마친 후까지도 태규의 얼굴에는 일종의 정서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술도 마시지 않고 여급들과 말도 없이 일어선 채 모자를 쓰고 보배를 재촉하였다.
 
198
“나갑시다. ─ 차마 보배 다니던 술집에 오래 있고 싶지는 않구려.”
 
199
거리에 나왔을 때에 태규는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었다.
 
200
“해야할 몇 마디 말이 있소. 보배의 집까지 간대도 물론 안내함이 없으니 알맞은 차점으로나 가지 않으려우.”
 
201
거리의 한복판에서 실례를 할 수도 없어서 또 하는 수 없이 태규의 뒤를 따라 뒷골목 차점으로 들어갔다.
 
202
“어린것 잘 자라오.”
 
203
의자에 앉자마자 다짜고짜로 이 소리였다.
 
204
“상관할 것 있어요,”
 
205
“그렇게 매정하게 굴 것이야 있소. 나는 이 이상 더 보배에게 귀찮게 굴자는 것이 아니요. 다만 오늘 이 몇 시간만 거역 없이 나의 말과 생각을 존중히 하여 주구려.”
 
206
태규는 차를 이르고 나서,
 
207
“애정문제는 별것으로 하더라도 어린것의 양육에 관하여서야 내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요. 혼자 공연한 수고만 말고 모처럼이니 내 청도 들어달란 말요.”
 
208
“누가 책임을 지랬어요.”
 
209
“내 청이래야 그다지 훌륭하고 넉넉한 것은 못되오마는.”
 
210
하면서 속주머니를 들쳐 한 장의 두툼한 봉투를 보배의 앞에 내놓았다.
 
211
“나중에는 또 다른 도리도 있을는지 모르나 우선 지금에는 이것이 나의 기껏의 정성이니 받아 주시오.”
 
212
차를 가져온 보이가 간 뒤에 태규는 말을 이었다.
 
213
“또 한 가지 청 ─ 이것도 오늘 하루만의 청이니 거절하지 말고 들어주시오.”
 
214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215
“어린것을 한 번만 보여 주시오.”
 
216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보배는 한마디로 잡아떼었다.
 
217
“그럴 것 없어요. ─ 이것도 받을 필요 없고.”
 
218
봉투마저 그의 앞으로 밀쳐 버렸다. 보배의 생각으로는 돈도 받아서는 안되고 어린것도 보여서는 안되었다. 이제 와서 그런 멋대로의 동정과 제의를 하는 것이 보배의 비위에 맞지 않는 것이다. 후회, 동정 ─ 이런 것을 보배는 극도로 미워하고 배척하였다.
 
219
여러 번의 간청에도 보배의 뜻은 종시 굽히지 않았다.
 
220
“만날 필요조차 없는 것을.”
 
221
오늘 태규와 만나게 된 것까지 불쾌히 여기면서 물론 차도 마시지 않고 혼자 차점을 뛰어나와 버렸다. 태규가 행여나 쫓아오지나 않을까 하여 골목을 교묘히 빠져 재게 걸었다.
 
222
며칠 후 보배는 의외의 신문기사를 보고 눈을 둥글게 떴다. 삼단의 굵은 제목이 태규의 사기사건을 보도하였다.
 
223
─ 낭비에 궁한 결과 부동산의 문서를 위조하여 사기를 한 탓으로 검거되었다는 것이었다. ‘몰락한 음악가’이니 ‘약관의 피아니스트’이니 하는 조롱의 문구가 눈에 띠었다. 보배는 그와의 과거에까지 캐어 올라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사기까지 하게 된 형편에 일전에 양육비로 내놓던 돈은 대체 어떻게 하여 변통한 것인가. 받지 않기 다행이었다고 보배는 생각하였다. 아마도 차점인가를 경영하기 위하여 그 노릇까지 한 것 같은데 그러면 대체 옥련은 어떻게 되었을까. 태규를 잃은 옥련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가엾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옥련이 역시 나와 같은 길을 밟게 되지 않을까. ─ 생각하는 보배의 마음은 여러 가지로 궁금하였다.
 
224
“세상이란 헤아릴 수 없이 교묘하게 틀어져 나가는구나.”
 
225
보배는 모르는 결에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었다.
 
 
 

4

 
 
227
몸이 괴로워서 보배는 다음날부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아픈 데는 없었으나 어딘지 없이 몸이 노곤하였다. 주사는 계속하여 맞는 중이었다. 물론 각혈의 증세는 없었으나 다만 전신이 괴로울 뿐의 정도였다.
 
228
이 생각 저 생각에 지쳐 무료히 누워 있으려니 편지가 왔다. 피봉에 이름은 없었으나 건에게서 온 것이었다. 실종 후의 첫 편지였다. 무료하던 차에 ─ 더구나 건을 생각하고 있던 차이므로 보배는 조급하게 내려 읽었다.
 
 
229
─ 보배, 이것이 보배에게 보내는 첫 편지이고, 혹은 마지막 편지 일는지도 모르오. 왜 그러냐 하면 앞으로는 자주 편지 쓸 기회도 없을 듯하니까. 지금 이 편지를 쓰는 곳이 어디인 줄 아오. 지도에도 오르지 않은 대동경 동남쪽 구석에 있는 빈민굴이라면 보배는 놀라겠소. 서울의 방을 무덥다고 여겼으나 이 방에 비기면 오히려 사치한 셈이죠. 단칸방에 사오 인의 동무가 살고 있소. 벽이 떨어지고 다다미가 무지러진 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보배 자신이 상상할 수 있을 것이요. 세상에서 제일 불결하고 누추한 곳을 머리 속에 떠올려 본다면 족할 것이니까 말이요. 그러나 이 불결한 방과는 반대로 마음은 반드시 불행한 것이 아니요. 도리어 한없이 즐겁소. 피가 뛰논다 ─ 고 말하면 어린애 수작같이 들릴는지 모르겠으나 실상 옛날에 느낀 열정을 지금 다시 느끼고 있는 중이요. 날마다 보는 것 ─ 그것은 이 방에 떨어진 벽이 아니고 그 너머의 세상이요. 날마다 생각하는 것, 그것은 반드시 먹고 입는 것에 대한 걱정만이 아니고 날마다 계획하는 것 ─ 그것은 적어도 일상생활에 떠난 앞날에 대한 것이요. 동무들은 아침에 나갔다가 다음날 새벽에 돌아오고, 혹은 며칠씩 안 돌아오는 수도 있소. 피차에 만나면 웃는 법 없고 살림 걱정하는 법 없고 잠자코 무표정한 얼굴로 맡은 일을 볼 뿐이요. 세상 사람들과는 혈족이 다른 감동 없는 무쇠덩이와도 같은 사람들이요. 그러나 그들 속에서 나는 얼마나 친밀한 애정과 굳은 신념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오. 굳게들 믿고 즐겁게 일하여 가는 것이요. 이 이상 우리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적는대야 보배에게는 흥미 없는 일일 것이오. 우리의 혈관 속에 굵게 맺히고 있는 열정만이라도 보배가 알아야 된다면 족하겠소. 내 말만 하다가 문안이 늦었소. 그 동안 건강은 웬만치 회복되었소. 아직도 시골 안 갔으면 제발 속히 내려가오. 만일 후일에 다시 만날 날이 있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보배의 건강이 있은 후의 일이 아니겠소. 내 충고 어기지 마오. 문밖에 돌아오는 동무의 발소리가 나기에 이만 그치겠소. 여기 있는 동무들은 고향에나 동무에게 결코 편지 쓰는 법 없소. 일도 바쁘거니와 그런 마음의 여유를 만들지 않는 것이요. 나는 여기에 온 후로는 서울서 겪은 일을 차차 잊어갈 뿐이요. 이만. 건 ─
 
 
230
편지에는 물론 주소도 번지도 기록되지 않았다. 봉투에 찍힌 일부인에 나타난 ‘후까가와’라는 흐릿한 글자로 보배는 건의 처소를 막연히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읽고 나니 건이 느끼고 있는 열정이라는 것을 아련히나마 느낄 수 있었다. 건의 건강한 육체, 굵은 감정이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나도 몸만 건강하다면 건이 하는 일 속으로 뛰어들어갈 수 있을까 ─ 얼토당토않은 생각도 하여 보았다.
 
231
괴로운 것도 잊어버리고 이모저모 건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반날이 지났다.
 
232
저녁때 의외에도 뜻하지 않은 옥련이 돌연히 찾아왔다.
 
233
“일전에 일러주신 번지를 생각하고 더듬어 왔죠.”
 
234
두 마디째에 옥련은 다짜고짜로 이야기에 들어갔다.
 
235
“신문 보셨어요?”
 
236
“어떻게 된 일이요?”
 
237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방을 빌리고 있었죠. 별안간 습격이예요. ─ 요행히 저는 빠졌지만. ─ 차점이고 무엇이고 다 틀렸어요.”
 
238
“피아노 팔지 않게 됐구려.”
 
239
“세상일이 왜 그리 잘 깨트려져요. ─ 마치 물거품 모양으로. ─ 언니,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240
소녀다운 형용이었으나 실감이 흘렀다.
 
241
보배는 결국 너도 나와 같은 운명을 밟게 되었구나 생각하며 미흡한 동무의 미래가 측은하게 내다보이는 것 같았다.
 
242
그가 간 후에 보배는 울울한 마음에 건의 일이 다시 생각났다. 별일이 없으면서도 또 한번 읽고 싶은 생각이 나서 건의 편지를 다시 펴들었다.
 
 
243
❋ 중앙 193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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