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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의 여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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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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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향의 여름
 
 
 

1

 
3
내가 평양서 여름방학을 하고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 옆에 있는 채소밭으로 나가 보았다. 한쪽에는 오이넝쿨이 이리저리 뻗어서 손바닥같이 넓은 잎사귀가 너울너울 움직인다. 그 잎사귀에는 진주알같은 이슬이 대글대글 달려있다. 들앞 느티나무 아래서는 레그혼 닭이 날개를 치며 울고있다. 이웃집 박서방 집에서는 ‘엄매’하는 송아지 소리까지 들렸다.
 
4
“한가한 산촌이군!”
 
5
나는 복잡하던 평양시가를 생각하며 매우 마음이 유쾌하였다. 또 닭이 날개를 치며 목을 늘이고 기운껏 운다.
 
6
“내가 봄에 학교에 갈 때에 겨우 깨운놈이 벌써 저렇게 커서 날개를 치며 울고!”
 
7
나는 매우 신기하여 그 놈을 한창 바라보다가 다시 오이넝쿨을 둘러 보았다. 팔뚝 같은 오이가 주렁주렁 달려서 마치 대지를 베개하고 아침 꿈을 아직도 깨지 않은것 같았다. 나는 탐스럽고 만족한 마음에 그 오이들을 만져 보다가 다시 저쪽 감자밭으로 갔다. 파란 넝쿨이 어린애 더벅머리 같이 엉키어 땅이 잘보이지 않았다. 나는 넝쿨을 제치고 감자알을 손가락으로 파보았다. 주먹같은 감자들이 파면 팔 수록 데굴데굴 굴러나왔다.
 
8
“이런 신통하고 기쁜일이 어디 있는가?”
 
9
내가 평양으로 가기전에 이 감자들은 내가 손수 심은 것이었다. 바지를 걷고 저고리를 벗어 제치고 손수 괭이를 들고 머슴과 어머니와 나와 이렇게 셋이서 반나절 동안이나 감자를 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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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좀 쉬렴!”
 
11
어머니가 약골로 할딱할딱하는 나를 보시고 조금 애처로워서 이렇게 말씀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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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일도 해보니까 재미가 나는걸요! 뭐 고까짓것하고 쉬긴 뭘 쉬어요?”
 
13
“애가 강단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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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귀여워서 나를 보시고 빙긋이 웃으셨다. 이렇게 셋이서 봄철에 심은 감자가 벌써 주먹같이 크게 열렸다는 것은 매우 유쾌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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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신통한 일이 어디 있나. 불과 석달 동안에 이렇게 컷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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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무슨 기적이나 발견한 듯이 서늘한 만족을 느꼈다. 감자를 원래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먹는것 보다 캐는 재미가 더 좋았다. 나는 주섬주섬 감자를 한 웅큼이나 캐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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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길(炳吉)아! 너 뭣하니? 감자는 그만 캐! 더 크거던 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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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밭으로 나오시며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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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이, 캐는 재미가 퍽 좋아요. 벌써 이렇게 주먹같이 컸어요.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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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벌써 꽤 컸구나 주먹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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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거 삶아 줘요. 어머니 설탕도 사왔으니… 네”
 
22
내가 이렇게 어리광을 피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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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라 원 먹지두 잘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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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다시 집에서 소쿠리를 갔다가 그 감자를 담아가지고 들어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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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사이에 뜰앞에 있는 개천으로 내려갔다. 감자를 캐느라고 눈섭 같이 검어진 손을 깨끗이 씻고 다시 얼굴을 씻고 시내옆 돌무덤에 앉았다. 시내에는 조그만 송사리들이 꼬리를 치며 왔다갔다하고 꾸구리, 갈메리, 가재들이 한가하게 논다. 시내 저쪽에는 내가 어려서부터 보던 버드나무가지만 숫처녀의 머리카락같이 길길이 늘어진 몇 천 오라기의 버들가지가 물에 닿을락 말락하게 덮여있다. 그리고 좌우에는 우리동네의 유명한 느티나무들이 열을 지어 서있다. 그 무성한 잎사귀가 하늘을 가리우고 그 사이로 조금씩 비쳐내리는 아침햇빛이 금실오라기같이 물위에 흘러간다. 매미가 몇 마리 울더니 그만 그치고 조금후에 까치란 놈이 와서 깍깍하고 울고있다. 다시 저쪽에는 꾀꼬리가 흘러가는 물소리같이 꾀꼴꾀꼴하고 울고있다. 건너 마을 정서방집 당나귀가 하품하듯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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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반을 먹고 뒷산으로 걸어 올라갔다. 멍석을 느티나무 아래 펴놓고 조용히 앉았다. 황해도 중에도 제일 두메요, 그중에도 제일 산촌인 이곳은 실로 동화(童話)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 산국(山國)이다. 무성한 느티나무가 백여그루 널려있고 그 아래 풀들이 드문드문 깔려있는 이곳은 실로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오백년이나 묵었다는 네 아름이나 되는 크나큰 노각 느티나무는 이 동네 사람들이 신목(神木)이라하여 제사를 드리고, 밤이면 여기서 도깨비가 방망이질을 한다고하여 애들은 무서워 곁에도 가지 못하던 곳이다. 천가지 만가지로 벌어진 나뭇가지는 푸른잎으로 하늘을 가리고, 그 아래는 언제든지 서늘한 바람이 슬슬 불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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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리에 앉아 그 나무를 쳐다보니까 노란 다람쥐 한마리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아 다니며 재주를 부리고 있다. 나는 일어서서 이놈하고 돌멩이를 던졌더니 다람쥐는 윗가지로 도망해버리고 보이지도 않는다. 이때 어머니가 송두리째 삶은 감자를 담아 가지고 올라 오셨다. 이 더위에 무명적삼과 무명치마를 입으시고 손으로 땀을 씻으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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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길아 어서 먹어라. 여긴 서늘하구나.”
 
30
하고 기쁜듯이 나를 바라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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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베적삼이나 하나 해 입으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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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돈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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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베적삼 하나 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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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철없는 소리 좀봐. 난 일년을 가도 내 몸을 위해서는 돈 일전도 안 쓴다. 그래도 네 학비를 대기에 죽을 지경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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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돈은 써야 돈이 생긴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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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소리 그만둬! 굳은 땅에 물이 고이지? 그리고 내야 돈을 쓰면 뭣 하니? 한푼이라도 모아서 너를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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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든지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지마는, 이 더위에도 베적삼 하나 안 해입고 무명적삼을 입고 여름을 버티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 심성에 더욱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젊어서 과부가 되어 나 하나를 위하여 반생을 늙으신 터이라 젊어서는 잡화행상을 하며 다소 돈을 모으시고, 지금은 사람을 두고 농사를 하시는데 가끔 호미를 들고 들에 까지 나가시는 것을 생각하면, 그 열성과 성의에 어린마음에도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38
“서늘한데 누워서 책이나 보렴!”
 
39
“네! 아주 시원해요!”
 
40
어머니가 내려가신 후에 나는 누워서 앞산을 바라보았다. 앞산에는 작은산 중간산을 넘어 크고 험상한 ‘돗바위’라는 큰 석산(石山)이 하늘가에 줄을 치고 또 서쪽에도 남쪽에도 첩첩이 산으로 두르고, 산으로 성을 쌓았다. 장연 신화리(長淵新花里) 그 중에도 돗바위골(帆石洞[범석동])이라는 이곳은 산 나라요, 물 나라요, 돌 나라다. 나는 이 곳에서 나고 또한 이곳에서 열 여섯 살까지 자랐다. 동리 가운데는 꽤 큰 들이 있고 그 들에는 밭이 널려있다. 또한 골짜기 골짜기마다 농사해 먹을만한 밭들이 많이 널려있다. 이곳은 우리 정가(鄭氏)가 몇십대를 두고 살아오는 산중왕국이었다.
 
41
나는 자리에 누워 영어책을 꺼내가지고 몇줄 읽느라니까 지난번 내가 평양으로 공부갈 때에 동구밖까지 나와서 손짓을 하던 이쁜이가, 어느덧 저편에서 가만가만 이쪽을 바라보며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무의식적으로 반쯤 일어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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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이 오래간만이군. 재미 좋아!”
 
43
하고 약간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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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러 갔다더니 언제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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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이는 이렇게 반말을 걸며 내곁에 와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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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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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좋은 구경 다했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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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 많이 했지. 기차도 타고, 기선도 타고, 비행기도 보고 전차 전등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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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요. 난 이름도 모르겠네. 전등이란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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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로 불을 켜는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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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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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번개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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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번개로 어떻게 불을 켜? 원,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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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뿐인가 비행기 타고 하늘에도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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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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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여간 발달 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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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깐 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희끄무레하고 통통한 얼굴, 함박꽃같이 탐스런 이마, 게다가 명주수건을 푹 내려쓰고 분하나 바르지 않은 얼굴이지만 풍만하고 시원한 표정이 그리 밉지 않았다.
 
58
이쁜이는 나와 어려서부터 한 마을에서 자랐고 또한 내가 이곳에서 십리나 되는 ‘새몰’이란 동리에 있는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또한 나를 좋아하였다. 지난 겨울에 이 동리 야학교에서 내가 몇 달 언문을 가르칠때 이쁜이는 매일밤 왔었고, 늘 나를 바라보고는 웃기도 하고 또한 가끔씩 얼굴을 붉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가 평양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봇짐을 지고 이 동리를 떠날 때에 그는 동구밖 멀리까지 나와서 손짓을 하며 이상하게 굴던 그를 보아도 그리 밉지는 않으나, 도회에서 쏙 빠진 여학생들을 눈에 싫도록 본 나는 그가 그리 신통치는 않았고 또한 나의 정열을 끓어 올릴만한 상대자가 되기에는 그 거리가 너무 멀었다.
 
59
그러나 그 순진하고 살찐 송아지같은 이쁜이를 볼때, 더구나 열 일곱살을 겨우 맞이하는 이쁜이의 붉은 웃음을 볼때에는 다소간 마음이 설레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60
“그래 여름동안 뭐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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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놀았지. 양잠을 하느라고 늘 뽕이나 따러 다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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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았구만. 속담에 뽕도 따고 님도 딴다고…… 호호”
 
63
“원, 사람 평양갔다 오더니 버렸어……”
 
64
이쁜이는 손으로 내 등을 한번 때리는 척하며 얼굴을 붉혔으나 성을 내지는 않았다.
 
65
“그럼 뽕만 땄어?”
 
66
“그럼 뽕만 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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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이쁜 새악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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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까시유?”
 
69
“이쁜이라 이쁘니까 그러지!”
 
70
두사람은 피차 얼굴을 붉히며 호호 웃었다.
 
 
 

3

 
72
이쁜이도 자기집으로 내려가고 나도 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은 후 들 구경을 나갔다. 이 동리에서 십여리 올라가면 중산막(中山幕)이라는 벌이 있으니 거기에 우리 조밭이 네자리나 있다. 이곳은 조밭이라면 세벌, 네벌씩 김을 매는 것이다. 오늘이 우리밭 네벌 김매는 날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점심을 잡수시고 먼저 나가셨다. 나는 밀짚모자를 쓰고 손부채를 건들건들 부치면서 중산막을 찾아갔다. 찌는 듯한 더위였다. 산모퉁이를 돌아 작은 시내를 건너니 거기에는 우리 조밭이 파랗게 펼쳐 있었다. 아직 이삭은 피지 않았으나 그 씩씩하고 굵직굵직한 조나무가 매우 보기 좋았다. 나는 조밭머리 느티나무 아래 한가히 앉아서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김꾼들은 한복판에서 김을 매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나무가 반길이나 들어섰기 때문에 옆에서 김을 매도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73
얼마후에 김꾼들은 쉴참이 되어서 밭 머리로 걸어나왔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주먹으로 씻으면서 나를 보고 인사를 하더니
 
74
“에─죽겠다. 더워!”
 
75
“이놈의 일을 늙어 죽도록 해야겠으니……”
 
76
“늙어 죽는 것은 고사하고 이렇게 고생을 하고 지랄을 해도 배나 부르면 좋겠지만 먹을 것 조차 없으니……”
 
77
김꾼들은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호미를 집어던지고
 
78
“제기랄 이놈의 호미는 저승에서부터 내게 붙어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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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 오늘 그만 죽어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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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김꾼으로 이름이 있는 박서방은 호미를 내어 던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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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다. 난 오늘 죽는다 죽는다……”
 
82
하더니 눈을 치켜뜨고 입을 실룩거리며 죽는 시늉을 하고 밭머리에서 한참 뛰며 연극을 하였다.
 
83
“호호호 정말 죽으시려나……”
 
84
“아저씨 제발 참으세요. 죽으시면 안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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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 정말 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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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 못 죽어도 내아들이다”
 
87
이렇게 김꾼들은 손뼉을 치며 웃어댄다. 박서방은 그만 숨이 차서 땅바닥에 앉으며
 
88
“너무 속이 상하니까 이따금 이런 연극을 해야지”
 
89
“아저씨 또 좀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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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 죽는다고 해서 못 죽는 놈은 개똥만도 못 하다!”
 
91
그들은 또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느티나무 아래 이리저리 쓰러져 눕는다.
 
92
서늘한 바람이 부드러운 발자욱으로 그들의 가슴을 밟고 지나간다. 유난히 높은 하늘은 쪽빛으로 물들이고 눈덩이 같은 몇 점 구름이 보기좋게 피어오른다. 어느덧 김꾼들은 코를 드르릉 드르릉 하며 잠이 들었다. 개미란 놈이 김꾼들의 코위로 오줌을 싸며 기어 넘어간다.
 
93
나는 보리밭 주위를 한바퀴 빙 돌며 학교에서 배운 동물학을 생각하고 메뚜기와 벌레와 잠자리등 동물채집을 하기 시작하였다. 길다란 뚝엔 메뚜기, 새빨간 얼룩메뚜기 그리고 길다란 잠벌레와 커다란 범잠자리등 이상한 놈을 많이 잡았다. 그리고 개천을 끼고 집으로 오면서 이상한 물새도 많이 보았다. 이런 곳에서 이쁜이나 만났으면 하고 생각하였으나 이쁜이는 보이지 않았다.
 
 
 

4

 
95
그 다음날 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낚시질을 가게 되었다. 동네에서 남쪽으로 팔구정 내려가면 청류대(淸流臺)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층암(層岩)으로 펼쳐있어서 아주 괴암이었다. 그곳에는 큰 시냇물이 둘레를 치며 흘러간다. 조그만 웅덩이가 진 곳에는 바위들이 있고, 그 아래에는 손바닥 같은 돌천어(石川魚[석천어])들이 시글시글 몰려다닌다. 침앙버드나무 아래서 낚시를 드려놓고 있으면 이놈들이 몰려와서 낚시를 물다가 그만 나의 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맞은 편에는 돗바위(帆石[범석])라는 기괴한 암석이 솟아있어서 마치 배의돗대 모양같은 풍경을 이루고 있다.
 
96
나는 아침부터 낚시질하기에 그만 재미를 꽉 붙였다. 돌천어, 중태, 메역기, 꾸굴이 등을 한 망태기나 잡아 가지고 저녁때에야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동리 어구에 왔을때에 이쁜이가 바구니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온다. 나는 약간 가슴이 설레는 것을 꾹 참고 천연스런 태도로
 
97
“어디가니? 저녁때……”
 
98
“뽕을 좀 따려고……”
 
99
이쁜이도 어쩐지 얼굴이 좀 붉어진다.
 
100
“나도 가서 뽕을 좀 따줄까?”
 
101
나는 좀 싱거운 소리를 하였으나
 
102
“정말! 그러면 고맙게……”
 
103
이쁜이는 매우 기뻐하는 눈치였다.
 
104
“그렇지만 남들이 흉보지 않을까?”
 
105
“뭐 뽕따는데 누가 뭐래? 흉보면 말지”
 
106
이쁜이의 태도는 매우 활발하고 강경하였다.
 
107
“그럼 나도 따라가서 같이 뽕을 딸께”
 
108
나는 이쁜이의 뒤를 따라 나섰다. 고기 망태기를 들고 그를 따라가는 것이 어쩐지 좀 싱거워 보였다. 그러나 싫지는 않았다. 이쁜이의 그 삼단같은 머리와 통통한 발이 매우 예뻐 보였다. 우리는 평양 이야기, 기차 이야기, 비행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들뽕을 많이 땄다. 그리고 공연히 피차 얼굴을 쳐다 보고는 어색한 듯이 빙그레 웃었다. 해가 지려고 할 때에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동구밖에 있는 들살구 나무아래서 나는 발길을 멈추게 되었다. 나는 나무꼭대기를 쳐다보며
 
109
“아직두 저 끝에 살구가 있네”
 
110
하고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111
“우리 올라가 딸까?”
 
112
“이쁜이는 나무에 오를 줄 알아?”
 
113
“그럼 뭐 그까짓 나무엘 못 올라가?”
 
114
이쁜이는 뽕바구니를 숲속에 놓고 먼저 나무로 기어 올라갔다. 나도 뒤를 따라서 기어 올라갔다. 그 뚱뚱한 이쁜이가 다람쥐같이 나무엘 잘 올랐다. 그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살구 몇 개를 땄다. 나도 따라 올라가니까
 
115
“먹어 봐”
 
116
하고 한개를 주었다. 나는 받아서 씹어 보았으나 시고 떫어서 맛이 없었다.
 
117
“에그 시어……”
 
118
하고 나는 땅으로 내던졌다. 그러나 이쁜이는 그래도 그 살구를 먹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나무에 붙어 있었다. 나는 다시 기어 올라가 이쁜이와 함께 큰 가지에 걸터 앉았다. 나는 공연히 가슴이 설레었다. 이쁜이는 아무 말없이 살구잎만 따서 땅으로 던지고 있었다. 얼마후에 이쁜이는 몸이 뒤뚱거리며 땅으로 떨어지려 했다. 그순간에 그는 나를 부여 잡았다. 나는 그를 부여 안았다. 추락의 무서움이 지나간뒤에 이쁜이는 내개서 몸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살찐 암소같은 포근한 그의 몸을 놓아 줄 수 없었다.
 
119
나는 더 한층 그의 몸을 껴안았다. 연든감 같이 보드랍고 달콤한 포옹의 마취. 통통한 가슴의 포근한 탄력(彈力)! 나는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눈에 불이 화끈 화끈 달았다. 이쁜이는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나의 입은 어느덧 이쁜이의 입을 점령하고 말았다. 살구나무에는 저녁빛이 피빛처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언제까지나 이쁜이를 안은 채로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다. 어여쁜 한쌍의 새! 해가 지고 서늘한 저녁빛이 넓은 장막을 가지고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쁜이를 놓아주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흰얼굴이 앵두빛같이 벌개졌다. 그는 아직도 얼굴을 들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120
건너마을 오서방이 소를 끌고 저편으로 올라온다. 나는 갑자기 싱거운 생각이나서 가만히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어 불을 그었다. 바로 소가 살구나무 아래를 지날때에 잘 조준(照準)을 하여 가지고, 그 불타는 성냥을 소잔등에 떨어 뜨렸다. 그 성냥은 잘 적중(的中)이 되었다. 불이 떨어지자 가던 소털에 불이 붙었다. 소는 뜨거움을 참기 어려워
 
121
“앙!”
 
122
하고 소리를 치더니 네 굽을 들고 내달았다.
 
123
“이 지랄할 놈의 소 왜 야단이야!”
 
124
하고 오서방은 고삐를 쥔채로 번개같이 따라간다. 나는 참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쁜이도 이바람에 호호하고 배를 쥐며 웃었다. 나는 이쁜이의 손목을 잡고
 
125
“집으로 가 응!”
 
126
하고 잡아당겼다. 둘은 나무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5

 
128
며칠이 지났다. 나는 저녁을 먹고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았다. 머슴이 관솔불을 켜놓았다. 그리고 모닥불이 번쩍번쩍 타고 있었다. 서늘한 여름 저녁이었다. 이웃집 박서방이 오고 복녀의 어머니와 만돌의 아주머니도 왔다. 어머니는 삶은 옥수수를 가져다가 그들에게 한개씩 주며 먹으라고 권하였다. 모닥불에서 옥수수를 먹으며 그들은 지난번 어느밤에 건너 마을에 호랑이가 왔었단 말과 정서방네 강아지를 늑대가 물어갔다고 이야기 하였다. 저쪽 느티나무 그늘에는 반디불이 반짝반짝하며 숲 옆에서 불을 켜고 있었다. 뒷간 지붕 위에는 하얀 박꽃이 소복한 처녀와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129
나는 마당 한편에서 반딧불을 보고 있었다. 우리집 삽살이가 콩콩하고 짖었다. 이쁜이가 가만가만 걸어온다. 그는 우리 어머니와 여러사람들께 인사하고 내 곁에 와서 앉았다. 하얀 모시적삼과 검은 치마 ─ 밤이라도 그는 여간 단장을 한 모양이었다. 이쁜이는 맥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130
느티나무위에는 별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저쪽 채소밭 울타리에는 또 반딧불 한 마리가 반짝반짝하며 몰래 걸어오는 사람의 밀행자(密行者)와 같이 조심스럽게 날고 있었다. 이쁜이는 토끼같이 그곳으로 뛰어갔다.
 
131
“반디 반디 반딧불 여기에 불을 달라”
 
132
하며 그는 달아나는 반딧불을 찾아갔다. 그는 마침내 반딧불을 잡아가지고 다시 울타리에서 호박꽃을 따서 그 속에 집어넣었다. 조그만 황금초롱이 되었다. 이쁜이는 또 반딧불을 잡아서 호박꽃 속에 집어 넣었다. 호박꽃 초롱을 그는 이렇게 세개를 만들어 가지고 혼자 풀밭에서 걷고 있었다. 나도 그 곳으로 뛰어갔다. 이쁜이는 반딧불을 내게 하나 주었다. 둘이서 검은 밤을 끼고 캄캄한 길을 말 없이 걷고 있었다. 반딧불이 또 한 마리 날아왔다. 나는 반딧불을 잡아 이쁜이에게 주며
 
133
“색씨 눈 같애”
 
134
하였다.
 
135
“애개! 뭐? 그까짓 반딧불이……”
 
136
이쁜이는 어느덧 내 팔을 잡았다. 나도 어느덧 그를 안아주었다.
 
137
“병길씨! 나도 가을에 따라서 평양엘 갈테야!”
 
138
“안돼!”
 
139
“난 병길씨 보고싶어 어떻게 혼자있어……”
 
140
“그래두……”
 
141
“아니 꼭 따라갈테야!”
 
142
이쁜이는 내 허리를 꼭 안으며 어리광을 하였다. 어디서 쑥쑥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편에서는
 
143
“병길아, 참외 먹어……”
 
144
하는 어머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무숲속에서는 흘러가는 물소리가 유난이 서늘하게 들리고. 우리는 다시 어머니가 부르는 곳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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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향의 여름 [제목]
 
  노자영(盧子泳) [저자]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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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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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의 여름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11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