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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극동선수(極東選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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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2~3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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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늙은 極東選手[극동선수]
 
2
─ 「歷史[역사]」 第二話[제이화]
 
 
 

1

 
 
4
날씨는 어젯밤보다도 더 추워졌으나 바람은 불지 않았다.
 
5
울 밖의 밭 가운데 섰는 전신주를 타고 들로 건너간 전신선이 바람에 부딪쳐 쩡 차갑게 우는 소리도, 그래서 오늘 밤은 들리지 않고 밤만 죽은 듯 괴괴하다.
 
6
불은 여전히 깡통으로 만든 대추씨만한 석유등잔불이고.
 
7
그 알량한 불을 한가운데 놓고 오늘 저녁에도 세 조손(祖孫)은 각기 일감을 가지고 둘러앉았다.
 
8
할머니(총기 좋은 할머니)는 아랫목으로 벽에 기대어 벗은 두 발을 포개 뻗고 앉아서 오늘 저녁은 버선을 깁는 것이 아니라 정다산(丁茶山)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읽고 있다.
 
9
손자며느리 정옥은 커다란 남자 저고리에다 솜을 하마 이불만큼 두껍게 두고 있다.
 
10
열네살박이 막내손자 대희는 어제 저녁처럼 등잔불 한옆으로 배를 깔고 엎드려 공부를 하고 있고.
 
11
손자며느리 정옥의 소생인 증손자 종수, 상수 두 놈은 역시 어제 저녁처럼 여기저기 제멋대로 나가떨어져 한잠이 들었고.
 
12
한동안 잠심하여 책을 읽고 있던 할머니가 별안간 호호, 이빨 하나도 없는 잇념으로 혼자 웃으면서 책 든 손을 내린다.
 
13
“무어유, 할머니!”
 
14
대희가 고개를 들고 저도 건성으로 웃으면서 묻는다.
 
15
“옛날 어떤 관인(官人)이, 아마 어느 고을 원님였던 게지. 도독놈을 하나 붙잡어다 문초를 했드란다……”
 
16
그러면서 할머니는 책을 도로 들고는 알아듣기 쉬운 말로 새겨가며 이야기를 한다.
 
17
“문초를 하는데, 아 도독놈이 허허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대들야말루 진짜 대적이 아니뇨. 유학을 ─ 공맹의 도를 강론하고 고금을 상고하며 하늘과 인사(人事)를 밝히면서 나라를 경제할 줄을 모르고, 백성을 혜택할 생각을 아니하고, 낮이나 밤이나 권문(權門) 귀가(貴家)에 매달려 악한 재물을 움킬 것만 유념을 하는구나. 사부(師父)의 가르치는 바도, 붕우에게 배우는 바도 오직 도적질하기로다. 높은 자리에 거만을 빼고 앉아 그 존엄(尊嚴)은 상제(上帝)와도 같으다, 벼슬은 돈에 매매되고, 정사(政事 : 政治[정치])는 뇌물로 좌우가 되는구나. 백주에 살인을 하고도 우무쭈물 면하는 세상이요, 황금이 권세 있어 백일(白日)이 빛이 없고, 양양히 팔을 저으며 마을로 나다니는도다. 누항(陋巷)의 천민(賤民 : 庶民[서민])은 억울히 벌을 받고 빈곤에 울며, 머리터럭을 뽑히고 껍질을 벗기우며, 집은 망하고 처자는 흩어지며, 물에도 산에도 몸둘 곳이 없구나. 신령은 노하고 사람은 원망을 하건만 전신(錢神)은 하늘에 통하여 벼슬(官爵)은 크게 떨치고 영화를 끝없이 누리고 있는도다. 그대들이야말로 진정 천하의 대적이 아니뇨. 고작 남의 한푼 돈을 훔쳤다 하여 곧 도적의 이름을 씌우나 그대들은 높은 자리에 팔짱을 끼고 앉아 만금(萬金)을 도적하지 아니하느뇨, 대적을 놓아두고 좀도적을 다스려 어이하자 함이뇨. 이에는 관인도 할 말이 없어 즉시 그 도적을 놓아보내더라.”
 
18
손자며느리 정옥은 빙그레, 대희는 소리를 내어 웃는다.
 
19
“그 도독놈은 말 한바탕 잘 하구 땡잡었네!”
 
20
대희가 하는 말이고.
 
21
손자며느리는 따로이 빈정거리듯
 
22
“그래두 그 관인은 양심이 조금은 있었던가 보죠, 할머니…… 아, 시방 세상에 누가 관청 같은 데 붙들려가서 이 녀석들, 느이야말루 진짜 도적놈들이니라구. 불쌍한 백성들을 피를 빨구, 나라를 팔구 벼슬을 팔아 호화롭게 사는 놈들이야말루 도적놈이 아니구 무어냐구 디리댔어 보세요. 당장 그 자리서 반주검을 당하는 것두 당하는 것이려니와, 빨강이루 몰려가지구……”
 
23
손자며느리는 퍼뜩 말을 그치고 잠깐 솜을 만지다가
 
24
“요세두, 어느 도지사가 공금을 횡령해 먹다 들려났네, 고관 누구는 배급 물자를 돌려 빼먹었네, 어떤 학교 교장은 학교 돈을 암만을 꼬아 먹었네. 이런 이얘기가 매일같이 신문에두 나군 아니해요? …… 누데기는 털수룩 먼지라구, 바보천치 말구는, 털어서 제법 먼지 안 나는 양반님네는 별양 없나 봐요. 오죽해 학교가 다 모리판, 사기횡령판이니.”
 
25
“그러게, 옛날버틈, 관(冠) 쓴 도적놈이란 말이 있더란다. 여기두 보렴……”
 
26
할머니는 무릎에 놓았던 책을 다시 집어들고, 새겨 들려 준다.
 
27
“만덕사의 중 근은(萬德寺僧 謹恩)이 일찌기 한 시를 읊으니, 일산음중대도다요, 목탁성리진승소라(日傘陰中大盜多 木鐸聲裡眞僧少). 일산 ─ 일산이라건 대관이나 양반들이 승교나 말 타구 출입할 때 하인시켜 핼 가리게 하는 우산야. 그 일산 밑에 큰 도적이 많구. 목탁 소리 가운데 옳은 중이 적으니라, 이 뜻야…… 또, 그 다음은 무어라구 했는고 하면, 한 북인(北人)이 일찌기 성균관(成均館) 앞에 이르러 꾸짖어 가로대, 이 조정의 장삼입은 낮도적들을 불러 모는 곳이로다…… 그 성균관이라는게 시방으루 치면 대학교야, 대학교.”
 
28
“할머니?”
 
29
대희가 그렇게 부른다.
 
30
대희는, 저는 도무지 땅띔도 못하겠는, 맨 한문 글자로만 된 책을, 할머니는 아무 힘도 안 들이고, 술술 쉬운 말로 새겨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척 신기하였었다.
 
31
“할머닌 어디서 그렇게 글공불 했수? 그 무어란 대학굘 댕겼수?”
 
32
“시러베아들놈!…… 시악시가 어딜 그런 델 댕기느냐? 글방에두 못 댕긴 걸.”
 
33
“그럼?”
 
34
“집이서 우리 어머니한테 배웠드란다.”
 
35
“그 어머니가 글을 퍽 잘 했수?”
 
36
“남자 같았으면 문장 소리를 들을 뻔하셋드란다. 옛날에는 부인네두 그렇게 글 좋은 이가 많었더니라. 허긴 요새 세상에두 여자 박사가 다 있구 하다드라만서두.”
 
37
“피이! 여자 박사, 엉터리 박사…… 아즈머니? 미국 박산 죄 모두 엉터리 박사래죠?”
 
38
“한참 당년엔 일본 횡빈(橫濱)에 오백 불(弗)씩 받구, 미국 박사 거간하는 거간꾼이 다 있었드라우. 정말이지 거짓말인지는 몰라두.”
 
39
“하! 나두 하나 살걸!”
 
40
“옛날 우리 죄선 사람, 진사첩지(進士牒紙) 사기 같던가 보다!…… 접때 참, 강진(康津)서 백진사(白進士)라구 죽었다구 부고 아니 왔더냐? 그 백진사두 과거를 보아 한 진사가 아니라, 진사첩지를 사서 한 진사드니라.”
 
41
“할머니네 댁은 그때 참 무슨 벼슬을 다니셌죠?”
 
42
손자며느리가 할머니의 말에서 문득 생각이 나 묻는 것을 할머니는 머리를 저으면서
 
43
“벼슬이 다 무슨 벼슬이냐.”
 
44
“아무 벼슬두 안 지나셌어요?”
 
45
“우리 할아버지 윗대까지는 벼슬들을 하셌던가 보더라만서두, 우리 할아버지버틈은 일짜루…… 우리 아버지라는 으런은 더구나 청백하기만 하신 으런이라, 벼슬 같은 것은 통히 뜻이 없으셌드란다. 학문으루두 참 도저하시구, 포부두 남달리 크구 하셌지만서두, 이 어지럽구 추악한 세상에, 어찌 환로(宦路)에 나가 깨끗한 몸을 더럽힐까 보냐구, 애당초에 벼슬엔 뜻을 아니 두셌드란다. 그러시구서, 거저 글이나 읽으시구, 풍월(風月 : 詩[시])이나 지시구, 그리구 뜻맞는 선비들루 친구나 사귀시구! …… 허시다, 기묘년(己卯年) 괴질에 궂기셌구, 갓쉬흔이셌지…… 그리군, 집안이라야 내 아래루 남동생 둘이 있었지만, 일곱 살, 네 살 그랬으니 아직 어리기두 했지만서두, 장성해서두 아버지의 뜻을 받아, 벼슬은 아니 했구.”
 
46
“그럼, 지나시긴? 부자시던가요?”
 
47
“부자가 다 무어냐? 어려웠지.”
 
48
“어려우셌으면 생화(生貨)는 무얼루?”
 
49
“선비가 생화가 있나!…… 우리 외삼춘 덕에 어렵긴 해두 고생은 모르구 지났지. 지나두 잘 지났지. ……우리 외삼춘이 큰 어물도가(魚物都家)를 하셌더니라. 돈을 잘 벌구, 소리나는 부자였지. ……그 외삼춘이 우리가 강홰서 살 적버틈 늘 뒤를 보아주시구. 서울루 올라와 살면서는 아주 나무, 양식에 옷감에 용돈까지 일일이 다 대주시구…… 그 으런허구 우리 아버지허구, 처남 남매간에 지기가 맞어서…… 새가 무척 조셌더니라…… 늘 두 분이 만나 술 자시구, 숨기는 말 없이 통사정하구. 시사를 논하시다 나라일이 나날이 글러만 간다구, 서루 개탄을 하시구…… 그렇게 참 지나시다가, 아버지께서 궂기신 뒤에는, 더구나 혼자 된 누님이 혹시라두 우리들 어린것들 데리구 고생할세라 더 살뜰히 보살펴 주시구. 우리 삼남매 다 공부시켜 성취까지 시켜 주시구. 우리 동생들 재산 분배해 주시구…… 내가 그 외삼춘 은공은 가슴에 뗏장을 얹기 전에는 못 잊는다. 맘이 여간 활협하구 인정이 있어가지구서야, 일 년 이태두 아니요, 삼사십 년을 하루같이 싫여하는 내색 없이 출가한 누님네 권솔을 당신네 친 권솔 다르잖게 그 뒷받이를 다 해주느냐? 예사 사람으루는 못하는 노릇이지.”
 
50
할머니는 말을 그치고 곰곰이 있다가 다시
 
51
“세상 그런 어질구 착한 으런이, 어떡허다 절손(絶孫)이 되구서, 무후(無後)하구 말었으니!…… 삼월 그믐날, 내가 뫼시는 제향이 그 으런 제향이다. 제향을 뫼신들 영혼이 아시랴마는, 그래두 내 정성으루 내 생전이나……”
 
52
할머니는 한숨을 짓고는 새로 말을 잇는다.
 
53
“병태라구, 나보담 두 살 아랫 아들 하나가 있기는 있었더니라. 무남독녀외아들였지. ……그 병태가, 어렸을 적버틈 재주가 있구, 무척 다부지구 하더니!…… 그게 그러니깐 바루 무술년(戊戌年 : 1898년)이다. 무엇이냐, 독립협회(獨立協會)라구, 이상재(李商在)랑 윤치호(尹致昊)랑 그리구 시방 대통령으루 들어앉인 이승만 박사랑 들 설도를 한 거길, 우리 큰동생 윤섭이허구 내외종(內外從)이 가담을 해가지굴랑은…… 둘이 한 동갑인데, 병태가 생일루 위였지…… 가담을 해가지구 연설을 하러 다닌다, 무얼 한다 하면서 정신 없이 날뛰구 댕기다 그만, 등짐장수패허구 쌈이 나질 않었니, 서대문 밖 아현(阿峴)서…… 그 쌈에 윤섭이는 율미작대기를 맞어 골병이 들어가지군, 한 달인가 누어 앓다 죽구!…… 그리구 병태는 그 뒤에 몰리게 되니깐 미국으루 망명을 갔다 게서 병으루 이내 객사를 하구. …… 그래서 우리 외가는 그만 절손이 됐더란다. 외삼춘은 양자나 양손은 해 무얼 하느냐구 며느리더러, 나 죽은 뒤에 너나 자량해서 양자를 정하던지 하라구 일르시구, 당신은 종시 양자 양손을 아니 들이셌지, 그 뜻을 받아 그랬는지, 며느리두길래 혼자 늙다 혼자 죽었구.”
 
54
방안은 이윽히 침묵이 흐른다.
 
55
두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엎드려 오도카니 할머니의 입 합죽한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던 대희가, 깜빡
 
56
“참, 할머니?”
 
57
하고 긴히 부른다.
 
58
“오냐.”
 
59
“어제 저녁 그 얘기 또 해주시예지.”
 
60
“공분 아니 허구, 이얘기만 바쳐?”
 
61
“해해…… 얘기두 그런 얘긴 공부야.”
 
62
“어제 저녁에 임오년 군란(壬午軍亂) 이얘기를 내다 말았겠다?……”
 
63
“응, 병정들이 난리 꾸민……”
 
64
“그래, 그렇게 참 난리를 피해, 총소리를 피해 강홰서 서울루 이사를 와 사는데…… 임오년, 내가 열두 살 먹던 해, 그게 그러니깐 유월 초아흐렛날이다. 또 총소리가 나는구나!……”
 
 
 

2

 
 
66
서력 1876년(高宗[고종] 13년, 丙子[병자]) 2월 26일, 음력으로는 2월 초 이튿날 조선정부를 대표하여 신헌(申櫶), 윤자승(尹滋承)과 일본정부를 대표하여 흑전청륭(黑田淸隆), 정상형(井上馨)과 사이에 맺어진 강화조약(江華條約) ─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은
 
67
○ 한국은 자주독립국인 것.
 
68
○ 두 나라는 서로 사신을 파견할 것.
 
69
○ 한국은 부산과 그 밖에 두 곳의 항구를 열어 일본과 통상을 하고, 일본 국민의 왕래와 거주를 허락할 것.
 
70
○ 일본 선박은 한국 해안을 자유로 측량할 것.
 
71
○ 양국 국민의 통상과 무역에 대하여 정부는 간섭치 아니할 것.
 
72
○ 영사재판권(領事裁判權)의 인정.
 
73
따위의 열두 조목으로 된 것이었다.
 
74
이때 조선에는 최익현(崔益鉉) 같은 유생을 비롯하여 여전한 쇄국척외(鎖國斥外)의 원로(元老)와 중신들이 조정에 있어, 반대의 소리가 요란치 아니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뭏든 실력을 가졌던 대원군은 그 안해 1875년(乙亥[을해])에 이미 권력을 잃고 없어, 승패는 하여커나 우선 무력으로 일본의 요구에 대답을 하잘 강단을 낼 계제가 되질 못하였다.
 
75
일본은 일곱 척의 군함에다 6백 명 군사를 싣고 와 한양의 명목인 강화 앞바다에서 커다란 대포를 인정전(仁政殿)에다 겨냥을 댄 바나 진배없이 잔뜩 엄포를 하고 있었다. 그때의 박규수(朴珪壽)의 말이 아니라도, 도저히 그를 막아낼 방비는 없고, 화친을 하는밖에 도리는 없었다.
 
76
겸하여, 때마침 왕세자 책봉(王世子册封)의 하사(賀使)로 청국에서 보내어 온 길화(吉和)가 이홍장(李鴻章)의 전갈로써 일본과 수호를 맺음이 가한 줄로 넌지시 권고를 하였다.
 
77
이리하여 일찌기 불란서(佛蘭西)가 병인양요(丙寅洋擾)라는 적지 아니한 사단을 일으키어 피차에 헛된 희생만 내고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또 그 뒤에 미국이 역시 신미양요(辛未洋擾)라는 적지 아니한 사단을 일으키어, 피차에 헛된 희생만 내고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다 늦게 일본이 ─ 꼬마 동이 푼수밖에 안 되는 일본이, 운이 좋았던지 쉽사리 항투인 문호개방과 국교수호며 통상의 이름 아래, 제국주의의 사냥터로서의 처녀지(處女地)였던 조선에 대한 침략의 전초에서 우선 첫째 노릇을 하게 된 것이었었다.
 
78
이 병자년에 국내적으로는 영남(嶺南) 지방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큰 흉년이 들었다는 시변(時變)이 있었다.
 
79
기록을 상고하면, 그 뒤 무자년(戊子年 : 1888년)의 흉년보다도 더한 흉년이어서, 사람을 먹을 지경이었다고 하였으니, 얼마나 큰 기근이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80
흉년 끝이면 사회적 불안과 인심의 동요는 저절로 이는 것이어서, 때의 조선의 상하도 커다란 불안과 동요에 싸여 있었다.
 
81
거기다 겸하여 인심을 자극하는 개국(開國)과 개화(開化)였다.
 
82
일본과의 수교통상의 조약인 강화조약에조차, 1879년(乙卯年[을묘년])에는, 앞서 조선을 다년간 궁본소일(宮本小一)의 뒤를 이어, 화방의질(花房義質)이 변리공사(辨理公使)라는 직책으로 오고, 서대문 밖에 있는 천연정(天然亭)에다, 청수관(淸水館)이라 하여, 비로소 서울에 일본 공사관을 설치하였다. 이것이 이를테면, 군국주의 일본의 조선침략의 교두보(橋頭堡)랄 것이었었다.
 
83
양복도 아니요 청복(淸服)도 아닌 괴상한 복색을 차린 왜인이, 다문다문 서울거리에 나타나고, 비 아니 오는 종로 거리에 나막신 소리가 딸각거리기 시작하였다. 동래(東萊)·부산(釜山) 말고는, 조선땅에서 왜인을 보기는 임진란(任辰亂) 이후 삼백여 년 만이었다.
 
84
부산(釜山)과 원산(元山)이, 그 다음 인천(仁川)이 차례차례로 일본을 위하여 개항(開港)이 되었다.
 
85
이들 항구로 일본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고, 조선의 쌀이며 그 밖의 물화가 일본으로 나가고 하였다.
 
86
딸각거리는 왜나막신 소리에 기어이 왜칠(日色)한 구라파의 문물(文物)이 조금씩 조금씩 조선땅에 퍼지기 시작하던 것이었었다.
 
87
여러 백년을 문을 처잠그고 살면서 안다는 것은 오직 중국뿐이요, 외국의 문화라면 중국문화 밖에는 ─ 그중에서도 쓸모 없는 정주학(程朱學) 밖에는 모르던 조선에 대하여, 그것은 좋건 그르건 엄연히 하나의 큰 사회적 혁변을 제시하는 첫 파도(波濤)라고 할 것이었었다.
 
88
일본이라면 예의가 없는 금수의 나라요, 그 국민을 오랑캐라 부르던 서울 백성이었다. 어제까지도 문을 닫고 들이지 아니하며 배척하던 일본이었다. 또 멀리는 임진왜란의 묵은 위협도 있었을는지 모른다. 조선 국민은 상하가 대부분이 일본 사람이 온 것에 반감을 품었다. 어떤 막연한 불안과 위협도 느끼었다.
 
89
일본의 사절이 거리에 나가 다니는 것을 민중이 돌을 던진 일이 두 차례나 있었다.
 
90
혁변의 파도는 일본 사람이 가져다만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91
일부 조선 사람 스스로가 그것을 하고 나섰다. 사실 조선 사람으로도, 우두커니 앉아만 있기에는 새로운 파도는 소리가 너무도 요란한 것이 있었다.
 
92
강화조약의 답례를 하기 위하여 바로 그해 ─ 병자년 사월(陰曆[음력])에, 예조관서 김기수(禮判 金綺秀)가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다녀왔다.
 
93
1880년(庚辰年[경진년]) 오월(陰曆[음력])에는 김홍집(金弘集)이 두번째의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왔다.
 
94
이듬해 1881년(辛巳年[신사년])에는 어윤중(魚允中), 홍영식(洪英植), 박정양(朴定陽), 조준영(趙準永) 들의 젊고 발랄한 고관과 선비들이 한목 십 여 명이나 일본으로 소위 신사유람(紳士遊覽)이란 것을 갔다. 일본공사 화방의질의 권고와 알선으로 일본의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시찰하도록 한국정부로부터 파견을 한 것이었었다.
 
95
화방의질의 의도인즉은 일변 정신적인 교두보의 설정, 즉 한국의 관계(官界)와 유력자층에다 일본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는 친일적(親日的)인 인물을 장만하여 두자는 정책이었음은 물론이었다.
 
96
일본을 가보고 온 그들은 제마다들, 일본에 대하여 커다란 경이(驚異)와 흠망과, 그리고 호감을 몸에 배도록 얻어가지고 돌아왔다.
 
97
때의 일본은 명치유신(明治維新)이라는 개혁을 시작한 지 불과 십육칠 년이면서, 보수적인 낡은 봉건체제(封建體制)로부터 현대적인 군국주의적(軍國主義的) 자본주의의 체제에로 향하여, 놀라울 만큼 급속한 발전을 하고 있었다. 이는 여러 백년을 밖으로는 거듭하는 외국의 침략으로 인하여, 안으로는 지도자들의 실생활과 떠난 정주학(程朱學) 일관의 허식적(虛飾的)인 지도와 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국력과 산업은 지칠 대로 지치고, 국민의 사기(士氣)는 침체할 대로 침체하고, 그리고 그러하기 때문에 침략하는 외세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항쟁할 힘과 기개가 없고, 차라리 그에 굴복 타협함으로써 목전의 구차한 안전을 도모하는 소극적이며 사대적(事大的)인 기풍에 쩔어 있는 조선과는 달라, 일본은 오랫동안 비교적 건전한 국내 산업의 발전으로 국력이 엔간히 충실한 것이 있었고, 따라서 국민의 정신도 진취적이요 적극적인 기풍이 넘쳐 있던 관계로 하여, 세차게 밀려드는 구미(歐美)의 물질문명의 침략적 공세(攻勢)에 대하여도 이를 자체의 독립과 주권의 침해를 능히 막아내면서, 한편으로는 받아들일 것을 잘 받아들여 내것을 삼고 내 힘을 만들고 할 만큼 기초가 서 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었다.
 
98
현대화하여 가는 각반 산업, 황폐한 자취가 없고 기름이 흐르는 듯한 산과 전야, 바쁘고 씩씩한 국민들의 기상, 풍부한 물화와 은성한 거래, 이런 것도 이런 것이려니와, 일본을 가보는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놀라고 부럽게 한 것은, 관리나 지도자들의 진취기상의 왕성함과, 상하가 한가지로 부패치 아니한 정치와, 그리고 현대화한 군비(軍備)의 크고도 충실함이었다.
 
99
한둘의 예외가 없던 것은 아니나, 일본을 가보고 온 사람들의 결론은 거개일치한 것이었다.
 
100
일본이 그와 같이 국세(國勢)가 융성한 것은 서양의 문명을 잘 받아들인 개화의 덕이라 하였다. 우리 조선도 그러므로 개화를 해야 하고, 개화를 하는 데는 일본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힘을 힘입어야 한다는 방법론에 있어서도 그들은 생각이 대개 일치하였다.
 
101
나의 심정이나, 그동안 다시 달라진 내외의 객관적 정세를 고려치 아니한 공식론은 공식론이었으나, 아뭏든 그리하여 조선의 정치계에는 일본에 호감을 가지며, 일본을 미뻐하며 일본을 본받고 일본의 힘에 의지해서 조선의 개혁을 꾀하려는 이른바 개화당(開化黨)이라는 것이 생기게 된 것이었었다. 그리고 이 개화당이야말로 중간에 많은 소장(消長)과 파란은 겪었으나, 마침내 가서는 한국을 일본에 합방을 통치시키는 공작을 함으로써, 이씨조선(李氏朝鮮)의 ‘피리어드’를 찍게 한 이완용이니 일진회(一進會)의 송병준이네 하는 소위 친일파라고 이름하는 것의 직계(直系)는 아닐망정, 하여커나 친일파 그것의 시초는 시초였던 것이었었다.
 
102
1882년, 임오년 정월(陰曆[음력])에 정부의 한 기관으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라는 것이 생기고, 그 안에 동문사(同文司), 군무사(軍務司), 통상사(通商司), 이용사(利用司), 전선사(典選司), 율례사(律例司), 감공사(監工司)의 일곱 부문을 두어, 일본을 다녀온 개화당 사람들이 주장 그 요임에 들어앉았다. 이것이 개화당이 정부에 제안을 하여 개혁을 시작한 첫 시험이었다.
 
103
개화당의 세력이란, 그러나 정부에서나 일반 사회에서나 지극히 미미한 것이었었다.
 
104
정부에는 사대당(事大黨)인 보수파(保守派)의 세력이 바위처럼 엄연하였다.
 
105
민비(閔妃)의 혈족인 민겸호(閔謙鎬), 민규호(閔奎鎬)를 비롯하여, 대원군의 중형이면서 대원군의 원수인 민파(閔派)에게 붙어서 그 이용물이 되고 있는 허재비 영의정 이최응(領議政李最應), 조대비(趙大妃)의 혈족 조영하(趙寧夏) 이런 인물들을 대각의 최고 지위에 앉혀놓고, 민비 스스로는 그 오래비 민승호(閔升鎬)의 훈수를 받아가며 고종 ─ 이태왕(高宗 : 李太王)의 병풍 뒤에 가 앉아, 그들 청당(淸國黨)을 지휘하면서, 일대(一代)의 능란한 수완을 휘저어 마음껏 정부와 국사를 농락하였다.
 
106
민비 이하 그들 청당은 어디까지나 보수적이요 사대파였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조선이라는 것을 자주독립국으로서가 아니라, 청국의 번방(藩邦 : 屬邦[속방])으로써, 강성한 청국의 힘과 지배에 의존하려는 사대주의의 사도들이었다.
 
107
진보니 개화니 하는 것에는 아무런 흥미도 필요도 느끼는 것이 없었다. 보수적인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대원군 이상이었다. 그들은 대원군이 재래 행정상 악폐를 끼치던 여러가지 방면의 좋지 못한 제도를 개혁 혹은 혁파한 것을 도로 부활을 시키고 하였다. 만동묘(萬東廟)와 서원(書院)의 부활도 그것이었다.
 
108
대원군에게 쫓긴 인물들을 불러들여 중히 썼다. 김병국(金炳國)의 좌의정(左議政)도 그것이었다.
 
109
그런 사대주의요 보수파인 그들이 개화당을 끌어들여 일종의 연립내각(聯立內閣) 같은 것을 꾸며가지고 보수파 그들로는 빙탄으로 용납키 어려운 개화정책이랄 것을 시험한 것은 자못 모순이 아닌 것이 아니었으나, 실상은 그것 역시 그들의 사대주의의 본령에서 나온 정책이었었다.
 
110
두 차례의 수신사와 또 신사유람으로 일본을 다녀온 여러 사람에게서 그들은 일본이 대단히 강성하다는 말을 누누히 들었다.
 
111
만약 일본이 그와 같이 강성할진대 그에게 항거를 하거나 그를 배척하였자 이로울 것이 없다…… 오히려 그에게 응종하고, 그와 친근히 지나면서 그의 강성한 힘을 빌어 나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떳떳한 일이다…… 이것이 사대파의 결론이요, 사대파가 사대파인 이상 당연한 결론인 것이었다. 사대주의의 파당들은 결코 그동안 섬겨오던 청국만이 사대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일본도, 노서아도, 미국도 강성하고, 강성한 힘으로 나를 누르려 하러 들면 그에 굴종을 하여 상전으로 섬기면서, 그 보호 아래 ‘편안한 종노릇’을 할 수가 있는 것이었었다. 나라의 주권은 어디로 갔던지 상관이 아니고서 말이었다. 민비는 겸하여 개인적으로 일본에 대해서 호의를 가질 일이 따로이 또 있었다.
 
112
민비는 고종 11년(甲戌[갑술] : 1874년)에 원자(元子)를 났다.
 
113
나중에 대를 이어 순종 ─ 이왕(純宗 : 李王)이 된 이 원자 외에, 고종에게는 귀빈 이씨(貴嬪李氏)의 몸에서 서족(庶族)으로 난 왕자 완왕(完王)이 있었다.
 
114
그 완왕이 서족은 서족이라도 나이가 민비 소생의 원자보다 여섯 살 맏이였고, 그래서 장자(長子)였고, 그런데 생김새랄지 하는 짓이랄지가 어려서부터 영특스런 구석이 있어, 고종이 끔찍 귀여워하였고, 장차에는 그를 세자(世子)로 책봉하여 대를 잇기울 내심까지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국민간의 인기도 높아, 그가 사인교를 타고 출입을 할 때면, 종로의 늙은 백성들이 모여와 교자의 발을 비집고 들여다보면서, 우리 왕자님, 우리 왕자님 하며 추앙을 하고, 은근히 그가 왕통을 이을 것을 기뻐하였다는 말까지 있었다.
 
115
고종의 총애가 비록 아직은 나에게 깊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완왕이 만일 원자에 책봉이 되어 왕통을 계승하게 된다면, 민비 자기는 소위 개밥에 도토리 신세를 면치 못하는 판이었다.
 
116
민비쯤으로 가만히 앉아 있으려고 하였을 이치가 없는 노릇이었다. 원자를 낳던 겨우 이듬해, 부랴부랴 원로(元老) 이유원(李裕元)을 단단히 신칙해서, 세자책봉의 주청사(世子册封奏請使)로 북경의 청국 조정에 보내어 완왕은 장자라도 서자요, 민비 자기 소생의 원자가 정통인즉 원자로 세자책봉의 허락이 내리도록 주장을 하게 하였다.
 
117
그러는 한편, 은밀히 사람을 부산의 유력한 일본 사람에게 보내어, 이번 한국 왕실의 세자책봉 문제에 대하여 원자를 책봉케 하도록 정부가 청국 조정에 긴히 조언을 하여 달라는 청탁을 하게 하였다 ─ 는 말이 있었다.
 
118
일본은 한국과 국교를 터야 할 참이었고, 계제에 한국 궁정의 호의를 사둘 필요가 있다 하여, 때의 외무대신이던 화방의질이 북경에 있는 일본공사를 시켜 한국조정의 ─ 민비의 청탁대로의 권고를 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러나 민비가 부산으로 밀사를 보낸 것과 그 말이 일본정부의 외무 당국자에게 들어간 것까지는 혹시 사실일는지 모르되, 북경의 공사를 시켜 청국 조정에 그러한 권고를 하였다는 것은 신빙키 어려운 말일 것이다. 생각컨대 일본공사 화방의질은 원자의 책봉이 이미 민비의 뜻대로 되어진 것을 아는 터이라, 그는 저희들의 생색을 냄으로써, 민비의 환심을 사고자 짐짓 꾸며댄 말이기가 쉬울 것이었다.)
 
119
어쨌든 그래서 화방의질은 민비에게 파격의 융숭한 환영과 대접을 받았고, 두고두고 민비는 화방의질의 조언을 잘 들었으며, 개화당의 포섭도 원인의 한 가닥은 거기에 있던 것이었었다.
 
120
동상이몽(同牀異夢)이라고 하거니와, 아뭏든 그리하여 사대주의의 보수파와 개화당이 얼려서 꾸민 그 정부란, 제각기 딴 궁량을 하고 있는 판속이어서, 내부적으로도 이미 수박에다 멜빵을 건 모양의 안정성(安定性)이 없는 물건이었었다. 언제 어디서 꿍하고 미끄러내려져 깨어져버릴지 모르는……
 
121
일반 백성은 민씨네 청당을 중심으로 한 외척과 종친이 정권을 쥐고, 다시금 정치를 전단하는 것이 마땅치가 않은데, 거기에다 이건 또 난데없는 개화당이 펄쩍 뛰어들어 한몫 끼여가지고, 개화니 통상이니 하면서 오랑캐 왜인을 불러들인다, 새로운 법도를 마련한다 하는 것이 장히 비위에 맞지가 아니하였다, 더우기 신정부는 새로운 통화정책(通貨政策)으로, 청국돈(淸錢)을 수입하여다 일반에 통용을 시켰고, 그 결과는 물가가 폭등하여 국민 생활에 가뜩이나 위협을 주었기 때문에, 또한 커다란 불평과 원망의 과녁이 되었다.
 
122
‘저이들 잘살자는 정부! 우리한테 무슨 상관야?’
 
123
‘개화? 개화하면 절루 배가 부른가?’
 
124
‘개화보다는 그 토색질하는 원이나 양반들 없어졌으면 살겠드라.’
 
125
‘이 흉년 끝에 백물이 다락같이 올라만 가니, 어떻게 살란 말인구?’
 
126
‘대체 그 왜인들은 어째 불러들이는 거여? 임진왜란 못 생각하나? 세상이 망할려니까 별……’
 
127
‘개화세상이 되면 살기가 좋아진다구? 흥, 부자허구 세도양반네허구는 살기 좋아질 테지.’
 
128
‘개화보다 싸라기 한 됫박이 아쉽다!’
 
129
피골이 서로 연한 백성들이 이렇게 불평인가 하면, 유림(儒林)에서는 유림대로 불평이었다. 최익현(崔益鉉)은 귀양이 풀리었다.
 
130
대원군을 쫓아내는 데에 일등의 공이 있는 이 유림의 거두는, 그리하여 민씨네 낭당과 정부에서 대단히 좋은 대접을 받았다.
 
131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짓는 등 여러 가지 토목사업을 일으켜놓고, 재정이 궁하여 필경엔 서울의 사대문(四大門) 이하 각 문에 파수를 두고, 드나드는 백성에게 한푼씩 문세(門稅)를 받은 것이 있었다.
 
132
최익현은 그것을 탄핵하여 행인에게 한푼 두푼을 받고 있으니, 조정의 체면에 거지 행세가 아니냐고 신랄하게 들이대었었다.
 
133
소위 나는 새로 떨어뜨린다는 대원의 집정하에서 그 대원군을 쫓아내려고 거듭 상소질을 하고, 필경엔 거지라고까지 적발 공격을 하다니, 최익현으로도 목숨을 내어걸고 나선 싸움이었다.
 
134
최익현은 완고하고 명나라 숭배(崇明思想)의 권화(權化)였기망정이지, 나약하고 지조 없고 부패한 무리로 찼던 이조말엽(李朝末葉)의 인물계에서, 그 기개와 지조만은 저으기 추앙함직한 것이 있는 지사(志士)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굳은 지조를 끝끝내 굽히지 않았고,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이후에는 의병대장(義兵大將)이 되어 일본에 저항하다가 붙잡혀 대마도에 유폐를 당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원수 일본의 밥을 먹을까보냐고 단식자결(斷食自決)을 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135
아뭏든 그 최익현이며 유림에서는 대원군에게 파괴와 철폐를 당하였던 만동묘(萬東廟)와 서원(書院)의 제도가 부활이 되어 그것만은 만족일 수가 있었다.
 
136
그러나 민씨네 청당과 개화당의 신정부가 엉뚱하게도 일본과 수교(修交)를 하고, 개화를 도창하고 하는 데는 그만 환멸을 느끼고 도리어 불평과 불만이 도지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137
도대체 그들의 유일한 경전(經典)인 사서삼경이나 주자(朱子)의 가르친 바 어떤 대문에도 오랑캐 왜인과 동등의 지체에서 국교를 닦고, 왜인을 본받아 개화를 하고 하느니라는 구절은 없던 것이었었다. 사서삼경과 주자의 가르침에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하늘이 쪼개진 것보다 더 큰 변괴였다.
 
138
일찌기 최익현이 선두에 서가지고, 민씨네 낭당의 정치공작의 앞잡이가 되어 대원군 배척의 운동을 일으킨 것은, 왕이 이미 상당한 나이가 되었는데, 언제까지고 섭정(攝政)이라니 불가하다는 등, 그 밖에 표방하는 이유와 조건이야 많았지만, 실상 유림들로는 그들의 지중하고 위대하고도 요긴하고 한 만동묘를 헐고 서원을 철폐하고 하는 대원군이 밉고 괘씸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짓만 아니었으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통하여 완강히 쇄국정책을 써서 외이(外夷)와의 타협과 그 침입을 막아낸 대원군은, 차라리 그들의 좋은 어른이요 동지요 하였을지언정 배척의 대상은 아니었었다.
 
139
대원군을 실각(失脚)시킴으로써 만동묘와 서원이 부활이 된 것은, 그리하여 자못 성공이요 만족이었으나 대원군이 쫓겨나기 때문에 쇄국(鎻國)과 척화(斥和)의 정책이, 그 쫓겨나가는 대원군과 함께 쫓겨나가고서, 대신 그들 명나라 백성 아닌 명나라 유민(遺民)과는 전혀 용납하지 못할 오랑캐 왜인과의 수교며, 오랑캐의 풍속인 개화라는 것을 보게끔 되었은즉, 결국 최익현 들의 유생들은 제 도끼에 제 발등을 찍힌 형국이라 할 것이었었다.
 
140
일반 국민과 유림으로부터 그와 같이 불평과 배척이 있는데다 겸하여 다시 이를 갈며 기회를 노리는 대원군이 있었다.
 
141
원수에게 세도를 빼앗긴 것도 분한데, 황차 원수는 문호를 열어 왜인을 불러들이고 개화를 도창하고 하는 것이 아닌가. 대원군은 참으로 이를 갈면서, 오냐 때만 오느라…… 하고 잔뜩 벼르고 앉았는 참이었다.
 
142
이리하여 새 정부라는 것은 밖으로 대하여서도 역시, 수박에다 멜빵을 건 모양의 안정성 없는 위태로운 물건이었었다.
 
 
 

3

 
 
144
임오년(1882년) 봄이었다. 조선의 서울 한양 거리에는 일본과의 국교와 통상이 트이면서부터 들리기 시작한 딸가락딸가락 왜나막신 소리와 함께 전에 보지 못하던 또 하나의 풍채(風彩) 기물스런 물건이 등장을 하였다. 항용 초록군복(草綠軍服)이라고 불리는 한국의 신식 병정이었다.
 
145
대님 묶은 바지 저고리 위에다 너펄거리는 흑전포(黑戰布) 입고, 흑전립(黑戰笠) 쓰고, 감발에 짚신 신고, 군도(軍刀)는 등에 걸메고 곰방담뱃대 물고 둘러앉아, 시장한 창자에 막걸리 생각이나 하면서, 고누 두고, 하품하고, 기지개 쓰고, 낮잠 자고 하는 이런 구식 군인과 대조하여, 가랑이 팽팽한 푸른 홀태바지 입고, 푸른 군복 저고리 입고, 상투 위에다 사포(帽子[모자]) : 軍帽[군모]) 눌러 쓰고, 군도는 허리에 차고, 구두 신고 하고서 뚜벅뚜벅 철그럭철그럭, 신바람이 나서 장안 거리를 내로라고 활개치고 돌아다니고, 조금만 건드리기가 무섭게 달려들어 치고 부수며 행패를 하고 하는 신식 병정은, 비록 그 수효는 적을망정 잘 눈에 뜨일 뿐만 아니라 낡은 눈에는 적실히 눈 거슬리는 ‘개홧속’임에 틀림이 없었다.
 
146
한국정부는 개혁의 하나의 시책으로 임오년 이월(陰曆[음력])에 군제(軍制)를 개혁하였다.
 
147
재래의 호위(扈衛)·훈련(訓鍊)·금위(禁衛)·어영(御營)·총융(摠戎)의 다섯 영(五營)을 폐하고서 무위(武衛)와 장위(壯衛)의 두 영을 새로이 설시하였다.
 
148
일변 사관생도(士官生徒)라고 하여, 상류계급의 자제 가운데서 청년 백여명을 뽑아 훈련원의 하도감(訓鍊院下都監)에다 훈련소를 두고, 일본으로부터 초빙하여 온 육군중위 굴본예조(堀本禮造)라는 교관으로 하여금, 일본군제의 신식 군사교련을 하게 하였다. 이를테면 장차 군의 중추가 될 고급장교의 양성인 것이었다.
 
149
다시 그리고 별기군(別技軍)이라 하여 일반 민간에서 백여 명의 체격 좋은 청년을 모집하여 같은 훈련소에서 역시 굴본예조의 신식교련을 받게 하였다.
 
150
이 별기군은 친위대(親衛隊)인 무위영의 소속이었다.
 
151
초록군복은 이들 사관생도와 별기군을 이름이었다.
 
152
군제의 개혁과 더불어 재래의 다섯 영의 낡은 병정의 일부는, 새로 된 무위와 장위의 두 영에 각기 흡수가 되었다. 그러나 노후병의 일부는 도태가 되었다.
 
153
도태가 되어 일조에 밥거리를 잃고 거리로 쫓겨나온 그들 낡은 병정들의 불평과 실망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요행히 우선 새로운 기구(機構)에 편입이 된 군인들도 와락 만족하지는 못하였다. 장차는 개화한 신식 병정 초록군복이 더욱더욱 확장이 될 것이요, 그리함을 따라 구식군인은 연방 도태가 되어 필경엔 죄다 쫓기어나고 말리라는 불안이 있었다.
 
154
낡은 병정들로 앉아서 보기에는 개화한 신식 병정이라는 초록군복 따위는 시쁘고 우스꽝스런 것들이었다.
 
155
우리야말로, 대원대감(大院君)을 뫼시어 포연탄우(砲煙彈雨) 가운데 목숨을 내어걸고 국난(國難)을 막아내던 국가의 간성(干城)이요, 백전노졸이 아니냐. 저 병인양요(丙寅洋擾)적에 문수산성(文殊山城)과 통진(通津) 싸움에서, 더우기 정족산성(鼎足山城) 싸움에서, 눈 새파란 양인놈들을 백발백중으로 쏘아 넘어뜨리고 필경엔 머리를 싸고 도망을 빼게 한 것이 대체 누구의 솜씨며 용맹이더냐. 또 신미양요(辛未洋擾) 적에 갑곶이(甲串)의 용감하고도 장렬한 야습전으로 양인이 그만 간담이 서늘하여 물러가게 한 것이 대체 누구의 솜씨며 용맹이더냐…… 이렇게 그들 구식군인들은 자긍하는 것이 있었다. 미상불 낡은 병정들 가운데는, 대원군 시절에 훈련, 편성이 되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두 접전에 참가하여 잘 싸운 장졸이 많이 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156
그러한 누차의 실전에 나아가 용맹을 떨치고 공을 세운 저네들 구식 병정에 비하여, 엊그제 뽑히어 개홧속으로 훈련을 받은 초록군복 따위는, 이에서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이었다. 군복이나 화려하였지, 그래서 한낱 화초병정이었지, 실전에는 아무 소용도 닿지 않는 것들이었다.
 
157
이 건방지기나 하고 쓸모 없는 화초병정 초록군복은, 그런데 원수의 개화와 왜인의 덕분에 받는 요포(料布 : 月給[월급])가 월등히 후하다. 가끔가끔 상감(上監 : 王[왕])의 특별상급이 있다. 장교며 병정이 세도를 부린다. 그러는 데 비하여 우리네 구식군인의 받는 요포는 끔직 푸달진 것이요, 대접은 주접 든 뒷방 늙은이 대접이 아니냐. 국가에 전공이 빛나고 용맹한 우리네에게 말이었다.
 
158
보수파 민씨네 낭당의 부당한 전단과 구미에 맞지 않는 개화와에 대한 사회적 불평불만은, 그리하여 우선 구식군인에게서 예리한 표면화(表面化)를 보게 된 것이었었다.
 
159
낡은 병정의 불평은 요포의 오랫동안 밀린 것에서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낡은 병정의 요포가 임오년 유월 현재도 자그마치 열석 달치가 밀려 있었다.
 
160
이름이나마도 외적이 침노할 때에 총을 잡고 나서 나라를 방패하여야 할 군인이 아닌가. 열석 달 동안이나 무엇을 먹고 나라의 군인으로서의 목숨을 지탱하고 있었으란 말인가. 이렇게 그들은 불뚝거렸다. 이유는 국고(國庫)가 고갈하여서 ─ 주자 하여도 줄 것이 없어서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161
왜 국고는 고갈이 되었더냐. 군사의 요포를 비롯하여 국가의 제반 용에 쓸 수 있을 만큼, 백성에게서는 꼬바기 세납을 받지 않았더냐. 곤장을 치고, 붙잡아다 옥에 가두고 하여 가면서, 한푼 외수없이, 외수는커녕, 두 곱 세 곱 가봉까지 얹어서 백성에게서 받을 것은 다 받아들이지 않았느냐. 백성이 뼈와 가죽만 앙상히 남도록 가혹한 세납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냐.
 
162
그 받아들인 것을 다 어떻게 하고, 군사의 요포는 열석 달치씩이나 밀리게 하느냐.
 
163
번연하였다.
 
164
백성에게서 받은 세납을, 받는 각기 현지에서 우선 이감(里監 : 區長[구장])이 먹고, 서원(書員 : 稅務員[세무원])이 먹고, 고을의 육방 아전(六房吏屬)이 먹고, 진이 먹고, 감영(監營)의 감찰사 이하 역시 각방 아전이 먹고.
 
165
전운영(轉運營)이 서울로 실어 올리는 데 관계하는 상하의 구실아치가 먹고.
 
166
결국 국고에 들어와 쌓이기는 받은 것의 몇분지 일도 되지 못한다.
 
167
아뭏든 그렇게 해서, 국고에 들어와 쌓인 것을 이번에는 지키는 졸개가 훔치어 먹고, 그 웃놈이 떼어 먹고, 또 그 웃놈이 농간해 먹고.
 
168
그리고 마지막 최고책임자인 판서대감(判書大監)이 공공연하게 실어내가고, 은밀히 실어내가고.
 
169
그러는가 하면, 상감의 분부라 하여 아침에는 오백 석을 실어내가고, 저녁 때는 내전(內殿 : 王妃[왕비])의 분부라 하며 천 석을 실어내가고, 잠시 그 짓을 하고 나니 국고는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었었다.
 
170
왕자(王者)의 지체와 관작(官爵)의 세도를 빌어 백성에게 온갖 불의한 토색을 함부로 하고 그도 부족하여 벼슬을 팔아 재물을 얻고, 또 그도 부족하여 국가의 공공한 재물을 도적하고 하여가며, 밤과 낮으로 하는 일이라고는 기잡과 고량진미에 음탕한 가무를 곁들인 환락이요 궁극한 사치였다.
 
171
그러는 한옆에는 뼈와 가죽이 맞 연한 백성이 있고, 열석 달 동안 요포를 받지 못하고서 주리어 불뚝거리는 국가의 간성(干城)도 있던 것이었었다.
 
172
이 백성에 이 통치가 있고서 그 정부가 몰락치 않을 법이 없었다.
 
173
고종을 최후로 이씨조선(李氏朝鮮)의 왕조(王朝)가 멸망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174
고종의 다음 대인 순종(純宗 : 李王[이왕])의 융희연대(隆熙年代)에 일본에게 병합이 되었다지만, 그 순종은 잠시의 로보트에 지나지 못하였고, 이씨왕조가 사실상으로 망하기는 고종 ─ 이태왕의 대였었다. 고종은 그리하여, 이씨왕조에 대한 죄인인 동시에 일찌기 조선의 역사상 어떤 왕조의 군왕(君王)에게서도 볼 수 없는 한 사람의 명예롭지 못한 민족의 죄인이기도 하였었다.
 
175
의자왕(義慈王)은 백제(百濟) 칠백 년의 왕조를 그의 손에서 문닫힌 최후의 군왕이었다.
 
176
경순왕(敬順王)은 신라(新羅) 일천 년의 왕조를 그의 손에서 문닫힌 최후의 군왕이었다.
 
177
공민왕(恭愍王)은 고려(高麗) 오백 년의 왕조를 사실상으로 그의 손에서 문닫힌 최후의 군왕이었다.
 
178
이 백제의 의자왕이나 신라의 경순왕이나 고려의 공민왕이나 이들은 그네들의 조상이 이룩한 왕업을 각기 그네들의 대에서 망케 한 불초한 군왕이요, 그러므로 그네들은 그네들의 각기 조상에게 대하여 면목 없는 죄인들이었다.
 
179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사로운(정히 사사로운) 왕조는 망케 하여 그들의 사사로운 조상에게는 죄인이 되었을지언정, 민족국가(民族國家) 조선이라는 것은 망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따라서 민족에 대하여서는 죄인이 아니었었다.
 
180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서 신라가 통일은 하였어도 왕조와 국호(國號)만 바뀌었을 뿐이지 조선이라는 민족국가는 그대로 존속이 되었다. 백제나 고구려는 망하였을지언정 조성은 망한 것이 아니었었다. 마찬가지로, 왕건(王建)이 신라를 멸하고서 고려가 서기는 하였어도, 역시 왕조와 국호만 바뀌었을 뿐이지 조선이라는 민족국가는 그대로 존속이 되었다. 망한 것은 신라요 조선은 아니었었다.
 
181
역시 마찬가지로, 이성계가 왕씨(王氏)의 고려왕조를 멸하고서 이씨왕조가 대신 들어앉기는 하였어도, 역시 왕조와 국호만 바뀌었을 뿐이지 조선이라는 민족국가는 매양 그대로 존속이 되었다. 망한 것은 고려요 조선은 아니었었다.
 
182
이렇게 번번이 왕조가 망하면 망하였지 민족국가 조선은 망함이 없이 면면히 존속이 되어 내려오던 것이, 이씨왕조의 멸망에 이르러서는 사태가 달라져 사사로운 이씨왕조의 멸망과 함께 민족국가 조선도 멸망을 본 것이었었다. 딴 민족 일본에게 병합이 됨으로써 조선이라는 민족국가가 소멸이 되었기 때문이었었다.
 
183
딴 민족 일본에게 병합이 됨으로써 조선은 조선민족의 나라로서의 조선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요 일본 국토의 한 부분에 지나지 못하는, 그래서 이미 아무런 생명이 없는 한 조각 땅덩어리로서의 조선, 죽어진 조선일 따름이었었다.
 
184
진정한 망국이요, 고종 ─ 이태왕이 그의 왕조의 창업시조(創業始祖) 이성계 이하 스물다섯 대의 선대에게 죄인인 동시에, 일찌기 조선에는 없던 민족의 죄인인 소치가 거기에 있는 것이었었다.
 
185
고종 ─ 이태왕은 고사(故事)를 두루 읽었을 것이고, 일찌기 신라의 경순왕이 왕실의 존엄과 영화를 보장하여 준다는 조건 아래 왕건에게 국권을 내어주던 대문에 이르러 이 불초한 군왕을 고종 그도 응당히 비웃었으리라.
 
186
아뭏든 그렇게 보아 내려올 때에, 1945년 8·15의 뜻하지 못한 해방은, 누구보다도 다행스러할 사람이 지하의 고종 ─ 이태왕 그 사람이었을는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4

 
 
188
임오년 유월 초아흐렛날(양력으로는 7월 23일) 아침이었다.
 
189
지게를 진 혹은 짐꾼을 데린 낡은 병정들이 꾸역꾸역 광흥창(廣興庫)으로 모여들었다.
 
190
열석 달이나 요포의 밀린 것으로 낡은 병정들 사이에 불평하는 소리가 차차로 높던 중, 이삼일 전에 마침 전라도로부터 세미쌀(稅貢米)이 조금 들어온 것이 있어 무위영의 낡은 병정들에게 우선 한 달치씩만을 나눠 주기로 한 것이었었다.
 
191
한 달치만이라도 타게 되는 것이 반가와 병정들은 얼굴에 제마다 희색이 돌았다.
 
192
호조판서 민겸호(戶判閔謙鎬)는 군자(軍資)에 관한 사무를 관리하는 선혜청 도제조(宣惠廳都提調)의 요직을 겸임하고 있었다.
 
193
민겸호는 그의 모든 배하에 그의 심복을 배치하여 두기에 범연치 아니하였고, 그래서 선혜청의 아전이나 광흥창의 고지기(倉庫지기)들도 한가지로 민의 동류요 심복이었다.
 
194
일찌감치 준다고 하고서 병정들을 모이게 하여 놓고는 아전들과 고지기들은 창고 안에서 오래도록 무엇을 하는지 꾸물거리고 수군덕거리고 하였다. 아침부터 다뿍 흐린 날이 무덥기는 하고, 병정들은 더딘 불평으로 여기서 저기서 불뚝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침 새때나 되어서야 겨우 창고문은 열렸다.
 
195
이름을 부른 대로 늙수그레한 한 병정이 맨먼저 쌀을 받았다.
 
196
쌀섬은 쿨럭하고, 겉으로 보기에도 반 섬밖에는 안되어 보였다.
 
197
“이게, 한 섬이람?”
 
198
늙은 병정이 볼먹은 소리로 두런거린다.
 
199
“한 섬으루 들어와 있은깐 한섬으루 내줄 뿐일세, 우리는.”
 
200
고지기의 대거리였다.
 
201
“제길, 열석 달 만에 겨우 준다는 게 마속이나 제대루 주어예지!”
 
202
그러면서 늙은 병정은 매끼를 풀고 쌀을 들여다본다. 누런 통미(玄米)였다. 절구에 다시 쓸어야 먹을 통미였다.
 
203
“아니, 무슨 녀석에 쌀이 또 이렇담?”
 
204
“쌀이 어떻단 말여?”
 
205
고지기가 짐짓 아니꼽게 거듭떠보면서 지청구를 하고는
 
206
“그 댐, 누구여? 척척 나서 받어.”
 
207
하고 건성 재촉이다.
 
208
“누런 통미를 주니, 말이지.”
 
209
“통미건 엠병이건, 내주는 우리게 아랑곳이 어딨어?”
 
210
“생판 이걸 가져다 먹으란 말야?”
 
211
“잔소리 정치게두 허이! 배때기가 불렀구먼? …… 못 먹겠으면 고만 두지?”
 
212
“제길, 요(料)가 아니라 거지 동냥인가?”
 
213
늙은 병정은 하릴없이 쌀섬을 꺼들고 돌아선다.
 
214
일변 그러는 동안에 다른 몇 병정이 각기 쌀섬을 받아가지고는 제마다들 마속이 차지 못하는 것과 쌀이 좋지 못한 불평을 꾸뚝거린다.
 
215
“유복만이?”
 
216
부름에 응하여
 
217
“예으이!”
 
218
하고 일부러 긴 대답을 하면서 복만(柳卜萬)이가 성큼거리고 나가더니, 쌀 섬을 한 머리를 출썩한다.
 
219
“흥! 쌀 한 섬에서 반 섬씩이나 꽈먹는 건 좀 과한걸!”
 
220
빈정빈정, 그러고는 매끼를 활활 풀고, 쌀을 한 줌 쥐어 올리면서
 
221
“쌀이 누런 거야 고지기 탓은 아닐 테지만서두……”
 
222
하고 주먹의 쌀을 들여다보다가
 
223
“잘 한다! 게다가 모래가 절반야?”
 
224
하면서 천천히 고지기와 아전들에게도 눈쌀 팽팽한 얼굴을 돌린다.
 
225
쌀을 받은 병정들은 제각기 제 쌀섬에서, 쌀을 아직 안 받은 병정들은 쌀을 먼저 받은 병정의 쌀섬에서 제마다 쌀을 한 줌씩 쥐어내어 들여다보면서, 과연 모래가 절반이나 섞인 것을 발견한다.
 
226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셈이냐, 열석 달 만에 고작 한 달치를 준다는 것이 마속이며가 겨우 요 꼴이야 하면서 불뚝거리는 소리가 왁자한 가운데, 별안간 한 소리가 우렁차게 울린다.
 
227
“저놈들의 농간이다!”
 
228
김영춘(金永春)이의 녹슨 목청이었다.
 
229
이 고함소리에 화하는 듯, 병정들은 얼굴에 와락 분노가 타오르면서, 일제히 고지기와 아전들에게로 대고 아우성을 친다.
 
230
“저놈들 밟어라!”
 
231
“천하에 무도한 놈들!”
 
232
“저놈들 죽여라!”
 
233
다음 순간에는, 와 하는 함성과 더불어 행동이었다. 명색이나마 병정이라, 병정답게 직접적이었다.
 
234
반주검을 당한 아전들과 고지기들이 목숨을 도망하여 민겸호에게 사실을 알리었다.
 
235
병정들은 쌀을 받지 않고 버린 채 병영으로 돌아갔고.
 
236
민겸호는 불같이 성이 났다. 버러지 같은 무리가 언감히 이런 무엄할 법이 있을까보냐라는 것이었었다.
 
237
시각을 지체치 않고, 포도청에 명하여 수괴로 지목되는 유복만, 김영춘 등 네 명을 체포하였다. 군대에서 생긴 일이라, 범행의 주동자를 붙잡는 데 힘과 시간이 들 것이 없었다.
 
238
붙잡혀 갇힌 주동자들은 대내(大內 : 王[왕])에 주청하여 다음날 일찌기 끌어내다 목을 벨 터이었었다. 영문으로 돌아간 병정들은 무위영의 대장인 이하영(李夏榮)에게 사연을 호소하였다. 이하영은 군사의 요포에 관하여는 아무 권한이 없다면서 민겸호에게 미뤘다.
 
239
대장도 모른다면 우리의 일은 우리들이……라는 결단을 가지는 수밖에 없었다.
 
240
그러는데다 동료가 붙잡혀가고 내일 아침으로 처형이 되리라는 소식이었다.
 
241
그것은 마치 타는 불에 기름을 부은 형국이었다.
 
242
‘들고 일어서자꾸나!’
 
243
‘죄면 그놈들만 죄더냐?’
 
244
‘죽어두 같이 죽자꾸나!’
 
245
‘이왕지사 한번 벌인 춤이다.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꾸나!’
 
246
‘워너니, 놈들 아니껍더라!’
 
247
‘놈들의 배때기를 좀 창으루 찔러보자꾸나. 피가 나나 아니 나나.’
 
248
‘이 따위루 만만히 사는 녀석에 세상, 한바탕 들부수구 나서 일찌감치 죽어버리는 것두, 속시언하지!’
 
249
‘아따, 죽으면 한번 죽지 두번 죽는다더냐?’
 
250
‘성즉군왕이요, 패즉역적이란다. 이괄(李适)이나 홍경래(洪景來)두 운이 조금만 좋았드라면 용상(龍床) 차지를 했더란다!’
 
251
‘양반이 무선가, 우리 창(槍)이 무선가, 한반탕 대보자꾸나.’
 
252
‘고 뇌꼴스런 놈들, 이판에 안 족쳐대구, 언제 다시 만나느냐!’
 
253
이런 울분과 결기와 자신과 그리고 막다른 골에 몰릴 생각과로 병정들은 선뜻 무기를 잡고 일어서게가 되었다.
 
254
동별영(東別營)으로 몰려가 무기를 빼앗아 가졌다.
 
255
소식을 듣고 장위영의 병정들과 또 도태된 묵은 병정들이 달려들어 합세를 하였다.
 
256
오정이 조금 지나서였다. 지체치 않고 드디어 행동은 개시되었다. 대를 갈라 한 대는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가 대원군에게 원정을 하였다. 행동을 통솔 지휘할 지도자를 가지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원군의 집정시절에 훈련 편성되고, 그의 명령으로 누차의 실전에 나아가고 하였다는 인연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다. 이 그들이 대원군을 찾았다는 것부터가 단순히 질서 없고 목적 없는 폭도인 것이 아니요, 농후하게 정치성(政治性)을 띤 일종의 봉기행동(蜂起行動)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었다.
 
257
대원군은 ‘오냐, 때만 오느라’하고 벼르면서 기다리던 그 ‘때……’가 마침내 온 것이었었다.
 
258
대원군이 누구라고 기회를 포착하기에 일호 범연하였을 리가 없었다.
 
259
일설에는 반란군이 동별영에 집결하여 있던 그 자리에 대원군은 자진하여 벌써 돈과 주식과 더불어 어떤 밀령(密令)을 보내었고, 그것으로 하여 반란군은 기운을 더 얻었으며, 아울러 그들의 장수로서의 대원군을 생각케 하는 자극을 준 것이라고도 하였다.
 
260
행동하는 반란군에 시민이 합류를 하였다.
 
261
병정과 시민으로 된 한 대는, 원망의 과녁이던 민겸호, 민창식, 이최응, 조영하, 김보현 등의 집을 부수고, 더러는 불까지 지르고 하였다. 이최응은 곳간 열쇠를 쥐고, 뒷담을 넘다 난군의 도끼에 찍혀 죽었다.
 
262
옥을 깨뜨리고 붙잡혔던 동료 이하 많은 죄수를 놓았다. 죄수의 참가로 행동은 한층 더 사나와졌다.
 
263
또 다른 한 대는 훈련원 하도감으로 몰려가 일본 교관 굴본예조와 통역생 일본인 하나를 죽였다.
 
264
또 더 많은 한 대는 서대문 밖으로 몰려나가, 일본공사관을 포위하였다.
 
265
일본공사 화방의질은 사십 명의 관원을 거느리고 총과 칼을 겨누면서 처음에는 농성을 하였다.
 
266
군중은 돌팔매와 화살과 몇 자루의 총으로 공격을 하다가, 나중 가서는 이웃에 불을 질러 화공을 하였다.
 
267
화방의질은 할 수 없이 저희의 손으로 공사관에 불을 지른 후 삼십 명이 한 덩이가 되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면서 정문으로 좇아 혈로를 뚫고 나왔다.
 
268
큰비가 쏟아지는 어둔 밤이었다. 군중은 아우성을 치면서 뒤를 쫓았다.
 
269
일본공사 일행은 싸우며 쫓기며 경기감영 안으로 피하여 들어갔다가 다시 남대문 밖으로 해서 양화진으로 도망을 쳤다. 그들은 남대문으로 좇아 창덕궁으로 피하여 궁정에 보호를 청하쟀던 계획이었으나 남대문이 잠기어 할 수 없이 양화진으로 가 가지고 인천으로…… 인천서 다시 반란군에게 쫓기어 영종도로 건너가 어선을 뺏어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마침 영국배를 만나 건짐을 입고 본국으로 돌아갔었다.
 
270
이 난리에 서울과 인천에서 일본인 열세 명이 죽었다.
 
271
마지막 중심세력의 한 대는 돈화문으로 좇아 창덕궁으로 몰려들어갔다.
 
272
민겸호, 민창식, 김보현 들이 왕의 눈앞에서 창과 칼에 넘어졌다.
 
273
난군은 그러면서 일변 민비를 잡아내라, 구미호(九尾狐)를 죽여라 하고 아우성치면서 궁중을 뒤지었다.
 
274
이리하여 궁중을 비롯하여 장안 천지는 때마침 지축을 씻을 듯 비 쏟아지는 밤, 피묻은 장기를 들고 화경덩이 같은 눈으로 제웅을 찾으면서 고함지르고 달리는 난군의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275
그에 대조되어, 세도하고 행학하던 사람들은 벼락을 맞은 듯 숨어 들어가 몸을 떨었고.
 
276
경풍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처음부터 떨고만 있던 고종은, 급한 대로 하릴없이 대원군의 입내(入內)를 명하였다.
 
277
이미 날이 어둔 후였다.
 
278
대원군은 마침 입내할 채비로 의관을 갖추고 교군까지 등대시키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279
대원군은 즉시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280
고종은 대원군에게 시국의 수습을 부탁하였다.
 
281
대원군은 스스로가 계획은 하지 아니한 쿠데타를 횡재한 것이었었다.
 
282
대원군은 의기양양 관물헌(觀物軒)에 높이 앉아 우선 반란군에게 궁중으로 부터 물러나갈 것을 명령하였다.
 
283
반란군은 대원군이 다시금 집정의 자리에 오른 것을 만세부르면서 순순히 창덕궁으로부터 물러나갔다.
 
284
이때나 그 뒤에나 대원군은 반란과 범궐(犯闕)의 죄를 다스리기 위하여 형식상으로나마 한 명의 범인도 체포한 것이 없었다.
 
285
대원군도 반란군도 민비는 정녕 난군의 손에 죽었거니 하였다. 과연 이튿날 아침에도 민비는 궁중에서 보이지 아니하였다.
 
286
대원군은 안심하였고, 밝는 날 아침 부랴부랴, 국상(國喪)을 발표하였다.
 
287
민비는 그러나 하마 위태할 뻔까지 하였던 것을 홍재희(洪在羲)라는 군사에게 업히어 궁녀인 것처럼 하고 몸을 화개동 윤태준(尹泰駿)의 집으로 피하였다가, 이튿날 새벽 셋교군을 얻어 타고서, 그 생지(生地)인 여주(驪州)로 무사히 달아나가지고, 여주로는 안심이 아니 되어 다시 장호원(長湖院)으로 옮아 민응식(閔應植)의 집에서 행색을 숨기고 환궁하던 팔월까지 머물러 있었다.
 
288
대원군으로는 생각지 못한 실수라고 할 것이었다.
 
289
불시의 국상의 발포로 백립(白笠)값이 뛰어오르고 동이 나고 하였다.
 
290
민비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줄도, 또 어떤 재앙이 닥쳐오고 있는 것도 모르고, 대원군은 태연히 새 정부를 꾸민다, 무얼 한다 하기에 골몰하였다.
 
291
임시 급한 대로 대원군을 불러들이기는 하였으나, 고종도 고종이려니와 그쯤의 난리로 뿌리가 빠질 미약한 세력이 아닌 민파에서는 대원군의 재차의 집권을 그대로 두어두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292
즉시 천진에 영선사(領選使)로 가 있는 김윤식(金允植)에게 급사를 보내어 대원군이 난을 일으키어 사태가 심히 위급하니 급급히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하여 주도록 청국 조정의 이홍장에게 요청하라는 기별을 하였다.
 
293
이홍장에게는 조선의 내정을 간섭함으로써 잠시 잃어버렸던 조선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도로 찾기에 마침 좋은 기회였었다.
 
294
대원군의 불란서 천주교 선교사 살해사건으로, 청국 주재의 불란서 공사 베로네가 청국 조정에다 대고,
 
295
“너의 속국(屬國)이라는 조선이, 이러한 사단을 저질렀으니 어떻게 할 터이냐?”
 
296
하고 항의를 한 데 대하여 청국조정에서는
 
297
“조선이 청국의 속국은 속국이라도 내치, 외교, 군사를 자래로 독립해서 행하였은즉, 그에 관계된 책임을 청국은 지지 않느니라.”
 
298
고 공교스러운 말로써 답변을 하였다.
 
299
이것이 증빙이 되어 그 뒤로 미국을 비롯한 여러 열국은 모든 문제를 청국을 젖혀놓고서 직접 조선정부와 교섭을 가질 뿐만 아니라, 외교의 실지 행위나 외교문서에 있어서도 청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의 인정을 거부하여 왔었다.
 
300
대원군의 손으로 한국이 저질러논 불란서 선교사 살해사건의 책임을 면하려고 임시로 말 한마디를 잘못하였다가 조선에 대한 간섭의 권리를 잃어버린 청국은 그래서 속으로 배를 앓으면서 기회만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었다.
 
301
때의 청국 조정의 사실상의 실권자였던 이홍장은, 배포 크고 노회하기 다시 없는 인물이었다.
 
302
이홍장은 병자년에 조선을 권하여 일본과의 조약을 맺음의 유익함을 말한 것이 있었다. 한 간접적인 내정의 간섭이었다.
 
303
그러나 그는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의 외교와 통상의 독점으로 말미암아 오는 일본세력의 단독 확장을 막기 위하여, 이홍장 자신의 적극 알선으로 임오년 사월에는 한미조약(韓美條約)을 맺게 하는 데 성공을 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도 계속하여 영국, 불란서, 독일, 노서아 등과 차례로 조약을 맺는 알선을 하였다.
 
304
이렇게 조선을 세계열강의 공동한 외교와 통상의 무대로 꾸미어 놓음으로써, 어느 한 나라의 독점을 막는 복선을 만드는 데 이홍장은 우선 성공을 하였었다.
 
305
반란이 난 지 스무날 만인 6월 29일에는 벌써 오장경(吳長慶), 마건충(馬建忠), 정여창(丁汝昌)이 원세개(袁世凱)와 함께 거느린 3천의 청병이 벼락치듯 서울도 들이닥쳤다.
 
306
이때 반란군은 대원군의 묵인 아래, 이태원(梨泰院)과 왕십리(往十里) 방면에 도합 천여 명 가량이 집결하여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자동적으로 대원군의 휘하에 든 것이 되었고, 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이상 정부군(政府軍)이나 다름없는 아무런 위험성도 없는 세력이었다.
 
307
일반 시민도 반란집단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가, 각기 본래의 시민으로 돌아갔다.
 
308
따라서, 반란은 사실상으로 이미 진정이 된 것이었고, 그러므로 반란을 진압키 위한 청국의 군사적 원조란 벌써 의미가 없던 것이었었다.
 
309
청국은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조선을 신국(臣國)을 삼아, 청국을 상국(上國)으로 섬기게 하고 조공(朝貢)을 바치게 하고 하는 쯤의 봉건적인 명목상의 종주권(宗主權) 따위는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19세기가 다 가고, 20세기가 밝아오는 이날에, 조선의 국왕에게 천자(天子)의 대접을 받고, 약간 조공이나 들어오는 것을 받아먹고 한다고, 별안간 군살이 한 점 나오는 바도 아니요, 반대로 조선의 국왕이 신열(臣列)에서 떨어져 나가고, 약간 들어오던 조공이나 없어지고 한다고, 졸지에 불편을 느낄 내력도 없고 한 것이었다.
 
310
그런 것보다는, 현대적이요 제국주의적인 실질상의 종주권 ─ 정치와 군사와 외교와 산업과, 이런 모든 권한을 손아귀에 쥐고서 자유로이 지배와 착취를 할 수가 있는 통치권(統治權) 이것이 필요하였다.
 
311
19세기 중엽 이후, 세계 식민지 혹은 상품식민지 사냥의 화살이 극동으로 집중이 되면서, 그동안까지는 단순히 지나대륙과만 교섭을 가지는 데 그쳤던 조선반도는, 선잠 깬 눈을 비비면서 우격다짐으로 국제무대에 올라앉히운 바가 되었다. 여기에서 조선은 조선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누구든지 조선을 지배하는 자가 곧 극동을 지배하는 패권을 잡는다는 중요한 물건이 되었었다. 대신 조선으로부터 쫓기는 자, 곧 극동으로부터 쫓기는 자였고.
 
312
청국이 저의 원 땅덩이도 너무 커 주체를 못하고서 남에게 찢기고 발기고 하면서도, 손바닥만한 조선에 대하여 그렇듯 연연한 미련을 가지는 연유가 다름 아닌 그 극동에서의 선수권(選手權)을 차지하자는 데 있던 것이었었다.
 
313
이홍장의 그와 같은 정치적 식견은 가히 상줄 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낡아빠져 제 한몸도 주체를 못하는 늙은 청국으로는 분수 없는 욕심이었다.
 
314
청병은 들어단짝 이태원과 왕십리 방면의 반란군을 소탕하였다. 전 수효의 반 이상인 6백여 명을 살상하고, 2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많은 시민이 살상되었다. 이틀 동안의 이 소탕작업에서 청군의 손해는 겨우 두 명이었다. 눈 오는 날, 학교의 아이들이 토끼사냥이나 하는 푼수밖에 아니 되는 수월한 행동이었다.
 
315
연회를 한다고 청군 황사림(黃士林)의 진중으로 대원군을 꾀어다 거기서 교군에 싣고, 청병의 감시로 남양만에 매어 있는 청국 군함 평원호(平遠號)에 태워 천진으로 데려갔다. 체포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거조였다.
 
316
그러고는 주복(周馥), 원보령(袁保齡), 마건충(馬建忠)을 심문관으로 그의 반란 일으킨 죄를 심문케 하였다.
 
317
대원군의 답변은 어엿하였다.
 
318
나의 보정시대(輔政時代)에는 각 영의 군사의 요포는 제 달 제 달 반드시 치러주었다. 민겸호가 집권을 하면서는 반란이 일던 그때 현재로 열석 달치가 밀렸었다. 군사가 불평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열석 달이나 밀렸다가 겨우 한 달치를 준다는 것이 마속은 절반이나 모자라고, 품질이 좋지 못한 통미인데다, 또 모래를 섞어서 주었기 때문에, 군사들이 아전과 고지기들에게 손을 댄 것이다. 잘못은 아전과 고지기들에게 있고 그 책임은 민겸호가 져야 할 것인데, 민겸호는 도리어 군사들을 체포하여 함부로 처형을 하려고 하였다.
 
319
“나는 왕의 부름을 받아, 궁중에 들어가서 난군을 타일러 물러가게 하고 시국을 수습한 사람일 따름이다.”
 
320
심문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이 흐지부지하였으나, 대원군은 천진에서 다시 보정부(保定府)로 옮긴 바 되어 삼 년 동안 연금(軟禁)의 유폐생활을 하였다.
 
321
잘나나 못나나 남의 나라의 국태공(國太公 : 王[왕]의 生父[생부])이었다. 왕명을 받은 섭정이었다. 남의 국민의 개인에 대하여서도 그러지 못하는 법이거든, 황차 그런 지위의 공공한 인물을 그처럼 체포하고 심문하고 처벌(幽閉)하고 하다니 이것은 불법을 지나 한 개의 행패요, 민족과 국기가 본새 있게 받은 모욕이며 멸시인 것이었다.
 
322
이 대원군 사건을 계기로 조선 상하에 반청의 열(反淸熱)이 이윽히 표면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었다.
 
323
정권은 다시 사대당의 수중으로 들어가, 민씨 일문이 실권을 쥐고 그 낭당으로 정부가 조직이 되었다. 민태호, 민영익, 홍순목, 김병국, 조영하, 한규직, 이조연, 민영목…… 이번 군란에 죽다 남은 여당과 그 일파들이었다.
 
324
얼마 아니 있다 장호원에 숨어 새숨을 쉬던 민비가 청병의 호위 아래 환궁을 하고, 그리함으로써 민파의 권세는 더욱더 견실하여졌다.
 
325
정부의 기구를 변경하되, 청국의 제도를 본떠 통리아문을 설시하였고, 외무아문(外務衙門)에 청장 마건상(淸將馬建常)이 고문으로 들어앉아 외교를 감독하였다.
 
326
내무아문에는 이홍장이 천거한 그의 심복 독일인 묄렌도르프(穆麟德)로 독판(督辦)을 삼아 내무행정을 감독케 하고, 역시 이홍장의 천거한 그의 심복 영국인 하트는 세관에 관한 일체를 감독케 하고 하였다.
 
327
장안의 질서와 궁성을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청병은 대부분이 그대로 눌러 주둔을 하였다.
 
328
군제를 청국식으로 개혁하고, 청국 장교로 하여금 한국군대를 훈련케 하였다. 군사고문에 청장이 들어앉은 것은 물론이었다.
 
329
이리하여 한국의 외교, 내치, 군사 그 밖에 모든 행정과 시책은 대소를 막론하고 청국측의 감독과 지휘를 받게 되었다.
 
330
완연 군정(軍政)이요 신탁통치(信託統治)였다.
 
331
청군측의 이 모든 활동과 조치는 참으로 놀랄 만큼 신속하고 민활하였다. 나이 겨우 스물이 조금 넘었을 뿐인 원세개의 수완이었다.
 
332
원세개는 그의 나이하고는 깔볼 수 없는 엉뚱스럽고도 민첩한 정치가였다. 그의 조선에 있어서의 지체는 아직 총리주찰조선교섭통상사의(總理駐察朝鮮交涉通商事宜)라는 길고 괴상하되 평범한 것이었으나 조선을 매만지는 전권자였었다.
 
 
 

5

 
 
334
“그러니까, 사가집(私家) 같으면 제 자식이 말을 아니 듣는다구 남더러 이리 들어와 우리 자식놈을 좀 때려주…… 이런 심이군요?”
 
335
그새 저고리는 뒤집어 치워놓고, 다시 바지에다 역시 이불만 하게 솜을 두고 있던 손자며느리가 할머니가 이야기를 마치는 뒤를 받아 그렇게 묻는다.
 
336
“이를테면, 그렇지……”
 
337
할머니는 이빨 없는 빨간 잇념으로 아기처럼 하품을 하면서 다시
 
338
“부재(父子) 쌈에…… 쌈이 아니라, 애비가 살림을 잘 못한다구 자식이 불뚝대는 것을, 애비 녀석이 순검을 불러대서 자식놈을 두들겨 패게한 심이지.”
 
339
“그래 그 세상에 무도하기루 이름난 청병을 불러다 제 나라 백성을 들이 쳐죽이구 했군요? 흥!”
 
340
“죽이다니, 머 개잡듯 했드란다…… 반군만 죽였나? 양민은 얼마가 죽었길래. 그리구 사람만 죽이잖아 재물 노략하구, 부녀들 겁탈하구…… 에구, 세상 그런 행패라니! 지금 생각해두 몸서리가 친다.”
 
341
“조선놈은 다 그모양예요. 어떡허다 세력을 잡은다치면, 걸 가지구 제 일을 하려 들구. 누가 무어라기가 무섭게, 외국 군대 불러들여, 반대파를 죽이구…… 정치나 국민은 어디루 갔던, 나라나 백성은 뉘놈의 물건이 되건, 뉘놈의 종이 되건 저이들 세력, 저이들 지체만 지탕을 할 영으루 걸핏하면 외국에다 청병을 해다간 백성을 도륙하구, 국토를 짓밟게 하구. 순전히 제 한몸, 제 한 집안일 하자는 노릇 아녜요?”
 
342
그러고는 손자며느리는 혀를 끌끌 차고 나서
 
343
“망해 싸죠…… 그런 놈의 정치가 아니 망하구 어떡허게요? 열 번두 망해 싸죠.”
 
344
“그러니깐 버얼써 다 망하지 아니했니?”
 
345
“그러게 말씀예요.”
 
346
할머니는 이윽히 손자며느리가 그 이불만하게 굉장히 솜을 두고 있는 바지를 건너다보다가 합죽 웃는다.
 
347
“그게 아범 옷이냐?”
 
348
“네에.”
 
349
“무슨 솜이 그렇게 요란하냐? 젊은 사람의 옷을……”
 
350
“………”
 
351
손자며느리는 웃고 대답이 없다.
 
352
이 옷을 입을 당자의 소식을 알러 전주(全州)를 간 시어머니가 돌아오는 날이 오면, 정녕 이런 특별하게 만든 솜바지 저고리가 즉시 소용이 될 반갑지 못한 소식을 가지고 올 것을 손자며느리는 벌써 짐작을 하고 있던 것이 었었다.
 
353
“이 사람들은 오늘두 소식이 없을려나 보구나?”
 
354
할머니가 걱정이었다.
 
355
이 달 초생에 집을 나간 채 한 달이 되도록 소식이 없는 손자 ─ 시방, 이 솜바지 저고리를 입을 본인이요, 그리고 이 손자며느리의 남편이요 한 관희(觀熙)와, 그리고 그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엊그저께 전주(全州)를 간 그의 모친 윤씨(尹氏) ─ 할머니의 며느리…… 이 모자 둘을 두고 하는 말이었었다.
 
356
“그럼요. 찻시간두 벌써 지나구……”
 
357
손자며느리가 마악 그렇게 대답을 하는데, 건너편 마을에 있는 지서에서리라. 별안간 싸이렌이 우우 밤의 적막을 찢고 처참히 운다.
 
358
통행금지의 싸이렌은 초저녁에 울었었다.
 
359
싸이렌은 우우 울고는 잠깐 그쳤다 또 울고, 또 그쳤다 울고 여러 번을 거듭한다.
 
360
방안의 얼굴들에는 긴장과 우울한 빛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361
밤조차 숨을 죽이는 듯 끝없이 괴괴하다. (1949. 1. 3)
 
 
362
<新天地[신천지] 1949년 2·3월호>
【원문】늙은 극동선수(極東選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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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늙은 극동선수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 신천지 [출처]
 
  1949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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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12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