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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상(斷想)의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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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9. 20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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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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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의 원고지가 서가 위의 설백석고(雪白石膏)의 소녀상같이 희고 초콜릿빛 파이프의 골동이 고귀한 고대의 도기같이 윤택하게 빛나고 ─ 이것이야 반드시 가을의 탓이 아니라 할지라도 소탁식분(小卓植盆)의 아스파라거스 잎새가 병든 것같이 여위었음은 ─ 이것은 바로 가을의 탓이 아닐까. 요리 접시에 오르는 민출한 아스파라거스의 줄거리와는 전연 이종족(異種族)같이 이 분재의 것의 대와 잎새는 왜 이리도 애잔하고 섬세하고 사치한가. 마치 병욕(病褥)위에 누운 여인(麗人)의 자태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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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래(性來)의 바람도 그러하거니와 가을의 의상이 또한 그러한 인상을 입히는 것이 아닐까. 더구나 분(盆) 안에 깔아 놓은 하아얀 조개껍질 ─ 이것도 이제는 싸늘한 철늦은 감각을 줄 뿐이다. 방안에 있으면서 바다의 음향을 들으려고 여름 해변에서 주워 온 조개껍질 ─ 이제는 그만 펀뜻 계절의 부채를 닫혀 주었으면 하는 느낌을 준다. 바다는 여름의 것이지 가을의 바다는 아무래도 철지나서 썰렁하다. 나의 귀의 모양이 조개껍질과 같은 까닭으로가 아니라 바다가 가까운 까닭으로 방안에 앉아 있어도 처량한 음향이 쉴새없이 들려 온다. 그 음향이 모르는 결에 가을을 실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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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금연화, 금전화, 카카리아, 석죽, 로탄제, 백일홍, 금어초, 비연초, 시차초, 캘리포니아 포피, 봉선화, 분꽃, 애스터, 채송화, 들국화, 만수국, 칸나, 글라디올러스, 달리아, 샐비어,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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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에 적혀 있는 가을 화초의 가지가지. 칸나와 글라디올러스의 농염한 진홍의 열정보다도 역시 카카리아, 금어초, 비연초, 애스터, 샐비어의 아담한 자태가 가을 성격에 더 잘 맞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아름다운 가을 화초는 싸리나무(萩) 꽃일 것이다. 깨끗하고 초초한 풍채 그대로가 바로 맑은 가을의 상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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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구석에 자작나무(白樺)로 토막집을 짓고 주위에 싸리나무를 그득히 심어 보았으면 ─ 가을 공상의 하나.
 
7
의자를 들고 마루에 나가니 이웃집 능금나무가 눈앞에 가깝다. 짙은 청지(靑地)에 붉은 별을 무수히 뿌려 놓은 페르시아 자수와도 같은 능금나무 ─ 5월에 꽃필 때의 인상과는 전연 달라 고대적 이국적 느낌을 줌은 무슨 까닭인고.
 
8
“아홉 해 동안의 무료한 세월을 능금꽃을 바라보며 자식의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운운의 워즈 워드의 문학에는 친밀감을 느끼면서 열매 맺은 이웃집 능금나무에 도리어 고색적 이국감을 느낌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능금의 열매, 그것이 인류 최고의 불후의 고전이기 때문일까.
 
9
들 옆 포도시렁에는 포도송이가 익을 새 없이 아이들이 쥐어뜯어 가서 지금에는 이지러진 검은 송이가 덩굴 밑에 군데군데 들여다보일 뿐이다. 포도라니 재작년의 가을이 생각난다. 지금에는 없는 고인과 서너 너덧 사람 작반하여 성북동의 포도원을 찾았을 때의 가을 ─ 날도 아름다웠고 마라카라든지 무엇이라든지 포도의 미각도 잊을 수 없거니와 마음도 즐겁더니. 지금에는 고인의 그림자조차 없다. 모든 정서와 비밀을 품은 채 그는 가만히 가버린 것이다. 비밀이라면 땅속에 파묻혀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비밀도 많은 것 같다. 포도의 씨가 땅에 떨어져 다시 싹이 나는 것과는 뜻이 다르다. 성북동의 가을 ─ 추억의 보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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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왔다고 산에 오르고 들에 나가지 않고도 방안에 앉아서 생각하는 가을이 더 절심함은 무슨 까닭인고. 현실의 가을보다도 관념의 가을이 월등히 감동적임은 무슨 까닭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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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꿈의 날개가 상념의 세상을 비상하는 외에 일간·월간의 간행물이 가을을 전하여 주고 화집의 페이지가 환상을 그려 준다. 그 위에 베를레느의 비올롱 아닌 육현금의 판당고의 줄을 옆에서 누가 뜯어나 주면 ─ 자신이 뜯는 것보다도 무기교의 것이나마 남이 뜯는 것을 들음이 한층 더 아름답다 ─ 최상급의 가을의 정서가 네 쪽의 벽으로 막힌 공간 안에 넘쳐흐르는 것이다. 아코디언 ─ 부드러운 음률을 가지면서도 가을 악기로는 요란하다. 벽장 속에 간수하였다가 겨울에나 집어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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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갔던 길에 낟 채로 사온 한 파운드의 모카가 아직도 통속에 아니 남은 것이 속 든든히 생각된다. 파아코레터를 사용하니 넣은 가루의 분량만 아끼지 않으면 가배(珈琲)의 진미가 조금도 상하지 않는다. 우유도 목장에서 신선한 것이 온다. 가배에 관한 한 서울의 끽다점(喫茶店)을 부러워하지 아니하고도 지낼 수 있으니 이 역 가을의 기쁨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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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가지 부자유스럽고 쓸쓸한 것은 여인풍경의 빈궁이다. 적막한 고성터인 이곳은 당세적 여인풍경과는 무릇 인연이 멀다. 댕기드리고 ‘골로시’ 신은 촌랑(村娘)조차 새벽 하늘의 별같이 드물게 눈에 띠일 뿐이니, 하물며 속발여장(束髮麗粧)의 당세랑(當世娘)에 이르러서야 채색적 시각은 거의 기아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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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만 드레스에 새빨간 목도리 감은 백석혜모(白晳彗眸)의 풍류랑 ─ 그의 마음까지 차지함은 귀찮은 사업에 속하겠지만 적어도 야심을 잊은 시각적 풍경만이라도 풍안(豊眼)이었으면 오죽 생색이 있을까. 그러나 그것도 이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일이니 이 역 활자와 화집으로 꿈꿀 수밖에는 없는 노릇이다. 벽 속의 가을 ─ 그것은 꿈의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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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성(雉城)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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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33. 9. 20
【원문】단상(斷想)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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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李孝石) [저자]
 
  1933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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