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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利三郞[이삼랑]) 요시의 남동생, 가구 만드는 목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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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근교에 있는 무사시노의 작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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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의 전당포, 삼대나 이어온 가게로 고풍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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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하[마루]는 앞에 있는 상점과 이층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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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정면은 아담한 정원이 있고 방공호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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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방 정면에는 불단이 있고 무대 하수(下手)에는 커다란 고목이 서 있다. 이 나무를 중심으로 울타리 너머로 이웃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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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쾌청한 가을날, 뒤뜰 쪽에서 마을의 근로봉사단들이 와서 일하는 소리가 활기차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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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를 만드는 도시가 자전거를 세우고 현관 쪽에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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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누님. (대답이 없자 안을 향하여)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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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2층에서 손에 전당포 대장을 들고 내려온다.) 아이구, 도시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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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방석을 내주며) 장사는 여전히 바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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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요새 가구점 잘 되는 거 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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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왜라니요. 주문은 많이 들어오지만 목재(木材)가 있어야죠, 목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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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정말, 어디서나 다 재료부족이라고 야단들이야. 옆집 미장이도 큰일났다고 걱정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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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뒤뜰에 있다. 창고 기둥이 네 개나 썩어서 새 나무로 고친대요. 거기다 이번 장마에 돌담이 무너져서 그것도 고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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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조상 대대로 50년이나 된 창곤데요. 썩을 때도 됐죠. 그런건 목수한테 시키시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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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목수보다도 오늘은 마을 청년단에서 근로봉사로 나와 돕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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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그렇단다. 단장이 솔선해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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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귀를 기울이며) 여자들도 왔나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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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응, 그녀들에게는 전당잡힌 물건들 정리를 부탁했어. 올여름엔 장마가 길어서 곰팡이가 많이 생겨 이번 공휴일에 한번 손질 좀 하려고 하던 차에 마침 청년단들이 와서 뭣 좀 돕겠다 하기에 부탁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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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2층에서 여자 청년단원 하나가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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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청년단원 아주머니, 좀약과 신문지가 좀 모자라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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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아, 여기 있어요. (좀약과 신문지를 건네주면서) 정말 너무 수고가 많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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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청년단원 아이, 아주머니도 별 말씀을…… 댁이 출정군인(出征軍人) 댁인데 돕는 게 당연하죠. (하고 2층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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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저렇게들 와서 도와주니 매형도 기뻐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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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그럼, 오늘은 아침부터 싱글벙글이란다. 일어나자마자 창을 한 가락 뽑는데 이 양반이 노래하는 건 시집 와서 처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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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누님, 그렇다면 오늘이 일 년에 한번밖에 없는 절호의 찬스네요.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안 올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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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약간 놀라며) 갑자기 무슨 얘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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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저 고목을 이번엔 꼭 좀 파시라고 전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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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네. 매형 기분이 좋을 때 누이가 한마디 해봐 주세요. 요전부터 몇 번 졸랐는데도 막무가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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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네. 요즘같이 재료가 부족할 때 저런 좋은 나무를 놔두다니 아깝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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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허지만 저 나무는 돌아가신 조부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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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지금은 세월이 변했잖아요. 그때는 저런 나무들로 목탄을 만들 때였으니 말예요. 남양이나 캐나다에서 흑단(黑檀), 자단(紫檀), 티크 등이 쏟아져 들어와서 우리 가구상들은 저런 고목 등은 안중에도 없었죠. 그러나 대동아전쟁 후 외국에서 물건들이 안 들어오니 말예요. 전 뭐 저 나무를 거저 달라는 게 아니에요. 6백 원 드릴까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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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네. 지하의 조부님께서도, 6백 원이면 당장 팔라고 하실 거예요. 어때요, 누님. 값이 괜찮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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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글쎄, 아무리 값이 좋아도 매형이 팔려 들지 않을걸.
58
도 시 그러니까 누이가 뒤에서 좀 거들라는 거 아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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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겨우 겨우 문은 안 닫고 있지만, 이대로 가다간 전업을 하든지 개척민으로나 떠나는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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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안쪽을 향해) 여보, 여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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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의 목소리 왜 그래, 지금 좀 바쁜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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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요시보고) 손 씻게 물 좀 갔다 주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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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손을 씻고) 장사는 계속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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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할 수 없이 하고는 있지만 재료난으로 폐업이나 다름이 없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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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그건 큰일이군. 배급은 전혀 안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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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2―3개월 만에 한번 나오긴 하는데 그걸로는 세 식구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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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문득 생각난 듯) 그럼 무슨 일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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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우리 집 고목에 대해서 의논 좀 하고 싶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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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실은 매형, 제 단골댁인 금성사(錦城寺) 자작(子爵)댁 아드님이 이번에 결혼을 하는데 저보고 가구 일습을 만들어 달라는 거예요. 허지만 아시다시피 전연 재료가 입수 안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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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그래서? 내게 저 고목을 팔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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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방금 말씀드린 대로 긴박한 사정이라서……, 그 대신 대금으로 6백 원을 드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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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네. 6백 원이면 저 고목 값으로 파격적인 값이죠. 물건에도 다 때가 있는 법인데 이 기회에 눈 딱 감고 제게 파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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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자네가 의논할 거라는 게 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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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아니, 그래 자네 단골손님을 위해서, 선조 때부터 삼대나 전해 내려온 저 나무를 자르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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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세상에 그 뭐라고 하는 자작의 멍청한 아들 신혼가구를 만들게 목숨보다도 귀중한 저 나무를 자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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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여보, 그러니까 쟤는 꼭 강요하는 건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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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돌아가신 우리 조부님께서 내게 뭐라고 유언하셨는 지는, 자네 누이한테 들어서 알고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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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그런 나에게 6백원에 팔라고? 나도 돈은 탐나네. 내겐 돈 모으는 일 외엔 낙이 없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조상의 유지와 뜻을 저버릴 순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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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그렇지만 매형, 이 물자난 시대에 저렇게 훌륭한 나무를 그대로 두는 건 조부님의 뜻이 아닐 거예요. 저 나무가 훌륭한 가구가 되어 지체 높은 댁 거실에 놓이면 지하에 계신 조부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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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듣기 싫네, 그게 고인에 대한 손자의 도리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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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아이 참 당신도, (동생보고) 너무 기분 상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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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일어서며)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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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얘야, 매형 성격을 알면서 가라고 했다고 일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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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시 또 좀 들려야 할 데가 있어서요. 이럴 줄 알았다면 애당초 말을 꺼내는 게 아닌데. 누이가 오늘 기분이 좋으시다 하길래……. 그럼 저 가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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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여보, 아무리 나무가 중하기로서니 그렇게 무안을 주면 어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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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당신은 입 다물어요. 설사 내가 이 나무를 처분하려 해도 옆에서 말리는 게 도리지. (나무를 쳐다보며) 여보, 저기 또 거미줄이 앉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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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그 작대기 좀 줘요. 거미라는 놈은 사람들이 잠깐만 방치해 놓으면 곧 거미줄을 치거든. 조모님이 생존해 계실 땐 일 년 내내 거미줄 한 올 끼질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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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이웃 어린아이가 밖에서 소리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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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아줌아, 그릇 가지고 저희 집에 잠깐 오시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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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네. 아빠가 뒤뜰에서 키운 무를 하나씩 드린대요.
114
(요시, 부엌에서 그릇 들고 나와 아이와 함께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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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작대기를 치우고 삽으로 나무 둘레를 정리하고 있는데 울타리 너머 옆집에서 삽질한 흙이 소오죠에게 튀어 온다.) 누가 남의 집에 흙을 끼얹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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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목소리 아저씨, 정말 죄송해요. 거기 계신 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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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안 돼, 거기 밭을 파면 우리 집 고목나무 뿌리를 다칠 텐데.
125
소오죠 다치지 않겠다니. 아무래도 다치게 될 텐데. 이거 봐라, 이렇게 뿌리가 찍혔잖아. 안 된다. 절대로 안 돼.
127
소오죠 너무한 건 바로 너다. 도대체 거기에 밭을 만들어 뭘 하려는 게야?
128
스미코 고구마하고 토마토 좀 심으려고요.
129
소오죠 심다니? 지금은 거의 수확할 때가 아니냐. 내년 봄에나 심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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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코 오늘 동회에서 공지(空地) 이용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조사나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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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공지이용? 거긴 공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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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억지부리지 마라. 이 고목 뿌리가 뻗쳐 있는 덴데 공지는 무슨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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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코 나무 바로 밑은 공지가 아니지만 그 둘레는 공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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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너와 말다툼해도 소용 없구나. 고구마와 토마토 키우는 것도 좋지만, 그 때문에 이런 유서 있는 나무가 죽는다면 동네에도 나라에도 이 될 게 없지. 하여튼 뿌리는 건드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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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코 허지만 아저씨, 그건 무리예요. 이 나무가 어찌 큰 지 뿌리가 우리 집 부엌까지 뻗어서 우리 집 어딜 파도 잔뿌리가 나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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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그럼 곤란한데. 작은 뿌리 하나에도 생명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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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코 잔뿌리 한두 개쯤 상해도, 끄떡 안 할 나무예요. 아저씬 정말 에고이스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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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코 이기주의요. 공지 이용도 이젠 옛날 얘기예요. 요샌 현관 앞이건 뒷문턱이건 땅만 있으면 사과 괴짝에 파를 심고 야단인데 아저씬 저 넓은 뜰을 함부로 파지 못하게 하시니 너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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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거, 부인잡지에나 나오는 지식을 떠들어 대지 말라구. 그쯤은 나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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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코, 토라져서 나가는데 요시코와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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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아니, 뿌리 근처에 파고 있기에 못 하게 했더니 공지이용에 대해 일장설교를 하잖아? 여학교 갓 나온 게 건방지게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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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그야 대학에 나가시는 이즈미 선생도, 이처럼 무를 심어 우리한테 나누어 주시고 동네 전체가 식량 증산에 노력하고 있는 판에 스미코가 그러는 게 당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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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그렇다면 나도 아무 말 안 했을 텐데, 그 계집애는 말로는 안했지만 이 나무를 베어 버렸으면 하는 거야. 이런 비상시에 이만큼 넓은 땅을 나무 하나 때문에 놀리는 건 아깝다는 거야. 이 나무를 베어서 거기에 감자, 토마토를 심자는 거야. 건방진 것 같으니. 뒤뜰의 대나무도 아닌데 5백 년이 넘는 나무를 무 자르듯이 자를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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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 여보, 설마 그 일로 스미코를 야단친 건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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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사람을 깔봐도 분수가 있지, 왜 모두들 저 나무 가지고 야단들야. 이게 다 동회장 농간이라구.
151
소오죠 그 친구가 모든 사람들에게 나발을 불고 다니는 거야. 어떻게 해서든 우리 나무를 자르도록 충동질을 하는 것 같아.
152
요 시 그런 근거도 없는 얘기 함부로 하지 말아요.
153
소오죠 귀에 들어가면 어때? 그러니까, 옆집 계집애도 당돌하게 나무를 자르라고 하지.
154
요 시 그건 오해예요. 그 아이는 우릴 위해 오늘 근로봉사까지 해줬는데요.
155
(이때 인기척이 나 요시, 입을 다문다.)
156
(동회장이 땀을 씻으며 나타나고 그 뒤를 여자 청년단원이 따라온다.)
157
동회장 이럭저럭 다 끝난 것 같습니다. 도구들은 다 씻어서 광에 넣었고요.
162
동회장 오늘은, 여러분 모두 수고들 했어요. 그만 해산들 해요. (모두들 떠나고 동회장만 남는다.)
163
소오죠 자, 올라오셔서 담배 한 대 피우시죠.
164
동회장 그럼 한 대 피울까요. 동회장일도 헐한 일이 아니에요. 입대하는 사람들, 금속회수니, 좌측통행이니, 예방주사에다 애국저축, 거기다 깨생산의 장려까지 숨쉴 틈이 없어요. 이렇게 이집 저집 다니면서도 담배 한 대 피울 시간도 없어요.
165
요 시 (차를 내놓고) 잠깐 뒷정리 좀 하고 오겠습니다.
166
동회장 네, 그러시죠. (요시, 나간다.) (차를 마시며) 요 2―3일 동안 징집장이 꽤 나온 것 같아요.
170
동회장 헌데, 오늘 조용히 부탁드릴 게 좀 있는데요.
172
동회장 근로봉사로 나와 도와드린 직후에, 이런 말 하기 좀 거북해서 내일 다시 올까 했지만 내일은 또 구청에서 동회장 회의가 있고 해서…….
175
소오죠 나무 얘기라면 아무 얘기도 말아 주오.
176
동회장 저도 댁의 나무는 거론하기 싫습니다. 이 마을의 명물 중의 하나이고 이 동네 어디서든 보여서 좋은 표적이 되어 주고 있거든요. 하지만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금속회수 다음으로 목재의 공출운동이 일어나고 있거든요.
178
동회장 새삼스럽게 설교하는 것 같지만, 전국은 나날이 험난해지고 전선에서는 비행기와 함께 배가 필요하거든요.
179
소오죠 동회장님, 나무공출의 취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허지만 이 나무는 우리 조부님의 유언이 있어서.
181
소오죠 조부님께서는 이 나무로 2층 창고를 지으라고 하셨어요.
183
소오죠 네. 조부님께서는 이 나무가 굵은 기둥으로 윤이 나 있을 걸 지하에서 기다리겠노라고 하셨어요.
184
동회장 아니, 커다란 창고를 둘이나 가지고 계신데 또 짓는다고요?
185
소오죠 저 창고들은 둘다 양철지붕에 나뭇결이 좋지 않은 소나무로 지은 거라 조부님께서는 벽돌로 잘 지어 기둥과 서까래를 저 나무로 하라고 유언하셨어요.
186
동회장 그야 조부님의 유언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국가존망의 때가 아닙니까? 황국의 흥패는 비행기와 배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아무리 방대한 자원이 있어도 배가 없으면 나를 수가 없으니 말예요. 적 측은 수백 척이나 되는 배들로 탄약과 양식을 속속 나르고 있는데 우린 전선보급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는 형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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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동회장님, ‘만들라, 보내라, 이겨라’ 는 저도 알고 있어요.
188
동회장 알고 있어도 그건 포스터의 문구를 외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알고 행하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더 나쁘죠. 얼마 전 해군성에서 목재 공출 발표가 있은 후 전국 방방곡곡에 이 운동이 확장됐고 황공하게도 황태후 폐하께서 정원의 나무들을 희사하셔 궁극적으로 고무나 석탄, 설탕 등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될 거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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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죠 동회장, 정말 이것만은 양해해 주세요. 이걸 보십쇼. 벌써 설계도도 만들었고 석재와 벽돌, 양회 등도 이미 다 사놓았구요, 경시청에 허가신청도 냈어요. 그래서 내일이라도 일을 시작할까 하니 어디 한 번만 좀.
190
동회장 그렇습니까? 공출은 어디까지나 자유의사로 하는 거지 권고나 강제는 취지에 어긋나지요. 그러니 나도 강요하진 않겠어요. 허나 자발적이라고 해도 내가 이렇게 돌아다녀야 하고…… 그리고 공출을 꺼리는 사람들의 구실인즉 “댁의 고목도 안 베고 있는데 왜 우리가 —— ”라는 거예요. 지금 당장 결정하시라는 게 아니니 한 번 다시 생각해 보시고 답을 주세요. 아이구, 바쁘신데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191
소오죠 모처럼 오셨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194
(동회장,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고 요시, 창고 쪽에서 돌아온다.)
195
요 시 (걱정스럽게) 동회장님이 모처럼 오셔서 부탁하셨는데 기분 상하시지나 않으셨는지.
196
소오죠 (힘 없이) 할 수 없지. 나도 괴로웠어.
197
요 시 당신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우리 나무를 눈독 들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게 다 시세 탓이라고 생각해요.
199
요 시 이제 난 집회나 반상회에도 얼굴을 못 내놓겠어요.
200
소오죠 무슨 소리야. 우리 집은 공출은 안 했어도 훌륭한 아들을 나라에 바쳤는데 주눅들 거 없어.
201
요 시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만 우리 아이가 출정할 때만 해도 마을 사람 모두가 분에 넘는 환송을 해주었고 동회에서는 성대한 송별회까지 해줬지 않아요? 더구나 오늘은 근로봉사까지 와서 해주고……. 동네의 호의를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202
소오죠 조상의 뜻을 받드는 건 자손의 의무요.
203
요 시 조부님 뜻대로 창고를 세우려면 아예 후딱 지어버리면 어때요? 모두들 저 나무가 서 있으니까 왈가왈부 하는 거예요.
204
소오죠 나도 그만한 생각은 하고 있어.
205
요 시 그렇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벌목꾼을 부르는 게 어때요?
206
소오죠 듣기 싫어, 벌목꾼이 어디 있어?
208
소오죠 저 나무를 깨끗이 잘 자를 수 있는 이는 옆집 스미코 아버지 자여몬밖엔 없다고.
209
요 시 그 양반은 기소(木會) 지방에 있는 산으로 벌목하러 가지 않았어요?
210
소오죠 그러니까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211
요 시 (어처구니없다는 듯) 기다리다니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212
소오죠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어.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214
소오죠 그 친구가 이번 여름에 우리 집에 저당잡힌 족자가 일 주일 전에 시한이 지났거든.
216
소오죠 그래 방매하겠다고 편질 썼지. 그 친구 허겁지겁 달려올 거야. 내 계략대로. 어쩌면 오늘쯤 올지도 몰라.
217
(이때 우체부가 번지를 찾는 모습, 나타난다.)
220
소오죠 바로 옆집인데 제가 전해드릴까요?
221
우체부 아뇨, 제가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22
소오죠 (만족한 듯) 필경 그 친구 전볼 거야. 당신 좀 가보고 와요. 몇 시에 도착하는지.
223
요 시 뭐 갈 것까지 있어요. (울타리 너머로) 스미코, 지금 전보, 아버지한테서 왔어?
226
스미코 25일 14시 30분에 동경역 착. 부.
228
스미코 네, 아저씨 역에 함께 가실래요?
229
소오죠 14시 30분이면 2시간이나 지났는걸.
231
요 시 요새 전보는 5―6시간 연착은 보통이야. 서로 어긋나면 안 되니까 그냥 기다리는 게 낫겠다.
232
(이때 자여몬, 넘어질 듯 뛰어들어온다.)
234
소오죠 아이구, 이게 누구야. 자여몬 아닌가?
237
요 시 네, 덕분에요. 참 오랜만이에요.
238
소오죠 4개월 만이야. 어서 올라오게.
239
요 시 (옆집에 대고) 스미코, 아빠 오셨어.
241
자여몬 (올라오면서) 자네 편지 보고 뛰어왔네. 설마 팔진 않았겠지?
242
소오죠 걱정 말게. 자네 건데 그럴 수가 있나. 잘 보관하고 있다네.
243
자여몬 아이구, 살았다. (목의 땀 씻는다.) 하루가 지나도 용서 없이 처분하는 자네 아닌가? 난 그 그림, 다신 못 볼 줄 알았지. (스미코, ‘아빠’ 부르며 뛰어온다.) 너 웬일이냐. 마중도 안 나오고.
245
스미코 아빠, 급한 일이란 여기 아저씨댁 일?
246
자여몬 그래, 별로 중대한 일은 아니지만…… 스미코, 너 집에 가 있거라. 오랜만에 저녁이나 차려다오. 여기 끝나는 대로 곧 갈테니.
247
스미코 맛있는거 차려 놓을 테니 빨리 오세요.
249
스미코 아줌마, 음식 차리는 거 좀 가르쳐 주실래요?
250
요 시 내가 도움이 된다면. 잠깐 실례하겠어요.
253
소오죠 그리 서두를 거 뭐 있나? 모처럼 고향에 돌아왔는데, 좀 앉아서 맑은 가을 하늘이나 바라보게나.
254
자여몬 그럴 틈 없네, 곧 떠나야 하니까.
256
자여몬 산을 떠난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벌써 산이 그리워지네.
257
소오죠 허 참, 자넨 벌목꾼으로 태어난 모양이야.
258
자여몬 정말 그런가 보이. 산은 정말 좋거든. 특히 내가 있는 기소는.
260
자여몬 내주쯤 오겠지. 눈이 펑펑 내리는 산의 정적은 뭐라 말할 수 없네. 그 속에서 쾅, 쾅 하는 도끼소리만 깊은 산 속에 메아리 쳐 울리지. 그리고 하늘까지 치솟은 나무가 우지끈 꽝 하며 쓰러지는 장쾌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렵네.
262
자여몬 자네네 나무가 오래 됐다고 자랑하지만 기소의 나무들은 모두 5백 년 이하 되는 건 없거든. 그 중에는 천 년 이상 되는 것들이 수두룩하니까.
263
소오죠 실은 자네가 여기 온 김에 좀 도와줄 일이 있는데.
265
소오죠 저 고목나무를 좀 베어 주게나.
267
소오죠 조부님 유언대로 창고를 지을까 하고.
269
소오죠 응, 그래서 실은 매일같이 자네 돌아올 땔 기다렸다네.
272
자여몬 누구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 보게. 난 저런 나무는 좀.
273
소오죠 명필가는 붓을 고르지 않는다고 했네. 자네같은 벌목꾼은 누워 떡먹기 아닌가?
274
자여몬 허긴 그렇네만. 그러나 난 기소의 향나무 이외엔 절대 손 안대기로 했네.
275
소오죠 그건 초문이군. 어째서 향나무 이외엔 손을 안 댄다는 건가?
276
자여몬 나는 황공하게도 황실에서 쓸 향나무만 잘라 왔다네. 스무 살 때부터 30년간 이세신궁, 명치신궁을 위시하여 여러 신전(神殿)을 만들 향나무만 잘라 왔거든.
277
소오죠 그러나 여보게, 궁내성에 드나드는 상인들도 민간인들한테 술이나 과자들을 팔지 않는가? 내 처남도 양반댁 가구를 만들려고 이 나무를 쓰고 싶어하는데 유독 자네가…….
278
자여몬 나를 그들과 같이 취급 말아주게.
279
소오죠 이거봐, 자여몬, 내가 창고를 지으려는 건 유독 나만을 위해서가 아닐세.
281
소오죠 난, 내 아들이 돌아오면 자네 딸과 짝을 지어주려고 하네. 둘은 옛날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니 결국 자네 딸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네.
282
자여몬 이 나무와 내 딸이 무슨 관계가 있나? 난 아까 말한 대로 전당포집 창고를 지으려고 나무 자르긴 싫네.
283
소오죠 (분개해서) 무엇이 어째? 전당포집 창고 재목은 안 베겠다고? 흥, 자네 언제부터 그렇게 거만해졌나? 벌목꾼 주제에.
284
자여몬 (화가 치솟아) 벌목꾼, 벌목꾼 하지 말라고. 신을 모시는 신전과 고리의 이자로 세우는 자네 창고를 함부로 비교하지도 말게.
285
소오죠 무엇이 어째? 고리대금 이자로 세운다고? 그게 뭐가 나뻐? 응? 뭐가 천하단 말야? 전당포가 천하다면 넌 뭐야? 여기서 먹고 살 수 없으니까 산으로 품팔이 간 주제에.
288
자여몬 (벌벌 떨면서) 너 이게 20년이나 함께 살아온 이웃에게 고작 하는 말이냐?
289
소오죠 누가 할 말인지 모르겠다. 너야말로 이게 20년이 넘는 우정의 표시냐?
291
소오죠 어서 가라구, 다신 내 문지방 넘지 말게.
294
자여몬 싸움은 싸움이고 셈은 셈이지. 얼만가?
296
자여몬 (주머니에서 전표를 꺼내 보고 돈을 지불한다.) 여기 있네. (족자 가지고 퇴장)
298
요 시 (목소리만 들린다.) 뭐예요, 큰소리로. (손 씻으며 나온다.)
299
소오죠 당신 자여몬네와는 왕래도 하지 말라구. 모자 좀 갔다주.
303
소오죠 이쪽에서 거절했어. 천하에 벌목꾼이 저 하난가? 건방지게스리. 이 동경 바닥에 벌목꾼들이 비로 쓸어낼 정도로 많단 말야. 그놈 보는 데서 우지끈, 왕창 잘라 보일 거야.
304
(소오죠, 혼자 기염 토하며 퇴장. 요시, 말을 잃고 바라볼 뿐.)
306
아 이 아줌마, 싱이치 오빠가 왔어요.
308
아 이 네. 곤충채집하러 절에 갔더니 거기 계단 위에 싱이치 오빠가 앉아 있었어요.
310
아 이 아녜요. 아줌마, 정말 싱이치 오빠예요. 무슨 걱정이 있는 것 같았어요. ‘싱이치 오빠’ 하고 말을 걸었더니 힐끗 쳐다보곤 절 안으로 걸어갔어요.
311
(스미코가 무슨 배급을 타 가지고 뛰어온다.)
313
요 시 글쎄, 얘가 지금 절에서 봤다는구나.
314
스미코 이상하네요. 지금 야채배급 타러 갔더니 거기 아주머니도 싱이치를 만났대요.
317
요 시 징용 나갔는데 일 주일 지나서 제대할 일이 없지 않니?
318
스미코 (아이보고) 얘, 정말 싱이치 오빠던?
319
아 이 정말예요, 못 믿겠으면 절에 가보세요. (돌아간다.)
320
요 시 (뭔지 생각난 듯) 스미코, 혹시……?
322
요 시 잠깐 집 좀 봐줄래. 절에 빨리 좀 다녀올 테니.
324
(요시, 신을 끌고 나가려는데 밖에서 풀이 죽어 들어오는 싱이치와 마주친다.)
328
싱이치 오늘 아침. (마루에 걸터앉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
332
스미코 하지만 지난 번에 분명히 합격했잖아?
335
싱이치 발 뒤꿈치의 아킬레스건이 요새 와서 땡기기 시작했어. 난, 불구자로 낙인 찍히는 게 싫어서 엄마, 아빠께도 말 안 했던 거예요. 그런데 어제 전령을 나갈 일이 생겨……. (고개를 숙이고 흐느껴 운다.)
336
요 시 모두 내 잘못이다. 뭔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니가 아무 말 안하기에 괜찮은 줄 알았지.
337
소오죠 (중얼거리며 들어오다 싱이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싱이치 웬 일이냐?
343
소오죠 (분통이 터져 싱이치의 뺨을 갈긴다.) 창피하게 쫓겨나다니!
345
소오죠 말리지마, 이 새끼. 이 망할 놈아.
347
소오죠 놓지 못해? 이런 새끼는 때려죽여야 해.
348
스미코 아저씨, 참으세요. 네? (그에게 매달린다.)
350
요 시 신체불구 때문에 돌려보낸 거니 할 수 없지 않아요?
351
소오죠 난, 딱지 맞은 것 가지고 화내는 게 아냐. 마을 사람들 보는데 여기 나타난 게 문제야. 출정할 때 마을 사람들이 온갖 정성을 다해 환송해 주었는데 어떻게 여길 나타나느냐 말이다. 내일부터 무슨 낯짝을 들고 마을 사람들을 보란 말이냐.
352
싱이치 뭐라고요? 이번 내가 쫓겨온 건 아버지한테도 책임이 있다구요.
354
싱이치 저는 아버지가 인색해서 희생된 거라구요.
356
싱이치 철봉에서 떨어져 아킬레스건이 상했을 때, 곧 병원에 입원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아버진 입원비가 아까워서 쑥뜸만 뜨게 하고 창포잎을 다려서 효과도 없는 물을 석 달씩이나 바르게 하고 말예요…….
358
싱이치 저도 이 마을에 떳떳하게 돌아올 수 없어서 몇 번이나 죽을 생각을 했는지 몰라요. 그러나 이 격렬한 전국을 눈앞에 두고 이 정도로 죽는다는 건 나라에 대해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전쟁엔 못 나가더라도 뭔가 나랄 위해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돌아왔어요.
360
싱이치 (눈물을 닦으며) 어머니, 제 짐 좀 싸주세요.
362
싱이치 남방으로 갈까 해요, 군속으로 아까 역에 군속 포스터가 붙어 있길래 신청해 놓고 왔어요.
364
싱이치 (목소리를 가다듬어) 아버지, 마지막 부탁이예요. 저 대신 저 나무를 나라에 바쳐주시지 않겠어요?
366
싱이치 네. 저 대신 공출해 주시면 마을 사람들한테도 체면이 서니까요.
367
소오죠 (좀 생각하더니) 그런데 벌목할 사람이 없어. 지금도 좀 나갔다 왔는데.
368
스미코 아저씨, 우리 아빠한테 부탁하면 잘라주실 거예요.
369
소오죠 너의 아빠는 향나무 아니면 안 자르신단다.
370
스미코 아저씨, 그건 핑계예요. 아빠는, 이 비상시에 저런 거목으로 창고를 짓겠다는 데 화가 나서 일부러 그러셨대요. 아저씨가 공출하신다고 하면 당장 뛰어와서 잘라주실걸요.
371
소오죠 (무슨 생각을 하고 거실로 올라가 불단 앞에 향을 올린다. 싱이치와 스미코는 곧 눈치를 채고 뛰어나간다.) 조부님, 조부님의 유지에는 어긋나지만 싱이치 대신 저 나무를 공출할까 합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합창한다.)
372
(스미코를 따라서 자여몬이 나무 자를 도구를 들고 들어온다.)
373
자여몬 여보게, 정말 공출을 하려는가?
375
자여몬 아무렴, 자르고말고. (하늘을 쳐다보고) 좋은 날씨로군. 솜씨를 발휘하여 깨끗이 잘라주겠네. (머리에 수건을 질끈 맨다.)
376
(싱이치를 선두로 동회장, 마을 사람들, 청년단원들 들어온다.)
377
동회장 정말 감사합니다. 동회장의 이름으로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378
소오죠 감사는 이쪽에서 드려야죠. 얘야, 출정할 때 마을 사람들한테서 받은 물건들 다 이리 내놔라.
380
소오죠 (마을 사람들에게) 여러분, 제 자식의 부족한 점을 이 나무로 보상하겠습니다. 저는 아이를 전장에 내보내는 것과 똑같은 기분으로 이 나무를 헌납합니다. 제 자식놈이 출정할 때 주신 송별금 308원은 내일 육군성에 헌납하겠습니다.
381
(동회장이 박수를 치자 모두 따라 박수한다. 자여몬은 나무를 살펴보더니 힘차게 도끼를 찍는다. 나뭇가지에 앉았던 새들이 놀라서 일제히 날아간다. 모두들 맑은 가을 하늘을 쳐다보며 감개무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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