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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보(萬甫) 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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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3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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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보(萬甫) 노인
 
 
 

1

 
 
3
‘아무래도 할멈 말이 옳을까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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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보 영감은 간신히 몸을 모로 세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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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을 때는 꼬리를 밟힌 독사처럼 악만 바락바락 쓰던 할멈이었지마는 그래도 할멈밖에 자기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없는가 했다. 저승에 가서까지 영감 걱정을 했으니까 그 혼백이 자기를 찾아온 게거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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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기에 쪼들려서 화풀이할 곳이 없으니까 자기에게 그렇게 억척으로 군 것을 모르는 영감은 아니면서도 아침 저녁으로 갖은 포악을 다 듣고 어떤 때는 대추씨만큼밖에 안 남은 꼭뒤상투까지 꺼들리는데 진저리가 나서 시원스레 잘 죽었다고 진정으로 생각한 일까지 있던 자기 자신이 새삼스레 돌아다보이었다. 홧김에 한 말이지만서도 거꾸러지지도 않는다고 갖은 악담을 한 것이 새삼스레 후회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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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멈이 죽은 지는 보름도 채 나지 않았는데 영감은 오늘까지 할멈의 꿈을 세 번이나 꾸었다. 여덟 달 동안이나 바깥 출입을 못하고 골골하던 할멈이니만큼 두 번은 다 몽달귀신 같은 화상을 하고 영감한테로 나타났다. 눈은 퐁 들어가고 광대뼈가 톡 튕겨진 것이 물귀신처럼 머리를 풀어 헤뜨린 그 화상은 죽기 전 석 달 동안 보아온 병석의 할멈 바로 그대로였다. 그것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앙상한 해골에다 벽지를 발라놓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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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처음 두 번은 할멈은 살아서 보였다. 한번은 진옆구리가 쑤신다고 영감더러 주물러달라고 아우성을 치던 꿈이었고, 또 한번은 숨도 제풀로 쉬지 못하는 반송장이 누워서 다홍저고리와 남치마를 해달라고 조르던 꿈이었다. 전에 또 한번 그런 꿈을 꾸고 나서 '인젠 가려나보다!' 했더니 과연 그런 지 사흘 만에 할멈은 숨을 거두었다 ─ 그 꿈을 영감은 또 한번 되풀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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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날은 할멈이 죽어서 보였다. 꼭두서니 저고리에 남치마를 입은 열일곱 살때 첫날밤에 들어왔던 각시 그대로의 할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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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각시는 그를 영감이라고 불렀다. 사는 형편을 이것저것 묻더니만 암만 살려고 해도 없는 놈은 못살게 된 세상이니 저승으로 가자고 끄는 것이었다. 자기는 좀더 일찍 오지 않은 것이 한이 된다고도 하였다. 하루 더 살면 하루 더 굶는 게다, 하루 더 살라면 하루 더 욕을 본다 ─ 할멈은 눈물을 좍좍 쏟아가며 그를 저승으로 잡아끈다. 저승에서도 굶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살았을 때보다도 더 처참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네들은 모두 세상에서 못된 짓을 하고 온 부자나 양반이다. 영감은 가난해 굶었을지언정 맘만은 착하고 곧았으니까 오기만 하면 염라대왕이 보살펴준다 ─ 이런 이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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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감은 할멈의 손을 뿌리쳤다. 이제 겨우 아장거리는 손자녀석이 여남은 살되기까지만 더 살리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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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 그러지 말구 날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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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던 할멈의 말소리가 곧 귓전에 울리는 것 같았다. 영감은 갑자기 어둠이 무서워졌다. 먹같이 새까만 어둠 속에서 곧 할멈의 대추나무 가지 같은 손이 자기의 손목을 잡아 끌 것 같았다. 뒤통수에서 내다보는 것 같은 눈이 자기를 노리고 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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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으면 어둠을 사랑하는 법이다. 만보 영감도 평상시에는 그랬다. 방안이 밝으면 이런 것 저런 것이 눈에 희뜩희뜩해서 기를 쓰고 불을 끄던 영감이었지만 그날만은 그 어둠이 무서웠다. 영감은 덧없이 헛기침을 '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길로 머리맡을 더듬었다. 달그락 소리가 나며 몇 개비 안든 성냥갑이 손에 집힌다. 영감은 질겁을 하고 나서 성냥을 드윽 그어 광명두에 걸린 등잔에다 불을 당겼다. 죽은 사람의 입김 돋아나듯 등잔 꼬투리에서 파란 불꽃이 차츰차츰 방안을 밝힌다. 영감은 겨우 안심을 하고 성냥갑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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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라고는 하면서도 가난한 노인에게는 찼다. 등받이에서 찬바람이 휘도는 것이 어깻죽지가 시원하다. 이불이라기보다는 솜자루처럼 된 처네를 당기어 어깨를 꾸리고 곰방대에다 담배를 한 대 붙이었다. 담배라야 이 동리 농군들이 다 그렇지만 된 내기 맞은 호박잎을 말려 비빈 것이다. 그래도 만보 영감의 담배 속에는 담배 대궁을 빻은 가루가 섞여서 으수이 구수한 맛이 나는 것이다. 그것도 영감이 지난 달부터 김참봉네 건조실에서 일을 하는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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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해두 할멈 말이 옳을까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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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은 오직 이 생각뿐이었다. 육십 년 동안을 낮에는 호미 아니면 낫, 밤이면 논두렁이나 짚단을 베고 새우잠을 잤건만 입에 밥이 안 들어간다! 그것이야말로 영감에게는 알고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건마는 가만히 앉아서 장죽만 딱딱 뚜드려도 쌀과 돈이 푹푹 쏟아지는 사람들이 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밥 나오너라 뚝딱! 쌀 나오너라 뚝딱…” 하고 방망이만 뚜드리면 소원대로 나오는 보물을 도깨비한테서 얻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방망이가 신기하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지마는 오늘날 만보 영감의 심경이 그 도깨비 이야기를 듣던 때와 똑같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부자니까 그렇다고 하고 영감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마는 ‘그러면 부자면 어째 그런가? 도대체 부자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 때면 역시 그 도깨비 이야기처럼 신기하였다. 부자란 돈을 모아야 된다는 것은 그도 잘 안다. 그리고 돈을 모으자면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부지런히 일을 하고도 굳어야 한다는 것도 만보 영감은 알고 있다. 그리고 여남은 살 때부터 이 거룩한 진리를 믿어올 뿐만 아니라 영감은 그것을 실행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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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잠을 못 자고 일을 하고 술 한 잔을 안 먹고 굳게 굴어도 나는 부자가 못 되는 까닭이 무엇일까? 다른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담뱃대만 뚜드려도 부자는 부자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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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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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적어도 이십 년 전까지는 양반이 못 되어서 그렇다고 생각해왔었다. 개불 상놈이니까 부자가 못 된다고 해왔었다. 그리고 양반 아닌 상놈이 부자 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땅 한 마지기, 밭 한 뙈기 없던 양반들도 걸핏하면 몇 천석꾼이가 되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렇던 그 진리도 근자에 와서는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시절에는 끼니가 간데없던 양반도 금시 발복을 하더니만 근자에 와서는 그 양반들도 옴치고 뛰지도 못한다. 아무개 자손이요 아무개 집안이라고 그것만 팔아도 돈이 푹푹 쏟아지던 그 거룩한 '양반'도 요새 와서는 단 일전 한푼의 값어치도 못 되는 것을 만보 영감도 발견한 것이었다. 그 양반도 지금 와서는 면 사환만한 값도 없는 것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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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옛날의 '상놈'도 지금은 의젓한 부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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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진대 옛날의 상놈과 지금의 양반이 서로 맞바꾸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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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도 생각해보는 것이었으나 그렇다면 자기도 지금까지 몇 대를 두고 상놈 노릇을 해왔고 보니 자기에게도 양반 차례가 응당 찾아와야 할 일이었다. 그렇건마는 지금의 자기는 양반도 아니요 또 부자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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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생각할수록에 까닭을 모를 일이었다. 결국 그가 얻은 대답은 ‘팔자’였다. 팔자를 그렇게 타고난 것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그 팔자는 삼십년에 한 번씩 변하는 건가? 도 했다. 자기가 삼십 시절에 양반과 상놈이 팔자를 바꾸었으니까 이번에도 한 삼십 년만 되면 또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이번에 또 변한다면 그때는 자기 차례가 올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삼십 년은 삼사 년만 지나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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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다음 순간 만보는, ‘다 부질없는 생각이지!’ 하고 모든 것을 단념한 듯이 자리에 쓰러졌다. 어둠 속이 싫기는 했지마는 삼전은 주어야 석유 한 등잔 살 생각을 하니 필시 늦지도 않았을 겐데 장등을 할 수는 없었다. 손으로 부치어 불을 끄고는 어둠이 보기 싫다는 듯이 눈을 딱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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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인지 떠들썩하는 바람에 만보 영감은 다시 잠이 깨었다. 처음에는 술꾼이거니 하고 누웠으려니까 바로 벽 한 겹 격한 윗방에서 뭐라구 외마디 소리가 들린다. 그러더니 뭣이라고인지 며느리의 쫑알거리는 소리가 뒤미처 나고 또 한번 창복의 외마디소리가 꽥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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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이것들이 또 트적어리는구나!’ 하고 영감은 다시 일어나 불을 켜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샐녘이나 되었는가 했더니 아직도 “패 주우.”하는 순경꾼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 닭도 안 운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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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이 일어난 줄을 알았는지 윗방에서는 잠잠하다. 그래서 다시 누우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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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당신은 뭘 잘했다구 큰소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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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팩 달려드는 듯싶은 며느리의 소리에 또다시 영감은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내가 깨었다는 듯이 헛 담뱃대를 문지방에 대고 딱딱 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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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흥분한 젊은 애들은 아버지의 담뱃대 소리쯤에 질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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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한 건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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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복이도 지지 않고 소리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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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은 가만히 일어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윗방 문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린것은 아랫목에 철없이 잠이 들었고 아들과 며느리는 쌈하던 닭처럼 서로 노리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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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내가 술을 먹고 다닌단 말이냐, 노름을 했단 말이냐? 아닌말로 계집질을 해서 돈을 썼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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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안 먹고 계집질만 안하면 제일인 성싶군! 피둥피둥 젊은 년을 거지처럼 해 내세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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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는 창복이도 할말이 없는지 잠잠하다. 그러더니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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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그래, 내가 일부러 당신을 그렇게 해 내돌린단 말이우? 그래,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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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요, 그럼! 아무리 가난하다기로서니 사죽이 멀쩡한 사내가 계집 하나를 벗겨서 내돌려! 뭘 잘했다구 큰소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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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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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영감은 한숨을 쉬며 기운없이 문께를 물러나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능히 셀 수 있을 만한 별이 군데군데 떴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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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보 영감은 기둥에 기대어 섰다가 기둥에다 등을 비비고 그대로 봉당에 내려앉았다. 그는 안 볼 것을 본 것처럼 머리가 아찔했다. 시꺼먼 어둠 속에 앉아서 아무도 잘 못한 것이 없건마는 잘했느니잘못했느니 하고 싸우는 자식 며느리의 악다구니를 듣고 있으려니까, 벌써 사십여 년 전에 아랫말 기름집 건넌방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하던때 자기 내외가 회상되는 것이었다. 그때의 그들도 지금 창복 내외의 나이 또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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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동안 군소리 없이 살아갔지만 그때의 그들도 창복 내외처럼 어느 날 안 싸운 날이 없었다. 악만 바락바락 쓰는 아내를 달래기도 하고 꼬이기도 하다가 듣지 않으면 주먹질이 나갔다. 그러다가 한바탕 드잡이를 놓고서 기진하면 쓰러져 자고 했던 것이다. 그래도 정 안 들으면 너 죽고 나 죽자고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나대기까지 한 자기였다. 그래도 그때는 ‘설마 나으려니.’하고 하늘에서 별 떨어지기를 기다리듯 살림이 늘 때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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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십 년을 속아온 그가 다시금 사십 년 후 자기의 자식이 또한 자기와 똑같은 드잡이를 자기 눈앞에서 되풀이하게 되리라고는 차마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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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고 좀더 참아봅시다그려! 설마 우리가 한평생 이 꼴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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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년 전 자기의 아내를 달래던 그 말 그대로를 가지고 자기의 자식이 또 아내를 달래고 있으리라고야 꿈엔들 생각했을까? 창복도 내가 속아오듯이 일평생을 속아가리라… 한 해 두 해 속아 살다가 나처럼 꼬부라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자식의 방문 앞에서 자식 내외의 싸움을 엿듣듯이 그때는 창복이가 지금 저 어린것 내외의 싸움을 말릴 것이다 ─ 이렇게 생각하니 몇 개 안 되는 별조차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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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인돌이란 놈도 내가 자라듯이 그리고 저놈 아범이 자라듯이 어미 치마폭에 싸여 부잣집 부엌으로 따라다니다가 내가 밟아온 그 길을 그대로 밟을 것이다. 예닐곱 살만 되면 벌써 망태기를 짊어지고 가엽산으로 올라갈 것이요, 여남은 살만 되면 남의 집 부엌데기로, 철나면 머슴살이로… 그러다가 운수가 트면 계집이라고 하나 얻어가지고 삼십 년 전의 나처럼 그리고 지금 제 아비처럼 아내에게 들볶이다가 자식새끼라도 낳으면 또 그 자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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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인생이라고 태어나서 마음놓고 밥 한 번 배불리 먹어보지 못하고 호미와 낫을 든 채 논두렁을 베고 죽는 자기네 일생… 자기의 아버지가 그랬고 자기가 그랬고 또 자기의 자식이 같은 일생을 마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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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방의 싸움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모른다. 주거니받거니 악다구니를 하더니 어린것이 깨어서 ‘빼애’ 하고 며느리의 울음소리가 홀짝홀짝 난다. 그러더니, “엑!” 하는 소리가 나며 창복이가 뛰어나오고 뒤미처 며느리의 울음소리가 탁 터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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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려는지 부리나케 신발을 찾아 꿴 창복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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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복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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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영감의 부르는 소리에 주춤하고 그 자리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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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은 아무 말도 없이 아들의 소매를 잡아끌고 아랫방 문 쪽 부엌 앞으로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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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왜 그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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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은 죄나 진 듯이 가만히 이렇게 묻는다. 없는 아비일수록에 업신여김만 받는 것이 보통이지만 창복이만은 더없이 영감을 어려워한다. 그는 아무 말이 없이 우두커니 아버지 앞에 섰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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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걔 애미가 하두 살기가 어려우니까 짜증을 내는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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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머뭇머뭇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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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두 잘 테니 아버지 들어가 주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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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은 더 할말이 없었다. 묻지 않아도 뻐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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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들어갈 테니 너두 가 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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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은 이렇게만 말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 눈물이 좌르르 쏟아진다.
 
62
영감을 들여보낸 창복이는 그대로 나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시 불러들일 용기도 영감에게는 없었다.
 
63
영감은 또 담배를 담았다. 가끔 모드거리로 한숨을 쉬기도 하다가 누웠으려니까 며느리의 울음소리가 그쳤다. 할멈의 일생을 보아온 영감에게는 이 며느리가 더없이 불쌍하였다. 그래서 다시 불을 켜놓고 윗방을 향하여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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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돌이 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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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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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애 어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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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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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나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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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도 다 갔건만 초가을에 입은 당목 적삼을 그대로 입은 며느리를 보자 영감은 공연히 불렀구나 했다. 그러나 무엇이라고든지 위로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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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걸 인력으로 어쩌니. 아예들 그리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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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간신히 말을 꺼내어 여러 가지로 타일렀다. 남편한테는 되양되양하면서도 원체 인자하게 구는 시아버지인지라 다소곳이 앉아 듣더니 며느리는 갑자기 흑흑 흐느낀다. 영감은 자기가 살아오던 이야기를 해가며 그저 참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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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마는 그것도 한이 있어야지유. 조끔이라두 호강을 하구 싶어 그러는 건 아녜유. 남들처럼 잘 먹고 잘 입기를 바라지 않지만 하루 밥 세 낀 먹어야 하잖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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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것이 안 되니 딱하단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구 하루 이틀 살 것도 아닌데 그래서야 쓰느냐. 그러구 인저 가을철도 되었고 하니 방아도 찧고 하면 좀 낫잖으랴.”
 
74
방아란 몇 해 전에 이십팔원을 주고 산 물방아였다. 살 때는 드센 일은 할 수도 없고 해서 빚을 내어 산 것이나 기계 방아가 생긴 후로는 통 방아가 놀았다. 그러한 방아인지라 며느리의 상이 펴질 것은 못 되었다.
 
75
영감은 다시 여러 가지로 타일렀으나 끝끝내 며느리는 다시 안 그러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영감은 오늘에 한하여 며느리가 자기 말에도 인제는 거스르는구나 하고 생각은 했지만 굳이 그런 맹세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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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뿔사!’ 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자기의 추측한 대로 며느리도 차차 자기한테 거스르는 눈치 같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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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밤늦도록 내외싸움을 하는 일조차 없던 것이었다. 올봄 이래로 남편한테 들이대는 버릇이 생기고 가끔 싸움질도 하기는 했지마는 대개 초저녁에 티적이다가도 이불 속에 들어가서는 구수하니 잔다. 그러하던 그들이 밤이 깊도록 티적이는 것을 볼 제 어쩐지 무서운 예감 같아서 영감은 몸서리를 쳤다.
 
78
첫닭이 운 뒤에야 창복이는 돌아왔다. 영감은 혹시 또 싸움이나 않을까 하고 은근히 근심을 했으나 한참 있더니 소곤소곤하는 소리가 들리어 겨우 마음을 놓았다.
 
79
윗방에서는 잠이 든 모양이나 영감은 한번 잠을 덧들려서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징건히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80
‘팔자’와는 터무니가 뜨게 몸만은 귀골이었다. 울멍줄멍한 방바닥에나 조그만 자리 마디에도 살 한 점 없는 뼈가 닿으면 진저리가 치어지게 배긴다. 오십 년간이나 지게 등태와 세장에 덴 날라리뼈는 콩조각만한 것이 배기기만 해도 등겁을 해서 튄다. 그런데다가 반백 년이나 되는 무서운 짐질에 관절조차 말라붙어버린 듯이 뼈와 뼈가 맞닿을 때마다 마디마디가 천참을 하게 쑤신다.
 
81
만보 영감은 목침으로 잔허리를 괴기도 하고 다리를 벽에다 거꾸로 세우기도 하여가며 겨우 날을 밝히었다.
 
82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아찔하고 현기가 났다.
 
 
 

2

 
 
84
점상(占床)처럼 쓸쓸한 아침상을 내물린 만보 영감은 밥도 내릴 사이 없이 곰방대를 물고 지게에다 짚 여남은 단을 얹고 일어났다. 그는 물방아가 제 철을 만난 생각을 하니 그지없이 기뻤다.
 
85
“얘, 애 어마, 너 오늘두 조리갈련?”
 
86
“가야지 집에서 놀면 뭐해유.”
 
87
“뭘 고단하건 집에 있으려무나. 난 오늘 못 가겠다.”
 
88
“왜 어디 일 가셔유?”
 
89
“웬걸! 인전 방아꾼도 차차 올 때가 아니냐?”
 
90
영감은 큰 수나 나는 것처럼 호기있게 이렇게 대답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담배가 전매로 되자 C주에서는 웬만한 집이면 담배 건조실 한 칸쯤은 갖고 있었다. 김 참봉은 이 동리에서도 뽐내는 부자인지라 건조실도 제일 많았다. C주는 조선에서 황색연초 경작으로 으뜸이었다. 김 참봉은 C주에서도 네짼가 된다. 여섯 평짜리가 일곱 채, 네 평짜리가 다섯 채나 있다.
 
91
일년에 두 번씩 오는 담배철이 되면 백여 호나 되는 동리가 건조실에 모인다. 여남은 살부터 칠십 노인까지 머리를 싸매고 덤비어서 그것도 차츰차츰 품값이 떨어졌다. 아이들은 대개 겹새끼 눈을 벌리고 담배 생엽(生葉)을 꿰어 열 줄에 삼전 오리씩 받는다. 재치있게 꿰는 아이라야 한 오십 줄 꿰고 대개는 삼십 줄 내외였다.
 
92
그런 다음에는 건조간에 달고서 화력으로 건조를 시킨다. 건조가 끝나면 상초(上草), 중엽(中葉), 말엽(末葉), 막초 이렇게 네 가지로 추려서 구김살을 펴서 차곡차곡 매를 진다 ─ 이것을 ‘조리’라고 하여 부인네들이 맡아 한다 ─ 만보 영감의 며느리도 이 담배를 해서 하루에 십팔전씩 버는 것이었다.
 
93
만보 영감은 젊은 것이 그 독한 담배 속에서 온종일 먼지를 마셔가며 일을 하는 며느리가 그지없이 가엾었다. 그 노릇을 그만두라는 데도 억척으로 달려가는 며느리를 볼 때 만보 영감은. ‘내 자식 내 며느리도 양반의 집 자식들만 못지않다.’고 생각하였다.
 
94
영감은 내일쯤 방앗삯 뜨는 것으로는 쌀밥에 청어마리나 사고 해서 며느리를 먹게 하리라 하였다. 그런 것을 생각하니 마음까지 가뜬해진 것 같았다. 여름내 내버려두었던 방앗간은 볼 나위 없었다. 초가을에 지붕에는 군새도 질러두고 바람 가림만은 해두었지만 요전날 비에 언덕이 또 무너지고 날씨가 선선해지니까 거지들이 울타리를 뜯어다 깔고도 자고 불을 피우기도 해서 도깨비 쳐 간 집 같았다. 영감은 삽을 얻어다 흙도 쳐내고 방아확도 말끔히 닦아냈다.
 
95
봇도랑도 여러 군데 무너져서 떼를 떠다 그것도 막고 구례 쪽으로 새어빠진 물줄기도 모두 봇도랑으로 몰아넣었다.
 
96
물레 쐐기가 모두 뒤틀렸다. 암쐐기는 그나마도 못쓰게 되어서 자귀를 얻어다 그것을 깎으려니까,
 
97
“방아 고치십니다그려.”
 
98
하고 등뒤에서 소리가 난다.
 
99
“자넨가? 제철이 돌아왔으니 좀 손질을 해두어야지.”
 
100
홍수는 볏단을 지고 섰었다.
 
101
“그게 뉘 겐가?”
 
102
“참봉 댁 겝니다.”
 
103
“인저 타적을 볼려나, 온. 좀 나려놓구 쉣다 가게나그려.”
 
104
홍수는 볏짚을 버티어놓고 적삼을 벗어서 제 지게 뿔에다 걸더니,
 
105
“댁에서도 그 댁 것이 있던가유?”
 
106
“있지. 아늑골 서 마지기가 그게 아닌가. 하지만 서 마지기에도 도지가 두 섬 일곱말이나 되니 모르지. 도지나 될는지, 온…”
 
107
실상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영감은 속으론 ‘양석은 났을 거니까 한 서너 섬 떨어지거니’ 하고 마음속으로는 흡족해했다.
 
108
“저두 그런걸요, 뭘. 신단이 두 마지기는 도지하고 나니까 베 네 말 떨어지던데요. 올핸 더군다나 마당쓰레까지 박박 긁어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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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젊은 사람이 너무두 야박하데나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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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이란 김 참봉의 둘째아들 상순이었다. 전문학교에 두어 달 다니다가 학비들여서 전문학교를 다니는 것보다 그동안에 단 몇 푼이라도 돈 버는 것이 장사라고 면서기를 육 년째 다니어서 지금은 회계원으로 있는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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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빡빡하지유. 그런데다가 글줄이나 배웠다고 어찌나 심수가 빠른지!”
 
112
“사람이야 똑똑하지만 너무 되양되양하니. 배 속에 양반만 잔뜩 들어서 반지빠르기란!”
 
113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홍수는 지겟다리에 팔을 넣으며,
 
114
“노인네가 애는 쓰시지만 그놈의 발동기 때문에 어디 셈이 돼야지유?”
 
115
“누가 아니라나.”
 
116
“부용네는 벌써 쌀루만 일곱 섬을 떴다던데요.”
 
117
“일곱 섬!”
 
118
하고 영감은 핏대까지 올렸다. 부용이란 이 동리 구장이다.
 
119
“저런 죽일 놈에! 그래 거미 궁둥이처럼 생긴 그놈에 연모가 우리 방아가 삼 년 번돈을 한 파수에 벌었네그려!”
 
120
홍수가 보이지 않도록 영감은 버언히 앉아서 발동기와 물방아를 대조해보았다. 전에는 가을철만 찧어도 네댓 섬 얻어먹었다. 그러던 것이 발동기가 생긴 후로는 차차 물방아를 찾아오는 사람이 줄어가서 지금은 단 한 섬도 마음놓고 삯을 찧어보지 못했다. 발동기라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영감의 주먹은 부르르 떨렸다. ‘칙칙칙’ 하고 세차게 돌아가는 피대를 볼 때마다 달려들어서 잘 드는 낫으로 섬벅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억제했던 것이다.
 
121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영감은 말을 돌렸다.
 
122
‘뭘 그까짓 것 있으면 대수냐! 그래두 물방아 찾아올 사람은 찾아오지! 호되게 빠르기만 했다뿐이지 싸래기야 야싱 나야지!’
 
123
그러나 사실은 만보 영감의 기대와는 아주 어그러졌다. 이튿날 점심때가 훨씬 기울때까지 목수 윤 서방을 술 받아주고도 오십전이나 주어가며 공이 쐐기를 해맞춘다 확돌을 바로앉힌다 했건만 아무도 그에게 벼를 지고 오는 이가 없었다.
 
124
그날 밤 만보 영감은 며느리를 보고,
 
125
“애 어마, 너 돈 있니?”
 
126
하고 가만히 물었다.
 
127
“돈은 뭐하서유?”
 
128
“아 글쎄, 돈 한 열 냥(일원) 있었으문 좋겠구나.”
 
129
“없지만 일한 걸 찾으면 한 열 냥 될까 모르지유.”
 
130
“옳지, 그럼 됐구나!”
 
131
하고 영감은 더없이 만족해하는 눈치다.
 
 
132
만보 영감은 며느리가 찾아온 팔십전을 들고 부리나케 나가더니 쌀 닷 되와 북어 두 마리, 백지 한 장, 막걸리 한 잔, 초 한 가락 ─ 이렇게 사들고 들어와서 밤으로 떡쌀을 담그게 하고 그 이튿날 밤 이슥해서 떡시루를 창복이한테 시켜 가지고 물방앗간으로 갔다.
 
133
손을 말끔히 씻고 방앗간 대들보에다 백지와 북어를 매어달아놓고 방아확 앞에 떡시루를 앉혀놓은 다음 무엇이라고 중얼중얼하며 빈다. 얼마를 빌고 나더니 절을 넓죽 세 번이나 하고 일어서며,
 
134
“너 어머니는 참 잘 빌더라만!”
 
135
하며 호인의 웃음을 넌지시 웃고 아들 내외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136
“인돌 어미 생일엔 우리 한번 잘해 먹자.”
 
137
만보 영감은 이런 소리까지 하며 더없이 기쁜 모양이었다. 그날 밤에도 손자놈을 무릎에 앉히고 며느리한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138
“아늑골 것에서 석 섬은 날 게구, 봉화둑 게 섬 반은 될 게구 방아삯이 두 섬 쌀은 될 게라… 그런다면 두 섬만 팔아서 조합돈 갚을 요량하고… 장려 벼 먹은 게 열닷말… 그러구 방아삯 뜨는 건 삼동 양식하구 ─ 그러면 또 그양저양 살아가는 게지! 그렇잖으냐, 얘?”
 
139
며느리는 ‘어머님 상포(喪布)한 건? 세금은? 구장센? 농회빈? 진흥회빈?' 하고 주워섬기면 끝이 없을 것이로되 꿀꺽 참았다.
 
140
물론 만보 영감만 한대도 그만 것을 모를 리는 만무하였다. 지난 삼십 년간 그는 누구보다도 충실한 납세자였다. 그는 일찍이 호세 대신에 단거리 한 개뿐인 가마솥까지 떼어다 바친 일까지 있는 가장 선량한 사람이었다.
 
141
부자들의 몇 천원 몇 만원 하는 ‘고사’를 받아먹기에 길든 말하는바 ‘신’은 만보 영감의 가족에게는 대금일지 모르나 끽해야 팔십전인 고사에 신의 마음이 돌아앉을 리는 만무하였다. 이른바 신은 배부른 사람에게 밥을 주는 신이기 때문이다.
 
142
그 갸륵한 정성으로 드린 백설기 고사를 지낸 지도 사흘이나 지났지만 만보 영감네 방앗공이는 의연히 고개를 번쩍 들고 폭포처럼 떨어지는 물확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143
나흘째 되던 날 방앗공이는 비록 떨어지기는 했으나 한 시간 동안 코가 땅에 닿게 절을 한 절값은 쌀 되가웃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방아꾼의 발이 뚝 그치고 말았다.
 
144
그새에도 아랫말 부용네 발동기는 밤이 이슥토록 쿵쾅거렸다. 육 마력짜리로도 오히려 당하지를 못해서 새로이 삼 마력 반짜리 한 대를 사들였다. 그랬건만 두 대가 한 시 쉴 틈이 없었다.
 
145
부용이는 동리 사람들을 볼 때마다 발동기를 자랑했다.
 
146
“이런 발동기에는 피대를 걸게 된 것이 없다우. 이건 대판으로 특별히 주문한 게 돼서 기계도 실합넨다. 아마 C주 안에선 이런 발동길 가진 사람이 없을 게요.”
 
147
“참 신기한 노릇이야.”
 
148
하고 누가 하나 말불을 질러줄라치면,
 
149
“암, 신기하구 여부가 있수. 보우, 우리 나라에서 옛날에 물방아나 드딜방아로야 밤을 새서 찧는대야 한 섬 밖에 더 찧었나요. 하지만 그까짓 한 섬쯤은 그저 두 시간이면 후딱 치워버리지! 하여튼 조선 사람도 내지 사람 본을 봐야 해.”
 
150
방아꾼을 기다리다 못한 만보 영감은 저녁도 뜨는 둥 마는 둥하고 김 참봉네 사랑으로 갔다. 자기를 보면 혹 생각이 나서 방앗거리를 내맡길 사람이 있음직도 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51
단간방이건만 한 십여 명이 모여앉아서 새로 실시된다는 농지령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152
덕대라는 별명이 있는 황 서방은,
 
153
“오냐, 인저 두고 봐라! 이 사음놈들이구 지주놈들이구 모두 경치는 판이다!”
 
154
하고 지주의 땅문서를 봉놋방에 흩뜨리는 법률이나 발표된 것처럼 의기가 등등하다.
 
155
“이런 떡대 꼬락서니하구, 아주 그렇게 잘두 경치겠다. 지주나 사음이 땅을 떼면 뗐지 어디 장비가 생겼다더냐?”
 
156
“저런 자식두 귀까리가 없나봐! 아아, 이놈아. 알지두 못하건 국으루 있어! 인저부터는 암만 지주구 사음이래두 맘대루 땅을 못 뗀대여!”
 
157
“떼면 누가 뱃짼대여!”
 
158
“고오소하지야! 고오소!”
 
159
“고오소? 고오소? 얘! 깨소금맛이 어떻더라! 야.”
 
160
옆구리서 돌쇠가 한마디 하자 일시에 웃음이 ‘펑’하고 터졌다.
 
161
“글쎄 이 사람아, 생각을 해봐!”
 
162
하고 수봉이도 지지 않았다.
 
163
“가령 내가 사음이라고 하자꾸나. 내가 네가 부치는 땅을 뗐다면 네가 날 어쩔 테냐?”
 
164
“고오소한단밖에 어쩌라구그래!”
 
165
“아냐!”
 
166
하고 돌쇠가 또 가로채서,
 
167
“그럴 땐 주재소에다 고소장을 내지 말고 사음소에다 씨암탉 장을 내는 법이야, 멍텅굴아!”
 
168
또 한번 방안은 웃음판이 되었다.
 
169
만보 영감도 하는 수 없이 따라 웃고 말았다.
 
170
웃음기가 걷히자 만보 영감은 또다시 이 사람 저 사람의 얼굴을 보살폈다. 방아를 찧음직한 사람도 서넛 있기는 했으나 그들은 만보 영감한테는 조금도 관심을 하지 않았다.
 
171
영감은 담배만 한구석에서 빽빽 빨고 앉았었다. 누구든지 방아 이야기 좀 꺼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건만 난데없는 ‘밀적’이 더 맛나니 ‘녹두적’이 더 맛나니 하고 토론이 일더니 한동안 그것으로 용택이와 순칠이 사이에 악다구니가 시작되었다.
 
172
“그래, 녹두적보다 밀적이 더 맛있다는 게 저게 입이야, 똥구멍이지!”
 
173
“그래, 신작로를 막고 물어봐라. 타박타박한 그까짓 녹두적이 맛이 있다나, 쫀득쫀득한 밀적이 맛있다나? 응! 가 물어봐!”
 
174
멀거니 앉아서 이 꼴을 보고 있던 돌쇠는 싱끗 혼자 웃더니,
 
175
“얘, 이 시러베 아들 놈들아! 그러지 말구 지금덜 가서 용택인 녹두적을 사오구 순칠인 밀적을 사오너라! 내 둘 다 먹어보구서 말해줄 게니!”
 
176
“저 녀석은 풀숙풀숙 우는 소리만 해여!”
 
177
덕만이가 말했다.
 
178
녹두적 싸움은 좀처럼 끝이 나지 않았다. 실없이 시작된 이야기가 나중에는 말다툼이 되고 말다툼이 다시 욕지거리로 변하더니 빈정빈정하는 순칠이가,
 
179
“이 자식아! 그래 밀적이 맛있지 녹두적이 맛있다는 자식이 어딨어! 네 입은 우리 집 개 입만두 못하다.”
 
180
하고 삿대질을 한 것이 시초가 되어 성미 팔팔한 용택이는 보기좋게 순칠의 뺨을 붙였다.
 
181
“이 망할 자식아! 사람의 입을 갖다 개 입에다 대? 요런 놈은 단단히 버릇을 알으켜놔야 해!”
 
182
“얘, 이 자식 봐라! 사람 친다!”
 
183
이리하여 용택이와 순칠이는 드잡이를 놨다. 웃고 구경하던 사람들도 일어나서 뜯어말렸다.
 
184
싸움이 끝나자 달순이라는 처녀가 김 선달 집 머슴과 울타리 밑에서 속삭이다가 들켰다는 둥 아무개 아내는 노름꾼 김 선달과 눈이 맞았다는 둥 계집 이야기가 나더니 우연히 누구의 입에선지 부용네 기계방아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185
기계방아 소리에 영감은 그것이 자기 것이기나 되는 듯이 가슴이 뛰었다. 방아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이 수봉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영감은 막걸리라도 한 잔 사주고 싶을 만큼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186
만보 영감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렇게나 기다린 보람도 없이 나오는 말마다 만보 영감에게는 불리한 말뿐이었다.
 
187
“그것 참 조화더라!”
 
188
하고 최민호네 일꾼이 입을 떼자 장 도령이,
 
189
“참 조화더라! 석유 한 초롱만 부면 그저 덜그럭덜그럭 금시에 벼 한 섬을 뿌옇게 찧어 내던구나!”
 
190
하고 받는다.
 
191
“아마 물방아가 한 섬 찔 동안에 열 섬을 찔껄?”
 
192
“찧고말구! 능중하지!”
 
193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이라도 만보 영감의 귀에는 바늘로 찌르는 듯이 야속스럽게 들리는 것이었다. 자기가 와 있으니까 일부러들 그런 소리를 하는 것만 같았다. 그 발동기가 지금 눈앞에만 있다면 도끼로 퍽퍽 찍어 내고도 싶었다. 아니! 그 얄미운 발동기를 하늘 꼭대기까지 치켜세우는 놈들까지 대가리부터 내려바수어도 속이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194
그럴 때에 그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은 정 생원이,
 
195
“발동기가 쉽기는 하지마는 밥맛이 없어지느니. 밥을 해놔도 구수한 맛이 적어서 낼 쌀이나 찔 게지 양식쌀은 아예 찔 것이 아니니!”
 
196
하는 바람에 만보 영감은 입이 딱 벌어졌다.
 
197
“그게 옳은 말이지. 기계서 빠져나온 쌀이 밥을 해노면 모양모양한게 겉물이 지르르 흐르느니”
 
198
그 말소리가 하도 흥분된 것이어서 방안 사람은 모두 영감을 치어다보았다.
 
199
“한목에 몇 십 석씩 찧는 게 아니면 물방아가 낫지!”
 
200
하고 정 생원이 다시 한마디 보태자 만보 영감은 신이 나서,
 
201
“암 그렇지! 옳은 말이고말구!”
 
202
하고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3

 
 
204
용안 장터의 타작소리도 끝난 지 오래지만 만보 영감네 물방아는 여전히 공이가 들보에 매달려 있었다. 이따금 ‘퉁치르르!’ 하는 소리가 나기도 했지만 세 시간도 계속 되는 적이 없었다.
 
205
두 말 서 말! 끽해야 닷 말 ─ 그런 것뿐이었다.
 
206
그렇건만 부용네 발동기 소리는 닭이 울도록 찧을 때가 펀했다.
 
207
만보 영감은 봇둑에 나와 서서 멍하니 발동기 쪽을 바라보고 섰다. 네 식구의 목숨을 메고 있는 물방아는 빈물만 철철 흐르건만 부잣집 발동기는 콩콩 찧고 있다! 하루 밥 세 끼는 고사하고 한 끼식이라도 밥맛을 보겠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의 창자에는 멀건 조당수나 시래기죽도 변변히 안 떠넣어주고 몇 백 석씩 추수를 하고도 해마다 땅을 사들이는 부잣집 창고에만 쌀 짝을 갖다 백여주는 이 세상에 대한 울분과 다 쓰러져가는 물방아를 버언히 지키고 섰는 자기를 조소하는 듯이 콩닥콩닥 재미나게 찧는 기계방아에 대한 원한이 만보 영감의 가슴속에 불을 부어주는 것이었다.
 
208
‘그래도 참아야 한다!’
 
209
이렇게 생각하고 입술을 깨물자 눈물이 좌르르 쏟아졌다.
 
210
인생의 일생이란 마치 단추구멍 끼우는 것과 같은 것이지마는 이 진리는 불행히도 만보 영감의 경우에까지 들어맞고 말았다. 만보 영감은 물방아에만 단념해야만 되지 않고 아늑골 서 마지기서 들어오리라고 믿었던 석 섬까지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11
창복이 부자의 억척, 닷 섬말이나 서 마지기서 떨었으나 거기에, 또 한 억척이 남아 있었다.
 
212
받으려는 김 참봉의 억척은 타작 마당에서 도지 두 섬 일곱 말에 장릿벼 열 말 먹은 것이 열닷 말 김 참봉이 용안 장터 금융조합원 감사인 관계로 조합돈으로 나머지를 제하고도 오히려 이십칠원이 부족이 되었던 것이다.
 
213
이리하여 만보 영감이 벼르고 벼른 며느리의 생일날 청어 꽁댕이 하나 구워보지 못하고 그나마도 저녁에는 멀건 죽국물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었다.
 
214
죽으로 배를 못 채운 그네들의 봉당에도 달빛만은 명랑하였다. 창복이와 며느리는 그날도 죽 상을 놓고 티적거리다가 제각기 어디론지 나가버리고 울다 지친 인돌이란 놈만이 영감의 무릎에서 색색 잠이 들었다.
 
215
밤도 으수이 깊은 모양이다. 멀리서 순경꾼의 “패 주우.” 소리가 서릿바람을 타고 들려올 뿐이다. 세상은 점점 야위어가는 것 같았다. 농사를 지을 줄 모를 때는 그래도 쌀밥이 입에 들어갔더니 줄모를 심고 암모니아도 주어 몇 곱절 농사를 지어도 일년을 쌀밥 한 그릇 차지되지 않는다. 그전에는 세목에나 돌던 순경도 초가을부터 “패 주우.” 소리가 들리고… 영감의 가슴 속에는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216
그러나 영감은 참을 줄을 알았다. 인돌이를 아랫목에 눕히고 우두커니 앉았으려니까 더없이 눈물겨웠다. 반 백 년을 하루 한시 쉬지 못하고 일을 했건만 쌀 한 됫박이 항아리에 없단 말이냐? 영감은 기진하여 찬 줄도 모르고 벽에 기대어 눈을 딱 감았다.
 
217
“영감! 고생 좀 작작하구 날 따러오시우!”
 
218
하던 할멈의 말소리가 금시에 귀에 쟁쟁하다.
 
219
바로 귓바퀴에서 귀뚜라미가 ‘째르르’ 한다.
 
220
지금의 만보 영감은 완전히 어둠한테 정복을 당하고 말았다. 모든 것이 어둠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어둠! 가슴속에서 느끼어지는 것도 어둠 ─ 눈 앞에 박두한 죽음이 자아주는 싸늘한 감촉을 주는 어둠! 가슴을 내려덮는 것도 어둠! 그는 완전히 어둠속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221
만보 영감은 바짝바짝 다가오는 어둠을 그것이라고 느끼었다. 야금야금 가까워오는 어둠, 차츰차츰 진해가는 어둠 ─ 그 어둠 속에서 할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222
“영감! 내 말이 뭬랍디까? 어서 날 따라오슈…”
 
223
할멈의 말이 옳은가보다!
 
224
영감은 가만히 생각해본다.
 
225
이 세상에 인생이라고 다 태어난 그날부터 인간의 일생의 전부인 반백년을 나는 일을 했다. 그리고 일해준 값으로 나는 굶어왔다. 헐벗어왔다. 이만하면 나의 일생도 끝날 때가 온 것이다. 더 살아야 일년 아니면 이태! 철난 때부터 오십 년이나 굶어온 내가 인제 남은 일년 동안도 또 굶어야 하느냐?
 
226
‘아니다.’하고 만보 영감은 어둠을 헤치고 살며시 일어났다. 일어났다가 다시 굽히어 정신 모르고 자는 인돌의 얼굴에 눈물을 두어 방울 떨어뜨리고 고사리처럼 야무지게 쥐어진 손을 어루만지다가, ‘할멈 말이 맞고나!’하고 일어났다.
 
227
‘인돌아! 널랑은 부디 할아비나 아비 같은 평생을 보내지 말아라.’
 
228
왕골자리에 눈물 떨어지는 소리가 뚝뚝 날 뿐 그 순간 벌레소리조차 그친 어둠 ─ 그대로의 순간이었다.
 
229
만보 영감은 문밖으로 나가다 말고 두 번 세 번 돌아다보았다. 마당까지 내려섰다가 다시 들어와 인돌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다시 나왔다. 그는 마치 뛰어나오듯 했던 것이나 동작은 그의 마음과는 정반대의 작용을 했다.
 
230
싸리삽짝에 와서 또 한동안 서서 눈물을 씻다가 싸리삽짝을 번쩍 들어 지그시 지치고 물방앗간으로 올라갔다. 그 사이에도 눈물이 가리어 영감은 두어 번이나 길가 논바닥으로 기어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231
눈이 부실 만큼 쨍쨍한 달밤이건마는 만보 영감의 가는 길은 어둠의 길 ─ 그것이었다.
 
232
방앗간에도 달빛은 있었다 . 영감이 공이를 매어달았던 줄을 잡아나꾸자 ‘쾅!’하고 멋모르는 공이는 확을 내려찧고 펄쩍뛴다. 영감은 공이 맸던 동앗줄을 당기어 자기의 목을 걸고 지그시 당기어본다.
 
233
‘이것만 잡아다닌다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234
어둠! 어둠은 점점 진해 간다.
 
235
그러나 순간순간이, 생에 대한 애착이, 어둠을 헤치고 내닫는다. 너무나 희미한 빛을 띤 생의 애착이!
 
236
그런 찰나마다 세상놈들에게 포악이나 실컷 하고 싶다는 격정이 부그르 가슴속에서 끓어오른다. ‘치르르 치르르’ 봇도랑물은 설사나 하듯 께름칙하다.
 
237
그러나 어둠은 가까워온다.
 
238
만보 영감은 눈을 감고 자식과 며느리한테나 복이 있으라 빌었다. 빌다 울다 울다 빌다 하였다. 그러고는 동앗줄에 다시 목을 걸고 움쩍 한번 당기었다. 아니 당기려는 그 순간이었다. 만보 영감의 귀는 갑자기 쫑긋해졌다.
 
239
그 귀는 확실히 무슨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무슨 소리를…
 
240
그것은 듣기만 하여도 이가 갈리는 발동기의 ‘쿵덕쿵덕’ 하는 소리였다. 그는 줄을 잡은 채 귀를 기울였다. 그렇다! 그것은 틀림없는 발동기 소리다. 그것이 발동기라는 것을 인식한 그 순간 그의 머리에는 번개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자 그의 손은 주머니로 달린다. 네모진 갑을 꽉 움켜쥔 만보 영감은 전신에 격렬한 전율을 느끼었다. 그 전율 ─ 그것은 기쁨과 공포가 뒤범벅이 된 복잡한 격동에서 오는 전류이었다.
 
241
그 전율과 함께 만보 영감의 얼굴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한도의 가장 짧은 순간의 쾌감에서 오는 미소와 공포에서 오는 격동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였다.
 
242
이 두 가지의 감정은 얼마 후 두 대의 발동기가 놓여진 기계방앗간의 바다의 혓바닥 같은 불길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을 때도 의연히 만보 영감의 얼굴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건마는 누구 하나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없다.
 
243
이 때아닌 불길에 놀라 허리 골춤을 치켜쥐고 모여든 군중 속에서 갑자기 깨어진 징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와르르 터져나왔던 것이다. 군중의 눈은 그 쪽으로 사태처럼 몰리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만보 영감이었다.
 
244
그러나 그 웃음이 만보 영감의 입에서 터져나왔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만보 영감이 선 그 언저리 사람 몇밖에 없었다. 그만큼 이 기상천외의 웃음을 터뜨린 영감의 입은 그 다음 순간 딱 봉해졌던 것이었다.
 
245
포플러처럼 쭉쭉 뻗은 불길에 비친 영감의 얼굴은 비장 ─ 그것이었다. 펄펄 날리는 불길을 자기의 눈꺼풀 속에 들이삼키기나 한 듯이 영감의 눈은 그 불길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246
그 표정이 약 일 분 동안을 지속되다가 무슨 말이 나올 듯 나올 듯 영감의 입언저리는 옴직 옴직하기를 다시 한 삼십초 아니 그것은 더 긴 시간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지마는 ─ 그런 다음에,
 
247
“헛헛헛!”
 
248
하는 후렴 없는 웃음소리가 다시금 그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249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은 다시 전으로 돌아갔다.
 
250
“영감!”
 
251
하고 누구인지 관중 속에서 그의 팔을 붙들려고 할 그 순간 영감은 번개같이 몸을 솟구어,
 
252
“헛헛헛헛!”
 
253
하고 또 한번 웃고,
 
254
“날 잡아가거라! 날 잡아가거라.”
 
255
부르짖으며 불맞은 노루처럼 날뛰는 것이었다.
 
256
이 만보 영감의 얼굴을 살피려는 듯이 불길은 한층 더 높이높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257
<「신동아」41호,1935년 3월>
【원문】만보(萬甫)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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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보 노인 [제목]
 
  이무영(李無影) [저자]
 
  # 신동아 [출처]
 
  1935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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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보(萬甫) 노인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1월 0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