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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체의 방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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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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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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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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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란 무엇이냐? “문체는 문장의 모습, 리듬, 풍격이다” “스타일이란 작가의 기술의 가능과 필연과 대상, 자재의 저항 사이의 즉 그 재료를 문장화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그 저항을 극복한 정도에서 기술적인 성격과 묘미의 나타냄 그것이다” “개인의 사상, 감정 또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의미 내용이 어떠한 언어적 개성을 거쳐서 표현되느냐의 성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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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나는 우리나라에 보였던 문장강화의 목적과 문학 개론의 목적, 그리고 국어학의 목적으로 쓰인 각각을 들었는데, 무엇보다도 문체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제나름인 것과 그와 반대로 그들 사이에서 어딘지 공통된 요결을 또한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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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이니 「묘미」니 「성격」이니 하는 것들은 도시 눈으로 가릴 수 없는 문체를 해석한 것이요 실로 “성령묘발(性靈妙發) 회포독발(懷抱獨拔) (양서문전(梁書文傳)”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대저 어찌하여 사람들은 문체에 대한 통일된 정의를 가질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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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급할진대 송나라 예사(倪思)는 「文章以體制爲先[문장이체제위선]」「文章先於辨體[문장선어변체]」라 하여 정공(精工) 이전에 위선골격(爲先骨格)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수서(隨書)인 경적지(經籍志)에도 「문체천변(文體遷變)」이란 용례가 있다. 한편 서구에 있어서 Style은 나전어의 Stilus에서 어원하여 Stilus는 본래 조각하는 의미나 조각하는 도구(첨필)의 의미로 쓰였고 16세기엔 「사상의 표기법」(Amyot)으로서 17·8세기엔 음악 미술의 「유행취미」 등으로 회자되고 Styliser에서 Styliste로 명사화하여 와용(訛用)되기는 Victor Hugo(1802∼85)가 효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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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754년 우리나라로 치면 영조 30년에 불란서의 박물학자 Buffon(1707∼88)은 그의 아카데미 취임연설에서 “문체는 곧 인간이다”(Le style, c'est I'homme mêe)라는 말을 씀으로써 획기적인 문체의 정의를 세계에 퍼뜨렸다. “문체는 곧 인간이다.” 오늘날 Buffon의 정의는 이미 부동하는 좌우명으로 모든 문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념이 되어 있다. 그러나 문체는 여기서 맺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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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ffon의 문체에 대한 정의가 백이면 백, 천이면 천의 머리에서 저마다 해석되며 의문되는 그 까닭은 무엇인가. 오늘날 문체는 언어과학과의 관련만이 아니라 널리 심리학적, 미학적, 생물학적, 또는 사회학적인 면과 비교 고찰되어 문체론(Stylistics)응 영야(領野)를 개척하면서 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복잡한 이론화에 당할 수 없으므로 감히 여기 대한 탐착(探鑿)은 후일의 일로 미루면서 「인간」 개념이 어떻게 문학 속에 살았는가를 되씹는 것과 아울러 문체의 존재이유에 대한 반성과 나대로의 관점을 서설(序說)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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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는 곧 인간이다”라고 정의한 Buffon의 연설은 당시에 있어서 고루적(固陋的)인 수사법과 허다한 웅변으로 가득찬 Fontenelle(1657∼1757), Diderot(1718∼84), Montesquieu(1689∼1755)들의 문체결함을 시정 반박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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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는 인간이 자기 사상에 이입하는 질서와 활동에 불과하다.” Buffon은 문체와 인간과를 다시 이렇게 설명했다. 이때 그가 정의한 I'homme란 어디까지나 Descartes(1595∼1650)적인 cogito의 인간을 말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Buffon 자신이 과학자이면서 인간의 전 기능을 발동함으로써만 얻어지는 수리적 개념에 충만한 까닭이요, 따라서 사유하는대로 적는다면 문체는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었으므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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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ffon은 질서에 대하여 설명하는 가운데 「주제의 파악」을 들었다. Montesquieu에 있어서 「만법정리(萬法精理)」가 재료수집만으로도 10여년 간 고심되었음에도 거기엔 전체적인 통일이 없으므로 즉 주제가 상실되었으므로 비질서적이라고 매겨졌다. 질서가 없고 주제의 통일이 없는 그러한 문체를 Buffon은 문체의 그림자(ombre du style)라 공격하여 어디까지나 실체인 인간과는 동떨어진 것이며 그림자 아닌 실체로서의 인간만이 그대로 주제와 질서로서 돌아오는 것이라 하였다. 한편 이러한 인간은 Descartes의 생득관념에 따라 「생득인간」「내부인간」이라고도 불리워져 Buffon의 인간이란 내적 질서의 이명(異名)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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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18세기를 전후한 시대가 고전적 인간주의의 전성기임을 상기할 때 Buffon의 입장은 가장 시대적인 것이었고 인간에 대한 또는 자아에 대한 치열한 요구가 결국 그로 하여금 “문체는 인간이다”라는 정의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문체의 정의는 아직도 하나의 문체관에 머물렀을 뿐, 문체론적인 연구는 동반되지 않았었다. 기실 그는 운문을 독단의 격식(formule arbitraire)이라고까지 하면서 문체에 대한 일체의 구속을 용인치 않았다. 구(舊)수사학에 대한 반발은 문체의 결과적인 희망과 분별을 일축해버린 것이다. Buffon에겐 문체에 대한 체계적인 방법을 고려하기보담 인간에 대한 자각적 감동이 몇 천리나 앞섰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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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이 문체 그것이 인간(자아)과 밀접하는 동시성에서 새로히 촉구됨으로 해서 우리는 문체에 대한 해석이란 곧 인간에 대한 해석으로도 충족되리라고 믿는 것이다. 어느듯 문체는 인간의 인간적인 이유, 즉 인간의 존재성을 반영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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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문체가 필연하는 조건이 인간존재와 동시적인 것이라고 긍정하면서도 사실 근대 아닌 이전에 또는 어느 시대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있어야 할 문체의 일반적인 계기를 쉽게 용인치 않는 경우가 많다. 비단 그것은 문체만의 일이 아니라 표현과 표현을 계기하는 표현 일반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문체」 또는 「표현」이라 불리우는 개념들이 얼마나 문체와 표현의 본질적인 파악을 장애 하였는가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제 문체의 해석은 문체의 일반적인 계기에 대한 추구에서 돌이켜 볼 필요에 점점 사로잡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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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they(1833∼1911)가 “모든 개념 속에는 개념 이상의 무엇인가 살고 있다”라고 하였음은 세계 일반에 대한 그의 해석학적 촛점을 천명한 것이나 전게한 제가들의 「모습」이니 「묘미」니 「성격」이니 하는 불명한 개념들은 그만큼 개념 속에 살고 있는 또다른 개념 아닌 무엇인가를 벌써 시인하여 있는 것이며, 어찌하여 우리는 문체 개념 속에 살고 있는 또다른 개념 아닌 문체 일반을 부정할 수 있으며, 그러한 문체 개념과 문체 일반의 통일을 꾀하지 못하는가. 문체의 해석은 문체 일반을 추구하며 동시에 문체 개념의 문체 일반에 대한 통일을 위하여 다른 하나의 목적을 성립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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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은 개념과 일반의 통일이야말로 Buffon에 있어서 주체적 통일인 질서의 의미와 서로 동등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문체의 그림자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란 문체 속의 I'homme에 문체의 그림자를 합치 시키는 일인 것과 같이, 문체의 해석은 문체개념의 개별성을 전혀 말살함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의 개별성을 전체의 일반성과 통일시킴으로써 그의 목적을 달할 수 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대단 애매한 일인 즉 바로 말하여 <무엇>이 유개념 속에 드는 개체가 있다고 할 것이다. “개별화 되지 않는 <무엇>이 개념과 대응한다고 믿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문체는 곧 인간이다”라고 하였을 때 “문체는 곧 문체 일반이다” 아니면 “문체 개념과 문체 일반의 통일이다” “질서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개념은 “이중의 의미에서 극한을 내포하며 표현 영역을 매개적으로 초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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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ffon에 있어서 주체의 파악은 그대로 문체의 파악으로 문체의 파악은 문체 아닌 문체의 그림자를 탈락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 다시 우리는 A. Bennett(1767∼1931)가 “문체란 곧 관념이다”라고 정의 한 뒤에 관념은 관념 자신을 표현한다함과 Humboldt(1767∼1835)의 Idealismus의 주창 등을 저으기라도 간과할 순 없다. Alain(1868)도 “문체가 문체되는 이유는 문체가 예고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문체가 예고하는 것은 관념인 문체가 관념인 문체 자신을 표상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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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문체를 표상하며 인간은 인간을 표상한다. 문체는 문체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문체 해석의 다른 또 하나의 목적이란 문체가 문체하는 그 움직임을 밝히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문체의 본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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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Style란 조각(drucken)하는 의미에서 어원한다 하였으니 독어에 있어서 drucken은 원체 Drukblock에 대한 충동을 말하는 것이며 이 Druckblock에 들어오는 것을 인상(Eindruck)이라고 부르며 다시 외출하는 것을 표현(Ausdruck)이라고 부른다. 비로소 그러한 “인상과 표현과의 상호매개가 행하여 지므로써 언어활동의 본 모습이 드러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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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인식론은 어떤 외부에 있는 존재(Sein)에 대하여 그를 지각(Wissen)함에 있어서 그 존재란 이미 지각된 존재(Bewusstsein)로서 변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이 원래의 존재를 지각된 존재로 변하게 하는 것을 가리켜 인식(Bewusstesin이라고 불렀다. 사실 “의식작용은 의식 일반의 입장에서만 보아지는 인식 대상에 불과하다”, 즉 작용하는 모두는 있는 것으로의 일반인 모두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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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조리를 그대로 drucken에 비할진대 Eindruck하며 다시 Ausdruck하는 두개의 방향이란 Sein에 대하여 Wissen하는 방향과 서로 하나의 것이므로 연관된 방향은 하나의 원처럼 존재하며 전체를 이룬다. 이렇듯 Ein, Aus가 함께 연관될 때 표현은 단순히 원체 Druckblock에서 무심히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Druckblock를 개변시키는 말하자면 원존재를 지각된 존재로 변하게 하는 것과 같이 Druckblock를 Bewusstdruckblock로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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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하여 표현은 표현 일반에 대하여 단순히 「반사」또는 「전달」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를 「지시」「결정」하는 의미에서 한층 새롭다. 이때의 표현 일반은 「결정」전후의 표현을 동시적으로 포함하는 것이 된다. “표현 활동상의 매개란 내재적인 지각 표상을 Ideal한 관념의 세계 또는 대상의 세계에까지 높혀 객관화 하는 것이며, 대상 세계의 객관성은 다시 나에게로 회귀하는 것으로써 믿어진다.” “자타는 서로 확인하며 결합된다. 거기서 우리들은 언어 의미의 영역을 받드는 존재론적인 기저를 얻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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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은 자의적 요소, 바꿔 말하자면 목적 또는 <원현(圓現)>(Entelechie)의 개념에서 다시 존재 일반에 개념화됨으로써 보편타당하다.” 잠간 Entelechie하는 문체를 원(圓)을 위하여 매개하는 선의 무수한 작용과도 같이 보아 올 때 우리는 문체를 하는 행위로서의 작용(Operation)을 새삼 여기에 부여함즉도 하다. 무엇보다도 문체가 문체하는 Operation으로서만 달하여지리라는 좋은 예는 한 미터라는 길이의 개념은 그 길이의 측정을 떠나서 있을 수 없고 차라리 그 측정과 동의라고 보았던 미국의 물리학자 Bridgman(1882∼ )의 경우만이라도 넉넉할 줄 안다. 이때 “Operational 한 주체는 의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요 행위적인 주체로서 일반화 한다. 인식은 의식만으로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행위로서의 Operation에 있어서 성립한다.” 여기 바꾸어 “문체는 의식만으로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행위로서의 Operation에 있어서 성립한다”할 것 같으면 조각하는 의미에서의 문체는 결과(Ergon) 아닌 활동(Energeia)이 계기 속에만 존재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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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봄에 있어서 표현(Ausdruck)을 지시(Direct) 또는 (결정(Handled)으로 해석한 것은 이미 하나의 행위적인 실천을 전제한 까닭이며 이러한 Operational 한 움직임이란 Buffon에 있어서 「문체의 그림자」를 탈락하는 방향에서 처음 요청된 것이다. 그러므로 Buffon의 질서는 활동과 불가분의 계기 속에서 끝까지 Operation하는 인간의 개념과 떠날 수 없게 된다. 문체인 질서는 바야흐로 개성과 전체를 매개하는 행위적 질서이다. 「夫志氣之師也[부지기지사야] 氣體之充也[기체지충야]」 아무리 기이(氣以)하며 축기(蓄氣)하는 동양 사고에서도 맹자의 이른 바 體之充也[체지충야]는 차지하며 숨은 Energeia의 Operation을 보편 구성의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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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개에 있어서 그리고 매개에 의하여 주체를 나타내고 예술을 구상하는 표현이란 주체로 부터 일어나는 것과 객체 조건과의 사이에 오랫동안 진행되는 상호작용 바로 그것이다 . 또한 그것은 처음으로 주체와 객체 조건의 어느 쪽에도 없었던 형식과 질서를 더불어 획득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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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매개로서의 Operation은 항상적인 것이 아니며 고정한 단일체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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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상재된 Gourmont(1859∼1915)의 「문체의 문제」는 작가의 생리 뇌세포, 감각들에 언급하면서 전적 매터리알한 표현으로 일관된 이 방향에의 새로운 진출이었다. 즉 그는 문체의 종족적 문제를 생리학의 문체로 보았으며 우리들은 우리들의 전신으로만 느끼는대로 생각하는대로 적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문체는 남으로부터 물려 받거나 좇아 따를 수도 없는 자의적이며 조사적(措辭的)인 모방과는 엄청난 끝내 비동화적인 것으로 갈파했었다. 곧 “문체는 감각의 특수화 변화(Specialisation)다.” 문체는 그대로 세포간의 관계가 전체적인 생명력에 의하여 통일된 일종의 전현(全現)으로 나타난다. 그만큼 인간은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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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형체도 아니며 순수 정신도 아니며 풍부한 구체적 내용을 가진 실체적이니만큼 물질과 격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을 내포하며 물질에 있어서 어떤 특성을 형성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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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물질인 육체와 생리에 대하여 내면적으로 우위하며 이를 포함하는 관계에 있으되 외면적으론 하나의 대립 관계를 짓고 있는 이상, 활동은 자연 Organic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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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문체를 형성하는 활동 안에 매개적인 Organic를 인식함은 정신인(精神人) Personne morale이 생리인(生理人) Personne physique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Paul Bourget(1852∼1935)의 『현대심리전서』를 출발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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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또다시 성격적인 연합을 요청함이었다. 사실에 있어서 문체론은 성격학에 불과하다. Gourmont의 특수한 변화란 일종의 성격화를 의미하였을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 행위적 형태란 첫째 전체와의 매김에서, 둘째 삶의 표징으로서, 셋째 타자에 끼치는 표현적 의미로서 현상하는 것이다.” 희랍 어원대로 성격은 하나의 「기둥(柱[주])」이며 연극에 있어서의 「가면」과 같다. 그러나 어찌 기둥과 가면이 건축의 운명과 배우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을 건가. 성격은 매개이며 중성이며 또한 유형이며 개성인 한에서 하나의 존재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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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는 곧 인간이다”라고 불리우는 대신에 “문체는 성격화된 생리이며 개성이다” 그러므로 “문체는 곧 하나의 인간이다”라고 개찬(改竄)되고야 만다. 小林英夫[소림영부]씨는 이 하나의 인간을 「통일」 「개성」 「자인성(自因性)」 「목적성」 「가치」 등등으로 분석하였다. “문체는 언어 중에 있는 정도로 언어 하에 있다. 그것은 작품의 육체인 정도로 작품의 정신이다.” Flaubert(1821∼80)의 사실주의란 오직 의무적인 분신을 자각하면서 생리인과의 결탁을 거부하지 못한 단계에서 그가 바라본 하나의 기질이었던 것이다. 그는 인간사상의 육체를 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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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ubert는 Monnier(1805∼77), Champfleury(1821∼83) 일파의 비문체적이며 반문체적인 사실주의를 문체의 설계도 위에 바로 잡았다. 무엇보다 인물의 문체다. 즉 Emma Bovary는 Champfleury 시골 여자에 더해진 문체이며 Homais는 Monnier의 속물에 가해진 문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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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baudet(1874∼1936)가 말하는 인물의 문체란 육체의 문체, 성격의 문체일 것이고 이를 다시 바꾸어 문체의 인물, 문체의 육체, 문체의 성격이라고도 이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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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생리화된 육체를 사람들은 물질(Matéiel)이라고도 불렀다. 사실 Zola(1840∼1902)의 실험 의학의 응용을 거쳐 문체 중의 인간은 보다 분석적이며 해부적인 과정으로 말하자면 Physiologie의 면에서 Psycologie의 면으로 또는 미시적인 하부로 유전으로 하며 차츰 흘러 오는 기세였다. Zola의 “성공은 자기의 해부 연구의 결벽과 과학과 자유주의 세기의 중대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비평되었다. 그보다도 Thibaudet는 “20세기의 발명은 19세기의 그것과 판이하며 전자가 인간에게 새로운 기계에 의한 방법을 주었는데 비하여 후자는 새로운 감각기관에 의한 방법을 주었다. 전자는 유성(流星), 사회, 생산, 소비 같은 것을 변화시키고 후자는 인간의 육체 능력을 변화시켰다”고 이 사이의 추이를 풀어 놓았다. 과연 물질로서의 인간의 육체 능력은 변화되었다. 정신인과 생리인과의 격리는 인간에 대한 외부적 관점(point devue sur la personne)과 인간과의 일체(la coincidence avec la personne)가 상극하는 무서운 심연을 바라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체상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인간은 그들이 의거한 「시간」과 「공간」의 분열을 어떻게 조리할 것이가에 대한 새로운 고민과 부딪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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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Bergson(1859∼1941)의 직관(Intuition)은 이 무렵의 가장 뛰어난 존재 방법이며 따라서 「이 철학 작용은 그 깊이에 있어서 철학만의 힘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작용과 다른 운동과 연결되어 인간의 어둡고 위험한 내부에 대하여 그의 변이, 불안, 개혁 ― 모든 종류의 혁명과 붕괴를 한줄기 방향에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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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은 1914년의 세대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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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과 작가의 관계는 반드시 직접적인 것이거나 또는 모든 개인 사정에 있어서 조심있게 해석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작가의 꿈과 그의 정밀한 심리적 대립을 구체화한 것이며 오직 경험주의적 개성과 직접관계되는 민감한 전도양식(轉倒樣式)의 面[면]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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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문체상의 심리주의 경향에 대한 일반 견해를 표명한 것이다. 1920년 Marcel Proust(1891∼1922)는 《N·R·F》지상에 Flaubert문체를 비평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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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ubert 이전에 있어서 동작이던 것이 인상으로 바뀌고 물질은 인간과 동일한 생명을 지닌다. 눈에 보이는 뭇 현상에 대해선 추리라는 것이 뒤따라 외적 원인을 결정하며 우리들이 처음으로 받을 인상에는 이러한 원인이 포함되지 않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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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간은 이 연달아 물결치는 동질의 시야에서 물질 이상의 것도 아닌 꼭 적어야만 할 하나의 환각에 사로잡힌다”는 부분이 있다. Flaubert에 대한 Proust의 시인은 『Madam Bovary』(1857)에서 거슬리도록 흔해빠진 comme 또는 tel과 같은 비유적 접속형이 『Salambo』(1862) 『감정교육』(1869) 등에 이르러선 거의 제거되고 대신 반과거 imparfait가 연속적으로 사용됨으로써 동사가 있어야 할 부분들이 거개 시칭적 의미를 잃어버린 일종의 망각을 회복하는 효과적인 문체에 성공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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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상에 있어서의 심리주의 경향이란 위에서 엿본 바와 같이 주로 시간 관념의 수정에서 혹은 타파에서 현저하여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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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소설과 같이 인과적인 한 줄기만으로 이해되기 위하연 한 사람의 생애나 사건이 이미 완료된 것이어야 한다. 즉 한 순간이 어떤 의미(방향)를 갖는 것으로 이해되기엔 그것이 전적 과거화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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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대소설은 시간과 사건과의 매김, 사건의 시간 속에서의 실현 나아가선 그러한 사건의 변화를 포함하는 시간 자체의 움직임을 포착하려 한다. 즉 시간은 역서(曆書)에서 내려와 구체화된 주체상의 의식류(意識流)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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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우리는 Proust의 Flaubert에 대한 확실한 눈을 보장할 수 있다. 그러한 현대소설의 대표작으로 흔히 James Joyce(1882∼1941)의 『Ulysses』(1922)와 Marcel Proust의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1913∼28)을 들고 있다. Herbert Gorman(1893∼ )의 “당돌한 이미지와 단편적 사고와 의식의 기괴한 부분과 또 명상의 얼핏 보아 매김없는 흐름의 소설구성을 변화시키고 우리들 이전의 인류를 그렇게까지 즐겁게 했던 시간적 통일과 선택을 파괴한다”는 서견(序見)은 Joyce의 Montage에 의한 동시적 전개를 극구 지칭한 입장이었다. Joyce는 바깥 현실과 안의 현실은 똑같이 나누어 기술할 수 있는 발생의 면으로 그의 사고를 집중했던 것이며 엄밀한 추구로써 비연속하여 연속하는 즉 현상적인 바리에티를 구조한 것이다. 그보다도 Proust는 “커다란 사회적 전망에 응할만한 이야기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연대기 작자의 방법을 물리친다.” 그는 외부에서 적용되는 연대기적인 시간대신에 한 주인공의 내부에 사는 시간감각을 이용한 것이며 “회상록을 적고 싶은 상태에 있는 한 사람의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전망의 무의지적인 전개로써 특징있는 문체를 수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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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ust에선 표현의 순간이 인식의 순간보다 가중한 것이며 또한 결정적인 본질이다.” “현인들이 지적 명상에 의하여 얻은 바 비시성(非時性)의 계시를 감정적 인상의 형식으로 포착했다.” “표현의 문학과 인식의 문학간에 다리를 놓아다.” “시적 진리는 문체의 인상과의 적합으로 표시된다.” Ramon Fernandez(1894∼1944)는 Proust의 직관적 미학을 이렇게 역설하였다. 이상의 소설(所說)은 전혀 Bergson의 철학적 근원과 또는 그의 「직실(直實)한 형이상학」과 서로 일치되는 것이다. 지속하는 우리들 자신(notre moi qui dure)을 이끄는 직관성이란 흘러 간 시간에 있어서의 다하여진 행위(I'action accomplie)를 une chose로 보고 지금 흐르고 있는 시간에서 다하며 있는 행위(I'action s'accom plissante)를 un progrè로 보았다. 우리는 여기에 이르러 전술한 정신인과 생리인이 서로 내(무의식)적 자아와 외(의식)적 자아로 분열되다가(확실히 그것은 심리적 방법과 사회적 방법에 통제된 것이다)흐르는 시간의 <중정(中程)>(michemin)에서 생존하는 하나의 자기(un moi vit)로 구제되고 있는 것을 본다. 따라서 Proust의 문체는 이러한 동시적(시간)이며 동질적(공간)인 인간을 재현함에 기저되었으며 Thibaudet의 말 같이 “자기 스스로의 지속에 대한 친밀성, 타인의 지속을 누릴 수 있는 천부, 그리하여 인간 그 자체를 드러내는 문체, 지속적 인간을 나타내는 함축과 천공성을 굴지(屈指)하며 이어가는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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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들어서면서 Style 변천은 직관의 직관(Aus schauung der ausschauung)을 위한 심리사건의 통각적인 발전이었다고 이를 수 있다. 한편 Jo yce계의 Imagism과 Proust계의 perspective하는 기억 요청 따위의 자의적인 표현을 들어 Charles Bally(1865∼ )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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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활동이란 그 근원부터 지적인 것이므로 정서표현을 위하연 이를 내재적인 연합작용으로 이끌어야만 한다. 언어기술은 그 형태(능기)에 있어서나 그 자치(소기)에 있어서나 자의적이므로 해서 연합은 능기(能記)에 따라서 그의 감각 인상을 일으키고 소기(所記)에 따라선 그의 개념을 상상적 표상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은 감각적 지성이나 상상적 표상들이 사유의 정서 내용과 일치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 표현성을 발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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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해 Bally는 통각적 Naturalisme을 표현 일반과 접근시키려는 새로운 문체의 경향을 procè아닌 procèes로서 설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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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들은 화술계통의 문체에의 맹신을 단절치 않으면 안될 시기에 도달하였다.” Proust의 문체는 심리학자 L.Klages(1872∼ )에 의하여 다시 아래와 같이 설명되겠다. 즉 그는 Person을 Stoff, Artung, Gefüe의 세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Stoff는 선천성의 총체이며 Artung은 관심체인 총체, 그리고 의욕하는 방향이라고 규정되었으며 Gefüe는 Temperament, 즉 진행적인 정서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잠자는 천성과 움직이는 의욕의 방향과 시간 진행의 기질이 곧 현대인의 성격이란 것이다. 한편 의식은 주체와 객체와의 인식 관계이며 이 관계는 주체와 객체의 접촉에 의하여 “예컨데 아무리 미소한 정도의 것이라도 언제나 주관의 쾌불쾌의 정서를 동반하니 이 정서란 흥미, 욕망, 혐오, 성급 같은 것인데, 이러한 정서는 진행형에 대하여 어슴프레한 일반의 Emotional Colouring을 부가한다.” 즉 Gefüe는 진행적 흐름(시간)을 부가하며 Proust에 있어서의 시칭 변화에 대한 의식이란 결국 Gefüe의 부가라는 것을 지적해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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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gson은 존재에 있어서의 두 가지 조건을 들어 그 하나는 의식에 나타나는 현전,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전하는 것과 그 선행자 및 그 후행자와의 논리적이며 인과적인 매김을 함께 포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존재에 있어서의 시간 의식이란 계기하는 의식일 것이다. 지금의 의식 위에 지난적 투영이 가하여짐으로써 시간지각(temporal perception)이 생긴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를 생각하는 지각의 원인에 지나지 못할 뿐 기억(회상)이란 한갖 지난적의 있었던 바를 그대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므로 “다만 지난적 시간은 지금 시간의 느낌인 따름이다.” 우리는 체계적 문법학에 나타난 「시간의 표준이동」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때매김의 대중은 실제의 때와 같이 고정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생각에 의하여 혹은 앞으로 혹은 뒤로 옮길 수 있나니” 하여 「과거 현사법(現寫法)」또는 「미래 현사법」의 두 가지를 들어 「가상시제」라고 부른다. 여기의 과거현사법은 널리 역사적 현재 또는 극적현재(Jespersen)아니면 심리적 현재(psychological present)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역사적 현재란 “우리가 지난적 역사의 일을 더욱 생생하게 힘있게 나타내고져 할 적에 쓰는 것”이며 “현대문학에 있어서 현재형이 많아졌다는 것은 사건 진행을 그 형태대로 여실히 잡아보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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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가상시제는 어디까지나 문법적 파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생활하는 일반사회에 있어서의 시제 관념과 여기의 가상시제의 관념과는 동일치 않다. 일찍이 波多野完治[파다야완치]씨는 이 두 개의 시제 관념을 각각 「사회적 시간」(시간) 「심리적 시간」(시제)이라 불러 구수사법의 해체를 목적한 일이 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시제 관념의 여러가지 변화는 춘원, 동인, 빙허, 이상으로 흘러 오면서 뚜렷한 굴곡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상론은 따로 작정하고 있으나 사회적 시간이 객체적이며 완료적인데 반하여 심리적 시간은 어디까지나 주체적이며 현재적임에 대하여 우선 수긍할 수 있겠다. 가상시제는 과거 미래의 어느 쪽을 불문하고 현재견인적이라고 보아질 것이니 사회적 시간에 대한 이단은 곧 심리적 시간의 충동에서라고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면 가상시제인 심리적 시간은 과연 문체 건설에 있어서 어떤 Operation을 요청하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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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문학의 심리묘사란 다만 심리를 오전한 현실로서 그리는 일이었다. 그들은 꼭 물질과 같은 현상으로서의 심리를 찬찬히 그려냈다. 하지만 어슴프레한 음영은 완전히 거세되고야 만 셈이다. 20세기 문학에서 이러한 기억의 반(半)현실을 놀랄만한 재치로 그려내어 여러 심리학자들에게까지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Marcel Proust이다. 사실 Proust를 두고 생각한다면 과거현사법은 현실과 비현실과의 중간인 반현실, 즉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빈도(frequency)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빈도는 사상적 구성에 있어서 가장 애띤 연상으로 하여금 빈도가 많은 연상보다 넓게 확장하기 위하여 누가(累加)인상(cumulative impression)의 작용을 비는 것인데 그것은 회상의 경우에 이르러 뭇사물의 관계적 위치가 전도되고 만다는 흥미있는 결론이 된다. 또한 이러한 빈도는 「직감직서(直感直叙)」를 위한 「실제적 도합(度合)」 (Realitäsgrad)이 가장 고조한 경우라고도 말하여진다. 어쨌든 반현실인 잃어진 시간에 대한 빈도로서 어슴프레한 음영이며 Emotinal Colouring인 I'homme을 탐색 노출하는 것이 Proust의 작업이었다. Buffon의 내적 인간 또는 Zola의 실험 인간에 대하여 그는 어슴프레한 perspective배경(配景)으로서의 인간을 그렸던 것이다. 가능한 범속(範屬)내에서 우리는 이 어슴프레한 I'homme의 정체와 그의 지속을 살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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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ust 그에겐 모델이 없었고 모든 모델은 표현에 따라 만들어졌다.” “Proust가 표현하려는 현실은 렌즈를 통한 특수광선 하에 비쳐진 시적 현실과도 같았다.” “그에게 있어서의 문체란 단순한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Vision의 문제이며 계시를 의미한다.” 우리는 Proust를 자극한 소위 순수시의 무의식적 현실에 대하여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아의 가장 심부에 대한 내공(內功)이 그들 시의 본질이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자아의 심부를 개착(開鑿)하는 방향을 시에서 산문으로 돌린 일인자가 Proust 였더란 말이다. 그러나 자아의 최심부에서 느낀 희열의 영원은 끝내 쓰러지지 않을 건전 완쾌한 정신의 자태일 수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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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바로 있는 대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이 만나기를 바라던 저 불가해한 요구를 느끼는 순간에만 부딪쳐 오는 그런 존재에 의해서였다.”순간에만 부딪쳐 오는 그런 존재는 문법적 특수성인 접속점의 기능과 「문장 아닌 여백」에 막상 탐익되더 존재다. 그러나 음악과 같은 여백은 “전혀 수동적인 장소로서 행동에 따른 어떠한 실천적 적극성도 바랄 수 없었다.” 여기 실천적 적극성을 결핍한 그의 vision이란 도피이며 무력이었음에 차질되어 그가 지향한 시간은 그로 하여금 “그 순간에 있었던 존재란 시간을 넘는 존재였다. 나는 미래의 유위전변(有爲轉變)이 걱정되지 아니하는 존재였음으로이다”라고 고백케 하였다. 정말 Proust의 심리적 시간이란 한갖 그의 임상적인 소극성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엔 지나치게 많은 정신적 방황이 노출 된 까닭이다. 어슴프레한 인간이란 미래가 걱정되지 아니하는 존재였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러면 심리적 시간은 단순히 반현실에 대한 탐구만으로 지속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주의에 의하여” 이동하는 시간은 “지난적 시간을 지금 시간의 느낌인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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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대전 뒤 실존주의의 대표적 작가인 J. Sartre(1905∼ )은 아래와 같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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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오직 스스로의 주관성과 맞설 뿐, 제가 만든 대상에까지 맞서기란 터무니 없는 노릇이다. ……주관성의 한계에까진 갔어도 그 이상은 넘지 못한다. 작가는 어떤 한 가지 표현법이나 격언이나 알맞는 형용사의 효용에 대해선 말할 수 있어도 혹은 효용을 측정할 순 있어도, 효용 그것에 대하여 느낄 순 없다. Proust는 결코 Charlus의 동성애를 발현한 것이 아니라 기교(起橋)하기 이전에 다만 그렇게 하도록 구상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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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주제는 문체를 받침할 순 있어도 거느릴 순 없다. 문학적 기술 외에 àriori로 존재하는 문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Ibid p. 76) “언어의 물질성과 그의 불합리한 저하에 대하여 민감치 못하다면 어찌 그 문체에서 우아와 박력을 찾을 수 있을까.”(Ibid p. 158) 그러나 Sartre의 심리주의 작가들에 대한 박론(駁論)은 대강 아래와 같이 귀결된다고 본다. “심리적 동기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선택된 것이며 문체로 말한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통제된 것이다.” “그 자신을 결정하는 심리학적 법칙을 그 자신과 함께 결정받는 독자에게 전하는 것이 문제였다.”(Ibid p. 161)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어슴프레한 소위 백색심리학(la psychologie blanche)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바삐 서둘러선 안되겠다. 우리는 시간 그것에 대한 다른 , 각도의 증명을 한번이라도 비쳐 봐야할 것이다. 존재는 시간적이요, 시간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시간이 어슴프레한 공영의 색출을 위하여 비시간으로도 존재하는 것을 알았을 때, 다시 <비아(非我)>(Ie non-moi)에 대한 철저한 projett가 요청되는 것이므로(Ibid p.108) M. Heidegger(1889∼ )에 준하여 이를 잠견(暫見)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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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시간성과 시간의 배려」에 나타난 Heidegger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흔히 그때엔(dann) 또는 이전엔(zuvor) 아니면 지금엔(jetzt) 당시엔(damals)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그때엔」에서 자아를 바라보고 「당시엔」에서 자아를 거느리고 또 「지금엔」에서 자아를 돌이켜 보는 것이 바로 배려(Besorgen)하는 것인데, 「당시엔」에서 표현되는 거느림의 시야는 이전(früer)인 것이며「그때엔」에서 표현되는 바라봄은 금후(späerhin)인 것이며 「지금」에서 표현되는 시야는 오늘(das Heute)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엔」은 「이리 저리하였던 그때엔」 (dann wann……)으로 「당시엔」은 「이리 저러하던 당시엔」(damals als……)으로 「지금」은 「이리 저리하는 지금」(jetzt, da……)으로 각각 배려되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다시 시부(時附) 가능성(Datierbarkeit)이라고 명명하였으니 “이것이 나의 배려들은 표현한다 함은 현전에 기초하며 현전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해석되는 현전, 즉 지금에서 표현되며 해석되는 것이 바로 시간인 것이다.” 또 다시 배려된 시간은 긴장하는 「그러하는 사이에」(wärenddessen)를 스스로 포함하여 새삼 공개시간(Offentlichzeit)로 옮아오는 것이며 다시 이러한 배려된 세계시간(Weltzeit)은 세계 내에 이미 존재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실존적 의미에서만 가능하다. 그는 위에든 배려적 시간에 대립하여 통속적 시간을 생각할 수 있다 하며 “배려적 시간에 있어서의 jetzt는 시부(時附) 가능성, 긴장성, 공개성, 그리고 세계성의 구조상에 서있는 것이지만 통속적인 시간개념에선 전혀 이러한 구조가 뒤집힌대로 시간의 지평적 성격마저 탈자(脫自)되어 시간이란 지금 시간(Jetztzeit) 또는 지금 연속(Jetztfolge)”이라고만 알려졌다. 그런데 이러한 배려적 시간과 통속적 시간이 서로 통일되므로써만 전(全) 시간성(Senpiternitas)을 획득할 것이라고 한다. 즉 “존재의 에 폭적 본질은 존재의 어두어진 시간 성격에 속하면서도 존재에 있어서 사유된 시간의 본질을 결정지운다. 통속시간의 명칭하에 나타난 것은 대상으로 꾸며진 존재물에서 빌려온 한갖 공허한 시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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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이 Heidegger의 시간론은 오히려 Bergson의 주장과 대동소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의 초점은 사회적이며 객관적인 시간과 심리적이며 주관적이 시간이 moi의 근저에서 혹은 세계의 지평에서 공개되지 못한 채 일종의 결투(une sorte duel)를 회피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배려되지 않고 회상된 심리적 시간은 험산(險山)한 위기에 직면케 되었다. 예(例)를 들어 Proust의 지속적 문체란 끝내 순간적인 비(非)배려의 시간 위에 구조된 것이었다. “순간은 지나가는 것이요, 그 자신 영원의 이메지요, 작업과 역사와의 삼차원을 가진 인간 시간을 부정하는 것이다.” (Il est la néation du temps humain)보다 넓은 의미에서 심리는 변증법적이어야 한다. “Proust의 지적 분석은 모든 순간에서 그 한계를 폭로하여야 한다.” “비연장적인 요소만으로 연장은 구성되지 아니하는 것 같이 현재에서 빌려 간 요소만으로 과거라는 차원은 구성되지 않는다.” Proust에 있어서 무력하도록 현재 속에 침투되는 과거란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과거는 원래 지금 현재의 과거인 한에서만 있는 것이다. 쓰러져 간 모두는 그 뒤에 남아 있는 인간들의 구체적 과거를 전적 다하는 한에서만 과거인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자와 같이 과거는 그대로히 무로 돌아가는 비과거일 것이다. 즉 과거와 현재와의 관계는 끝까지 내적인 것이며 나는 나의 과거이며 나는 과거를 소유(exis)함이 아니라 과거의 실천(praxis)으로 (Ibid, p. 264) 과거 그것으로 있는 것이다. 과거는 그것으로 있는 바의 즉자가 언제나 퍼져 가는 전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과거로 있는 것은 자기 동일적인 나의 가운데에 깔아 앉아 즉자적인 내가 되는 것이다. Sartre는 근원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의 반성을 이야기하며 반성되는 의식은 나의 과거인 동시에 미래인 것이라고 한다. 즉 근원적 시간은 나 이외의 아무 것으로도 구성되지 않으며 심리적 시간은 다만 제 사실들의 계기를 메모함에 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심리상의 사실은 대자의 것이여야 하며 순수한 반성만이 이러한 심리적 사실과 통일되는 즉자의 존재 방식을 이룬다고 한다. 여기 Heidegger의 배려적 시간을 Sartre의 반성하는 근원적 시간과 일치시켜 생각할 때 문체는 성격이며 성격은 심리이다 함에 대하여 문체는 인간이며 인간은 서약이라고까지 부르짖는 전체의 문학(lalittéature des grandes circumstances)을 긍정할 수 있다. 따라서 결단적인 인간주의와 Perspectism과의 종합을 시도하는 Sartre의 문학적 입장은 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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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적 수법으로 대상을 고정화시켜 다시 허므로 빠뜨린 Flaubert에 대하여 불모의 리얼리즘을 선언한 그는 다시 구성물의 여러가지를 단조히 배열한 문학을 순수한 소비의 최후 형식이라 지적하며 심리주의 문체의 기초엔 근대식 개인주의가 숨어 있고, 그 개인주의의 기초엔 자본주의와 시민사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아울러 탄핵한다. 불모의 리얼리즘과 상실된 메카니즘을 극복하기 위하여 잃어진 시간을 뒤로 바라보는 그는 자유에의 길(les chemins de la liberté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포함하고 생략하는가에 따라 그 전경과 후경이 구별되는 것이며 우리는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것을 이 방향 혹은 저 방향으로 독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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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Faulkner(1897∼ )의 시간성을 말함에 있어서 Sarte는 Proust에게 잃어진 과거를 재현하는데 그쳤음에 반하여 Faulkner는 결코 잃어진 과거를 느낄 수 없으며 과거는 언제나 있는 것으로만 신념될 것이라 하며 Faulkner가 과거를 거기에 있는 것으로 신념하는 그 까닭이란 어디까지나 현재의 선택에 임하는 그 자신에는 추호도 허망됨이 용납되지 않는 까닭이라 하였다. 따라서 Faulkner의 의식은 의식을 의식으로만 변하게 하는 작용에 있어서 의식 자체가 시간화 된다는 조건하에서만 의식은 시간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그것은 하나의 가능이며 동시에 현존에 의하여만 결정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마침내 과거는 잃어진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신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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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저리하였던 그때엔」과 「이리저리하던 당시엔」과 「이러저리하는 지금」과는 시간의 포함된 상황(Situation)을 의미하며 동시에 전체의 문학(체)이란 상황의 문학(체)를 의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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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인간의 전체에 대하여만 적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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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작가는 다른 인간들과 같이 상황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의 창작은 인간의 모든 기도(企圖)와 같이 그 상황을 감사면서 바로 잡고 바로 잡으면서 초월하니 원주의 관념은 선의 회전관념을 설명하고 밑다짐하는 것 같이 또한 상황을 설명하고 밑다짐 할 것이다. 상황에 놓여 있음(êre situé)은 자유의 필연적이며 본질적인 성격이다. (Ibid p.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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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성격은 「놓여 있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 조건에 저항하는 것과 부정성의 문학을 선택하는 길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각 이론의 중심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시찰의 여러가지 결과를 지적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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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역사 창조와도 일관한다. “행위의 문학을 개시하기 위하연 소유의 문학을 포기치 않으면 안될 시기에 도달했다.”(Ibid pp. 264∼265) 그렇지만 상황으로서의 시대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시대 속에 있는 자기를 선택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즉 Sartre는 속박성을 들고 그 속박성에 의하여 “세계가 매장 되었을 때 이야기는 시작된다”(p. 180)고 하였다. 그리고 표현은 상황에의 호응으로 비롯할 것이며 “단순한 현재의 서술이 아니라 미래의 이름으로서의 하는 현재의 심판이다”(p. 195)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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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적 경험에 비쳐 볼 때 고립한 단어 대상이나 사건이란 있을 수 없다. 언제나 하나의 대상과 사건은 상황인 포위적 경험세계의 특수 부분이며 양상이며 또한 Aspect에 불과하다.” 기실 Dewey(1859∼1952)도 문제적인 상황의 존재를 operative한 지(知)에 대한 도전이라고 보았으며 미결 미정적인 상황은 Operation을 통함으로써만 통일된 상황에로 번지는 것이라고 한다. 극력(極力)하는 존재의 Operation은 상황을 재건하며 상황을 초월하련다.(Ibid p. 897) 존재적 결의란 「……에 있어서」를 언제나 상황화하며 이것을 한사코 공개하려는 것이다. 다시 Dewey는 피차 대상과 사건의 발전을 바라볼 때에 거기엔 언제나 장소라는 것이 있어 이 장소는 행위목적을 관통함에 있어서 어떤 능동적인 책임성까지를 발휘한다 하였다. 즉 상황은 어디까지나 부정된 즉자와 부정하는 대자와의 공동지역이며 Emplacement의 자각이 곧 나의 장소이며 나아가선 세계 상황에의 도전이 되는 것이다. 다시 상황으로서의 “세계는 뭇 생명들이 거기 태어나고 거기 죽어 가고 거기 일어나고 또 거기 쓰러져 가는 장소를 의미한다.” “시간을 떠난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개체적 결의에 의한 시간을 그 속에 포함하는 시간적 공간적인 전체의 존재이다.” 사실 “장소는 언제나 상황적이다” “장소에 일정한 중심을 응결시켜 놓고 다시주변을 이 중심까지 연결시키며는 장소 중심과 주변의 구조를 짓는 관심이 된다.” “상황성은 장소가 관심에 차 있는 장소로서만 성립되며 장소가 관심에 의한 중심과 주변이라는 구조를 가지므로써만 상황적이며 또한 상황 그것이 된다.” 장소는 주체로서의 나의 자리이며 상황은 그 장소를 중심하며 벌어지는 구조의 전체다. 관심에 차 있는 장소를 「배려하며 결의하는 장소」로 동일시 한다면 존재하는 나는 나의 장소를 전체의 상황으로 번져 가야만 할 새로운 Operation의 방향량(量)을 여기에 또한 제시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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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 Ausdruck을 호응의 원리와 같이 생각할 때 표현자(Kundgabe)와 <수현자(受現者)>(Kundnahme)는 이 구조 간의 대립자이면서도 오히려 이 구조 간의 통일자인 것이 알려진다. 상황을 위한 operational한 문체의 건설은 곧 동시적인 호응에 열중하는 장소에만 있는 것이 된다. 이때 문체 일반은 곧 상황일 것이오, 문체하는 일은 장소에 있어서의 호응작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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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장소는 사람이나 다른 개체가 그 구역에 있을 때, 그 사람이나 그 개체에서 작용하는 힘이 크기와 방향과를 그의 전면에 연관시키는 것이다. 주체란 전체 속의 여러 부분의 관계를 지배하는 일반법칙에 종속하는 장소의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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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Gestalt 심리학의 주요한 목적은 “장소의 개념이 지각이론의 중심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시찰의 여러가지 결과를 지적하는 일이었다.” 다시 Gestalt 학설은 전체성(Ganzheit)을 중시하는 다른 학설의 일반적인 동향과 서로 관계 있는 것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Gestalt는 역사를 가지지 못하였다고 비난되었다. “전체적 장소의 고찰은 무한의 변형을 일삼을 뿐이다.” 다시 Gestalt는 시각적 체제의 일반화에 치중한 나머지, 일종의 Vision의 계기에만 소여된다고도 비난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이것을 조건발생의 가정에만 두지 않고 널리 생산적 사고에로 확충시켜 본다면 엄청난 분야가 앞에 열려 질 것이오, 마침내는 Gestalt화의 요구(Gestaltungsdrang)인 Operation을 역학의 원리로써 전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즉 장소는 고정불변한 공간이 아니며 행위를 포위하는 시간 공간을 통칭한 전(全)명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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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가 시간관계 대신에 표현한 것은 실상 동작의 Aspect, Aktionsart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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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se와 Aspect는 현재의 발달된 언어일수록 표현상 뚜렷이 구별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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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서도 시상(時賞)에 현재형·과거형·미래형을 포함하는데 흔히 Shal or Will 부정사의 우언법(迂言法)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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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Shall, Will가 단순히 시간관계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다각적인 점에서 시간의 표현이 아니라고는 잡아뗄 순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현대문법의 시간 의식이 Tense에서 Aspect로 거기서 다시 Mood로 전환되는 여러가지 경향을 말하고 있다. “모든 동사에 있어서 Mood란 일인칭의 심리적 사상과 그 실현가능 여부에 대한 현저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 관계를 나타내는 동사에 대하여 <태(態)>(Voice)라고 불리우는 문법 범주를 새로이 인정함인데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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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걸려 있는 두 가지 항인 능동 수동의 표상에서 어느 편을 직접으로 생각할 것인가를 암시하는 동사형식의 발달에 의한 것이다. 동작이 주동(主動)에 대하여 사동이냐 혹은 능동에 대하여 피동이냐 하는 범주를 태라고 한다. 그러나 태는 더 넓게 잡아서 생각할 수가 있다. 강의 (強意)나 존경도 여기에 속한다. 태의 형태는 일종의 굴절(Inflexion)이라 할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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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제에 대한 태의 우월성은 다음과 같이 비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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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표현과정을 우리들이 가지는 시제의 관념적인 단계로 분류하여 이 분류에 따라 표현형식을 정하려는 것이 시제법인데 이에 반하여 목적의 어떤 과정의 완성과 미완성을 반문하는 것이 태법(態法)이다. 시제는 간접적이나 태는 직접적이다. 시제는 개념적이며 이지적이나 태는 감정적이며 정서적이다. 시제는 추상적이며 태는 구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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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몇 사람의 견해와 같이 동사는 성질상 상호관련적으로 존재하여 Active ― Passive(Jespersen)으로 기능화 된다는 것이었다. 이제 동사에 있어서의 상호관계가 논리 이전의 표상을 나타내고 이러한 표상의 경향은 주로 서구의 특징인 시칭 부정의 언어의식에서 크게 영향된 바라는 것까지 명백하여졌다. 앞서 보았던 동사진행형은 우리말에 있어서도 사실적 가정을 비사실적 가정과 포괄함으로써, 시제의 변화를 과거·현재·미래로 하여 연체(連體)시킬 수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들은 예컨데 동사의 Mood에 의한 것이며 태에 있어서도 보편적인 사역태와 수지태(受持態) 이외에 자연 생리의 불가항적 원인에 강쇄(強刷)된 동작을 위한 초월태라든가 혹은 동작의 이행적 실현을 일러주는 가능태가 있음을 주목하여야겠다. 특히 최근 발표 되는 산문소설 중에 흔하게 보이는 「것이다」 종형은 어느 동작이나 진상을 정상화(靜相化) 하려는 일종의 Mood의 활용일 것이니 이러한 필연의 판단에 대한 우연의 판단 , 그리고 불가능의 판단에 대한 가능의 판단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가를 도대체 살필 만 하다. 나는 이것을 달리 상고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생각한다. 하필 “꽃이 핀다”를 “꽃은 피는 것이다” 고 적은 따위는 “가 생각하기에 꽃은 피어난다는 뜻으로 매김될 것인데, 이때의 내가……” 곧 「것이다」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이러한 의식은 「꽃이 핀다」 또는 「피어난다」는 움직이는 진행을 통틀어 「피는 것」으로 아니면 「피어나는 것」으로 정상화(靜相化)한 것이다. 참으로 이 의식은 작가 자신의 주의 여하를 불문하고 <(相[상])>(Aspect)에의 희망이오, 법(Mood)에의 의지요, 나아가선 태(Voice)에의 발전을 증거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문체론 연구에서나 작가비교론 기타에서 경시할 수 없는 정신문제라고 생각하는 바다. 그러나 태의 의식은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논하여 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니 즉 시를 요청하는 의식의 경우가 그것이다. 점점 나는 문체가 시되는 이유를 저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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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1월 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