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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적 아이로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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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고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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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아이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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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의 특징은 가장 독자적이면서도 가장 타협적인 데에 있다. 현대라는 관형사의 새김 여하에 따라 그는 여러가지로 논의가 된다. 심리 정신분석 순수 행동이니 하는 낱말들은 그에게 있어 관련되는 의식의 반영일 것이다. 현대문학은 문학으로서의 전부를 다른 무엇에 연결시킴으로써 반문학적이다. 현대문학의 타협이란 이렇게 전래적인 독자성을 반발하는데 있으며 이때의 독자성은 「에고」(개성)와 대치된다. 한 마디로 현대문학은 의식의 표현이며 그러한 의식은 가장 「에고」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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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 초두부터「에고」는 시의 운율화를 거부했으며 소설의 허구화를 물리쳤다. 「에고」는 문학의 상대적 효용을 깨뜨렸다. 「에고」는 조화를 비웃는다. 끝내 「에고」는 「에고」적인 것으로 지양한다. 상징파 이전의 시작(詩作)들과 고전 및 자연주의 소설에도 「에고」는 없지 않았다. 다만 그 때의 「에고」는 하나의 「에고」를 다른 「에고」로 소통하기 위한 작품양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에고」는 비평적이 아니었다. 그 「에고」는 오히려 합리적이며 이기적인 「에고」였다. 모든 「에고」는 「에고」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발상되며 조형된 것이다. 어원상 비평은 위기를 내포한다. 따라서 비평적 「에고」란 위기적 「에고」다. 위기적 「에고」는 보다 더 허무인 쪽에 가깝다. 모든 관계가 파악되면서도 순수한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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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의 밖에 다른 하나의 「에고」를 세운다. 그 「에고」가 처음의 「에고」를 향하여 걸어오는 기한만큼 살고 싶다. 다시 모든 지주가 제거된다. 「상대적인 것은 부조리만이라」(까뮤)할 제 결론은 명확하다. 이 「에고」는 생각는 「에고」가 아니라 느끼는 「에고」 느끼는 까닭으로 언제든지 행할 수 있는 「에고」 그리하여 그 모든 책임을 접수할 수 있는 「에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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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에고」는 우리 문학에 있어서 또한 어떻게 나타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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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내는 왔다. 그는 왜 왔는지 알았다. 지금 그는 아내가 왜 안 가는지를 알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왜 갔는지 모르게 아내가 가버릴 징조에 틀림없다. 즉 경험에 의하면 그러하다. 그는 그렇다고 왜 안 가는지를 일부러 몰라버릴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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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상의 「지주회시」 첫 장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상은 반산문적인 산문가이며 반시적인 시인이다. 돌이켜 보면 산문적 시인 아니면 시적 산문가라고나 할까? 이상은 내가 표제의 이 글을 적어 가는데 상당한 희생을 들어 준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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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가는지를 일부러 몰라버릴 수도 없다”는 반어적 구문을 지적해 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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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에고」는 그가 말한대로 「읽을 수 없는 학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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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 가운데 정물이 정물 가운데 정물을 져며내고 있다. (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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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권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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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뮤의 『이방인』을 해설하면서 싸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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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워트」들은 독립된 섬과도 같다. 우리는 「워트」에서 「워트」까지 허무에서 허무까지 옮는다. 그가 복합과거로써 진행한 것은 균일한 여러 「워트」의 고독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복합과거에 의한 문장은 동사의 시제를 은폐한다. ……동사의 타동성은 쓰러지고 「워트」는 그 자리에 응고한다. 이 때의 문장현실이란 동사가 아니라 명사가 된다. …… 인과 관계는 모두 떨어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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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산문은 동작 아닌 동태를 그리는 데 집중되었다. 「보이스」(태)의 기능은 시에 이르러 「무으드」(법)의 활용으로 다시 전기되었다. 이상은 철저히 언문일치를 배격했던 것이다. 즉 이상의 「에고」는 하나의 「에고」를 다른 「에고」로 소통하기 위한 작품양식에 구애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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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뮤가 동사의 시제를 은폐하고 지주인 인과관계를 제거하는 문체를 수립한 것은 그다지 이국정취가 아닐 터이다. 까뮤의 「에고」가 그대로 이 이상의 「에고」와 어느 면에서 동일할진데 그들이 호응하며 제약당한 세계와 정신성은 대차없는 무엇이었겠다. 즉 반어적인 충동이며 희생일 것이다. 까뮤 자신 「부조리의 창조」 속에서 「악령」의 「끼리로브」가 저승의 영생을 믿느냐는 답변으로 아니 여기의 영생을 믿는다는 실존을 얼마나 구가하였던가. 작가 도스또예프스끼이는 “원고이며 변호인이며 재판관이며 피고라는 어쩔 수 없는 자격”의 「에고」를 존재 그것으로 영원 그것으로 전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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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인간사상의 처음에 있어서 「아이로니」는 기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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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에고」에 대한 약점의 발견이며 폭로였다. 「아이로니」는 하나의 탐탐한 승리감이었다. 이러한 관조적인 「아이로니」가 행동적 「아이로니」로 번져온 것은 인간이 자기목적에 대한 눈을 떴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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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로니」는 인간에게 악을 비쳤다. 내면적 붕괴로 말미암아 「아이로니」의 이웃엔 퇴폐가 히죽거리며 있었다. 낭만 퇴폐 허망 고독의 어디든지 「아이로니」는 번식하며 일반화 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행동적인 「아이로니」가 문학을 유인하여 문학이 그의 전부를 바쳐 타협하게 된 오늘이 다가왔다. 「아이로니」는 하나의 출혈이며 처절한 희생이다. 소크라테스의 「아이로니」는 소크라테스의 경우에 있었던 세계의 「아이로니」라고 키에르케고올은 언급했던 것이다. 「아이로니」는 극적인 부정성이다. 키에르케고올은 언급했던 것이다. 「아이로니」는 극적인 부정성이다. 키에르케고올엔 더욱 처절한 「아이로니」가 있다. “개인은 동시에 세계사상의 존재적 권리를 소유하면서 소유하지 못한다. 후자일 때 그것은 희생을 무릅쓰야 하고 전자일 때 그것은 승리할 수 있다. 즉 그것은 희생됨으로써만 승리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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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행동적 「아이로니」란 끝내 행동적일 수 있던가. 괴에테는 종속적 수단으로 이것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락에 빠진 사람들은…… 본질과 현상 개인과 세계사의 모든 대립이 비종속적 전체인 「아이로니」로 말미암아 해소되는 순간이 있다. 출혈하는 희생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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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산문(?)엔 부분적인 「에고」가 있어 움츠려드는 「아이로니」를 넘겨다 보는 「풀마숑」이 있을 뿐이다. 이상과 그의 문체를 무비판으로 접수하기 이전에 우리는 생각하자. 이상의 「에고」가 하나의 신앙과 전통과 또 그밖의 무슨 우월한 「에고」와 비유될 수 없었다는 한계는 그대로 우리 문학의 한계가 아닌가 하고.
 
21
반어는 있어도 반어성은 없었다. 표현이 존재를 은폐하는 일시적 기적만을 바라서 현대문학은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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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국제》
【원문】문학적 아이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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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석규(高錫圭) [저자]
 
  1956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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