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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1
현진건
1
물꽃 돋는 대로
 
2
아나톨 프랑스의 예측(豫測)에 의지하면 유토피아의 공산사회에서는 만인노동(萬人勞動)의 원칙에 따라, 로마법왕(羅馬法王)도 옷칠장이로 입에 풀칠을 하리라 하였다.
 
3
인류갱생(人類更生)의 거룩한 아츰을 앞에 두고 전환기의 폭풍우는 예술의 궁전까지 휩쓸어 버렸다. 거기서 쫓겨 나온 뮤즈는 어떻게 되었는가. 실안개로 짠 듯한 그의 깁옷은 진흙투성이가 되었고 세상에도 귀중하고 진기하다는 그의 노리개는 쟁연(錚然)한 소리도 없이 물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치위와 주림을 견디다 못한 그는 민중의 부엌데기가 되었다. 백옥(白玉) 같은 손은 구정물에 더러워지고 수정같이 맑은 눈이 연기에 그을리며 속절없는 눈물을 마실 뿐이다.
 
4
상아탑이 무너지매 달과 꽃으로 안석 삼아 은피리를 불던 뮤즈의 신도(信徒) 또한 십자단두(十字斷頭)에 거꾸로 떨어졌다. 얼떨떨한 정신을 차리자 그들은 매약행상(賣藥行商)이 되었다. 없는 요술을 있는 듯이 입힘을 부려가며 사람을 모으기는 모았으나 요술 대신 약봉지를 들어내매 모인 사람은 흩어졌다.
 
5
그리스(希臘) 시대엔 시인 곧 예술가란 예언자를 이름이러니 현대에 있어서는 예술가란 행차(行次) 후에 나팔 부는 곡고수가 되었다.
 
6
사회주의란 사상적(思想的)으로 현대인의 어떤 부분엔 상식이 되고 어떤 부분엔 신앙이 된 지 오래다. 경옥(瓊玉)과 같이 무지개 같은 광휘를 발하던 이 위대한 인생의 꿈은 벌써 싸늘한 유리 시험관 속에 들고 말았다. 찬연한 그 무지개에 눈이 어린 이들은 시방도 시험관을 두들기며 잠꼬대를 한다.
 
7
예술이란 감정의 ‘이콜’이다. 심장의 선율이다. 사상이란 감정의 수증기가 머리에 서린 꾸정물일 따름이다.
8
되다가 만 예술가는 이 꾸정물에 불을 붙여서 감정의 수증기를 맨드려고 헛애를 태운다.
9
예술이란 좋은 의미로든지 나쁜 의미로든지 절대로 구속을 거절한다.
10
현대 예술은 사상의 찬미에 얽매여서 출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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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도덕성은 지상지고한 시대 양심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현대문학은 이 시대 양심을 사회주의 사상한테 빼앗기고 말았다. 여기 현대 작가의 고민이 있고 비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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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 문학이란 글자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문학이라야 한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의 즐겨할 듯한 문학,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이 될 듯한 문학을 가지고 뱃심 좋게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고 어깨를 뽐내는 군이 많다. 마음 좋은 진짜 프롤레타리아는 그 아유구용(阿諛苟容)에 고소를 금(禁)치 못할 것이다. 성품 괄괄한 진짜 프롤레타리아는 “남의 그림자를 왜 밟아 먹느냐!”고 눈을 부릅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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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말이 났으니 말이지 그림자의 위대한 가치를 발견한 이는 독일작가 Adalbert Chamisso이리라. 그 작품 『Peter Schlemihl』의 주인공은 한번 제 그림자를 팔아 먹었기 때문에 햇발과 달빛을 아니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시진한 몸을 끄는 그의 생애는 참담한 것이 있었다. 누거만(累巨萬)의 재원(財源)도 그림자 하나 없는 까닭으로 일조(一朝)에 거덜이나 버리고 제 목숨같이 사랑하던 애인조차 쉽사리 제 하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제 그림자를 팔아 먹어도 이러하거든 하물며 남의 그림자를 팔아 먹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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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절대적이 아니요 상대적이다. 부르주아에게 부르주아의 정의가 있고, 프롤레타리아에게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의 정의가 옳다는 것은 정의란 거룩한 이름이 아니요 일(一)에 일을 가(加)하면 이(二)가 된다는 수학적 정확을 이름이다.
 
15
작일 문학의 화석(化石)에 덮어놓고 찬미를 마지 않는 군도 딱하거니와 명일 문학의 신기루에 턱없는 기(氣)를 올리는 군도 그리 끔찍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금일 문학도 어떻게 된단 말인가. 과거를 더듬으며 한숨 쉴 일이 아니요, 미래를 바라보며 팔만 벌이고 있을 것이 아니다. 손아귀에 단단히 힘을 주어 현재를 움켜 쥘 것이다.
 
 
16
(『동아일보』, 1926. 1. 1.)
【원문】물꽃 돋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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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꽃 돋는 대로 [제목]
 
  현진건(玄鎭健) [저자]
 
  동아 일보(東亞日報) [출처]
 
  1926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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