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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의 한국시는 일언으로 방황하는 고민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수다한 시인들이 자칫하면 동시대적인 이념의 추구를 방기하였거나 아니면 형태적 실험에 정열의 송두리채를 기울였으므로 내내 분산과 자독의 숭한 암류가 시단전체를 지배하였던 것이다. 이하 세 가지 양상으로 그것을 포착하여 소묘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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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견해로선 아직도 현대의 한국시가 노쇠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받들고 싶은데도 시단의 일우에선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의 무서운 병증이 떠돌고 있다. 바로 서정주씨를 중심으로 한「현대문학」계의 젊은 시인들을 지목한다면 대개의 독자들은 그 윤곽을 납득할 것으로 믿어진다. 아다시피 정주 시의 세계는『화사집』으로 대표된 서구적 고뇌와 반성의 과정을 치르고 난 뒤에 비로소 당도한 고유정서에의 어쩔 수 없는 귀의이며 발견이라 할 것이며, 한편 어법과 문체상의 조각은 그대로「신라」를 불러 일으키려는 그 자신의 비판력을 양성하고 남음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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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에도 정주 시를 좇고 있는 고관(苦冠)의 시인들은 대개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확대하려 하니 심히 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짙푸른「도솔천」과 암담한 우리들의 상황과를 맺게 하는「무엇」이 사색되어지지 않는 한 정주 시가 모방되고 복합된다는 것은 독자적인 정주 시의 위기를 점점 증대하는 것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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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상부해서 기독교적 인생관에 철저하려는 김현승, 박두진, 김남조 제씨와 불교적 내세관에 정착하려는 신적성씨의 비교적 방대한 노력의 댓가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종교적 심미성은 부조되었으면서도 목숨의 조건들이 전혀 도외시된 것과 같은 너무나도「오프티미즘」적인 정실의 고백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오로지 동시대적인 이념의 추구를 개적 조건에다 감금시킴으로써 전통과 종교의식을 대등의 것으로만 착각하게 됨은 시인 자신들의 정신적 안이성과 판단력의 허위를 토로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구하는 동안 몰래 얻어지는 것을 받아 누릴까 아니하고 구함과 동시에 무엇인가 얻어지려니 하는 취약한 심장(시정신)의 비애를 오늘의 한국시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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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일부의「아나크로니즘」을 배격하면서 가능한 현대적 상황에 전심하려는 젊은 세대의 몸부림들이 그 동안의 초점을 형성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김춘수, 전봉건, 이철범, 김수영, 성찬경, 박성용, 민재식 제씨들의 포말(formal)하면서도 꾸준한 내면적 사색은 현대적 상황에 절실한 고발과 증언의 방향으로 시의 비평의식을 고조화 시켰으며 강력한 현대시의 「액티브티」를 충분히 발휘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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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향은 전기한 고대정취적인 시인들과 순전히 대립되는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써 어떠한 기성이념의 지배나 종교적 영향에도 편승되지 않고 다만 부정과 회의, 그리고 비극과 반항의 현대를 열렬히 포착하여 분석하려는 실존적 방법론에 대하여 가장 명철한 지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따져보면 함부로 총괄할 수 없는 각기의 특징을 보유하면서도 저들의 마음 바탕에 흐르는 동시대적인 자각과 체험은 속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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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 중에 있어서의 상상과 비유의 다각도적인 구사라든가 새로운「리듬」의 창조는 어디까지「포에지」와「메소드」와의 동일적인 변혁에서 폭발된 것이라고 믿어지며 어언간 미완적인 언어의 혼돈이 가시어짐으로써 한국시는 저들에게 두터운 기대를 걸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약간의 아류와 사이비성이 동반되고 있다는 점만은 경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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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대립적긴 두 가지 경향을 좌우에 느끼면서 내용면에 있어선 보다 현대적 사상에 취재하고 형식면에 있어선 정형적 온건성을 유지하려는 부동적 절충주의 경향이 있었는데 박남수, 김구용, 장서언, 송 욱 제씨가 아니었던가 싶다. 이들의 시를 볼진댄 내용과 형식의 괴리가 작품외면으로 숨김없이 드러나 독자로 하여금 의식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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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질서를 내포하면서 질서를 가장한다는 것은 현대인간으로서의 가능한 한 자세 일지도 모르겠으나 불투명하며 견강적인 실험으로 그칠 때 시란 저들의 존재를 구제하기가 힘든 것이다. 곧 시는 시인과 모순되지 않을 수가 없다. 저들은 우리 말에 대한 근본적인 구조연구를 우회하면서 외래시행의 「멜로포에아」를 함부로 차용하였으며 또는 자동기술적인 불연속을 생경한 한자의 조작으로 점철하려 하였다.「의미」를 상실한 상상과 허망한 의성의 기록이 시로서 평가되기란 막무한 노릇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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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의 작업이 비질서에 대한 질서적 노력의 일단이라고 간주된다면 앞날의 정진을 더욱 기대해서 말함이 예의일 것이다. 어쨌든 행복하지 못한 시인들의 거치른 호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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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밖에도 군소 시인들의 여러가지 활동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1957년을 통한 한국시의 족적은 그대로 고민과 방황의 결실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진통하는 시심에 비하여서 시적 수확이란 터무니 없이 적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시가 자기 기반의 모순을 자각하고 반성하기 시작한 뚜렷한 증거는 금년도의 비평가들이 시론과 시사를 위한 다량의 집필을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넉넉할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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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이철범씨의 「뉴 ‧ 크리티시즘 시론의 양상」「현대시의 위상」정태용씨의「현대시인 연구」(연재중) 그리고「시인의 역설」같은 데서 짐작되는 바와 같이 한국의 현대시는 지금 상황 이외의 비평적 촉수에 의하여 더욱 가혹한 주시를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시는 점점 쓰기 어려울 것이라는 여론들이 떠돌고 있다. 그러나 현대시의 미래를 모색하는 시인과 비평가들의 한결같은 의지는 조금도 위험스런 것이 못된다. 한국의 현대시는 바야흐로 냉철한 비평정신과 일치되어야 하며, 그것은 내용과 형식의 어느 면에도 꼭 같이 작용할 수 있는 능력이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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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이 지나면 봄이 싹터 오리라. 저조한 산문(소설)에 대항해서 결정적인 확정을 물어올 수 있는 참신하면서도 고달픈 후조인 현대시의 다음 한해를 손꼽아 보는 필자의 감정이 포근한 것은 웬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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