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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은 다 못되고 아마 14,5년은 넘어 된 듯싶다. 열네 살이 아니면 열세 살…… 아직 놓아먹인 망아지처럼 홀홀 뛰어다니며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라나던…… 보통학교 삼사년급이 될 무렵인 듯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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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도 다 늙고 꽃이 진 자리에 연한 떡잎들이 우줄거리며 새 생명을 춤추던 때다. 이것도 마침 그때라는 기억은 없으나 지금 보기에 벽도화라는 꽃이 이때에 피니까 그것이 그때이었다는 것을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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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은 읍에서 십리 가량 떨어져 있는 K라는 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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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로 누구하고 그곳을 갔었던지 생각은 아니 나나(이러하기 때문에 더구나 꿈같이만 생각이 된다) 어떻게 해서 나 혼자 촌(村)집 앞에 있는 우물 옆을 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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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아니해도 목이 마른 참인데 우물을 당하니 더욱더 물이 먹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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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은 파란 동청(冬靑)나무로 울이 둘리어 있고 한편이 터져서 드나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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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터진 데로 쑥 들어서니까 웬 처녀 하나가 물동이를 옆에 놓고 마침 두레박줄을 잡아올리며 있었다. 나는 덮어놓고 “물 좀 먹자”하고 와락 덤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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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아니한 침입자에게 그 처녀의 평화로운 크막한 두 눈은 휘둥그래졌다. 그리고는 얼굴이 수줍음에 빨개지며 그대로 고개가 폭 수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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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야 비로소 나도 얼굴이 화끈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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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이 얼굴이 화끈하여본 일은 한번도 없는 일이었었다. 이상스럽게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그러면서도 몸이 가벼운 것같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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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는 고개를 수그린 채 두레박을 달아올리었다. 달아올려 자루를 쥐고도 그대로 있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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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스러운 맑은 물이 줄줄 흘러내리건만 나는 그것을 받아먹을 기운이 나지 아니하였다. 그저 그 처녀가 고개를 숙이고 나를 보지 아니하는 것만 다행으로 그의 소곳한 머리 ─ 동백기름 발라 한가운데로 가르마를 곱게 갈라 빗은 머리와 빨개진 두 귀를 쳐다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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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처녀는 참다 못한 듯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보매 열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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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제야 두레박을 받아가지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물을 켜고 있는데 가느다란 소리로 ─ 그것이 행동이라면 손가락 끝으로 살폿 지분거리는 듯이 ─ “샘에다 대구!” 하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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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니 나는 그대로 서서 물을 먹기 때문에 턱으로 흐르는 물이 우물로 질질 흘러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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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허둥대는 것을 보고 처녀는 해쭉이 웃었다. 그때도 그 웃음이 아름다왔거니와 지금 생각에는 그만큼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는 다시 없을 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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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렴한 바람에 물도 만족히 먹지 못하고 돌아서서 울 밖으로 뛰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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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뛰어오다가 무엇인지 뒤에다 잃어버리고 온 것같이 섭섭한 생각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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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까 두레박을 손에 든 그 처녀가 꺄웃이 동청나무울 밖으로 나를 내어다보고 있었다. 나도 마주 바라보았다. 그때에 문득 보니까 그 우물을 둘러싼 동청나무 울에 한 포기 우뚝 솟은 벽도도 있고 때 한창 연푸른 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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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더욱 기특한 것은 그 처녀의 입고 있는 치마 빛이 꽃빛과 꼭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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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 마음에도 신통스러운 부합(符合)에 돌아설 줄을 모르고 그 처녀와 벽도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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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내 몸이 외로운 생각이 날 때 ─ 더구나 봄이 가고 초록의 벽도화 시절을 당하면 그때의 일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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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하나인 아름다운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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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지금의 참나무 장작같이 뻣뻣하고 물기 없는 생활…… 인간의 본성인 물질의 안정과 정의 위무(慰撫)에서 버림을 받은…… 앞으로 남은 반생이 역시 사람다운 생활의 권외에서 방황할……나에게는 이 기억만이 한 기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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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쯤은 시집을 가서 아들딸을 낳고 잘 살겠지? 그러나 또 지금은 딴세상 사람이 된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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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도 혹 친정에를 왔다가 우물가의 벽도가 핀 것을 보면 그때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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