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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宗植)……서곡에서는 김선달의 차인(差人), 40세 가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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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김선달의 벗, 동리 남녀, 걸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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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초하(序曲[서곡]은 15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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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의 집 문앞. 무대 정면으로 큰 대문이 활짝 열리어 있고 우수는 줄행랑, 좌수는 개와 담 너머로 사랑채의 처마가 보인다. 대문 안에는 차면 담이 가로막히고, 좌수로는 사랑채로 들어가는 중문, 우수로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보인다. 막이 열리면 헙수룩한 동리 남녀, 상을 머리에 인 남녀 하인, 점잖게 차린 손님들이 분주하게 혹은 천천히 대문 안으로 드나들고 가지각색 걸인들이 대문 옆에 모여서서 소리를 친다. 사랑채에서는 요란한 잔치 소리에 섞이어 ‘삼현(三絃)’소리가 유장하게 울려온다. 한 2분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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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 (대문 안 사랑 중문에서 나와 걸인들을 보고) 웬 사람들이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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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 (손을 밖으로 내어저으며) 지금은 안돼. 이따가 저녁때 와. 저기 가서 있다가 저녁때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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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한술 얻어먹고 다른 데도 가봐야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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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사랑 중문에서 나오다가 보고 대문 밖으로 나오며) 왜들 그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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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걸인들을 어서 먹여 보내잖고! 어서 술이랑 떡이랑 고기도 많이 놓아서 골고로 먹여보내라. 어서 (걸인들을 보고) 지금 곧 채려 내올 테니 먹고 가게들. 응. 모자라거든 더 청해서 배부르게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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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의 현재 살고 있는 집. 집재목과 지붕이 낡아빠진 오막살이. 우수에는 뼈만 남은 울타리와 조그마한 터전을 지나 집이 놓여 있는데, 헛간 사랑방이 보이고 앞으로는 좁은 뒷마루가 있다. 좌수는 거적으로 가린 차면이 있어 내실과 명색만의 경계가 되어 있다. 무대 전면에는 좁다란 마당. 우수 울타리에 역시 명색만의 사립문이 비스듬히 누워 있다. 마당과 울타리며 터전에는 이 시계(時季)에 그럴 듯한 잡초와 나무새가 우거져 있다. 오후 두시쯤. 막이 열리면 김선달과 부인과 딸이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그 가로 둘러앉아 베어놓은 보릿목을 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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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이것도 아모니 (암모니아) 나 좀 주었으면 요렇게 못 피지는 아니 했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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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안타까이) 또 약주 생각이 나시는가 보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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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주책없는 창자가 그래도 전에 먹든 가늠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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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고 (딸을 보고) 시원한 냉수라도 길어 드리렴.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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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어머니를 보고 눈짓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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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알아채고) 너도 철없는 소리도 한다. 늙은 것이 군입으로 술을 사먹자고 방금 굶게 생긴 판에 보리를 판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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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울듯이) 사시면 얼마나 사신다고 이 고생을 하시면서 그렇게 잡수시고 싶은 때 약주 한잔도 못 잡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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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그런 철없는 소리는 아예 내지도 말아라. 보리가 한 말이면 우리 식구에도 하로는 먹잖느냐.
56
부인 하로를 먹거나 한 달을 먹거나 그건 그만두고라도 보릿금이 하도 헐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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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후, 세상에 곡식이 이렇게 헐컨만 우리는 이렇게 굶주리고 살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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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우리 그전에 잘살 적에 수채 구먹으로 흘러내려가든 밥만 해도 지금 넉넉히 먹고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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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우리가 주고 못 받은 빚만 다 받아들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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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삼천리 강산이 다 떠내려가도 안타깝지 않다마는 우물배미 한섬지기를 놓친 것은 내가 지금 죽어도 눈이 아니 감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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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딸더러 하는 말이) 그 논을 너의 할아버지한테 너의 아버지가 물려받아 가지고 그놈을 밑천삼아서 삼천 석지기나 되는 살림을 장만한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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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그 논을 둘째오빠가 청국으로 갈 적에 잽혔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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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울듯이) 발써 육 년이 넘는대 죽었는지 살았는지 한번 간 뒤로는 소식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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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말로만) 그놈 천하에 불효한 놈! 어미 아비를 바리고 수만리 타국으로 가서! 그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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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그래도 그런 말씀 마시요. 제깐에는 그래도 큰일을 한다고 그러고 갔는데, (間) 더구다 수만리 타국에 가서 고생인들 좀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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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큰일이란 다 무어요! 옛 성현의 말씀도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하섰는데, 제 몸 하나 제 집안 하나 바로잡지 못하고 이 늙은 어미 아비가 이 죽을 고생을 하게 두고 달아난 놈이 무슨 큰일이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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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그래도 어느 손가락을 깨물어서 아니 아픈 법이 있소. 죽기 전에 한번 만나나 보았으면 철천지한이 아니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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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 (책보를 둘러메고 사립문으로 시름없이 걸어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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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조용히) 그것이 배가 고파서 그런다. 어린것이 조반도 못 먹고 십리 길이나 갔다가 왔으니 좀 하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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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게 있거라. 인제 네 큰아비가 쌀 사가지고 오면 어미더러 밥 해주라고 하께, 응, 울지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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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글쎄 인제 네 큰아비가 쌀 사 지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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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 선생님이 월사금 아니 가져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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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머리를 어루만지며 혀를 끌끌 찬다) 네 아비가 죽일 놈이다. 천하에 못쓸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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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울듯이) 울지 말아. 지금 새삼스리 울면 무얼 하냐! 맘만 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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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길게 한숨을 내어쉬고) 천하에 죽일 놈이야. 조강지처를 버리고 여학생첩을 얻어 살면서 자식까지 돌아보잖는 놈! 그놈이 인제 천벌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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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참다 못하여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안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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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운다) 너무 그러지 마시오. 사우자식이라도 자식이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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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자식이란 다 무어요! 내 속에서 난 내 자식도 품안에 벗어져나가면 그만인데, 더구나 그놈이 인제는 민적까지 옮겨놓아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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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그건 애초에 당신이 도장을 찍어주시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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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글쎄 갑갑한 소리도 하오! 그놈이 이혼을 한다고 미친 놈같이 날뛰고 나를 그렇게 창피를 주는데 낸들 어쩌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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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그러나저러나 저도 인제 나이나 좀더 들고 하면 회심할 때가 있을 테지요. 제 안해 제 자식하고 무슨 원수가 져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한 때 딴 계집한테 미쳐서 그런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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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 (조그마한 자루에 쌀을 몇 되 담은 것과 굴비 몇 마리를 새끼로 묶어 양편 손에 갈라 들고 사립문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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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 (멍석 옆에 손에 든 것을 내려놓으며) 그런 것은 애들이나 시키 시지. (間) 이 쌀 좀 얻어왔는데 어서 밤 지라고 하시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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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오냐. (일어서서 자루와 굴비를 들고 안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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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내키잖게) 쌀은 어데서 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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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 남촌에 가서 박장의(朴掌儀) 영감한테 말했더니 돈 일 원을 주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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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한숨을 쉰다. 잠깐 침묵) 인원이는 어느 날쯤 온다는 소식이나 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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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 지금 읍에 들려서 알아보았더니 제 동무애 하나가 왔는데 오늘 아니면 내일쯤은 올 듯하다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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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그놈은 서울 가서 무얼 하고 있는 세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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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 저도 알 수는 없읍니다마는 그저 제 한몸은 굶잖고 지내는 모양이니 과히 염려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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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한숨) 그래도 마즈막으로 그놈 하나를 믿는대 (間) 인제는 다 허산가부다.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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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 (잠깐 묵묵히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서 웃옷과 모자를 벗고 다시 나와 사립문 밖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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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안에서 나와 다시 보릿목을 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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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상원의 나가는 뒷모양을 바라보고 방백) 네 신세도 딱하다. 좋은 논밭 수천석지기를 다 팔아 허평대평 없애바리고 사십이 넘어 오십줄에 앉인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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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그것도 다 팔자 소간이지 지금 탓을 하면 소용이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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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역하게) 팔자가 무슨 팔자란 말이요! (間) 저이들은 저이들이 어미 아비가 물려준 것을 팔아 없인 죄로나 그런다지만 이 두 늙은이는 무슨 죄란 말이오! 내가 평생에 사람 하나를 죽였소. 남한테 모진 소리 모진 짓을 했소! 그러고도 만래는 주린 창자를 부둥겨 쥐이고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으니 생각하면 분하고 섧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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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어서 바삐 칵 죽기나 했으면 이꼴 저꼴 보지 아니하련만 모진 목숨이라 죽어지지도 않고.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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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모다 우리가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 죄다짐을 하느라고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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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 (사립문 안에 들어서서 부른다) 상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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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 안녕하십니까. (허리를 굽히고 손으로 뒤통수를 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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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노안으로 바라보며) 거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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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냉랭하게) 응 종식이…… 어서 오소, 잘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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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 웬걸이요. 저도 죽을 지경이올시다. 돈을 늘어놓기는 담뿍 늘어놓고 걷히지는 않고. (멍석 한귀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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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그래 자네 어루신께서도 기운이나 안녕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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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 네, 자식이라고 한 개 있는 것 성취시켰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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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자네는 세상에 난 보람이 있네. (間) 나는 자식 멫을 둔 것이 자네도 알지만 다 그 지경이 되고 만래에 늙은 어미 아비를 이 고생을 시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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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 (잠잠히 앉았다가) 상원이 어데 멀리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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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방금 있었는데, 아마 동리 마을 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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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 네, 저 다른 것이 아니라 벌써 아섰겠지만 댁의 선산(先山) 말씀이여요. (거북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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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응. 상원이가 자네한테 잽혔다는 것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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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 네. 그런데 그것이 발써 여러 번 기한 넘고 상원이는 번번이 만나기를 피하고 편지로 이자만이라도 넣어주면 좋겠다고 해도 그것도 들은성 만성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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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 그래서 제 도리로야 차마 못할 일이지만 저 역시 그것 때문에 손해가 적지 않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수속을 해야 되겠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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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수속? 팔아버린단 말이지? (다소 불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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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놀라) 응? 내 선산을 팔아? 그래 다른 사람은 다 모르겠네마는 내 집안이 구차해져서 자네게다 그것을 잽혔기로니 자네 입에서 그것을 팔아버린단 말이 나와야 옳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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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 (성이 나서 꼿꼿하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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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무슨 말이라니? (일하던 손을 놓고 종식과 마주 앉아) 그래 이놈, 네가 너이 아버지 두루매기 자락에 싸여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을 친구의 자식이래서 내가 걷어 길렀지. 그래 네가 내 집에서 잔뼈가 굵었지. 그래가지고 내가 대어준 밑천으로 그래도 지금 그만한 성세를 이루었지. 그런 놈이 그래 이 죽을 지경이 된 나를 돌봐주든 못한다고 내 선산을 팔어! 그게 사람의 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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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 아니 내가 댁에서 잔뼈가 굵었으면 공으로 놀고 먹었나요? 나도 분에 넘치게 뼈아픈 일을 해드렸어요. 식은밥뎅을 깨물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댁에서 대여준 밑천이면 내가 그것을 잘라먹었나요? 어떻게 하시는 말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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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분해서 떨며) 응. 이런 놈 응 이놈.
158
부인 (그러안고 말리며) 영감, 영감이 참으시오. (운다) 영감이 참으시요. 세상 인심이 그런 것인 줄 몰랐소? (종식을 보고) 가소 가. 세상이 야속하다지만 자네 같은 사람은 처음 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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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 가지오. 가라고 아니해도 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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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붙들린 채 날뛰며) 이놈 이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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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 (뛰어나와 김선달을 붙잡고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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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나오지 못하고 차면 옆에 서서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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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이놈 나는 나희 늙고 그랬다만 인제 우리 인원이가 서울서 내려오면 보자, 보아, 이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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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 (나가려다가 돌아보며) 인원이는 뭣 산 빼는 재조가 있답디까? 어림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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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내 선산을 팔어만 보아라. 내가 네 집에다 불을 칵 지르고. (이를 간다)
168
종식 (돌아서서 나가며) 맘대로 하지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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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 (노동복을 입고 손에 바스켓을 들고 사립문으로 들어서다가 놀라 발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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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먼저 보고 김선달을 놓고 달려가서 인원의 목을 그러안고 운다) 인원아 인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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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인원아 너 왔느냐. 저 저놈 좀 보아라. 저놈이 우리 선산을 판다고 한단다. 저놈이 내 밥 먹고 자란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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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 그 사람이 왜 우리 선산을 팔아요?
174
김선달 잽혀먹었단다, 잽혀먹어. 잽혀먹었는데 기한이 지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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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그러고 말도 말아, 그 사람이 우리 은혜를 지고 지금 그렇게 잘 되었것만 지금 너의 아버지한테 폭백하든 꼴이라니! 가난한 것도 섧지만 인제는 내 밥 먹고 자란 사람까지 우리를 이렇게 업수여기니 정말이지 설어 못 살겠다. 인원아. (더욱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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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 우지 마세요. 우지 마세요, 제 따위 놈이 교만을 피면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필라구요. 그런 세상은 인제 오래 가지 않습니다. 우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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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달 인원아, 인원아 선산을 찾어야 한다, 선산을. 너의 선영 백골 묻혀 있는 선산을. 그러고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이 늙은 어미아비는 어데다 파묻어 줄라느냐! 인원아, 나는 너 하나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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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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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안은 것을 놓고) 가자, 저 마루로 가서 올라앉아라.
180
상원 (사립문으로 급히 들어오며) 웬일여? 인원이 언제 왔냐? (차림새를 보고 낙망의 빛을 보인다)
182
상원 그런데 웬일로 그렇게 요란한 소리가 났어?
183
부인 종식이가 와서 우리 선산을 판다고 하다가 너의 아버지가 좀 나무랬더니 귀에 못 담을 폭백을 하고 갔단다. 그래서 너의 아버지가 시방 분해서 그러신단다.
184
상원 쳐죽일 놈. (인원을 보고) 너는 그놈을 다리뼈를 부지러주지 않고 그대로 놓아보낸단 말이냐!
185
인원 형님도 그런 말씀은 말으시요. 그따우 월수쟁이 돈노이(貸金業)하는 놈 하나쯤 때려주면 쾌할 게 무어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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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 그렇다고 그놈을 그대로 놓아보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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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이 애가 오니까 그놈은 달아났단다.
188
인원 아니어요. 도망을 갔거나 아니 갔거나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잽혀먹지를 말든지 또 잽혀놓고 못 찾게 되었으면 그만이지, 지금 세상이 모다가 그렇게 된 것을 그따우 여석 하나를 붙잡고 시비를 캐고 때리고 하면 그야말로 모기를 보고 칼을 뽑는 셈이지요.
189
김선달 (멍석에 펄썩 주저앉으며) 다 틀렸다. 다 틀렸어. 그래도 너 하나를 믿었더니! 인제는 다 틀렸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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