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사섭 ◈
카탈로그   본문  
1937. 9
백신애
1
사섭
 
 
2
지난 이년(二年) 동안은 부친(父親)의 병환(病患)과 이어 별세(別世)로 말미암아 효녀(孝女)다운 간병(看病)이나 비통(悲痛)의 한가(閑暇)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래도 이럭저럭 마음이 어수선하여 종용(從容)히 단편소설(短篇小說)일편(一篇)을 창작(創作)치 못하였었으므로 금년(今年) 봄에는 마음을 정리(整理)하여 벌써 몇 해 전(前)에 구상(構想)했던 장편소설(長篇小說)을 써버리리라고 결심(決心)하듯 마음을 먹었었다.
 
3
장편(長篇)을 쓰느라면 자연(自然) 그 동안은 마음이 안정(安定)도 되고 자위(自慰)도 되며 따라서 차차(次次) 활기(活氣)와 용기(勇氣)도 회복되어지려니 하였던 것이다.
 
4
그러나 봄 한철이 소설(小說)의 구성안(構成案)을 꾸미느라고 원고지(原稿紙) 단 한 장에 이리저리 아희(兒戲같은 글자를 써 놓았을 뿐으로 후딱 지나가 버리고 숲 속의 매미가
 
5
“네 마음 먹었던 것은 얼마나 썼니?”
 
6
라고나 하듯 매암매암 우는 소리가 마음 마음이라고 들리게 하며 여름철이 되고 말았다.
 
7
그러면‘이 여름에라도’라고 결심(決心)한 바를 연기(延期)해 놓으며 마음에 채찍질을 해 보았더니 웬일일까 차일피일(此日彼日)하며 가끔 수필(隨筆)줄이나 휘적그리며 역시 엉둥엉둥!
 
8
“아! 이번 가을에야 설마 설마!”
 
9
아직 가을을 다 ― 지내보지 않았으니 모르려니와 나는 이렇게 봄에나, 여름에나, 가을에야 설마 아니 겨울 동안에…… 라고 미루고 미루다가 세월을 다 ― 보내버리고 그러는 사이에 그만 죽어지고 말 것 같은 느낌이다.
 
10
창작욕(創作慾)에 불꽃같이 타면서도 한 자(字)도 쓸 탄력(彈力)이 없는 이 초조(焦燥)를 벌써 이 년(二年)이나 계속하고 있는 나의 고통(苦痛)에 정말 장탄식(長嘆息)이 난다.
 
11
부친생전(父親生前)에는 읽는 것은 일본내지신문(日本內地新聞), 쓰는 것은 편지 이것만이 공인(公認)받아 왔었다.
 
12
그러나 오히려 그때는 아버지의 눈을 피하여 방구석에 엎드려 열(熱)있게 독서(讀書)하고 열(熱)있게 창작(創作)하였었다. 그리고 그의 병(病)이 이미 회복될 가망이 거의 없어져 구주의대(九州醫大)로 옮겨 갔을 때는 나는 반야월(半夜月)집에 홀로 남아 있어 온 천지(天地)가 제 것인 양 사랑(舍廊)넓은 응접실(應接室) 위에다 원고지(原稿紙)를 펴 놓고 남들같이 버젓하게 비로소 글 쓴다고 해 보았다.
 
13
그러느라고 염려는 되면서도 남의 자식답게 간장을 태우지도 않고 책상(册床)위에 원고지(原稿紙) 펴고 글 쓴다는 그 기쁨만이 하루라도 더 ― 연장(延長)되기만 바랬었다.
 
14
하루는 이웃 늙은이가 와서
 
15
“공부(工夫)하는 것도 분수가 있지.”
 
16
라고 나를 빈정대었으므로 처음은 예사로 들었으나 자꾸 곁에서 뒤씹으므로 귀찮은 것을 억지로 일어서서 원고지(原稿紙)를 걷어 간수한 후 대구(大邱) 집으로 가 보았더니 그 때 최후(最後)의 전보(電報)인 듯, 준비(準備)하여 급래(急來)하라는 것이었다.
 
17
노인(老人)에게서 일체범절(一切凡節)을 배워가지고 그 밤에 남자(男子)라고는 단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종제(從弟)와 도구(渡九)하며 집안의 곡성(哭聲)을 벗어난 것이 시원하여 서점(書店)에 들러 새로 나온 개조(改造)를 싸가지고 정차장(停車場)으로 나갔더니 나의 슬픔을 위로(慰勞)해 주며 먼 길에 행여나 하는 전송객(餞送客)이 죽 ─ 나와 혹은 눈물까지 짓는 이가 있었으나 나는 별로 슬픈 줄도 모르고 엉둥엉둥 떠나갔다.
 
18
병원(病院)에 도착(到着)하자
 
19
“아버지가 너를 기다리신다.”
 
20
고 하며 병실(病室)로 안내(案內)하는 오빠의 뒤를 따르며 그제야 눈물이 났다.
 
21
내가 간지 수시간(數時間)에 의식(意識)이 불명(不明)해지고 만(滿) 일일(一日)에 별세(別世)하였으므로 나는 슬픔보다 행여나 뒷날에 후회(後悔)됨이 없도록 온갖 예절(禮節)을 다 ─ 하려는 그 마음에만 분주하며 집까지 돌아갈 동안 병(病)이나 나서 가인(家人)들의 염려꺼리가 될까봐 그것만을 주의하며 한번 울지도 않았다.
 
22
집에 돌아왔어도 초상중(初喪中)에 새로운 잡지(雜誌)에 발표(發表)된 소설(小說)을 남들이 자라고 권하는 때 가만이 읽어 보았다.
 
23
그러나 심중(心中)으로는 그다지 금(禁)하시던 것이니 백일간(百日間)만 읽지도 쓰지도 않으리라고 결심(決心)하였다.
 
24
백일(百日)이 지난 뒤에 이제는 부득이(不得已)한 사정의 것이면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하자고 생각하였더니 그것이 버릇이 되어 이제는 내 스스로 펜을 들고 싶지가 않아져 버렸으므로 요즈음도
 
25
“쓰자…….”
 
26
하고 펜을 들고 앉으면 먼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대로 우울(憂鬱)에 잠기고 만다.
 
27
그의 생전(生前)에 불효(不孝)였던 내가 그의 사후(死後)에야 효녀(孝女)가 되려는지 감기(感氣) 한 번 앓지 않던 건강(健康)한 그의 죽음이 거짓인 듯 사람의 생사(生死) 너무나 무상(無常)함이 절절(切切)이 느껴져 얼핏 하면 눈물이 흐르고‘아버지’라고 한 번 되씹기만 해도 눈물이 나고 이렇게 쓰고 있는 지금 역시 억지로 참고 쓰고 있는 중(中)이다.
 
28
“쓰고 싶으면서도 쓰기가 싫으며 그의 생전(生前)에 불효(不孝)였던 내가 이제야 효녀(孝女)가 되었느냐. 차마 그의 훈계(訓戒)를 잊기 어려워 못 쓰는 것이며 눈물이 나는 건가…….”
 
29
라고 중얼거려 보면 더욱 애 끊어진다.
 
30
내가 어릴 때 너는 무엇이 되려니…… 라는 그의 물음에 시인(詩人) 되겠다고 대답하여 문인(文人)은 부(富)치 못하고 또한 단명(短命)하다고 나에게 그 생각을 단념(斷念)하라고 명령(命令)하던 일이 지금도 삼사 시간(三四時間) 계속 하여 독서(讀書)나 집필(執筆)을 하게 되면 이삼 일(二三日)씩 소화불량(消化不良)으로 신고를 하게 되는 터이라 가슴이 저리게 생각이 난다.
 
31
그는 하나뿐인 딸에게 오 ― 직 바란 것은 부(富)와 수(壽)이었고 무지(無智)의 행복(幸福)였는가 한다. 겨우 혀를 돌릴 줄 알 때부터 글을 가르쳐 주려고 가진 애를 다 ― 쓰던 그가 장성(長成)한 나에게서 도로이 글을 금(禁) 하도록 변(變)해진 이유(理由)는 아마도 사회주의(社會主義)요, 오빠가 투옥(投獄)되던 때부터일 것이니 조선어신문(朝鮮語新聞)을 읽지 못하게 한 것도 이 방면(方面)소식이 많이 실리는 까닭이었다.
 
32
그리고 그의 별세 전일(別世前日) 내가 도착(到着)된 때 마침 병원장(病院長) 이하(以下)의 담임의사(擔任醫師)들이 모여 왔으므로 그는 가장 행복(幸福)된 웃음을 띄우고
 
33
“이 세상(世上)에서 하고자 하여 못 해본 것이 없는 나에게 기어이 굴복하지 않은 것은 이 병(病)이었소. 당신들도 너무 애쓰지 마시오. 알아 못 고치리다. 나는 이제 죽어도 마음에 남기고 갈 일이 없이 내 할 일은 남기지 않고 다 ― 해 놓았으며 이 많은 사람이 타국(他國)까지 나를 위(爲)하여 와 있고 또 내 뒤를 이어서 아들과 딸을 다 ― 만나 보았으니 나는 정말 행복하지요.”
 
34
라고 자랑같이 말하였다. 평소(平素)에 우리 남매(男妹)를 남에게 자랑 한번한 일 없고 항상 불만(不滿)이어 하던 그가 최후(最後)로 남긴 말이 이것임을 볼 때 내 가슴은 더욱 아프며 글을 쓴다고 쫓아내려고까지 하며 나를 탄식(嘆息)하던 그때의 그의 심정(心情)이 어렴풋이 깨달아진다.
 
35
더구나 항상 위병(胃病)으로 밥을 적게 먹는 나를 꾸지람만 하던 그가 최후(最後)에 가까워 내 손목부터 만져보며 행여나 여위지나 않았는가 하는 눈치였음을 생각함에 더욱 어버이의 마음을 자식이 몰랐음이 애 끓는 듯하다.
 
36
“이해(理解) 없는 아버지
 
37
자식(子息)들에게 애정(愛情)이 없는 아버지.”
 
38
라고만 한껏 원(怨)망하고 거역만 해오던 나였다.
 
39
반야월(半夜月) 과원(果園)에 가서 일이나 하라고 못 견디게 굴던 그를 나는 원망하였거니와 그의 진심(眞心)은 나의 건강(健康)을 위(爲)해줌이었다.
 
40
오호(嗚呼)라 이제야 깨달아짐이여!
 
41
그를 거역(拒逆)하고 그에게 염려만 끼치며 원(怨)망하며 그가 천금(千金)같이 아끼던 정력(精力)을 부어가며 쓰겠다고 기어이 썼다는 것이 무엇이던가……. 오 ─ 그가 그같이 아껴주던 나의 건강(健康)만 소모(消耗)되었을 뿐, 낭비(浪費)하였을 뿐, 단 한 자(字)의 글도 값 있음이 없는 글을 쓰기 밖에 더 했더냐…….
 
42
그는 나의 무재(無才)를 간파(看破)했고 공연히 남의 잡지(雜誌)나 신문(新聞)을 더럽히고 또 읽는 사람의 눈만 피곤하게 할 따름임을 알고 있었으리니 아무리 나의 잘잘못을 함께 용서하고 귀중(貴重)이 여겨주는 아버지의 영전(靈前)이라 할지라도 펜을 들기 부끄럽고 죄송하다.
 
43
읽는 것과 쓰는 것이 이 자리에서 집어던져 버려지면 나는 얼마나 평화(平和)하랴…… 마는 그래도 읽고 쓰고, 쓰고 싶은 이 마음의 불꽃같이 타오르는 욕망(慾望)은 버려지지도 않고 잊어지지도 않으니 마음먹어 되지 않는 일이 없던 아버지를 이겨낸 그 병(病)과 같이 아마도 나의 이 욕망(慾望)도 병(病)이라고 이름 부칠까…….
 
44
나는 아버지의 십분(十分)의 일(一)의 강단성(强斷性)도 지혜(知慧)도 없으니 이 병(病)을 이겨내지도 짓밟아버리지도 못하리니 차라리 이 병(病)과 함께 죽으리라.
 
45
창(窓) 앞에 놓은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원고지(原稿紙)가 서늘한 바람결에 소리 지르니 할머니가 올라오는가…….
 
46
“사랑하는 딸아 나는 이미 죽어 공간(空間)에 연기(煙氣)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는 네 원(願)을 허락하노니 열심(熱心)으로 매진(邁進)하라.”
 
47
라고 귀에 들리는 듯한 끝 풀렸던 마음이 닻줄이 다시 감겨 오려고 한다.
 
 
48
─《조광》(1937. 9).
【원문】사섭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수필〕
▪ 분류 : 근/현대 수필
▪ 최근 3개월 조회수 : 7
- 전체 순위 : 5265 위 (4 등급)
- 분류 순위 : 1120 위 / 1791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사섭 [제목]
 
  백신애(白信愛) [저자]
 
  조광(朝光) [출처]
 
  1937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수필 카탈로그   본문   한글 
◈ 사섭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