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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 전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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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4
김남천
1
생일 전날
 
 
2
“농사 해 먹는 사람이 그렇디.”
 
3
하면서 창선(昌善)이는 조롱박 모양으로 가운데가 짤름한 흙물 든 자루와 닭 한 마리를 넣은 종다래끼를 닁큼 들어, 자루는 잔등이에 둘러메고, 종다래끼는 왼손에 들고서, 저만큼 앞서서 소를 세우고 이쪽을 바라보는 최서방에게로 성큼성큼 뛰어간다.
 
4
광목 상침 바지 저고리 위에 무명 중의를 껴입고, 푸수수하니 먼지 묻은 상고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인 창선이가, 밤 한 말과 사과 배 섞어서 스무 알, 그리고 살찐 암탉 한 마리를 휭하니 지고 들고 찬 이슬이 눅진하게 내린 밭 샛길을 우쭐거리며 내려가는 것을 토방 위에서 멍하니 바라보던 서분(西粉)이는,
 
5
“복손아, 너두 뛰어가 소 기르매(길마) 위에 타라.”
 
6
하고 여섯 살 난 아들을 돌아본다.
 
7
가장자리가 떨어져서 누런 말똥지가 드러나 보이는 학생 모자를 뒤통수에 재 쓰고, 이런 때에나 내어 입는 파란 목서지 조끼의 흰 조개 단추를 만지작거리고 섰던 복손(福孫)이는, 코 흘린 자국이 빨갛게 남아 있는 세수한 낯짝으로 한 번은 어머니를, 그 다음은 문지방에 서 있는 확실(確實)이를 휘끈휘끈 돌이켜보곤, 팔을 뽑아 찬 공기를 휘저으며 아버지의 간 길을 뛰어간다.
 
8
“울디 말구 집 잘 봐라.”
 
9
어머니를 쫓아가구 싶어서 눈물이 글썽글썽하여 문 턱 위에 손을 얹은 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확실이에게, 이렇게 다시 타이르고, 서분이는 새로 입은 옥양목 치마의 한 끝을 쥐어 허리에 꽂고, 닦아 신은 흰 고무신을 토방 밑으로 내려놓는다.
 
10
창선이는 지금 최서방의 소 잔등에 짐을 올려 싣고 길마를 판판하게 매만진 뒤에 복손이를 번쩍 들어 그 위에 올려 앉힌다.
 
11
“기르매를 두 손으로 꼭 쥐구 앉아라, 또 괜히 나가 딩굴디 말구.”
 
12
앞에서 소 곱지(고삐)를 쥐고 섰던 최서방은, 흰 수염은 너털거리며 소 잔등 위에 올라 앉은 복손이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가운데가 잘름한 가루를 손가락으로 발근발근 만져보며,
 
13
“이건 밤인데 이 우읫 치는 뭔가?”
 
14
한다.
 
15
“그건 뭐 사과 알이나 배 알인가부웨다.”
 
16
하면서 창선이는 닭 다랭이 달아맬 곳을 이리저리 찾다가, 그것을 길마 뒤에다 새끼 오래기(오라기)로 매어단다.
 
17
“뭐, 최서방넨 배추만 사오믄 뒵네까?”
 
18
하고 손을 떨며 물으니,
 
19
“무슨 잘되진 않아서두 쥐꼬랭이만한 게 서너 이랑 있으니.”
 
20
하면서 담뱃대를 허리춤에 꽂고 ‘이라 쩌쩌’소를 끌기 시작한다. 소는 싸던 오줌을 마저 싸고 네 다리를 움적거린다.
 
21
“그 행액던(鄕約丹[향약단]) 목화 밭에 심은 게 쥐꼬랭이겉이 되다니 원.”
 
22
창선이는 혼잣말처럼 입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소가 발자국을 옮겨 놓으므로 성큼 최뚝(밭두둑)에서 내려서면서 길을 비킨다. 이윽고 그의 아내인 서분이가 치마폭에 이슬이 묻을까 조심조심하면서 걸어오는 것을 보더니,
 
23
“아바지 생일엔 들어가 뵈일랬더니 갈(추수)할 게 밀려서 못 들어간다구 그러우.”
 
24
한다. 서분이는 못 들은 척하고 남편의 앞을 지나서 덤덤히 소가 지나간 뒤를 복손이를 보면서 따라가다가,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채 얼굴도 안 돌리고,
 
25
“소 먹이 잊디 말우.”
 
26
하고 딴말을 한다.
 
27
최서방과 소와 그리고 그 위에 탄 복손이의 머리가 흔들흔들 움직이고, 그 뒤로 새 옷을 입은 서분이가 길을 골라 이편 저편 짚는 대로, 창선이가 서있는 곳에서 점점 그들은 멀어져갔다. 언덕을 내려가서 그들의 일행이 큰 버드나무를 끼고 산고비를 돌아 없어질 때까지 그것을 내려다보던 창선이는 담뱃대를 내어서, 기새미 한 대를 피워 물고 쌍긋이 웃으며 확실이가 혼자 있는 제 집으로 올라간다.
 
28
해는 보이지 않더니 골짜기를 내려와서 앞산이 멀찌감치 물러갔을 때에야 쌀룩한 산 허리에서 찬 안개를 휘저으며 불쑥이 치밀어오른다. 싸늘하여 입김에 부딪치면 찬 물기가 돌던 새벽 공기도 햇살이 퍼지는 대로 포근히 더워 올라서 물 마른 흰 개울을 옆에 끼고 걸을 때엔 꼬드러졌던 손길에도 온기가 생긴다. 째부라진 골짜기는 앞이 트여서, 산고비를 돌고, 국사당을 지나고, 향약전을 휘도는 대로, 차차 벌판 같은 것이 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리도 안 나던 개울이 여기까지 오면 제법 돌돌거리며 낙엽을 띄우기도 한다. 고불고불한 삼밭이 고개를 넘어서니 해는 쫙 퍼져서 등 허리에 따갑고, 소 잔등 위에 탄 복손이는 굳어진 손으로 갈마를 쥔 채 졸림에 붙잡혀서 가끔 머리를 내두른다 . 소는 개울을 쩔가닥거리며 뒤채고, 사람들은 돌다리를 골라 닝금닝금 뛸 때에, 복손이는 다시 숨을 들이쉬고 안개 낀 눈을 휘저어보는 것이다.
 
29
서분이는 5 리가 넘도록 사뭇 말이 없이 걸었다. 토방 위에서 막연하게 아버지의 생일날을 생각해보고, 다시 친정에 모일 동기들을 머릿속에 그려볼 때,
 
30
“농사 해 먹는 사람이 그렇디.”
 
31
하면서 자루와 다래끼를 닁큼 둘러메고 소 있는 편으로 뛰어가던 남편의 모양이 서분이에겐 여적(여태까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32
사내 한 몸으로 닷새아리를 자작하기란 여간 힘드는 농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될수록 품을 대지 않으려고 서분이는 갓 낳은 아이가 죽어 홀몸이 되자 확실이와 복손이를 집에 두고는 매일같이 남편을 따라 밭으로 나갔다. 밭이라야 제법 쓸 만하게 평지에 벌어져 있는 것은 도무지 두 뙈기밖에 안되고, 그 외의 것은 화전이나 다름없는 산 밑을 부대(화전)한 땅 조각이었다. 뙤약볕이 내리쪼이는 산 허리에서 김을 맬 때엔 숨이 탁탁 막히고 목구멍에서는 불기운이 내솟는 듯하였으나, 이것을 해야 굶지 않는다는, 가슴을 무뚝뚝이 올라 받치는 욕망에 고을 생활을 그리워하거나 제 신세를 한탄하거나 하는 그런 딴 생각은 들지 않았다.
 
33
며칠만 날이 가물면, 어서 비가 오기를, 또 연거푸 사흘만 비가 내리면 어서 날이 개이기를, 곤하게 들었던 잠귀에 우수수 하는 바람 소리가 들리면 자리를 차고 소스라쳐 깨어, 이 바람이 자라나는 수숫대를 휘몰아치지 않기를─ 그러므로 모든 신경과 희망이 단 한 줄기의 직선, 그 이외의 것을 따르지 않았다.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하고─이러한 모든 욕망을 어쩌면 그렇게 깜박 잊어버렸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서분이에게는 더없이 슬픈 시간이었다.
 
34
오늘 아침과 같이 친정을 다녀오려고 짐을 차리는 순간이 그러한 쓸쓸하고도 슬픈 시간이었다.
 
35
“아니 복손 애비는 무슨 갈을 오늘 한다우? 콩 마당질을 발쎄 할라나.”
 
36
하두 아무말 없이 걷기가 무료했던지 최서방이 창선이의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37
“글쎄 아마 나무를 좀 벨라는디…….”
 
38
서분이는 말끝을 흐린다. 나무는 지금 베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사 해서 1년을 돌리지 못하는 창선이 같은 자작농은 겨울 한철 나무를 고을에 실어다 팔아서 도움을 하였다. 겨울이 오기 전 틈을 보아 비밀히 나무를 좀 베어두려고 창선이는 오늘 집에 붙어 있는 것이다.
 
39
“아, 내 참 들으니 복손이 외삼춘이 나왔다구 하던걸.”
 
40
하고 서분이가 나무 베는 이야기에 쭈뼛거리는 기색을 눈치 채고 최서방은 마침이라는 듯이 서분이의 오빠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서분이는 가느다랗게 ‘예’ 했을 뿐이다. 서분이의 오빠라면 창선이의 처남이다. 처남이 오래간만에 왔는데 창선이가 갈할 것을 구실로 찾아가 보지 않는다는 것은 더군다나 말이 안 되는 소리인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41
“복손이 아버지는 만젯당에 들어갔다 봤대요.”
 
42
하고 거짓말을 할까 했다.
 
43
“복손이 외삼춘 많이 상했갔건.”
 
44
하고 최서방은 혀를 두어 번 차고는 혼자서 생각에 잠긴다.
 
45
물론 창선이와 확실이가 서분이와 함께 가지 않고 떨어져 있는 것엔 서로 내놓고 말하지 않지마는 딴 생각들이 있었다. 사실인즉 서분이는 네 가족이 함께 웅게중게 친정집 뜰 안으로 몰려들어 가기를 은근히 꺼렸다.
 
46
입을 것도 변변히 못 입고 촌티가 쪼루루 흐르는 초라한 모양들을 해가지고 옹졸스럽게 되지떼같이 몰려들어 가기를 꺼렸다. 창선이 역시 말하지 않아도 아내의 눈치를 못 챌 리가 없다.─
 
47
얼마나 왔는가? 머리를 들고 앞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소 위에 탄 복손이가 손을 두드린다.
 
48
“얘 굉장하구나, 데거 데거.”
 
49
하면서 날뛰는 바람에 그의 얼굴 돌린 방향을 보니 피보다도 빨간 단풍나무가 누런 싸리수풀 숲에 유난히 눈부시게 손을 뻗치고 있다.
 
50
“단풍을 첨 보네? 촐랑씨다 떨어틸라구.”
 
51
그러나 복손이는 어머니의 핀잔에 쭈그러지지 않고,
 
52
“단풍 말인가, 다람쥐, 다람쥐, 데거 간다. 간다.”
 
53
하면서 아직두 길마 위에서 야단을 친다. 아닌게아니라 재빠르게 다람쥐 두 놈이 까끕 선 벼랑 위를 단풍 든 넝쿨을 넘으며 훌훌 날라가 듯하고 있다.
 
54
“다람쥔 첨 보네? 망할놈어 새끼.”
 
55
앞서서 가는 최서방은 모자간의 다투는 것을 그저 ‘흥’하고 가볍게 치워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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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술막에 다아 왔수다.”
 
57
하면서 머리를 들어 해를 쳐다본다. 비둑바우〔鳩岩[구암]〕다.
 
58
“한참 앉아 기대리야 자동차가 오갔군.”
 
59
신작로 옆 술막집 토방 옆에 소를 세우고 복손이를 안아서 내려 세우더니,
 
60
“그럼 짐일랑 내 실어다 올리리다. 차와 거반 함께 들어갈걸.”
 
61
하면서 소를 앞세워놓고는 다시,
 
62
“여보 귀동이 할머니 있소? 난 삼밭이 최서방이외다. 여기 방밖에 재당네 아주머니 오셨는데 윗방에 화리나 좀 올려주.”
 
63
하고 집안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른다. 그러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흰 석비레(푸석돌이 많이 석인 흙)가 깔린 길 위에 질질 끌고가는 소 곱지를 닝금닝금 뛰어가서 허리를 굽히고 한 끝을 집는다.
 
64
술막지 귀동이 할머니는 방 문을 열더니,
 
65
“본가에 갑마? 정, 오래비가 왔다구 하더니 오래비 보러 가누만.”
 
66
하면서 그들을 맞아들인다.
 
67
“아버지 생일두 되구 그래. 겸사겸사 갑네다.”
 
68
“어, 참 이때가 생일이갔군, 그래 오래빈 이전 왼통 무사하게 됐습마”
 
69
“글쎄, 그게 발쎄 4 년이니 인제 그 위에 더, 뭘 고생시키겠소.”
 
70
재만 복닥한 화로를 가운데 놓고 유리조각 붙인 창 구멍으로 신작로를 내다보면서 그들은 길마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71
지금부터 4 년 전 봄. 서분이는 스물 여섯 살 그리구 확실이가 다섯 살, 복손이는 세 살째 먹던 해 봄이다. 창선이와 서분이가 큰집에서 땅조각과 집 한 채를 갈라가지고, 처음 살림을 벌여놓고 한 돌 째 맞는 봄이다. 농량(농가에서 농사 지을 동안 먹을 양식)을 대일 길이 없어 고개 넘어 큰집으로 가서 다시 조 두 섬과 팥 닷 말을 얻어다놓고 햇보리가 날 때까지 견디어야 된다고 궁리를 하다가, 고단한 기절이라 일찌감치 불을 끄고 잠을 이루었었다.
 
72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수숫대로 얽은 바자 대문에 매어달은 생철통이 갑자기 덜렁거리는 바람에, 먼저 눈을 뜨고
 
73
“이게 뭔 소리오?”
 
74
한 것은 서분이었다. 창선이도 아마 별안간에 들려오는 이 대문 흔드는 소리에 놀라 깨었을 텐데, 별로 겁내는 기색도 없이
 
75
“누가 온 게로군.”
 
76
하고 낑하니 반쯤 일어나더니,
 
77
“거 누구?”
 
78
하고 소리를 지른다.
 
79
“내외다.”
 
80
한 것은 지금은 정녕 동경서 공부하고 있을 터인 서분이의 오빠 인호(仁浩)의 목소리에 틀림없었다 . 그러나 그들은 이 목소리를 선뜻 믿어버릴 수는 없어서, 다시 한번
 
81
“아니 이 밤중에 거 누구요?
 
82
하고 서분이가 재쳐 물었다.
 
83
“누님, 나얘요. 인호야요.”
 
84
틀림없는 인호였다.
 
85
“아니 인호와?”
 
86
하고 아직 자리에서 창선이가 우물거리는 동안 서분이는 옷을 걸치고 뜨락으로 나갔다. 밤은 칠흙같이 캄캄한데 바자 밖에서 뻥끗뻥끗 회중 전등의 불길이 뜰 안을 엿본다.
 
87
“아니, 너, 이게 웬일인가?”
 
88
이렇게 말했을 때 인호는 캄캄해서 보이지는 않았으나 확실히 벙글벙글 웃는 모양이었다.
 
89
“왜요, 제가 못 올 집이유?”
 
90
이러면서 들어서더니 제 손으로 바자 대문을 다시 밀어 닫고 토방으로 올라선다.
 
91
“못 올 집이라는 게 아니라 너무 뜻밖이게 말이다.”
 
92
작은 남포등에 불을 켜놓은 방안으로 들어서는 인호는 신작로 닦는데서 늘 보는 십장 모양으로, 감발을 치고 지카다비(작업화)를 신었다. 낡은 양복에 허름한 외투를 걸치고 도리우치를 올려놓았는데, 이러한 복색부터 창선이와 서분이에게는 이상스러웠다. 대학 본과생이 됐다고 사각모를 썼던 것을 지난 여름 방학에 보았는데, 이건 전매국 수납계원같이 어인 복색이 이 모양이냐 싶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취직을 했다구 믿을 수도 없고, 그래서 서분이는 다짜고짜로
 
93
“너 이게 무슨 복색이가?”
 
94
하고 물었으나 창선이는
 
95
“저녁을 어떡했나 묻구서 어서 시장기를 끄게 하야디.”
 
96
하고 마누라를 나무랬다.
 
97
“집에서 저녁은 먹었어요.”
 
98
“너 그럼 집에서 오는 길이가?”
 
99
이 말에 대답은 아니하나 서분이는 다소 안심하였다. 친정에서 급한 일로 인호를 시킨 것같이 추측되기 때문이다. 몇 홰째 우는지 밖에서는 닭이 운다.
 
100
“자 그럼 밤두 늦었는데 어서 자리를 잡구 자야디, 이야길랑 내일하구.”
 
101
창선이는 자기 자리를 북 윗목으로 잡아 끌며 새삼스럽게 방바닥의 온기를 짚어본다 한참 입을 . 다문 채 멍하니 앉았던 인호는, 자기 옆에 쭈그리고 앉았는 누이의 눈살을 피하여, 아랫목에서 곤하게 자는 조카 아이들을 바라보며,
 
102
“여기서 묵을 수 없어요. 이제 난 원산 쪽으루 가야겠수다.”
 
103
하고 말한다. 이 말은 두 사람을 동시에 놀라게 하였다. 자리를 어루만지던 창선이는 두 손을 이불 속에 박은 채 아무말도 못하고 인호의 얼굴과 아내의 얼굴을 황망히 번갈아 본다. 서분이는 뻗쳐지던 상상이 이 한마디에 부딪쳐서 그저 쓸개 빠진 사람 모양으로 인호의 입만 바라본다.
 
104
인호도 자기가 말한 이 말 한마디가 얼마나 이들을 놀라게 할 것인가를 짐작하지 못함은 아니었다.
 
105
“고을을 들르려다 그만두구, 어두워서 사람을 보내 우시장 옆에서 어머니만 만났습니다. 있는 돈 몇 십 원을 받어 쥐구 그 발루 예까지 왔는데, 신작로루 나서지 말구 뒷걸음을 해서 양덕으루 돌아, 원산쪽으루 빠질랍네다.”
 
106
인호의 설명을 들으며 그들은 인호의 말이 무엇을 뜻함인지 막연하게 알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서움은 점점 더하여갈 뿐이다.
 
107
“내가 들린 뜻은 오래간만에 한 번 보일 겸 노비를 좀 둘러달라구, 그래서 허둥지둥 찾아왔수다. 어머니께 여쭈었으니까 돈은 있는 대루 절 주구이 다음에 고을 들어가 집에 가서 찾으시우.”
 
108
무엇 하러 가는 길인지, 무엇 때문에 하는 여행인지, 무엇 때문에 집에는 들르지도 않고 신작로에는 나서지도 않으면서 산길을 취하여 가는 것인지, 그들에게는 물을 수도 없고 또 묻지 않아도 알 것 같기도, 또는 모를 것 같기도 하였다.
 
109
“글쎄, 원 이게 무슨 일이가.”
 
110
단지 재산이라고는 금반지를 팔아서 남편 모르게 꽁꽁 뭉쳐둔 지전 50원, 이것을 장롱 한모퉁이에서 꺼내어 인호의 손에 쥐어줄 때 서분이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었다.
 
111
놀라움과 두려움이 없어지고 슬픔이 찾아온 것이다.
 
112
“뭐, 아무 일두 없어요. 학생들이 늘 하는 무전 여행 아니우. 이길루 금강산 구경이나 갈라우. 학생들은 험한 산이랑 눈구덩이랑 그런 델 늘 탐험하러 안 댄기우. 내가 지금 그걸 하누라다 고만 노비가 궁했수다.”
 
113
아무도 믿지 않을 줄 아는 소리를 지저분하게 늘어놓으며, 싱글싱글 웃고 일어서는데 서분이는,
 
114
“달두 없는 이 밤에 너 산길을 어떻게 갈랴네, 자구 새벽에 가려므나.”
 
115
하고 졸라본다.
 
116
“험한 델 가는 게 이 여행의 본무인데 자구 가믄 되나요, 또 밤이 길 걷긴 외레 좋다우.”
 
117
인호는 벌써 모자를 쓰고 토방에서 지카다비를 끌어다 길마리에 앉아 신기 시작한다.
 
118
“정 가야 될 길이라믄 달걀이나 둬 알 먹구 가라.”
 
119
서분이가 밖으로 나가서 들고 들어온 것은 그러나 달걀뿐이 아니었다. 암가루로 쓰려던 찹쌀가루를 한 됫박이나 되게 작은 자루에다 넣어서 인호에게 들려준다. 그러고는 시렁 위를 뒤지더니 작은 표주박 하나를 꺼내온다.
 
120
“길 가다 시당할 땐 물에다 풀어서 마시거라.”
 
121
인호는 짐이 된다고 사양하다가 결국 절반을 덜고 그대로 안주머니에 두둑하니 넣었다. 앞서서 성큼성큼 산등으로 뻗친 길을 더듬어 올라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서분이는 창선이의 잔등에 낯을 묻고 느껴 울었다. 어둠은 완전히 인호를 삼켜버리고 그가 내는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뭇짐승이 날고 뛰는 무서운 수풀 속에서 홀몸으로 내세우는 것 같은 두려움이 갑자기 서분이를 송두리째 잡아버린다. 역시 그를 붙들어 재워 보내는 것이 옳았던 것 같다. 무엇 때문에 하는 여행인지, 샅샅이 캐어보고 이 길을 중지시키는 것이 마땅했을 것 같다. 다시 낯을 들어 인호의 간 길을 바라보매 그곳에는 벌써 개똥벌레의 불똥 같은 회중 전등의 불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밤이면 싼듯한 바람이 산 위에서 몰아쳐 내려온다. 서분이는 창선이에게 이끌리어 실심히 방안으로 돌아왔다.
 
122
인호가 떠나간 뒤 한 밤을 꼬박 세우고, 이른 아침 대체 어이 된 영문인지를 탐문하러 나무 한 바리를 싣고 고을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는 집을 떠나기 전에 고을서 그를 모시러 나왔다. 처음 창선이는 ‘인호구 뭐구 아무두 온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호는 지금 동경 있지 않느냐고도 말했다. 물론 집과 집 부근을 뒤져보았으나 그런 사람이 나타날 리는 없었으나 창선이는 그 길로 고을에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123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서 고을로 올라가는 자동차를 얻어 타니, 비둑바우서 고을까지 시오 리나 되는 길을 차는 20 분 내외에 달려간다. 시오리라야 결국 아홉 번이나 구불구불 돌아서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는 고개 하나에 불과하였으나, 서분이에게는 빠르다고 생각하는 자동차가 다른 손님에게는 느리고 지리한 느낌을 준다. 올라가는 길이나 내려오는 길에나 스무 명 이상를 태울 수 있는 커다란 버스는, 사뭇 고동만을 울리며 소 달구지보다도 느리게 가는 것 같다.
 
124
좁은 틈을 비집고 앉아서 복손이는 앉히지도 못하고 한편 옆에 붙들어 세워놓으니 ‘이제는 고을이다’ 하는 생각과, 4 년 만에 보는 인호와, 그 새 윗동생으로 지금은 바로 이 고을과 연달린 인근 경찰서 사법 주임으로 있는 박경부(보)의 부인이 된 인숙(仁淑)이의 얼굴이, 잠깐 눈앞에 아물거렸으나, 이어서 차장이 와서 차표를 찍고 주머니를 풀어 돈을 주고 하는 통에 깊은 생각도 못하고 높은 고개를 넘었다. 치마폭을 감싸고 자기를 바라보던 뭇사람의 눈이 다시 저 볼 데를 찾았을 무렵에 가벼운 한숨을 쉬며 밖을 내어다보니, 차는 벌써 고개를 다 넘고 판판한 길을 고을 입구를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잎새가 거의 떨어진 백양목이 휘끈휘끈 지나가고, 소말뚝이 총총하게 박힌 우시장 마당 가운데를 달리니, 뽕밭과 배추밭이 먼발로 보이고 음식점이라고 쓴 초가 마거리가 자동차 옆에 충충히 나선다. 한 번 고동이 까그긍거리고 찌지직 하는 뒷바퀴 지치는 소리가 나더니만 차는 전매국 출장소 앞에 와 멎는다. 가운데 탔던 양복쟁이 둘이 내리고 차는 휘발유 냄새를 가득하니 풍기면서 다시 끄긍거리며 대가리를 휘젓고 나즈막한 돌집들이 두 줄로 나란히 하여 있는 시가지 가운데를 윗거리로 올라간다.
 
125
두 눈을 바로 세우고 영창 밖으로 뛰어넘는 집을 하나 세다가,
 
126
“여보 여기 세워주.”
 
127
하고 서분이는 황급하게 차가 채 멈추기도 전에 시트에서 일어서려고 머뭇거렸다. 차가 떠난 뒤에 서분이는 길 가운데 한참 벙하니 서 있었다.
 
128
안방이 밖 대문, 안 대문을 거쳐, 길거리에서 훨씬 떨어져 들어가 있는 때문일까. 밖에서 우르렁거리는 소리가 한참이나 나고, 다시 뚜뚜 소리를 내면서 먼지를 뽀오얗게 날리고 차가 윗거리를 달려가버린 뒤에도 친정 집에서는 사람 하나 얼른하지 않았다.
 
129
최서방이 짐을 가지고 왔을 터이니까 서분이가 복손이를 데리고 낮차로 온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터이므로, 거리에서 자동차의 기관 소리만 나면 막간 사람이라도 뛰어나올 것인데 낯설은 집에나 오는 것 같이 서분이와 복손이가 대문 턱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에도 안방에서는 누구 하나 마중 나오는 이가 없었다.
 
130
밖 대문을 넘어서 중문 가까이 가니 빨간 스웨터에 곤색 스커트를 깡충하니 입은 단발한 명자(明子)가 캐러멜을 씹으면서 아장아장 걸어 나온다. 1년 전 제 엄마가 아이를 낳으러 왔을 때보다 엄청나게 컸으나 이 아이가 그의 동생인 인숙이의 딸이라는 것은 서분이로서도 넉넉히 분간할 수 있었다.
 
131
“명자 너 언제 왔네? 너, 나 모르간”
 
132
서분이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하였으나 명자는 살짝 몸을 비끼고 쫄랑쫄랑 거리로 뛰어간다. 복손이는 뒤로 돌아서서 명자의 가는 양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섰는데 서분이는 중문턱을 넘으며 ‘얘 뭘 정신 없이 보네.’하고 핀잔을 주듯 한다.
 
133
중문을 들어서니 아직 보이지는 않으나 여인네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숙이의 웃는 소리가 유달리 높아서 서분이는 짐짓 그러는 것은 아니나 잠깐 그늘 속에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본다.
 
134
“거저 촌에 가 살믄 별수 없어요.”
 
135
하는 인숙이의 말소리가 움찍하려던 서분이의 발 위에 다시 못을 박았다. ─ 역시 인숙이의 말소리다. 그리고 지금 ‘촌에 가 살믄 별 수 없다’는 것은 자기를 이름일 게다 ─ 하고 가슴이 뭉클하는 것을 느끼며 서분이는 생각해본다.
 
136
“어떻든 사과나 벤벤한가 한 알 먹어봅세다.”
 
137
뒤이어 다시 인숙이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벤벤한가 먹어보자’는 사과는 정녕 최서방이 소 길마 위에 져다 주었을 서분네가 가져온 사과일 것이다. ─ 서분이는 처음보다는 좀 가라앉은 마음으로 고요히 대문 안 바람 벽 뒤에 서 있다.
 
138
“농사 해 먹는 사람이 그렇디.”
 
139
하면서 자루와 닭 다랭이를 들고 껑충껑충 언덕 길을 뛰어가던 창선이의 모양이 휙 머릿속을 스쳐간다.
 
140
“아니 이거 삼밭이 누님 아아이우? 어째 여기 있수”
 
141
기겁을 하여 머리를 돌이키니 어느 새에 밖에서 뛰어 들어온 인호다. 4년 전 봄 캄캄한 밤에 산등에서 갈라진 채 처음 보는 인호의 얼굴이다.
 
142
“아니 이게 인호로구나.”
 
143
겨우 이 말 한마디를 얼겁간에 했을 뿐이다. 영감 모양으로 앞 이마가 유난히 벗어진 머리빡을 수그리며
 
144
“누님, 인사 디립시다.”
 
145
하는 것을 두 손을 잡아 일으키고 다시 한번 인호의 얼굴을 보니 코와 눈에만 옛날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146
머리는 중학생 같으나 앞 이마가 번번하고, 낯빛은 양촛빛 같은데 볼이 쏙 빠졌다. 얼굴빛에 비하여 좀 발간 듯한 두 눈만이 웃으면 갸름한 채로 옛날의 영채를 남기고 있다.
 
147
“아 이눔이 복손이유? 어디 보자. 컸구나. 너 학교에 가니?”
 
148
복손이는 점직해서 낯을 돌리니,
 
149
“얘 외삼촌에게 인사두 못 하네? 지지리 못난 것.”
 
150
하고 서분이는 핀잔을 준다.
 
151
둘이서 이러고 있으니 그때서야 안방에서는 서분이가 온 줄을 알았는지,
 
152
“큰 애기가 왔수다.”
 
153
하는 어떤 여인네의 소리와 함께 어슬렁어슬렁 방을 나오는 기색이 엿보인다.
 
154
방안에 들어앉아 서로 인사들이 끝나매 윗목에 우뚝 선 채 창문 쪽을 바라보던 인호는 약간 굳어진 표정으로,
 
155
“그럼 난 이야기하든 게 있어 잠깐 나가 보갔수다. 집 앞에서 차가 멎고 어떤 부인네가 내린다는 말을 듣구 누님이 오시는 줄 알구 쫓어 왔는데 이야기가 좀 남았어요.”
 
156
하고 밖으로 나간다.
 
157
“아니 큰누이 왔는데 함께 점심 안 먹구 어딜 또 가네?”
 
158
하고 어머니가 뒤쫓아 불러보았으나 인호는 대답도 안 하고 종종걸음으로 중문 뒤에 없어진다.
 
159
“쟈는 몸두 약한데 마짱을 배왔나?”
 
160
하고 인숙이가 방안 중복판에 도사리고 앉아서 무릎 옆에서 잠이 들어서 자는 한 돌이나 되었을 명순(明淳)이를 슬쩍 눈길해본다.
 
161
“이 애 아버지두 한창 마짱에 바쁘더니, 서장이 갈리면서 마짱 취체를 엄하게 해서 이즈막에야 버릇을 뗐는데, 것두 노름이 크게 해나면 인이 백이나봅데다.”
 
162
영창으로 아들이 나간 곳을 멍하니 앉아 내어다보던 어머니는 얼굴도 안 돌리고 작은딸의 말이 못마땅한 듯이,
 
163
“인호가 마짱은 무슨…….”
 
164
하고 변명하듯 한다.
 
165
“아이구, 그만두슈, 걸 누가 알우. 이좀 청년치구 마짱 안하는 이가 있는 줄 아슈? 어머니두 참, 우리 명자 아바지가 술 한 잔 안 하는 얌전한 이건만, 반년간이나 그만 미칠 듯이 밤이면 줄창 마짱판이었다우.”
 
166
인숙이는 황해도와 인접된 고을로 전근이 되어, 이사간 지가 두 해가 되므로 그곳 말씨를 본따서 제법 ‘디’를 ‘지’로 발음하고, 군데군데 서울말도 애써 섞어보는 것이 한방 안에 앉아 있는 여인네들의 이목을 끌었다.
 
167
“아버지는 또 산에 가셌나요?”
 
168
하고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앉아 인숙이의 말만 듣고 있던 서분이가 비로소 어머니에게 묻는다 산이란 . 광산을 이름이다. 이 집 주인은 인호가 학교를 그만두게 되면서부터 관청을 나온 뒤에는, 이 고을서 한 5 리 가량 되는 금광에 가서 분광을 하며 소일거리를 삼았다.
 
169
“응, 이좀 쇳줄을 하나 잡아서 해가 기울어야 오신다.”
 
170
이렇게 대답하더니 겨우 정신이 든 듯이 윗목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막간 여편네를 보며,
 
171
“어서 국수 내렸나 가보구 닷 냥어치만 받아오시게. 양푼 가지구.”
 
172
하고 재촉한다. 말이 떨어지자 아궁지에 그슬려서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까만 치마를 두른 막간집 젊은이는 푸시시 일어나서 부엌으로 나간다. 이 바람에 옆집 쌀 장숫집 노파는,
 
173
“이 애 외삼촌은 마짱은 안 질겨요, 손에 대디두 않는데. 늘상 윤초시네 집 사랑에 가서 놀아요.”
 
174
하고 아까 하던 마짱 이야기를 한 번 되풀이하면서 훌쩍 일어선다.
 
175
“아니 점심 사 오거들랑 잡숫구 가라구요.”
 
176
하며 어머니가 붙잡는 바람에 마지 못해 앉으면서
 
177
“난 기침이 나서 국술 먹나.”
 
178
한다.
 
179
“아니 윤초시 아들은 백화점을 벌였다는데 사랑에 가면 누구하구 노는가요?”
 
180
인숙이는 대들기나 하듯이 싸전집 노파에게 파고 묻는다.
 
181
“디내가멘 봐야 가게 사무실에두 없구 안사랑에 있는가보든.”
 
182
“그러게 마짱이죠, 것들이 마짱하느라구 안방에들 몰려 있는 게유.”
 
183
“마짱두 단 둘이서 하나, 원 내가 알게 말이디.”
 
184
늙은이는 버럭 화를 내듯이 한다. 이 바람에 이야기는 좀 중단이 된다.
 
185
서분이는 무릎 옆에 쭈그리고 앉은 복손이와 함께, 꾸어온 보릿자루 격으로 뎅그렁하니 앉아 있다. 너무 인숙이 혼자 떠벌리고 들까부는 바람에 이야기 참례는커녕 정신도 걷잡을 수 없어, 낯설은 집에 온 것처럼 벙뗑한 채 앉아 있었으나, 말이 중단되고 잠시 침묵이 방안을 점령하매, 그는 차근히 방안을 둘러 살핀다. 얼마 전에 최서방이 실어다주었을 밤자루는 입을 헤에하니 벌린 채 아랫목 발치 구석에 가로 놓여 있고, 쭈그렁 바가지에 과일을 담다가 남은 것이 모랭이에 너더 알 딩구는데 아까 인숙이가 먹어보다 놓은 것인지 잇자리가 벌겋게 변색한 사과 하나가 내동댕이쳐 있다.
 
186
푸대접을 받은 밤과 사과 알이 제 주인을 건너다보는 것 같아서 서분이는, 이 방안에 들어앉은 이들의 입심을 금시에 외면당하는 거나 같이 낯이 화끈했다 그런데다가 . 마짱판에서 이야깃줄을 잃은 인숙이가,
 
187
“참, 형님이 가지구 온 사과는 내가 먼저 맛있게 맛보았수다.”
 
188
하는 바람에 나이 보람도 없이 서분이는 귀밑까지 빨개져버렸다.
 
189
“저 사과 종류가 아마 왜금이지, 지금은 저런 대루 먹어두 겨울이면 소개 방맹이 씹는 맛이지, 사과는 무얼무얼 해두 홍옥허구 국광이야.”
 
190
금시 1 분도 되기 전에 빤히 고 입으로 맛있게 먹었노라고 한 인숙이가 뒤이어서 하는 말이다. 서분이는 아랫동생한테 우롱을 당하고 업수임을 당하고 있는 자기를 아까보다도 더 심하게 느끼면서, 그러나 성질이 고얀년이거니 하고 놀아나려는 제 마음을 붙잡기에 애를 썼다. 이러고 있는데 유리창으로 내다보니 마침 인호가 중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하반신만 보인다. 그의 두 다리는 기운 나간 사람처럼 터덕터덕 걸어오더니 이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뜰 앞 가운데서 제 방으로 된 맞은 마루 위로 올라간다. 털석 주저앉으며 그의 전신이 서분이의 눈에 나타난다. 인호는 아까와는 달리 낯이 질린 듯이 해쑥해져서 가을 해를 반듯이 쪼이다가 담배를 꺼내어 태워 문다. 파란 연기를 훅 내뿜고 그는 담배 든 손으로 머리를 괸다. 이때에 중문 밖에서,
 
191
“리상, 인호 리상.”
 
192
하며 부르는 소리가 나며 이윽고 상점 마크가 달린 점퍼를 입은 소년이 들어온다.
 
193
“죈님이 빨리 좀 나오시래요.”
 
194
그러나 인호는 일어나지 않는다.
 
195
“머리 아퍼 못 나가겠단다구 그래라.”
 
196
소년은 무슨 말을 더 하려다 인호의 태도가 너무 엄숙하고 단정적인 데 놀래어서 그대로 나가버린다.
 
197
“아니 그 애가 윤초시네 전방에 있는 아인데.”
 
198
창문 하나에 유리창 하나씩을 붙인 때문에 얼굴을 숙이고야 뜰 안에 온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싸전집 노파는 목을 구부리고 밖을 내다보면서,
 
199
“술을 먹자는가부건, 안 나가는 걸 보네껜.”
 
200
하고 뒤로 물러앉는다.
 
201
부엌 문 소리가 나고 국수 사온 인기척이 들리니 서분이는 팔을 걷고 부엌으로 내려간다. 그는 친정에 오면 항상 부엌일을 맡아보았다. 냉면을 듬뿍이 말아 인호의 방으로 들여놓으면서,
 
202
“오래비, 국수 먹으시게 자리 잡네.”
 
203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인호는 마지 못해 하는 듯이 아무 대답도 않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 그릇을 가시려고 인호의 상 물린 것을 보니 냉면 그릇이 절반이나 먹은 둥 만 둥하다. 인호 방으로 쫓아올라가 방 문을 열고,
 
204
“어데 몸이 말쨈마, 국수를 절반두 안 자셌으니.”
 
205
하였으나 허리를 구부리고 뻐금뻐금 담배만 빨던 인호는 낯을 들어 맥 없이 씩 웃으며,
 
206
“그렇게 많이 먹나요.”
 
207
하고 다시 낯을 돌린다. 어인 영문을 몰라 서분이는 방문을 열어젖힌 채 한참 동안 인호의 등골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208
내일 ─ 음력으로 시월 스무 여드레 날은, 서분이, 인숙이, 인호의 아버지, 이 고을 사람들이 항용 이주사라고 부르는 이의 쉰 번째 맞는 생일이다. 환갑도 아닌데 돈 만 원이나 실히 되느니 못 되느니 하는 집 형세로 생일 잔치란 엄두도 못 둘 일이건만, 인호가 없는 동안 생일이라고 국 한 그릇 변변히 못 끓이게 해오던 터이고, 아들이 4년 만에 밝은 날을 보게 되는 기쁨을 겸하여, 그리 굉장치는 않아도 갈비 두 채와 살치, 나부등, 엉치 등의 뼈다귀를 들여다 곰국이나 끓이고, 떡말어치나 치고, 부치개질(지짐질)이나 해서 가까운 친지와 문중끼리 술이나 나누고 아침밥을 먹기로 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일갓집 막간 여편네도 둘이 붙어서 부엌은 아침부터 웅성웅성하니 바삐 돌아간다. 도끼로 뼈다귀를 패는 사람, 큰 솥에 무우를 삶은 이, 빈대떡 할 녹두 맷돌질을 하는 부인네, 달걀을 깨뜨려 밀가루에 개는 이, 또 뒤뜰 안에서 숯불을 피우는 이, ─ 이러한 가운데서 서분이는 이 일 저 일을 두루 살피며 건넌방 부뚜막 옆에서 떡가루 절구를 찧고 있고, 이 집 주인 어머니는 닭의 죽지를 쥐고 후간(광)으로 들락날락하고, 인숙이는 제 고장서 전근되어 이곳에 온 지 달포가 넘는다는 안순사 부장의 처와 방안에서 이야기 보를 터뜨리고 있었다. 인호는 어젯밤 저녁과 오늘 아침 밥도 어인 일인지 시원히 먹지 않고 지금도 제 방에 반듯이 누워서 담배만 피운다. 그리고 이주사는 ‘생일이구 뭐구’ 하는 듯이 밥술을 놓자 곧장 산으로 달려갔다.
 
209
생각해보면 서분이의 신세는 타고난 팔자같이도 보이었다. 그는 세상에 나오던 첫날 그가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족에게 실망을 주어 이름이 서분이가 되었다. 보통학교가 생겼건만 그가 학령이 될 무렵엔 여자의 교육이란 마땅치 않은 풍습이었다. 집도 가난하여 물려 받은 반날갈이론 겨우 녹냥이나 되었다. 호적이 정비되면서 인숙이는 제법 항렬을 따라 신식 이름을 붙이면서도 어찌 된 판국인지 그는 그대로 서분이로 있었다. 학교 교장과 교장 부인이 조선 선생을 앞세우고 생도 모집을 다닐 대에 이주사는 군청 고원 이었고 인숙이는 (雇員) 바로 열 한 살이었다. 이렇게 하여 인숙이는 4 년제 보통학교를 나왔고 인호가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엔 이주사도 속관(屬官)이 되었고 집안도 제법 피어서 그는 순서대로 평양을 거쳐 동경 유학을 하였다.
 
210
밑도 끝도 없는 월급쟁이에게 주는 것보다 시골이라도 반날갈이나 가지고 있는 풍성한 농가에 시집 보내는 것이 낫겠다고 하여 서분이는 삼밭이 경주 김씨네 둘째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러나 지내보니 농가에보다는 역시 월급쟁이가 낫겠다고 하여 그 다음엔 고보 3 학년을 중도 폐지하고 순사를 다니던 박씨에게 인숙이는 출가시켰다. 이 결과가 서분이를 가난한 자작농의 처로 만들고, 인숙이를 박경부의 부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이 결과가 친정에 오면 으레히 서분이는 부엌으로 내려 쫓고, 인숙이는 방안에 그대로 도사리고 앉아 입방아를 찧게 만들었다고 서분이는 막연하게나마 생각한다.
 
211
그러나 이것이 조금도 부자연한 현상이 아니라고 마음에 거리끼지 않을 만큼 서분이의 생각은 굳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할 의무를 다 하듯이 아침부터 부엌을 휭 둘러보고 뒷문 밖에서 불을 피우는 여인네한테로 가더니 닭의 멱을 따서 더운 물에 튀기라고 시키고 그는 다시 들어왔던 문으로 나간다. 그러더니 인호의 방문 여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212
“너 동무들 청할 사람이 몇 이나 되는디, 종에 자박에 적어서 안 하네?”
 
213
하는 어머니 소리가 샛문 넘어서 들려온다.
 
214
“난 청할 사람 없어요.”
 
215
퉁명스러운 인호의 대답에 약간 놀라며 서분이는 절굿공이를 절구통에 박은 채 멈칫하였다.
 
216
“아니 왜? 채린 것 없어두 너 동무덜이야.”
 
217
하고 어머니도 뜻밖의 말에 주춤거린다.
 
218
“먹일 사람 없다는데 그럽네다.”
 
219
인호의 말소리엔 역정의 기세까지 보인다. 서분이는 마음이 두근하였다. 무슨 까닭일까? 무엇이 불만하여 저러는 것일까?
 
220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이해할 길이 없어 그의 머리맡에 들어와 앉는 것 같다.
 
221
“아니 왜 이러네? 뭘 맘에 안 드는 일이 있네?”
 
222
목소리는 한층 낮고 부드러워 아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려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아들을 노엽게 한 죄가 자기의 불찰에 있거나 아니한가 하는 듯한 어름거리는 기색이 엿보이는 목소리였다. 아들의 대답이 없으매 어머니는 정녕 아들이 갈 것은 아들의 동무들을 푸대접한 탓이라고 생각했던지.
 
223
“다른 손님 겪기 전에 그럼 오늘밤에 미리 주안이나 하구 술을 먹이게 하려므나.”
 
224
하고 새로이 아들의 마음을 풀으려 한다.
 
225
인호가 일어나 앉은 기색이 들린다.
 
226
“어머니 그런 게 아니야요. 이 고을 안엔 옛날같이 친히 지낼 친구가 이전 하나두 없어요. 장사하구 관청 댄긴다구야 나무래겠수, 해두 그 사람들 모두 도박이나 하구…….”
 
227
하더니 제 하는 말이 싱거운지, 말끝을 채 여미지 않고 만다. 다시 또 방 가운데 드러눕고마는 모양이다. 불충분하게나마 이 한마디를 듣고나니 어제 낮부터 이상스럽게 굴던 인호의 행동이 좀 이해할 수 있는 것같이 서분이에게는 생각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직도 아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228
“그래두 너 없을 땐 길에서 볼 적마다 뭐, 소식이나 있나요, 하군 늘 묻구 그러든걸.”
 
229
인호는 그 말엔 아무 대답도 안하고 한참 있다가,
 
230
“저두 몸이 말째 술 한 잔 못하겠는데 며칠 지내거든 한 잔을 먹이지요.”
 
231
한다. 어머니는 끝끝내 아들의 마음을 이해할 길이 없어 실심하여 밖으로 나가버린다.
 
232
서분이는 이상한 감정이 가슴속에 서리는 것을 휘저어버리려는 듯이 다시 절굿공이를 들어 쿵 하고 쌀을 찧는다. 바로 이 절굿공이 소리와 함께 안방에서 인숙이와 안부장 부인의 웃음 소리가 요란히 들려온다.
 
233
“설마 아무러믄 그랬을라구.”
 
234
하는 것은 웃음을 털면서 다시 이야기를 거두는 인숙이의 목소리다.
 
235
“하기는 우리 명자 아부지두 벌써 경부가 됐을 걸 우리 인호 때문에 시험엔 들구두 1 년이 훨씬 넘어서야 임관이 됐다우. 인호가 삼밭이 형네 집엘 들럿다가 원산으로 밤길을 떠날 그 당시에 우리 명자 아부지는 여기 순사루 있었구려. 그때 경부 시험에 합격해가지굴랑 이제 어데 사법 주임으로 나간다는 판인데 그 일이 생기구, 또 게다가 우리 형부가 시골뜨기라 쓸데없는 거짓부리를 해가지구 이렁저렁 일이 늘어지다가…… 그러니 새에 끼어서 우리 명자 아부지만 죽을 욕을 보셨지. 위에서는 우리 인호가 집에 왔던 걸 알구 있었다구 의심허구, 또 우리 형부 일두 무사허게 해줄라구, 여보 범인 은닉죄가 성립되지 않수.”
 
236
하고 제법 법률까지 펼쳐놓으니 부장 부인도 지지 않고,
 
237
“아니 위증죄두 구성되지우.”
 
238
한다. 인숙이는 맞장구를 쳐주는 것만 고마워서 위증죄가 어떤 것인지두 생각할 겨를이 없이,
 
239
“그러게 말이유. 그래 그만 1 년 반이나 돼서 의심이 훌쩍 풀려서야 임관이 됐구려.”
 
240
하고 다시 말을 받는다.
 
241
서분이는 이야깃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써 두 손으로 힘을 넣어 절구질에 열중하나 자꾸만 인숙이의 말소리가 들려와서 어쩔 수가 없었다. 미친 사람 모양으로 연거푸 눈을 감고 절구질을 하고나니 땀이 잔등이에 내발리는데 가만이 귀를 기울이니 화제가 바뀌었는지 자기 있던 고을의 경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서분이는 절굿공이를 내려놓고 부뚜막 옆에 한 다리를 올려 세우고 멍하니 뜰 앞을 내다보았다. 뜰, 저쪽 후간 앞에서는 복손이와 명자와 또 한 아이가 셋이서 마주 서서 무슨 장난들을 하고 있었다.
 
242
별로 눈 붙이지 않고 아이들 노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까 빨간 스웨터를 입은 명자가 뭐라뭐라 시부렁거리며 그 앞에 조끼에 두 팔을 넣고 서 있는 복손이를 쿡 찌른다. 그러고는 또 한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헤헤 하고 웃는다. 다시 또 주먹을 제법 오무려가지고 두 팔로 권투하듯이 복손이의 퍼런 조끼를 향하여 마주쳐 들어간다.
 
243
모자를 뒤통수에 재쳐 쓰고 아무말 없이 서 있던 복순이는 명자가 주먹으로 찌르는 바람에 자구만 뒤로 밀려간다. 그러나 그는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하면서도 손에 조끼에 박은 채 무표정에 가까운 낯짝으로 비실비실하기만 한다. 서분이는 다소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으나 그대로 천연한 표정으로 이것을 보고만 있다.
 
244
명자는 복손이가 비실비실 피하면서도 아무말도 못하는 것이 재미나서 옆에 선 아이와 연실 웃어가며 자꾸만 대든다. 드디어 손가락으로 복손이의 볼편을 찌르고 또 눈알을 찌르려고 하는 순간이다. 여태껏 아무말 없이 죽은 듯이 서 있던 복손이가 두 손을 조끼에서 뽑아 휙 둘러치는 바람에 눈알을 찌르려던 명자는 허리를 까풀하고 마당에 엎어진다. 명자의 ‘앙’하고 우는 소리와 방문을 차고 ‘아, 왜 이러니’하면서 튀어 나오는 인숙이의 목소리와 거지반 한시간에 났다. 버선 발로 쪼루루 뜰을 뛰어 건느더니 엎어진 명자를 부둥켜 세우고 이어서 주먹으로 복손이의 머리를 쿡 찌르며,
 
245
“촌 아새낀 미욱스레 어린 아인 왜 때리네? 기 애가 너 겉은 거한테 맞을 아이가.”
 
246
하면서 고함을 지른다.
 
247
서분이는 저도 모르는 새에 부엌 가운데 일어서 있었다. 그는 낯이 헤쓱하게 질리어서, 그러나 조금도 덤비지 않고 문지방을 넘어 토방을 지나 뜰 안을 걷는다. 그의 심상하지 않은 모양에 부엌에서 일하던 여인네들이 그의 뒷모양을 바라본다.
 
248
서분이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세 사람 사이를 헤치더니 복손이의 멱암치를 잡아 끌어낸다. 울음보가 터지려다 겨우 참고 있던 복손이의 울음이 ‘앙’소리를 치기 전에 서분이의 주먹은 그의 불편을 난장치듯 짓갈기고 있었다. 이 소란스런 풍파를 인호는 불안스러운 마음을 누르고 담배가 다 탄 줄도 모른 채 멍하니 창문을 넘어 바라보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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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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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일 전날 [제목]
 
  김남천(金南天) [저자]
 
  1938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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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1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