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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몸매 단정한 용모에 어디론지 분주히 걸어가는 Ꮤ씨를 골목에서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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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군데 결혼의 주례를 맡았답니다. 지금 식장으로 가는 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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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잰 어조로 그날의 용무를 말한다. 살펴보면 주례의 성장으로 예복을 입은 것도 아니오, 평복의 자유로운 자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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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아주 거리의 주례를 도맡아 하시게 됐군요. 언젠가도 만났더니 그 말씀이시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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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편이 본직인지 모르게 됐어요. 일껏 부탁하는 걸 사절할 수두 없는 노릇이구. 나이두 이젠 주례 감밖엔 못되나 보구요. 들러리서본 것이 벌써 까만 옛날이군요. 자, 그럼 실례합니다. 시간이 좀 촉박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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잰 걸음으로 휘적휘적 멀어가는 씨의 뒷모양을 바라보노라면 주례감하나는 꼭 떼놓은 규격이다. 사실 현재 일을 맡아보고 있는 도서관장의 임무와 어느편이 본직인지 보는 사람으로도 가릴 수가 없다. 어느 때부터 그렇게 됐는지도 모른다. 나뭇잎이 천연스럽게 누르게 물들 듯이 모르는 결에 그렇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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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과장으로 있을 때, 낡은 노트로 역사를 강의하고 잡무에 휘둘리우고 강당에서 기도하고 설화하고─그러던 시대도 한 옛날이 되었다. 다음 관장으로, 주례로, 변천된 것이 불과 수삼 년 내의 일이면서도 긴 세월의 착각을 준다. 물결의 기복이 큰 까닭일까. 씨의 자태는 직무가 무엇으로 변하든지 극히 자연스럽다. 과장으로 있을 때엔 과장다웠고, 관장으로 있을 때는 관장답고, 주례로 분장하면 또 주례다운 것이다. 그의 심경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아무 거칠음 없이 변해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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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역사서의 교시(敎示)를 받으러 가면 고대사의 토막 토막을 조예를 기울려 장황하게 강화한다. 특히 일설적인 사재(史材)에는 비길 바 없이 자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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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역사를 공부하는 분이 부쩍 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예요. 암, 역사는 배워야죠. 역사를 배우면 첫째 마음이 편안하구, 둘째 앞을 헤아릴 수 있구─일종의 종교적인 해오(解悟)를 주는 신통한 학문이죠. 차례차례 시대를 밟아 인류의 행적을 살피노라면 성전이나 경서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껴요. 어느 시대의 어느 부분이든지 좋죠─아무렴, 좋구 말구요. 기어이 읽어야죠. 영광과 부끄럼을 함께 잡을 수있는 거울예요, 역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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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잰 까닭에 자연 말도 많다. 잠깐 동안에도 씨의 입을 벗어져 나오는 말은 무려 백 어 천 어─그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을 끌고야 만다. 모두가 필요한 말이다. 불필요한 말은 거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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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를 정리해 보는 중인데 없어진 책이 퍽두 많아요. 앞으론 관 밖으론 대출을 금할 작정입니다. 책을 사랑하는 건 좋은데 한번 빌려 가군 돌려올 줄들을 알아야죠. 독점해 버리군 만단 말예요. 책을 사랑해서 그러는 건 기특하다고나 할까, 소홀히 해서 잊어버리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악덕이예요. 아무렴 악덕이죠. 그렇다구 누가 아니 빌려주는 것은 아닙니다─언제까지든지 두구 보세요. 흡족히 참고될 때까지 두구 읽으세요. 아무때 가져오셔두 좋습니다. 조금두 염려하실 것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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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물론 필요한 말인 것이다. 관장으로서의 책무상 소홀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씨는 대단한 분망하다. 사시장천 마음과 직무가 분주해서 한시도 영가(寧暇)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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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테두리 나이의 낙차는 있으나 K씨도 한번 결혼의 주례를 서 보았다고 말한다. 친구의 딸의 혼인날 끌려 나가 어쩌는 수 없이 예단에서 장엄한 어조로 인생의 성전을 들어 행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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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주례의 나이가 됐단 말인가. 대체 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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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라는데 주례인들 못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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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사십인가. 불혹이라니 아름다운 신부의 자태를 봐두 유혹을 느끼지 않는단 말이지. 명예로운 사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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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나두 감개무량하네. 벌써 내게 그런 청이 올 줄 누가 알았겠나. 일껏 부탁하는걸 사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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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마디가 Ꮤ씨의 어투와 흡사한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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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술타령을 번기는 날이 없으면서 그래 그 주제로 신성한 결혼의 주례를 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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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낯으로 부끄럽긴 해. 허나 난 이것을 인생의 절차라구 생각하네. 차례차례 겪어 가는 절차라구. 엄벙덤벙 놀구만 있는 동안에 벌써 이 절차에 이른 것이 부끄럽기두 하구 서글퍼서 못 견디겠단 말이야. 야심두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고 청춘두 먼 옛날로 뒷걸음질쳐 갔어. 인전 연애라군 생각할 엄두두 못 내게 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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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의 탄식이라는 것이 조금 이른 듯은 하나 씨의 자탄은 실감에서 우러나옴인지 사실 처량하게는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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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커다란 연애의 일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해놓고 귀찮은 바람에 교직까지 물러나서 조그만 회사의 중역으로 사십의 고개를 맞이하게 된 씨의 심경으로 응당 그럴 법도 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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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야심과 청춘─사람이 이 두 가지를 그렇게 수월하게 단념하고 잊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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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딸의 주례를 서는 씨에게도 적령의 자녀가 있을 때 사십의 실감이 얼마나 절실할까를 미루기에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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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 씨를 찾은 동무에게 집안에서 나온 한 청년을 소개해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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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도 놀랐거니와 씨의 심중도 단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무의 눈에는 씨나 그의 사위나 별반 낙차가 심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동무 자신 씨와 같은 세대에 소속되어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남는 것은 엄연한 사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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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발을 들여놓는 술집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자태를 발견할 때의 아버지의 심정이 어떤 것일지, 그런 감정까지를 남보다 일찍이 경험하게 된 씨는 확실히 뭇 동갑들을 앞서서 인생의 걸음을 재촉한 한 사람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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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삽시간에 온 것만 같네. 중간은 떼어 버리구 처음과 끝만이 있는 것 같애. 청춘이 언제 지났는지 있는 건 이 사십의 오늘뿐이야. 주례요, 아버지요, 장인인 오늘뿐이야. 아, 인생두 빨리 저문다. 서글프다.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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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엄한 것도 세월이려니와 절대적인 고집장이도 세월인 듯하다. ─ 11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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