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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경(淑卿)의 경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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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2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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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숙경(淑卿)의 경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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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저질렀다고 깨달은 순간 숙경은 현의 뺨을 찰싹 후려갈기고 말았다. 순간의 발작이었다. 아니 착각이었다. 만일에 때린다면 현이 숙경이를 때렸어야 할 것이었다. 선손을 건 것도 숙경이었다. 오늘 현한테 그럴 의사가 없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숙경이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 오늘뿐이 아니라, 현은 그런 생각을 감히 품어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현이 숙경을 사랑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살뜰히 사랑한다. 숙경이가 만일에 사랑의 대가로서 현이 가지고 있는 일체를 요구했대도 감격해서 바쳤을 현이었다. 이 사랑의 대가란 반드시 숙경의 전부를 의미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단 한 번의 키스를 위해서 숙경이가 현한테 그의 생명의 일부를 요구 했 대도 기뻐서 응했을 현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명예라도 좋았고, 사회적 지위라도 좋았다. 결핵균의 최고 권위요 국립 결핵 연구원장이란다면 값싼 지위도 아니다. 그 일부나 또는 전부와 숙경의 사랑과를 바꿀 수 있다면 언제든지 헌신짝처럼 버리고 숙경의 사랑을 독점했을 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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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 한 번의 키스가 숙경의 애정의 전부 ─ 육체까지를 의미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것이 설사 키스에서 그치는 애정이라는 것을 알았었대도 기뻐서 자기를 바쳤을 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숙경에게 대한 현의 사랑은 반드시 그 대가를 요구한 사랑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애정이었다. 별을 그리는 철 없는 소녀의 하염없는 그런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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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현이 감히 숙경이에게 손을 내밀었을 리가 없다. 현한테 먼저 손을 내어 준 것은 숙경이었다. 현은 하늘에서 떨어진 별을 받듯 숙경의 손을 받았었다. 손바닥에 놓여진 그 숙경의 손을 현은 그저 바라다보기만 했었다. 감히 쥐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현은 숙경의 의사를 몰랐다. 숙경의 열이 삼십팔도가 넘었을 때였던지라. 열 때문에 그러는 것이려니 했을 뿐이었다. 마침 객혈을 한 뒤이기도 했다. 생명에 대한 위협의 공포가 의사 인자기한테 구원을 청하는 것이거니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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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나 좀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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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애원으로만 해석했었다. 그래서 현은 보고만 있었다. 으 스러지도록 쥐어 보고 싶은 손이었다. 말라서 그렇지 여자로서는 큰 편에 속하는 숙경이다. 그러면서도 손과 발은 조그마했다. 정말 귀엽게 생긴 손이었다. 꿈에라도 한 번 만져보고 싶어하던 손이기도 했다. 그 손을 만져볼 용기를 못낸 현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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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어주는 손도 만져보지 못하는 현이었다. 그것을 보자 숙경은 안타까운듯이 또 한 손으로 현의 손을 덮어 쥐었었고 현의 상체를 지그시 당긴 것도 숙경이었다. 그 때 숙경은 누워 있었다. 침대였다. 의자를 침대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현의 상체는 물 속처럼 숙경한테로 끌리어갔다. 현한테는 아무런 힘도 권리도 없었다. 일체를 숙경이한테 내어맡긴 것은 숙경의 의사를 모르는 데서였다. 중환자는 곧잘 의식 없이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현도 오늘의 숙경의 행동은 중환자의 그것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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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우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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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 이렇게 물었었다. 정중을 다한 물음이었다. 사실 숙경은 소중한 환자이기도 했다. 공무원의 수입밖에 없는 현한데는 숙경은 생활의 좋은 보조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생활뿐이 아니었다. 극진히도 아내를 사랑하는 숙경의 남편은 돈도 있고 권세도 있는 사람이었다. 넥타이도 사서 보냈고 셔츠도 보냈었다. 아내의 건강이 좋아졌노라고 차를 가지고 와서 저녁도 내고 하는 숙경의 남편이었다. 물론 숙경의 뜻을 받아서였을 것이고 보니 숙경이는 현의 좋은 패트런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고마운 사람에게 대한 예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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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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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현은 그때까지도 숙경이가 괴로워 그러느니라 했다. 그러고도 숙경이가 그의 상체를 지그시 끌어당기는 것을 보고서 도현은 자기의 생명을 맡은 의사한테 대한 중환자의 하소연으로 알았었다. 그랬기 때문에 끄는 대로 끌리어갔었고 숙경이의 병을 고쳐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에만 사로잡혀 있은 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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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숙경이가 현의 목에 손을 감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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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엄두도 못 내던 물건을 받은 때와도 같았다. 받아야 주체도 못할 물건을 받은 때의 낭패였었다. 받다가 뺨이나 맞을것 같은 그런 두려움이기도 했었다. 현은 갈피를 못 차렸다. 주는 것도 같았다. 숙경의 눈이 그랬다. 그것은 적어도 장난치는 눈이 아니었다. 그 어떤 탐나는 물건에 대한 억제하지 못하는 정열의 눈이다. 자글자글 끓는 것 같은 눈이었다. 대담한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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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때까지도 현한테는 용기가 없었다.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다. 아파서 아파서 못견디는 환자가 의사한테 매어달리는 심정이라 했다. 사실 현은 그런 경험이 많았다. 아름다운 부인도 있었다. 처녀도 있었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운 여자 대학생도 있었다. 희랍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건성 늑막염이었다. 미애란 이름이었다. 미애는 마치 애인인 듯이 현을 끌어안고 울었었다. 울고 나서는 그만이었다. 대금을 주고 짐이나 지웠던 사람처럼 다음 순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이다. 오늘의 숙경이도 그것이라 했었다. 그러나 숙경은 당기던 팔의 힘을 늦추는 것이 아니었다. 사뭇 끌고 가는 것이었다. 현의 상체는 숙경의 가슴에 안기고 말았었다. 그 순간이었다. 현의 입술은 숙경의 입술에 닿았던 것이다. 아니 숙경 이의 입술이 현의 입술을 요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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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긴 동안이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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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이다. 숙경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물론 지금 미영 각국의 결핵병원 시설 시찰차로 가서 있는 남편과의 신혼여행이다. 그때 그의 남편 ㄷ씨는 이미 상당한 지위에 있었다. 학구생활에 빠져서 서른 다섯이 되도록 여자란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이었다. 그 ㄷ씨가 독신 때부터 소중히 여기던 그릇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백자기였다. 값도 숙경으로서는 믿어지지 않는 값이었지만 동경 유학 때부터 십오 년간을 책상에 놓고 즐기던 그릇이라 했다. 남편은 그 그릇에 과일을 담아 놓는 것이 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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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릇이 뭔지 아시오?"
 
20
초면에도 자랑을 하던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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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이가 혹 다른 사람과 연애를 했다면 그건 용서할 수 있을지 몰라두 이 그릇을 깼다간 이혼입니다. 잘 보아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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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시대였다. 물론 농담이었다. 그만큼 아끼던 고려시대의 백자기였다. 이조의 백자기에 비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백자기를 숙경은 탈싹 깨었던 것이다. 부리는 계집아이더러 받으라고 준 것이 잘못 받아 떨어뜨리자 댓 돌에 떨어지면서 탈싹 두쪽이 났던 것이다. 실상 따지면 계집애한테는 잘못이 없었다. 주기를 잘못 주어서 깬 것이었다. 그러나 숙경은 발작적으로 계집애의 뺨을 후려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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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오늘 같았다. 그 계집애한테 잘못이 없었듯이 오늘의 현한테는 조그마한 잘못도 없던 것이다. 순애라는 열넷 된 아이였다. 이름처럼 온순한 아이다. 지금 세상에서도 저의 할머니가 걱정을 하신다고 귀밑머리까지 땋던 순애 였다. 순애는 잘못했노라 싹싹 빌며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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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도 지금 뺨을 야무지게 얻어맞고서 눈물이 글썽해 있는 것이었다. 현을 부른 것도 숙경이었다. 퇴근 시간보다도 두 시간이나 먼저 숙경을 위해서 나온 사람이다. 사실 열도 올랐었고 식모는 저자에 가고 없었다. 아이들도 학교에서 돌아오려면 두어 시간은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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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가장 고독한 시간이었다. 아무도 없는데 혼자 죽는 것이나 아닌가? 그런 공포의 시간이었다. 숙경은 그럴 때면 매양 남편한테 전화를 걸었었다. 전화를 걸면 십오분 이내에 뛰어와 주는 남편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그랬었다. 정 바쁘면 와서 삼, 사분 위로를 해주고 다시 뛰어나가던 남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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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남편은 지금은 없었다. 아직도 석 달은 더 있어야 돌아온다. 숙경이도 그렇게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까지 될 줄도 몰랐었다. 그 저 고적 했고 그저 허전했었다. 주사를 맞고 싶기도 했었다. 그래서 현을 불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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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현을 부른 것도 숙경이었고 현한테 손을 내어준 것도 숙경이었다. 그의 목에 팔을 걸어당긴 것도 숙경이다. 입술을 청한 것도 숙경이었다. 주저 하는 현을 채찍질하듯 해서 모든 잘못이 저질러졌던 것이다. 잘못을 저질렀다고 깨달은 순간은 꼭 십 년 전 그 고대의 백자기를 깼다고 깨달은 순간과도 같았다. 그릇을 깬 것이 순애라고 숙경은 순애의 뺨싸대기를 후려쳤지만 지금은 똑같은 발작으로 현의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걷잡을 수 없던 발작이었다. 무서운 착각이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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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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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 눈물이 글썽해서 이렇게 사과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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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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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어떡하란 말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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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무서운 착각이다. 순애 때처럼 그때의 숙경한테는 일체의 잘못은 현한테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현이 온 것 같았다. 혼자 있는 시간을 엿보고 온 것이라 했다. 손을 내어준 것도 현이요 입술을 청한 것도 현이라 했다. 일체의 잘못을 현이가 주동이 됐더니라 했다. 아니 강요 했더니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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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씨, 정말 죄송합니다. 나 때문에 이런 과오가 생겼습니다. 나는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뵈올 낯이 없습니다. 숙경 씨도 ㄷ 선생도. 나 그만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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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이가 일체의 과오가 자기한테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아니 현을 사랑했다는 것을… 숙경은 일어서려는 현의 손을 잡아 앉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의 입술을 적시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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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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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은 현의 볼을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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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내가 해놓고 제가 왜 선생님을 때렸을까. 매쳤어, 내가. 정말 아프셨을 거야. 아주 빨개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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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이었지요. 숙경 씨야 지금 중환자가 아니십니까? 정신적으로나 육신상으로나 피로할 대로 피로한 사람이 아니십니까? 거기다 열도 있고. 더욱이 생에 대한 자신도 서 있지 않을 숙경 씨지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ㄷ 선생까지도 안 계시니까 정신적으로 몹시 고독하셨지요. 기대고싶어하는 것은 상정이겠지요. 더구나 숙경 씬 환자십니다. 그런 심정을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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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씀하시면 전 정말 선생님 뵐 낯이 없어집니다. 차라리 절 꾸짖어주세요. 탕녀라구 욕해주세요. 그게 얼마나 저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시는것인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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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숙경 씨한텐 환자란 죄명밖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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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인제 그만해 주세요. 제가 책임이 있다는 표시로, 이렇게 또 한번 키스를 하겠어요. 선생님은 조금도 책임을 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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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숙경은 엎드려 울고 말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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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돌아가주세요!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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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하는 소리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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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씨 부인은 어둠이란 것을 모르고 살아온 여성이었다. 어려서는 공주처럼 자랐었다. 집도 궁궐 같았다. 숙경이는 얼마나 되는지도 몰랐지만 막대 한 돈도 있었다. 부리는 사람만도 식모가 둘에 침모가 둘이나 있었다. 거기에 막내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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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에는 인력거를 타고 다니었었고 학교에는 자동차를 타고 다닌 숙경이었었다. ㄷ씨와 결혼을 할 때는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명월 관에서 혀를 내어두른 호화판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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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ㄷ씨는 아내밖에는 모르는 신사였다. 이 세상에서 오직 숙경이만이 미인이라고 생각하고 또 믿는 ㄷ씨다. 술도 별로 안했다. 매일 연회에 쫓아다니어야 할 ㄷ씨면서도 부득이한 자리가 아니면 빠졌고 가도 곧 자리를 뜨는 남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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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셔요? 좀더 놀다 오시잖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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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이가 미안해하면 ㄷ씨는 이렇게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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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다람쥐 보구 싶어서 앉었겠더라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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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씨는 만혼(晩婚)이기도 했었지만 집에 와서도 숙경이가 못견딜 만큼 애무를 했었다. 귀여워 귀여워 못견디는 모양이었다. 서재에 들어가면 목석처럼 움직일 줄 모르면서도 안에 들어오면 그대로 재수였다. 볼도 비비고 입술도 대고 안아도 주고 어린애처럼 무릎에 앉히기를 좋아하는 남편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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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몸 약한 것이 불행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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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숙경의 병은 숙경을 조금도 불행하게 하지는 않았었다. 때로는 절망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ㄷ씨는 이 숙경의 절망을 잘 헤쳐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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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병을 비관하는가 보지만 당신이 정말 피둥피둥하니 날뛴다면 난 당신이 벌써 싫어졌을지도 몰라. 당신이 얼마나 큰 사람이오. 여성치고는 큰 편이야. 거기다가 살이나 뒤룩뒤룩 찐다든가 짐 안 실은 말마차처럼 덜그럭 대어 보오. 금방 싫증이 났을 거야. 몸이 약하다는 거, 그것두 당신 의복 중의 하나야. 그런 줄이나 알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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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남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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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떠나던 날이었다. 그날 아침 ㄷ씨는 숙경을 서재로 불렀었다. 여섯 달 동안이니까 여섯 번은 키스를 해야 한다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 어린 애들처럼 소리를 내어 세던 남편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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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둘에 딸이 하나, 한 부부가 행복을 느끼기에는 알맞을 소산이기도 하다. 그 아들과 딸들이 또 머리가 좋았고 인물도 해사했었다. 거의 연년생이어서 그것이 고통이었으나 몸이 약하다 하여 만 오 년간은 의학의 힘을 빌려오고 있는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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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프시니까 아빠하구 잔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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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도 석 달만 되면 뚝 떼어가는 남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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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젊은 여성들한테는 시부모는 힘에 겨운 상전이니까… "이렇게 같은 서울 안에서도 따로이 살림을 차린 ㄷ씨이기도 하다 ─ 이 숙경이한테 병보다도 더 무서운 우울이 생긴 것은 그날 오후였다. 현이 나가자 숙경은 식모와 딸년이 저자에서 돌아오도록 울었었다. 통곡이었다. 울 어도 울어도 씻어지지 않는 죄였다. 뒹굴어도 깨끗해지지 않는 몸이었다. 그날뿐이 아니었다. 숙경은 이튿날도 울었고 이튿이튿날도 남몰래 자리 속에서 울었었다. 바로 그 이튿날이었을 것이다. 남편한테서 편지가 왔었다. 편지가 왔다면 버선발로 뛰어나가지 않고는 못견디던 숙경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편지다. 일주일간 그리웠던 정이 찰찰 흘러넘치는 편지였다. 가위를 찾는 시간이 안타까웠다. 부욱 찢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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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남편의 편지는 벌써 며칠째 경대 빼닫이 속에서 뒹굴고 있는 것이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런 일을 남편이 알 리가 없다는 것을 숙경이가 몰 라서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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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숙경이가 이렇듯 괴로워한 것은 한 번 저지른 과오에 대한 참회 때문만은 아니었다. 숙경은 그래서 슬프니라 했었다. 잃어서는 안 될 것을 잃은 슬픔이니라 했었다. 버려서는 안 될 것을 버린 뉘우침에서 오는 슬픔이니라 했던 것이다. 다시는 깨끗해져 볼 수 없는 몸, 티 하나 없던 얼굴에 생긴 치명적인 흉터를 거울에 비추어보며 울고 울고 하는 그런 슬픔이니라 고도 생각하던 숙경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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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의 숙경의 슬픔은 그런 슬픔이었다. 그런 고민이었고 거기에서 오는 공포였었다.
 
65
그러나 지금의 자기의 슬픔이 그런 슬픔 ─ 그런 슬픔만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 '슬픔’이 보다 더 큼을 깨닫고 우는 자신임을 발견하고 있는 숙경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숙경은 그날 오후에 생긴 일은 죄니라 했었다. 과오니라 했었다. 그 죄를 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느니라 했었다. 죽을 용기가 없다면 잊어야 한다 했었다. 현을 잊어야 한다. 아니 현을 미워해야 하느니라 한 숙경이었었다. 사십 년간 고이고이 지켜온 몸의 순결을 여지없이 짓밟은 사나이, 낙원처럼 오직 즐겁고 밝고 행복스러운 자기네 가정에 불을 지른 사나이가 현이었다. 그 현을 잊는 데 그치지 않고 미워해야 한다는 숙경이었다. 사실 미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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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숙경은 현으로 해서 잃어진 자기 몸의 순결을 슬퍼하는 슬픔보다도 그 를 잊지 못하는 자신임을 깨닫는 슬픔이 더 큼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었다. 잊어야 할 사람을 잊지 못하는 슬픔은 더 컸다. 미워해야만 할 현이 갈수록 그리워지는 애달픔 ─ 그것은 고통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67
지금의 숙경이한테는 한 가지의 슬픔만으로써 족했다. 그 어느 한 가지의 슬픔만에도 견디기 어려운 숙경이었다. 그는 원래 조그만 슬픔에도 견디어내기 어려운 약한 체질을 타고난 여성이었다. 벌써 숙경의 하루는 슬픔의 연쇄 였다. 하루의 이십사 시간은 괴로움으로 잇닿아 있었던 것이다. 반은 뉘우침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이었다. 또 반은 잊어야 할 사람을 잊지 못 하는 슬픔, 미워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그리워지는 자신을 어찌하지 못 하는 괴로움이었다. 귀중한 것을 잃어버린 안타까움은 그래도 현을 그리는 안타까 움과 잇닿아버리는 숙경이었다. 숙경의 눈은 언제나 남편의 눈과 마주쳐있었다. 무서운 눈이었다. 이글이글 타는 눈이었다. 적한테 덮치려는 직전의 그 무서운 증오의 눈이다. 증오뿐이 아니라, 인간을 가장 잔인하게 만들 어줄 수 있다는 질투에 타는 눈이었다. 숙경은 지금도 그 눈과 마주치고 있었다.
 
68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현한테서 얻을 수 있었던 가지가지의 향락에 사로잡히는 숙경이었다. 숙경이보다도 칠 년이나 젊은 현이었다. 남편보다는 십 오 년이나 젊은 현인 셈이었다. 그 젊음에서 오는 손의 온기, 체온, 우람스러운 힘. 증오와 질투에 이글이글 타는 남편과 눈쌈을 하면서도 마음은 현 한 테로 줄달음질치는 숙경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숙경은 지고 이기고 했다. 무서운 싸움이었다. 쪽을 찐 정숙한 숙경과 반나체인 또 한 숙경과의 피 비린내나는 싸움이었다. 서로 머리채를 감아쥐고 있었다. 서로 어깻죽지를 물고 뜯는 그런 싸움이었다.
 
69
그 싸움에 숙경은 지쳐 넘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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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석에 누워서 있는데 또 남편의 편지가 날아왔다.
 
71
긴 편지였다.
 
72
"… 미치고 싶게 보고 싶은 숙경에게… "숙경은 첫 줄을 읽다가 말았다. 더 읽을 용기가 없었다. 쪽찐 또 한 숙경의 승리였다. 선의 ─ 그러나 곧 다음 순간 숙경은 쪽찐 숙경이가 반나체의 또 한 숙경이한테 피 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숙경이었다.
 
73
숙경은 자기도 모르게 전화를 들고 있었다.
 
74
"저예요! 오늘 저녁 그리로 나와주시겠지요!"
 
 
 

4

 
 
76
'이 고뇌에서 나를 구하는 길은 죄에 대한 의식을 없이하는 것이다.’
 
77
숙경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다행한 일이다. 숙경이가 가장 마음으로 존경하는 박 여사 집에서 돌아온 뒤부터다.
 
78
숙경이뿐이 아니라, 박 여사를 아는 사람은 모두가 신처럼 존경하고 사랑 하는 박 여사였다. 남편은 6․25에 납치가 되어 갔었다. 유산이 있을 리 만무하다. 박 여사의 남편은 숙경이의 모교의 교장이었다. 숙경이보다 두 살 위다. 그렇건만 일생에 몸살은 사흘 누워본 일밖에 없다는 박 여사였다. 젊 다기보다는 앳된 편이었다. 박 여사는 갖은 유혹과 싸우고 있었다. 오 남매나 되는 자녀에 고올고올하는 시어머니까지 있다. 남편이 납치가 되자, 여사는 훌훌 벗고 나섰다. 반찬가게를 시작한 것이었다. 학교에도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여사가 구멍가게를 시작한 것은 오직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여사는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를 갔었고 일체의 유한 마담과도 왕래를 끊었었다. 그 흔한 계에도 발을 안 들여놓았다.
 
79
"계에 가면 옷 해입어야지? 다이아 반지 껴야지? 핸드백 들어야지? 그걸 뉘가 당하우? 나 아홉 식구야, 아홉… 난 아무 생각도 없어요! 어린 것들한테 삼시 먹이는 자미, 학비 주는 자미, 성적표 보는 자미."
 
80
이런 박 여사였다.
 
81
그날이 박 여사의 생일이었다. 오직 먹고살기 위해서 새벽 자전거를 타고나서는 박 여사한테 생일이 있을 리 없었다. 동무들간에 말이 많았었다. 박 여사 남편의 제자들이었다.
 
82
숙경이가 간 때는 주안상이 떡 벌어졌었다. 모두 한다하는 부인들이었다. 화제가 계였고 댄스였다. 이야기뿐이 아니었다. 음악도 없는데 서로들 끼고 돌던 것이다.
 
83
칙칙칙 칙칙칙.
 
84
숙경이도 몇 번인가 본 광경이기는 했다. 그러나 상상밖이었다. 모인 부인들의 거의 전부가 그 길로 또 몰려가던 것이다. 누구는 잘 추고 인물은 어떻고 ─ 모두가 남자들 이야기였다. 그중의 둘은 딴 남자와 사건을 일으키고 있던 것이다.
 
85
'세대가 달라졌다!’
 
86
숙경은 이렇게 생각이 든다. 달라진 이 세대에서 자기만이 괴로워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했다.
 
87
그러나 숙경이가 이것만으로써 자기의 죄를 벗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날 저녁, 숙경이는 이상한 자리에서 박 여사를 발견했던 것이다.
 
88
그 집은 가정 부인이 가서는 안 될 자리였다. 더욱이 박 여사가 가서는 안될 집이었다. 그것도 남편이 아닌 딴 남자와는 가서는 안 될 집이었다. 그 집에서 숙경은 한 중년의 신사와 음식을 먹고 있는 박 여사를 발견했던 것이다. 숙경이가 현과 살짝이 만나는 바로 그 집이었다.
 
89
그날 밤 숙경은 이 이상 자기를 괴롭히지 않으리라 했었다. 그렇다고 숙경이가 죄를 더 짓기 위한 자위책은 아니었다. 현을 잊기 위해서였다. 현을 못 잊는 것은 죄에 대한 의식 때문이었다. 죄에 대한 너무도 괴로운 자책에 견디다 못하면 현한테로 구원을 청하러 가는 일이 더 많던 숙경이다. 그 저 뉘우침에 그치는 괴로움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남편의 사진을 볼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그것은 무서운 공포를 가져다 숙경이를 함정에다 휘몰아넣고야 마는 그런 고통이었다.
 
90
아픔과 무서움에 숙경의 약한 신경으로써는 견디어 낼 수가 없었다. 누구고 좋았다. 손 잡아줄 대상이 필요했다. 공포에 떠는 자기 몸을 포근히 안아주는 사람이 그리웠다. 이 지금의 숙경의 이 공포를 이해해줄 사람은 오직 현 뿐이었다. 현을 내놓고는 이 세상에는 없었다.
 
91
'세대가 변한 것이다. 나만이 이렇게 괴로워할 필요는 조금도 없지 않은가? 이 죄에 대한 의식이 나를 또다시 현한테로 달려가게 만들던 것이 아니냐. 옛날에는 이런 죄를 짓고는 못살았다. 목을 매서 죽거나 양잿물을 먹었다. 그러나 그런 여성은 오늘날은 없지 않은가? 이혼? 이혼도 그렇다. 헤어지면 그만일 것이다.’
 
92
해방 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헤어졌던가를 숙경은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숙경의 주위에만도 허다하니 많았었다. 정임이, 문자, 은희. 은희는 십삼 년 동안이나 살던 남편과 헤어져서 남편의 친구와 버젓하니 살고 있는것이었다. 전 같았으면 돌아서서 침을 뱉었을 것이다. 상종은커녕 개나 짐승 취급을 했을 그런 사람들과 모두 몰려다니고 춤도 추고 계도 들지 않는가? 괴로워하기는커녕 즐거울 수 있는 모양이었다. 본인만이 아니었다. 주위의 사람들도 용감하게는 볼지언정 욕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은가? 이 것이 이 세대의 윤리라 했다.
 
93
'나도 그런 죄의 관념으로부터 해탈을 하자. 일시적인 과오가 아니냐. 깨우쳤으면 그만이다. 그럼으로써 현으로부터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내 가현을 못잊는 것은 그에게 대한 애정보다도 이 죄에 대한 강박감 때문 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가 그리워서 만날 때도 있다. 그러나 사나운 개를 보고 어머니 옆으로 다가서는 아이들 심정대로 죄에 대한 공포와 괴로움에 못 이기어 현의 품으로 뛰어간 일이 더 많지 않았던가? 죄에 대한 강박감만 아니라면 나는 현에 대한 그리운 정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박 여사까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세대가 아닌가? 현에게 대한 그리움보다도 죄에 대한 공포가 확실히 나를 더 괴롭히고 있다! 그렇다, 사나운 개만 나의 주위에 없다면 내게는 어머니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내가 죄인이 아니라면 현의 보호를 받을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94
숙경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95
그리고 또 이 죄에 대한 강박감으로부터의 해탈은 숙경으로 하여금 훌륭히 현에게의 애정을 이길 수도 있었던 것이다. 숙경은 용감했다.
 
96
현에게서 온 전화를 끊었다.
 
97
두번째도 그랬다.
 
98
세번째도 그럴 수 있었다.
 
99
숙경이가 전화를 받은 것은 현에게서 온 다섯번째의 전화였다.
 
100
"꼭 한 번만 만나주실 수 없습니까?"
 
101
현은 애원하고 있었다. 완전히 사랑의 포로가 된 사나이의 음성이었다.
 
102
"단 한 번만이라도 좋습니다. 다른 데가 싫으면 댁으로 갈까요?"
 
103
"집엔 안 돼요."
 
104
"그럼 요전 그리로?"
 
105
"거기는 더."
 
106
숙경은 망설이다가 역시 집으로 청했다.
 
107
"그럼 집으로 오세요, 세시까지요."
 
108
숙경은 인제 자신이 생긴 것이었다. 오늘로써 모든 것을 청산하기 위 해서였다. 그런 이야기를 누가 들어도 곤란했다. 숙경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날을 것만 같았다. 모든 죄가 말끔히 씻어진 것 같은 가벼움이었다.
 
109
숙경은 문을 활짝 열어젖히었다. 태양이 무섭지가 않다. 영하 팔도라니 차련만 곧 달다. 식모와 어린것을 내보내고 나니 곧 후회가 난다. 다방 같은데 가서 간단히 끝을 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벌써 나갔다는 대답이다.
 
 
 

5

 
 
111
택시를 타고 온 모양이다. 현은 십분도 못 되어서 왔다. 숙경은 현을 남편의 서재로 안내했다. 서재의 엄숙한 공기와 남편의 커다란 사진이 자기를 북 돋아주리라 한 것이다. 현한테도 그런 감정을 갖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112
그러나 현을 본 순간 숙경은 가슴에 통증을 느끼었다. 싹싹 에는 아픔이었다. 열흘 남짓한 동안에 현은 처참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광대뼈가 나온 편이었지만, 눈에 보이게 두드러졌다. 양 볼은 쪽 빠졌고 고열이 있는 사람처럼 까칠하다. 그 깔끔한 성격에 와이셔츠는 때가 꾀죄죄했다. 구레나룻이 많아서 그 깎은 자리의 푸르죽죽한 빛이 여간 좋아 보이지 않던 현이었다. 그 볼을 볼 때마다 숙경은 새끼 청어를 연상하곤 했었다. 한번은 그런 말을한 일도 있었다. 그 말에 현은 자기가 그렇게 어리어 보이느냐고 웃고 있었다. 그 볼에는 네댓새나 면도가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113
"퍽 수척하셨어요!"
 
114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115
그러나 이것이 숙경의 순정이기도 했다.
 
116
"숙경 씨의 잔인을 인정하기에는 충분할 겁니다."
 
117
웃지도 않고 하는 말이었다.
 
118
"제가 그렇게 잔인한 사람일까요?"
 
119
"한 인간을 빈 껍질로 만들어놓고도 그런 질문을 할 만큼 숙경 씬 잔인할수 있는 여성이지요. 그러나 나는 조금도 숙경 씰 원망을 않습니다. 미워하지도 못하고. 나는 완전히 천치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한번 만나 달란 것은 이런 세속적인 하소연을 하자던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만나잔 목적은 모든 것을 끝내자던 것이었지요."
 
120
"감사합니다. 저도 그런 때가 오기를 빌었어요. 그래서 오늘도 만나 뵙기로 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물로 씻어버려 주셔요. 모든 것을… 그렇다고 제가 일시적 기분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은 혹 제가 선생님을 농락한 것처럼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아닙니다. 절대로 그건 아니었어요. 깊이깊이 사랑했었습니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구요! 선생님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던진 지금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좋았었어요. 말을 않고 또 의식도 못했지만, 선생님을 뵙기만 해도 병이 낫는 것 같았어요. 열이 들뜰 때는 더구나 그랬어요. 선생님의 그 자상한 음성은 성자의 음성처럼 다정하게 들렸어요. 선생님이 놓아주시는 주사액은 생명수처럼 제게 생기를 돋우어주었습니다. 그런 선생님을 잊는다는 건 제게 가장 무서운 벌인 것도 잘압니다. 전 일생을 두고 괴로워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환상은 영원히 제 눈으로부터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단념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랑은 괴로운 것이라니 이 괴로움을 우리는 달게 받아야 할 것 같아요. 이 괴로움조차 없는 사랑이었다면 얼마나 허무했겠습니까?"
 
121
"사랑은 괴로운 것일지도 모르지만 괴로움이 반드시 사랑이 아니잖을까요?"
 
122
"그렇다고 괴롬조차 없는 사랑이 무슨 사랑값에나 가겠어요! 괴롭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는 통하는 말이라구 전 생각하구 싶습니다. 진실한 사랑이 아닌데 괴로움이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진실한 사랑이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지요. 우리의 사랑이란… "
 
123
"숙경 씨!"
 
124
현은 숙경의 말을 툭 잘랐다.
 
125
"우리가 오늘 이야기해야 할 것은,
 
126
"하고 그는 이제 처음 담배에 불을 붙인다. 무서운 애연가로 하루에 평균 세 갑을 피운다는 현이었다.
 
127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주고받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이 괴로운 것이거나 배꼽을 쥐고 웃는 것이거나 오늘의 우리 자체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사랑이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들은 평생 머리를 가랭이 속에 처박고서 괴로워할 것이고, 우스운 것이니라 믿는 사람이면 허리가 동강이 나게 웃게 내어버려두면 그만이 아닙니까? 요는 그것이 괴로운것이든 소태같이 쓴 것이든 우리는 어떻게 거기에 견디어야 하겠느냐는 것이 이야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숙경 씬 괴로운 것이 사랑이라 했습니다. 숙경 씨의 말이니 나두 그걸 믿겠습니다. 나는 숙경 씨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요. 사랑은 괴로운 것이라 치고 ─ 그럼 우리는 이 괴로움에 어떻게 견디어야 할까요? 출발이야 어찌되었건 숙경 씨에게 대한 애정의 추억은 일시적인 기억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숙경 씨의 손에서 오는 감촉은 나의 생리의 일부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숙경 씨의 입술에서 받은 환희는 나의 생명이 그 기능을 유지하기에 절대 불가결한 한 요소가 되어버렸다는 사실 입니다. 우리는 이론을 캘 필요는 없습니다. 좀더 구체적인, 좀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야겠지요. 숙경 씨가 뭐라든 숙경 씬 나와 세포를 달리한 별개의 생물체입니다. 숙경 씨의 호흡기에 아무런 이상이 없으란 법은 없을 겁니다. 숙경 씬 숙경 씨의 주관대로 ─ 아니 숙경 씨 생리대로 물로 씻어 버렸으니까 그로써 다 끝났을 것이지요. 그러나 물 아니라 잿물로 씻어도 씻어지지 않는 생리를 가진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은 반드시 상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만으로써 사랑은 성립이 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면 온전한 해결이란 이 양쪽이 다함께 ─ 동시에, 그리고 똑같은 방법에 의해서 해결이 되어야만 진정한 해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너무도 무성의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난 이러 이러하여 해결을 지었으니 넌 어떻게 해결을 짓든 모르겠다 ─ 우리가 아니 인간이 이렇게도 무책임해서 좋겠습니까? 숙경 씨가 날 진실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면 이런 말도 성립이 안 되겠지요. 그러나 진실한 것이었다면, 난 일체 물로 씻었으니 넌 자살을 하든지 미치든지 네 멋대로 해라 ─ 이럴 수가 있을까? 어떤 것입니까, 숙경 씨가 지금 내게다 요구하시는 것은? 미치는 것인가요 자살인가요?"
 
128
"……"
 
129
"물로 씻어버린다는 것 ─"
 
130
현은 다시 말을 잇고 있었다.
 
131
"숙경 씬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로 깨끗이 씻어버렸노라고. 나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숙경 씨 자신은 씻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믿기도 하고… 그러나 한 생명과 생명이 그 생 전체를 내어건 진실한 사랑은 물쯤에 씻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난 생각해요. 그것은 착각이지요. 숙경 씨의 눈이 그것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난 우리 숙경 씨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숙경 씬 그렇게 믿고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오산입니다. 설사 숙경씨를 위해서 그것을 시인한 다 하더라도 나만은 목숨을 내어걸고 시인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둘이 다 그것을 시인한다는 것은 ─ 두 생물이 생명을 교차시킨 우리의 진실한 사랑이 물로써 그렇게 간단히 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동물적인 욕망에 휘갑이 되어서 일시 야합을 했다는 것을 시인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성인입니다. 교양도 가졌습니다. 자존심을 가질 수도 있는 위치의 인간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우리의 ─ 명예를 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떻게 시인할 수 있을까요? 동물적인 일시적 야합이란 것 을시 인하기보다는 나는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내가 자살을 한다면 우리의 사랑이 그런 불명예로부터는 분리가 되어줄 것이니까요. 정말입니다. 진정 입니다. 말씀해주십시오. 난 내게 필요한 일체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사흘 전에… 숙경 씨의 부군도 인제 이십 일 후면 돌아오실 것이 아닙니까? 나는 숙경 씨와의 결혼할 준비도 완료했고 미칠 수 있는 준비도 갖추었습니다. 자살하는 것, 그것은 큰 준비를 필요로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 필요한 물건이라면 내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내 아내가 나의 심경을 이해하고 깨끗이 해결해준 것을 기뻐합니다. 역시 내 아내는 영리한 여자였어요. 그럼 숙경 씨, 말씀해주시지요. 숙경 씨가 내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 입니다. 발광입니까? 자살입니까?
 
132
"이것입니다!" 하고 숙경은 달려들어서 자기의 입술로 현의 입술을 덮어버렸다.
 
 
 

6

 
 
134
무서운 고뇌의 날이 잇닿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성이 완전히 무시된 고뇌 였다. 숙경은 어려서 생인손을 앓은 일이 있었다. 손톱을 뽑아내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숙경은 이 세상 병 중에서 생인손 앓는 것이 제일 아프니라 했다. 관격도 되어보았고 맹장염도 앓은 일이 있었다. 내장을 훑어내는 통증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이 무서운 가슴의 통증에 비할 것이 아니라 했다.
 
135
남편의 돌아올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그럴수록 고뇌는 더해갔다.
 
136
그렇다고 현에게 대한 그리움이 줄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137
남편한테는 자백을 하리라 ─ 이렇게 숙경은 결심을 했다. 숨겨둘 수는 없다 했다. 이 무서운 죄를 숨기고 그의 품에 들 수는 없다 했다. 숙경은 남편의 성격을 잘 안다. 남편은 일단 용서를 할 것이다. 그러나 용서로 끝날 일은 아니었다. 죽어버리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일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남편뿐이 아니라, 남편이 용서를 해줄지 모르지만 그것은 남편한테 버림을 받는 것보다 더 크고 더 비굴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138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일체를 숨겨 둔다면…’
 
139
그럴 수는 없다 했다. 벌써 몇 번째나 ─ 아니 몇 십번째나 부정된 방법이었다. 그렇건만 숙경은 또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140
'나만 말을 않는다면 그이는 영원히 모르지 않는가. 현 씨가 그런 말을 할까? 현 씨가? 그럴 린 없지. 현 씨가 그런 비겁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말을 않고 현 씨가 않는다면 이 무서운 사실도 영원한 비밀로 돌아갈것이다. 그렇다. 덮어만 둔다면 아무런 비극도 없을 것을 구태여 드러낼 필요는 없다. 그이를 불행하게 하고 나 자신을 불행하게 하고 어린것 들을… 아니, 너무도 분해서 그이는 죽을지도 모르지. 숨기자! 나 하나만이 괴로우면 되지 않는가. 죄를 짓고 숨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 하루에도 몇번씩 공포에 떨겠지…’
 
141
생각 하면 그것도 무서운 일이었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도 그 앞에서 떨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자기의 일생이란 그대로 공포의 연속일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각이 될지도 모르는 불안 속에서 앞으로 몇 십 년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숙경이었다.
 
142
그래도 역시 숨기는 길밖에는 없는 숙경이었다.
 
143
'숨기자! 나만 말을 않는다면 그이는 알 리가 없다. 나 하나는 괴로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이와 어린 것들이 구원을 받지 않는가? 속이다 속이다 양심에 괴로우면 그 때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경과한다면 그이한테도 덜 괴로울지도 모르지 않는가…’
 
144
이렇게 결심을 하고 보니 정말 모든 비밀이 영원히 숨겨지기나 한 것처럼 마음까지가 가벼워지던 것이다.
 
145
그때에 현이 전화도 없이 찾아왔다. 아침결이었다. 출근도 않았던 모양이다.
 
146
숙경은 비교적 가볍게 이 결심을 현한테 이야기할 수 있었다.
 
147
"이것이 양심 잃은 사람의 하는 짓인 줄은 저도 잘 알아요. 그러나 사람이 일생에 한 번 잘못쯤은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을 회개한다면 ─ 뉘우쳤다면 신도 한 번쯤은 용서해주시리라 믿어요. 선생님도 물론 저도 이 무서운 비밀을 영원한 비밀로서 ─"
 
148
"숙경 씨?"
 
149
경대 앞에 놓인 앨범을 뒤적뒤적하고 있던 현은, 앨범에서 숙경이가 비원에서 박은 사진을 떼어 양복 안포켓 속에 넣고서,
 
150
"이 사진은 내가 보관합니다. 숙경 씨가 뭐라고 하든 숙경 씬 나의 사람이란 표적으로입니다!"
 
151
이렇게 말하면서 앨범을 덮어서 놓고,
 
152
"지금까지 난 숙경 씰 가장 영리한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긴 정말 날 실망시킵니다. 숙경 씬 일체를 부군한테 숨긴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속여야 할 것은 부군이 아닐 겁니다. 숙경 씨 자신을 속일 수 있느냐지요! 난 죽어도 나의 숙경 씨가 그런 여성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남편을 속인다거나 자기를 속일 수 있는 ─ 아니 속이고도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그런 여성은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할 여잔 따로 있지요. 주인 몰래 남의 과실을 하나 뚝 따먹고서 입을 쓱 씻듯 남편 몰래 딴 남성과 접촉을 하고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 싶게 싹 돌아서서 아양을 피울 그런 여성은 못 되십니다. 물론 많지요. 나도 그런 여성의 한둘은 압니다. 고명한 분의 부인 중에도 그런 사람을 알고, 대학교수, 실업가 여럿을 알고 있어요. 게다가 파티에나 몰려다니는 여성들의 거의 대부분이 남편 몰래 딴 남자와 밀회를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지요. 첫째, 놀라지 마십시오. 접땐 그런 말을 않았었지만 내 아내까지가 그랬습니다! 내가 숙경 씨 이야기를 하자 내 아내도 실은 자기에게도 그런 남성이 있으니 잘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배 채기로 하는 수작이겠지요. 내 아내한테 그런 남성이 있었다고는 믿지 않아요. 지기 싫어서 한 수작이었겠지요. 그러나 젊은 아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도록 된 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입니다. 전에는 생각도 못하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 나라의 애정의 윤리처럼 일반화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난 숙경 씰 그런 여성과 같이 볼 수 없어요. 그것은 숙경 씨의 명예보다도 나 자신의 자존심입니다. 난 숙경 씰 그런 여성으로 볼 수도 없지만 나자신 현대의 그릇된 윤리에 휩쓸린 여성들의 희영수 가음이 되었다고 생각 한다는 것을 최대의 치욕으로 알고 있어요. 나 자신이 그렇게 지지리 못난 얼간이로 떨어지고 싶진 않습니다. 숙경 씨가 내게 그렇게 잔인하지는 않을줄 압니다!"
 
153
"그럼 선생님은 절더러 어떻게 하란 말씀이신가요?"
 
154
"나와 새출발을 해야 하지요!"
 
155
"무서! 아이, 무서!" 하고 숙경은 두 손으로 얼굴을 폭 가렸다.
 
156
"너무 셉니다! 선생님, 너무 세요!"
 
157
반은 울음이었다.
 
158
"한 여성의 과오에 그렇게도… "
 
159
"숙경 씨!"
 
160
현은 숙경의 손을 잡아당기듯 하고 있었다.
 
161
"그러면 숙경 씬 일시적인 과오라는 것을 시인하시나요? 과오였다고?"
 
162
"과오보다 죄가 더 커야 합니다!"
 
163
이 말에 현은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모자가 쥐어졌었다.
 
164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좋습니다. 난 한 여성의 일시적인 과오에 무거운 책임을 지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비겁한 사나인 아닌 세음이지요, 잔인한 사나인… 좋습니다. 안심하시지요. 숙경 씰 위해서 숙경 씨의 일 시적인과 올 영원히 비밀에 붙여드리리다. 단 한 마디, 난 과오가 아니었다는 걸말 씀해 둡니다. 삼 년간 극진히도 사랑했습니다. 숙경 씬 내가 숙경 씨의 유혹에 졌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아닙니다. 난 의사입니다. 숙경 씨의 요구가 약일 때 약을 드렸고 애정일 때 또 애정을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렇다고 없던 애정을 짜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 년간 축적 해 두었던 애정이 내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애정에 과오란 추한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내게 대한 모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지요. 자, 안심 하시오. 난 숙경 씨의 과올 일체 비밀에 붙여드리리다!"
 
165
이렇게 말을 마친 현은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어 숙경이 앞에다 집어던져주고,
 
166
"약속은 지키지요!" 하고 휘익 나간다. 그제야 숙경이가 울며 매어달렸다.
 
167
"선생님, 잠깐만 들어오세요!"
 
168
"인간의 과오는 한 번으로 족합니다."
 
169
현은 돌아앉은 채 신발을 신고 있었다.
 
170
구두끈을 매면서 하는 소리였다.
 
171
"나는 이런 모욕을 당해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여북 인간이 지지리두 못 나서 과오의 대상이 되고 다니었을까. 그러나 나는 그것을 과오였다고 생각 하지 않습니다. 순정에 충실했을 뿐이지요. 순정도 과오라면 그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인간은 성자가 아니지요. 우리의 한 일이 과오였던가 아니었던가는 우리가 죽는 그 순간에야 정확한 판결이 내려질 겁니다."
 
172
"선생님, 그러지 말구 부인께로 돌아가주세요! 숙경이가 이렇게 애원 합니다!"
 
173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또 과오를 범하는 겁니다. 과오는 한 번으로 족하지요!"
 
174
"네, 선생님!"
 
175
"인제 그만두십시다. 내 일은 내게 맡겨두어 주시오. 내가 돌아간다고 되받아줄 내 아내도 아닐 겁니다. 아내는 날 사랑하지 못할 뿐만 아니지요. 경멸할 겁니다. 자기에게도 남자가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여성이니까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다시는 과오가 없기를 바랍니다."
 
176
발길로 걷어찬 거나 진배없이 하고 나가버린 현이었다. 얼굴에 침을 뱉어주었대도 이렇게 무색할 수는 없었다.
 
177
숙경은 더 붙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기운이 없었다. 숙경은 맥 이탁 풀리며 그 자리에 팍삭 주저앉고 말았다. 어째서인지 눈물 한 방울 나오지가 않는다. 눈앞이 아득해온다. 앉은 마루가 차츰차츰 수천 척의 땅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착각이다. 아니, 실감이었다. 숙경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과 초조 였다. 벽을 짚고 겨우 몸을 가누어 역시 벽을 짚고 방까지 돌아왔다. 걷는 대로 그제서야 눈물이 똑똑 복도에 떨어지던 것이다.
 
178
거기에 전보가 왔다. 모레 저녁 다섯시 비행장에 도착한다는 남편으로부터의 전보였었다.
 
 
 

7

 
 
180
공포 이외의 아무것도 없는 하룻밤이 지났다. 새벽녘에서야 잠시 눈을 붙였던 모양이다. 눈을 뜨니 방안이 화안하다. 숙경은 질겁을 해서 이불을 뒤집어 썼다. 빛이 무서웠다. 어둠보다도 무서운 빛이었다. 숙경은 떨고 있었다. 학질 들린 어린애처럼 떨려온다. 나는 죽어야 하는가? 했다. 죽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181
'죽지 않고서 이 괴롬에 견딜 수는 없다!’
 
182
그것이 착한 남편에게 대한 의리라 했다. 아내의 도리라 했다. 땅에 떨어진 윤리에 항거하는 지성의 의무라 했었다. 그럼으로써만 더러워진 자기의 피가 정화되느니라 했었다. 이때부터 열이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183
짐작에도 삼십팔도가 넘는다. 보통 사람에게는 고열이랄 것도 없는 열이었다. 그러나 한쪽 폐가 벌집처럼 되어버린 숙경이한테는 견디기 어려운 열이기도 했다. 열에 못견디게 되면 현의 생각이 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숙경이었다. 습관이라기보다 생리다. 숙경은 현이 그리워졌다. 현의 의술이, 주사가, 약이, 아니 애정이었을지도 모른다.
 
184
"몹시 괴로우신가요?"
 
185
속삭이듯 다정한 음성. 현의 유한 음성은 그대로 그의 깊은 애정의 표현이었다. 현의 손을 통해서 받은 온기가 아직도 숙경의 손바닥에 남아 있다. 몸이 확 풀리던 온기였다. 숙경은 그 남은 온기만으로써도 흐뭇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온기였다.
 
186
이 현의 체온이 그에게 대한 그리움을 불러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손에 남았던 현의 체온이 숙경의 몸 안에 퍼지기 시작하고 있다. 손에서 팔로, 팔에서 가슴으로. 가슴이 뜨거워진다. 열이 넘친 모양이었다. 가슴에서 넘친 현의 체온이 입술로 왔다. 짜릿한 자극의 키스다. 벌써 지금의 숙경이한테는 죄의 의식이 아니었다. 아내의 의무도 없었다. 윤리도 지성도 없었다. 오직 행복감뿐이었다. 이 아름다운 감정이 어떻게 죄가 되랴 했다.
 
187
"현…"
 
188
"현 선생님!"
 
189
열 번 불러보아도 그리운 이름이었다.
 
190
과오란 누가 한 말이냐 했다. 인생이 가장 아름다웠을 때도 과오를 범 하던가? 성스러운 감정이 어째서 죄라는 무서운 이름으로 불리어지던가 했다. 숙경은 현이 그리운 나머지 울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191
얼마를 우는데 박 부인이 찾아왔다. 눈이 부시게 화려한 차림이다. 옷 뿐이아니다. 얼굴도 한결 젊어진 감이었었다.
 
192
"왜 이래, 숙경이?"
 
193
"괴로워요!"
 
194
"그렇게 나빠졌나!"
 
195
"네."
 
196
"웬만하면 일나자우. 좀 나다니면 기분이라두 낫지. 나하고 시장에 좀 가. 나 결혼하기루 했어요. 숙경이, 놀랐지?"
 
197
"아아니, 정말이세요, 사모님?"
 
198
"응. 의외야? 놀랄 거야. 나도 놀라구 있어요, 자기 자신한테. 내게 그런 용기가 어디 있었더냐 싶어, 그런 정열이."
 
199
"뭘, 사모님은 아직 젊으 신데요… "숙경은 부인의 나이를 챙겨보고 있었다. 확실히 마흔일곱인가 여덟일 것이다.
 
200
"아직 젊으셔! 이쁘시구!"
 
201
누구한테 해 들리는 말인지 숙경 자신도 모르고 되뇌고 있다.
 
202
"나 어제 「안나 카레니나」봤다우. 잘됐어. 하지만 안나가 죽는 건 난 반대야. 그야 원작이 그러니까 할 수 없겠지만 자살을 한다는 건 잘못야. 하기야 반세기가 넘었으니까. 거기다가 톨스토이란 분이 또 반세기는 뒤진 사람이었구. 그러니 백 년이 아니야? 백 년의 차이겠지. 그래두 좋았어. 한번 가보라우. 일나요, 내 옷 몇 가지 골라주구 구경 가자구. 나 또 한번 볼테예요."
 
203
숙경은 사정하듯 박 부인을 돌려보내었다. 사실 열도 많았다. 숙경은 얼른 혼자가 되고 싶었다. 박 부인의 이야기를 좀더 혼자 해부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204
"백 년의 차!"
 
205
숙경이한테는 솔깃한 말이었다. 이 백 년의 차란 말이 자기를 위해서 생긴 말처럼 달갑다. 그렇다. 백 년 전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백 년 후에 진다는 수도 있나 했다. 일체를 물로 씻어 백 년 전 과거로 돌려보내자. 그것은 마치 백 년 전에 물에 띄운 나뭇조각을 백 년 후 같은 강물로 찾으러 가는 것이나 진배없는 어리석은 짓 같았다.
 
206
오후에는 열이 훨씬 내리었다. 숙경은 옷을 갈아입고 나가기로 했다. 박부인이 이야기하던 「안나 카레니나」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207
숙경한테는 무서운 영화였다. 숙경은 입술을 깨물고 버티어보았으나 기차 달리는 것을 보고서 그대로 뛰어나와 버렸다. 속이 메스껍다. 부랴부랴 차를 잡아타고 집으로 온다는 것이 차 안에서 객혈을 하고 말았다.
 
208
어느 때던가 눈이 뜨인다.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때야 보니 남편이 와서 머리맡에 앉아 있다. 남편은 깊은 근심에 잠겨 있었다.
 
209
"숙경이, 숙경이 나와 이혼을 하고 현 선생과 결혼을 하면 어때?"
 
210
밑도끝도없이 하는 남편의 말이었다. 그렇다고 비꼬는 티도 없다. 순정 같았다.
 
211
"지금 숙경이의 생명을 구하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을 것 같아. 현 선생은 권위자거든. 당신 병엔 신이야. 그이 옆에서 치료를 하면 날 거야. 자기아내란다면 현 선생도 좀더 정성을 낼 수 있을 거야. 그렇다고 그가 지금은 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야. 아무러면 자기 아내와 남의 아내가 같을수 있나? 응, 숙경이, 그러자구. 난 달리 또 결혼을 하지. 난 당신이 살기만 하면 그만야."
 
212
헛소리를 했던가 했다. 비행장에도 안 나가니까 현을 만난 것이 아닌가 했다. 현이 모든 것을 이야기한 것에 틀림이 없었다.
 
213
"현 선생이 폭력으로 그랬어요?" 하고 숙경은 자기도 모르게 뒤집어씌웠다.
 
214
"뭐, 폭력으로?"
 
215
"네! 마취약을 먹이구서요! 전 몰랐어요. 깨어나서야 알았어요. 그래, 난 그 이의 뺨을 후려쳤어요! 정말예요, 정말!"
 
216
― 그러다가 정말 깨었다. 꿈이었다. 땀이 쪽 흘러 있었다.
 
217
"인제 좀 정신이 드십니까?"
 
218
꿈이 아니다, 분명히 꿈에서 깨었는데 머리맡에는 현이 앉아 있지 않은가? 숙경은 얼른 눈을 되감았다. 감고 생각해본다. 역시 꿈이 아니라 분명한 현이었다.
 
219
"아드님 전활 받구 정말 울고 싶었습니다."
 
220
현이가 하는 소리다.
 
221
그러고 보니 기억이 되살아온다. 숙경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현을 찾았던것이다. 아니, 현을 불러달라고 한 것도 같았다. 무서운 또 한번의 과오 였다. 불러서는 안 될 현이었다. 가슴이 아프다. 터지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222
'나는 또 잘못을 저질렀다!’
 
223
이 뉘우침이 또 피를 쏟게 하고 말았다. 정신은 점점 선명해져온다. 그럴수록에 뉘우침도 커갔던 것이다.
 
224
현은 서슴지도 않고 두 손에다 숙경의 피를 받고 있었다. 그러고는 차근차근 조처를 하는 것이다. 일찍이 남편에게서 보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런 때의 남편의 표정은 불쾌해하는 표정이었다. 현은 애석해하는 표정뿐이었다. 솜으로 입을 닦아주고 그리고 현은 또 놀라운 행동을 하던 것이다. 아직 피가 묻어 있는 숙경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갖다 대는 것이 아닌가.
 
225
숙경은 질겁을 해서 현을 떠밀쳤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현의 정열을 부채질 했던 모양이다. 현은 일찍이 보여본 적이 없는 정열로 숙경의 입술을 빨고 빨고 하는 것이었다.
 
226
일찍이 남편한테서 보지 못한 정열이었다.
 
227
날이 밝았다. 현은 긴 키스를 남기고 일어서 갔다.
 
228
오늘 다섯시에 남편이 돌아올 것이었다.
 
229
'모든 것을 이야기할까? 자백해서 남편의 처사를 바라자.’
 
230
남편이 돌아오기까지에 얻은 결론이 이것이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 마음이 좀 후련하다. 그러나 막상 남편 ㄷ씨가 돌아와서 머리맡에 앉고 나니 다시 또 번복이 되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했다.
 
231
역시 숨기자 했다.
 
232
그러나 이 결심도 그날 밤 반년 만에 남편의 품에 들고서야 그릇된 결론이었음을 발견하는 숙경이었다. 남편의 극진한 애무에 숙경은 떨기만 했다. 성자 같은 남편이었다. 이 남편을 속이고서 그의 품에 안길 수는 없다 했다. 공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대한 증오가 더 컸다.
 
233
"나 오늘 따로 좀 눕게 해주세요."
 
234
숙경은 이불을 쓴 채 남편한테 애원을 했다.
 
235
"열이 또 오르나?"
 
236
"네."
 
237
"나 아직 미국에 있거니 하고 편히 쉬어요."
 
238
남편은 다소곳이 떨어진다. 이불을 내리어 덧덮어주기도 하는 남편이었다.
 
239
숙경은 눈물이 핑 돌았다.
 
240
이런 남편을 속일 수는 없다 했다.
 
241
그렇다고 자백할 수 있는 숙경이도 못 되었다.
 
242
숙경이한테 할 수 있었던 일은 유서를 쓰는 일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밤새도록 숙경이가 생각한 것은 남편을 속이는 방법도 아니었다. 자백 하는 일도 아니었다. 오직 유서의 사연을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죽는다는 결심만으로써 도 숙경은 석 달 동안의 그 무섭던 고뇌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었다. 일체의 불안과 공포는 벌써 숙경이를 괴롭히지도 않았었다.
 
243
"나 좀 안아주세요. 꼬옥, 좀 더요!"
 
244
아내의 속삭임이 무엇을 의미했던지 남편은 그날 새벽에야 알 수 있었다.
 
245
이 한 편을 나는 숙경 ─ 아니 숙경이의 영에게 부치기로 한다.
 
 
246
〈「사상계」19호, 1955년 2월 〉
【원문】숙경(淑卿)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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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무영(李無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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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1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