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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의 예어(囈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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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1
이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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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이의 예어(囈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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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光弼)은 찜질하는 칠월 더운 날 석양에 자기의 방 동편 툇마루에서 상의를 벗고 부채질을 하며 종일토록 흘린 땀을 들이고 있었다. 이웃집 기와지붕은 쇠를 녹일 듯한 광선을 비스듬히 받아서 반짝거리며 따가운 숨을 한없이 토한다. 뒤뜰 좁은 그늘이 덮인 사이로 숨어 들어오는 바람에 검붉은 얼굴을 쪼이며 괴로운 가슴에도 흠씬 받아서 겨우 정신을 진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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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은 삼 년 전에 진달래꽃이 피고 개나리꽃이 누럴 때에, 경이의 눈을 뜨고 남대문 역에 내렸었다. 자기의 시골에서는 매우 똑똑하다는 평을 듣던 그도 경성에 올라온 뒤로 업숭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었다. 입학 시기가 조금 늦었을 때였지마는, 어느 명사의 소개로 좌청우촉(左請右囑)하다시피하여 어느 중학교에 입학하였었다. 입학 그것만이 그의 장래의 모든 것을 결정한 것처럼 어린 가슴을 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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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도 삼 년 전의 단꿈처럼 생각하는 광필은 오늘까지의 모든 것으로 장래를 저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의 도움을 받아서 공부하면 무엇을 하노? 데데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모처럼 오늘까지 해오던 것을 그만두는 것은 장래를 위하여 일신상 큰 결점처럼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기를 서울까지 보내놓고 그리고 장래의 모든 것을 스스로 담당할 것을 약속하여 놓고 모르는 체하는 사촌 원망을 하는 생각도 날마다 깊어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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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자폐(中度自廢)라는 말이 항상 염두를 떠나지 않아서 하숙 주인에게 여러 달 식채(食債)로 졸리면서도 귀향의 봇짐을 싸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주인의 안색을 보아가며 날마다 고향의 소식을 기다리며 불안의 날을 보내게 되는 터이었다. 오늘에도 자기의 시골에서 사람이 왔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만나려고 수삼 처(處)로 바삐 돌아다니다가 고향의 반가운 소식도 듣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왔었다. 자기의 고향에는 아편 중독자가 날마다 불어간다는 둥, 전황(錢荒)이 심해서 모두 쩔쩔맨다는 둥, 그중에도 자기가 존경하던 이삼의 벗이 화류계에 침염(浸染)되었다는 것과 현재에 유일의 믿음을 두고 매일 고대하던 학비 보낼 사촌이 가산집물(家産什物)까지 전부 차압을 당하였다는 것이 어린 광필의 가슴을 몹시 아프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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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탕자가 되었다는 벗도 벗이려니와 파산에 이를 지경이란 사촌의 소식을 들을 때에 만사휴의(萬事休矣)라고 실망치 않을 수 없었다. 실망과 우수와 불안이 가득한 머리를 무거운 듯이 수그리고 자기의 하숙으로 돌아올 때에, 그는 몇 번이나 담 밑 그늘을 찾아들어가 혼미한 머리에 새 기운을 들였다. 하숙에 돌아온 뒤에도 더욱 불안의 엷은 놀이 그의 안전(眼前)에 가득히 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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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의 방은 대청마루를 가운데로 두고 내실과 통하였다. 그래서 아무리 성서(盛暑)라도 대청 바람이 통하는 문은 닫아두는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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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을 들이려든지 또는 달리 파탈(擺脫)할 때에는 더구나 말할 것도 없이 엄폐하여두던 터였다. 광필은 ‘방문이나 훨씬 열어두고 지냈으면…….’하는 생각이 날 때마다 자기 시골에서 지내던 일이 절로 생각난다. 그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며, 푸른 잎사귀가 가지에 가득한 정자나무 그늘이며, 무르 녹아가는 앞산 수풀이며, 그 밖에 서울 시내에서 볼 수 없는 자연이 안전에 전개되어 왔었다. 서울의 부호나 귀족의 화려한 저택과 별장 같은 데에 있어보지 못하고, 다만 학생 하숙집으로 전전한 광필은 ‘서울 가옥은 사람을 찜질하려고 괴롭게 하려고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생각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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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이 저고리를 입고 자기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 대청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주인 소사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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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웁겠소. 이 문 좀 열어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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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러고 앉으며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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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은 “그렇게 덥지도 않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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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하는 것처럼 말하였지마는, 기실은 찬성하며 감사히 여기는 빛을 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에 나올 김 소사의 말을 기다리는 순간에, 아! 또 식가(食價) 재촉…… 또 무엇이라 대답해…… 하는 걱정스러운 것이 더위에 부대낀 그 산란한 머리에 얼음덩이를 대는 것처럼 선뜻 놀라게 하였다. 광필은 다시 김 소사의 안색을 살피었다. 김 소사는 이전에 없던 웃음빛을 띄었다. 그러한 얼굴빛이 있었다 하면, 그것은 밥값을 먼저 받을 때에나 다른 사람에게 선사 물품을 받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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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은 ‘이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려나?’ 생각하며 ‘아마 식가 재촉은 아닌 것이로군.’ 직각(直覺)하였다. 김소사는 언제든지 자주 들을 수 없는 순한 음성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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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박 학도, 이 방을 좀 비워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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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사의 집에 기숙하는 여러 손님을 머리 깎은 어른이면 김 소사는 다 “나리”라는 존칭을 붙여서 부르지마는, 광필에게는 아직 미장가 전이요 학생이란 의미에서 ‘학도’를 붙여서 불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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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은 분노의 감정을 숨길 수 없이 얼굴을 붉히었다. ‘밥값을 안 내었다고 방축(放逐)을 하려는구나!’하고 생각하고 보니, 부끄러운 것도 같았고 슬픈 듯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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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가란 말이오? 다년주객(多年主客)으로 있다가 두어 달 밥값을 받지 못했다고 그 손을 쫓아내려고 하는구려! 너무 지독한걸!’이란 말이 곧 김 소사 말이 떨어지기 전에 나오려 하였으나, 그것을 억제하고 다음 말이 나올 때까지 광필은 머리를 수그리고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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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사는 웃음을 지으며 어린아이를 달래는 어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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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게 아니라요! 이 방이 칸 반이나 되고 혼자 있기는 너무 넓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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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은 속으로 ‘밥값 못 낸 것이 미안이지, 방 넓은 것은 걱정이 아니야! 내게는 넓을수록 좋은데…….’하고 생각하면서도, 또 묵묵히 머리를 수그리고 눈만 깜박하였다. 김 소사는 광필의 얼굴빛을 살피면서 주름 잡힌 얼굴에 아양을 띄우며 광필의 묵묵한 것에 끌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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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차 여러 해 동안 지내서 허물이 없으니 말이오. 내일 시골서 손님 두 분이 오는데요. 둘이 함께 있어야 한답니다. 그런데 둘이 있을 방은 이 방 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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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은 벌써 김 소사의 마음이 어떠한 것을 짐작하므로 ‘이 여우 같은 늙은이가 나를 기어이 구박을 주려는 구나. 밥값도 아니 내고 방만 좋은 것을 차지하려는 것도 너무 몰염(沒廉)하다.’ 생각하고,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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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을 대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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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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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의 허락에 김 소사는 겨우 미안한 듯이 조금 몸을 앞으로 창 가까이 옮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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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건넌방에 있어주……. 참으로 안 되었소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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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으로 가리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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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자기가 있을 방을 바라보기만 하고도 벌써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올라 오는 듯하였다. ‘저러한 굴 속 같은 방으로 방축을 당해……. 그러나 할 수 있나……. 자기가 벌써 저주스러운 물건이 되어 되는대로 하지…….’하는 여러 느낌에, 자기가 있던 자리가 바늘방석인 듯 생각한 것처럼 곧 몸을 일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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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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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책상 위에 흩어놓은 서책을 집어 모으며 모은 행구(行具)를 주섬주섬 정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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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사는 미안한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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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옮기구려. 오늘 저녁까지 여기서 주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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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대청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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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할 것 무엇이오. 한번 작정한 것은 곧 해야 시원하지. 있을 사람이 온 뒤에 옮기면 그 사람에게도 미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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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뒤에 ‘들어올 사람 앞에서 봇짐을 싸는 것은 더욱 창피해…….’하고 싶었으나, 광필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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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아니 되는 서생의 행장이지마는, 앞마당으로 십여 차나 진땀을 흘리고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 몸은 몹시 피로를 느끼었다. 그날 저녁부터 잠자게 된 그 건넌방은 행랑에 붙은 방이었다. 북향 전벽(前壁)이라 바람 한 점 통할 곳이 없고, 방문이라 하여도 기어들고 기어나게 되었다. 서울 집에서는 희귀하게 여길 만큼이나 지은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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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 방문 앞에 바로 배수구가 있었다. 쌀 썩은 물, 생선 썩은 물, 채(菜) 썩은 물, 더러운 것이란 더러운 것은 반드시 그 창 앞에 고였다가 다시 썩은 물이 위에서 내려와야 비로소 흘러가게 되었다. 그래서 악취란 악취는 여지없이 방으로 들어와 코를 찌른다. 그리고 북편으로 비스듬하게 쓰러져가는 집이었다. 북편 벽에 몸을 비끼면 마치 안락의자에 앉은 것처럼 편안하였다. ‘그러나 이 집이 만일 즉각에 쓰러진다 하면 이 방에서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쥐덫에 쥐 치듯 할 사람은 수개월 동안 식가를 못 내고 쫓겨 온 이 광필이로군!’하고 생각할 때에, 광필은 슬픈 가운데도 헛웃음을 아니 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원통한 일인걸. 나는 내껏 천금처럼 자중하는 몸을 그리고 희망을 가득히 품은 몸을 그대로 없이해.’ 비스듬하게 기울어가는 벽과 천정을 바라보고 기하에서 배운 제형(梯形)을 연상하였다. 공포, 비애, 분노, 모든 감정이 몽롱한 광필의 머리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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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라도 있는 것이 불안하였다. 생각나는 대로 하면 밖으로 뛰어나가 이 밤을 지내는 것이 시원할 듯하였다. 고대광실에 살림하는 이가 일조(一朝)에 오막살이로 들어가서 그 비좁은 생각이며 구슬픈 생각이 어떠한 것을 비로소 알듯이 하였다. 기름 같은 땀이 점점 전신에 흘러서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생각을 하였다. 음침하기가 굴 같은 방이라 모기떼들은 앵앵거리며 삼분심(三分心) 램프불 앞으로 날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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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은 솥 속에서 찜질당하는 생각을 하며 자리를 펴고 누웠다. 잠이 들어서 이 괴로움을 잊을까 한 것이 여러 슬픈 생각과 번뇌가 그의 눈을 갈수록 초롱처럼 밝게 하였다. 또는 여러 해인지 여러 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언제든 주리었던 빈대들은 사정없이 괴로운 광필의 몸을 꼬집는다. 모기들도 빈대와 지지 않을 만큼 손발이며 얼굴을 침(鍼)질한다. 바늘 끝까지 날카로워가는 광필의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간다. 그는 껐던 정(灯)불을 다시 켜고 일어나 앉아서 모든 것을 생각하였다. 명일이라도 이러한 곤경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음을 생각함에 더욱 가슴이 갑갑함을 느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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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에게는 여름밤 짧은 것이 행(幸)이었다. 하룻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다시피 하였지만은, 그래도 피곤한 몸에는 잠의 구름이 잠깐 덮었었다. 광필이가 잠깐 졸다시피 잠들었던 눈을 뜰 때에는 벌써 밤이 밝아서 그을린 미닫이가 밝은 빛을 받아서 모든 물건이 분명히 보였다. 사방 벽 구석의 불긋하게 배부른 모기들이 붙어 있는 침구를 치우면서 보았었다. 저 암자색(暗紫色)의 불룩한 배에는 자기의 피가 들어 있거니 생각하매, 광필은 가증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광필은 가만 다니며 손가락으로 누르고, 나는 놈은 두 손바닥으로 쳤다. 암자색의 자기를 빨아먹은 모기 한 마리 두 마리씩 죽어가는 것을 무슨 복수나 한 것처럼 광필은 시원하게 생각하였다. 그 선혈이 물든 손가락과 손바닥을 들여다볼 때에 알 수 없이 불쾌도 느끼었다. 그리고 자기가 일로부터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여름날을 이러한 방에서 어떻게 지낼까를 다시 근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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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은 방문을 열고 구부리며 나왔다. 밝기는 밝았으나, 비가 곧 쏟아질 듯한 하늘에는 구름의 떼가 남에서 북으로 그의 머리에 닿을 듯이 나직하게 날아간다. 구름떼가 지나간 틈으로 보이는 하늘빛은 남색이 더욱 농후하였다. 그는 전벽(全壁) 방에서 훨씬 보이는 밖으로 나오매, 책농(柵籠)에서 벗어 나온 김생의 생각과 같은 상쾌한 것을 잠깐 느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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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사는 몸채 마루에서 나오는 광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이제는 좀 견디어보라는 것처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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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잤소? 물것이나 없습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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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은 문득 불쾌하였다. ‘마님 덕분에 잘 잤소이다.’하고 싶었으나, 아무 말도 아니하고 세숫대야를 집으며 우물로 나아갔었다. 우물로 나아가며 뒤를 흘긋 한번 졸아볼 때에 대청에서 불안한 얼굴로 자기를 바라보는 주인 딸 옥정(玉貞)이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시선이 자기의 등을 쏘거니 생각할 때에, 부끄러워서 곧 아니 보이는 데로 달려가고 싶었다. 저러한 소녀 앞에서 모욕과 다름없는 대접을 받아서 그러한 동정의 눈이 온다는 것은 비교적 무엇보다도 광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광필은 세수를 마치고 들어올 때에도 그 동정의 눈에 또 마주쳤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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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사는 육십이 되어가는 늙은이였다. 그러나 처음 보는 이는 누구든지 오십 내외라 한다. 그렇게 젊어 보였다. 아들은 없고 딸만 둘을 두었었다. 큰딸은 어느 귀족의 양첩을 주었고, 작은딸은 현금 S여학교에 다니었다. 학생과 다른 시골 손님을 치러 자기의 살림을 보조하여가고, 또는 내외술집처럼 술도 팔았다. 그래서 의식(衣食)에는 아무 부족한 것이 없이 지내었다.
 
50
밥장수나 술장수 할 것 없다고 그의 큰딸은 말리지만은, 자기가 스스로 좋아서 하는 터이다.
 
51
김 소사는 천주교 신자였었다. 그래서 그의 방에는 형관(荊冠)을 쓴 이마와 못이 박혔던 손바닥에서 임리(淋漓)한 선혈이 떨어지는 성상(聖像)을 걸어놓고, 조석으로 그 성상 앞에서 염주를 세며 손가락으로 가슴에 십자를 그으며 기도를 드렸었다. 주일이 되면 집안 식구 가운데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서 인력거를 타고 종현(鍾峴) 천주교당으로 달려갔었다. 풍우(風雨)나 한서(寒暑)를 가리는 일은 물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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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광필에게는 김 소사의 신앙이 어떠한 것인지 또 어디서 그러한 신심이 생겼는지가 한 의문이었다.
 
53
김 소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술을 잘 먹고, 그 술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었다. 여인이지만은 교제 수단이 있어서 그 집에는 단골 술꾼이 늘 끊이지 않았다. 일요일이나 토요일이 되면 그 집 대청에 여러 술자리가 벌이게 되었다. 그 술꾼들은 다 점잖아 보였고, 그렇게 젊은이는 없었다. 김 소사의 연령과 비슷하여 보였었다. 김 소사는 그 술꾼들과 한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일은 그렇게 이상한 것이 아니었었다. 그는 술이 엔간히 취하면 주름잡힌 얼굴에 발그스름한 빛을 띄워 가지고 사람에게 친압(親押)하려는 것처럼 평일보다도 잔말을 더 많이 하였다. 그래서 그 청춘의 모든 것이 나타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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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취해 가지고 기도는 꼭 잘하였었다. 광필은 이러한 것을 볼 때마다 웃음을 금치 못했다. ‘저 늙은이가 천주교당에는 무엇을 하러 다니노. 광사(狂邪)들린 노파다.’고 경멸하는 말이 나오려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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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때에 광필은 종교개혁의 이야기를 서양사에서 들은 그대로 옮기었었다. 김 소사는 노기를 띠고 “그것은 수도승과 수녀가 붙어 가지고 미국으로 도망가서 펼쳐논 교(敎)라우!” 두말도 없이 반박 매도를 연해가며 신교를 마치 종교의 사생자나 서자처럼 여기는 터였다. 이러할 때에 광필은 ‘네가 술을 먹어가며 무자비한 행동을 혼자 해가며 믿는 종교가 정통이냐? 이 종교나 신을 더럽히는 요녀!’라고 구역나는 대로 하면 곧 부르짖었을 것이다. 광필은 또 묵묵히 들었었고, 다만 조롱과 모욕의 웃음빛이 입가에 나타날 뿐이었다. 그리고 ‘늙은이가 분을 바르고 이성과 술을 먹고 하인들에게는 악독한 욕설을 퍼붓고도 성상 앞에 앉아서 태연히 기도만 올리면 그 죄가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것이 종교요?’ 반문하고 싶었으나, ‘저 이가 무엇을 아나?’하고 그만두었던 일도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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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사는 술이 취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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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밥장수나 술을 아니한다고 밥을 굶겠소, 옷을 헐벗겠소? 그렇지만 내가 나의 손으로 먹고 입어야 떳떳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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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아주 넉넉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처럼 말하는 일도 있었다. 남자의 취한 것은 물론 많이 보았지만은, 여자가 주정하는 것은 그 집에 있으면서 김 소사를 보는 것이 처음이므로, 일시에는 흥미를 가지고 주정 말대답을 하여왔었다.
 
59
“그러하실 것이오? 이렇게 밥장사나 술장사 할 것 없이 큰따님한테로 가시구려!”
 
60
광필은 충동시키는 어조로 말한 적도 있었다.
 
61
김 소사는 자기의 큰딸을 두호하고 자랑하는 것처럼 대답하였었다.
 
62
“그렇지 않아도 그만두고 오라고 오라고 하지오만은, 그러나 옥정이도 있는데…….”
 
63
이 옥정은 광필에게는 한 의문이었다. 이러한 김 소사에게서 저러한 옥정이가 나왔는가 의심이었다.
 
64
수년 있으면서도 크게 말하는 것도 듣지 못하였고, 다른 손님방에 한 번 출입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걸인이 오면 자기 어머니 모르게 가만히 돈이나 먹을 것을 주는 것을 더러 보았었다. 광필은 참으로 경이할 만한 일이라 생각하던 터였다.
 
65
광필은 김 소사의 말할 때에 자기가 먼저 옥정의 말을 끄집어낼 용기는 없었지만은, 말끝에 옥정의 말이 나오고 보면 반드시 그 문제로 길게 말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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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따님과 함께 큰따님한테로 가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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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은 옥정이가 반대하므로 그대로 지내는 것을 알면서도 말하였다. 그러면 김 소사는
 
68
“옥정이가 어쩐 일인지 죽어도 언니네 집에는 안 간다 하오. 그래서 이대로 지내갈까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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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딸을 자랑하다시피 말하였었다.
 
70
그리고 “우리와 같은 늙은이는 알 수 없지오마는, 학교에서는 항상 우등이라고 합디다. 나는 모르지, 참으로 우등인가 무엇인가…….”하고 빙글빙글 웃는 일도 있었다.
 
71
광필은 옥정의 동정의 시선을 등에 지고 다시 그 굴 같은 방으로 기어 들어왔다. 온 집안사람들이 자기를 대하여 “못난이! 밥값도 못낸 자 ― 쫓겨난 이”라고 조롱을 보내지만은, 옥정 한 사람만이 ‘나는 당신을 멸시치 않습니다. 지금에 그러한 자극이 당신의 모든 것을 크게 하고 자라게 합니다.’라고 귀에 속살거리는 듯하였다. 광필에게는 옥정의 어제나 오늘의 모든 표정이 모두 미안이란 것이라 직각되었었다. 옥정의 모든 것에 동정을 가지고 있는 광필은 옥정도 가련한 소녀라 하였다.
 
72
탐욕한 김 소사가 그의 큰딸과 같이 어떠한 희생을 만들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광필이가 옥정에 대한 동정과 불안이었다. 아무리 이토(泥土) 중에서 생장한 연꽃일지라도, 꺾는 그 사람이 그 연꽃과 같은 결백한 사람일지 이토와 같은 더러운 사람일지 누가 장래를 말할까 함에, 광필은 항상 가엾은 소녀라 하는 것도 당연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고 옥정은 소녀, 자기는 소년이라고 의식할 때마다, 저항할 수 없는 위대한 힘이 그의 가슴을 눌렀었다. 이러한 생각이 물어 나올 때에는 현금 하숙료를 내지 못하여 방을 쫓겨 나온 것도 잊어버리고 그것만 흠씬 생각하는 터였으나, 현실에 돌아올 때에는 비애를 느끼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학업을 어떻게 계속할까 하는 데로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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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은 곧 자기 사촌에게 현금의 곤경을 비교적 소상하게 편지로 보냈다. 그는 붓을 들고도 자기의 몰염한 것과 약한 것을 몇 번이나 생각하였다. 자기의 궁상을 일일이 들어 구걸하지 않으면 아니 될까 생각할 때에 슬픔과 부끄러움뿐이었다. 학비를 보내려거든 보내고 말려거든 말라고 좀 엄격하고 강경한 문구를 쓰려 하였으나, 그래도 미련과 약점이 자기에게 있으므로, 결국은 부드러운 문구만을 늘어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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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필은 결심한 듯이 붓을 던지고 생각하였다. 고학 ― 노동 ― 성공 여러가지 연상이 어지러운 실마리와 같이 머릿속에 엉클어진다. 매약 행상(賣藥行商), 신문 배달, 인력거, 모든 고학생의 하는 일을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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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약봉을 손에 들고 여관이나 노상에서 모자를 벗어 꾸벅거리며 “한 봉 팔아줍시오!” 해볼까 할 때에, 광필은 얼굴이 호듯하였다. 매약 행상하는 고학생 ― 그 사절(四節)을 두고 입는 무명 두루마기, 등만 남아 있는 양말, 뒤축 찌그러진 경제화(經濟靴), 그 영양 부족한 얼굴빛, 그이가 여관에 들어오면 여러 손님들이 그 고학생에게 대한 태도가 어떠하던 것을 생각하였다.
 
76
고학생이 들어오면 그 추비(醜卑)한 태도를 보는 학생이나 손들은 ‘저것 또 온다…….’ 얼굴을 찌푸리며 못 본 체하고 슬슬 피하던 것이 생각난다. 그 고학생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얼굴빛을 살피며 저는 고학생이란 표를 내보이며 학비에 보태어 쓰겠으니 약을 좀 팔아달라고 하면, 그 손님들은 내게는 돈이 없다니 나는 약을 많이 가졌느니, 이 핑계 저 핑계 하면 그 고학생은 “미안합니다.” 모자를 벗어 예(禮)하고 추비한 태도로 기운 없이 나가던 것이 눈앞에 분명히 나타난다. 이러한 광경을 볼 때에 ‘저렇게 창피한 것을 당하며 공부할 것이 무엇 있나, 사람이 학교만 졸업하여야 사람인가.’라고 생각하였으나, 한편에서 ‘요 녀석! 너는 사촌의 덕분에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니까 그런 생각 하지, 돈 있는 너희들만 이 세상에 항상 잘살게.’ 부르짖어 들리었었다. 이러한 모든 기억이 근일의 광필을 괴롭게 하던 중에 오늘에 와서는 더욱 괴롭게 하였다. 광필은 자기는 매약 행상은 참으로 할 수 없다하였다. 그의 자존심이 차마 그것을 허락지 아니하였다. 공부를 그만둘지언정, 그와 같은 하대 능욕은 차마 받을 수 없다 생각하였다. 그의 한편 귀에서는 ‘요 녀석! 너만 귀동자(貴童子)냐! 우리들도 다 우리 집에서는 귀한 사람이야! 그래도 사촌이니 친척이니 믿을 구석이 있으니 그러한 생각이 난다. 그리고 네가 우선은 외상 밥이라도 뱃속에 들어가니까 그러한 자존이니 염치니 하지! 밥을 몇 끼쯤 굶어보아라. 너의 눈에 무엇이 뵈나?’ 질타하는 소리가 울리어 들리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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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러면 무엇을 해……. 노동, 귀향……. 광필은 자기의 힘없는 팔과 다리를 만져보았다. 이 팔다리로 신문을 배달해? 인력거를 끌어? 낮에는 공부, 밤에는 노동, 그리하여서 졸업, 졸업하여서 무엇을……. 이 약한 본질로는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다 하였다. 노동을 시작한 지 며칠 뒤에…… 영양 불량과 심신의 피로로 병상에 드러누워……. 이러한 생각이 머리에 돌 때에 일종의 공포가 광필의 단단한 결심을 약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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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면 어이하노? 집으로 편지나 해보고, 그저 되어가는 대로 하지. 걱정하면 별수 있나?’ 생각하려 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역시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였다.
 
79
광필은 자기의 의지의 박약한 것을 한하였다. 그가 부모에게 동철(銅鐵)같은 강장(强壯)한 신체를 받지 못한 것을 한하였다. ‘강건한 신체를 주지 못하였거든 좀 더 굳센 의지를 주지 못했소? 둘이 다 못 되었거든, 풍부한 유산이라도 주지 않았노?’ 생각하였다. 또 한편 귀에는 ‘이놈! 너의 그런 생각이 다 몹쓸 생각이다. 무엇을 아니 주었는가? 그런 것을 말할 때에도 정직하게 말하여라. 제일 첫 번째 풍부한 재산을 왜 아니 주었는가? 라고 양심을 속이지 말고 정직하게 말하여라.’라고 또 꾸짖는다. 광필은 또 몸이 오싹하고 눈에 눈물이 빙글빙글 돌았다.
 
80
최초의 결심을 스스로 녹이고 사람을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결국에는 다시 사람에게 구걸하고 자심(自心)을 속이고, 그러고도 무슨 희망을 두고 구걸하는 편지를 쓰게 된 자기의 의지박약한 것만을 주저하고 싶었다.
 
81
광필은 하룻밤을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하고 또 반일(半日)은 공상과 우수로 보내었다. 머리는 천 근이나 되는 것같이 무겁고도 아프다. 선하품은 자주 나오면서도 누우면 눈이 감기지 않고 여러 가지 사려에만 마음이 달려간다. 오래 드러누워서 공상하는 중에 잠이 들었다가 문득 눈을 뜰 때에는 창밖에 소낙비 소리가 들리고 그의 몸에는 비지땀이 이슬처럼 맺히었다. 그는 방문을 더 열고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느덧 비가 그치고 개인 푸른 하늘이 이곳저곳 나타나며 솜을 엷게 편 듯한 조각구름은 아침처럼 남에서 살같이 북으로 닿고 있었다. 서늘한 맛이 사면에 나타난다. 광필의 머리가 조금 가볍고 정신이 쇄락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곧 모든 걱정의 구름이 다시 엄습하여왔다. 해가 지도록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82
황혼의 빛이 물결 밀듯이 광필의 방에 먼저 찾아왔었다. 밤빛이 핍박하여 올수록 광필은 전야(前夜)의 지난 괴로움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무슨 형벌을 당할 시간이 가까워오는 듯한 두려움과 걱정스러운 것이 밤기운과 함께 그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83
광필은 저녁밥을 먹은 뒤에 홀로 여관을 나왔다. 하도 갑갑하여 여러 가지의 번뇌를 잊어버릴까 나오기는 나왔으나 물론 어디로 가려는 방향도 정치 않았다. 그는 걸어가는 발에 몸을 맡기어 아래만 굽어보며 ‘어디로 갈까?’ 궁리하며 한참 걸었다. 비가 갠 맑은 하늘에는 불 가루를 헤친 것처럼 별만 반짝거리었다.
 
84
그는 한양공원으로 향하였다. C은행 앞 광장을 바쁜 걸음으로 건너서 공원 들어가는 좁은 길로 향하였다. 가정(街灯)들은 습기에 젖어서 흐릿흐릿하게 깜박거린다. 종일 더위에 시달린 사람들은 큰길이나 좁은 길에 가득하였다. 좌우편 상점에서는 푸르고 흰 광선을 길 가운데로 한없이 토하고 있다. 그 빛 가운데에는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85
공원 입구에 이르렀다. 공원의 조등(照燈)은 소나무 사이로 반짝거려 보이고, 검은 윤곽만 보이는 남산 덩어리에서는 적막한 빛이 소나무 사이로 흘러내리는 듯하다. 배암같이 이리저리 굽은 길을 가쁜 숨을 쉬어가며 올라갔다. 희물그레하게 보이는 한 사람 혹은 두 사람 또는 많은 사람의 떼가 여기저기 움직이었다. 그는 공원 넓은 곳에 올라와서 한양 전시(全市)를 부감(俯瞰)하는 동북편 벤치에 피로한 몸을 던지었다. 만이나 천으로 셀 수 없이 흩어져 있는 전시의 정(灯)불은 모두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또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처럼 깜박깜박한다. 어둠에 잠기인 광필의 마음도 무슨 암시나 받은 것처럼 상쾌한 것도 같고, 침울한 것도 같았다. 거무스름한 북악의 허리에는 희물그레한 저녁 안개가 둘러 있고, 그 밑 경복궁 일대에는 바라볼수록 적요와 침묵이 물굽이 칠 따름이었다. 밤의 한양은 속살거리는 듯 하고, 침묵한 듯도 했다. 레일을 걷는 전차의 궤성(軌聲)도 가끔가끔 고요함을 깨닫게 했다. 광필은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점점 높아가는 감상의 기분을 금할 수 없이 느끼었다. 광명과 암흑이 섞이어 보이는 한양을 손바닥에 굽어보다시피 하는 동안에 광필은 어떠한 초연한 생각을 하였다.
 
86
‘사람들이 저런 데서 오물오물 사는군! 십 수만의 생령(生靈)이 모두 살려고 애를 바득바득 쓰는 것이 참으로 가련해……. 그런데 자기도 수십만 시간 전에 저 풍진(風塵) 속에서 나오지 않았어? 그리고 몇 시간이 못 되면, 아니 곧 지금이라도 다시 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닌가? 무엇이 영측(怜惻)해?’ 할 때에, 광필은 다시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었다. 그 광장으로 두루두루 걸었다. 다정스럽게 속살거리며 천천히 거니는 외국인의 남녀 무리, 팔을 □□내고 굵은 몸뚱이를 힘없이 끌고 다니는 사람, 또는 학생의 떼가 그 광장에 흩어져 있다. 광필은 다시 남으로 발을 옮기어 어두운 빛과 안개에 잠기어 있는 광야를 바라보았다. 다만 무한한 침묵과 적요를 포용한 듯 하였을 뿐이었다.
 
87
다시 벤치를 찾아 앉았다. 그의 머리에는 식가, 빈대, 모기, 옥정, 김 소사 모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움직이었다. ‘누구든지 위대한 사람은 이러한 곤란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슬프고 고독한 데에서 참으로 광명을 볼 수가 있다.’고 귀에 울려올 때에, 그는 ‘무엇 그런 것은 다 많이 먹은 사람이 흔히 하는 소리, 나는 참으로 견딜 수 없는걸요…….’ 대답하였다.
 
88
이런 생각에서 저런 생각으로, 걱정에서 희망으로 희망으로…… 중복하는 동안에, 공원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점점 드물어졌다. 그러나 광필은 내려가려고도 안 했다. 모기와 빈대가 끓는 굴 같은 방……. 그것을 생각할수록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밤은 각일각(刻一刻)으로 깊어갔다. 사람의 발자취가 드물어갈수록 한편으로는 불안과 고독을 느끼었다. 밤이슬은 광필의 몸과 벤치를 축축하게 적신다. 그는 몸에 피로를 더욱 느끼어 벤치 위에 누웠다. 새까만 날에서 반짝하는 불 가루 같은 별들은 광필을 향하여 비 오는 듯이 무수히 떨어지는 듯하다. 무수한 깜박거리는 별들을 비춰 보는 광필의 눈은 벤치 위에서 깜박하였다. 이슬 젖은 몸에는 찬 기운이 각각으로 배어들었다.
 
89
몸은 더욱 무거워간다. 사람의 자취가 끊기고 시가의 밝은 빛도 점점 희미하여질 때에 광필은 무거운 다리를 끌고 여관으로 향하였다. 가로에도 행인이 드물었다. 불안과 비애를 품고 고요한 밤길을 걸으면서 광필은 생각하였다.
 
90
‘그와 같이 아름답고 공원의 자연에 안기어 창공의 성문(星紋)이 찬란한 이불을 덮고 잠자지 못하고 조그마한 움이라도 제각기 만들고 거기에서 오물오물 살아야만 하게 되었노? 그러한 인생은 그래도 큰소리를 하지!’
 
91
그의 귀에는 또 큰 부르짖음이 들렸다.
 
92
‘그 생각이 너의 장래를 정할 것이다. 그것을 진실하게 생각하여라. 그곳에 너의 모든 사명이 있다. 너의 인생을 바라보는 거울이다. 거기에서 생명의 시가 나올 것이다…….’
 
93
광필은 역시 무거운 듯이 가던 길을 다시 밟으며 그 굴 같은 방으로 돌아왔다.
 
94
광필은 한여름 동안을 더운 날이면 한양공원 벤치 위에서 반(半)밤을 흔히 보내었다. ‘밥값도 아니 내고 밥만 먹는다……. 사람들이 염치가 없지…….’ 이러한 김 소사의 구누름 소리가 자주자주 들리었다. 고향에서는 한여름이 거의 가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95
광필은 이대로 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은 일이라 하였다. 믿을 수 없는 사촌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남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라 하였다. 좌우간 공부를 계속한다든지, 그만두고 고향에 가서 괭이자루를 붙잡는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고학이라도 한다든지 작정하려 하였었다. 집에서 오는 소식과 지금까지 내려온 타성이 그대로 김 소사 행랑방에서 눈칫밥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공부를 중도에 폐지하고 그대로 자기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무면목(無面目)하다고 생각하였다. 광필은 자기가 자신의 전도를 개척치 않고 누구를 의뢰하는 것부터 그른 것이라 생각하지만은, 목전에 여하히 하자는 방략도 없었다. “분투, 분투”라고 연해 부르짖지만은, 방 안에 앉아 있는 분투는 그로 하여금 더욱 실망에 떨어지게 할 따름이었다.
 
96
광필은 ‘아! 벌서 추기(秋期) 개학이 임박하였는데!’하고 걱정하였지만은, 다시 이와 같은 형편으로는 계속할 수 없으므로 용기를 내어 모든 일을 작정하였다. 그는 고학뿐이라 하였다. 그러나 같은 고생을 하고 노동을 하려면 손바닥만 한 경성에서 하는 것보다 좀 더 넓고 문화가 열리고, 최고의 학부가 많이 있고, 자기와 같은 운명에 지배받는 사람이 많다는 동경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운명에 맡기어 무엇이든지 되어가는 대로 하자. 백 번 거꾸러지고 만 번 자빠질지라도 노력 분투 밖에 없다.’ 하고 또다시 주먹을 쥐었었다. 경성을 떠나려는 것이 목하의 광필에게는 장래 방책이었다. 그래서 광필은 수일 전에 동경에서 고학하다 온 Y를 찾으려고 학생복이 떨어진 곳을 약간 기워 입고 여관을 나왔다.
 
97
의외의 낮 출입에 주인 김 소사는 놀라며,
 
98
“이게 오늘은 웬일이오?” 묻는다.
 
99
광필은 “네! 좀 다녀오리다!”
 
100
한참 무르녹은 더위는 지나가고 거리거리의 빙수(氷水)의 집의 채색기(彩色旗)도 그렇게 세월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얼굴과 손등에 비치는 햇빛은 따갑기는 따가우나 이슬이 젖은 잎사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맑고 서늘한 맛이 있다. 광필은 육조 앞을 지날 때에는 모래 반사되는 광선에 눈이 부시어서 몇 번이나 정신이 혼미하였다. 월여(月餘)를 들어앉아 있는 동안에 몸이 어떻게 피로한 것을 스스로 슬퍼하였다.
 
101
“아! 박 공 아니시오? 언제 올라오셨소?”
 
102
불의의 심방에 놀란 듯하다. 그리고 유심(有心)하게 광필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103
광필은 Y가 놀라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104
“네! 여름 동안 서울에 있었소이다.”
 
105
“그러면 어찌 한번 뵈올 수가 없었습니까? 학교에 운동도 한 번 하러 안오시고…….
 
106
Y가 자기의 집으로 들어오기를 권함을 따라 광필은 들어갔다.
 
107
Y는 광필의 다니는 학교의 선배였다. 성질이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니다. 모든 것을 희롱 반 진실 반으로 해학과 기담을 일삼아 붕우 간에 그렇게 미움이나 지목받던 사람은 아니었다. 누구든지 호인이라 하였다. 광필이는 자기의 장래의 중대한 일을 상의하려면서 이러한 Y를 찾을 필요가 없겠지마는, 고학하던 경험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것이다.
 
108
광필은 Y에게 동경 고학생 형편을 물었다. Y는 벌써 눈치를 챈 것처럼 빙글빙글 웃으면서 모든 경험과 형편을 말하여준다.
 
109
Y의 말은 이러하였다. 동경에 가서 고학하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란 것이며, 고학하려 한다 하더라도 처음 수삼 개월 지낼 학비는 될 수 있으면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신문 배달, 공장 노동, 그 밖에 여러 가지 직업이 있지만은, 너무 과도한 노동을 하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으므로 자연히 과도한 일을 하게 되고, 그러한 노동에 몸을 쓰고 또 야간에 공부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란 것과 인삼이나 엿장수를 한다하지만은, 다수한 고학생이 다 그것만 하다가는 서로 밥을 얻어먹지 못하게 된다는 것과 지금에 인삼이나 엿장수도 일본 사람에게 모두 신용을 잃어서 잘 팔리지 않다는 것과 혹 어쩌다 운수가 좋아서 회사원이나 또는 월급쟁이가 되어 공부하는 수도 있지만은, 그러한 것은 극히 소수라는 것을 일일이 말하여준다.
 
110
광필은 자기가 혼자 생각하던 때보다도 고학이란 것이 훨씬 더 어려운 것을 알았다. Y의 말을 오할인(五割引)하고 듣더라도 고학이 용이치 않은 것은 사실인 듯 생각하였다.
 
111
“어째든 일본 가서 고학이라도 하려면 일어를 몰라 가지고는 아무것도 아니 됩니다. 가서 밥만 얻어먹으려면 어디서든지 못 먹겠소마는, 밥 얻어먹고 또 영원한 장래를 연(然)해서 공부까지 잘할 수가 과연 어려운 일이지요.”
 
112
Y는 이 말을 여러 번 되짚어 말하였다.
 
113
광필은 Y의 집을 나왔다. 집에 돌아오면서 또 생각하였다. 그러한 말을 아니 듣고 그대로 따라 들어갔더라면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껏 다수(多數)한 고학생 생활이 동경에 있다 하면 그 사람은 다 어떻게 지낼까? 모든 것은 용기를 내어 결단하리라 하고 동경에 가기로 마음에 단단히 결정하고 집에 왔었다. 이러한 뒤에는 광필에게는 장래에 대한 불안과 또는 좋은 결과를 꿈꾸는 동경은 있을지언정, 우려와 번뇌는 확실히 적은 것을 느끼었다.
 
114
광필은 이것만으로도 구함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리고 신경은 더욱 흥분하여졌었다. 그의 가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동경의 고학생 생활이 그 가슴의 전부였었다. 서편 하늘이 천색(茜色)으로 물들을 때에, 그는 나뭇가지에서 숨어 나오는 매미 소리를 듣고 또다시 주먹을 쥐고 ‘나는 간다, 동경으로.’ 부르짖었다.
 
115
광필은 모든 것이 정리되는 대로 하루라도 속히 서울을 떠나려 하였으나, 동경에 갈 여비는 고(姑)하고 자기 시골에 갈 여비도 구할 길이 없었다. 모든 것이 그림의 떡에 지나지 못하였다. 여러 가지로 위선(爲先) 집에 돌아 갈 여비라도 구처할 방략을 생각하였으나, 아무 도리가 없었다.
 
116
구월 개학의 날이 남은 것도 불과 이 일이었을 때에, 남대문 역에서 떠나는 동경 유학생 S를 작별하러 갔었다. 지금토록 자기의 선배인 S의 금전이나 물질에 대한 관계는 한 번도 없었으나, 금일의 광필은 절박한 형편이 시골까지의 여비로 S에게 사정말을 하고 꾸어볼까 하는 생각을 나게 하였다. 그러한 물질로 세 곱 흐려지는 말을 S에게 하게 됨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리고 S는 그렇게 넉넉지 못한 것을 광필은 잘 알음으로, 부득이 거절할 때에 S와 자기의 얼굴빛이 어떻게 될 것을 생각할 때에, 그는 주저치 않을 수 없었다. 광필이가 정거장에 당도할 때에는 발차하기 전 반시간이었다. 시간이 넉넉함으로 대합실에서 잠깐 쉬었다. 그러나 S가 아직 아니 보이므로 광필은 정거장 안으로 눈을 두루 주어 S를 찾았다. 개찰구 가까이 맥고모자를 쓴 동경 학생인 듯한 사오 인이 무엇이라 지껄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앞으로 두루두루 거닐며 무슨 생각에 깊은 S도 보였다. 광필은 바쁜 걸음으로 가서 S의 어깨를 가벼이 흔들었다. S는 놀란 듯이 언제와 같은 웃는 얼굴로 흘긋 돌아보며,
 
117
“아! 박 공이시오? 그런데 웬일이오?” 한다.
 
118
“네! 작별차로 왔소이다.”
 
119
“고맙습니다. 박 공은 명년이 졸업이시지오? 졸업하거든 건너오시구려!”
 
120
이와 같이 두어 마디 회화하는 동안에도 고향 가는 데의 노비(路費)를 꿀 것이 광필의 머리에 떠나지 않았다. 가뿐해 보이는 여행구(旅行具)를 앞에 늘어놓고 무엇이라 일어 섞은 말로 중얼대고 있는 유학생들에게로 광필의 시선은 늘 갔었다.
 
121
발차 시간이 점점 가까워진다. 시간이 갈수록 어떠한 기회를 떨쳐버리는 듯한 두려움이 났었다. 광필은 오던 길에 말해볼까 한 자기의 형편과 방침을 말하려 하면서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몇 번이나 주저하다가 ‘쉬 만나보게 될는지 알 수 없다.’라고 전제를 삼아 자기의 형편과 또는 동경에 가서 고학이라도 할 것을 얼굴을 붉혀가며 말하였다. 그리고 집에 가야할 터인데, 여비가 없으니 오 원만 꾸어주면 집에 가서 곧 부치겠다 말한 뒤에 광필은 머리가 절로 수그러졌다.
 
122
S는 참으로 딱한 일이 생겼다는 것처럼 발끝으로 땅을 그으며 잠깐 아무 말도 없다가,
 
123
“박 공이 어련히 생각하실 리가 없지마는, 고학이란 것은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내년이 졸업이 아닌가요? 더 잘 생각하여보시오. 본국에서 중학도 못 마치고 오면 입학에도 더욱 곤란합니다.”
 
124
주저주저 말한다.
 
125
광필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섰었다.
 
126
“그러한 형편이면 좀 일찍 말씀하여주셨으면 한걸요. 댁에 가실 노비야 어떻게든지 할 것인데……. 지금 저에게는 가진 것이 없으니 내가 K에게 부탁하리다.”하고 S는 K를 보러 간다.
 
127
광필은 미리 생각하였던 사실이 그대로 실현된 것처럼 다시 S를 쳐다보기에도 얼굴이 화끈화끈하였다. K와 S가 함께 광필에게로 왔었다. 광필은 왜 이러한 말을 하였나 하고 후회하였다. K는 S의 부탁대로,
 
128
“박 공! 석양에 저의 집으로 오십시오.”
 
129
하고 다른 곳으로 곧 갔다.
 
130
“박 공! 약한 몸에 어떻게 고학을 하세요? 집에 가서 잘 의논하여보시구려! 그리고 명년에 졸업하고 오시구려!”
 
131
S는 Y가 말한 말과 같은 말을 간단히 한다.
 
132
“더 잘 생각하여 보시오.”
 
133
하는 말이 귀에 울리어 온다. 여러 달 동안 고생하는 중에서 결정한 것을 S가 일언하에 불가라고 하는 데에 조금 불만을 품었다. 자기의 생각이 등하(等下)의 권위가 없다고 생각할 때에 문득 불유쾌하였다.
 
134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는 동안에 발차 시간이 되었다. 개찰구 앞에 벌린 행렬은 하나둘씩 보곽(步廓)으로 향하여 몰려 들어갔다.
 
135
광필도 행렬 속에 싸여 들어갔다.
 
136
광필은 S를 보내고 오는 길에 여러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리에 가득하였다. S를 보내러 온 여러 벗들의 아주 작별을 아끼는 듯이 악수하고 건강을 비는 것이며, 서서히 움직이는 차창으로 내어다보며 꾸벅거리는 얼굴에 어떠한 승리자인 듯한 빛이 감출 수 없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눈에 수건을 대던 두 여학생이며, 모든 것이 광필에게 감상의 기분을 일으키게 하였다.
 
137
역경에 있을 때에는 모든 일이 하나라도 여의치 못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신이 진심으로 존경하고 믿어오던 자기보다는 경험도 많고 또 선배인 S의 말에는 얼마만큼 용기가 저상(俎喪)되는 듯하였다. 좀 더 생각해볼까 하는 마음도 생겼다. 그러나 한번 결정한 것을 그만한 말에 그만둘 수 있나 기어이 간다 하였다. 저
 
138
또 걱정되는 것은 김 소사의 밥값이다. 간 뒤에라도 밥값 떼어먹고 도망하였다는 말은 차마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한 광필은 정거장에서 들어오던 김 소사에게로 갔었다. 몇 번이나 주저하다가,
 
139
“주인마님! 내가 시골에 내려가야 하겠소. 이렇게 오래 식가도 못 내니 집에 가서 어떻게 주선해서 부쳐드리리다.” 말하였다.
 
140
김 소사는 무슨 볼모 잡은 물품을 그저 아니 내놓으려 하듯이,
 
141
“그게 되는 말이오? 몇 달이나 거저 있다가 집에 가서 부친다니 말이 되오? 사람은 뒤 보러 갈 때와 뒤 본 뒤가 다르다오. 지금 있으면서도 아니되는데 집에 내려가보오.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지요.”
 
142
성을 버럭 낸다.
 
143
광필은 다시 할 말도 없었다.
 
144
“이렇게 있으면 어떻게 되나요?”
 
145
두어 마디 문답하는 동안에 밖에서 옥정이가 들어왔다. 광필은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그 뒤에는 다시 말을 어찌 못하고 우두커니 마루에 걸터앉았다.
 
146
옥정은 자기 어머니와 광필의 이야기가 자기로 말미암아 중단된 것을 미안히 여기는 것처럼 가벼이 머리를 수그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옥정의 귀가 창 밑에 기울이고 있는 듯하여 광필은 다시 말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자기 굴 같은 방으로 돌아왔다. 몸이 더욱 무겁고 머리가 아픔을 깨달았다. 그는 자려고 누웠었다. 몸이 떨려서 여름 동안 넣어두었던 이불을 내어 덮었다. 익일에 봉서 한 장과 엽서 한 장이 왔다. 봉서는 자기 사촌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동안에 집안이 수리 중으로 지냈다는 것과 구월 중에는 상경할 터이니 모든 것은 그때 말하자는 것이다. 엽서는 S가 차 중에서 보낸 것이었다. 자세한 말은 시간이 없어서 듣지 못한 것이 유감이라 하였고, 한편에는 얼마 남지 아니한 학업도 마치지 못할 것이 무엇보다 유감인 것과 또는 지금까지의 고학한다는 여러 분의 전감(前鑑)을 두려워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롱하듯이 형은 침의(沈毅)하시고 지모(知謀)가 있으니까 나의 간섭이나 충고 같은 말을 웃으실 줄로 아나이다. 아우 전도(前途)도 많이 인도하여주십시오. 끝의 수절(數節)은 S 일류의 풍자라고 문득 불쾌하였다.
 
147
광필의 머리는 아침이 되어도 여전히 아팠다. 몸을 일으키기에도 눈이 빙빙 내어 둘리어 현훈(眩暈)을 느끼었다. 그는 누워서 다시 생각하였다. S의 전감이란 데에는 적이 걱정되었다.
 
148
‘졸업. 사촌이 미구(未久)에 상경. 동경의 고생. 질병.’ 이런 것이 머리의 전부였다. 그래서 광필은 ‘좀 더 기다릴까.’가 ‘나는 간다, 동경으로.’ 결심을 굳게 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149
『흙의 세례』, 1926년 11월
【원문】어린이의 예어(囈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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