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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춘류(迎春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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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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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류(迎春柳)
 
2
치리코프
 
 
3
아아 어떻게 향기롭게도 봄 아츰 일찍이 개나리(迎春柳[영춘류])가 웃겠지요! 해는 아직 맑고 서늘한 밤 기운을 사루지도 않았고 밤의 꽃과 풀에서 이슬을 녹이지도 않았을 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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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어느 식전꼭두이었습니다. 나는 어여쁘고 다정한 소녀와 함께 교외를 산보하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쾌활한 새들 모양으로 우리들은 조그마한 배(舟)에서 뛰어 오르자 둘씩 둘씩 나누어 제 각기 고운 이를 데려다 주려고 길 어귀에서 서로 헤어졌습니다.
 
5
해가 막 오른 때이라 그 황금 같은 빛줄(光線)은 교당(敎堂)의 둥근 지붕과 십자가와 높은 집들의 창 위에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습니다. 길거리는 오히려 적적(寂寂)히 서늘하여 집집의 창들은 말끔 창 휘장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 창 아래 있는 이들은 모두 오히려 깊은 잠에 잦아지고 있었습니다.…….
 
6
그윽하게 못(釘[정]) 박은 한 높은 담 안에서 이슬 젖은 옅은 자줏빛 한 송이와 흰 그것이 오지조지 발린 개나리 몇 가지가 무겁다 하는 듯이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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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이상하게도 봄 아츰 일찍이 개나리가 웃고 있겠지요! 당신이 갓 스물이 채 될락 말락 하고 어여쁘고 다정한 소녀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눈과 눈이 마주치는 족족 웃음과 웃음이 마주치는 족족 기쁘게 몸을 떨 그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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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저 개나리 꽃 한 가지 꺾어 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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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담은 미끌하게 높고 게다가 그 위의 가에는 삐죽삐죽 못조차 박혔습니다. 꽃 많이 핀 개나리 가지를 지팽이로 걸어 꺾으려든 것은 헛애에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개나리는 우리들에게 향기로운 이슬을 빗발 모양으로 쏟아 나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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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라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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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것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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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으응으, 보랏빛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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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정하고 어여쁜 소녀를 위하여 개나리를 훔치려 내 몸을 희생하여 담 위에 기어 올랐습니다. 나의 팔은 녹슬은 못에 긁히었습니다. 마는 나는 그런 줄도 몰랐으나 조금도 쓰라리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나의 머리는 향기가 너무 강한 때문에 저절로 돌려 옆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기쁜 듯이 해죽 웃고 있었습니다. 나는 소녀에게 아츰 이슬을 향기로운 비처럼 나려뿌렸습니다.……나는 그를 위하여 꽃이 핀 개나리란 개나리는 모다 흰 것이든지 보라(紫)의 것이든지 꺾으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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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만 꺾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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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용사 모양으로 담 위에서 펄쩍 뛰어 나리었습니다. 즐겁고 유쾌한 사랑을 머금은 눈은 말없는 감사로써 나를 향하여 번쩍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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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당신께……저어……기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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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만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 살짝 붉어진 얼골을 개나리 속에 숨기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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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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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츰 산보의 한 기념이에요……개나리의……그리고 또 그것이 어떻게 식전꼭두부터 이상하게도 웃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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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소녀는 나의 얼골에 그 젖은 개나리 꽃 뭉치를 다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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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손을 어쨌어요? 피가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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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처음으로 나는 내 팔목에 피가 감추인 상처가 있음을 보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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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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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이 역시 기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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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나에게 조고마한 명주 수건을 내어 주었습니다. 나는 그것으로 손목을 동여매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랑하는 여자의 명예를 위한 싸움에 부상한 용사처럼 발길을 옮겼습니다. 우리가 걸음을 멈추고 작별할 때 소녀는 그 수건을 도로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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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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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것은 내가 가질 테야……기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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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었습니다. 양보하였지요! 그 수건은 벌써 나의 피로 새빨갛게 물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29
아아 그러나 인생이란 너절한 산문은……그것은 언제든지 우리의 생활을 간섭하여 우리가 저 까만 벽락(碧落)의 푸르고 높은 곳에 날아오르려고 몸차림을 하자마자 꼭 그 순간에 우리의 나래를 꺾고 마는 것입니다.
 
30
나는 눈에 마음의 누그러짐과 행복의 빛을 띠우면서 부들부들 떠는 가늘은 소녀의 손을 쥐고 갔었습니다. 그리고 다못 몇 초라도 떠남을 끄을고 싶어서 놓지 않았습니다. 나는 뺨에 홍조(紅潮)가 밀린 반(半)만개 개나리의 뭉치에 가리어 소녀의 얼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습니다. 그리고 어째 취한 듯 싶었습니다. 그것은 개나리의 향기 때문인지 또는 소녀의 밝은 뺨과 두런두런한 눈찌 때문인지 그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너무 많이 잔 잠에 달린 듯한 문지기가 비(箒)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머리 뒤를 긁적긁적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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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 도련님, 바지가 찢어졌군……꿰매야 되겠는걸……그것은 안된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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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소녀는 쥐어있던 손을 빼쳐 소리높이 웃으면서 동산 저편으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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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달아나고 말았다. 웬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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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아범, 지금 무에라고 하였는가? 미치지나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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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기는 자세자세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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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에 긁혔나 봐!……안된 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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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옷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수치와 능욕 때문에 얼골에서 불이 펄쩍 나는 듯하였습니다. 참말 나의 흰 개나리꽃에 누가 춤이나 밭은 듯하였습니다. 나는 가만가만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츰 기도종이 울었습니다. 오히려 드물기는 하지만 길마차가 포석(鋪石) 깔린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진세(塵世)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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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그 이른 봄 아츰이 잊히지 않습니다……못 박이 한 담과 척 드리운 개나리의 무성한 가지와 향기로운 이슬의 폭포와 보라빛과 햇빛이 개나리 꽃 안에서 내다보고 있던 소녀의 어여쁜 얼골이 잊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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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지금도 오히려 나의 귀에는 환상과 봄 아츰의 향기를 쫓은 그 사나운 문지기의 소리가 들립니다.
 
40
아아, 어떻게 이상하게도 아츰 일찍이 개나리가 웃었겠지요. 해는 아직 개나리로부터 이슬을 흡수치 않았을 때에 그리도 당신의 나이 스물밖에 더 안되고 당신과 나란히 다정하고 어여쁜 소녀가 서있던 그때에…….
 
 
41
(『백조』, 1922.1.)
【원문】영춘류(迎春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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