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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해에 마지막 쓰는 결산 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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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2.27, 18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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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에 마지막 쓰는 결산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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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어찌 하다가 그만 무인년의 최후의 학예면에 글 쓸 기회가 왔다. 이렇게 첫 허두를 시작하고 보면 ‘결산 논문’이란 제목을 혹시 ‘최후의 논문’이란 의미로 볼 분이 있을는지 모르나, 실상인즉 그렇지 아니하다. 12월로 접어들면서 신문이나 잡지가 나에게 보여 준 1년간 총평, 다시 말하면 무인년의 결산 보고 논문에서 내가 느낀 건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자는 게 이 문장의 의도이었다. ‘결산 논문’에 대하여 느낀 바가 있다고 한대도, ‘결산 논문에 이의 있다’ 하는 등류로 문제를 크게 제출해 보자는 것도 아니고 혹은 그 많은 각 문화계 총평에 대해서 이러니 저러니 시비를 붙여보자는 것도 물론 아니다. 범위를 좁혀서 문단, 그 중에서도 내가 꼭 하고 싶은 한두 가지를 들어서 이야기를 늘어놓아 보려는 데 불과하다. 사실 문화계의 각 방면의 총평 중에서 문단 이외의 다른 부문에는 나의 소감에 의하면 아직 비평이나 논평이나의 성격, 나가서는 비평의 정신이라는 게 서있지 아니한 것 같았다. 더구나 음악계나 미술계 같은 데는 총평 정신을 발휘치 않는 것이 어쩌면 ‘일종의 미덕’인 것처럼도 되어 있는 것 같아서 비평으로 본다면 문단 같은 데 비해서 말할 수 없이 초보적인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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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찌 되었든 우리 문단의 이야기로 머리를 돌려본다면 가령 이러한 것이 이야기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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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평론의 공죄에 대한 문제 같은 것. 다시 부연해서 말하자면 1년간 평론이라고 수다한 양의 것이 소산되었는데 그건 부질없는 평론가들의 잡소리뿐이었지, 아무데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들이었다는, 이러한 논평이 있었다. 심지어는 어떤 잡지의 좌담회에서 신인이란 분들이 모여 앉아 하는 말에, 비평가는 작자를 지도할 수 없다느니, 월평은 폐지해야 한다느니, 나는 이런 생각으로 썼는데 아우러한 모모 비평가는 그걸 거꾸로 봤다느니, 어쨌건 평론이나 비평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고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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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행히도 필자는 평론도 썼고, 비평도 썼고, 또 소설도 썼다. 나의 평론을 아니꼽게 보는 이는 나를 신진 소설가라 부르고 나의 소설을 하찮게 보는 이는 마치 성악 전문하는 이에게 당신은 피아노가 월등 낫다는 격으로 슬쩍 뒷데석을 둘러보려는 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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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사람의 작가의 입장에서 명언해 두거니와 평론이나 비평이 소용없다고 떠드는 것은 공연한 수작들이다. 솔직하게 고백하여 나는 평론가나 비평가의 말을 가장 경청하여 오는 작가이며, 또한 이것 없이는 우리 문학의 전진은 불가능하리라고 믿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장편 소설 논의를 시비하는 총평가(總評家)의 한 분이 공연한 탁상공론의 되풀이라는 말을 한 것을 보았는데 이는 작가의 입장도 또는 장편 소설 자체의 처지에 관해서도 깊이 생각을 갖지 않았다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증거밖에 되지 않는 말이라 생각한다. 금년의 화제가 되었던 것으로서 작가가 경홀(輕忽)히 지나쳐야 할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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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장편 소설 논의 같은 것은 작가가 혼신의 태도를 가지고 이야기에 참여하여야 할 것이었고 또 참여할 만한 준비나 용의가 없는 이는 그것을 제 자신의 문제로서 경청해야 할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우인 작가들은 한 분도 이 논의를 무시하거나 무관심했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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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야는 스스로 참여했다. 이 밖에 채만식 군이나, 박태원 군이나, 안회남, 이무영, 이효석, 유진오, 이기영 어느 한 분이라도 나는 그것에 무관심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모두 제 문제처럼 생각했고 또 이 논의에서 각각 적지 않은 암시를 받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대체 우리 순문학의 앞에 도도한 세력을 갖고 밀려들어오는 통속 인조견 문학을 앞에 놓고, 장편 소설의 앞날을 생각지 아니하는 어떠한 작가가 우리 조선에 있단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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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작가들의 명예와 긍지를 위하여 그것을 단언할 만한 신뢰를 갖고 있다. 방관자는 모를 일이다. 제3자는 더욱 알기 어려울 문제일 것이다. 나는 기량 있는 결산서의 회계인이 독주가 끝나기 전에 박수를 하거나 매언(罵言)을 던지는 그러한 음악회 ‘만연’한 관람객이 되는 것을 민망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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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8년 1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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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현재의 우리 평론가의 글은 모두 딱딱하고 난삽하고 맛이 없고 공연한 과학적 술어만이 많아서 하나도 읽을 생각이 없다는 말을 하는 교양인(?)이 이즈음 대단히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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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취미를 아직도 놓지 못한 분들의 말로서 개의할 건덕지도 되지 않는 시비거리고 작문 채점과 주필 첨삭의 작문 선생 기질을 벗어나지 못한 분들의 교실적 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내버려두면 그만이겠으나. 이것이 그대로 한 고비를 넘어서 평론의 가운데 시 정신을 넣으라든가 평론을 좀더 에세이식으로 가미하라는 권고에 이르면 아닌게 아니라 제법 이야기거리가 될 수가 있다. 그 분들이 가령 상트 뵈브나 아나톨 프랑스 등의 태서의 거물을 척척 입에 올려서 예증을 삼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인데, 그러한 분들이 실제로 실험해 놓은 일(을) 보면 희극이 아니면 비극이었다. 잡담이나 만담, 그렇지 않으면 미문조의 예찬문이거나 찬송가라는 게 고작이다. 조선의 비평이 유치하고 문자의 세례를 덜 받은 것은 사실이겠으나 잡담이나 예찬문이나 레토릭의 경지를 졸업한 지는 이미 오래다. 이 즈음 춘원의 「사랑」 평이 대단 흔하게 횡행하는데 잡담이나 예찬문을 떠난 것은 김동인 씨의 평문 뿐이었다. 꿇어 엎대어 삼배하고 예찬문을 봉정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겠으나 그것이 비평이 아니라는 것은 명언해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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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비평은 가치의 판단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변별의 능력을 갖지 않은 이는 그러므로 비평의 자격이 없는 이다. 비평은 미문이나 찬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을 가릴 줄 아는 양식, 다시 말하면 지성의 소유에서 비로소 첫 걸음을 내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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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에 과학성과 유리된 비평의 시화(詩化)는 사실에 있어서는 논리성의 포기다. 과학의 문학에의 침투는 가능하고 필요하지만, 문학적 표상의 과학에의 침윤은 잘못하면 과학의 속화나 논리적 파악의 애매를 습득함에 그칠 것을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니체, 베르그송, 세스토프, 키에르케고르 등의 일련의 문학주의적 철학자들이 논리적 개념과 범주를 중도에서 파기하고 시적 표상에 몸을 맡겨, 그 곳에 신용할 수 없는 망상의 체계를 건설한 것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학성과 논리성은 실로 현대 비평의 최대의 성격이 아닌가. 현대인의 현대인으로서의 긍지를 버리는 것은 제위의 자유겠으나 비평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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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해 오면, 비평이나 평론가에 대한 불만은 문장이나 어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과학성에 대한 반감일는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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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게 아니라 신인 여러분들의 이야기한 바를 보면 안회남 군의 말마따나 비평이나 월평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제 작품을 칭찬해 주는 평론만이 있어야 한다는 수작이었다. 제 작품에 대하여 호평이나 예찬문을 써 준 이에 대해선 참말 굉장한 존경을 갖는 모양이다. 어찌 그리 기억력이 좋은지 칭찬해 준 사람의 생각은 하나도 잊지들을 않았다. 신인들이거나 누구거나 이해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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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금년 치고 신인만큼 행복된 기회를 많이 가진 이는 드물다. 그럼에 불구하고 그들이 좌담회에서 희망한 것 같은 그러한 저급한 취미나 포부나 기백을 갖고는 문학의 새 길을 개척할 날이 멀었다고 생각했다. 문학의 본질, 문학의 갈 길을 깊게 생각하고 제 작품을 반성해 보려는 생각은 손톱만치도 없고 웬 불만만이 그리도 많고 어이된 자신만이 그리도 많은고. 조선의 평론가나 월평가가 아무리 유치하다고 해도 제위들에게 어떠한 암시나 자각이나 반성의 기회를 줄 만한 평안(評眼)은 갖추고 있다. 이효석 군 말마따나 신인은 제대로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둘 것이지 특히 금년처럼 서둘러 주는 게 화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는 것 같다. 벼가 자라기를 희망하는 나머지에 그놈을 한 치 가량 뽑아 준 우농(愚農)의 이야기가 생각키인다. 친절한 예찬문이 되려 연소한 작가에겐 우농의 행동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비평에 대하여 저주하는 분들은 깊이 명심할 필요가 있다. 며칠이 지나면 새해가 온다. 새해부터는 비평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새로이 배워도 늦지는 않을 줄 안다.(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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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8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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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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