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인간하경(人間夏景) 수제(數題) ◈
카탈로그   본문  
1936.8
채만식
목   차
[숨기기]
1
人間夏景數題[인간하경 수제]
 
 
 

(1) 막걸리와 농군(農軍)

 
3
낯때를 넌지시 겨운 해가 한창 드세게 내려쪼인다. 둘레 높은 하늘에는 구름도 한 조각 엷게 걸쳐 있지 않다.
 
4
바람은 한점 지나가지 아니한다.
 
5
콩밭의 콩잎들이 밭두덕의 풀잎들이 사정없이 내려쪼이는 불볕에 숨이 죽은 듯 꼼트락거리지도 아니한다.
 
6
그렇지만 논의 나락은 싱싱하다. 암모니아를 주었는지 두엄(堆肥)을 내었었던지 거름을 흠뻑 빨아올린 나락잎은 푸르다 못해 시커멓다.
 
7
모포기는 제가끔 탐스럽게 새끼를 쳐가지고 세차게 자라올랐다. 제가끔 자랐으면서 그러나 약속이나 한 듯이 키 가조롱하다.
 
8
이 둘레는 가뭄이 무엇이냐 수해가 무엇이냐……다.
 
9
들 가운데는 늙은 정자나무가 한 주. 푸른 잎이 무성하여 가위로 가꾼 듯이 동그랗다.
 
10
정자나무 밑에는 짙은 그늘…… 그늘에는 허리 굽은 노인이 하나. 노인은 어린아이와 같이 회상에 잠겨 있고 고목은 거인과 같이 묵상(黙想)에 잠겨 있다.
 
11
쓰르라미가 한 마리 졸립게 울다가 만다. 정자나무 옆논에서 농군이 세 사람 묵묵히 김을 매어 이리로 오고 있다.
 
 
12
가래날보다 넓은 호미로 차진 개흙을 세모지게 듬쑥 긁어서 먼저의 호미 자리에 엎어놓고는 이어 그 담치를 또 긁는다. 쩍쩍하는 흙소리 벌컥거리는 물소리 끙끙하는 농군의 힘소리에 맞추어 농군의 구부린 몸뚱이는 이리저리 율동적으로 움직이며 나아온다.
 
13
김을 매고 지나온 곳에는 나락들이 이리저리 쓸린다. 그러나 괜찮다. 인제 한 사날만 지나면 도로 일어서니까. 소매걷이도 아니한다. 초벌김이 아니고 벌써 세벌김이니까.
 
14
농군들은 가끔 허리를 펴고 일어서서 허리도 쉬고 땀도 씻는다.
 
15
땀은 얼굴에서 목덜이에서 앞가슴에서 등에서 비오듯이 쏟아진다. 삼베적삼은 앞자락을 마주잡아 비끄러매었다.
 
16
얼굴도 목덜미도 앞가슴도 등어리도 모두 햇볕에 그을어 에디오피아 사람 같이 시커멓다.
 
17
세코잠뱅이에는 걷어올릴 것도 없다. 당초에 무릎에도 닿지 아니하니까.
 
18
햇볕은 불같이 내려쪼인다. 농군들의 땀에 밴 등어리는 묵묵히 이리로 움직이며 온다. ── 에널기쉬하게 ──
 
19
멀리서 풍장(農樂) 소리가 감감히 들린다. 어딘지 두레를 대어 김을 매는가 보다.
 
20
쓰르라미가 또 한번 울다가 만다. 졸리운 소리다. 그놈 게으름뱅이다. 노래를 할 테거든 어여루상사뒤여나 한바탕 하지는 않고.
 
 
21
샌님이 동리에서 이리로 오고 있다. 한손에는 술병. 술병이라도 유리병은 아니다. 새끼로 목을 얽어맨 질(陶[도])것이다.
 
22
또 한손에는 상사발. 사발 속에는 불그스름한 보리고추장. 그리고 풋마늘이 댓 포기쯤.
 
23
“샌님 올에 농사는 장원허섰수.”
 
24
졸던 노인이 샌님한테 인사 겸 치하하는 말이다.
 
25
“글쎄…… 위선 보매는 그렇지만.”
 
26
샌님은 이렇게 겸사 아닌 겸사를 한다.
 
27
“수고들 허네. 와서 목이나 좀 축이지.”
 
28
샌님이 논으로 대고 하는 소리다. 농군은 대답이 없다. 대답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요, 말한 사람도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29
샌님이 ‘목 축일 것’ 을 내려놓고 얼마 아니 기다려서 김매던 농군 세사람은 이편 언덕 밑까지 다다랐다.
 
30
“피가 많지 ?”
 
31
이렇게 샌님이 묻는 말을 받아가지고 맨먼저 정자나무 그늘로 올라오는 농군이 대답을 한다.
 
32
“그대두룩잖언디유.”
 
33
“샌님 올해 농사는 장원이유.”
 
34
둘쨋번에 나오는 농군이 하는 소리.
 
35
“이크 이놈 봐라.”
 
36
세쨋번의 농군이 논바닥에서 허리를 펴면서 한 손에는 꿈틀거리는‘응지’를 움겨쥐었다.
 
37
이놈을 그대로 가지고 올라와서 마른 흙바닥에 내동댕이를 치니까 바르륵 떨다가 흙고물을 덮어쓰고 뻐드러진다. 이놈이 이렇게 학살을 당하는 이유는 논두덕에 구멍을 뚫어 물이 새게 한 죄에 있다.
 
38
땀으로 멱을 감고 흙으로 맥질을 한 세 사람 농군이‘샌님과’과 한가지로 술병을 둘러싸고 앉는다.
 
39
“김첨지 이리 오시우.”
 
40
이만 것도 음식판인지라 농군 하나가 노인을 청하는 것이다.
 
41
“나야 어디…… 어서들 먹게.”
 
42
“이리 와서 한잔 허지.”
 
43
‘샌님’ 도 권한다 그래서 다섯이 소연을 베풀게 된다.
 
44
샌님이 한 사발 넘싯넘싯 부은 놈을 그중 나이 많은 농군한테 권한다.
 
45
“아 샌님 먼저 하지……”
 
46
“아니 나는……”
 
47
농군은 더 사양하지 아니하고 술사발을 받아 그놈 뻑뻑한 놈을 벌컥 벌컥벌컥 들이켠다. 모든 피로와 더위가 사발의 막걸리 사라지듯 사라지는 것이다.
 
48
마지막 한 모금까지 들이켜고는 손등으로 막걸리가 묻은 입을 수염 아울러 쓱 씻고 그러고 마늘을 집어 고추장에 꾹 찍어서 썩둑 베어 워석 워석 씹는다.
 
49
그 담 사람이 또 그렇게 한 사발 들이켠다. 그리고 또 그 담 사람도.
 
50
네쨋번에 샌님이 반 사발. 노인 김첨지가 반 사발.
 
51
그러고 나서 술병을 흔들어 보아가지고 세 사람 농군이 반 사발씩 꼭 맞게 나누어 마셨다.
 
52
“시방 매던 닷 마지기 스무 섬은 나겠읍디다.”
 
53
농군 하나가 곰방대에 통이 미어지라고 담배를 재우면서 하는 말이다.
 
54
“스무 섬 먹어야겠네야.”
 
55
샌님이 하는 말이다. 그는 다음 말을 더 덧붙인다.
 
56
“그 논이 도조가 얼만 줄 아는가 ? 열 섬이여, 열 섬 !”
 
57
“요새 도지로 열 섬이 되레 헐헌 심이지요. 그 논이 어떤 논이라구…… 상답 중에두 상답인디.”
 
58
노인 김첨지가 한마디 거드는 말이다.
 
59
“헐허구 무엇이구 간에 농사지어먹을 수 없어 ! 지주헌테 도조 물어야지 거름 사 넣어야지……고지 주어야지. 그 밖에 농사짓느라구 자작소롬한 것까지 다 치면 간장값 밑진단 말이 옳아.“
 
60
샌님이 하는 말이다. 남쪽 산간부락에 흔히 있는‘조그마한 농업기업가’인 것이다.
 
61
샌님이 빈병인 것을 가지고 돌아가자 그새 담배 한 대씩을 다 태운세 사람 농군은 그대로 드러누워 어느 겨를에 잠이 들었다.
 
62
코고는 소리도 들린다. 쇠파리가 날아와서 침을 주어도 모른다. 그러나 시계는 없어도 30분만 자면 제절로 깰 판이다.
 
63
햇볕은 여전히 불같이 내려쪼인다. 정자나무는 거인처럼 묵상을 하고 노인은 물러앉아 어린애처럼 회상에 잠겨 있다.
 
64
바람도 한 점 지나가지 아니한다. 쓰르라미가 또 졸립게 울다가 만다.
 
65
그러나 이것은 결코 목가가 우러나는 듯한 전원의 한아(閑雅)한 인간하경(人間夏景)은 아니다. 그놈이 정말로 아름답고 즐겁자면 그 논은 그 농군들의 것이라야 (적어도) 한다.
 
 
 

(2) 원두막의 한인(閑人)패

 
67
일을 하자니 도대체 할 일이 없다.
 
68
농사일 ? 글쎄 손이 하얀‘서방님’네가 더구나 도회지에서 도태당한 당대의 인텔리들이라 농사일과는 무릇 인연이 멀다. 외국산인 것이다.
 
69
해가 질증이 나게 길다. 붉은 연필로 언더라인을 죽죽 친 묵을 책을 보다가 낮잠을 자다가 해도 해는 남아 있다.
 
70
산정사태고 일장여소년(山靜似太古日長如少年)
 
71
이놈 여소년(如少年)을 여실직(如失職)이라고 고쳐놓아야 할 판이다.
 
72
그러다저러다 바라보면 앞산 밑에 그늘이 진다. 옳다. 인제는 참외도 식었겠지.
 
73
같은 패가 둘이 혹은 셋이 작당을 해서 나선다.
 
74
풀대님에 동저고리 바람으로 머리에 밀짚벙거지쯤 덮으면 상이요 그렇잖으면 맨대가리에 뱀에 대한 호신무기로 도회지 시절의 유물 단장을 손에 든다.
 
75
개구리가 놀라 뛰고 휴업중의 소가 누워 있는 들판을 건너 원두막 가까이 가면 위선 물큰한 참외내에 구미가 동한다.
 
76
아래층 없는 이층집 이것은 원두막.
 
77
척척 올라앉아 참외를 청할라치면
 
78
“익은 것이 없을걸……”
 
79
으례껀 이 말 한마디는 원두첨지마다 슬로건처럼 외운다. 그러면서 구럭을 어깨에 메고 내려가 원두밭으로 들어간다.
 
80
구부리고는 만져보다가 도로 놓는다. 원두첨지란 원두밭의 가래질을 할 때부터 눈이 익은 주인이라 어느만큼에는 어떻게 생긴 놈이 얼마큼 익어 있고 또 어느만큼에는 어떻게 생긴 놈이 얼마큼 익어 있고 하는 것을 빤히 알고 있다.
 
81
그래서 이렇게 굽어다보고 만지고 따고 하는 동안에 여남은 개 구럭속에 들어찬다. 그놈의 제일차로 손님( ? )에게 올려보낸다.
 
82
설익은 놈을 따서 섬에 담아가지고 배로 혹은 차로 시골서 도회지까지 가져오는 동안에 억지로 익은 놈과는 달라 원두막에 앉아 바로 밭에서 따오는 놈을 그 자리에서 먹는 신선한 맛이란 각별하다.
 
83
이렇게 그늘진 산밑 원두막에서 찌는 듯한 폭서를 잊고 향기로운 생과를 먹는 풍경 또한 여름 인간의 한 스냅이 아닐 수도 없는 것이다.
 
 
 

(3) 날맥주

 
85
땀과 먼지와 전염병과 확성기, 전차 등의 소음과 반대로 이런 것들 속에서 콩나물동이 속처럼 빽빽히 들어박혀 허덕거리는 것이 여름의 도회지 사람이다.
 
86
그런 것들을 어찌 일일이 스케치하랴. 그중에서 도회지 ─ 에서도 경성 ─ 사람의 조그마한 흥취 하나만 구경하기로 한다.
 
 
87
요란한 역사를 편찬하기에 지친 하루가 저물고 사람도 목이 컬컬한 판.
 
88
목이 컬컬하니 차나 물을 마셨으면 그만이겠지만 사람은 금붕어가 아니니까. 또 소독하고 하고 열도 공급하기 위해서는 알콜분이 때로는 필요하다.
 
89
(금주 선전가는 이하 읽지 말 일)
 
90
빠아나 카페로 찾아가자니 밤도 아닌데 쑥스러울 뿐 아니라 대체 하루 종일 더위에 부대낀 끝에 이제 양풍(凉風)이 약간 돌고 더위도 넌짓했으니 목을 축이자는 것이니까 그에 알맞은 자리가 좋다.
 
91
비어홀이나 백화점의 식당이 가장 적소다.
 
92
커다란 조키에 그 고운 마노색 액체가 가득 담겨가지고 그 위에 부연 버큼이 흐벅지게 덮인 놈을 하나씩 타고 앉을 때에는 먹기도 전 위선 느긋해지는 만족이 실로 무엇과도 바꾸기 어려운 풍류요 그래서 한개의 스냅거리도 넉넉하다.
 
93
그래 그 놈을 조키째 들고 벌컥벌컥 두어 모금씩 마시면서 콩을 한 알 두 알 씹고 또 마시고……
 
94
맥주의 본도는 한꺼번에 죽 들이켜란 법이지 결코 한 모금 두 모금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조키 그놈을 한꺼번에 들이키기는 아무래도 마음(馬飮)이어야지 유유한 자리에서는 안될 말이다.
 
95
그래 좌우간 이야기하는 동안에 한 조키씩 다 먹었다.
 
96
또 하나 씩 그 담에 또……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거기서 넘어가면 풍경이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된다. 따라서 소풍 겸 산보를 나왔던 것이 갈지(之)자 보(步)가 된다. 그러나 그것도 여름 인간의 스냅은 스냅이니까.
 
 
97
<四海公論[사해공론] 1936년 8월호>
【원문】인간하경(人間夏景) 수제(數題)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수필〕
▪ 분류 : 근/현대 수필
▪ 최근 3개월 조회수 : 18
- 전체 순위 : 2701 위 (3 등급)
- 분류 순위 : 361 위 / 1835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1) 반(盤)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인간하경 수제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 사해공론 [출처]
 
  1936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 참조
  막걸리(-)
 
 
  여름(夏)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수필 카탈로그   본문   한글 
◈ 인간하경(人間夏景) 수제(數題)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3월 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