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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주(咀呪) 받은 샘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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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8
고한승
1
저주(咀呪) 받은 샘물
 
 
2
충충한 삼림의 구석으로부터 가만가만히 거두어 나오는 것 같은 석양의 어두움이 넓은 대지를 차츰차츰 휘여 싸고,벽공에 반짝이는 별은 하나씩 둘씩 늘어갈 때 멀고먼 외국으로부터 걸어온 무사(武土) 한사람이 자세하지 않은 삼림길을 걸어가면서 광채 나는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3
저-건너쪽 나무 사이에 새빨간 불빛이 비쳐 나오는 곳은 확실히 그 무사가 찾는 헤루테(譯者[역자], 서양미신종교의 神[신])의 신사(神社)가 분명하였다.
 
4
제단에 켜놓은 불꽃이 춤추는 곳에 무녀(巫女) 예쓰테가 혼자 앉아서 무심히 불을 들여다보고 있다. 무녀가 입은 흰 의복은 불빛에 반사되어 붉게 빛나며 고요히 생각하고 있는 그의 얼굴은 참으로 대리석(大理石)으로 깎은 여신같이 아름다웠다.
 
5
그는 아직 나이 어린 처녀의 몸으로 헤루테 신(神)에게 몸을 바쳐 과연 신통자재(神通自在)하였다.
 
6
그의 이름은 멀고 먼- 여러 나라에 들려 그에게 점을 치려고 이 하이델벨희의 산림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혹 그중에는 이 예쓰테의 아름다운 자태를 탐하여 오는 청년도 없지 아니하나, 신명에게 몸을 받치는 것 외에 세상의 물욕을 알지 못하는 이 소녀에게 사랑을 쏘삭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침범할 수는 신비(神秘)의 위엄을 갖춘 예쓰테도 하루의 직무를 무사히 마치고 사람 없는 고요한 산림속에 어두움이 쏘여 들어올 때에는 나의 중대한 직무도 잠시 잊어버리고 상쾌한 저녁바람에 금발(金髮)을 나부끼면서 즐거운 노래를 한 곡조 불러보고 싶은 이 세상 보통 처녀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여자일 것이다 예쓰테의 이같이 한가로이 쉬고 있는 모양을 나무 그늘에서 엿보고 있는 저 무사도 역시 멀리서 그의 점을 치러 온 사람의 하나였다.
 
7
꿈꾸는 듯이 아름다운 이 모양을 오랫동안 보고 있던 무사는 드디어 마음을 정하고 처녀의 고요한 마음을 놀랠까 겁내어 극히 부드럽고 고운 소리로
 
8
“아름다운 무녀(巫女)시여 ! 나의 운명을 점쳐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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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리를 들은 예쓰테는 꿈에서 깨인 듯이 얼굴을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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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젊은 무사의 아름답게 타는 듯한 눈자위에 마주칠 때에 처녀의 가슴에는 알 수 없는 파도가 쳤다. 예쓰테는 어지러운 마음을 진정하려고 애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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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오신 무사시여! 당신께서는 마침 나에게 예언(豫言)의 힘이 없어진 뒤에 오셨습니다. 점을 칠 때에는 신명께 제물을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 이맘 때 오시면 당신의 운명을 점쳐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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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그의 소리는 몹시 떨렸다. 참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의 가슴의 파도는 더하여가며 그 가운데로 이상한 기쁨조차 도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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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내일 저녁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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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남기고 마음을 남기면서 무사는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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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쓰테는 시뻘건 불빛을 등지고 사라진 무사의 뒷모양을 언제까지 보고 앉았었다. 돌연히 울려오던 부드럽고도 정 있는 그 소리, 불붙는 광채 나는 그 눈에 그는 정신을 모조리 빼앗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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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점을 쳐주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으로 그 직무를 게을리한 생각을 하면 죄송스럽기도 하지마는, 내일 다시 그 미목청아한 무사를 보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할 때에는 오늘 점을 쳐주지 아니한 것이 큰 은혜같이도 생각된다. 아- 저 예쓰테의 티 없는 마음에는 지금 벌써 아름다운 젊은 무사의 모양밖에는 다른 것이 비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을 스스로 깨닫고 잊으려고 잊으려고 해도 그의 모양은 꿈같이 무지개같이 나타나니 이때부터 예쓰테의 마음의 평화는 영원히 사라지고 두 번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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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저녁때 과연 약속같이 무사는 찾아왔다. 그러나 예쓰테는 또 다시 점칠 수 없다 핑계하고 내일로 미루었다. 무사도 역시 서로 볼 기회가 많아짐을 기뻐함인지 그대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기를 하루 이틀 사흘 되는 날 저녁때 예쓰테는 무사를 보고 곧 고개를 숙이고 쏘삭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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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운명을 점칠 수 없습니다. 저 별이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별과 나의 별이 점점 가끼워지는 듯합니다. 이 말 한 마디를 하고 그는 도화같이 불거진 얼굴을 장간 들어 무사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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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쓰테,그러면 당신은 나를 사랑하여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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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는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면서 말하였다. 대답은 안 하고 반쯤 웃는 예쓰테의 모양은 확실한 허락이 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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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와 같이 우리집으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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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붙잡는 무사의 힘센 손을 뿌리치고 예쓰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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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헤루테의 신에 몸을 바친 무녀는 사람의 아내가 되지 못하는 법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헤루테 신에게 노여움을 사서 벌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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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이 말했다. 그러나 무사는 대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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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쓰테! 나는 그대를 데리고 가서 푸레야 신에게 기도를 드려 헤루테 신의 저주(咀呪)를 풀게 할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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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헤루테의 저주는 그렇게 쉽게 막을 수 없는 것이에요. 그렇지만 다만 뵈옵고 이야기만 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겠지요. 요 고개 넘어가면 맑은 샘물이 흐르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면 사람도 오지 않는 고요한 곳이니 천천히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요. 나는 벌써 마음속으로는 당신의 아내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돌아가지 마시고 있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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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치고 예쓰테는 무사를 이끌어 샘물을 찾아갔다. 샘물은 졸졸졸 두 청춘남녀의 가슴을 씻어주는 것같이 고요히 흘렀다 풀 위에 둘이 앉아 그치지 않는 꿀같이 따스한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내일 저녁때를 약속하고 손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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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이 천추 같은 하루도 지나고 석양이 되었다. 산림을 통해 어둑어둑해 올 때 예쓰테는 연보를 옮겨 샘물을 찾아갔다. 아직 약속한 시간은 되지 않았는데 문득 저편에서 풀을 헤치고 오는 발자국 소리가 사뿐사뿐 들려온다. 예쓰테는 벌써 사랑하는 무사가 찾아오는 힘 있는 발소리 인줄 알고 만면의 기쁨이 빛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29
보라! 그곳에는 잊지 못하고 잊지 못하는 애인이 빙그레 웃고 섰을 줄 알았더니 아- 천만뜻밖에 보기에도 소름끼치는 한 마리 이리(狼)가 등잔 같은 눈을 휘두르며 뾰족한 이빨을 악물고 지금 당장 뛰어 달라붙을 듯이 서있지 아니하랴.
 
30
그는 정신이 아득하고 눈이 캄캄하여‘사람 살려’라고 소리소리 질렀으나 맹폭한 이리는 벌써 아름다운 처녀의 목을 향하여 뛰어들어 물었다.
 
31
마침 이때에 샘물을 향하여 걸음을 빨리하던 무사는 문득 산림 사이로 들리는 여자의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 전심전력을 다하여 고통을 호소하는 슬픈 부르짖음이야말로 꿈에도 잊지 못하는 예쓰테의 소리로구나 생각할 때에 무사는 공중을 나는 것같이 번개처럼 뛰어갔다.
 
32
보니 나의 사랑하는 처녀는 무참하게도 물어 뜯겨 시뻘건 피에 젖어 이리의 발아래 넘어져 있었다. 분노와 슬픔과 원통함을 참지 못하는 무사는 찾던 바 장검을 빼어 날쌔게 한 칼에 이리를 죽여버렸다. 이렇게 애인의 원수는 갚았지만 아- 애처로운 일이다. 헤루테의 저주는 벌써 다- 이루어서 사랑하는 예쓰테의 따듯한 몸은 차고 푸른 시체로 변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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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부터 이 샘물은‘저주 받은 샘물’이라 이름지여 길이길이 가련한 무녀 예쓰테의 사랑 이야기와 함께 세상에 퍼졌다 한다.
 
 
34
-《개벽》통권 50호, 1924,8.1.
【원문】저주(咀呪) 받은 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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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한승(高漢承) [저자]
 
  개벽(開闢) [출처]
 
  1924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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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동 문학(兒童文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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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3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