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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말엽(李朝 末葉)으론 세도(勢道)에게 잘만 뵈면 세상없는 죄를 지었더라도 쪽지 편지 한 장으로 죽을 것도 사는 수가 많았다. 그래도 100 ∼ 200년 전에는 나라법을 그렇게 마음대로 흑작질은 아니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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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판서 황인검(黃仁儉)은 소년시절 절간에 가서 심부름 하느라니 그 절 가운데 중 하나이 성심껏 심부름을 하되 몇 해 동안에 한결같이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양식이 떨어지면 동냥까지 하여다가 받들었었다. 그때에 양반과 중의 계급이 엄중하였지마는 이 황소년과 그 중은 가위 지기지우로 허물없이 지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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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황소년이 자기집으로 내려간 뒤로는 서로 관심(關心)이 막혔다가 황씨가 현달(顯達)하여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어 열읍(列邑)으로 순행 하는 길에 뜻밖에 그 중을 만나니 여간 기뻐하기를 마지아니 하여 뒷 수레에 태워 데리고 감영으로 와서 밤마다 한 이불에 자면서 전일 정분과 같이 두텁게 굴었으나 감사인 귀인으로 이러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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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 나는 네 의기를 잊을 수 없다. 네가 만일 머리를 길러 환속 하게되 면 비단 살림만 넉넉할 뿐 아니라 너를 발신(發身)시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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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이 본래 속인으로 산골 속에서 새 분상(墳上)에 소복한 미인을 보고음 심이 동하여 강간타가 죽이게 된 뒤로 일상 놀라는 증이 생겨서 그만 중이 되어 진 죄를 속하려고 오늘까지 이르렀은즉 사또의 후의시나 변할 수는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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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감사가 경상감영에 도임한 뒤에 전관시대에 도안에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정범(正犯)을 잡지 못한 지가 수년이나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 살인 사건의 연월일과 중의 말한 날짜와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보통 인정으론 그만한 정분에 물론 덮어두겠는데 사또는 그때 풍기(風氣)인 꿋꿋한 마음으로 중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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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와 정의는 아무리 두터우나 공법(公法)을 폐할 수 없으니 어찌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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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만 법대로 처결하여 원녀(寃女)의 혼을 위로하고 그 중은 후히 장사를 지내주면서 설게 울고 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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