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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계급 전형의 창조와 『고향』주인공에 대한 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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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6. 28~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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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계급 전형의 창조와 『고향』주인공에 대한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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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고향』의 일면적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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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싶은 욕망, 자존심과 자홀(自惚)을 용감하게 박차고, 언어와 양식과 구성하는 방식에서부터 일체의 창작적 실천과 창작 이전에 이르기까지― 통틀어 한 개의 작품 속에서 섭취할 수 있는 모든 영양을 식욕에 찬 야심을 가지고 ‘내 것’을 만들어 보겠다는 연소한 작가의 만용을 가지고 나는 이 비평적인 감상에 붓을 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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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작품을 아무 정당한 이유도 없이 헛되이 과찬하려는 파적(波的) 심리도 또한 아무런 과학적인 연구도 없이 이리저리 건드려 보려는 건방진 기도도 여기에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이 작품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두 개의 태도― 덮어두고 칭찬하는 경향과 묵살 내지는 과소평가로 일관하려는 경향, 이 두개의 태도에 대하여는 끝까지 항의하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논리적 주체 배후에 숨은 인간적 가면을 폭로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적인 열정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여기에 명언(明言)해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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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방법에 관한 논의에서 자기의 명제의 확증을 위하여 읽어보지도 못한 발자크와 위고에서의 전재적(轉載的) 이식에는 급급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품적 재산의 속에는 손끝 하나 대어보지 못하는 진실로 참혹한 비평적 탁목조(啄木鳥)― 이들의 비학구적(非學究的) 태도도 여기에서 통렬하게 배격당해야 할 것이다. 실로 우리들의 의심은 발자크와 괴테와 졸라와 입센의 문학적 평가에서 그렇게 훌륭하였던 것이 어째서 동인, 상섭의 자연주의 문학의 평가, 서해 문학의 사적 가치, 신경향파 문학, 카프문학 혹은 최근의 이민촌(李民村)의 수많은 작품에 대하여는 문학애호자로서의 식견조차도 가지지 못하였는가 하는 데 집주(集注)되어 있는 것이며 이것은 때때로 의심의 한계를 넘어서 비평가의 문학적 식견에 대하여 극도의 경멸까지를 초래케 하고자 만다. 참말로 킬포틴과 유진의 인용에서 시작되어 그의 이식에서 종료되는 이들 탁목조의 사업에 대하여는 그가 막사과(莫斯科)에서 출발하지 말고 조선의 20년 신문학의 역사와 조선의 현실생활에서 시작하라는 경고야말로 가장 적절한 충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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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내가 이민촌의 『고향』의 스크랩을 든 것은 작년 12월 초였다. 원래 비평적 안식이 빈약한 일 소작가로서 어찌 선배의 일대장편에 대하여 비평의 붓을 드는 외람된 생각을 가졌으리오만은 지지(遲遲)한 연구를 거듭하는 중 나의 섭취한 영양을 정돈해 보겠다는 욕망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내 머리 속에서 어느 정도까지의 체계를 형식(形式)하였을 때 나는 『고향』이 한가지 작자의 바로 전작인 「서화」와 밀접한 예술적 논리체계를 가졌음을 발견하고 우선 『만세 전후』의 일 서곡인 「서화」의 재평가에 붓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원고지로 백 매를 훨씬 초과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기타의 이유로 지금의 나로서는 전혀 그의 적당한 발표 기관이 없다는 결과를 가지게 됨에 부득이 나는 방침을 달리하여 『고향』을 일면적이나마 개별적 단편(斷片)으로 비평해 보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방편상 우선 해작(該作)의 주인공 김희준을 가져다 그를 중심하고 감상을 적어보려는 기회를 이곳에서 만들어 보려고 한다. 물론 일면적인 평이 비평의 형식으로서 결코 적당한 최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만일 체계적인 전체성을 망각하지 않고 이 사업에 종사한다면 다른 때와는 다른 특이한 수확을 가져 볼는지도 알 수 없다는 요행을 기다리는 마음도 지금의 나로서는 가지고 싶은 것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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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이 비평적 감상을 될수록 일면적인 것으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또는 미학적인 논리관계를 이해하는 한 개의 도움이라도 되기를 원하여 「서화」평의 목차만을 적어놓고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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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기준의 새로운 설정과 작품 「서화」의 재평가―이기명작 『고향』 비평의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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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제목이고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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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설의 전언(前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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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화」에 대한 왜곡된 제 ‘맑스주의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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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화」를 보기 위한 기미년 전후의 내외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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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대의 거울로서의 「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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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설의 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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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1935.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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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계급의 출신작가가 자전적인 색채가 농후한 작가 자신과 가장 밀접한 육체적 관련을 가지고 있는 성격을 예술적으로 창조하려고 할 때에 작가가 그 주인공을 구체화하는 근본방향을 어느 곳에다 설정하였는가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가장 큰 흥미를 주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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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계급의 한 개의 전형을 적극적인 혹은 원심적인 방향에서 형상화하려고 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 소극적인 그러므로 구심적인 성격에서 묘사하려고 하였는가의 문제는 그것이 전자에 있어서는 작중인물에 대한 익애(溺愛)와 관념적인 이상화에 빠질 위험이 있고, 후자에 임할 대에는 심경적인 자기생활의 형이상학적 추구에 그칠 염려가 있어서인 때문만이 아니라 작자가 인텔리겐챠의 주인공을 적극면(積極面)에서 그리려고 하였는가 혹은 그 반대의 면에서 추구하려고 하였는가의 여하에 의하여 이‘전형적인 성격’을 창조하기 위한 ‘전형적인 정황’의 서술과 그를 싸고도는 전형적인 인물과 그들의 성격이 전연 상이한 두개의 창작방향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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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전자의 길을 취할 때에 그는 넓이에 있어서 보다 광활하여지려고 애쓰고 자기 자신의 국한성을 넘어서 자기 격파의 방향을 취하려는 욕망에 불타기 쉬울 것이요, 작자가 후자를 취할 때에 그는 점점 작아져서 우물 속으로 찾아들어 가고 다시 그 우물 속에서 어디 쥐구멍이나 없나 하고 탐색하는 길을 구하게 되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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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김희준과 그의 창조자를 살펴보면 우선 『고향』의 작자가 전자에 속하는 방향을 취하였다는 것을 손쉽게 알 수 있으나 문제는 이것에 그칠 것이 아니고 우리는 나아가 이것을 여하히 설정하였는가, 그것은 성공하였는가 혹은 실패하였는가, 또 실패하였으면 무엇으로 인하여서인가, 그의 형상적인 진행에 있어서 그의 보조를 혼란케 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 등등을 살펴보는 것이 다음에 오는 흥미의 중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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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곳으로 붓을 넣기 전에 지식계급의 주인공을 창조하는 마당에서 두개의 방향의 어느 것이 우월하냐 혹은 저열하냐를 가리고 싶은 열망을 가질 것이나 우리는 전자 이것이 다분히 건전한 세계관과 관련되었고 후자가 최근의 세스토프적인 희색적인 내지는 내성적인 사상과 연관된 것을 상상할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일률적으로 제재와 주제 선택의 여하에서 곧 작품평가의 일체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으로써도 우리는 그것을 ‘여하’히 설정하고 형상화의 길을 ‘어떻게’진행시켰는가 하는 것에 보다 많은 흥미를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김희준은 적극적인 인테리겐차의 대표적인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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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는 우선 자기의 창조적 대상인 가장 복잡한 농민의 생활의 속에 그리고 모든 역사적 갈등이 파묻혀 있는 풍부한 생활과 일 부락 전체의 풍속사의 속에 적극적인 인테리겐차를 집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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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서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와서 단 5년간에 그렇게 심하게 변하여진 계급적인 이동과 낡은 것의 소멸과 새로운 것의 생성과정을 바라보며 주인공으로 하여금 마치 변증법의 ‘부정의 부정’을 눈앞에 보는 듯한 쾌감을 가지게 하는 것을 우리들이 볼 때에, 우리는 작자가 그의 창조물―김희준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 듯하다. “여기에는 네가 잡어 찾을 모든 것이 있다. 조금도 두려움을 모르는 나파륜의 칼을 들고 이 현실 생활의 속으로 뛰어들라!”―자기의 주인공에게 이렇게 타이르는 이 격투적(格鬪的)인 열정―이것이 리얼리스트 작가의 고유의 정신이다. 작자는 김희준이가 이 농촌적 현실의 대해 속에서 고민 없이 반성 없이 그리고 지식계급 그 자체에 대한 폭로와 매도 없이 일해 나갈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실로 작자는 주인공과 함께 자기 자신까지를 연소(燃燒)하고 벌거숭이를 만들고 힘껏 현실생활과 격투시켜 보겠다는 청년다운 정열에 불타고 있는 것이다. 김희준이가 웃을 때에 자기가 웃고 김희준이가 추태를 연출할 때에 그것을 자기 자신의 추태로 반성하고, 김희준이가 가슴을 잡아뜯으며 땅을 치고 울 때에 작자 자신도 같이 울자는 의지적인 육체적인 열정을 우리는 찾을 수 있다. 김희준에 대하여 가진 작자의 이 의지적인 열정이 안승학과 같은 가장 저열하고 증오에 해당하는 인물을 창조케 하였고 원칠이 부부와 같은 가장 선량하고 건실한 농민의 전형, 그리고 소작농의, 자작농의, 중농의, 상인의 여러 가지 타협을 만들게 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인물의 배치와 설정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일관한 사상―그것은 농민은 한개의 계급이 아니고 그것은 점점 이산되어 이동되는 층이라는 사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부자는 어떻게 하여서 생겨나고 중산계급은 어떻게 하여 몰락하여 가는가, 빈농과 소작농은 어째서 노임(勞賃)으로 벌어먹게 되어가는가 ―이것이 가장 풍부한 풍속과 자연 속에서 뚜렷하게 묘파되어 있다. 통틀어 적극적인 능동적인 성격적 전형은 가장 풍부한 전형적 정황의 묘사 속에서 형성되고 창조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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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1935.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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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가 자기와 가장 근접한 육체적인 연계(聯繫)를 가진 지식계급의 전형을 적극적인 방향에서 찾고자 할 때에 나는 작자가 흔히 작중인물에 대한 익애와 관념적인 이상화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고 말하였다. 사실 과거의 프로문학이 얼마나 이 위험에 빠져서 추상적 인간의 창조에 허다한 정력을 소비하였는가―‘일꾼’과 ‘투사’라고 일컬어지는 인간은 모든 인간적인 욕망과 정서를 상실한 나무로 깍아 놓은 목탁이었고 오직 일률적으로 기성(旣成)된 한가지 눈 한가지 코 한가지 마음 한가지 행동을 하는 아무 개별적 성격과 특징도 없는 인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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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주인공의 이상화와 그에 대한 익애로부터 문학을 구원하는 길은 어느 곳으로 향하여 열려져 있는가? 이곳에 일률적으로― 정서를 주고 욕망을 주고 계급적 모순 속에서 생활을 주라 하는 대답으로는 우리는 좀처럼 만족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헛되이 정서와 욕망을 생활의 모순을 부여하려고 할 때에 작자는 다른 한 개의 위험성 앞에 봉착할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공으로부터 적극성을 뺏어버리든가 그렇지 않으면 자기 성격의 안이한 묘사에서 자기 정서의 도취와 긍정을 責[책]하고 드디어는 다시 자기 계급 출신의 주인공에 대한 익애로 돌아가고 말른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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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지금 다른 한 개의 중요한 것을 가져보려고 시험해 본다.―그것은 지식계급 자신에 대한 가면박탁의 방향이다. 가면박탈 그렇다. 조금도 용서 없는 가면박탈의 칼만이 가히 나팔륜의 칼이 될 수 있으며 이것만이 지식층의 출신작가로 하여금 적극적인 인텔리겐트 주인공을 정당히 운전(運轉)하게 할 수 있으며 주인공에게 부여되는 일체의 생활감정도 익애의 긍정에서가 아니라 가장 치열한 비판적 태도에서 그려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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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준―작자는 이 인물을 그리려고 할 때에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가면박탈의 무자비한 칼, 리얼리스트 정신의 칼을 준비하였을까? 물론 민촌은 그것을 예리하게 갈아 가지고 바른손에 높이 들기를 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이 전형의 창조에 있어는 그릇되지 않았다. 그러나 안갑숙― 이 여주인공에 대하여도 우리는 동일한 평가를 가질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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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김희준을 향하여 높이 들었던 가면박탈의 칼은 아름다운 미모의 마름집 딸 안갑숙의 머리 위에선 맥없이 꺾어지고 무너지고 말았다. 안갑숙이가 공[1행 불명] 느고 천공(天空)을 향하여 높이 비상할 예술적 필연성은 이 작품의 어느 부분의 묘사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가 집을 나와서 출가하여 공장으로 들어가 혁혁한 일꾼이 되어 자기의 애정과 전 몸을 희생하여서까지 빈한한 농민과 직공을 위하여 일하겠다는 정면을 볼 때에 우리는 고무풍선을 타고 상승하는 마술단의 천사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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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촌은 어째서 인테리겐차의 두개의 적극적인 전형을 그릴 때에 김희준에 대하여선 작자 자신까지를 박탈하고 폭로하는 무자비한 칼을 아끼지 않았음에 안갑숙에 대하여는 추구와 폭로를 단념하였을 뿐 아니라 저널한 안이한 베일 속에 그를 보호하려고 애썼는가? 혹은 김희준만을 추구하는 나머지에 안갑숙을 등한시하는 결과로선가. 혹은 젊은 여자를 많이 알지 못하는 작자가 그를 벌거숭이를 만들기에 미안과 수치를 느껴서인가. 또는 혹은 성격상으로 김희준이보다 천성적으로 더 강하고 꿋꿋한 타입을 그리려다가 그만 저널하게 미끄러져서 이 실패를 보고 말았는가……. 우리는 ‘숭고한 이상적인 타입’인 안갑숙과 영감쟁이(작자)를 대조해 보면서 고소(苦笑)에 싸워 엥겔스의 민나 카우츠키에게 보낸 서신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그 예로서 나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르놀트입니다. 사실 그는 너무도 지나치게 완전무결합니다. 만일 그가 최후에 산으로부터 떨어져서 죽는다고 하며는 그것을 시적 정의(正義)와 좌화시키는 것은 오직 아마 그가 이 세상에서는 너무도 지나치게 훌륭한 인간이었었다는 것에 의하여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작자가 자기가 그리고 있는 주인공에게 반하여 버리는 것은 언제 보아도 보기 흉한 일입니다.”―(강조 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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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그것이 김희준이도 아니고 젊은 미모의 여성 안갑숙의 창조에 있어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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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1935.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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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향』의 작자가 김희준의 창조에 있어서는 지급계급 자체에 대한 용감하고 준열한 가면박탈의 완강한 감행에 의하여 성공하였고 한가지 안갑숙의 묘사에 있어서는 그의 칼이 무디었고 날이 빠져서 드디어는 인조인간에 가까운 추상적인 이상화에 함락하고 말았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물론 나는 민촌이 김희준 창조에 있어서는 하등의 탈선도 결함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여기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가면박탈의 칼의 도합(度合)의 여하에 의하여 예컨대 그 칼이 무디고 그 칼을 쓰는 태도가 연약하면 할수록 창조하는 인물은 실패의 길로 떨어진다는 것을, 그러므로 리얼리즘의 승리 및 리얼리스트 정신의 우월은 다분히 그의 강렬한‘가면박탈’의 성격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였음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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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지금은 김희준이가 어떠한 때에 구체적인 씩씩한 생명 있는 인간으로 살고 있으며 그것이 과연 작자가 그에 대한 가면을 무자비하게 박탈하려고 하였을 때이었던가 아닌가 ― 이것을 살펴보는 것이 흥미 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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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고향』의 가장 아름다운 윤택 있는 장면의 하나로서 「달밤」 5회를 머리 속에 그려보고자 한다. 야학, 청년회, 귀로, 부부싸움 ― 이것을 통하여서 작자는 상당한 정도까지 희준이를 벌거숭이를 만들려고 달려든다. 보기 싫은 아내를 가진 자의 야릇한 애욕을 폭로하고 소부르주아를 상대로 하는 청년회 운동의 자기 만족과 합리화에 철추를 주고, 표면적인 명랑성의 외피에다 예리한 칼을 넣고자 한다. 그리고 드디어는 모든 활동과 생활에다 동요를 던져주고 이 속에서 끝까지 적막에 부닥치게 하고 현실에서 부서지게 한다. 그리고 작자는 주인공을 데리고 달밤을 헤매려 넓은 들로 탈출하는 것이다. 실로 희준이나 작자에게는 집을 뛰쳐나와 넓은 평야에서 땅을 두드리며 통곡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적극적인 인테리겐차를 이렇게 땅 위에다 무자비하게 메어던지고 ‘다운’을 선언하는 작자 그는 마치 김희준은 이 비참한 불 속을 지나지 않고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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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렬한 리얼리스트적 정신이 이렇게 아름다운 풍부한 형상을 가지고 등장한 전례를 우리는 일찍이 조선문학에서 찾을 수가 없다. 형상을 풍부하게 한다고 살커리를 너무 두텁게 씌우는 바람에 움직이지 못하는 뚱뚱보의 동맥경화증 환자를 만들거나 기(其) 반대로 뼈다귀를 살리려고 애쓰는 바람에 살은 하나도 없는 빈약한 인간만을 만드는 서투른 기술자만을 가져본 조선문학에서 ‘달밤’과 같은 구절을 찾아보는 것은 우리들의 둘도 없는 즐거움이다. 이럴수록 근육과 골격의 모순을 훌륭하게 극복할 수 있는 리얼리스트 ‘명장(名匠)’의 손에 잡힌 나파륜의 칼에 대하여 재삼의 경의를 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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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회를 부흥해 보려고 모든 것을 애써보아 그것은 잘못이 있다. “밤낮 이야기해야 그 수밖에 없담…….”그렇다. 아무 수도 없는 것이다. “일찍 가서 자는 것이 상책이지”하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올 때에 부흥책을 열심히 토론하는 회원들은 달이 밝아 그대로 자기가 무엇하니 외상술이라도 먹으로 가자고 하지 않는가. 야학을 가르칠 때마다 가끔 성적 충동의 대상이 되는 음전이가 있는 술집으로 몰려가는 회원들을 여이고 교교한 달빛 속을 홀로 원터 자기집을 향하여 걸어가는 김희준의 가슴에는 공허가 가득 차 있다고 작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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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허 ― 이 지극히 강렬한 공허 속에서 나는 우리의 가슴을 잡아뜯는 육체적인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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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인가 과연 이 공허를 안고 넓은 들을 혼자 헤매지 않는 젊은 인테리겐차를 볼 수 있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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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1935.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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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가는 희준이는 적적한 들 가운데를 접어들며 마음속에 고독을 느끼었다. 그의 외로운 그림자가, 논둑 길 밑으로 따라온다. 넓은 들과 같이 마음 속에서도 공허(空虛)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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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동무들을 격려하며 일을 보다가 가끔 이와 같은 적막을 느꼈다. 그럴 때는 여러 사람들과 같이 함께 웃고 떠들어도 자기만은 산중에 홀로 있는 사람같이 의식의 간격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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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까짓 일을 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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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기의 생활이 무의미한 것 같다. 인간들이란 이렇게 하치 않은 존재인가? 하는 가소로운 생각도 난다. 그는 금시로 허무한 생각이 들어가서 만사가 무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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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사는가! 놈들은 모두 조그만 사욕에 사로잡혀 제 한 몸 생각하기에 여념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말로나 글로는 강한 소리를 하지만 뱃속은 돼지같이 꿀꿀거리는 동물이야! 그것들과 같이 일을 해보자는 나 자신부터 같은 위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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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론 가장 훌륭한 자연으로 이것을 인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폭로당하지 않는 어떤 인테리겐차가 현존하여 있는가? 누가 과연 자기 자신을 두드리고 있는 이 자기폭로의 문장에서 적면(赤面)을 가지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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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준이는 먼데서 인순이와 방개가 재잘거리며 청춘을 향락하는 것을 들으며 동리 입구로 접어든다. 그럴 때에 그는 다시 대문을 기대고 달을 바라보고 있는 마름집 딸 안갑숙을 발견하게 된다. 야릇한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면서 그는 자기 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의 마음은 우수에 싸여서 부동(浮動)하고 있다. 그런데 다시 자기 집 마루를 보니 그곳에는 천하 보기싫은 아내가 잠도 자지 않고 나와 앉아서 돈이 어쩌니 일이 어쩌니 하고 바가지를 긁지 않는가? 그는 드디어 아내와 다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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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남의 참견 말어, 너보고 벌어먹으라고는 안 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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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그렇게 큰소리할 것두 난 없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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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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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뭐루 큰소리유? 남과 같이 잘 먹이구 잘 입혔수? 계집자식을 호강시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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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를 입을 옥물고 독살이 나서 쌔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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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런 미련한 것! … 그런데 너보고 누가 살라드냐? 진즉 부자놈한테로 갈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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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가라지! 내가 이집에 와서 얼마나 잘 먹구 살 살기에 - 흙! 흙… 나두 공밥 안 먹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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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준이는 분대로 하면 안해를 당장에 박살내고 싶었다. 들어오나 나가나 그에게는 하나도 유쾌한 꼴을 볼 수 없다.
 
 
60
희준이는 여기서 허덕이고 있다. 그러나 곧 그에게 광명을 주는 것은 서투른 기술일 것이다. 리얼리스트의 정신은 희준에게 좀더 가혹하여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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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더러운 인간들! 더러운 욕심!”야학용품의 외상값을 칠팔 뭘 갚아주었다고 그들은 무슨 못할 일이나 한 것처럼 야단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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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기 아무리 무지하고 인색하기로 너 같은 것도 사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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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준은 참다못해 주먹으로 안해의 턱주가리를 치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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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들의 싸움난리에 희준이 모친이 참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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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웨들 그러니! 자지 않고. 응? 너 술 먹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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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어머니는 나를 술망나니로 아시우? 에- 빌어먹을 놈의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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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준이는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68
여기서 비로소 희준이는 넓은 들판으로 도망을 치는 것이다. 희준이가 이 교교히 밝은 달밤에 소쩍새만 “솟족! 솟좃!”우는 들판으로 나가면 과연 마음의 울분을 훌훌 털어줄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냐? 아니었다. 이 달뜬 하룻밤을 그는 머리를 잡아뜯고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새어 보냈으리라. 이 원심적인 것과 구심적인 것의 갈등. 상상(上翔)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와 자성적인 내지는 인테리겐차의 계급적 특유물(特有物)과의 모순 - 이 속에서 허덕이며 통곡하는 눈물을 나는 결코 값싸게 사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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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자기 자신에 대한 가면박탈의 칼이 한번 이 모순과 갈등의 속으로 내리워질 때 희준이가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면 알수록 더욱 참혹하게 무자비하게 폭로는 감행되려고 한다. 이것 없이는 적극적인 성격은 기계로 화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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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1935.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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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인 지식계급 타입의 창조적 형상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은 무엇보다도 그의 원심적인 것과 구심적인 것의 모순에 대하여 조금 용서 없는 가면박탈의 칼을 드는 것이 처음으로 들 수 있는 불가결의 조건이라는 것을 나는 위에서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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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김희준이 그곳에서 나고 생장하여 자라난 계급적인 토대가 주는 고유의 유전물 인테리겐차로서의 본래적인 모든 성격적 발동 - 이것과 자기계급의 고유의 것을 격파하고 위(上[상])로 높이 혹은 밖(外[외])으로 널리 뻗어져 나가려는 적극적인 것과의 갈등 - 이 모순 속에서 주인공을 부다끼게 하고 이것과 격투시키고 이것을 끝까지 추급(追及)하는 집요한 태도 없이는 진실로 적극적인 구체적 인간의 전형은 창조될 수 없으리라는 것이 나의 말하려고 하는 주지(主旨)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추급이 느리게 완만하여 졌을 때 안갑숙이는 계급인 구체적 인간이기를 중지하고 이상화된 엥겔스의 소위 ‘너무도 지나치게 완전무결’한 천사로 우러러보게 되어 버렸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이며, 동일한 이유에 의하여 김희준 창조에 있어서도 그를 ‘소유욕’을 가지고 무자비하게 벌거숭이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가져다 가장 큰 결점으로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안승학을 끝까지 추궁한 ‘소유심’과 ‘사유욕’은 김희준에 대하여서는 너무도 지나치게 사양하였다. 우리는 김희준이가 ‘사유심’과 ‘소유욕’때문에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를 두드리고 자기를 매도하는 장면을 발견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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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김희준에 대한 나팔륜의 칼이 때때로 무디어졌을 때 이 소설은 다분히 저널하게 흘러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희준이가 끝까지 자기의 애욕과 정욕을 누르고 억제하였다고 하여 결코 이것 때문에 그가 더욱 훌륭하고 적극적인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김희준이 보다는 그의 출신계급으로 보아서나 또는 성격 기타 사실과 정치적 지위에 있어서나 몇 배 더 강철에 가까운 전형적인 인간도 숄로호프의 『개척된 처녀지』에 있어서는 이 애욕의 앞에 엎으려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숄로호프는 결코 다비도프를 애욕 앞에서 약간의 탈선도 안 하는 나무로 깍은 듯한 추상적인 인간으로 만들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 김희준에 대하여 다분히 관해하여진 『고향』의 후반은 예술적 구성에나 또는 스토리에나 피치 못한 안이성이 침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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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 결함은 이 작품에 있어서 가장 건강한 타입에 속하는 인동이와 그의 누이동생 인순이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는 바 그것은 건실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소작인이 되는 인동이나 또는 소작인의 딸로서 여공이 되는 인순이나 모두가 그가 자라난 계급적 토양으로 보아 가장 씩씩하고 적극적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이들의 묘사 위에 다분히 지식계급의 압력을 가하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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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모로 보든지 제사공장 내에서의 활동은 인순이가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인순이의 압력이 안갑숙의 성격을 개조하여야 당연할 것임에 이곳에는 오히려 갑숙의 ‘천사’적인 성격이 인순의 위에 덮씌워져서 이로 인하여 인순의 활동은 하나도 없고 그는 ‘산송장’이나 다름없이 되어 버리었고 또 인동이 - 이 가장 명랑한 젊은 소작청년의 성격 위에도 강렬한 김희준의 압력이 눌리워서 광채를 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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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시대(나는 이것을 30년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에 있어서의 지식계급의 역할의 중요성과 또한 농민의 지식층에 대한 막연한 신뢰와 환상적인 기대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적극적인 가장 건실한 농민 청년의 티피칼한 성격 위에 김희준적 압력을 가하는 것은 단순한 미학상 문제인 성격의 대척적(對蹠的) 배치라는 관점으로 보아서도 이것을 결점으로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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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마치 일본의 신진작가 평전소륙(平田小六)이가 「사로잡힌 대지」(因[인]はれた大地[대지])에서 ‘기무라(本寸[본촌])’의 압력을 너무 지나치게 ‘요사꾸(與作[여작])’등하게 가하여 드디어‘요사꾸’의 성격을 흐리게 하고 그의 인상을 희박하게 한 것에 비교하여 생각할 수도 있다. 어쨌든 처음에는 인테리겐차의 성격이 농민 위에 신뢰를 매개로 영향된다고 하여도 오히려 지식계급의 성격적인 개조가 농민으로부터의 압력으로 오는 것이 사실이므로 이 중요한 계기와 과정을 망각하고 지식계급에 대한 농민의 환상적인 신뢰를 그대로 작자가 지지하여 이것을 토대로 형상화의 길을 진행시킨 것은 최대의 결점이라고 생각된다. 이것 때문에 사실상 『고향』의 후반은 구(救)할 수 없는 저-널한 안이에 빠져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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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많은 인물을 훌륭하게 종합 창조하는 형상화의 길이 ‘과학적인 분석’으로부터 전체적인 민족을 사게 되는 것은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닐 것이다. 복잡한 농업문제와 농촌의 계급적인 갈등과 모든 모순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도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어늘 하물며 이것의 예술적 형상화에 있어서랴 ! 한 개의 ‘티피칼한 성격’-그리고 그것을 싸고 있는 ‘미류’‘티피길한 정황’의 묘출(描出) 이것에서 만전(萬全)할 작가와 작품을 가지기에는 조선 문학은 아직도 몇 년이란 긴 세월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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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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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1935. 7. 4)
【원문】지식계급 전형의 창조와 『고향』주인공에 대한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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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 조선중앙일보 [출처]
 
  1935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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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4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