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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선의 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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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11
고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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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평선의 전달
 
2
부르는 소리는 ― 비켜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素月[소월])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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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침한 줄기가 시종없이 흘러간다. 해와 달이 떳다 잠겼다 하는 무풍의 시대가 바라보일 뿐이다. 터트린 목아지와 머리카락과 아슴한 시야 속에 발버둥치는 너의 세계는 그 모든 것을 들어내며 운다. 어찌하여 너의 형상을 멀면서도 이렇게 가까운 것인가. 수만 갈래의 거리로 좁혀지는 나의 전면과 나에게 알려오는 지금의 시간이란 대저 무엇인가. 정전보루의 일각에서 무인광장의 정오에서 아니면 녹쓰는 철조망의 휴식 같은데서 그림자를 감추지 못하는 그리고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되씹는 심장이란 심장은 저 남은 하늘빛과 자연의 소리에 새삼 귀눈을 고루는데도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향하여 던져진 나의 밑창이란 얼마나 피붉은 홍수이며 또 이글대는 불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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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나는 던져진 것이다. 하이데거의 가슴을 해치지 않아도 던져진 의식에서 나는 안타까운 종말에의 눈을 뜬다. 그것이 다가오는 내일만을 뜻함이 아니라 지난 어젯날과 더더욱 지금의 오늘이라는 울뇌(鬱惱)에 집중되었을때 나는 지금에 나를, 즉 현존(Dasein)인 나를 저버리지 못한다.
 
6
지금에 있는 나란 개별의 나로 생각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의 나는 이 다른 하나의 나와 아주 동떨어진 마당에서 오랜동안 의식과 명상과 살육을 일삼은 인간인 것이었다. 다시 하나의 나는 통상의 나를 추종하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면서 통상의 나는 이 하나의 그림자같던 나를 끝내 배척할 수 없는 상태로 점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는 하나의 나에 대하여 다시 하나인 현존의 나를 접속시키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이 우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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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곧 지금에 섰는 형체와 같이 다시 하나의 나를 참으로 견인하려는 나의 결의는 너무나 비겁한 저항으로서 몇번씩이나 단말된 것이었다. 보루에서 광장에서 철조망에서 나의 던져진 바의 의식이 나의 지금에 있는 의식과 서로히 접속되는 것이라면 나는 던져졌기에 있는 것이며 있는 까닭에 통상의 나를 벌써 떠나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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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지금에 있는 나란 지금에만 있고 지금 밖에는 있지 아니하는 것일까. 무릇 지금이 가고말면 나는 나와의 해후를 영영 포기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오랜 분열 속에 살아가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만으로 부를 것인가. 아닐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떨어진 지금에 살고 있지 않다는 강렬한 충격에 억눌리며 전율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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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선상에 있어야 할 지금에 비긴다면 그러한 지금은 이미 지금을 넘는 지금에만 분명할 것이다 꼭이나 어디서 . 와서 어디로 가야 될 그러한 순간이 지금이라고 알려진다면 그와 같이 지금의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든지 가게 될 지향성의 불길에 비쳐든 스스로를 또한 어떻게 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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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보루에서 가는 길 광장에 들어오는 골목과 광장을 빠져나가는 골목, 그리고 철조망에 압송된 거리와 여기서 다시 석방될 거리가 서로 같은 지역상에 있는 것이라도 다만 그것들이 서로 같은 지역상의 길과 골목과 거리가 아니라는 자유에 대하여 나의 대답이 결정되면은 그만일 것이다. 짐짓 역설을 소유한다 함은 대저 누구의 권리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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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그러한 복판 같은 데서 아니면 타다 남는 보루에서 내려쬐는 광장에서 피묻은 철조망에서 한갖 나의 자세가 끊일 수 없는 항진에 괴로워졌을 무렵, 아아 공간을 넘은 시간 저편에 그들과 함께 나의 지금은 처량하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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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의 나는 지금에 있는 별개의 같이 생각된 나를 이미 어디서부터 맞이했던 것이며 어디까지 맞이하고 갈 것이라는 새로운 결의에 더욱 더 벅차는 것이다. 현재는 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연달은 흐름 속에 살아 있는 것이며 침묵은 매양 밀접한 현존의식이 불같이 치밀은 때이다. 그때 나는 잊었던 것과도 같이 나의 황폐한 전신에 대하여 식어가는 맥박에 대하여 울음겨운 손이라도 감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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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찌 할 것인가. 던져진 나는 저 하강의 거센 압력에 대하여 설사 반항할 수 있었던가. 지낼수록 휘감기는 어둠의 질펀거림에서 던져짐(Geworfenheit)을 회복하려는 나의 역승(逆昇)은 오히려 던져감(Entwurf)을 선택하는 계기적 심정으로 스스로를 벗는 것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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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통상의 내가 현존의 나와 접속하려는 역승이 밖으로 돋히일 때 존재론은 다시 그 일을 탈아(Zeitekstase)라 불렀으며 마침내 그 일은 지금에 있는 나를 떠남이 아니라 지금에 있는 나를 넘을려는 아무런 가정도 용납하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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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루에서 광장에서 철조망에서 한사코 나는 나를 넘기 위하여 저들의 공간 지역을 무관하는 것이며 마침내 세계내연에 미칠 수 있는 다른 것으로서 변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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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은 지금의 나를 바로 잡고 지금의 나를 다시 넘을려는 지향 끝에서만 죽음이란 것을 앞으로 세운다. 지금의 나는 곧 죽음의 나로 전주하는 것이다 던져진 내가 던져가는 . 나로 새로히 나타나는 전기의 질서가 곧 지금인 이상 죽음도 워낙 나의 결의적 관계 위에 나의 선택인 나의 실존과 동일한 것이며 세계의 허다한 부분들이 세계전면에의 접촉을 개시하는 지금, 지금에 있는 나는 곧 지금이란 시간과도 일치하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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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통상적 시간에서 현존적 시간으로 나를 번져내는 전기의 질서란 또는 그러한 근거란 어떻게 보아질 것인가. 이를 밝히려는데 현대성은 이중의 산고를 겪지 않을 수 없다. 시는 인간은 이 불명하면서도 명확한 정신의 지시에 타는 저들의 나래를 먼 불 하늘에 바라볼 것이며 광열한 그 순간의 지속을 마지막 누리에 감전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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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시간과 지난 시간은 아마 모두 앞으로의 시간에 있을 것이며, 앞으로의 시간이란 지난 시간에 포함될 것이다.”(Time present and time past are both perhaps present in time future, and time future containted in time past)〈Eliot〉“시간은 가지 않는다. 없는 것이다. 마침내 시간은 더 가지 않는다.”(Le temps ne passe pas. Iln’y a pas: Longtemps, le temps ne passe plus)〈Elu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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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내가 배회하던 역사와 내가 스쳐온 갖가지의 상황들을 하나의 지역적 공간에만 귀착시킨다면 세계에 대한 나의 결정은 거의 불가능으로 돌아간다. 일반적으로 〈시간에 대한 싸움〉(La lutte contre le temps)은 두 가지 면을 갈라 객체적 시간이나 주체적 시간 속에 적극적으로 잘아든 과거란 적극적으로 잡아든 나의 무(Nichts)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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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원리의 4차원 전개는 어디까지나 세계 내에 포함된 시간적 Perspective를 지적하며 관측주체에 의한 시간은 벌써 과거적 지평에서 미래적 지평으로 얼마든지 원격 평행하는 것이라는 이론에 충족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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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데 지속상하(Subspecie durationis)에 있어서의 죽음이란 지금에 대하여 전주되는 결의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근거적 고요는 오히려 있었던 것에 대한 적극화에서 말하자면 과거에 대한 무에 대한 결의에서 필경 부풀어 오는 지평권이라고 불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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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다시 보루와 광장과 철조망이 바라보이는 나의 정경으로 돌아간다. 가리워졌던 별개의 내가 다시 촉발되고 난 뒤의 지금은 저것들의 처참한 외곽이 그 스스로를 포함하는 세계전면에 대하여 이미 하나의 지속적 통일을 다하는 참이며, 이러한 무렵 보루와 광장과 철조망은 나의 시야에서 점점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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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모두 불가지한 시늉으로 형상의 지평선(Horizont)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무한에의 해소를 일삼는 그러한 地平[지평]이란 닿을 수 없는 저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는 나의 뒤에도 있는 것이며 나의 어느 부분까지도 포함하는 전체인 것이다. 있어야 할 것이 있었던 것으로 다시 있는 것으로 하여 각각 일치되며는 가장 멀었던 너는 어찌하여 가장 가까운 나에게로 돌아오는가. 영원히 상반되지 않는 거리란 얼마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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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의 지평선은 말이 끓는 눈물에 어룽거리지 않는가. 지평선은 연연한 불길로 까마득 저물지 않는가. 斷食[단식]한 나는 색맹한 나는 그리고 고문당한 나는 오히려 나 스스로를 질타하며 부정함과 같이 시간은 또 시간을 부정한다. 이것은 지평선의 부정소를 믿는 것과 같다. 무의 적극화는 무의 부정화일 것이며 나아가선 무의 수동성을 초월함일 것이다. 던져짐에서 던져감으로 역승하려는 나의 현존은 던져짐의, 즉 있었던 바를 새감 否定[부정] 타개하는데서만 가능할 줄 안다. 이리하여 나의 피투(被投)는 나의 투기(投企)로 나의 수동은 다시 나의 능동으로 각각 전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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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나의 탈아. 그리고 저물어가는 형상의 노을들. 지금에 있는 나란 어디까지나 무에 걸려 있는 무로 돌아오는 아니 무로 장래하는 시간성 그것이 되어야 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러한 “시간은 있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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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아닌 시간과 존재의 입장에서 실존은 Existenz 아닌 Eksistenz, 즉 개존(開存, 明存[명존])의 뜻으로 전기되었다. 망각되었던 내가 지금의 나로 다시 촉발되었을 때 나의 우수는 한층 〈세계야(世界夜)〉(Weltnacht)의 검은 침대를 거역하지 못한다. 끝없는 밑창을 들여다보면 끝없는 밑창이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며 상실된 목숨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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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 낮과 밤, 나와 함께 던져진 모두는 던져진 모두의 순서에 따라 죽음으로 갔다. 지평선의 수축도 없이 노래 부를 목청도 없이 다만 마지막 나의 귀향(Heimkehr)이란 저 망각된 밑창으로 아니면 보루와 광장과 철조망의 어둠으로 여지없이 무지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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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 어느 상황에서든지 조금이라도 지금에 있는 나를 불처럼 느꼈을 때, 그리고 저 머나먼 도정의 교실과 같은 심혈이 머리 위에 돌았을 때, 나의 귀눈은 짙푸른 하늘의 흐름과 초원의 계절로 다시 무궁한 과원으로 마구 둔주하던 것이다. 침묵하면 피고인 눈들이 따를 수 없는 저들의 거리를 부르며는 마침내 있어야 할 것은 있었던 것으로 다시 있었던 것은 있어야 할 것으로, 끝내 장래된 과거와 무는 지금에 있는 나로 인하여 지평선상에 수상한 빛발로 묻힌 저들의 공지(Waldlichtung)를 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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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있는 나의 유일한 확인란 저 빛부신 공지의 확인과 무엇이 다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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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빛발 속에 서는 것을 나는 인간의 개존이라 부른다.”(Das Stehenin der Lichtung des seins nenne ich die Eksistenz des Menschen)〈Heidegger〉또다시 “세계는 존재의 빛이다.”(Welt ist die Lichthng des Seins) 어느듯 보루 주변에는 뗏풀이라도 돋아날 것이며 광장에는 옛날과 같은 웃음의 선가들 그리고 헐어진 철조망지역엔 웅장한 축전들이 저만치 잇닿인다.
 
32
1924년 라이너·마리아·릴케는 이러한 하이데거의 빛을 예정하는 열린 것(das Offene)이라는 숙어를 하나의 즉흥시에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그것은 세계전면에 대하여 내가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세계내의 목숨 가진 이들의 애정적 상관이란 무릇 하나의 열린 자유로서 의미될 것이라는 그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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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부신 공지는 지금에 있는 나의 개존임으로 하여 그것은 곧장 지금이라는 시간의 개존이기도 하다. 따라서 릴케는 이러한 현존적 가능의 저편에 열려오는 시간과 함께 번쩍이며 나타난 새로운 지대를 애오라지 심정공간(Herzensraum)이라 불렀다. 릴케의 열린 자유와 릴케의 심정공간은 우리들의 근원적 고요가 담담한 강물처럼 구비치는 마차나 그러한 흐름의 강뚝에 그의 마지막 「과수원」을 불러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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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우수는 릴케의 보루와 릴케의 광장과 릴케의 철조망은 저들의 외곽을 풀어 헤치면서 세계전면으로 꽃피는 과수원으로 차츰 접속되며 있었다. 그리하여 릴케의 지평선은 그대로 Inmitten der Offenheit von Seienden에 나타난 것이며 릴케의 시는 존재의 절정을 거닐은 것이다.
 
35
「赤日滿天地[적일만천지], 火雲成山嶽[화운성산악], 草木盡焦卷[초목진초권], 川澤皆竭凅천택개갈고], 輕紈覺衣重[경환각의중], 密樹苦陰薄[밀수고음박], 莞簞不可近[완단불가근], 絺綌再三濯[치격재삼탁], 思出宇宙外[충출우주외], 曠然在寥廓[광연재요곽].」여기 詩人[시인] 王維[왕유]는 「고열」하는 세계 저편 曠然在寥廓[광연재요곽]을 사출(思出)한다 하였다. 동양인에 있어서의 일체공(一切空)과 서방왕생은 사상은 모다 지평선의 열림에 눈뜨려는 그들의 계기적 심정에서 울어난 것이다. 어찌 王維[왕유]의 曠然在寥廓[광연재요곽]과 릴케의 심정공간과를 차별한 것이며 지금에 있는 나에 대한 확인이 이토록 처절하던 그들은 존재의 인인(隣人) Mitdasein에 대한 피의 발견, 피의 씻어줌에서 전해오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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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gage I’humanité싸르르트는 사유로서 직접 나에게로 도달하는 사람은 역시 인인을 얻어보고 그 모든 인인을 자기 존재조건으로 하여 실존하기 때문이라 한다. 卽自對他[즉자대타]하는 세계, Mitwelt라고 불리우는 세계, 시에 있어서의 대화성이 보다 충족되는 세계, 거기서 처음 동시성은 인인에 결박된 존재를 의미한다. 나와 나의 인인들이 무엇에의 현존으로 세계내에 공존할 때, 이방의 소속을 해소하며 자기소외에서 반발하여 던져갈 때, 음악과 같은 동시적 조직이 시에 응축되어오는 것이다. 나는 어찌하여 홀로 나의 상황의 주인이 되겠는가.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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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으로 존재에 대한 의식은 메타파직의 방법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속에서 칸트는 뭇 인간에 있어서의 자연소질이며 가장 현대적인 것이 메타피직이라 논하였다. 이어 딜타이는 영원적인 삶의 의식이 메타피직이며 무신론자에 한하여도 그러한 존재는 가능할 것이라 보았다. 자칫하면 존재와 존재자와의 구별을 혼동하므로써 메타피직은 하나의 독선적 사상에까지 편취(騙取)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존재망각으로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는 메타피직에 대한 질적 발전을 거의 은닉하다시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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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시간에 돌아갈 존재를 다시 시간을 여는 존재로 전기시키므로써 그의 입장을 새로이 한 것이다. 이러한 메티피직의 의식은 대저 어떻게 발단되며 그것이 또한 시에 참여하는 관계란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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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메타피직의 요청은 중간자(Medium)인 인간을 생각할 때 플라톤에 있어서 존재와 비재와의 중간, 지자와 막자와의 중간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상과 질료의 중간으로 각각 저현(著顯)된 것이었다. 또한 「致中和[치중화] 天地位焉[천지위언] 萬物育焉[만물육언]」의 중용론과 「如來說法[여래설법] 捨離二邊[사리이변] 會於中道[회어중도]」의 연기설은 이를테면 앞에 갔던 것과 뒤에 오는 것과의 사이쯤에 인간인 존재를 찾아보는 일이었다. 인간을 다리(橋[교])라고 불렀던 니이체나 이미 지나간 신과 아직 이르지 않는 신과의 사이에 말하자면 두 개의 무로 인하여 짚인대로 참담한 야스페르스의 예외자(die Ausnahme)는 그대로 현대를 구축삼는 우리들의 정신적 이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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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중간자의 고민은 당초부터 인간의 호순성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고전심리학에 있어서의 의식의 능동 파동의 차별은 존재의 자발성과 수용성을 정하는 것으로서 따로 이것을 시간에 비춰본다면 미래성과 과거성을 추정하는 것이 된다. 두 개의 면에서 존재에 대한 한 과거성 반정을 제기하려 메타피직의 의식에 충격됨에 있어서 노에마, 노에시스(Noema, Noesis)의 현상구조는 더욱더 진지한 대상일 것이나 지금은 이상 피하기로 하고 다만 중간자의 모순성이 과거와 미래간에의 변증법적 통일을 짓고 있다는 제가(諸家)의 학설에 동의하는 것 뿐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변증법이란 유물 유신설 따위의 주관성에 구속되지 않고 노에마, 노에시스의 유기적 관계에서 필경 처음의 모습이 끝나는 모습으로 일치하는 전면에서만 요청되어야 한다. 따라서 메타피직 의식은 세계의식이며 동시에 역사의식일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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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헤에겔 부근으로 접어든다면 지금에 있는 나란 과거에의 추억 그 재현에서만 가능할 것이 아니라, 바로 있는 이 절대적인 지금에서 미래까지를 견인하여 오는 지금에서만 의식되는 것이라 한다. Bei-sich는 지금이라는 시간의 자각인 동시에 당장 이곳이라는 공간적 자각마저 포함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시간적 공간적 자각의 통일이 곧 나인 것이며 우리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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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의 중심에 있어 공간을 포위한다.”(Je suis au coeur du temps et je cerne l’espace) 이러한 나와 우리들은 미래를 끌어오는 즉발적인 그리고 잠재적인 것으로서 역사와 자연과 사회 속에 언제나 발전하는 나며 우리며, 나아가선 역사적 자유의 분담자로서 혹은 현재적 조정자로서 다시 조정된 무명의 나며 우리들인 것이다. 헤에겔은 이러한 나와 우리들을 무시간적 현재 (zeitlose Gegenwart)에서 감득되는 것이라 하였으며 『정신현상학』에 있어서의 그의 종장은 역사와 개인은 언제까지나 정신을 향한 무한성의 거품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44
여기서 다시 돌이켜본다면 중간자의 의식은 시의 현대성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단계로 진출되어 왔다. 하이데거는 무시간적으로 깔앉는 신비와 지금과의 사이에 걸린 또하나의 세계를 포에지라고 일렀으며 이러한 중간영역의 설정이 곧 『헬다아린과 시의 본질』을 말하는 그의 태도인 것이었다. 그리고 중간영역은 열려오는 지평선상의 공지에 해당되는 것이며, 한편 성역 (Templum)이라고까지 불리운 마당의 시는 존재의 역승을 끝까지 지지하는 것이다. 시란 존재를 Vollbringen하는 것이며 시란 존재의 마지막 Werk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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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의 내가 현존의 나를 망각하였음에 반하여 시는 현존의 나를 가일층 집중하는 위에서 아직도 무참한 위험을 범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던져진 의식이 이중으로 갈투(葛鬪)하는 지금에서 중간지의 기치는 다함없는 불길에 찢어진다.
 
46
“시는 세계에 대한 승리이다.”(Poesie ist der Sieg üer die Welt) 그러나 나루(搬[반])는 중간자의 승리는 결정적일 수 있었던가. 작용을 작용하는 집중의 감정은 앞으로 갔던 것과 점차 다가올 것의 複合[복합]된 얼굴을 어떤 방법으로 기억하면 좋은가.
 
47
“마지막 誘拐[유괴]이란 잔인한 배반이다.”(The last temptation is the greatest treason) 엘리어트 시는 이토록 세계인들이 그들의 두 눈에 가득찬 흑사(黑砂)를 어쩌지 못하는 황료(荒蓼)를 노래하던 것이었다. 사실 대화로서의 시는 그만큼 역사적이며 공유적이며 또 동일적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 〈Unreal City〉서간에서 엘리어트는 그와는 달리 우리들 배면에서 오랜동안을 묵어온 신이 우리들을 표효하는 것이 아닌가. 시간에 헐벗은 그리고 엘리어트와 함께 표효하지 못한 더많은 우리들의 지금을 어찌 한마디로 잔인한 배반이라 하겠는가. 엘리어트가 견인하며 합리하던 그 전면의 신은 이제 우리들 배면의 신과 어찌 승부치 않을 건가.
 
48
신이 되고자 아니하는 나의 초극과 우리들의 계속적 심정은 저 메타피직에 젖어 나리는 〈Le juste milieu〉(Pascal)의 포기를 어떻게든지 간수 할 일이다. 그것이 내가 우리들로 나의 이웃으로 아직껏 던져가는 것이라면 새삼 현대시는 C.D.루이쓰의 「피의 상실」과 그러한 자기성의 매몰 또는 비조정적인 〈Da〉의 意味[의미]를 어떻게 보아야만 옳겠는가.
 
 
 

Ⅳ.

 
50
지금에 있는 나는 나의 지평선을 위하여 중간자의 고민을 미래성과 과거성에 대하여 또는 전면의 신과 배면의 신의 새로운 발각에 대한 고민으로 이끌었다. 배면의 신이란 특수한 신이다. 부활하지 못하는 신학적 표준에선 언제나 박제당한 신이다. 과거의 신이다. 눈에 가득찬 흑사를 어쩌지 못하는 모든 우리들의 추상이며 돌아선 채 우리와 함께 살았던 신이다. 부재의 신, 부정의 신 마침내 신이라고 불리우지 못하는 신 어디로 갈 것인가를 지시하지 않고 어디서 왔는가를 지시하는 신, 빈 신이 현대에는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믿는 것이다.
 
51
다시 중간자의 고민을 시에 이끌어 개성〈Personality〉과 초개성(Impersonality)의 고민으로 새겨보자. 일찍이 엘리어트는 리챠이즈의 「시의 전달」과 뮤리이의 「시의 계시」를 반박하면서 시의 초개성설(impersonality theory of poety)을 자신의 전통적 입장에 適應[적응]시켜 批評[비평]하였었다. 그는 워즈워드 시를 요약해 말하면서 시인이란 표현에 대한 개성을 따로이 갖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매개(Medium)를 갖는 것이며, 그 매개는 뭇 인상과 경험들을 결합하는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하나의 개성이라고는 불리울 수 없다 따라서 . 시는 감정의 석방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탈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탈주라고 보았으며 감정과 개성을 갖는 자만이 그들로부터 탈주하는 의미를 또한 이해할 것이라고 하였다.
 
52
그런데 엘리어트는 모든 대상을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까지 그러한 탈주는 승인 되는 것이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탈주는 대상의 수용과 함께 피탈주를 의미 포함하는 것이므로 초개성이란 어디까지나 본래의 개성을 수용포함하는 탈주인 고로 비개성이라곤 말하여질 수 없다. 개성으로부터의 외산(外散) 아닌 개성에로의 내공은 개성의 거리적 시간적 의미가 곧 초개성이라고 알려진다. 어쨌든 이 때에 있어서 절연되지 않는 관계가 〈im〉일 것이요 그것은 또 시를 넘는 〈transcend〉일 것이다.
 
53
엘리어트는 개성을 지지하며 개성으로부터 탈주하는 시에 처음으로 초개성을 부여한 것이다. 질서는 전통(Tradition)을 정통(Orthodoxy)으로 현재화한 그의 비평성에 끝까지 합리한 것이며 또한 단테의 신생관념과도 동등한 것이었다. 이렇듯 그는 개성과 초개성간에 매개되는 객관적 상관(Objective Correlation)을 제시하면서 그러한 상관을 특수한 감정공식으로 이끄는 것이 곧 시의 현대적 임무라 하였으며, 우리는 객관적 상관이란 어디까지나 세계에 대한 노에마, 노에시스적인 형상구조에 입각한 것임과 후싸알의 주관성에 대한 싸르트르의 세계적 비판을 포함하여 의식으로만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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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엘리어트 시학에 나타난 메타피직이란 양극성(Polarity)의 동시적 인식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개성에 발견되어 의식분화의 반시적인 방향과 언어의 원시적 상태로 환원하려는 시적 방향은 전자가 사물간의 차별 인식인데 반하여 후자는 그러한 차별을 존재화하려는 작용으로서 초개성은 보다 더 합리적 의식이 원시적 의식으로 번져나가는 매개에서만 발전되는 것이라고 알려진다. 그러므로 은유는 이러한 매개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한편 정신의 탄력성인 시는 “Sum total of awareness”이라고 불리워져 엘리어트 시의 모더니티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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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개로서의 시(언어)와 중간자로서의 시인(존재)은 결국 동시적인 것이며 에즈라·파운드가 지적한 현대시의 황혼정신(Crepuscular Spirit in Modern Poetry)이란 아직껏 파스칼의 무한에 비하면 허무이며 허무에 비하면 전체인 무와 전체와의 중간자(un milieu entre rien et tout)로서의 정신을 재촉(再觸)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엘리어트의 매개가 하나의 신으로 자기동일시 될 떄 과연 현대시의 개성은 그의 탈주를 완료한 것이겠는가. 다음과 같이 노래하던 엘리어트 그에게 있어서……Fishing, with the arid plain behind me. Shall I at least set my lands in 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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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바아드 · 리이드는 페르낭테스가 그의 「개성론」가운데서 “세계변화는 언제나 관측주체가 확립된 자기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한 Perspective를 찬동하면서도 프로이트의 결집(Coherence)으로서의 개성설을 성격의 고정불변함과 어디까지나 떼어서 논의한 바 있다. 이것이 개성과 개인성을 분별하려 한 그의 입장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로되 생각할 것은 거기 지적된 개성과 〈개질(個質)〉(Personage)과의 관계이다. 통상인 내가 현존의 나로 촉발되지 않았을 때 나는 어디까지나 개질로서 머물어 있던 것이며 촉발된 다음에 있어서의 나는 마침 하나의 개성으로 결의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초개성에의 예비단계이며 지금까지의 내가 별개의 그림자 같이 생각되었던 지금의 나로 다시 촉발되어오는 즉자하며 대타(對他)하는 관계에서 아주 일반적인 증명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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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던져졌을 때 나는 하나의 개질에 지나지 않았으며 내가 역승하며 던져갈 때 있어서 나는 이미 하나의 개성인 것이며 다시 내가 열려오는 지평선상에 나의 공지를 얻어볼 때에 있어서 나의 매개는 완성되고 나의 중간자는 초개성으로 번져가는 것이 아닐까. 보루와 광장과 철조망에서 지칠대로 지친 나의 깃빨이 화복되는 초개성으로 가는 길이란 구원으로 가는 길이다. 앙드레·미슈엘은 가로되 “우리들의 모다 우리들 가운데서 개성의 멸각을 느낀다. 사회적 일반성 아니면 우리들 보편세계의 보편적 감정이 바라건데 다시 안겨졌으면 좋겠다. 그때 우리들은 또다시 신의 무릎으로 돌아갈 것임으로” 현대에 처한 시인의 최대비극인 차별을 존재화하는 의식과의 두 가지 방향은 엘리어트에 있어서 조정의 길(mediation), 즉 믿음(foi)으로 가는 길이었다. 사실 엘리어트는 희랍주의와 중세주의와의 종합인 종교적 전통으로 귀의하였다. 그러나 싸르트르는 대타의 눈짓을 막아버린 무한주관, 즉 신의 개념과의 일치를 냉철히 통박한다. 오늘 나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진정 무엇을 남을 것인가. 우리들의 매개는 우리들 배면과 함께 하나의 조정으로 나타날 수 있었는가. 한 죽음(une mort)과 죽음 자체(la mort). 또 유익의 무상과 참살(斬殺)은…… 그리하여 헤블의 신은 헤블의 신대로, 무에 대한 과거에 대한 시간에 대한 그리고 지금에 있는 나에 대한 나의 이웃인 우리들에 대한 막다른 결의란 아직도 침강하는 세계야의 암류에서 버둥치지 않는가. 그것이 싸르트르의 강조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저 무풍의 지대가 더 파아란 달을 뜨게 하고 더 침침한 강물소리를 일게 한다면 내가 기다리듯이 내가 불러볼 나의 인인(隣人)들은 이맘 때 세계 어느 허리에서 죽음을 안고 나와 같이 출혈하는 상채기를 어떻게나 치유할 것인지. 배면의 신을 위하여 배면의 신을 사정없이 난도질하며 기피하며 강박하며 물어뜯는 그들의 황색피부를 어찌 나는 거역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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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이쇼! 너의 철학으론 꿈도 꾸지 못한 별별 일들이 하늘 땅 사이엔 많단 말이야.”(There are more thing in heaven and earth. Horatio, than are dreamt of in your philosophy) (Hamlet) 나는 가치가 되지 않기 위하여 나의 개질을 벗어나는 것이며, 나는 홀로가 되지 말기 위하여 다시 나의 개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이웃이 흘리는 피를 씻어주기 위하여 적어도 그러한 피를 바라보려 그러한 강물로 달음치기 위하여, 지금인 여기에서 일어서는 것이다. 일어서는 것(Aufstand), 아무런 협약도 없이 나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일어서는 것은 아아 남아있는 나의 실존이다. 우리들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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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보루는 광장은 철조망은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지금 나의 정점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느 이전에 나를 휩쓸던 나의 밑창과 같은 설음이라 할 것 같으면 나의 심정공간은 아직도 나와 우리들의 혈장(血醬)으로 펄펄 넘치어라. 어쩌면 지금에 있는 나를 끊임없이 불러보던 계기적 심정과 시의 생생한 메타피직은 어느 종소(宗所)의 컴컴한 출입구에서 아니면 비뿌리는 석계(石階)의 차단한 모서리에서 다만 눈감고 배면한 시간의 신과 함께 허덕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들의 해방을 기다리는 뿐이다. 谷神不死[곡신불사] 그것이 더욱 동양의 계절이며 밤이라고 하였을 때는……오늘 엘리어트의 승리는 문제의 승리일 뿐 시의 승리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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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답한다. 나는 나의 밑깊은 부재에서 떠오는 것이다.”(Je réonds : Je surgis de ma profonde absence) (Valery) 저 한없는 시공에 일어서는 것은, 천만 나래를 털며 세계의 무풍지대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은…… 아아 나의 투시는 저 운속(雲速)하는 엘시놔성곽의 자정으로 다시 초혼하는 무주공산으로 거기 지평선의 전달을 귀담아 쫓는다. L’horizon a pour elle d’éouésa ceinture. 현대시는 바야흐로 그의 매개가 어떤 것인지를 성책(省責)할 일이다. 권위와 신앙. 보다 더 나의 승리로서의 질서를…….
 
 
 

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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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적인 각서는 한국에 현존하는 시인 한 사람을 논하려는 출발에서 어쩔 수 없던 나의 서론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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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이데거의 시간성과 싸르트르의 대타성이 아직도 시의 메타피직을 패진 시켰다곤 생각하기 (敗盡) 무섭다. 더우기나 쉬르리아리스트들은 콤뮤니즘 참여와 대조하여 신의 문제가 끝까지 존재의 문제, 시의 문제라고 할 때에 있어서 명명당한 엘리어트의 신은 우리들의 신과 비하여 너무나 개연하다. 그렇다고 자연과의 관조성이 곧 우리들 신이라고 이르기엔 지금의 상황이 그리 반갑지 않는 것이다. 침강은 우리들을 뇌살한다. 개성이 망각되었던 개성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초개성에 방위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들은 얼마든지 신의 이름을 이패(離牌)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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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불명한 매개를 생각하는 우리들의 계기적 심정, 그리고 지평선의 전달은 배면하는 매개의 부재적인 전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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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의 초탈이란 결국 우리들 내인간(內人間)에 지나지 않는다는 슈바이첼의 신념과 같이 “The superman has not raised himself to the level of superhuman reason… the more we become supermen, the more we become inhuman.”시는 울음우는 매개의 전달을 또는 그러한 심정공간의 개존을 위해 그의 모더니티를 획득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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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머지 않는 날의 보고(補稿)를 생각하며 쓰기로 한 약속의 파탄이 얼마나 나의 뼈저린 불안이었던가를 다시금 고백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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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품 8집, 1954. 11》
【원문】지평선의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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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평선의 전달 [제목]
 
  고석규(高錫圭) [저자]
 
  # 신작품 [출처]
 
  1954년 [발표]
 
  평론(評論) [분류]
 
  # 문학평론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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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4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