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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전(菜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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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강경애
1
채전(菜田)
 
 
2
어렴풋이 잠이 들었을 때 중얼중얼하는 소리에 수방이는 가만히 정신을 차려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안 살림에 대한 걱정인 듯 싶었다. 그래서 그는 포로로 눈이 감기다가 푸루룽하는 바람소리에 그는 또 다시 눈을 번쩍 떠서 문켠을 바라보았다. ‘아이 저 바람 저것을 어쩌나!’ 무의식간에 이렇게 중얼거리며 밤사이에 많이 떨어졌을 사과와 복숭아를 생각하였다. 이 생각을 하니 웬일인지 기뻤다. 무엇보다도 덜 익은 것이나마 배껏 먹을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3
“이번 바람에 저 실과가 다 떨어질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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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내 말이 그 말이얘요. 실과도 돈 값어치가 못 되고 채마니 뭐 변 변하오. 그러니까 일꾼을 줄여야 하지 않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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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나도 그런 생각이여. 그러나 지금 배추밭 부침 때가 아닌가.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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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뭐 걱정이 되어요. 배추밭 부침이나 해놓고 나서 내보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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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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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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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방이는 어느덧 졸음이 홀랑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누구를 내어보내려누. 맹서방이 안 될는지 혹은 추서방인지…… 아이 누굴까? 하고 귀를 기울이나 그들은 잠잠하고 숨소리만 높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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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는 때인가 깜짝 놀라 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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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방아 어서 밥 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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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음성이다. 그는 펄쩍 일어는 나면서도 눈이 자꾸만 감겨지며 정신차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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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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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재차 놀라보니 문턱을 집고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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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의 계집애, 또 한 개 붙여 주어야 일어날 모양이구나!” 지정이 저르릉 울린다. 그는 그제야 안타깝게 감겨지는 눈을 손으로 부벼 치며 문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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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뜻한 바람이 그의 앞머리칼을 살랑살랑 흔들어 주었다. 그는 적이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심히 하늘을 쳐다보며는 ‘언제나 잠을 실컷 자보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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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하늘은 컴컴하였다. 그러나 저 동켠 하늘 쪽으로는 회색빛 선을 뿌옇게 둘러치고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다가 부엌문을 흘끔 바라보았다. 이렇게 밖에 섰는 것은 무섭지 않으나 오히려 부엌이 무섭게 생각되었다. ‘어쩌누 맹서방이든지 누구든지 일어났으면 좋겠어’하며 부엌 뒤로 연달린 방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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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우물에서 두레박 넣는 소리가 찌꺽찌꺽나므로 그는 주춤 물러서다가 담뱃불이 껌벅껌벅하는 것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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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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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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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서방의 음성이다. 그는 얼핏 달려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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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서방, 부엌에 불 좀 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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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꿀꺽꿀꺽 마신 맹서방은 이리로 왔다. 그래서 부엌 문을 비꺽 열고 들어간다. 수방이는 뒤를 따르다가 부엌 속에서 뛰어나오는 듯한 시꺼먼 어둠에 그는 주춤하며 저 속에 무엇이나 들어 있지 않나? 하는 불안이 불쑥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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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긋는 성냥소리에 그는 얼핏 문안으로 들어서며 맹서방의 굵다란 팔이 등불을 차차 시렁 위로 올리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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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젠 되었지. 이렇게 네 청을 들어주었으니 내 청도 들어줘야 해.” 맹서방은 빙긋이 웃는다. 그는 마주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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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또 그 말이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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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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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가 하게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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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얼핏 생각키운 것은 어제 저녁 잠결에 들은 말이다. 그래서 그는 남보는 줄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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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맹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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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을 흘끔 바라보다가 머리를 푹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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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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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서방은 수방의 눈치를 살피며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주인 마누라에 대한 말이 아닌가 하고 직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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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따 이야기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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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갸웃이 들었다. 맹서방은 싱긋 웃으며 밖으로 나간다. 수방이는 물끄러미 어둠 속으로 충충 걸어나가는 그의 뒤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맹서방일지 누가 아나? 이렇게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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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박소리가 또 난다. 그리고 중얼중얼하는 여러 사람의 소리에 그는 얼핏 돌아서며 부뚜막으로 왔다. 연기에 걸은 냄새가 아궁이에서 뭉클뭉클 난다. 그는 솥을 횅횅 부시며 마마는 나쁜 사람이어 그리고 바바두…… 하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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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우구구 끓어날 때에야 그의 어머니는 부시시 나온다. 수방이는 얼핏 몸을 바로 가지며 무엇을 또 잘못했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속이 울 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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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하고 방정맞게 하품을 하고 난 어머니는 이편으로 기우뚱기우뚱 걸 어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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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는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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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추채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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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또 많이 둘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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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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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말똥말똥 바라보다가 돌아서 나간다. 수방이는 그제야 흘끔 쳐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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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에 빛나는 어머니의 귀고리! 걸음발을 따라 무서운 빛을 발하였다. 귀고리가 까뭇 없어질 때 그는 뜻하지 않은 한숨을 후 쉬며 무심히 자기 귀를 만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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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끼워준 이 귀고리! 어떤 때는 시꺼먼 빛이 미워서 면경을 보며 몇 번이나 얼굴을 찡그렸는지 몰랐다. 그리고 떼어서 몰래 내치려다가도 어머니의 꾸지람이 무섭고 매손이 두려워 그냥 두곤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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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 음”하는 어머니의 하품소리가 또 들린다. 그는 흘끔 문켠을 바라보았다. 저켠으로 포도넝쿨이 회색빛을 두르고 어슬어슬하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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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불을 멈추고 벌컥 일어나며 ‘포도두 떨어졌나’하고 머리를 넘석하여 보았다. 그러나 아직도 채 밝지를 않아서 분명히 보이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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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볼까 하고 한발 내디디었다가 어머니가 밖에 있는 것을 생각하며 단념하고 말았다. 그러나 끊이지 않고 눈이 그리로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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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후에 또다시 보니 포도는 한 송이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실망을 하며 사과나 복숭아야 좀 떨어졌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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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퍼들이고 설거지를 하고 나니 해가 떠오른다. 그는 솔치를 긁어먹고 나서 바구니를 들고 채마밭으로 나왔다. 그제야 우방이는 깡충깡충 뛰어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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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복숭아 떨어지지 않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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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없구나 저 아래나 가보렴.” 곁에 섰던 맹서방이 우방이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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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마마가 다 주워 들여갔다. 까우리 애들한테 눅게 판다고……” 우방이는 머리를 끄덕끄덕하며 걸음질쳐 들어간다. 수방이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쟤는 복숭아를 먹겠구나 생각을 하니 웬일인지 새벽부터 졸이던 가슴이 슬픔과 아픔으로 변하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맹서방은 괭이를 높이 들어 땅을 푹 파헤친다. 뒤따라서 감자가 와그르르 일어난다. 수방이는 얼핏 감자를 들어보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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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서방, 이거 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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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견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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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방이는 머리를 끄덕끄덕해 보인다. 속눈썹까지 폭 내려 덮은 그의 앞머리칼을 맹서방은 사랑스러운 듯이 바라보며 나두 언제 계집을 하나 얻어 데리고 살아볼거나 하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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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끈 끼치는 똥내에 수방이는 바라보니 배추밭 부침을 하려고 추서방과 그 외 몇몇 일꾼들은 똥통을 배추밭에 날랐다. 그는 깜빡 잊었던 생각에 얼굴이 화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마침 말을 하려고 맹서방을 바라보았을 때 웬일인지 얼핏 입이 벌려지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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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말한 것을 마마나 바바가 안다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뒤미처 일어난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머리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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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소리가 맴맴 하고 났다. 그는 얼핏 매미 우는 편으로 머리를 돌리다가 무심히 띄인 우방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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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새로 사온 산뜻한 분홍빛 양복을 입고 책보를 끼고 그리고 한켠 손에는 복숭아가 쥐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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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이나 부럽게 바라본 수방이는 맥없이 머리를 숙일 때 자기의 보기 싫은 퍼렁옷이 새삼스럽게 더 보기 싫고 추잡스러워 보였다. 난 밤낮 이런 것만 입고 있어야 하나. 우방이는 그렇게 잘 해주고, 마마두 잘 해 입고 바바두 그래두 나만 안 해줘. 이런 생각을 할 때 눈물이 글썽글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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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감자 주워라. 야! 이것은 꽤 크다. 너만이나 하구나.” 괭이 끝으로 밀어 보낸다. 수방이는 냉큼 집어 보았다. 눈물 고인 눈에는 어느덧 웃음이 돌았다. 그리고 이 감자를 삶아서 먹었으면 맛이 있겠다 하고 맹서방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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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왜 울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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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서방은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수방이는 가라앉으려던 슬픔이 맹서방의 말에 기세를 돋궈 으악 쓸어나오는 것을 혀끝을 꼭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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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서방은 얼핏 새벽에 무심히 들어 두었던 수방의 말이 생각키우며 아마 어젯밤에 저 애가 매를 또 맞은 모양이구나 하고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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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가 또 때리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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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좌우로 머리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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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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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방이는 머리를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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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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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침착한 그의 음성에 맹서방은 눈이 둥그래질 뿐 대답이 얼핏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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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방이는 고추 따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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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소리치는 바람에 그는 소스라쳐 놀란다. 그리고 귀밑까지 빨개진다. 맹서방은 의아하여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74
수방이는 얼른 일어나 고추밭으로 왔다. 그래서 고추를 따며 이 말을 해야 좋은가 안 해야 되나? 하고 맘으로 물어보았다. 물론 마마와 바바를 생각한 다면 안 해야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이 말을 하지 않고는 자기 맘이 이렇게 편치 않고 곧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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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하나…… 맹서방도, 추서방도, 이서방도, 그러구 그러구 모두 다들 좋은 사람들이 이렇게 나와 같이 일만 할 줄 알지. 일만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인지 몰라? 바바와 같이 마마와 같이 노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 그러면 이 고추가 어떻게 달리며 감자가 어떻게 땅 속에서 나와? 마마같이 놀고 가만히 있다면 말이야. 그러면 일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들이지 뭐야. 그래두 우리들은 좋은 옷은 못 입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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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각에는 고운 옷 입는 사람이 훌륭하고도 무엇을 많이 아는 사람으로 짐작되었던 것이다.
 
77
그는 뜨거운 햇볕을 피하여 복숭아나무 아래로 왔다. 그때에 무심히 흘려 듣는 괭이소리가 뚝 끊어지고 한참이나 들리지 않음에 그는 머리를 번쩍 들며 감자를 다 캐었나? 얼마나 캤누? 하고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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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서방은 감자 담은 광주리와 참대 바구니를 어깨에 올려놓고 손에 들고 벌컥 일어난다. 그래서 왜죽왜죽 집으로 들어간다. 이것을 바라보는 수방이는 가벼운 감격이 사르르 올라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더구나 광주리 위로 수북이 담아 올라간 감자를 보니 말로 형용할 수 없이 기뻤다.
 
79
저것을 내일 장에 갖다가 팔면 돈이 되지. 그 돈은 아부지가 가지구서 쌀두 사오구 나무도 사오지. 그리고 우방의 양복도 사오고 마마의 옷두 사오구 내 것만 안 사오지…… 바바는 나쁜 사람이어…… 만일에 그 돈을 맹서방이 아니 다른 일꾼들이 가지면 반드시 자기의 옷부 터 사다줄 것 같았다. 누가 아나? 그 사람들도 다 내 맘과 같지 않아. 이렇게 생각하다가 얼핏 맹서방이 자기 머리에 꽂은 핀을 담배용에서 떼어서 사다준 것을 생각하고, 아니야 그들은 그렇지 않아 하고 머리핀을 슬슬 어루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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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맹서방이 총총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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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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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핀 또 만지누나. 허허.”
 
83
빨간 유리알 박힌 핀 만지는 손을 보다가 무심히 바라보니 구슬 같은 눈물 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84
“맹서방, 나 핀 사주었지. 후담에 또 뭐 사줄 테야?” 의붓어머니한테서 시달리는 그라 항상 불쌍하게 보았지만 더구나 몇 푼 주지 않고 사다준 핀을 만지며 저러할 때에는 눈허리가 시큼시큼해서 바라볼 수가 없었다.
 
85
“그래 너 원하는 대로.”
 
86
“정말!”
 
87
그의 조그만 가슴은 감격에 넘쳐 들먹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은 충혈되는 것을 보았다.
 
88
수방이는 한 걸음 다가서며 사면을 휘휘 돌아본 후에 맹서방 귀에다 입을 대고 종알종알 하였다. 맹서방의 눈은 점점 둥그레지며 비분한 기색이 양볼 위로 뚜렷이 흘러내려온다.
 
89
다 듣고난 맹서방은 한참이나 무슨 생각을 하였다. 수방이는 안달을 하여 저리 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바나 마마나 말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부탁 하고도 맘이 안 되어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시원하였다.
 
90
다음날 아침 맹서방은 수방의 아버지인 왕서방과 마주 앉고 이러한 조건을 제출하였다.
 
 
91
1.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들을 겨울까지 내보내지 말 일.
92
2. 우리들의 옷을 한 번씩 해줄 일.
 
 
93
이 두 조건을 듣지 않으면 그들은 오늘로 나가겠다는 것이다.
 
94
왕서방은 눈이 둥글하였다.
 
95
어제밤 자리 속에서 귓속말로 한 것을 어떻게 저들이 알았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어떻게 처리를 해야 좋을지를 몰라 무겁게 내려덮은 그의 눈까풀이 가늘게 떨렸다.
 
96
“우리는 말로만은 신용을 할 수 없으니까 이런 것을 대서방에게 맡기어 써왔습니다.”
 
97
종이 조각을 내놓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갑자기 일꾼을 사대서 채마밭 부침을 한다고 하면 돈이 더 들 터이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98
그래서 그는 그 종이에다 도장을 눌렀다.
 
99
며칠 후에 수방이는 소문 없이 죽고 말았다. 그의 머리에는 여전히 핀이 반짝였다.
【원문】채전(菜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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