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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임진왜란]과 事大主義[사대주의] - 外力[외력] 依存[의존]의 敎訓[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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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壬辰倭亂[임진왜란]을 論議[논의]함에 있어서 두 가지 큰 敎訓[교훈]을 發見[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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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나는, 倭賊[왜적]과 같이 好戰的[호전적]이고 殘忍無道[잔인무도]한 民族[민족]을 바로 이웃에 두고서는, 우리는 恒常[항상] 그들의 動靜[동정]을 보삺이여 對備[대비]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요지음처럼 倭賊[왜적]의 武裝解除[무장해제]를 後悔[후회]한다고 뻔뻔스럽게 放言[방언]하는 사나히가 外國[외국]에는 벌서 나타났다고 傳[전]하며 朝鮮[조선] 國內[국내]에도 이에 共鳴[공명]하는 者[자]가 없잖어 있으리라고 推測[추측]되는 때에는 倭賊[왜적]의 再武裝[재무장]에 對[대]하여 크게 警戒[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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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百[삼백] 五十年[오십년] 前[전]의 壬辰倭亂[임진왜란]은 여기에 좋은 參考[참고]가 될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祖上[조상]들이 犯[범]한 過誤[과오]를 다시 뒤푸리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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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큰 敎訓[교훈]은 自力[자력]으로써 祖國[조국] 防禦戰[방어전]을 遂行[수행]하지 못하고 外力[외력]에 依存[의존]하여 國家[국가]의 生命[생명]이 存續[존속]될 때에는 그 弊害[폐해]가 이루 形容[형용]할 수 없을 만치 莫大[막대]하고 深刻[심각]하다는 것이다. 國家[국가] 保全[보전]의 虛名[허명] 밑에 强要[강요]되는 이 事大主義[사대주의]는 其實[기실]은 불타는 民族精氣[민족정기]를 去勢[거세]해 버리는 屈辱[굴욕]에 甘受[감수]하는 奴隸根性[노예근성]을 助長[조장]하는 以外[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解放[해방] 以後[이후] 이미 三年[삼년]이 훨신 넘었음에도 不拘[불구]하고 朝鮮[조선] 땅에 아직도 外國[외국] 軍隊[군대]가 駐屯[주둔]하고 있으며 또 同時[동시]에 外力[외력] 依存[의존]의 事大主義[사대주의]가 一部[일부]에서 公公然[공공연]하게 主張[주장]되고 있는 이 때에 있어서 가장 緊急[긴급]하고 切實[절실]한 敎訓[교훈]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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所謂[소위]‘藩邦[번방]을 再造[재조]’해 달라고 使臣[사신]들이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비러서 모셔내온 明將[명장] 李如松[이여송]가 그의 軍隊[군대]는 事大主義者[사대주의자]들에게는 ‘天朝[천조]’에서 나온 ‘天兵[천병]’으로 보이었을는지 모르나, 一般[일반] 大衆[대중]에게는 傲慢無軌[오만무궤]의 暴君[폭군]이며 苛斂誅求[가렴주구]를 일삼는 惡魔[악마]로 밖에는 보이지 않었을 것이다. 殺人[살인], 强姦[강간], 放火[방화], 略奪[약탈]에 있어서 李如松[이여송]의 軍隊[군대]는 倭賊[왜적]에 지지 않을 程度[정도]로 때로는 그 以上[이상]으로 神人[신인]이 共怒[공노]할 犯罪[범죄]를 恣行[자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明[명]에서 나온 救援兵[구원병]의 正體[정체]며 ‘藩邦[번방]의 再造[재조]’해준 恩人[은인]들의 ‘거륵한’ 行蹟[행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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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倭賊[왜적]에 關[관]한 것은 暫間[잠간] 保留[보류]하고, 이 破廉恥[파렴치]한 恩人[은인] ─ 明[명]의 救援兵[구원병]에 關[관]하여 몇마디 적어보고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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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임진왜란]이란 國家存亡之秋[국가존망지추]를 당하여 兩班[양반] 官僚[관료]들이 明[명]하게 救援兵[구원병]을 請求[청구]하게 된 것은 이미 李成桂[이성계]가 高麗[고려]를 떠엎고 李朝[이조]를 建國[건국]할 때부터 明[명]의 封冊[봉책]을 받은 데 緣由[연유]하는 것이다. 朝鮮[조선]이라는 國號[국호]까지 明[명]의 指示[지시] 없이는 確定[확정]하지 못하였으며 明[명]의 正式[정식] 認準[인준]을 받기 前[전]에는 政府[정부] 當局者[당국자]들은 不安[불안] 焦燥[초조]를 免[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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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直接的[직접적]인 政治的[정치적] 隸屬[예속]이 있기 前[전]에 兩班[양반] 官僚[관료]들은 儒敎[유교]를 通[통]하여 이미 精神的[정신적]으로 明[명]에 隸屬[예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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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敎[유교]가 宗敎[종교]냐 아니냐는 論者[논자]에 따라서 異見[이견]이 없지 않으나 儒敎[유교]의 篤實[독실]한 信徒[신도]이면 信徒[신도]일수록 儒敎[유교]의 聖地[성지] 中國[중국](같은 中國[중국]이라도 漢民族[한민족]이 建設[건설]한 夏[하], 殷[은], 周[주], 漢[한], 唐[당], 宋[송], 明[명]에 局限[국한]한다.)에 對[대]하여 祖國[조국]과 같은 憧憬[동경]을 갖고 好意[호의]를 갖는 것은 否定[부정]할 수 없는 事實[사실]이다. 그들의 祖國[조국]의 朝鮮[조선]이기 前[전]에 먼저 中國[중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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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前[전]에 全羅道[전라도] 事件[사건]이 勃發[발발]하였을 때 어느 基督敎[기독교] 信者[신자]를 맛나서 그들이 이러한 混亂期[혼란기]에 處[처]하여서도 泰然[태연]하게 그들의 行事[행사]로 繼續[계속]하여 或[혹]은 祈禱[기도]를 디리고 或[혹]은 郊外[교외]에 나가서 幸福[행복]된 하루를 즐길 수 있는 것은 그들의 國籍[국적]이 天上[천상]에 있기 때문이라고 ― 弄談[농담] 비슷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적지아니 衝擊[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基督敎[기독교] 信者[신자]들의 祖國[조국]은 地上[지상]에 있기 前[전]에 먼저 天上[천상]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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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마찬가지로 朝鮮[조선]의 儒學者[유학자] ― 兩班[양반] 官僚[관료]들의 祖國[조국]은 朝鮮[조선]이기 前[전]에 먼저 中國[중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들어누어 자다가도 孔子[공자]님 소리만 나면 本能的[본능적]으로 벌덕 이러나서 두 무릅을 착 꿇었으며 漢字[한자]를 眞書[진서]라 하고 한글을 諺文[언문]이라고 하는 데 조곰도 躊躇[주저]하지 않었다. 世宗大王[세종대왕]이 訓民正音[훈민정음]을 制定[제정]하느라고 苦心[고심] 慘憺[참담]할 때 極力[극력] 이것을 反對[반대]하던 儒敎中毒者[유교중독자] 副提學[부제학] 崔萬理[최만리]의 上疏文[상소문]은 이 方面[방면]의 가장 좋은 參考文獻[참고문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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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中國[중국]에 태어나지 못하고 朝鮮[조선]에 태여난 것을 얼마나 怨望[원망]하였으며 呪咀[주저]하였던가! 豪傑男兒[호걸남아]로 自他[자타]가 共認[공인]하던 林悌[임제]로부터서도 이러한 嘆聲[탄성]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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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壬辰倭亂[임진왜란]을 마지하여 그들의 精神的[정신적] 祖國[조국]인 明[명]에 莫大[막대]한 期待[기대]를 가지고 그 後援[후원]을 要請[요청]하였음은 아주 當然[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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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希望[희망]과 現實[현실]은 그렇게 쉽게 一致[일치]하지 않었다. 그들은 明[명]을 祖國[조국] 乃至[내지] 祖國[조국] 以上[이상]으로 생각하였으나 明[명]에서 나온 救援兵[구원병]들은 決[결]코 朝鮮[조선]을 祖國[조국]이라고 생각지 않었다. 東方[동방]의 禮儀之國[예의지국]이란 一片[일편]의 外交辭令[외교사령]에 不過[불과]하고 事實[사실]은 別[별]수없이 東方[동방]의 오랑캐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明[명]의 救援兵[구원병]들이 朝鮮[조선]에서 마치 敵國[적국]에 나온 것처럼 强姦[강간]과 略奪[약탈]을 恣行[자행]한 것은 또한 當然[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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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임진왜란] 當時[당시]에 恒常[항상] 要路[요로]를 떠나지 않고 또 明將[명장] 李如松[이여송]과 가장 交涉[교섭]이 많었던 柳成龍[유성룡](號[호]는 西崖[서애])은 그가 典型的[전형적]인 事大主義者[사대주의자]였으며 따라서 明[명]의 救援兵[구원병]의 行動[행동]을 되도록 好意的[호의적]으로 解釋[해석]하고 잔득 修飾[수식]하였음에도 不拘[불구]하고 有名[유명]한 『懲毖錄[징비록]』 속에서 여기저기 그의 不平不滿[불평불만]을 吐露[토로]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여기서 그 한두 가지를 紹介[소개]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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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如松[이여송]이 平壤[평양]을 回復[회복]하고 一路[일로] 南下[남하]하다가 碧蹄[벽제]에서 大敗[대패]하자 東坡[동파]에 退却[퇴각]하여 本國[본국]으로 回軍[회군]하려고 하였다. 柳成龍[유성룡]은 李如松[이여송]과 面會[면회]하고 心情[심정]을 삺이다가 다시 進擊[진격]할 것을 哀乞伏乞[애걸복걸]하였다. 李如松[이여송]은 或[혹]은 降雨[강우]로 길이 질어서 前進[전진]할 수 없다고 하고, 或[혹]은 倭賊[왜적]의 數[수]가 많어서 衆寡不敵[중과부적]이라고 하여 핑계만 대며 進擊[진격]은 커냥 開城[개성]으로 退却[퇴각]해 버렸다. 그리고는 敗戰[패전]한 화푸리를 朝鮮[조선]의 百姓[백성]들에게 恣行[자행]하였다. 軍糧[군량]이 不足[부족]하다고 戶曹判書[호조판서] 李誠中[이성중], 京畿左營司[경기좌영사] 李廷馨[이정형] 等[등]은 李如松[이여송] 앞에 呼出[호출]되어 大聲詰責[대성힐책]을 당하고 軍法[군법]으로써 處斷[처단]하려 하는 것을 柳成龍[유성룡]이가 들어가서 陳謝[진사]해서 겨우 모면하였다.(一國[일국]의 大臣[대신]들이 이 地境[지경]이니, 一般[일반] 百姓[백성]들이야 말해 무었하랴!) 咸鏡道[함경도]에 侵入[침입]하였던 加藤淸正[가등청정]이가 平壤[평양]을 來襲[내습]하려한다는 所聞[소문]을 좋은 口實[구실]로 삼어서 李如松[이여송]은 다시 平壤[평양]까지 後退[후퇴]하고 말었다. 그는 참말로 回軍[회군]할 意思[의사]가 있었던 것이다. 多幸[다행]히 全羅道[전라도] 巡警使[순경사]로 있다가 北上[북상]하여 幸州山城[행주산성]에 依據[의거]한 權慄[권율]이가 巧妙[교묘]한 作戰[작전]으로 倭敵[왜적]을 大破[대파]하였으므로, 여기에 元氣[원기]를 回復[회복]하여 李如松[이여송]은 다시 南進[남진]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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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안에 謀略[모략] 外交[외교]의 選手[선수] 沈惟敬[심유경]을 시키어 朝鮮[조선]을 犧牲[희생]시키어 倭賊[왜적]과 和議[화의]하자는 工作[공작]이 熾烈[치열]하게 展開[전개]되며, 이것을 막너라고 柳成龍[유성룡] 等[등]이 안절부절하였다. 그러나 和議[화의]하고 안하고는, 또 어떠한 條件[조건]으로 和議[화의]하느냐는 李如松[이여송]의 專斷[전단]에 依[의]한 것이지, 柳成龍[유성룡] 等[등]이 敢[감]히 干涉[간섭]할 배가 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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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서울에 入城[입성]하여서도 南[남]쪽으로 退却[퇴각]하는 倭賊[왜적]을 그저 傍觀[방관]할 뿐이었다. 柳成龍[유성룡]이 李如松[이여송]에게 倭賊[왜적]을 곧 追擊[추격]할 것을 建議[건의]하니, 李如松[이여송]은 漢江[한강]에 배가 없다고 핑계하였다. 柳成龍[유성룡]이가 헐레벌덕하여 갓갓으로 周旋[주선]하여 배를 準備[준비]해 놓으니, 李如松[이여송]은 발병이 났다고 回避[회피]해 버렸다. 이 退却[퇴각]하는 倭賊[왜적]이 途中[도중]에서 얼마나 百姓[백성]들을 殺戮[살륙]하든지, 그것은 李如松[이여송]의 알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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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임진왜란]의 最大[최대]의 名將[명장] 李舜臣[이순신]도 이 救援兵[구원병] 때문에 적지아니 괴로웠다. 워낙 李舜臣[이순신]이 高潔[고결]한 人格[인격]과 天才的[천재적]인 作戰[작전]에 壓倒[압도]되어 그 사이에 큰 摩擦[마찰]은 없었으나, 이 쓸 데 적은 上典[상전]이 여간 가루거치지 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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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能[무능]한 統制使[통제사] 元均[원균]이 閑山[한산]에서 大敗[대패]하고, 억울하게 陋名[누명]을 쓰고 投獄[투옥]되었던 李舜臣[이순신]이 다시 統制使[통제사]가 되어 珍島[진도]로 出動[출동]하였을 때에 明[명]의 水兵都督[수병도독] 陳[진]린이 여기 來援[내원]하였다. 陳[진]린은 性格[성격]이 몹시 暴猛[포맹]하여 아무도 그 비위를 마추지 못하였으므로, 큰일났다고 모다 걱정하였다. 李舜臣[이순신]은 陳[진]린의 배가 오자 軍儀[군의]를 整備[정비]하여 멀마 出迎[출영]하고, 窮塞[궁색]한 軍糧[군량]을 애낌없이 내놓아 그들을 款待[관대]하였다. 救援兵[구원병]들은 모다 술이 大醉[대취]하여 “果然[과연] 名將[명장]이라”고 稱讚[칭찬]이 藉藉[자자]하였다. 賊船[적선]이 來襲[내습]하자 이를 擊破[격파]하여 賊首[적수] 四十級[사십급]을 얻었으나, 그 功[공]을 全部[전부] 陳[진]린에게 讓步[양보]하였다. 陳[진]린이 더욱 기뻐하여 以後[이후]부터는 모두들 李舜臣[이순신]과 相議[상의]하였으며, 李舜臣[이순신]을 “經天緯國[경천위국]의 才操[재조]와 補天浴日[보천욕일]의 功[공]이 있다”고 心服[심복]하였다. 그러나 陳[진]린을 이처럼 心腹[심복]시킴에는 李舜臣[이순신]의 눈물겨운 忍耐[인내]와 努力[노력]이 必要[필요]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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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明[명]의 救援兵[구원병]이 얼마나 眼下無人[안하무인]의 態度[태도]로 朝鮮[조선]에 君臨[군림]하였나는 通俗的[통속적]인 이야기책에 훨신 露骨的[노골적]으로 記錄[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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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如松[이여송]이 救援兵[구원병]을 거느리고 朝鮮[조선]에 나와 宣祖大王[선조대왕]과 맛나는 場面[장면]을 그린 一節[일절]을 抄[초]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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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은 뜻밖에 왜란을 당하오니 오직 근심하시리가. 황상의 명을 받자와 왔사온대 대왕을 보오니 지성이 없사오니 아모리 생각하야도 도읍지 못하고 그저 도라가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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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거날. 상이 근심하사 일영(崔一令[최일영])다려 이여송이 하던 말을 난낫치 이르시니 일영이 주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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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는 근심 마르소서. 당장(唐將) 있는 뒤에 칠성단을 모시고 독을 씨고 축문을 읽으시면 당장이 듣고 용서할 도리가 있사오니 그대로 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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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즉시 영을 나려 단을 모으라 하시고 단애 올라 독을 씨고 슬피 통곡하시니 이여송이 듣고 문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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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이 장군님이 그저 회군하신단 말을 드르시고 우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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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슲으다. 상(相)을 보니 왕후의 기상이 아니압더니 우름 소래를 드르니 용의 우름 소래 분명하도다. 사백년 사직이 넝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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堂堂[당당]한 一國[일국]이 外國[외국] 軍隊[군대]의 繼續[계속] 駐屯[주둔]을 願[원]하기 爲[위]하여, 外國[외국] 軍隊[군대]의 指揮官[지휘관]의 비위를 마추기 爲[위]하여 단에 올라 독을 쓰고 슲이 痛哭[통곡]하는 꼴을 想像[상상]해 보라. 李如松[이여송]의 傲慢不遜[오만불손]한 態度[태도]도 態度[태도]려니와 外力[외력]에 阿諛[아유]하기 爲[위]하여는 體面[체면]도 自尊心[자존심]도 다 버리고 如何[여하]한 屈辱[굴욕]이라도 甘受[감수]하는 兩班[양반] 官僚[관료]들의 徹底[철저]한 事大主義[사대주의]에 ‘感嘆[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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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以外[이외]에도 여러 가지 壬辰錄[임진록], 野史[야사], 傳說[전설] 等[등]에 明[명]의 救援兵[구원병] ― 特[특]히 그 指揮官[지휘관] 李如松[이여송]의 不測[불측]학 行動[행동]에 對[대]하여 가지가지의 逸話[일화]를 傳[전]하고 있다. 或[혹]은 朝鮮[조선]과같은 偏小之國[편소지국]에 英雄[영웅] 傑士[걸사]가 많이 나서는 안된다고 해서 朝鮮[조선] 八道[팔도]를 돌아단기며 精氣[정기]가 通[통]하지 않도록 名山[명산]에는 모다 칼침을 주었다고 하고(서울 市民[시민]이 朝夕[조석]으로 바라보는 南山[남산]도 李如松[이여송]의 칼침을 마저서 한 쪽이 턱이 젔다고 한다.) 或[혹]은 壬辰倭亂[임진왜란]이 끝나고나서도 李如松[이여송]은 제가 朝鮮[조선]의 國王[국왕]이 될려고 回軍[회군]하지 안는 것을 太白山[태백산]의 少年[소년]이 나타나서 李如松[이여송]을 혼구녁을 내어 겨우 쫓아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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或[혹]은 壬辰倭亂[임진왜란]에 있어서 朝鮮[조선]이 自力[자력]으로써 倭賊[왜적]을 擊退[격퇴]할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外國[외국] 軍隊[군대]의 힘을 비러서라도 獨立[독립]을 確保[확보]한 것이 옳지 않었느냐고 辨明[변명]하는 사람도 있을는지 모르나, 그 當時[당시]의 朝鮮[조선]의 國力[국력]으로써, 兩班[양반] 官僚[관료]들이 쓸 데 없는 黨派[당파] 싸흠만 하지 않고 一致協力[일치협력]하여 對備[대비]하였다면, 確實[확실]히 自力[자력]으로써 能[능]히 祖國[조국]을 防禦[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偏狹[편협]하고 無能[무능]한 兩班[양반] 官僚[관료]들 때문에 戰爭[전쟁]途中[도중]에서 이미 爀爀[혁혁]한 戰功[전공]을 세운 李舜臣[이순신] 不當[부당]하게 投獄[투옥]되어, 그 때까지 겨우 整備[정비]해 놓은 無敵艦隊[무적함대]를 元均[원균]이가 끌고 나가 閑山[한산] 싸흠에서 한거번에 犧牲[희생]시키어 버리고, 各地[각지]에서 벌떼처럼 이러난 農民[농민]들의 義兵[의병]을 쓸 데 없이 警戒[경계]하고 牽制[견제]하느라고, 그 有能[유능]한 指揮者[지휘자] 金德齡[김덕령] 郭再祐[곽재우] 等[등]을 얼토당토 않은 陋名[누명]을 씨워 或[혹]은 殺害[살해]하고 或[혹]은 投獄[투옥]하여, 그들의 一切[일체]의 機動性[기동성] 있는 遊擊[유격] 作戰[작전]을 封鎖[봉쇄]해 버린 事實[사실]만을 想起[상기]하여도 이것을 認定[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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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百步[백보]를 讓步[양보]하여, 壬辰倭亂[임진왜란]에 있어 外力[외력] 依存[의존]이 不可避[불가피]한 運命[운명]이었다고 하자. 李如松[이여송]의 軍隊[군대] 없이는 朝鮮[조선]의 獨立[독립]이 保全[보전]할 수 없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할지라도 外力[외력] 依存[의존]이 얼마나 큰 犧牲[희생]을 要[요]하는 것이며, 事大主義[사대주의]가 얼마나 屈辱的[굴욕적]인 것인가는 뼈앞으게 體驗[체험]하였을 것이며, 同時[동시]에 多少[다소]라도 民族觀念[민족관념]을 保有[보유]하고 있다면 어떻게든지하여 이 事大主義[사대주의]를 淸算[청산]하도록 努力[노력]하여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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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不拘[불구]하고 兩班[양반] 官僚[관료]들은 壬辰倭亂[임진왜란]을 契機[계기]로 하여 明[명]에 對[대]한 事大主義[사대주의]를 더욱 强化[강화]하였다. 그리하여 朝鮮[조선]의 名將[명장] 李舜臣[이순신]은 제처놓고, 倭將[왜장] 加藤淸正[가등청정]을 威脅[위협]하기 爲[위]하여 서울 南[남]쪽에서 나타나 東[동]쪽으로 사라졌다는 關雲長[관운장]을 모시느라고 南廟[남묘]와 東廟[동묘]를 지었으며, 光海君[광해군] 때에는 明[명]의 命令[명령]에 順從[순종]하여 滿洲[만주]의 胡人[호인]을 치느라고 國境[국경]을 넘어 멀리 出戰[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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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報酬[보수]로써 仁祖[인조] 때에 丙子胡亂[병자호란]이라는 壬辰倭亂[임진왜란] 以上[이상]의 慘憺[참담]하고 屈辱的[굴욕적]인 戰爭[전쟁]을 마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嚴冬雪寒[엄동설한]에 홀로 南漢山城[남한산성]에서 벌벌 떨다가 白旗[백기]를 들고 王[왕] 自身[자신]이 胡王[호왕]에게 完全[완전]히 屈服[굴복]하고 말었다. 外力[외력] 依存[의존]을 金科玉條[금과옥조]로 하는 무리에게 참으로 無慈悲[무자비]한 鐵槌[철퇴]가 나려진 것이다. 그러나 朝鮮[조선]의 兩班[양반] 官僚[관료]들은 事大主義[사대주의]의 痼疾[고질]이 이미 膏肓[고황]에 侵入[침입]한지라. 丙子胡亂[병자호란]을 契機[계기]로 하여 尊明思想[존명사상]을 더욱 鼓吹[고취]하고 明[명]의 滅亡[멸망] 後[후]에도 明[명]의 最後[최후]의 紀元[기원] 崇禎[숭정]을 언제까지나 지켜 나갔으며, 宋時烈[송시열](號[호]는 尤菴[우암])같은 이는 華陽洞[화양동]에 萬東廟[만동묘]를 지어 尊明[존명]의 뜻을 表示[표시]하였다. 孝宗[효종] 때에 淸[청]을 치겠다고 計劃[계획]한 北伐[북벌]의 꿈은 꿈으로서 中止[중지]된 것이 얼마나 多幸[다행]하였더냐! 朴趾源[박지원](號[호]는 燕岩[연암])의 <許生傳[허생전]>을 빌 것도 없이 이 北伐[북벌]의 計劃[계획]은 참으로 無謀[무모]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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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신 더 나려와서 高宗[고종] 때의 東學亂[동학난]을 다시 한번 回顧[회고]해 보자. 全羅道[전라도] 古阜[고부]에서 烽起[봉기]한 이 農民[농민]의 反亂[반란]은 瞬息間[순식간]에 南鮮[남선] 一帶[일대]를 휩쓰러 所謂[소위] 官軍[관군]으로써는 對抗[대항]할 道理[도리]가 없었다. 이 때에 있어서 閔妃[민비]를 中心[중심]으로 한 兩班[양반] 官僚[관료]들은 뻔뻔스럽게도 丙子胡亂[병자호란]의 怨讎[원수] 淸[청]에게 救援兵[구원병]을 請求[청구]하였으며 이 통에 倭賊[왜적]도 朝鮮[조선]에 進出[진출]하게 되어 그여히 朝鮮[조선]을 國際爭覇戰[국제쟁패전]의 싸흠터로 만드러 버렸다. 이 때에 萬若[만약] 外國[외국]의 干涉[간섭]이 없었다면 썩어빠진 李朝[이조]는 단숨에 轉覆[전복]되고 어쩻든 自力[자력]으로써 民主[민주] 改革[개혁]이 斷行[단행]되어 옳은 方向[방향]을 向[향]하여 巨大[거대]한 第一步[제일보]를 내디딜 수 있었을 것이다. 腐敗[부패]할대로 腐敗[부패]한 王朝[왕조], 民族[민족]을 背反[배반]한 兩班[양반] 官僚[관료]들은 破廉恥[파렴치]하게도 外國[외국] 軍隊[군대]의 힘을 비러 同族[동족]을 殺戮[살륙]하고 正當[정당]한 革命[혁명] 勢力[세력]을 抹殺[말살]해 버리어 그들의 더러운 生命[생명]을 延長[연장]하였다. 그리고 이 當然[당연]한 結果[결과]로 韓日合倂[한일합병]이 오고 朝鮮[조선] 民族[민족] 全體[전체]가 倭賊[왜적]의 奴隸[노예]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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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이상] 壬辰倭亂[임진왜란] 以來[이래]의 兩班[양반] 官僚[관료]들의 事大主義[사대주의]가 얼마나 國事[국사]를 망치었으며 反民族的[반민족적] 罪惡[죄악]을 犯[범]하였나 그 一端[일단]을 紹介[소개]하였는데, 이것은 오늘날 外國[외국] 軍隊[군대] 駐屯[주둔] 下[하]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示唆[시사]를 주리라고 믿는다. 結論的[결론적]으로 말하면 事大主義[사대주의]는 어떠한 時期[시기] 中[중] 어떠한 條件[조건] 下[하]에서든지 反民族的[반민족적] 主義[주의] 主張[주장]이다. 그것은 언제나 順調[순조]롭게 成長[성장]하는 自力[자력]의 生新[생신]한 革命的[혁명적] 인 要素[요소]를 抑壓[억압]하고 外力[외력]의 阿諛[아유]하여 이미 腐敗[부패]한 旣存[기존] 勢力[세력]을 不當[부당]하게 延長[연장]시키는 以外[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朝鮮史[조선사]의 發展[발전] 過程[과정]에서 그 沈滯性[침체성]을 찾는다면 實[실]로 이 傳統的[전통적]인 事大主義[사대주의]를 看過[간과]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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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大主義[사대주의]를 辯明[변명]하는 사람은 或[혹]은 朝鮮[조선]의 地理的[지리적] 環境[환경]을 말하리라. 또 或[혹]은 朝鮮[조선]이 强大國[강대국] 틈에 찌어 있는 弱小民族[약소민족]인 點[점]을 말하리라. 그러나 朝鮮[조선]만한 地域[지역]과 朝鮮[조선]만한 人口[인구]를 가지고 自主獨立[자주독립]만 한다면 決[결]코 弱小國[약소국]일 理[리]가 없으며 그 屈辱的[굴욕적]인 事大主義[사대주의]를 國家[국가]의 最高[최고] 方針[방침]으로 하는 奴隸根性[노예근성]을 徹底[철저]히 紛碎[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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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九四八[일구사팔]. 一一[일일]. 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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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天地[신천지]』 3권 10호, 서울신문사, 1948년 11·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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