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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일홍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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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승
1
백일홍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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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한 바람이 건건히 불어오는 첫가을이었습니다. 여러 날 두고 비가 조금씩 오던 날이 겹겹 이 싸였던 검은 구름까지 시원하게 벗겨지고 파란 하늘에 화려한 햇볕이 빤하게 빛나는 정신이 번쩍 나는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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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에 갇혀서 방 안에 꼭 들어앉아 골무를 만들고 있던 정희도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나서 뒤뜰로 나왔습니다.
 
4
저녁 해 비치는 뒤뜰에는 담 앞에 선 오동나무가 석양 해에 비춰 길게 그림자를 뻗치고 있고, 지난 봄에 정희가 손수 모종하여다가 심은 봉선화며 맨드라미들의 아름다운 화초들이 이파리를 나팔나팔하고 있어서 그 번쩍번쩍 윤 흐르는 이파리가 나부끼는 것이 마치 마음 고운 동무 정희를 웃고 손짓하며 반겨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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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중에도 가을이 된 까닭으로 벌써 다른 화초들은 늙어 시들었는데, 그중에 다만 하나 빛 여윈 분홍빛 백일홍 한 송이는 쓸쓸하고 근심스러운 얼굴이나마 아직 생기 있고 끈기 있는 얼굴로 반짝 피어서 정희를 보고 반기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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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는 이상하게도 그 백일홍에게 마음을 끌렸습니다. 그래서 그 백일홍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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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가운데 금빛같이 산호 모양으로 도톨도톨한 것은 꼭 혼인날 새아씨 쓰는 족두리 같네’하고 정희는 생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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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서리가 와서 다른 꽃은 하나도 안 남고 다 쓰러져도 저 백일홍만은 남아있겠지……. 저렇게 족두리를 쓰고 활옷을 입은 채로 신랑을 기다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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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는 그 영롱한 눈으로 백일홍을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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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는 못 참을 듯이 백일홍이 곱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가만히 고사리 같은 손을 들어 어루만져보았습니다. 백일홍의 꽃잎은 차면서도 더할 수 없이 부드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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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는 다시 사랑스런 마음에 고개를 숙여 따뜻한 입술을 꽃 위에 살그머니 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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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바람은 사르르 불어오고 날은 조용하였습니다. 어디서인지 기이한 향기가 가만히 모르는 사이에 날아왔습니다. 정희는 고요하고 아름답고 가지런한 마음으로 눈을 스르르 감았습니다. 정희는 멀고 또 먼 꿈의 나라로 마음이 펄펄펄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더니 어디선지 모르게 가느다란 애달픈 노래가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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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는 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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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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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옷 입고 연지 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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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두리 쓴 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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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는 백일홍
18
가여운 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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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 동안 초례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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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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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도 맑은 목소리로 부르는 이 노래가 끝이 나자 정희의 앞에는 언뜻 세상에도 드물게 예쁜 색시가 한 명 나타났습니다. 오색무늬를 놓은 비단활옷을 몸에 입고 토실토실한 고운 얼굴에는 새빨간 연지를 찍었으며,까만 물결치는 머리 위에는 산호 진주와 금은보석으로 장식을 한 족두리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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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는 화려한 그 색시에 정신이 황홀하여 한참 멍하니 앉았다가 겨우 입을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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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새아씨! 당신은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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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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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지금 착하고 고운 마음으로 어루만지고 입 맞춰주신 저 백일홍입니다. 나는 당신의 아름다운 마음을 고맙게 여겨 감사를 하러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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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옥을 부수는 소리같이 맑고 깨끗한 목소리로 말을 하면서 두 눈에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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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는 반갑고도 정다운 소리로 백일홍 색시의 두 손을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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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당신이 백일홍! 그리고 당신께서 지금 부르신 그 슬픈 노래는?”
 
29
하고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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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나의 가련하고 애처로운 신세랍니다. 아 나의 몸에는 당신네들이 알지 못하는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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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그는 쓸쓸한 얼굴을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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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당신이 아직 세상에 알리지 않은 그 신세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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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는 마음을 다해 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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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슬픈 이야기에요. 당신이 듣고 싶어 하시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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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 색시는 몸을 단정히 하고 나직한 소리로 슬픈 신세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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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이렇게 불쌍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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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랜 옛날이었습니다. 어느 해변가에 고요하고 깨끗한 시골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시골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착하고 근실한 사람들이라 바다 저편에서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에 그물과 낚싯대를 메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서는 저녁별이 석양 하늘에 반짝일 때 돌아와서 그날 하루 잡은 생선을 세고 즐겁게 평화롭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죄 없고 탈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매일 화려한 태양은 이 어촌을 평화롭게 비춰주며 바위를 치는 파도소리는 이 시골의 이름다움을 노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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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만 한 가지 이 시골에 걱정과 무서움이 있으니 이것은 다름아니라 이 바다 속에는 큰 짐승이 하나 있습니다. 그 짐승은 혹 전하는 말에 용이 되다가 못 된 것이라고도 하고 또는 악어의 왕이라고도 하는데,대가리가 셋 달리고 몸에는 검고 번쩍이는 큰 비늘이 덮혔으며 두 눈은 번개같이 번쩍이는 참말 무섭고 소름 끼치는 짐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골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그 동네 십칠팔 세 되는 처녀 한 명을 그 짐승에게 시집을 보내지 않으면 일 년 동안 고기 잡으러 나가는 배는 하나도 남지 않고 깨어져 부서지며, 그곳에 탔던 사람은 물속에 가라앉으며 그뿐 아니라 그 짐승이 물결을 몹시 쳐서 온 시골에 집이 헐리고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도록 다 죽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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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무서운 짐승으로 인해서 할 수 없이 일 년에 한 번씩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자기의 딸이나 만약 딸이 없으면 어디서 처녀를 사다가라도 그 짐승에게 시집을 보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집을 보내는 처녀는 해변가에 큰 장막을 치고 초례상을 해놓은 후 여러 사람이 울고 느끼는 동안에 어느덧 짐승의 꼬리가 나와서 처녀를 안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합니다. 그리고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지만 그 이튿날 아침에 무참하게도 처녀의 해골과 뼈가 바닷물에 떠오른다 합니다. 시골 사람들은 슬피 울면서 그 뼈를 골라서 장사 지내는 것이 으레 해마다 당하는 무섭고 기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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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였습니다. 이 시골 가장 마음 착하고 편안한 김 첨지의 집에 이 돌림차례가 돌아왔습니다. 김 첨지에게는 이 시골에서 제일 아름답고 똑똑한 딸이 하나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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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한번 돌아오는 이 무서운 일이 차례가 되었으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사랑하는 예쁜 딸을 무서운 짐승에게 시집을 보내어 죽게 하기도 차마 못할 노릇입니다. 원래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 몇 천량 돈을 내어 처녀를 사올 수도 없는 일입니다. 김 첨지 부부는 낮밤을 눈물과 근심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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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토실한 뺨에 까만 머리를 늘어뜨리고 밖에서 일하는 딸을 볼 때에 더욱 눈물과 한숨이 앞을 가릴 뿐이었습니다. 날은 점점 가까워오고 근심은 더욱 더욱 더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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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래 마음이 곱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한 처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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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울지 마세요. 제가 짐승에게 시집을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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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위로를 하고는 혼자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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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무서운 날은 돌아왔습니다. 해변가 바위 위에 초례상을 차려 놓고 회색빛 장막을 쳐놓았습니다. 시골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근심과 눈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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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예쁜 색시가 내일이면 몹쓸 짐승에게 죽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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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애처로운 한숨만 쉬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 무서운 짐승에게 감히 대적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쓸데없는 탄식만 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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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해가 동편에서 솟아오를 때 슬프게 울리는 북소리를 따라 김 첨지의 딸 처녀는 곱게 단장을 하고 활옷을 입고 족두리를 쓰고 울고 따라오는 부모에게 의지하여 초례상 앞에 나왔습니다. 시골 남녀노소들은 불쌍한 부모와 예쁜 처녀를 보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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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는 가만히 꿇어앉아 기도를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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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나님 ! 나를 구원해주실 수 없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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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는 고요히 흐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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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멀리서 신악소리가 들리면서 기이한 광채가 빛났습니다. 울고 숙였던 시골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바다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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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저편 동쪽에서 조그만 금빛 배 한 척이 살같이 달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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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것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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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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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리가 그들의 입에서 새어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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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금빛 배 속에는 신수 좋은 귀공자 무사 한 사람이 긴 칼을 짚고 이곳을 향하여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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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옷 입고 족두리 쓰고 짐승에게 안겨가기를 기다리던 불쌍한 처녀와 촌사람들은 일제히 그 이상한 배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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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배는 실같이 달려왔습니다. 신수 좋은 젊은 무사는 모든 사람의 반김을 받는 중에 배에서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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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기에 사람이 많이 모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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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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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들은 이 무서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말하고는 ‘여간 무서운 짐승이 아닙니다. 결코 경솔하게 싸우지 못할 짐승입니다’하면서 젊은 무사의 얼굴을 귀신같이 우러러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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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는 칼을 짚고 한참 묵묵히 무엇을 생각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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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 마시오. 초례상에 내가 대신 서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무서움과 근심을 영영 끊어드리겠습니다.”
 
66
말을 하고 처녀에게 공손히 인사한 후 초례상에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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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과 불쌍한 처녀는 이제 살게 되었다 하는 기쁨으로 용감한 무사의 이길 것을 빌면서 한편으로는 너무 젊고 너무 예쁜 저 공자의 몸이 위험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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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구에 날이 흐리며 물결이 몹시 치면서 짐승의 꼬리가 나타나서 서있는 무사를 처녀로만 알고 안고 들어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힘이 센 무사는 꼼짝 않고 섰습니다. 그러자 물속에서 무서운 짐승이 대가리 셋 달린 고개를 들더니 화가 난 눈을 번쩍이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맹렬한 소리를 지르며 입에는 연기 같은 푸른 독을 내뿜고 달려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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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시골 사람들은 무섭고 지긋지긋하여 얼굴을 가리고 서로서로 붙들고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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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연기 속에서 칼 소리와 짐승의 소리만 한참 들리더니 다시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바다 물속으로 무엇이 떨어지는 철벅 소리가 나고는 다시 고요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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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가 거친 후 시골 사람들은 무서움과 근심으로 그곳에 가보았습니다. 아 놀라운 일입니다. 젊은 무사의 칼에는 짐승의 목이 하나 꽂혔고 그 자리에 피가 먹물같이 흐르며 무사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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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사람들의 정성스런 간호를 받아 겨우 정신을 차린 무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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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여러분 염려 마시오. 그 몹쓸 짐승도 대가리가 하나 없어져서 이제는 아모 힘도 없고 여러분을 괴롭게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저 바다 속에서 적은 물고기나 잡아먹고 지낼 것입니다. 조금도 근심하지 마시고 평안히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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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기쁜 듯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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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은 행복과 기쁨을 참지 못하고 무사를 떠메고 칼에 짐승의 목을 꿰어 들고 무사의 만세를 부르며 즐겁게 뛰어 놀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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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소원대로 아름다운 처녀와 신수 좋은 무사는 해변가 초례상에서 혼인예식을 치르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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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근심되던 초례상은 이제 정말 행복한 초례상이 되었으며 아까까지 울던 모든 사람들은 이제 웃음과 기쁨으로 신랑 신부를 축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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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시 그들 아름다운 남녀에게는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 이름 모르는 무사는 어느 먼 나라 임금님의 맏아들인데 그 임금님께서 보내신 신하가 여기 온 것이었습니다. 신하는 초례상 앞에 임금님의 펀지를 가지고 와서 공손히 무사에게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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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무사는 임금님의 편지를 읽더니 얼굴이 점점 파래지면서 슬픈 소리로 처녀를 향하여 말했습니다.
 
80
“나는 이제 당신을 작별하고 저 마음 착한 시골 분틀을 작별하고 가야겠습니다. 나의 아버지 되시는 임금님이 당신과 나와 허락 없이 혼인하는 것을 아시고 대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가장 중요한 보배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세 가지 보배는 어느 때든지 우리들 세상에 착하고 아름다운 사림들을 위하여 쓸 것인데, 그 귀중한 세 가지 보배를 이제 고약한 마귀의 왕이 훔쳐갔다고 하니 만약 내가 이제부터 그 마왕을 잡고 그 세 가지 보배를 찾아오면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당신과 다시 혼인하게 될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세상에서 무서운 마왕에게 잡혀 죽을 것입니다.”
 
81
하고 왕자는 눈물을 지었습니다.
 
82
이 뜻밖의 말을 들은 촌사람들의 근심보다도 처녀의 근심과 섭섭함이 어떠하겠습니까?
 
83
처녀는 왕자의 무릎에 기대어서 흐느끼며 울었습니다. 왕자는 손으로 처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84
“염려 마시오. 아무리 무서운 마왕이라도 내가 반드시 잡은 후에 세 가지 보배를 찾아가지고 오겠습니다. 오늘부터 백일 동안만 기다리시오. 백일 안에 나는 기쁘게 돌아오지요”
 
85
그는 말을 마치고 일어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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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는 흐느끼는 소리로
 
87
“백일 동안 나는 족두리를 쓰고 활옷을 입고 연지 찍은 대로 이 초례상에서 기다리겠습니다.”
 
88
하고 맹세를 하였습니다.
 
89
왕자는 깃거운 소리로,
 
90
“반드시 그렇게 하여주시오. 내가 성공을 하고 돌아올 때에는 저 황금 배에다가 흰 기를 달고 올 것이오. 만약 내가 불행히 마왕에게 죽으면 내 신하들이 내 흘린 핏빛 같은 붉은 기를 달고 올 것입니다. 번쩍이는 저 황금 배에 흰 깃발 날리기만 기다리시오.”
 
91
말을 마치고 왕자는 배에 올랐습니다. 촌사람들의 슬픈 작별을 받으면서 처녀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면서 용감한 왕자 무사를 태운 황금 배는 살같이 동편으로 사라졌습니다.
 
92
꿈같이 만나 살같이 작별을 하게 된 처녀는 그날부터 수심과 적막한 마음으로 단장한 채로 초례상에 앉아 왕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93
촌민과 부모님의 위로하는 말도 듣기가 싫고 세 때의 음식도 제대로 먹지않고 다만 한없이 넓고 푸른 바다만 바라보면서 왕자의 무사히 돌아오기만 축수할 뿐이었습니다. 아침에 뜨는 해와 밤에 돋는 별과 바위에 나는 까마귀밖에는 보이지 않는 처량한 바다가 처녀의 다만 하나인 세상이었습니다.
 
94
처녀의 얼굴은 근심과 쓸쓸함으로 여위고 말라갔습니다. 편안히 집에 들어와서 쉬라고 하는 부모님의 말도 들은 척 만 척하고 한결같이 초례상에 앉아서 바다만 바라보며 눈물의 기도를 올릴 뿐이었습니다.
 
95
이와 같은 슬픈 날이 하루 가고 이틀 가고 어느덧 백일이 다 되었습니다. 야 오늘이 반가운 왕자가 성공하고 돌이올 날입니다.
 
96
아침 해가 동편에서 불끈 솟을 때 처녀의 수척하고 힘없는 눈은 졸리듯이 동편 바다만 바라보았습니다.
 
97
촌의 모든 사람들까지 새벽부터 해변가에 가득 모여 서서 왕자의 황금 배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98
해가 중천에 높이 떴을 때 동편 바다 저쪽에서 번쩍번쩍 하는 배가 나타났습니다.
 
99
‘아 왕자님의 배다! 금배다!’
 
100
하는 소리가 촌민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101
‘무슨 기를 달았나보자.’
 
102
하고 무서움과 근심으로 그 배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103
‘왕자님은 성공하고 오시겠지. 저 배에는 흰 기가 달렸겠지.’
 
104
하고 처녀는 떨리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생각하였습니다.
 
105
황금 배를 타고 신부를 맞으러 오는 왕자님은 과연 무서운 마왕을 잡고 세 가지 보물을 찾은 후 아버지 되시는 임금님의 허락을 받아가지고 흰 기를 달아놓고 오시는 길이었습니다.
 
106
‘어서 가자! 그래서 가엽게 기다리고 있을 신부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리자.’
 
107
하고 왕자님은 배를 재촉하고 있는데 문득 물속에서 백일 전 처녀를 위해서 모가지 하나를 베인 짐승이 나오면서 배 속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이 못된 짐승은 기운이 다 없어져서 전같이 무서운 짓은 하지 못하지마는 남은 힘을 다해서 왕자가 탄 황금 배 돛대를 부러뜨리려고 머리로 돛대를 쳤습니다. 그러나 마음 착한 왕자의 돛대가 못된 짐승으로 해서 부러질 리가 있습니까?
 
108
이것을 본 왕자는 찼던 칼을 빼서
 
109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겨 죽이지 않고 네 못된 힘만 없앴거늘 아직 마음을 고치지 않고 나를 해치려고 하니 너는 살려둘 수가 없다.”
 
110
고 소리를 치고 짐승의 허리를 칼로 베었습니다.
 
111
두 동강이 난 짐승의 머리가 펄펄 뛰다가 돛대 위에 가서 걸렸습니다. 철철 흐르는 짐승의 붉은 피는 배 안으로 하나 가득 차고 돛대 위에 달린 머리에서 흐르는 피는 그 밑에 달린 흰 기에 흘러서 그만 붉은 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112
왕자는 배 안에 피를 씻으라고 신하에게 분부를 하면서 어서 가서 처녀를 만나고 반가운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에 배 앞에 단 흰 기가 붉은 기가 된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113
이와 같은 풍파가 배 안에 있는 줄을 알지 못하고 촌민들과 처녀는 눈을 비벼가면서 배 앞에 단 기의 빛을 보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114
배가 점점 가까이 올 때에 돛대 위에서 날리는 기는 확실히 붉은 기였습니다.
 
115
‘아 붉은 기다! 왕자는 그만 마왕에게 잡혀 죽었구나.’
 
116
하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소리가 촌민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117
백일을 두고 밤낮으로 잠을 안 자고 음식을 안 먹고 왕자가 성공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처녀가 저 붉은 기를 보고 얼마나 기가 막히고 슬펐겠습니까
 
118
‘오 왕자님은…….’
 
119
하고 말을 못 마치고 그 자리에 처녀는 쓰러져 기절을 하였습니다.
 
120
아무것도 모르는 왕자님이 배에서 내려다보니 가엽고 애처롭게도 처녀는 활옷 입고 족두리 쓴 채로 초례상에서 죽었으니 왕자의 미어지는듯한 가슴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왕자는 흐느껴 울면서 처녀를 안고 장사지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용감한 왕자님은 촌민들의 만류함도 듣지 않고 다시 배에 올라 동편 바다를 향하여 사라졌습니다.
 
121
백일홍꽃 색시의 신세 이야기는 이렇게 슬프게 끝났습니다.
 
122
“그래 나는 그 처녀의 죽은 넋인데 꽃으로 되어서 지금도 활옷 입고 족두리 쓴 채로 백일 동안을 곱게 피어 있답니다.”
 
123
하고 정희에게 이야기를 그친 백일홍 색시는 눈물을 씻으면서 고개를 숙이더니 그냥 사라져버렸습니다.
 
124
정신을 번쩍 차린 정희는 석양의 붉은 해에 빗방울을 머금어 마치 눈물 흘리는 듯이 적막히 핀 백일홍을 애달프게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125
『무지개』
【원문】백일홍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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