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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헨그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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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8.
고한승
1
로-헨그린
 
 
2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사방으로 어두움의 정-막을 드리울 때에는 철창을 넘어 들어오는 강가의 바람까지 몸에 배어들도록 차가운 것이다. 철창 아래를 흘러가는 라인강은 검고 푸르게 빛나며 때로 바위에 부딪치는 흰 파도는 눈이 부시도록 광채난다. 맑은 물결 위에 늘어진 날개를 추키고 있는 갈매기 떼도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다만 어두컴컴한 철창 속에 홀로 갇혀 있는 박명미인 ‘에루사’의 외로운 그림자뿐이다. 에루사는 이 크레베 성 철창 속에서 굽이굽이 치는 라인강을 벗 삼아 도화량 옆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이같이 불쌍한 신세에 고생을 하고 있지만 원래에 에루사는 신분이 높은 뿌라반트 공작의 무남독녀 귀한 몸으로 금전옥루 높은 집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이 자라는 몸이었다. 더욱이 만인을 압도할 만한 천생려질은 아침저녁으로 거울을 대할 때마다 곱게 곱게 피어 향기로운 한 송이 장미꽃보다 아름다운 그 자태는 사람마다 부러워하지 않는 이 없었더니 세상은 무상한 것이라! 지금은 도리어 아름다운 얼굴이 원수가 되어 사랑하시던 부모를 여의고 그 눈물이 아직 마르기 전에 다시 이 몸이 애달픈 운명 아래 울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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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에루사의 아버님 뿌라반트 공작이 세상을 떠나는 임종의 베개머리에 신하 중에 제일 유력한 텔람드에 푸리드릿희란 사람을 불러놓고 사랑하는 외딸 에루사의 뒷길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그 분묘의 흙도 마르기 전에 강욕무도한 역신 텔람트는 주군의 부탁을 저버리고 아름다운 에루사를 아내로 삼고자 하였다.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다시는 이 세상에 자유를 주지 않으리라 하여 가련한 군주의 외딸 에루사를 드디어 이 크레베 성 속에다가 깊이깊이 가두어둔 것이었다. 에루사는 이 몸이 아버지와 같이 죽지 못한 것을 원통해하며 천생의 여질로 못된 신하의 마음을 끌은 내화용윌태를 저주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한들 아무리 저주한들 벌써 때는 늦었으니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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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에루사의 신세에 동정하여 때에 독일 황제 하인릿희 일세 폐하께 상소한 사람이 있었다. 황제는 그 말씀을 들으시고 누구든지 에루사를 위하여 텔람트와 결투를 하여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라는 측령을 내리었다. 그러나 거인이요 더구나 무예절승(武藝絶勝)한 텔람트와 감히 싸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줄 알고 있는 저- 무도한 텔람트는 그 황제의 측령이 더욱 조화라고 널리 세상에 광고하여 싸움할 남자를 작정하고 누구든지 그날까지 나와 승부를 결단하자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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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부터 마음을 졸이는 시간은 자꾸자꾸 쓸데없이 지나갈 뿐이다. 누구나 한 사람 에루사를 위하여 싸우겠다고 나서는 무사는 없었고 벌써 싸움을 작정한 날짜는 하룻밤을 격하게 되었다. 오늘 밤만 새고 내일까지 아무 변동 없이 지나가면 불쌍하게 이 몸은 무도한 역신의 아내가 되고 말 것이다. 이 생각을 하니 에루사의 별 같은 눈에서는 다시 새눈물이 샘솟듯하였다. 에루사는 타는 듯한 졸이는 가슴을 부여 뜯으니 그 자리에 쓰러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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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박행한 운명에서 나를 구원하여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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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성모에게 기도를 올렸다. 다시 기운 없이 일어서서 가슴을 깨져라 하고 두 손에 걸었던 진주 술로 가슴을 때렸다. 진주 술에 달린 조그만 은방울이 딸랑딸랑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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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방울이야말로 이상한 마력을 가진 방울 임자가 비상한 곤란을 당할 때에만 울리는 기이한 방울이었다. 처음 울릴 때는 선녀가 속삭대는 것같이 조그만 소리가 나지마는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갈수록 소리는 점점 크게 퍼져서 나중에는 파도소리와 벼락 치는 소리에 비하리만큼 크게 울리는 것이었다. 에루사가 지금 아무 생각 없이 고통에 못 이겨 흔드는 이 은방울 소리는 과연 소녀의 슬픔과 서로 공명하여 몇백 리 산과 강을 넘어 그 소리를 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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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의 도움은 이르렀다. 방울소리는 멀리 멀리 울려가서 성배(聖盃)를 지키는 ‘빨시바!’의 귀에까지 갔다(성배에 대한 전설은 따로 있으나 여기는 약함-옮긴이의 말). 딸랑딸랑 울리는 방울은 지금 숭배의 앞에 구원을 청하는 소리가 된 것이다 이때 여러 무사들은 서로 얼굴을 돌아보며 무슨 일인 줄 모르고 있을 때에 공중에서 소리가 있어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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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시바! 너의 아들 로- 헨그린을 보내어서 뿌라반트의 에루사를 구원하여라. 그리고 이름은 가르쳐주지 말고 로헨그린으로 하여금 에루사의 남편이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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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명령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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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무사들은 이것은 과연 높은 성배의 명령임을 깨닫고 젊은 무사 ‘로-헨그린’은 즉시 존귀한 명을 다-하려고 떠났다. 얼마 만에 라인강까지 왔을 때에 고요히 흐르는 물 위에 기이한 흰 새가 끌고 있는 배가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저- 백조선은 로헨그린을 얼른 태워가지고 즐거운 음악 소리를 내면서 라인강을 살같이 저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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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편 불쌍한 에루사는 벌써 기다리는 하룻밤도 어느덧 새서 별그림자도 차차 사라지고 동쪽 하늘이 시뻘겋게 되었을 때이다. 싸움할 기일이 지금 바야흐로 밝으려 하는구나! 나를 위하여 싸워주는 용사 하나도 없으니 오늘 하루만 지내면 아무리 싫다 할지라도 저 포악무도한 텔람트와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룻밤을 울고 샌 에루사의 눈에는 벌써 눈물조차 진한 모양이다. 그는 근심스러운 눈을 들어서 아침의 상쾌한 경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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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다! 어디서인지 일찍이 듣지 못하던 풍악 소리가 나며 라인의 비단같은 물결 위로 백조가 끄는 배가 한 척 살같이 달려온다. 배 가운데는 평생 처음 보는 신수 좋은 젊은 무사가 잠깐 졸고 있었다. 에루사는 “아!” 소리를 치며 창 앞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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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고 있는 무사가 그대를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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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일찍이 에루사를 위하여 어떤 늙은 여승이 점쳐준 말이 있었다. 에루사의 부드러운 가슴속에는 새로운 희망과 광명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기쁨의 파도는 너울너울 염통 속에서 춤추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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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구에 배는 머물렀다. 신수 좋은 젊은 무시는 터벅터벅 철창 아래까지 와서 공손히 인시를 한 후 예쁜 에루사를 위하여 싸우는 전사가 되겠다고 하였다. 그때에 마침 저쪽으로부터 텔람트의 싸움을 청하는 최후의 나팔소리가 울려왔다. 로-헨그린은 이제는 주저할 것 없이 싸움터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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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아름다운 소녀를 이제는 내 손에 넣을 수가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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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마음 깊이 행복한 꿈에 취하고 있는 텔람트는 뜻밖에 방해자가 나타난 것을 보고 잠깐 불쾌히 알았으나,그러나 보니 로-헨그린은 미목 청아한 어린 무사라 이길 것은 정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속히 승부를 결단하려는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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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만한 이 승부가 있다는 말을 들은 크레- 베의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싸움터로 몰려왔다. 그들은 누구나 박명미인 에루사에게 만공의 동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 한결같이 텔람트의 지기를 속으로 가만히 기도를 하였으나 후환이 두려워 입 밖에 내지는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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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싸움은 시작되었다. 홍안 미소년 로-헨그린은 늠름한 기상,광채 나는 두 눈,범치 못할 위엄을 갖추고 있는 무사였다. 그러나 몸이 크고 기운이 센 텔람트에 비교하여 그는 확실히 약한 몸의 소유자다. 구경하는 여러 백성들은 손에 땀을 짜내면서 젊은 무사의 승리를 마음을 다하여 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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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나고 번갯불같이 번쩍이는 두 사람의 장금은 쟁연한 소리를 내고 부딪쳤다. 용과 범이 얼크러져 싸우는 일상일하 잠시는 승부의 판결조차 알 수 없었으나 아! 하늘은 포악무도한 역신 텔람트를 도우실 리가있으랴. 로-헨그린의 힘을 다하여 내리치는 칼 아래 텔람트의 거인은 모래 위에 홍조를 뿌리고 쓰러지고 말았다. 우레같이 일어나는 만인의 박수성,미쳐 날뛰는 만인의 환호성! 실로 발을 구르고 팔을 벌려 춤추고 뛰놀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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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거두고 로- 헨그린은 고요히 에루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에루사는 뛰는 가슴을 진정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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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혜는 일평생 잊지 못합니다. 내 몸으로 능히 할 수 있는 무엇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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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치지 못하는 에루사의 벌 같은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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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헨그린의 소원은 에루사와의 결혼이었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약속할 것은 에루사가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동안만 부부가 되리라. 만약 에루사가 로- 헨그린의 이름을 묻는 날에는 부부의 약속은 사라지고 영원히 영원히 슬픈 이별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사는 두세 번 이 말을 거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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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숭엄과 감사로 가슴이 가득 찬 에루사에게는 이만한 조건쯤이야 못 들을 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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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당신의 이름은 일평생 묻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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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깊이깊이 맹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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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구에 성대한 결혼식은 거행되었다. 용사와 가인은 가장 행복한 세월을 서로 보내는 동안에 두 사람의 사이에는 옥 같은 아들을 셋이나 낳았다. 무엇 한 가지 부족함이 없이 만인을 압도할 만한 행복도 오래 있으면 별로 신기하게 생각되지 않는 것은 세상 인심의 상례다. 더할 수 없는 행복의 소유자라고 사람 사람이 우러러보는 에루사의 몸에도 사람이 알지 못하는 가슴깊이 근심이 있었다. 그는 비할 데 없는 남편 로- 헨그린의 사랑을 저버리고 다만 이름도 모르고 신분도 모르는 사람과 일생을 같이하는 슬픔만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31
더욱이 사랑하는 아들 셋이 이후에 아버지의 성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불쌍한 신세가 될 것을 생각함에 아 비천한 자식도 그 아버지의 성명을 알거든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에게까지 이름을 숨길 것이 무엇이냐? 에루사는 이때부터 천고의 은인이요, 애정 깊은 남편을 의심하고 근심 하게 된 것이었다.
 
32
의심은 의심을 낳고 근심은 근심을 더하게 하여 하루날 에루사는 전날 깊이깊이 약속한 것을 잊어버리고 로-헨그린에 대하여 그 이름을 말하기를 청하였다.
 
33
“가련한 아들 셋을 위하여 제-발 성명을 대어주십시오.”
 
34
에루사는 울면서 청한 것이었다.
 
35
이 말은 들은 로-헨그린의 얼굴은 홀연히 변하였다. 그는 에루사의 얼굴을 원망스럽게 들여다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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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에루사여! 어찌하여 그 말을 나에게 하였소? 결혼하던 그전에 그같이 길이길이 맹세한 그 말을 어찌하여 입 밖에 내었소. 나는 벌써 당신과 같이 살 수가 없소. 사랑하고 사랑하던 당신과도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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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치고 벽에 걸린 피리를 꺼내어 높이 불기 시작하였다.
 
38
이것을 깨달은 에루사는 어리석은 자기 마음의 잘못을 후회하고 마음을 다-하여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였다. 그러나 이미 한번 입 밖에 나온 말은 몇천 줄의 눈물을 뿌릴지라도 결코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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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탄과 후회를 걷잡지 못하는 에루사의 귀에 문득! 귀에 익은 음악소리가 들렸다. 몇 해의 옛날 기쁘고 기쁜 은인 로-헨그린을 태워가지고 오던 백조선(白鳥船)이 고요한 라인강 위로 흐르는 듯이 가까이 오는 음악 소리인 것을 깨달은 에루사의 슬픔이 얼마나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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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헨그린은 고요히 입을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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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시오. 나는 성배를 지키는 무사 빨시빨의 아들 로- 헨그린이오. 나는 가오. 아무쪼록 저 아이들을 잘 기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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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감추었던 이름을 말하고 사랑하는 처자와 부리는 하인까지 따뜻한 작별의 인사를 마치고 백조선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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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유량하고도 창자를 끊는 듯한 신악소리를 쫓아 백조선은 살같이 라인 강을 저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무사를 태워가지고 갔다 사랑하는 남편을 이별한 에루사는 그치지 못하는 슬픔에 부대끼어서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난 후 과연 천국에서나 주소로 못 잊던 로- 헨그린을 만나보았는지 그것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끼치고 간 세 이들은 다- 훌륭한 무사가 되어 그의 가문을 날로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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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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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제3권 제8호, 1925. 8.
【원문】로-헨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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